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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국에 살 때에 부산 금정산을 많이 올라갔습니다. 금정산은 802m 정도 됩니다. 그 산은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최고 정상 고담봉에 가면 바위가 아주 이상하게 생겼습니다. 자세히 보면 마치 용이 앉아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신령하다고 생각하고서 기도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거기서 기도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누구에게 기도하느냐고 물으니 산신 할매와 금정산 할배한테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떨어진 텐트에서 기도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마치 우리가 방언 기도하는 것처럼 들려왔습니다. 제가 만난 사람이 설명하기를 기도하는 사람은 신내림을 받았는데, 좀 더 높은 차원의 신내림을 받아서 점쟁이가 되기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몇 달 후에 대구 팔공산 갓바위에 갔습니다. 갓바위는 갓을 쓴 부처가 있어 갓바위입니다. 여기가 영험하다 하여 불공드리러 오는 사람이 줄을 지었습니다. 그 곳에서 금정산에서 만났던 그 도인을 또 만났습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안고 기도하는데 어두움의 세력에 사로잡혀서 산신 할매에게, 할배에게 또 돌아가신 조상에게 자신의 영달과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기도합니까? 하나님에게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우리가 기도하고,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에게 기도할 때에 어떻게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복을 받았는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누구신지를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신약성경 학자로서 유명한 요아킴 에레미아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학자가 많은 유대 문헌을 검토해 보고 결론 짓기를 예수님 당시까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은 예수님 외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기도 시간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매달린 사람도 없었고 또 예수님처럼 제자들을 보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신 분도 없었다고 그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성경을 보아도 그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를 하셨는데, 오직 한 군데에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고통과 고독 가운데 빠졌을 때에 기도하셨을 때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때에는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대신에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무겁고 무서운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절대 고독과 절대 고통 속에서 진노의 잔을 마시는 순간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시던 때를 제외하고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앞에 통곡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때를 보십시오.
“아바 아버지여”
땀방울이 피처럼 뚝뚝 떨어지듯이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이처럼 다정하게 부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유대교의 습관에 젖어 있던 제자들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 죄를 가만히 두시지 아니하시는 징계하시는 분, 항상 노여워하시고 근엄하신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감히 찬송하고 예배 드림은 굉장한 두려움과 공포였습니다.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부를 때에 ‘아바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아바’는 아람어로 ‘아빠’입니다. ‘아바 아버지’라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습니까?
마치 아버지가 회사 일을 마치고 집으로 퇴근하여 현관문을 열면 우리 자녀들이 ‘아빠’ 하면서 달려오면서 품에 안깁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하루의 피곤도 잊고서 아이를 품에 안고서 연신 아이 얼굴에 뽀뽀를 퍼부면서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 주시는 아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가 하면 아무도 없는 집에서 외로움과 무서움에 떨던 아이에게 기둥과 같이 집안의 어른이요, 문제 해결자이신 능력 많으신 아버지 품으로 달려들면서 안전과 편안을 느끼는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밀러’하는 학자는 주기도문 초두에 나오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문구는 [기도의 황금문]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다가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 황금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 앞에 친근히 나아가 그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주저 없이 미주알고주알 자기의 이야기를 내려놓을 수 있는 능력이 많으신 아버지인 것입니다.
탤런트 최불암씨가 요즘 스크린에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고 몸이 아픈지, 유일하게 나오던 [한국인의 밥상]에서도 안 나옵니다.
그가 출연했던 [전원일기]라는 오래 기간 동안 방영된 농촌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인데, 국민 드라마로 인기를 누렸습니다. 저도 10대 20대 시기에 참으로 열심히 보았습니다. 최불암씨는 아버지, 동네 회장님으로 나옵니다.
저는 그 드라마에서 과묵한 연기를 보였던 최불암을 보면서 제가 태어난지 8개월만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울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 시절에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아버지, 아버지’하면서 애타게 불렀습니다.
그 시절, 저에게는 아버지가 그리웠습니다.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기도하며 예배하는 교회에 빨려 들어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주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게만 해당되는 권리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제자들에게 알리도록 했습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요 20:17)
예수님께서 아버지라고 부르시던 그 하나님이 이제는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셨다는 것을 주님께서 선언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가르쳐 주는 성경말씀이 두 곳이 더 있습니다.
로마서 8장과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도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 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4-15)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여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해주시고,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에게 “당신이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아버지라고 불러보라”고 해보십시오. 절대로 그렇게 기도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입을 열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안에 성령이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보고서 상놈이라고 욕을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집안에 최고 어른이신 할아버지가 하나님을 두고서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는데, 그 아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촌수로 따지면 하나님을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그 손자도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니,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예수님 믿는 가정은 촌수도 모르고, 아래 위도 모르는 상놈 중에 최상놈이라고 욕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아무리 연세가 많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 아이가 됩니다. 인품이 있든 없든, 점잖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모두 하나님 앞에 ‘아바 아버지여’라고 부르며 달려나가는 어린 아이가 됩니다.
어떤 왕이 신하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가 더 슬폈습니까? 자식이 죽었을 때가 더 슬폈습니까?”
왕의 질문에 인생을 많이 산 지혜로운 노 재상은 말했습니다.
“이뢰옵기는 황송하오나 어느쪽이 더 슬펐는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왕께서 신더러 어느 쪽이 더 슬폈느냐고 차이를 물으신다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눈물로 인해 안개 속에 가끔 뽀얗게 남산 끝머리가 보일락 말락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죽을 때는 아무것도 안보였습니다.”
이 말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늙은 신하는 자식이 죽었을 때의 슬픔이 더 찐하게 다가왔음을 표현하였답니다.
여러분! 누가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주었겠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온세상의 아버지의 마음을 다 합해도 우리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그 마음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외워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어떻게 사랑했다고요 “이처럼 사랑하사”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의 아들이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슬피 탄식하는 자기 아들을 외면하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사 이처럼 사랑하사 십자가상에서 아들을 죽게 내어 주셨습니다. 그것을 지켜 보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십자가는 그래서 무서운 공의의 현장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시는 그 공의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는 그 사랑의 현장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의 조화가 이루지는 곳이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흔히 사랑이 많은 사람은 공의롭지 못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공의가 희생되어야 사랑이 설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참 공의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법대로 질서대로 매사에 빈틈이 없습니다. 다 좋은데 그 사람에게 사랑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이 두사이의 딜레마에 빠져서 혼란이 올 때가 있습니다.
가령, 두 사람이 다투어서 저에게 와서 말합니다. 서로에게 문제가 다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시시비비를 가려서 ‘옳다, 그르다’ 두부 자르듯이 말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입 끝까지 말이 나올라고 해도 혹 상처를 입고 떠나갈까 봐 ‘그래요’라고 하면서 싸메어줄 때가 많습니다. 사랑과 공의를 말하기란 인간인 우리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은 공의를 내세우면 사랑이 없고, 사랑을 내세우면 공의가 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 공의와 사랑을 가장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내 죄를 위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믿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지옥에서 천국입니다.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은 는 내 모든 죄값을 치루어 주셨습니다. 구속의 사랑을 흘러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십자가는 유태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우리의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기까지 사랑하신 아버지가 들으십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에 십자가의 공의와 사랑과 지혜와 능력으로 우리에게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은 친밀한 단수로 말하지 않고 복수인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것을 가르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인간의 이기적인, 독선적인 모습을 경계하고 있음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은 나만의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인종과 종파와 교회를 넘어 포용하고 초월합니다. 믿는 모든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나만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모두의 하나님 아버지가 되십니다.
교우 여러분, 지금 내가 소화하지 못하는 아무개 집사, 아무개 성도의 하나님이 되심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미워하고 내가 열 받고 있는 그 분을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데 왜 내가 미워해도 되는 겁니까?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신묘막측하게 지은 자를 왜 열나게 합니까? 무슨 배짱입니까?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 자신’를 죽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내 주장과 내 생각이 올바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 우리에게 맞추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주장과 생각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용납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를 죽일 때에 ‘우리’가 살아납니다.
죤 웨슬레와 휫필드는 영국교회의 부흥운동과 성결운동에 서로 협력하여 불을 댕겼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에서 제명을 당했습니다. 두 사람은 생명의 동지로 교회의 부흥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하나님의 예정부분에서 서로 의견을 달리했습니다.
웨슬리는 “누구든지 믿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것을 강조했습니다. 휫필드는 “하나님이 예정한 자는 반드시 믿게 된다”는 예정론을 믿었습니다. 그러니 서로 강조점이 달리하니 마치 원수처럼 격렬한 논쟁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휫필드를 추종하는 어느 여신도가 와서 휫필드에게 말했습니다.
“웨슬리같은사람은천국에서안보이겠지요”
그러자 휫 필드가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웨슬리는 천국가면 안보일 것입니다”
그러자 여신도는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휫필드목사가 말합니다.
“웨슬리는예수님곁에너무가까이있어서그광채에가려서잘안보이고우리는간신히구원을받아서저문끝에있기때문에웨슬리를천국에게못보게될것입니다”
이 얼마나 서로 존경하고 있습니까? 서로 의견을 달리해도 서로를 인정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 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김동휘의 하나님, 권사님의 하나님, 집사님의 하나님, 교우들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십자가 그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우리 다같이 주기도문을 한번 외워보십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른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찬송
아버지여 나의 마음을 424, 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