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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 서야
마9:18~26
주님은 친히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담당하심으로 우리를 속량하시고, 그 사랑을 확증하심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또한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려면 십자가에 죽는 삶, 곧 그 사랑을 삶 가운데 가치 삼고 좇아 행하는 몸부림의 삶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지 아니한 부활의 영광은 그 어디에도 없으며, 있을 수도 없습니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좇아, 몸으로써 행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신앙의 결과로 나타날 그날의 영광에 대한 소망이며, 우리 신앙의 목적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
여러분~
마태는 오늘 예수님의 기적의 절정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극복하시는 주님의 능력입니다.
(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말씀 하실 때) 한 직원이 와서 절하고 가로되 내 딸이 방장(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하니”했습니다.
그 때, 지체가 높은 유대인의 고급 관리 한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와 말씀 드린 내용입니다.
여기 “한 관리”란 “통치자, 지배자”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막5:22, 눅8:41에 자세히 기록하는데, 그 사람은 회당장 중의 한 사람인 야이로였습니다.
여러분~
회당장이 누구입니까? 유대인 중에서도 특별히 뽑힌 사람입니다. 회당의 실무를 맡은 책임자요, 종교지도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대부분은 자기들의 종교를 무시하고 혼란스럽게 한다는 이유로, 거의 모두가 주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 앞에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못 하는 그런 관계의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당시 주님과 바리새인, 회당장과의 불편한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의 회당장인 야이로 라는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고, 자기의 어린 딸이 죽어 감을 살려 달라고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이 딸에 대해서는 눅 8:42에서는 기록하기를 열두 살 먹은 외동딸로 기록합니다. /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 감이러라”
지금 이 딸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긴박하고 애끓는 순간인 것입니다. 이대로 죽는다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순간인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나 죽음 앞에서 자유한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그 죽음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인 것이 인생입니다. 그 어떤 지식도, 건강도, 그 많은 돈도, 높은 권세나 명예도, 지위도 권력도 이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회당장인 야이로 또한, 그 동안 외딸을 위하여 세상의 찾아 갈 곳은 다 찾아가 보았을 것이며, 쓸 약은 무엇이든지 다 써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길이 없습니다. 그 사랑스러운 외딸이 속절없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절망의 순간인 것입니다.
지금 깔딱 깔딱 숨이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18)에서 보았듯이, 지금 주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토론을 하고 계신 그 가운데 한 관리가 끼어들어 무릎을 꿇고 절하며, 지금 죽어가고 있는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지금 자기 집으로 가시자고 애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이보다 더 애절하고 긴박하고 기가 막힐 때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죽어가는 자식을 바라보면서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황이야 말로 피를 말리고 절망 적인, 살릴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인생의 한계인 것입니다. 까불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믿을 것, 의지할 것, 자랑할 것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들이 우리의 생명을 대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내 생명, 내 행복, 내세를 보장할 것처럼 살아갑니다. 이는 어리석음입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우리 주님의 반응을 보십시요!
(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상황에 대해 이러저러한 말씀을 하시지 아니하시고 그대로 일어나 따라가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 나올 때에 무엇을 알아서 나옵니까? 또 무엇을 알려고 나옵니까?
거저 주님의 은혜를 바라고 나 같은 죄인을 구속하신 그 은혜를 사모함으로 나아오는 것 아닙니까?
겉으로는 차마 드러내지 아니하고, 점잖게 넥타이 매고 차려입고 나오지만 각자가 야이로와 같은 처지와 애절한 심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엄청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 사정이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 주님은 모두 영접하여 주신다는 사실입니다./할렐루야!
주님은 절박한 심정으로 회당장의 체면도 버리고, 주님과의 비판 적 관계의 불편함도 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믿고 찾아와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이 사람을 받아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가진 무엇, 지위, 명성, 권력이나 권세, 돈의 많고 적음 등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십니다. 우리가 창기이든지 세리이든지, 강도이든지 도적이든지 외모를 보심이 아니라, 그 중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 동기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회당장 야이로가 주님 앞에 나아올 때, 주님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나아 온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자기 딸에 대한 동기로 나아 온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하는 순간, 그 마음속에 회개의 영이 부어진 것입니다.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주님 저는 나를 받아 주소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나는 실패한 사람입니다.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하는 회개의 마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고백을 보십시요!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엄청난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은 그의 과거를 책망하시거나, 왜 왔느냐고 묻지도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고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받아 주셨습니다.
이분이 우리가 지금 만나는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
전적 나를 비우고 내려놓고 죽는 삶, 이 고백과 행함의 믿음을 통해 순간마다 주님을 만나는 사람이 우리 모두이기를 축복합니다.
이 믿음, 이 간절한 고백을 보시고 아신 주님은 곧 따라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만남이요, 응답인 것입니다.
주님의 응답은 이처럼 간절한 고백이 행함의 삶으로 나타날 때, 즉각 우리 가운데 만남의 응답, 해결의 응답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할렐루야 ^^
그런데 여러분~
이 긴박하고 답답한, 단 일초가 시급한 이 상황 가운데 주님이 회당장을 따라 가시는 도중에 생각지 못 한 사건이 하나 더 일어납니다. 이번에는 한 여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20~21)/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막5:25~26에 더 자세히 기록하는데/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했습니다.
이 여자는 12년 동안 여기저기 찾아다니지 않은 의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진 재산도 다 허비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낫기는커녕 효험도 없고 더 악화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혈루증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하혈을 하는 병으로, 당시 문둥병처럼 저주받은 불결한 병으로 여겨지던 병입니다. (레15:25~27)
이 여자는 불결한 여자로서 하나님 앞에 제사도, 사람들과의 교제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만지는 것마다 다 불결하고 부정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고 사람에게 버림받은, 철저히 외롭고 배척 받는 저주의 병을 가진 여자인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괴롭고 저주스러운 삶이었겠습니까? 그 얼마나 이 병에서 놓임을 받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여자가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시는 주님의 뒤로, 사람들 틈으로 몰래 숨어 들어와 그 겉옷자락을 만진 것입니다.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얼마나 초조하고 떨렸겠습니까?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얼마나 외치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마태처럼 주님을 감히 따를 수 없는 사람이라고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는 여자입니다. 아무에게도 자신을 노출할 수 없는 여자입니다. 그래서 오직 병을 고치려는 애절함으로 주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자락이라도 잡으면 나으리라는 믿음으로 그렇게 용기를 낸 것입니다.
(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했습니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저는 문둥병자처럼 당당히 나서서 외칠 수도 없는 여자입니다. 내 병을 고쳐주세요. 도둑처럼 주님의 뒤로 몰래 들어가 겉 옷이라도 만지면 나을 것 같아 이러하오니 제발 저를 고쳐주세요, 이런 심정이었습니다.
주님은 그의 중심을 아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믿음이 이것입니다. 간절함, 절박함의 믿음으로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즉 그 요구를 좇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신앙연조를 보시지 않습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그 직분을 보시지 않습니다. 모태신앙, 몇 대째 믿는지 그것을 보시지 않습니다. 세상적 학위, 지위, 명예, 돈의 많고 적음, 그것 묻지 않으십니다.
금식을 얼마나 했으며 새벽기도를 얼마를 했고 철야를 얼마를 했는지 그 스펙을 요구하시지도 않으십니다.
방언을 말하는지, 예언을 말하는지 그것 보시지도 않으십니다.
간절함으로, 오직 그의 요구 적 삶을 몸부림침으로 좇아가는지를 보십니다. 그것이 복음, 곧 십자가 보혈의 본질이요, 우리 신앙과 믿음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이 삶으로 그날에 그 앞에 서기 때문입니다./할렐루야!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해도 열두 해 앓던 혈루증이 나을 것이라는 순수함과 절박함, 그런 진실한 믿음이 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보시는 것입니다.
결과가 무엇입니까?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막, 눅 복음에서는 기록하기를, 길을 가시던 주님이 자기 몸에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시고 사람들에게 “누가 나를 만졌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만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마 사람들이 많음으로 스쳤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때, 이 여자가 두렵고 떨림으로 주 앞에 나아와 “주여 내가 만졌나이다” 고백합니다.
그런데 부정한 그 여자를 책망하시지 아니하시고, 그 믿음을 아신 고로 주님은 “딸아 안심하라” 하시고 구원, 곧 병고침을 선언합니다.
뜻하지 않은 일로 주님이 지금 긴박한 상황의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걸음에 지체가 생겼습니다. 야이로의 마음이 얼마나 초조하고 답답했을까요?
그런데 야이로가 주님을 재촉한 말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우리의 시간표가 아니라, 주님의 시간표대로 운행됩니다. 이것을 알고 믿음의 인내로서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가서 본즉 아이가 죽어 가고 있습니다!
유대의 전통에 따르면 사람이 죽었을 때, 세 가지 의식을 행하는데 슬픔을 표시하기 위하여 옷을 찢고, 대신 울어 줄 사람을 돈으로 사서 통곡을 하며, 마지막으로 피리를 불며 슬퍼했습니다. 그러므로
(23)/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를 보시고” 하심을 보면 이미 그 아이는 죽어가는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24)/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했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육신적 죽음을 죽음으로 보시지 않는 것입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는 죽음이 없습니다. 주님 자신이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요14:1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하시고
요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는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 했습니다.
그 능력으로 주님은 죽은 나사로와 야이로의 딸 아이를 살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하고 잔다 하시는 주님을 비웃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기만의 종교라고 욕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불신앙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소녀를 살리셨습니다. 그럼에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독하게도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내 생각, 논리, 세상 가치와 맞지 아니하고, 눈에 보이지 아니하면 믿으려고 하지 않는 불신앙으로 꽉 차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다 비워야 합니다. 다 죽여야 합니다.
세상과 사람들의 편견을 뛰어 넘는 주님의 생명의 능력을 우리는 지금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25)/ “무릴ㄹ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 지라”했습니다.
이에 대해 막, 눅 복음에서는 비웃는 저 무리들을 다 내어보내신 후에, 주님은 소녀의 손을 붙잡고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하시니 일어나 걸었다고 기록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언젠가 육신적 죽음의 때를 맞게 됩니다. 그러나 이처럼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우리는 그 때에 이처럼 부활하게 됩니다.. 할렐루야 ^^
이것을 주님은 오늘 상징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했습니다.
죄를 위하여 이제는 다시 제사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속죄하심의 은혜로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의 죄를 주께서 다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히10:4~18/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 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그 뜻을 좇아 살아감으로 구원을 이루게 하셨느니라) ~~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죄 때문에)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를 믿는 주의 신부요 천국상속을 약속받은 자로서 그 요구 적 삶을 붙좇아야 합니다.
이유는, 믿지 않는 것이 죄이기 때문이요,
믿음이란 사단의 종이 아닌 새 사람으로서, 그의 종노릇 하는 자가 아니요,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요구 적 삶인 십자가의 도를 가치 삼고 좇음으로서 그의 영광을 목적 삼고 도모하는 하나님사랑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도를 버리면 헛수고요, 죄인 연고로 그날에 그 부활의 영광, 그 영광 보좌 앞에 서지 못 하는 것입니다.
이 삶으로서 그날에 의인과 악인, 양과 염소를 나누심의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마25:31~46)
또한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 곧 성도들의 능력은 곧, 십자가의 도를 좇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고전1:18)
이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의 요구요, 방향이요, 목적입니다. 믿음의 인내로써 몸부림침으로 그 뜻을 좇아 달려가야 하는 당위성인 것입니다. /아멘^^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살전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그 하나님을 만났으면 전해야 합니다.
(26)/ “그 소문이 온 땅에 퍼지더라” 했습니다.
우리 또한 십자가의 도를 좇는 하나님사랑의 삶을 행함으로 세상의 저들로 그 주님을 만나게 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올해 30명 구원 목표를 위해 전도 폭발훈련에 최선을 다하시고,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게 주신 것으로 나누고 섬기며, 돌아보는 사랑함의 행함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넘쳐나길 축원합니다.
죽음을 정복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 뿐입니다. 그분을 믿음으로써 우리 또한 부활의 자리에 나아가게 됨을 믿으시고, 그 전제조건인 하나님사랑의 삶인 그 도를 좇는 삶에 몸부림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리하면 죽어도 다시 삽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이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천국과 금생의 약속입니다.
육신의 죽음은 천국영생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땅의 삶은, 그 천국 문을 여는 열쇠로서의 쌓아가는 삶이요, 그날을 준비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