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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능력과새계명
요한일서 2:7-8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사도 요한은 “나의 자녀들아”라고 부르며 화목제물 되신 그리스도와 부활 승천하셔서 우리의 영원한 보혜사 되신 우리 주님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나누는 말씀에 대해서는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며 가르칩니다. 즉, 사도 요한은 주의 자녀들을 너무나 사랑함으로 반드시 알려주고 싶은 진리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내에서만 찾아보아도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표현을 6번 사용하면서 독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며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전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1-22).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그리고 우리의 본문에서도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하며 대단히 중요한 내용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요일 2:7-8).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사도 요한은 참 신자와 관련해서 진리와 계명에 대해 말했습니다. 진리에 속하여 계명을 지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선언하며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여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제 참 신자와 관련해서 사랑을 말합니다. 사실, 사랑은 기독교의 표지요, 그리스도인의 표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간의 사랑은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자녀임을 온 세상에 증거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서 우리 주 예수께서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줄 아는 것입니다.
또한 신자 자신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할 때 자신이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사실 나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이란, 예수께서 그들을 사랑하사 생명까지 바치신 주의 사랑의 대상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그들을 사랑할 때 그것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우리 자신도 정말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한편, 사도 요한이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하며 말한 7-8절의 교훈에는 옛계명과 새계명이 나옵니다. 사실 7-8절에 대한 바른 해석의 열쇠는 옛계명과 새계명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데 있습니다. 즉, 옛 계명은 무엇이고 새 계명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 오늘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7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내가 너희에게 새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고 너희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옛계명을 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때 새 계명도 (엔톨렌)이라 하여 단수로 되어 있고 옛 계명도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새 계명에서 ‘새’라는 단어는 (카이넨)으로 되어 있고 옛 계명의 ‘옛’은 (팔라이안)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옛 계명은 너희가 처음부터 갖고 있던 계명이라고 말합니다. 놀라운 것은 옛 계명은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계명”이라고 하여 (에키케테)라는 미완료형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 반면, 들은 바 ‘말씀’에서는 (에쿠사테)라는 과거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옛 계명은 과거에서부터 계속 있어온 것이며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지만, 들은 바 말씀은 과거에 들은 메시지를 뜻합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같은 절 7절에서 단수로 된 옛 계명과 과거에 들은 바 ‘말씀’이 일치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옛 계명은 무엇이고 새 계명은 무엇입니까?
옛 계명에 대한 단서는 요한일서 3장 11절에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요일 3:11).
그런데 요한일서 3장 11절을 원어로 보면 그 구절에는 옛 계명 또는 말씀 대신에 (호 앙겔리아)라고 하여 ‘소식’이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은 처음부터 들은 바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미난 것은 신약에서 ‘소식’은 ‘기쁜 소식’을 뜻하는 (유앙겔리온)인 반면, 여기서 말하는 ‘소식’은 과거에 들은 바 ‘소식’으로서 구약 시대와 맞물려 있습니다. 즉, 구약의 말씀 또는 소식의 모든 핵심은 ‘옛 계명’인데 그것은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즉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서 지금까지 이어왔고 앞으로도 그것은 진행된다는 의미의 (에케케테)라는 (미완료형) 동사가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들은 바 ‘말씀’ 또는 들은 바 ‘소식’은 하나의 계명인 옛 계명으로 그 핵심이 요약될 수 있는 옛 언약입니다. 그 옛 계명은 바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에서 주신 십계명의 핵심이 사랑의 계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십계명은 단 하나의 계명인 “사랑하라”는 계명을 10개의 계명을 풀어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옛 언약의 핵심이며, 사실 ‘사랑하라’는 계명은 영원한 주의 계명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약 율법 및 특히 제사법으로 가득한 레위기를 보면, 구약 율법의 핵심은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축약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는 11장부터 그 당시 풍습과 관련한 율법을 말하고, 16장은 절기에 대해 말하고, 18장부터는 십계명과 관련한 도덕법 등을 말하는데 그 핵심으로 두 가지가 등장합니다.
첫째는 19장 2절 이하로서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고 말하고 있고, 또 다른 핵심으로는 16절 이하로서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8)
라고 하여 도덕법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정확하게 구약 율법을 요약해 주셨습니다.
[
37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
그러므로 옛 계명, 들은 바 말씀, 들은 바 소식은 전부 옛 언약을 의미하는 표현으로써 그것을 하나의 명령으로 요약하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즉,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의 강령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7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라고 말한 것입니다. 분명히 사도 요한은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의 백성에게 주신 단 하나의 계명이라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8절에서 사도 요한은 매우 해석하기 힘든 말을 합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8절).
방금 전에 요한은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더니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라고 하니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사실 이것에 대한 이해는 구약과 신약의 연관성을 이해하는 것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러면 그 연관성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고 불연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연속성의 관점에서는 구약과 신약은 같은 명령, 같은 말씀, 같은 소식을 갖고 있지만, 불연속성의 관점에서는 구약의 명령과 신약의 명령, 구약의 말씀과 신약의 말씀, 구약의 소식과 신약의 소식은 같지 않습니다.
이렇게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이해하고 7절과 8절을 읽으면 조화가 됩니다. 이와 함께 놀라운 것은 ‘새’ 계명이라고 할 때 ‘새’라는 원어는 (카이넨)이고 ‘옛’ 계명이라고 할 때의 ‘옛’은 (팔라이안)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원어의 원형 (카이노스)는 품질에 있어서 새 것이라는 뜻입니다. 같은 종류가 있는데 지금까지 헌 것만 있었는데 새 것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컴퓨터도 그렇고 자동차도 그렇게 프로그램도 그렇고 계속 업데이트 됩니다. 그런데 구약과 신약은 단 한번 업데이트 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업데이트는 다름 아닌 성령의 오심으로 인한 질적인 변화입니다. 성령의 오심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셨다는 뜻이고,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삼위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완전하게 실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 이 땅에 이루어짐으로써 성령께서 주의 백성의 마음에 내재하시며 새로운 시대를 여신 것입니다.
그래서 옛 계명에서의 ‘옛’에 쓰인 헬라어 (팔라이오스)는 오래 동안 과거에 쓰여온 헌 것, 오래 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종류는 같지만 업데이트 된 새로운 계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에 우리 예수님은 옛 계명과 새 계명, 옛 말씀과 새 말씀, 옛 소식과 새 소식의 차이를 이렇게 비유하셨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 9:16-17).
즉, 생베 조각이나 옷은 같은 종류지만 질이 다릅니다. 낡은 가죽 부대와 새 부대는 같은 종류지만 새 포도주를 담으려면 새 부대가 필요합니다. 즉, 새 언약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새 계명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새 소식의 시대가 열렸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에서도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정확하게 같은 (카이노스)를 사용하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은 과거의 하늘 및 땅과 이어지는 질적 개념의 ‘새’하늘 ‘새’ 땅을 말합니다.
[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더라
](계 21:1-2, 5)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은 지금 우리의 하늘과 땅과 연속성이 있을 것이며 또한 무한한 불연속성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낡은 모습은 그 날에 영광의 부활체를 얻게 될 텐데, 우리 자신에게도 역시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을 것입니다. 분명히 부활한 ‘나’는 이 땅에 살던 ‘나’인데 종류가 너무나 업데이트 된 영광스런 ‘나’로 변해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셨는데 그때 모든 것이 영적으로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러므로 부활의 영으로 거듭난 신자들 역시 과거 사람과 거듭난 후의 사람 사이에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는 것이며, 죽음 이후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으되 영원한 것들만 영원히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부패한 것들, 어둠의 것들, 마귀에게 속한 모든 것들이 전부 다 불못에 던져지고, 새하늘과 새땅에는 완전한 선과 빛과 사랑과 거룩함과 평강과 기쁨만이 차고 넘치는 것입니다. 즉, 선한 모든 것들은 과거 때나 현재나 영원한 장래에나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새로운 종류의 영원한 미래가 예수님의 십자가 속량 이후로 성령의 오심과 함께 이 땅에 임한 것입니다. 그 뜻이 바로 사도 요한이 8절 끝에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침이니라”라고 덧붙인 내용입니다.
그러면 구약과 신약 모두가 사랑이라는 계명으로 집약된다고 했고,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전체가 하나라고 했는데 무엇이 불연속성입니까?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인한 생명력이 불연속성입니다. 과거에는 인간의 힘으로 주의 도움을 받아 사랑했다면, 지금은 폭포수와 같은 생명을 받아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는 율법을 지키는 것은 그저 희미한 불빛과 같은 촛불 또는 형광등의 도움을 받아 순종했는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속량을 치르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이후로는 우리가 율법 지키는 것이 너무 쉽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7장과 8장을 보면, 바울은 새로운 변화의 시대를 자각하게 되면서 개인의 삶에 어마어마한 변화를 얻게 됩니다. 그것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변화된 것입니다. 그는 이 사실을 깨달아 알기 전까지는 이 법을 자신의 개인의 삶에 적용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죄와 늘 갈등하는 너무나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항상 한숨을 쉬며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
14 우리가율법은신령한줄알거니와…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14-24)
그런데 바울은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함이 그러한 비참한 갈등의 자리에서 승리하는 비결인 것을 알게 됩니다.
[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하나님의영으로인도함을받는사람은곧하나님의아들이라
](롬 7:25-8:1-4, 9, 13-14)
이러한 현상에 대해 구약에서는 미래에 있을 가장 복된 메시야 시대의 현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
8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9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
10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11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12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히 8:8-13)
[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16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 10:14-20)
그러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 사랑이라는 계명이 어떻게 새 계명이 있고 옛 계명이 있습니까? 사랑하라고 하면 그만이지 어떻게 그것이 새 계명도 될 수 있고 옛 계명도 될 수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또한 요한일서 3장 23절을 보면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고 합니다.
그러면 왜 주님의 사랑하라는 계명은 “새 계명” 또는 “그의 계명”입니까? 34절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단서입니다. 이 단서가 주님의 계명을 옛 계명과 구별하여 “새 계명”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요한복음 15장 12-17절은 이 새 계명을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요 15:12-15, 17)
예수님은 분명하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옛 언약과 동일한 계명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 이어지는 부분 때문에 새 계명이 됩니다. 그 뒷부분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구약에서 나타냈던 모든 예표들과 그림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재가 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사랑도 그러하고 거룩도 그러하고 영광도 그러하고 하나님과의 통일도 그러합니다. 이에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세상과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영화롭게 변화되었습니다. 그 변화를 바울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
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3, 6-11, 17-18)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도 다른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새 계명이라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로마서 5장을 보면, 내가 연약, 죄인, 원수로 행하였을 때 그리스도는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롬 5:6, 8, 10)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의 단점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내가 괴수 같은 타락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이웃이 험악하고 나를 조롱하고 대적하고 미워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이 십자가에서 나오는 사랑으로서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새계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새계명은 "불구하고"의 사랑을 요청합니다. 새 계명은 "때문의" 사랑도 아니요 "만일의" 사랑도 아닙니다. 새 계명의 특징은 상대방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내게 베푸신 사랑을 기억하며 인내 가운데 다른 사람에게 여전히 주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주신 사랑의 새 계명은 내 자신의 자존심과 교만과 육신의 세력을 죽이기 위한 많은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또한 이런 새 언약의 사랑은 성령의 살아 있는 역사가 우리 마음 속에 있을 때에야 실천되는 사랑이기 때문에 쉬지 않고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평생 이를 위해서 말씀과 기도와 거룩한 교제 가운데 신앙의 연단과 훈련을 쌓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유일한 새 계명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특이한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면,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새 언약의 사랑을 행하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하신 복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미소가 환하게 비췰 것입니다. 또한 자자손손 하늘의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새 계명의 사랑으로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예수께서 주신 새 계명의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이방인에게는 불가능한 사랑입니다. 오직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만 가능한 사랑으로서 우리 예수께서 우리에게 계명으로 요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종류의 사랑이 우리에게 없으면 우리는 가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이 새 계명을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할 때에야 지킬 수 있습니다. 즉,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실 때 행할 수 있는 계명이 새 계명인 것입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19-20).
오직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따라 행할 때 그리스도로 인한 사랑이 내게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다른 사람들을 동일한 종류의 놀라운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사랑이 나타나지 않으면 우리가 거듭난 주의 자녀라는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며, 새 생명이 입증되지 않는 것이며, 새언약의 복락을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 나라 안에 들어와 있다는 보증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성령으로 말미암은 새 생명을 지키는 현상이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기질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원래 내게는 가능하지 않던 사랑인데 주 예수님의 영으로 가능하게 된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30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눅 6:27-36)
이처럼 우리는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단서 때문에 새 계명인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의미는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 곧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십자가의 사랑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지키면 너희는 곧 나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주께서 주신 새 계명을 지키기 바랍니다.
또한 십자가의 그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과실을 맺게 하고 하나님께 간구한 것을 받게 하는데 이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려는 자들 모두에게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응답될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이 사실은 요한일서 3장 22절에 의해서도 뒷받침 받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그러므로 다른 일반적인 사랑과는 구별되는 이 십자가의 사랑을 행하려는 자들에게 특별한 기도응답이 약속되어 있고, 이러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주 예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이며, 이에 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새 계명을 부탁하시며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네, 맞습니다. 이 새 계명은 천국의 유일한 계명이요 주님과의 새 언약 속에서 주어진 유일한 계명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을 세상 사람과 구분시키는 사랑이 바로 이 새 계명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사랑이 바로 이 새 계명입니다. 주 예수께서 주신 새 계명은 성령이 없는 사람들은 지킬 수 없는 계명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주신 새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사실,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사는 사람들만이 지킬 수 있는 계명이 바로 이 사랑의 새 계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해야만 주의 제자들이 세상과 구분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과 백성들에게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주께서 주신 새 계명을 우리가 행하면 우리를 통해 생명이 흐르고 사랑이 흐르고 빛이 흐르고 평강이 흐르고 감사가 흐르고 기쁨이 흐를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우리 주변에 천국이 임하여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 이후로 주님의 생명이신 새 생명으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하게 주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넉넉히 지켜 행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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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