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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14) 덕을 채집하라!
완덕에 오른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하며 늘 평정심 유지
‘덕을 채집하라!’ 이 주제어가 다소 어색하게 들릴 수 있다. 이 말은 ‘덕을 쌓다’, ‘덕을 획득하다’, ‘덕을 닦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채집하다’란 표현은 ‘지혜로운 꿀벌’ 개념에서 착안한 것이다. 덕(德)을 라틴어로 ‘비르투스’(virtus)라 하는데, 이는 선을 행하는 ‘힘’ 또는 ‘용기’를 뜻한다. ‘나쁜 습관’을 뜻하는 ‘악습’(vitio)의 상대어로 ‘좋은 습관’이라 할 수 있겠다. 수행 생활은 악습을 제거하고 덕을 심는 과정이다.
그래서 악습과의 싸움과 동시에 덕의 획득을 위한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악습에 대한 승리는 그에 상응하는 덕의 획득을 가져온다. 카시아누스는 인간 안에 악습과 그 반대 덕이 동시에 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양심에 따라 악마나 그리스도 중 누구에게 주도권을 부여할지 결정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라는 것이다.(담화집 1,13-14)
- 사막 수도승들은 덕을 얻으려 분투했으며, 모든 덕에 나아가고 온갖 악습을 없애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했다. 사진은 죠반니 벨리니의 <사막에서 수행하는 성 예로니모>. 위키미디어
지혜로운 꿀벌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우스의 생애」에서 안토니우스를 지혜로운 꿀벌에 비유하며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초기에 안토니우스도 자기 마을 근방에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열정으로 가득한 어떤 사람에 대해서 듣자마자 그는 지혜로운 꿀벌처럼(칠십인역 시편 6,8 참조) 그를 찾아갔습니다. 안토니우스는 그를 보고 덕의 길을 가기 위한 일종의 양식을 얻기 전에는 자기 집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안토니우스의 생애」 3,4)
꿀벌이 여러 꽃에서 꿀을 채집하듯 안토니우스는 다양한 사람에게서 덕을 채집하려고 노력했다. 어떤 한 사람에게서 모든 덕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에게서 각각의 고유한 덕을 모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꿀벌이 꿀을 찾아 여기저기 부지런히 다니듯 능동적으로 덕을 찾아 본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시아누스는 이를 상세히 설명한다. “누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 한 사람에게 모든 덕의 모범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사실 어떤 이는 인식의 꽃으로 장식되고, 또 어떤 이는 분별의 기술을 더 잘 갖추고 있으며, 어떤 이는 인내의 무게를 기초로 하고, 어떤 이는 겸손의 덕으로 승리하며, 어떤 이는 극기의 덕으로 승리합니다. 또 다른 이는 단순성의 은총으로 장식됩니다. 이 사람은 관대함, 저 사람은 자비나 철야, 또는 침묵이나 노동에 전념함으로써 다른 이들을 능가합니다.
이 때문에 영적인 꿀을 채집하려는 수도승은 매우 지혜로운 벌처럼 어떤 덕에 더 나아간 사람들에게서 각각의 덕을 채취하여 자기 마음의 그릇에 정성껏 모아야 합니다. 상대에게 부족한 덕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고 오직 그에게 있는 덕을 얻는 데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한 사람에게서 모든 덕을 얻으려 한다면 본받을 모델을 거의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규정집 5,4,1-2)
참으로 일리 있고 유익한 가르침이다. 우리 인간은 완전하지 않기에 모든 덕을 갖추고 있을 수 없다. 사람마다 나름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도 지혜로운 꿀벌처럼 타인의 장점을 찾아 본받으려 노력할 때 영성 생활이 더욱 진보하게 될 것이다.
덕을 위한 노력
사막 수도승들은 덕을 얻으려 분투했다. 압바 이시도루스는 그 이유를 말한다. “악은 사람들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서로 갈라놓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빨리 악에서 돌아서서 덕을 추구해야 합니다. 덕은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고 서로 일치시켜 줍니다.”(이시도루스 4) 악습이 여럿이듯 그 상대 덕도 여럿이다.
그들은 가능하면 많은 덕을 얻으려 노력했다. 압바 포이멘의 다음 두 금언은 이를 잘 말해준다. “한 형제가 압바 포이멘에게 물었다. ‘사람이 오직 한 가지 행위에만 의지할 수 있습니까?’ 원로가 대답했다. ‘압바 요한 콜로부스가 말했습니다. 나는 오히려 모든 덕을 조금씩 갖고 싶습니다.’”(포이멘 46) “누가 집을 지으려고 준비할 때, 그는 집 건축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한데 모읍니다.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자재들을 수집하지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온갖 덕을 조금씩 얻읍시다.”(포이멘 130) 압바 요한 콜로부스도 “사람은 모든 덕을 조금씩은 가져야 합니다”(요한 콜로부스 34)라고 말한다.
사막에서 여러 해 동안 함께 화목하게 생활한 두 형제의 일화는 그들이 덕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보여준다. 그들은 서로 인내와 겸손에서 경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느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한 형제의 눈에 다른 형제의 성덕을 드러내 보이셨다. 그 형제는 다른 형제의 우월함을 인정하고 그 순간부터 그를 형제가 아니라 사부로 부르며 자기 원로로 대했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96) 여기서 우리는 영적 경쟁에서 쉽게 빠질 수 있는 교만이나 시기심이 아닌 지극한 겸손을 보게 된다. 우리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질투와 분노, 교만에 사로잡힐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큰 걸림돌
사막 교부들은 덕을 닦는 데 있어서 교만과 허영심을 가장 큰 걸림돌로 보았다. 교만은 영혼이 소유한 모든 덕을 무자비하게 약탈한다. 카시아누스는 말한다. “교만의 질병이 얼마나 위험하고 심각합니까! 세상의 본성과 법칙까지도 바꿀 만큼 그렇듯 많은 정의와 덕, 그렇듯 위대한 신앙과 헌신이 한 번의 허영심으로 파괴되어, 그 모든 덕이 마치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립니다.”(규정집 11,10,3)
그리고 “교만의 악만큼 모든 덕을 제거하고 인간의 모든 의로움과 거룩함을 빼앗아 발가벗기는 악습은 없습니다. 교만은 온몸에 널리 퍼진 전염성 있는 질병과 같아서 단지 한 지체만을 오염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온몸을 해치며, 이미 덕의 정상에 도달한 이를 완전히 파멸시키고 분쇄하려 합니다.”(규정집 12,3,1)
그래서 그들은 교만을 가장 경계했다. 어떤 원로는 덕행이 뛰어난 세속인이 있다는 계시를 받는다. 완덕의 경지에 이른 위대한 원로들은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느님은 종종 그들을 교만에서 보호하시기 위해 그들 못지않게 덕스러운 평신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어떤 독 수도승은 천사를 통해 자신이 평신도 농사꾼보다 거룩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를 만나 그의 말에 감명을 받는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288-9)
모든 덕의 으뜸은 겸손이다. 겸손이야말로 사막 수도승들에게 일상생활의 본질이었다. 그들은 모든 덕에 나아가고 온갖 악습을 없애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하였다.(규정집 6,6) 그 누구도 하느님의 은총 없이 인간적 노력만으로는 완덕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이 사막 교부들의 가르침이다. 완덕에 오른 사람은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하며(마태 11,29 참조), 늘 한결같은 평정심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온유와 겸손, 평정심은 바로 덕스러운 사람의 표지다.
[사막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21) 과녁을 겨냥하라!
하느님이 당겨주시는 시위, 흔들림 없이 꽂히는 사랑의 화살
‘과녁을 놓치지 말고, 제대로 겨냥하라’는 말이 있다. 과녁을 놓치면, 늘 엉뚱한 곳을 겨냥하게 된다. 우리 삶도 비슷하다. 종종 삶의 목표, 즉 과녁이 확실치 않기 때문에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매번 엉뚱한 곳을 겨냥한다. 그리고 거기에 불필요한 시간과 힘을 쏟게 된다.
사막 교부들은 과녁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교부들의 금언집을 보면, 우리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 보이는 그들의 엄격한 금욕 수행에 지레 기가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과녁은 금욕주의가 아니라 하느님이었다.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길은 사랑이었다.
사막의 관대한 사랑은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의 중심이자 그들의 생활 방식을 평가하는 기준이었다. 금욕 수행은 단지 하나의 수단일 뿐이었다. 결국 사막 수도승의 과녁은 하느님과 사랑이었다. 교부들의 금언집에는 이를 보여주는 흥미롭고 교훈적인 일화가 많이 있다.
- 사랑은 바로 우리가 겨냥해야 하는 과녁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한결같은 마음과 자세로 본질과 핵심을 향해 소신껏 자기 길을 가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진은 AI 생성 이미지. ChatGPT
과녁을 겨냥한 예들
다음 일화들은 인간이 정한 규정보다 하느님의 계명인 애덕이 우선임을 잘 보여준다. 압바 모세는 주간 단식 주간에 방문한 형제들을 환대하기 위해 요리를 조금 만들었다. 그러자 이웃 수도승들은 이에 대해 성직자들에게 고발했다. 하지만 성직자들은 압바 모세의 놀라운 처신을 알았기에 모두 앞에서 말했다. “오, 압바 모세, 당신은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명령을 따랐습니다.”(모세 5)또 카시아누스와 게르마누스가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수도승들이 단식 규정을 깨고 열렬히 환대해 주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래서 그들이 한 원로에게 그렇듯 쉽게 단식을 깨는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단식은 늘 할 수 있지만, 내가 여러분을 항상 대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식은 확실히 유익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 선택에 달려 있는 반면, 하느님의 법은 우리에게 절대적 의무인 애덕을 행하도록 요구합니다. 따라서 내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것이니, 나는 온갖 열성을 다해 여러분을 섬겨야 합니다. 여러분이 떠나면 나는 다시 단식 규정을 지킬 수 있습니다.”(카시아누스 1)
압바 포이멘은 사순절이라 주저하며 자신을 방문했던 한 형제를 환대한 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나무문을 닫으라고 배우지 않고 혀의 문을 닫으라고 배웠습니다.”(포이멘 58)
이 애덕의 특징 중 하나는 남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었다. 압바 마카리우스는 형제들을 보호했고, 누군가 죄를 지으면 그것을 듣거나 보지 않았다. 어느 날 한 형제가 죄를 지어 집회가 소집되었고 압바 모세도 초대되었다. 가기 싫었던 그는 마지못해 구멍 난 바구니에 모래를 가득 채워 가져갔다. 마중 나온 형제들이 의아해 묻자, 그가 대답했다. “내 죄가 뒤로 줄줄 새 나오는데,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나는 다른 형제의 잘못을 심판하러 가고 있습니다.”(모세 2)
포이멘의 다음 일화도 우리 가슴을 활짝 열어준다. “몇몇 원로가 압바 포이멘에게 와서 물었다. ‘공동기도 중에 조는 형제를 보면 우리가 그를 흔들어 기도 중에 깨어 있게 해야 합니까?’ 압바 포이멘이 대답했다. ‘나는 자고 있는 어떤 형제를 보면 그의 머리를 내 무릎 위에 누이고 그를 쉬게 할 것입니다.’”(포이멘 92)
압바 디오스코루스는 거지를 만나자 좋은 투니카를 내주었다. ‘어째서 헌 투니카가 아니라 집회에 갈 때 입는 좋은 투니카를 주었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 같으면 예수님께 헌 투니카를 드리겠소?” 이 일화는 애덕이 전례의 성대함에 우선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처럼 사막 교부들은 늘 본질과 핵심을 놓치지 않고 과녁을 겨냥했다.
주객전도
주객전도는 수행의 길에서, 우리 일상에서 자주 있는 일이다. 예컨대, 어떤 외적이고 부수적인 것에 대한 의존 혹은 집착이라 할 수 있다.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되 그 겉모습을 보고 거기에 천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작 바라봐야 할 본모습, 진면목을 보지 못하게 된다. 신앙생활을, 영성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든 간에 직접 사물의 본질을 향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늘 피상적인 차원으로 끝나게 된다.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강을 건너라고 만든 뗏목에 집착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더 깊은 차원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본질을 향하지 못하고 수단, 방편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주객전도의 우를 범하기 때문에 성경의 문자에 집착하고 그 내면의 깊은 뜻을 놓쳐버리게 된다. 그래서 자기와 다른 생각, 다른 신앙과 문화, 다른 민족을 배척하고 적대시하는 것이다.
과녁을 겨냥하라
중국에 임제 의현이라는 유명한 선사가 있었다. 그는 평소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살불 살조사(殺佛 殺祖師)’, 즉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라는 말이다. 언뜻 들으면 섬뜩하고 살기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그 뜻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 어떠한 것에 얽매여 본질(과녁)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뼈 있는 가르침이다.
임제 선사는 여기서 ‘무의도인(無依道人)’, 즉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집착하거나 의존하지 않고 본질을 향해서 스스로 자기 길을 가는 자유로운 주체적, 자립적 인간이 되라’고 강조하고 있다. 또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직접 사물의 본질과 핵심을 통찰함으로써 온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이 세상 모든 사물 안에는 하느님 현존이 깃들어 있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인간 안에도 그분을 닮은 참된 인간 본성(眞我)이 깃들어 있다. 이것을 찾고 깨달아가는 여정이 우리 영성생활이 아닐까 한다. 이것을 보지도 느끼지도, 인식하지도 못하기에 우리는 쉽게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 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존중이나 예의 없이 인간을 막 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과 사람 안에서 하느님 현존을 느끼고 참된 인간성의 원형이신 그리스도를 발견한다면 더는 아쉬울 것이 없을 것이다. 그 깨달음 자체가 우리 삶을 인도할 것이다. 하느님 말씀인 성경은 문자로 표현된 책 자체보다도 그 안에 담긴 내용, 곧 하느님의 뜻이 중요하다. 하느님 뜻의 핵심에는 사랑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사랑을 실천하려 노력해야 한다. 사랑은 바로 우리가 겨냥해야 하는 과녁이다.
우리는 길을 간다. 함께 가지만 결국 혼자 가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한결같은 마음과 자세로 본질과 핵심을 향해 소신껏 자기 길을 꿋꿋이 가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무의도인의 자유로움으로 홀로 우뚝 서서 타인의 지표, 길잡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우리 안에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있고 지금까지 배워 알고 있는 것으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너무나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사막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24) 계속 전진하라!
주저함 없이 나아가자, 하느님 향한 힘찬 행진에 거칠 것 없으니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시간과 더불어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감은 일종의 여정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영적 여정’이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여전히 여정 중에 있는 존재다. 이 지상 여정은 마치 순례 여정과도 같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두 순례 중인 나그네이자, 순례자다. 사막 교부들의 주요 관심사는 내적생활에서의 진보였다. 그들의 가르침은 모두 여기에 초점이 놓여 있다. 즉 어떻게 하느님을 향한 이 순례 여정에서, 내적생활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다.
장작에 불 붙이기
사막 교부들은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으로 인해 혹시라도 타성에 젖어 내적생활에 퇴보하게 될까를 우려했다. 그들은 매일 새롭게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열정을 유지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압바 모세가 압바 실바누스에게 물었다. ‘사람은 매일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까?’ 원로가 말했다. ‘부지런하다면 매 순간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실바누스 11) 요한 콜로부스는 말한다. “매일 일찍 일어나 모든 덕과 모든 하느님 계명을 실천하십시오.”(요한 콜로부스 34) “압바 포이멘은 압바 피오르가 매일 새롭게 시작했다고 말했다.”(포이멘 85)
두 수도승이 영적 담화를 나누던 중 한 수도승이 다른 수도승에게 말했다. “우리가 할 일은 장작에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장작을 우리 마음에 비유해 볼 때, 불은 우리의 열정이라 할 수 있다. 열정이 없는 차가운 마음은 우리 영성 생활의 가장 큰 장애다. 마음에 열정이 없을 때 삶은 무미건조하고 무의미해진다. 열정을 상실한 마음은 수도승의 고질병인 ‘아케디아’(영적 태만)로 이끈다.
- 사막 수도승들은 늘 수도승 생활 초기의 열정을 간직하려고, 매일 초심자로 새롭게 시작하곤 했다. 앞으로 나아가기는 늘 쉽지 않지만, 계속 나아가야 한다. 하느님은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사진은 앙리 프레데릭 쇼팽 <홍해를 건너는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 위키미디어
사막 수도승들은 늘 수도승 생활 초기의 열정을 간직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매일 초심자로 새롭게 시작하곤 했다. 요한 클리마쿠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열정의 불이 꺼지지 않게 돌보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수도승은 누구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매일 불에 불을, 열정에 열정을, 열의에 열의를, 갈망에 갈망을 더하기를 절대 멈추지 않는 사람입니다.”(「천국의 사다리」 1,6) 초기의 열정을 간직하고 계속 키워가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초기의 열정을 잃어 우리 마음은 불 꺼진 싸늘한 장작처럼 식곤 한다. 그래서 매번 새로운 열정으로 우리 마음에 불을 붙여야 한다. 하느님을 향한 이 여정에서 열정은 우리를 지치지 않고 계속 전진하게 하는 에너지다.
끝없는 진보
그리스어 ‘에펙타시스(epektasis)’는 끝없는 진보를 뜻한다. 이 진보 개념은 특히 니싸의 그레고리우스의 「모세의 생애」에서 부각되는 핵심 개념이다. 이것은 우리가 영성 생활에 부단히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불변의 존재이신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끝없는 움직임, 이것이 그레고리우스의 진보 개념이다. 영혼이 하느님과 동일하지 않다면, 선에 참여하는 영혼의 이러한 진보는 끝이 없을 것이다. 하느님만이 무한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무한을 향하는 유한한 존재다. 이는 이동 중인 존재, 갈망의 존재를 의미한다. 약속된 땅을 향해 나아간 삶을 산 모세가 그 전형이다.
요한 클리마쿠스도 덕과 사랑은 현세에서건 내세에서건 한계나 종료점이 없다고 말한다. 진보는 단지 이 세상에서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생명의 표지라고 한다. 완전함의 본질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절대 완전해지지 않고 영광에서 영광으로 끊임없이 나아간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이다. 위(僞)마카리우스에게서도 이 진보에 관한 주제가 나타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영적 은총을 더 많이 받을수록 천국에 대한 그의 갈망은 더욱더 만족을 모르게 되며, 그는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갈망으로 더욱더 타오른다. 그가 자신의 영적 성장을 인식하면 할수록 그는 자기가 더욱더 은총을 받아야 하고 그 은총 안에서 성장해야 한다는 굶주림과 갈증을 느낀다. 그가 영적으로 더욱 풍요로워지면 질수록, 그는 더욱더 자신을 가난하게 생각한다. 천상 신랑에 대한 그의 영적 갈망은 만족을 모르게 되었기 때문이다.”(모음집 2,10,1)
따라서 ‘충분하다. 나는 이제 더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주님은 무한하시고 도달하기 어려운 분이시며, 그리스도인은 감히 자신이 주님께 도달했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밤낮으로 그분을 찾으며 겸손히 머물러 있어야 하기 때문”(모음집 2,26,17)이다.
‘수도 생활에는 졸업이 없다’는 말을 종종 하곤 한다. 이는 수도 생활이 일시적 과정이 아니라, 전 삶을 통해 이어지는 지속적 여정이라는 의미에서다. 베네딕토 성인의 표현에 따르면, 수도원은 ‘주님을 섬기는 학교’(규칙 머리말 46)다. 이 학교에서 졸업이란 아마도 자의건 타의건 이 학교를 떠나게 될 때, 그리고 이 지상 여정을 마칠 때일 것이다. 영성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을 찾는 영적 여정은 끝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멈춤은 퇴보이자, 죽음이다.
우리는 여전히 지상에 있다. 성인들이 이 지상에서 도달한 이러한 완성은 단지 부활 후, “부활한 육신이 새로운 신적 옷으로 덧씌워지고 천상 양식으로 양육될 때”(모음집 2,12,14) 얻게 될 바를 미리 맛보는 것일 뿐이다. 완성에는 끝이 없다. 매일 초심자로 새롭게 시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채워지지 않는 어떤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하거나 모든 것이 익숙해지고 안주하게 될 때, 우리는 멈추게 되고 결국 뒤로 처질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기는 늘 쉽지 않다. 그래도 우리는 끝없이 나아가려 노력해야 한다. 이 지상 여정을 마칠 때까지, 아니, 저세상으로 건너간 뒤에도 계속 나아가야 한다. 하느님은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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