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리3 ◆
【나는 믿나이다.(Credo in Deum )】
사도신경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크래도 인 데움(Credo in Deum)= 나는 믿나이다. 하느님을! 그다음에 나오는 것이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의 창조주”라고 원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말에서는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로 번역되었습니다. 욥기 19장 25절에서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라고 욥이 고통 속에서 외쳤던 신앙고백입니다. 이 짧은 신앙고백에 그의 현재와 미래가, 그의 삶의 전체가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 신앙고백에는 욥의 삶의 무게가 실렸듯이 “ 나는 믿나이다. 하느님을” 이라고 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에도 우리의 삶의 무게가 실려야 합니다. 즉 내 삶의 온갖 물음, 회의, 실패, 절망 등에 대한 대답이요, 대안이요, 보루로써 하느님이 고백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을까? 라는 주제로 이야기 하겠습니다.
우선 먼저 사도신경에 담겨진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신앙공동체에 속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만 구전으로 전수하였다. 둘째 믿음은 문자로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증거 곧 그리스도인 각자와 그 공동체의 “삶”으로서 전파되는 것이다. 셋째 신앙고백의 한 단어 한 단어를 “마음에 새기고”그와 더불어 살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이 정신을 어떻게 살려내야 하겠습니까? 첫째 신앙고백을 통해서 하느님에 대한 객관적인 진술이 아니라 “나의 신앙”을 고백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공동체에 전수된 그 교회의 신앙을 한 인간이 자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인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믿고 실행하는 주체가 “나 자신”이어야 합니다. 둘째 신앙고백은 가슴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믿는다.”라는 고백은 “온전히 신뢰하고 의탁합니다. 희망을 겁니다. 속하기를 바랍니다. 의지합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셋째 우리 신앙의 본래적인 원천은 성경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고백문은 “하느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힘차게 선포해야 합니다. 이런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의심 또는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너무 고독할 때 생기는 의심 , 위기에 처할 때 생기는 의심, 교리나 세계관과 관련하여 생기는 지적인 의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은 잘못된 것이라기보다는 의심의 단계를 지나 더 깊은 하느님의 체험을 경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프랑스의 장 설리번 신부는 하느님께 대한 회의와 하느님으로부터의 도피자체가 하느님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도록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의심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부활을 의심한다고 단죄하지 않으셨습니다.” “토마의 의심을 해소시켜 주셨습니다.” “의심을 없애기 위해 조바심을 내지 않으셨습니다.” “진리가 결국 이긴다는 것을 확신하셨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의심과 무지의 속박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단계를 넘어서서 어떠한 믿음의 자세로 나아가야 하는가? 첫째로 하느님께 하느님 자리를 드려야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함은 하느님께 하느님의 자리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나에게 전적으로 중요한 분, 아니 절대적인 분 내 생각의 첫 자리, 내 시간의 첫 자리, 내 사랑의 첫 자리를 차지하시는 분이시다.” 라고 고백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둘째로 잘못된 하느님의 상을 버려야만 합니다. 잘못된 하느님 상을 가지고 그것에 하느님을 가두어두는 것,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형상도 없고 제한도 없는 하느님께 “틀”을 지우는 것 그것이 우상입니다. 하느님의 속성과 일치하는 틀을 지우기보다는 속성과 부합되지 않는 틀을 지우게 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을 범합니다. 셋째로 하느님이 나의 삶에 스며들도록 합니다. 하느님의 존재만을 인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마음을 열고 하느님을 내 삶에 초대해야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다면 하느님이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도록 초대하고 의탁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을 삶 속으로 받아들이면 자기중심의 생활에서 하느님 중심의 생활로 세상 중심의 생활에서 복음 중심의 생활로 끊임없이 회심하고 결단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믿지 않을 때 지녔던 인생관 ,가치관 , 세계관을 떠나 “새 하늘, 새 땅” 의 시민으로 살고자 회개하게 됩니다. 이는 정신이 바뀌고 심정이 따라서 변화하고 마침내 행동이 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넷째로 뜬금없이 보여도 그냥 믿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는 무관심하고 무기력하며 심지어 적대적이라고 말 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위기의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화를 내면서 돌아설지 아니면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때 믿음의 사람들은 “신뢰의 길”을 택했습니다. 가시를 빼낼 때의 아픔을 참아내면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됩니다. 심리요법 가운데 “행동치료요법”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남편을 정말 사랑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면 그를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면 사랑의 감정이 구체화 되어서 나타나듯이 하느님 관계에서도 하느님의 모든 말씀이 사실인 것처럼 믿고 행동함으로써 신앙생활이 영위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신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에 속합니다. 위와 같은 믿음의 자세로 하느님께로 나아간다면 하느님께서는 “궂은일 ,잦은 일 , 애, 경사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뤄 주실 것 이라 믿습니다. 우리는 항상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서 늘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에 속하는 신자가 됩시다.
★ 신경
신경이란 가톨릭 신자가 고백하는 신앙의 핵심이며, 믿어야 할 신앙 개조(信仰個條)이다.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창조에서부터 강생을 통해 성령강림과 교회와 성사들의 신비에 이르는 역사 전체의 요약이다. 또한 복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동의를 표명한 것이고, 동시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얻게 되는 신자의 특권을 상기시킨다.
3세기경 성치프리아노가 처음으로 신경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신경은 심볼룸(Symbolum), 즉 표시라는 어원을 가지며, 실제 이를 고백함으로써 가톨릭 신앙의 표시가 되어 왔다.
이 신경은 사도들이 직접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신앙 개조로 사도신경(使徒信經)이 있다. 그리고 4세기 성아타나시오가 특별히 삼위일체 교리를 강조하여 엮은 아타나시오 신경(Athanasius信經),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작성된 니케아 신경(Nicaea信經) 세 가지가 있다.
※예수님을 부르는 칭호들
가. 하느님의 어린양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어 돌아가심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드러냄.
나. 하느님의 아들 :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심 “천주성자”
다. 사람의 아들 : 종말에 나타나 세상을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분을 뜻함. (다니엘서 7. 13-14)
라. 사람이 되신 말씀(로고스) → ‘예수님’ 육화됨 말, 말씀, ‘레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