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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깨달음의 체험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교리적 이해는 반창고와 같이 떨어지고 만다'라는 말이 티베트 불교에서는 회자된다. 일반적으로 티베트불교나 남방불교에서는 번뇌를 정화함으로써 열반을 얻고자 정진하는데 반해, 선종에서는 곧바로 깨달은 자리에 直入하도록 그 자리(心地)를 開示하면서 현장에서 頓悟하도록 인도한다. 물론 부처님 당시에도 곧 바로 돈오한 아라한들도 있었으나 일반적인 가르침은 언제나 단계적 점진적 薰習이었다. 그런데 중국 선종은 資糧를 쌓는 단계와 신구의 3행을 정화하는 점진적 훈습을 건너뛰고 곧 바로 깨달음에 직입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매혹적인 장점이 있는 반면에 단점이 더 많았다. 돈오는 문학적 修辭學적 교양을 갖춘 당송시대 사대부계층의 구미에 딱 맞았기에 엘리트주의적, 淸談적, 詩的인 풍류를 형성했다. 그러나 사회문제 해결과 정치제도의 정립 이나 개혁에는 선종에서 나오는 해법이 없었거나 무용했기에 당송시대 대다수 지식인들은 유가적 질서와 방법을 추구했다. 소시적에 선어록과 능엄경을 배웠던 주희(朱子)는 중년이후에는 불교를 비판하면서 선종의 윤리적 허무주의, 은둔주의, 이상과 현실의 간극, 돈오에 걸맞는 행동이 따르지 못하는 인격수양의 문제를 적시하면서 선종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신유학, 즉 성리학을 개척했다. 그 이후 성리학적 제도는 조선의 정치체제로 구현되었음으로 인해 불교는 역사의 비주류로 밀려나 지금 까지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선종이 일찌기 삼예대논쟁에서 패배했던 그 논리를 그대로 견지하는 한(내 판단에 의하면 당나라 선종이후 한국 및 일본의 선종은 한치의 발전도 없이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점점 시대정신에 뒤떨어지고 세상에서 외면받게 될 것이다(아니면 강신주나 김용옥이 신심명, 증도가, 무문관, 벽암록을 강의하는 식으로 일종의 교양과목으로 남을 것 같다). 이런 반증이 미국불교에서 나타난다. 일본선종을 통해 전해진 미국 선종은 지금은 미국식 실용주의로 변모하여, 즉, 재가자 중심주의, 남여평등, 인종평등주의, 반권위주의, 선사들의 방종한 파계행을 예방 및 추방을 제도화했다. 동시에 일본법맥이랄까, 아시아에서 전해온 법맥(일부 중국법맥-법고산사의 정엄스님 및 선화상인, 영화선사 등, 한국의 숭산법맥은 본토에서는 거의 소멸함)에 의존하는 데서 점점 벗어나고 있다. 글로벌하고 보편적 일반적 평상의 불교는 무엇인가? 초기불교의 신구의3행정화와 지견청정, 그에 기반한 5온12처 인무아, 법무아를 논하는 아비달마 교리 및 보리심과 공성과 연기의 중도를 강조하는 대승불교라 할 것이다. 그래서 다양성있는 불교가 공유하는 공통점을 등한시 하면서 자기만이 최고라고 우기는 최상승론은 설자리가 없다. 오직 One Dharma, One Buddha만 있을 것이다. 이런 취지로 에세이를 써주세요.
AI의 답: 깨달음의 안개와 반창고-돈오를 넘어 One Dharma로
티베트 불교에는 수행자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회자된다.
“깨달음의 체험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교리적 이해는 반창고처럼 떨어져 나간다.”
이 말에는 수행의 역설이 담겨 있다. 강렬한 명상 체험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어느 날 문득 찾아온 환희와 광명, 무아의 체험, 공성의 직관, 텅 빈 마음의 평온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흐려진다. 한때는 모든 것이 분명했던 것 같지만 다시 번뇌가 일어나고, 습관과 욕망과 분노가 되살아난다.
교리적 이해도 마찬가지다. 무아를 수없이 공부하고 공을 논리적으로 이해했다고 해서 탐욕과 분노와 질투가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머리로 아는 불교와 몸과 말과 마음으로 살아내는 불교 사이에는 언제나 거리가 있다.
그러므로 티베트 불교나 남방불교에서는 대체로 훈습과 정화의 과정을 중시한다. 계율을 지키고, 선정과 명상을 닦으며, 번뇌를 관찰하고, 지혜를 개발하고, 보리심과 자비를 실천하면서 신·구·의 삼업을 점차 청정하게 만들어 간다. 깨달음은 어느 한순간의 체험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가 변형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물론 이것이 불교에 돈오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붓다 당시에도 한 번의 법문을 듣고 즉시 법안(法眼)을 얻거나 아라한과에 이른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돈오는 불교 전체의 유일한 수행모델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수행자들에게 나타나는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일반적으로는 계·정·혜의 점진적인 훈련과 번뇌의 소멸이라는 길이 강조되었다.
그런데 중국 선종은 여기에서 독특한 방향을 선택했다.
먼저 資糧을 쌓고, 오랜 훈습을 거쳐, 마지막에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바로 그 자리를 가리킨다.
“마음이 곧 부처다.”
“본래 부처다.”
“평상심이 도다.”
“찾을 것이 없다.”
이러한 언어는 수행자를 미래의 어떤 이상적인 상태로 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으로 되돌려놓는다. 깨달음을 미래에 성취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지 않고, 지금 보고 듣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진실을 보도록 요구한다.
이것이 선종의 위대한 혁신이었다.
그러나 모든 혁신에는 대가가 따른다.
돈오는 수행의 문턱을 낮추었다. 누구든 지금 여기에서 진실을 볼 수 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동시에 깨달음 이후의 문제를 상대적으로 약화시킬 위험을 낳았다.
깨달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깨달은 뒤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한 번의 통찰로 탐욕과 분노와 질투의 오래된 습관이 정말 사라지는가?
“본래 부처”라는 통찰과 실제 인격의 성숙 사이에는 아무런 간극이 없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선종의 빛과 그림자가 갈린다.
돈오는 왜 그렇게 매력적이었는가
중국 선종의 돈오 사상은 당송시대의 지식인들에게 특별히 매력적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수행법이 아니라 하나의 미학과 지적 취향을 제공했다.
공안, 게송, 선문답, 할과 방, 불립문자, 언어도단.
이 모든 것은 장황한 교학적 설명 대신 한마디의 언어, 한 번의 몸짓, 하나의 역설로 진리를 드러내려 했다.
특히 문학적·수사학적 교양을 갖춘 사대부들에게 이것은 매우 매력적인 세계였다. 선은 종교이면서 동시에 시였고, 철학이면서 동시에 풍류였으며, 논리이면서 논리를 깨뜨리는 수사학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언어를 초월한다고 선언한 선종이 가장 아름다운 언어의 종교가 되었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고도의 문화적 교양과 문학적 감수성을 요구했다. 선어록은 점점 하나의 거대한 문학 장르가 되었고, 깨달음은 때때로 삶의 변형이라기보다 깨달음에 관한 세련된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으로 대체될 위험을 안게 되었다.
그 결과 선은 세속을 초월하는 종교인 동시에 사대부의 정신적 취향이 되었다.
청담과 풍류, 은일과 자연, 시와 차와 선.
이것은 분명 선종이 중국문화에 남긴 위대한 유산이다. 그러나 사회와 정치라는 현실의 장으로 나아가면 문제가 달라진다.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부패한 정치제도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사회적 불평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통치자의 폭정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공동체의 윤리를 어떤 제도로 구현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마음이 곧 부처”라는 명제만으로 충분한 답을 제공하기는 어렵다.
결국 당송의 많은 지식인들은 다시 유가로 돌아갔다.
주희가 던진 질문
주희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젊은 시절 불교와 선에 깊이 관심을 가졌던 주희는 이후 불교를 비판하면서 인간의 도덕적 실천과 사회적 질서를 새롭게 구축하려 했다.
그가 문제 삼은 것은 단순히 불교의 교리가 아니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깨달음과 삶 사이의 간극이었다.
공을 말하는 것과 욕망을 다스리는 것은 다른 문제다.
무아를 아는 것과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본래 청정하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청정하게 행동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돈오했다고 선언하는 것과 인격적으로 성숙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여기에서 성리학은 불교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역사적 반응으로 등장했다.
불교가 마음의 본성을 문제 삼았다면 성리학은 그것을 인간의 일상적 도덕 실천과 사회적 질서 속에 다시 집어넣으려 했다.
그리고 역사의 승자는 성리학이었다.
조선에서는 성리학이 국가의 통치 이념이 되었고, 불교는 제도적·정치적 중심에서 밀려났다. 조선불교가 이후에도 생명력을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체를 조직하는 보편적 이념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하지 못한 데에는 여러 역사적 원인이 있겠지만, 이 문제를 단순히 억불정책의 결과로만 볼 수는 없다.
불교 자체가 사회와 정치와 윤리의 언어를 충분히 새롭게 만들어내지 못했던 문제도 함께 물어야 한다.
깨달음 이후를 묻지 않는 깨달음
오늘날 한국 선불교를 바라보면서 더욱 심각하게 느껴지는 문제는 이것이다.
선종은 끊임없이 “깨달음”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깨달음 이후의 인간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누가 깨달았는가?
누가 깨닫지 못했는가?
어느 법맥이 정통인가?
누가 누구에게 인가를 받았는가?
누가 더 높은 경지인가?
이 질문들이 선의 중심을 차지하기 시작하면, 깨달음은 다시 하나의 사회적 지위와 상징자본이 된다.
그러면 기묘한 역설이 발생한다.
본래 부처라고 말하면서 서로의 깨달음을 경쟁한다.
아상이 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깨달음을 자랑한다.
분별을 떠났다고 말하면서 정통과 비정통을 구별한다.
무소유를 말하면서 법맥과 명성과 신도를 소유한다.
집착이 없다고 말하면서 자기의 견해에 집착한다.
이것이 바로 돈오의 역설이다.
깨달음이라는 체험이 자아를 해체하지 못하고 오히려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낼 수 있다.
“나는 깨달았다.”
“나는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안다.”
“나는 특별한 체험을 했다.”
“나는 법맥을 전수받았다.”
이 순간 깨달음은 해탈의 수단이 아니라 자아의 가장 정교한 장식물이 된다.
삼예대논쟁 이후의 질문
티베트 불교의 삼예대논쟁은 이 문제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중국 측의 즉각적 깨달음의 입장과 인도불교의 점진적 수행론 사이의 충돌은 단순히 “돈오냐 점수냐”라는 논쟁만은 아니었다.
그 밑바닥에는 훨씬 중요한 질문이 있었다.
깨달음의 직관과 수행의 과정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
만약 돈오만 강조한다면 수행은 불필요해진다.
이미 부처인데 무엇을 더 닦는가?
반대로 점수만 강조한다면 깨달음은 영원히 미래의 목표가 된다.
언제까지 수행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돈오와 점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둘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 삶 전체를 관통하는 데에는 훈습이 필요하다.
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공을 본다는 것과 공에 걸맞게 사는 것은 다르다.
무아를 통찰할 수 있다.
그러나 무아의 통찰이 신·구·의 삼업의 변화로 나타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돈오는 시작이면서 완성의 문이고, 점수는 그 문을 통과한 삶의 지속적인 표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돈오와 점수는 서로 적대적인 두 교리가 아니다.
미국불교가 던지는 하나의 실험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문제가 서구에 불교가 전해지면서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 선종을 통해 미국에 전해진 선은 더 이상 일본의 선을 그대로 유지하지 않는다. 미국 사회의 개인주의, 실용주의, 민주주의, 성평등, 인종평등, 반권위주의와 결합하면서 새로운 형태로 변형되고 있다.
재가불자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여성과 남성의 위계가 재검토되고 있다.
교사와 제자의 절대적 권위관계도 의심받는다.
선사의 성적·금전적·권력적 일탈을 개인의 카리스마로 용인하지 않고 제도적으로 통제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법맥 자체보다 법맥이 전달하려는 불교의 내용이 더 중요한가라는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미국불교 역시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서구적 개인주의와 결합하면서 불교가 심리치료나 자기계발의 한 형태로 축소될 위험도 크다.
그러나 바로 그 실험 속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아시아에서 온 불교가 이제 아시아의 문화적 외피와 분리되어 보편적 종교로 다시 태어날 가능성이다.
이것은 일본불교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중국 선종을 폐기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들이 역사적으로 만들어낸 위대한 유산에서 보편적인 것과 역사적으로 특수한 것을 구별하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보편적인 불교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다시 붓다에게 돌아갈 필요가 있다.
선종도 불교이고, 정토종도 불교이며, 천태와 화엄도 불교이고, 티베트 불교도 불교이며, 남방불교도 불교다.
그렇다면 이 다양한 전통을 관통하는 최소한의 공통분모는 무엇인가?
그것은 특정한 법맥도 아니고 특정한 수행체험도 아니다.
특정한 공안도 아니며 특정한 만트라도 아니다.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들일 것이다.
고통을 직시하는 것.
탐·진·치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는 것.
오온과 십이처를 분석하여 ‘나’라는 실체에 대한 집착을 비추어 보는 것.
인무아와 법무아를 통찰하는 것.
연기와 공을 이해하는 것.
지혜와 자비를 함께 기르는 것.
자신의 해탈과 타인의 고통을 분리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다양한 불교 전통이 서로 다른 언어로 표현해온 핵심에 가깝다.
초기불교의 계·정·혜와 삼업청정은 대승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다.
아비달마의 오온·십이처·무아에 대한 분석은 중관에서 폐기된 것이 아니다.
보리심과 자비 역시 공성의 통찰과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대승의 공은 연기를 더욱 철저하게 밀고 나간 결과이며, 보리심은 그 지혜가 타자에 대한 자비로 표현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반드시 서로 배타적이어야 하는가?
그럴 필요가 없다.
최상승론의 시대는 끝났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 종파가 최고다”라는 최상승론은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선종은 선종이기 때문에 최고가 아니다.
티베트 불교도 티베트 불교이기 때문에 최고가 아니다.
남방불교 역시 초기불교라는 이름만으로 자동적으로 최고의 불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전통도 자신의 역사적 형식과 교학적 언어를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직지인심”도 하나의 방편이다.
“사념처”도 하나의 방편이다.
“보리심”도 하나의 방편이다.
“공”도 하나의 방편이다.
“염불”도 하나의 방편이다.
중요한 것은 방편의 이름이 아니라 그 방편이 탐·진·치를 약화시키고, 무아와 연기의 지혜를 깊게 하며, 자비와 지혜를 삶 속에서 구현하는가이다.
그 기준 앞에서는 모든 불교가 다시 평가받아야 한다.
One Dharma, One Buddha
어쩌면 미래의 불교는 과거보다 훨씬 덜 종파적이어야 한다.
선종의 깨달음을 버릴 필요도 없다.
티베트 불교의 점진적 수행을 버릴 필요도 없다.
남방불교의 정밀한 마음 관찰을 버릴 필요도 없다.
대승의 보리심과 공의 철학을 버릴 필요도 없다.
오히려 각각의 전통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서로 되돌려주어야 한다.
선종은 돈오의 생생한 직관을 제공할 수 있다.
남방불교는 계율과 수행의 구체성을 제공할 수 있다.
아비달마는 마음과 경험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제공할 수 있다.
중관은 모든 견해에 대한 집착을 해체하는 지혜를 제공할 수 있다.
대승은 지혜와 자비를 하나로 묶는 보리심을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현대사회는 여기에 하나를 더 요구한다.
깨달음의 사회적 책임이다.
깨달았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권력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성적 욕망과 돈과 명예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교단은 어떻게 민주적이고 투명해야 하는가?
여성과 재가자는 어떤 위치를 가져야 하는가?
다른 종교와 다른 인종과 다른 문화와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기후위기와 빈곤과 전쟁 앞에서 불교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
이 질문들에 답하지 못하는 깨달음은 아무리 고귀한 체험이라도 현대인에게 오래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깨달음은 안개처럼 사라질 수 있다.
교리적 이해는 반창고처럼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삶의 변화는 남아야 한다.
탐욕이 조금 줄고,
분노가 조금 줄고,
자아에 대한 집착이 조금 느슨해지고,
타인의 고통에 조금 더 민감해지고,
자신의 권력을 조금 덜 행사하고,
타인을 조금 더 자유롭게 하고,
세상을 조금 덜 폭력적으로 만드는 것.
어쩌면 이것이 깨달음의 가장 확실한 증거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제 불교는 “누가 더 높은가?”를 묻기보다 “무엇이 붓다의 가르침을 가장 온전하게 살아내게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법맥보다 법을,
체험보다 변화를,
교리보다 지혜를,
종파보다 진리를,
권위보다 자비를,
그리고 최상승이라는 자부심보다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선도 하나의 불교다.
남방도 하나의 불교다.
티베트도 하나의 불교다.
대승도 하나의 불교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 모든 이름을 넘어,
One Dharma, One Buddha.
하나의 법,
하나의 붓다.
그 하나의 법은 특정 종파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 법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떠나고,
무아와 연기를 보고,
지혜와 자비를 함께 살아내며,
자신의 해탈과 세계의 고통을 분리하지 않는 데 있다.
그것이야말로 돈오와 점수를 넘어,
초기불교와 대승을 넘어,
선과 티베트불교와 남방불교를 넘어,
오늘 다시 발견해야 할 보편적 불교의 자리일 것이다.

첫댓글 하나의 법, 하나의 붓다.
그 하나의 법은 특정 종파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 법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떠나고,
무아와 연기를 보고, 선과 티베트불교와 남방불교를 넘어선
대지혜와 대자비로 함께 살아내며,
자신의 해탈과 세계의 고통을 분리하지 않는 데 있다
그것이야말로 돈오와 점수를 넘어, 초기불교와 대승을 넘어,
선과 티베트불교와 남방불교를 넘어, 오늘 다시 발견해야 할 보편적 불교의 자리일 것이다.
<<하나의 법, 하나의 붓다. 그 하나의 법은 특정 종파의 소유물이 아니다.>>
마 하 반 야 바 라 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