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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법
22: 25-31
25.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 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26.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 보내라
27.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
28. 너는 재판장을 욕하지 말며 백성의 유사를 저주하지 말찌니라
29. 너는 너의 추수한 것과 너의 짜낸 즙을 드리기에 더디게 말찌며 너의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찌며
30. 너의 소와 양도 그 일례로 하되 칠일 동안 어미와 함께 있게 하다가 팔일만에 내게 줄찌니라
31.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찌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것의 고기를 먹지 말고 개에게 던질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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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의 시내 산 언약에서 도덕법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 외에, 사회생활에서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시민법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시민법 중 몇 가지를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25절에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너와 함께 한’이란 구절은 상호 친근한 관계성이나 결속성을 강조해 주는 말입니다. 비록 물질적으로 가난한 처지에 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의 형제들이요 늘 함께한 자들임을 깨우쳐주고, ‘나의 백성’이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임을 가르쳐 줍니다. 비록 현실적으로는 가난한 처지에 놓였지만 그럼에도 가난한 자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돈을 빌려 준 사람에게 ‘채주같이’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채주같이 하지 말라는 말은 ‘고리대금업자처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특히 원어의 의미는 ‘고리 대금업자가 절대 되지 말라’는 강력한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라는 구절도 “너희가 그로부터 이자를 결단코 받지 말라”는 말로서, 이웃에게 돈을 꾸어 주되 마치 고리대금업자처럼 이익을 얻기 위해 빌려 주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고리대금을 엄히 금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리 대금은 적합한 이윤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폭리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고통과 저주로 몰아가는 악습이기 때문입니다. 고리대금 하면 악몽처럼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보릿고개를 넘기기가 지난했던 시절 ‘목구멍이 포도청’인 농민들은 비싼 이자를 감수하고 곡식이나 돈을 빌려야 했습니다. 보통 전리꾼으로 불리던 시장 대금업자들과 가난한 농민들과의 거래는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아쉬운 사람이 당하게 마련이라 눈 덩이처럼 불어나는 이자를 감당치 못해 패가망신 하는 일도 흔히 벌어졌습니다. 현물을 빌려주고 현물로 갚는 ‘색걸이’, 또는 장리곡은 춘궁기에 빌려 수확기에 1. 5배로 갚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봄에 천만 원을 빌렸다면 가을에 천 오백만원을 갚아야 했으니 6개월만 50%가 넘는 엄청난 고리대금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자는커녕 오히려 가난한 이웃을 도와주라는 적극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이자를 받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 된 자의 특징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 15편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라고 하면서 그 중의 한 사람으로서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악습은 이자 놀이나 계 조직 등의 형태로 오늘날 교회 안에도 남아있는데, 이러한 일들은 교회의 유익이 아닌 하나님께서 금하신 고리 대금의 악습일 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음은 영국의 W. M. Anderson 목사님의 증언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에 가난한 과부 한 분이 있었다. 그녀는 조그만 구멍가게를 차리기 위해 20파운드가 필요했는데, 주위에 의논할 상대가 없는지라 자신이 다니고 있는 교회의 목사인 내게 찾아와 사정을 호소했다. 마침 그 때 나는 우리 교회의 신자는 아니지만 한 부자 양반을 알고 있었으므로 과부와 함께 찾아가 그 사정을 말했다. 그는 쾌히 승낙하면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차용 증서를 만들었으며, 과부는 그 증서에 싸인을 했고 나 또한 보증인으로 싸인을 했다. 그는 차용 증서를 서랍에 집어넣고 돈을 꺼내 주었다. 그런데 돈을 받아 세어 보던 과부는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선생님, 돈이 15파운드 밖에 안 되는데요.’ 그러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요, 나머지 5 파운드는 이자니까요’ 우리는 기가 막혔지만 달리 돈을 구할 방도가 없었으므로 그 돈을 들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 후 과부의 장사는 크게 번창하여 그녀는 곧 20파운드를 내게 가져 왔다. 돈을 빌려 준 남자를 찾아가 그 과부가 돌려주는 20파운드를 전했더니, 그는 차용증서를 찾아 건네주면서 말했다. ‘목사님, 또 돈이 필요한 과부가 있으면 알려 주세요. 기꺼이 돕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돕는다고요? 천만에, 당신은 그 과부에게 강도짓을 했소이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천벌을 내리실 것이오’ 그 후 나는 그 고리대금업자를 계속 지켜보았다. 그리고 6개월이 체 못되어 하나님께서는 그를 심판하시어 그의 목숨을 앗아가셨다.> 그래서 성도는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고리대금업 같은 장사를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한편 신 23:20에 보면 “타국인에게 꾸이면 이식을 취하여도 가하거니와, 너의 형제에게 꾸이거든 이식을 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얻을 땅에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 상호간에 대해서는 이자를 위해 돈을 빌려주는 일을 금하고 있지만, 외국인과의 관계에서는 적절한 이자를 받는 것을 불법으로 간주하지 않고 일종의 정당한 상업적 활동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성도들 상호간에는 돈을 빌려 줄 때에 이자를 받지 말고 빌려 주라는 것이고, 성도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고리대금이 아닌 적절한 이자를 받고 빌려 주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혹자는 그러면 아예 돈을 빌려 주지 않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난한 형제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는 죄악으로 역시 하나님께 합당한 태도가 아닙니다. 진정 우리 성도들은 다른 성도들의 약점을 볼 때 그것을 자신이 담당하려고 할지언정,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악행에 빠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롬 15:1에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26절에 보면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돌려보내라.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고 했습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의 기후와 관련 있는 약자 보호 규례입니다. 가나안 땅은 일교차가 매우 심합니다. 그래서 낮에는 뜨겁지만 밤에는 기온이 뚝 떨어져 이불을 덮지 않고는 잘 수 없을 정도로 춥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는 겉옷은 통옷으로 펴면 마치 이불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에게는 겉옷이 밤의 추위를 막아 주는 이불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가난한 자들이 이러한 겉옷을 전당잡히고 나면, 밤에 덮을 이불이 없어 추위로 고생하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의 겉옷을 전당잡았을 때에는 해가 지기 전에 돌려보내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신 24:6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본 생활권을 보장하기 위해 마련된 법으로, 맷돌의 윗짝을 전당잡았을 경우에도 그 전당물을 해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이는 맷돌로써 생계를 유지하는 자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극빈 계층에 속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해가 지고 한밤의 추위가 오기 전에 전당잡은 옷을 돌려주라는 것은,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면 사람이 아무리 가난하고 미천하다 하더라도 결코 최소한의 인간다운 기본적 삶이 짓밟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이 규례는 분명 약한 자들의 보호를 위한 규례이지만 우리에게 또 다른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고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겉옷을 담보로 돈을 빌려 준 사람은 돈을 돌려받을 때까지 옷을 돌려주지 않는 것이 정당합니다. 그러나 만일 자기의 입장과 유익만 생각하고 밤에도 옷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그 옷 주인은 밤새 추위에 떨거나 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자기의 입장과 유익만을 생각하기에 앞서 다른 사람의 입장과 유익을 먼저 생각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옷을 저당 잡힌 자가 추위에 떨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부르짖으면’이라는 말은 구원을 열망하여 거듭거듭 부르짖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부르짖음에 대해 분명한 어조로 ‘내가 들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신다 함은 단순히 청각적으로 수용한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듣는 행위 이후 곧 그에 따른 적절한 행동까지를 포함한 표현입니다. 즉 이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의 아픈 호소를 귀담아 들으시고, 그들의 고통을 해소하시기 위해 친히 일어나 역사하실 것을 보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가난한 자들의 호소를 즉각 응답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자비’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자신의 사정을 아뢰며 도와 줄 것을 간구하는 자들을 그냥 내버려 두실 수 없는 자비와, 반드시 도우실 수 있는 은혜로운 열의와 능력을 지니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본받아 살아가야 마땅할 것입니다.
28절에 보면 “너는 재판장을 욕하지 말며 백성의 유사를 저주하지 말찌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재판장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근거하여 백성들에게 발생한 문제를 재판하는 사람으로 종교적인 지도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유사는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적인 지도자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는 신정국가였기 때문에, 재판장이나 유사는 하나님의 판결과 다스리심을 전달하는 대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재판장을 욕하고 저주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재판장을 욕하지 말고 유사를 저주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신정국가였던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규례가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즉 오늘날 성도들은 교회의 신앙 지도자들과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을 욕하거나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국가가 비록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신정 국가는 아니지만, 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불러 세우신 자들이며, 나라를 통치하는 위정자들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그 권세를 위임받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의 지도자나 나라의 통치자들도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라도 성도들은 그들을 욕하고 저주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잘못에 대해 깨우쳐주고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특별히 성도들은 교회의 지도자들과 나라의 위정자들을 위해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도들을 바로 인도할 수 있도록 해주시라고 기도하고, 나라의 위정자들에게는 나라를 정의롭고 평화롭게 다스릴 수 있는 힘과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들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도우며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 평화롭고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입니다.
29-30절에 보면 “너는 너의 추수한 것과 너의 짜낸 즙을 드리기에 더디게 말찌며, 너의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찌며”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곡식을 추수하거나 포도주의 즙을 짜면 가장 먼저 하나님께 바치고, 아들을 낳으면 첫 아들을 바로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규례는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바로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이 가장 우선순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모든 삶에 있어서 자신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존재의 원인이 되실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의 삶을 친히 주관하시며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삶에서 두 번째에 위치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은 진정 가장 우선순위에 계십니까?
정말 여러분은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십니까?
혹시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은 두 번째, 세 번째, 아니 맨 나중에 위치하는 것은 아닙니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성도들이 말로는 하나님이 자기 삶에서 가장 우선순위라고 하면서도, 실제의 삶 속에서는 하나님을 다른 것보다 뒤에 두고 있습니다. 실로 많은 성도들이 하루의 삶 가운데서 가정 일이나 회사 일을 앞에 두며,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 만나는 일은 나중에 두고 있습니다. 물질을 사용할 때도 가장 먼저 자신을 위해 사용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위해 사용합니다. 사랑을 줄 때도 배우자와 자식, 또는 친구, 그 다음에 하나님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바로 그런 사람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최우선 순위에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최우선 순위가 되어 풍성한 축복과 은혜를 받기 원하신다면, 여러분도 하나님을 최우선 순위에 두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30절에 보면 “너의 소와 양도 그 일례로 하되 칠일 동안 어미와 함께 있게 하다가 팔일 만에 내게 줄찌니라.”고 했습니다.
곡식은 이미 성숙한 상태에서 추수를 하지만, 짐승의 새끼는 처음 났을 때에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출생 후 짐승의 새끼는 칠일 동안 어미 곁에서 젖을 먹어야만 완전한 짐승으로서 구실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곡식과 달리 짐승의 새끼를 팔 일 만에 바치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최상의 것 완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때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자신을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마지못해 겨우 흉내만 내는 것은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가장 아름답고 가장 경건한 예배를 드리기 원하십니다. 나아가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을 떼어 하나님께 헌신하여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릴 때에는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가장 좋고 완전한 최상의 것으로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31절에 보면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찌니 들에서 찢긴 것의 고기를 먹지 말고 개에게 던질지니라.” 했습니다.
들에서 야생 동물에게 찢긴 고기는 정결 율례상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부정한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물론 맹수에게 찢겨 죽은 짐승의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병에 걸리거나 죽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개에게 주는 것보다는 사람이 먹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훨씬 이익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성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경제적인 이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거룩한 백성으로서 자신의 순결을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고기를 먹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익이라고 해도 결코 먹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신앙적 순결을 지키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세상을 살다 보면 짐승에게 찢겨진 고기처럼 불의한 재물들의 유혹이 성도들의 마음을 흔드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이 부당한 방법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회사에서는 부정으로 이익을 챙기고, 심지어 군대나 학교에서까지 나쁜 마음만 먹으면 쉽게 돈을 버는 것을 볼 때 ‘한 번만 신앙 양심을 속이면 많은 돈을 벌 텐데’라는 유혹이 성도들의 발목을 붙잡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만일 부정한 방법으로 이익을 얻는 순간 여러분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영광의 신분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작은 것을 얻기 위해 불의를 가까이 하게 되면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는 큰 것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눈앞의 이익 때문에 불의한 재물을 탐하시겠습니까? 우리는 결코 그런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신앙적 순결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가치 있는 것이며, 그 어떤 것을 희생해서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송정 중앙 교회 성도들은 어떤 유혹 앞에서도 신앙적 순결을 지킴으로 영광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1)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고
2)과부와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며
3)가난한 자에게 이자 없이 꾸어주고
4)이웃의 옷을 전당잡더라도 해지기 전에 돌려주라는 명령 속에 잘 나타납니다.
이러한 규례들은 우리 성도들이 가난하고 연약한 이웃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하며, 또한 이를 실천하는 것이 자비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 길임을 가르쳐 줍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법을 통하여 그들에 대한 착취와 압제를 엄격히 금지하시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베풀도록 요구하신 것입니다. 특별히 이 법은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긍휼에 빚진 자 된 우리에게 사랑과 자비의 실천에 대한 강력한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자비로운 주 하나님 날 구원했으니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큰 은혜요 특권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에게는 감당해야 할 의무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본받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려운 이웃을 힘써 도와야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긍휼은 영혼에 대한 긍휼임을 잊지 마시고, 총동원 전도 주일을 기하여 한 영혼이라도 꼭 건져내어 살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