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요한복음 3:16-18)
‘아는 것이 힘이다’ (Knowledge is power) 라는 말을 누가 했을까요? 예,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한 말입니다. 그 이전에 성경 잠언 24:5에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성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에는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이 대우를 받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 왔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잘 알지 못하면 길을 잘못 드는 것과 같습니다.
언젠가 우리교회 여선교회 회원들과 춘천에서 오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몰라서 그렇지 그때 저는 정말 당황했습니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길을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길을 잘 모르면 엄청 고생할 수 있습니다. 예수믿는 것은 길을 가는 것과 같고 잘못 믿는 것은 길을 잘못 들어서는 것과 같습니다. 엄청 고생하고 망신살이 뻗치고 부끄럽고 미안하고 ....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었는데 교회에서는 무엇을 믿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나는 우리교회 장로님이 믿는 것을 믿습니다.” “장로님은 무엇을 믿는데?” “장로님은 내가 믿는 것을 믿습니다.” “너는 무엇을 믿는데?” “나는 우리 장로님이 믿는 것을 믿습니다.” 하여튼 뭘 믿기는 믿는데 정리가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믿는 것일까요?
첫째,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피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나의 모든 죄를 속죄하신 예수님의 피를 믿는 것입니다.
작년에 구로 구청에서는 쓰레기 무단 투기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가리봉동에 현수막들을 걸었습니다. 현수막 내용은 '쓰레기 무단 투기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이 죄는 자식 대까지 불운하게 만듭니다' 는 것이었습니다. 이 현수막들은 한국어와 중국어로 병기(倂記)돼 작년 5월 걸렸습니다. 이 동네 인구의 68%를 차지하는 외국인(주로 중국 동포)의 쓰레기 무단 투기로 골머리를 앓던 구청 청소행정과 직원들이 짜낸 아이디어였습니다.
구로구청 청소행정과 과장은 "아무리 쓰레기 분리 배출 계도 활동을 해도 큰 효과가 없기에 중국 동포에게 물어 맞춤식 현수막을 만들게 된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구로구청 직원으로 일하는 중국 동포 직원은 "조선족도 자식 문제에 민감한 것은 한국이나 마찬가지"라고 조언했습니다. 현수막을 붙인 지 한 달 만에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중국의 조선족 교포들도 사람이 죄를 지으면 죄값을 받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는 가정을 파괴하고 형제를 미워하게 합니다. 아담의 가정에 죄가 들어오니 가정이 파괴되고 행복한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험한 세상으로 쫓겨났습니다. 가인에게 죄가 들어가자 그는 동생 아벨에 대한 증오심으로 살인자가 됩니다. 그 죄는 저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가인은 농부였는데 땅이 더 이상 소출을 내지 않을 것이라는 저주를 받고, 땅에서 정처없는 떠돌이가 될 것이라 했습니다. 성경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 것’ 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난과 환난의 원인은 죄라고 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를 해결하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을 때에 우리의 죄가 용서됩니다. 요한일서 1:7에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벧전 1장 18-19절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십자가가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4장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느니라(개역 롬4:25)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 예수님이 사탄에 패배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에게 기대했던 희망이 절망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에서 무덤을 열고 부활하셨습니다.
뱀과 싸우는 망구스를 본적이 있습니다. 망구스는 덩치가 조그마한 짐승입니다. 싸우다 보면 킹코브라에게 물리고 몸이 뻣뻣해지고 뱀독에 중독이 되어 죽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죽은 것 같은 망구스가 다시 일어나고 다시 뱀을 공격합니다. 이제는 뱀독이 망구스에게 효력이 없습니다. 망구스는 결국 뱀을 죽이고 승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이 세상에 교회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흩어졌던 제자들 도망갔던 제자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 전 세계 20억이 믿는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인생에게 가장 무서운 적인 죽음을 이기게 해 주셨습니다.
셋째,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사는 도리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 가르침의 핵심은 사람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셨는데 어떤 사람이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한 사마리아 사람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되었는데 레위인, 제사장이 그냥 모른체하고 지나갔습니다. 한 사마리아 사람, 그는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약을 바르고 싸매주고,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에 가서 부비가 들면 내가 갚으리라 .... 이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을 한 마디로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같이 아파하는 마음이 사랑입니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사랑입니다. 상처를 싸매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 지갑을 열고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이 때문에 내가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끝까지 돌보는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넷째,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를 부르시면서 ‘나를 따라오너라.’ (follow me)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실 말을 하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분신이 되어야 합니다. 작은 예수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이 좀 잘못하면 안 믿는 사람들이 ‘예수믿는 사람들이 말이야... 그러면 되겠냐고..’ 그러는데 이것은 예수믿는 사람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들이 잘못 된 게 아니라 예수믿는 사람이 기준에 미달해서 그런 말을 듣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님의 가족인줄 압니다. 사실 우리집에 예수님이 사는 거죠. 저나 여러분이나 예수님의 가족이니까, 여러분의 집에 누가 오면 예수님의 마음으로 대접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나를 희생하여 사람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가장 깊은 차원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는 3단계에 있습니다. 이 3단계에서 갈등하고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합니다.
안수현 이라는 의사가 있습니다. 고대 의예과 91학번입니다. 군의관으로 복무하다가 예수님처럼 33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의 장례식을 통해 33세에 죽은 젊은 의사가 어떻게 인생을 살았는지를 사람들이 알게 됐습니다. 안수현은 영락교회 출신으로 교회장을 치루었습니다. 그의 장례식에는 문상객 4천명이 찾아왔습니다. 어디선가 몰려 온 4천여명의 사람들을 통해 33세 청년이 살아왔던 인생의 스토리가 알려졌습니다.
그는 인생을 예수님처럼 살았습니다. 그가 인턴, 레지던트로 일할 때, 아픈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느라고 꼬박 밤을 새우기도 했습니다. 병원에 입원했던 어린아이와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선물을 사 들고 부산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병원이 파업을 할 때, 왕따를 당하면서 환자의 침상을 지키던 의사였습니다.
안수현은 병원앞 구두딱이 할아버지에게 하루도 빠짐없이 인사하고 손을 잡고 위로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병원의 세탁하던 아주머니에게 하나님 사랑과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안수현은 친구들에게 메일을 쓸 때마다 마지막에 '스티그마 안수현'이라고 적었습니다. 스티그마는 예수님의 흔적이라는 말입니다. 그의 몸에 예수님의 흔적, 상처를 가지고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흔적을 사모하며 짧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청년 의사의 짧게 살았던 인생 속에 남겼던 놀라운 영향력을 바라보고 책을 하나 썼습니다. 안수현에게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써 내려간 책입니다. 그 책이름이 ‘그 청년 바보의사’입니다. 짧게 살았지만 안수현은 인생을 제대로 살고 갔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바라보면 100살을 살았어도 찰나에 불과합니다. 안수현은 그 몸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간 이 시대의 뛰어난 그리스도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