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여성수필의 정체성 연구
Ⅲ. 80년대 여성 의식의 특성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여성수필에서 중요한 주제를 형성해 온 여성 의식은 산업화시대라는 사회적 배경과 뗄 수 없는 관련을 맺고 있다. 여성에 대한 문제 설정은 산업화 과정에서 형성된 도시, 노동자 가정, 핵가족의 대중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주부’와 ‘기혼여성 노동자’라는 새로운 집단의 탄생과 관련된다.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이론가인 우에노 치즈코에 따르면, ‘주부’라는, “고용관계에 의거하지 않고 가사노동에 전적으로 종사하는 여성층”이 형성되는 데에는 “도시, 핵가족, 피고용인 가정”에서의 “아내의 자리”가 불가결한 전제였다.
한국은 1970년대를 관통하고 1980년대를 거치면서 핵가족화, 평균 수명의 연장, 가족계획의 실천, 가사노동의 간편화 등으로 여성의 생활 주기와 생활상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산업화와 도시화, 고등교육의 확대 등으로 세상이 달라지고 여성의 의식이 달라졌다. 여성이 “전통적으로 가정생활에만 얽매어 온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을 찾지 않을 수 없도록 사회가 변하고 생활주기와 가정과 가족제도가 변해버렸다”는 의식이 대두한 것이다. 현대 여성이 직면한 이러한 근본문제, 즉 ‘현대사회에서 여성의 자기 찾기’라는 정체성 문제에 대한 여성수필가들의 시각은 세 가지로 나타난다.
정체성은 한 사람이 세계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규정하는 데 있어 전반적인 방향과 종교적 제약을 제시하는 한편, 사고와 행동의 영역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미리 규정된 사회적 역할이자 전통적 사회 체계로서 기능하였다. 인간은 씨족, 고정된 친족 체계, 더 나아가 한 종족 또는 집단의 일원으로서 태어나고 죽었으며, 그의 인생행로는 미리 정해져 있었다. 따라서, 현대 이전의 사회에서 정체성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개인은 정체성의 위기를 겪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수정할 일도 없었다. 사냥꾼이면서 어떤 종족에 속한 사람은 그러한 역할과 기능에 따라서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였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여성작가들은 주로 현실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감추려 했다. 앞 문단에서 언급했듯이 현실의 문제를 ‘모성원리’에 묻어두고자 했던 것이다. 남성 작가와 비교해볼 때 여성수필에 나타나는 현실 인식은 추상적, 간접적, 암시적, 상징적이다. 현실에 대한 그러한 감춤과 침묵은 사회 참여와 정치 참여를 보다 사회 보편적으로 공유하고 있었던 남성들에 비해 여성들에게는 억압과 통제가 극도로 이루어졌던 사회 관습적 규범에서 연유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여성들은 현실 문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보다 적극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자아와 일 그리고 사랑에 관한 자신의 언어를 찾으려 한 것이다. 즉 여성을 사적 영역에만 머물게 하는 데 가장 효과적으로 동원되는 모성애 이데올로기의 신화를 깨뜨리려는 시도가 80년대에 들어오면서 수필 작품 속에서 엿보였다는 것이다.
여성이 처한 현실은 내적 현실과 외적 현실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여성은 내부적으로 스스로를 주변적인 타자로 느낀다. 그래서 페미니즘 관점에서 중심이나 자아로부터 소외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외부적으로는 가부장제나 자본주의 등이 자신을 억압한다고 느낀다. 이런 내외의 이중적인 억압이 여성들의 현실을 부정적으로 만든다. 우리나라에는 ‘여성부’가 존재한다는 것이 이런 현실을 증명한다. 우리나라의 여성은 평등하거나 자율적이지 못하며, 21세기 여성의 권리와 능력이 신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여전히 불평등한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 세계가 전제로부터 벗어나려면 왕의 신성한 권리와 다투는 동시에 남편의 신성한 권리와도 다투어야 한다.”는 200년 전 월스톤 크래프트의 주장이 지금도 유효하다면, 지금보다 더 열악했던 80년대도 유효했다고 하겠다.
80년대는 그 어느 시기보다 비판적 담론이 시대의 중심에 떠오르고 있었던 시기였다. 80년대 후반부터 소외된 계층의 묻혔던 목소리와 숨겨졌던 욕구가 표출됨과 동시에, 여성들도 큰 무리의 일부로서 권리를 주장하면서 제도나 법은 대단히 짧은 시간 동안 많이 정비된 반면, 여성들 자신의 의식은 쉽게 깨우쳐지지 않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여성문학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도 페미니즘문학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여성수필의 다양한 형식이 모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도 일군의 여성 수필가들은 개인의 자유를 말하고 사회 수필의 성격을 띠면서 현실 참여를 선언했다. 이러한 흐름은 의식 있는 여성 수필가들의 작품에서 다양한 형태로 분출된다. 그것은 대체로 지배체제에 대한 짙은 허무의식으로 드러나거나 광기의 이성이 지배하는 현실을 초월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 흐름은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80년대 여성 수필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신달자를 비롯한 80년대의 일련의 여성 수필들이 보여주었던 여성 정체성의 거세화나 불모화는 강제된 여성의 조건을 부정했다는 점에서 그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는 있지만 건강한 여성 정체성의 회복과는 거리가 있다. 진정한 여성성의 회복은 여성성을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강제된 조건의 무게와 맞서는 여성성의 자아 정체성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성의 가치성 여부에 대한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체험을 공론화하면서 그 과정에서 여성적 삶의 양상을 페미니즘 시각으로 다시 보는 것이다. 여성들은 언젠가는 그들 자신의 유용함을 위하여 그들 자신의 필요로부터 여성 자신의 문학 양식을 발전시키게 될 것이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희망과 기대는 이러한 여성 고유의 체험조차 남성에 의해 규정되고 틀 지워지는 것에 대한 그녀 자신의 문제의식을 깊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여성수필의 정체성과 방향을 점검해 보고자 하는 차원에서 여성작가들의 텍스트 속에서 그려지는 여성의식 특성은 무엇인가 하는 점과 그러한 의식을 드러내는 여성 수필가들의 텍스트는 어떠한 현실 인식과 작가의 내면을 재현하며 어떠한 가치와 이상을 재현하는가 하는 점에 초점을 둔다. 이런 여성의 의식은 관점에 따라서는 더욱 세밀하게 분화시킬 수 있겠지만, 본장에서는 첫째, 주체의 각성이 중심이 되어 억압 탈출의 의지와 여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나타내는 적극적인 현실의식 태도를 먼저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둘째, 자아와 현실의 모순적 양면성을 특징으로 하는 중도적인 현실의식 태도에 대해 예증을 통해 살펴보고, 셋째, 자아와 현실을 환상적으로 통합시키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소극적 현실의식 태도를 구체적으로 고찰하도록 하겠다. 이러한 여성의식의 세 가지 양상은 80년 여성작가들의 현실안을 보여준다. 따라서 여성 의식의 분석은 여성작가 사이에서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느냐, 그리고 누가 더 적극성을 보이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은 곧 여성의 정체성 정도를 나타낸다는 측면에서 여성성의 양상을 규명하는 작업에 해당한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80년대 여성작가들이 여성 정체성 형성 과정에서 적극성을 보이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여성문학론은 기본적으로 남성과 여성이 문학을 생산하는 물질적 조건이 다르며, 이는 그들이 쓰는 형식과 내용에 영향을 미치고, 성의 이데올로기는 남녀의 작품이 읽히는 방식과 그 작품이 정전으로 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여성의식이 재현되는 방식에 주목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관여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정영자, 이정림을 비롯한 몇몇 여성수필가들의 사회 수필에서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긍정적 통찰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