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하는 아내 黃貞禮JohannaYang 追憶의 소중한寫眞
23世孫(세손) 修政(수정) - 國叙(국서)의 長男(장남) - 母(모) - 金順子(김순자)
天主敎(천주교) 洗禮名(세례명) - 라이문도(Raymund).
西紀(서기) 1920년 庚申年(경신년) 6월 5일생. 西紀(서기) 1947년 丁亥年(정해년) 2월 27일 卒(졸:善終(선종).
實際(실제) 西紀(서기) 1948년 戊子年(무자년) 陰曆(음력) 2월 27일(陽曆(양력:4월 6일)에 善終(선종).
享年(향년) 28歲(세)
아버님께서 미군부대에 근무 하실때, 퇴근길에는 항상 초코렛을 가져다 주시던 추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작남감이나 초코렛(chocolate)을 동생에게 양보 안한다고 야단치실때는 어린 나는 너무 무서워 얼른 주고 말았던 추억이 평생 남아 있다.
내가 7살에 善終(선종)하셨다. 호적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 있다.
西紀(서기) 1947년 丁亥年(정해년) 3월 19일 오전 9시 京畿道(경기도) 高陽郡(고양군) 恩平面(은평면) 弘濟外里(홍제외리) 山(산) 1의 8, 淸淨洞(청정동) 167號(호)에서 死亡(사망) 戶主(호주) 黃成安(황성안) 居出(거출), 同日(동일) 高陽郡(고양군) 恩平面長(은평면장) 受附(수부) 동년 6월 5일 送付(송부).
할아버지 53살에 큰아들을 잃었으니 그 얼마나 哀慟(애통)하고 哀痛(애통)했으랴?!
墓所(묘소)는 본래 서울 중림동 성당 墓地(묘지)인 蠶室(잠실) 언구비에 모셨는데, 1970년경에 蠶室(잠실)이 아파트 대 단지가 造成(조성)되면서 墓地(묘지) 移葬(이장) 公告(공고)를 냈다고 하였는데, 엄마나 내 자신이 그것을 모르고, 지내고 보니, 결국은 墓地(묘지) 移葬(이장)을 못한 모든 屍身(시신)은 한꺼번에 중림동 교회 공원묘지에 合葬(합장)을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체험하고 말았다.
천주교 중림동 성당 墓地(묘지)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320-3에 위치 한다. Google.com의 위치 추정은 아래와 같다. 壻(서) : 梁芳秀(양방수) 整理(정리)
公園墓地(공원묘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320-3
http://blog.daum.net/bangyang/2443
넷째사위 : 黃壽政(황수정) - 1920년 庚申年(경신년) 陰(음) 6월 5일 생.
譜名(보명)은 修政(수정) 懷德黃氏(회덕황씨)
넷째따님 : 朴壽來(박수래) - 1921년 辛酉年(신유년)12월 4일 생.
四女(사녀) - 朴壽來(박수래) - 1921년 辛酉年(신유년)12월 4일 생.
부 - 朴永俊(박영준) - 모 - 李星玉(이성옥)의 四女(사녀)
★ 黃貞禮(황정예:요안나)의 어머님 이시다.
懷德黃氏(회덕황씨) 黃壽政(황수정) - 永俊(영준)의 넷째 따님.
넷째따님 : 朴壽來(박수래) - 1921년 辛酉年(신유년)12월 4일 생.
넷째따님 : 朴壽來(박수래) - 山所(산소)는 아래에 모셨다.
壻(서:사위) : 南原梁氏 兵部公派中 郡守公派中 雨番派 30世孫 巨濟門中 梁芳秀
서(서:사위) : 남원양씨 병부공파중 군수공파중 우번파 30세손 거제문중 양방수
http://blog.daum.net/bangyang/2443
서울 弘濟(홍제) 初等學校(초등학교) 入學(입학)하다.
初等學校(초등학교) 時節(시절) 堅振聖事(견진성사)를 받으면서...
韓美 財團에서 勤務할때 ...
南山 Hotel에서 엄마와 살때...
미도파 백화점 앞에서...
신부님이 촬영한 사진. 南山에서...
숭의여자고등학교(崇義女子高等學校) 時節(시절)...
숭의여자고등학교(崇義女子高等學校) 時節(시절) 運動會(운동회) 假裝行列場(가장행렬장)에서...
숭의여자고등학교(崇義女子高等學校)沿革(연혁)
1903년 10월 31일 :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가 경영하는 형태로 평양에서 개교, 설립자 마포삼열 박사, 초대 교장에 미국인 배귀례 선생 취임
1938년 3월 15일 :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 (29회, 30회 졸업)
1953년 4월 22일 : 재단법인 숭의학원 설립(문보 제685호), 재건 설립자 겸 이사장에 박현숙 선생 취임
1953년 5월 8일 : 숭의여자중학교 설립 인가(문보 제686호), 숭의여자고등학교 설립 인가(문보 제687호)
1959년 1월 17일 : 2부 중학교 12학급(문보 제170호), 2부 고등학교 9학급 인가(문보 제152호)
1964년 5월 28일 : 학교법인 숭의학원으로 조직 변경(문고대 1043-3)
1991년 10월 22일 : 2부 고등학교 폐교 승인, 모집 중단(행정 25412-754)
2003년 2월 26일 : 숭의여자 중.고등학교 대방동 교사 신축 준공 (시설 81471-5239)
美 八軍에서 退勤 길에...
남이섬(南怡ー)에서...
친구 김성환 양과...
남이섬(南怡ー)에서...
남이섬(南怡ー)은 江原道(강원도) 春川市(춘천시) 남산면 방하리에 있는 섬이다. 南怡(남이) 將軍(장군)의 墓域(묘역)이 있는 文化遺蹟(문화유적)지이자 觀光(관광)休養地(휴양지)로 開發(개발)된 곳으로서 2016년 現在(현재) 世界(세계) 122개국으로부터 130만명의 外國人(외국인) 觀光客(관광객)을 포함, 年間(연간) 總(총) 330만명이 찾는 大韓民國(대한민국)의 代表的(대표적)인 觀光地(관광지)이다.
行政(행정) 區域(구역)상으로는 江原道(강원도) 春川市(춘천시) 남산면 방하리에 속해 있고 길은 京畿道(경기도) 가평군으로 통한다. 둘레가 약 5km로 작은 섬이지만 1960년대부터 나들이터로 이름을 떨쳤다. 現代(현대)에는 경춘선 복선 전철이 개통되면서 가평역에서 南怡(남이)섬으로 바로 통한다. 한편 2010년 12월 世界(세계)에서 14번째, 韓國(한국)에서는 最初(최초)로 유니세프 어린이친화공원(Unicef Child Friendly Park)에 選定(선정)되었다.
남이섬(南怡ー)에서...
남이섬은 원래 섬이 아니라 구릉지로 형성된 작은 봉우리였다. 1944년 청평댐을 만들 때 북한강 강물이 차서 생긴 경기도와 강원도 경계에 있는 내륙의 섬이다. 금융인, 출판인이자 문화예술후원자인 수재 민병도(1916~2006)가 1965년 토지를 매입, 모래뿐인 불모지에 다양한 수종의 육림을 시작하였다. 1966년 경춘관광개발주식회사를 설립, 종합휴양지로 조성하여 오던 중, 90년대 말 금융위기로 인한 불황을 극복하고자 2000년 4월 주식회사남이섬으로 상호를 변경하여 관리해 오고 있다.
남이섬(南怡ー)에서
남이섬은 2001년부터 '문화예술 자연생태의 청정정원'이란 이름으로 재창업을 선언하고, 환경과 문화예술 관련 콘텐츠에 집중 투자하기 시작하였다. 환경 분야에서는 환경운동연합, 환경교육센터 및 YMCA, YWCA 등의 시민환경단체와 함께 재활용운동, 환경감시, 환경순화적 개발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으며, 지역사회 및 교육복지 분야에서는 지역 고등학교와 다문화미혼모복지기관, 독립유공자 지원을 위한 광복회 후원을 지속하고 있다. 또한 문화 분야에서는 유니세프, 유네스코 및 작가들과 더불어 순수미술과 종합예술축제 등 후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1960~90년대에는 최인호의 <겨울나그네> 촬영지 및 강변가요제 개최지로 알려져 행락객들의 유원지로 인식되어 왔으나, 2001년 12월 KBS 드라마 <겨울연가>의 성공으로 대만, 일본, 중국, 동남아를 비롯한 아시아권 관광객이 급증하면서 관광지로 탈바꿈되었다. 이에 남이섬 측은 그간 진행해 오던 각종 환경순화적 사업과 문화예술 지원사업을 강화하고자 2006년 3월 1일 국가형태를 표방하는 특수관광지, '나미나라 공화국'으로의 문화독립을 선언하였으나 이는 실상 관광 브랜드로서의 명칭이다.
남이섬(南怡ー)에서
설립자인 민병도가, 친일 행적이 있는 민영휘의 서자(庶子)인 민천식의 양자(養子)로 입양된 자이기에, 친일의 잔재가 아니냐는 논란이 있다. 일단은 주식회사남이섬 측에서는 민병도 본인은 요절한 부친 민천식과 함께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에서 지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이나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고 공식 입장에서 밝히고 있다. 다만 민영휘가 친일 행적으로 모은 재산을 후손이 물려받았는가에 대한 의혹으로 인해 섬을 매입한 자금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2019년 6월, 이 논란에 대한 대한민국 사법부의 최종 확정판결이 나왔다. 남이섬은 친일재산이 아니며, 친일 이슈와는 상관이 없다는 최종 판결이 2019년 6월 26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14민사부에서 확정(2018가합545698)되었다. 판결에 따르면 “민병도는 자신이 모은 재산으로 남이섬을 매입한 것이지, 선대로부터 상속 내지 증여 받은 재산으로 남이섬을 매입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워 친일재산이라 할 수 없다.”로 정리되었다.
섬 내에는 노래박물관, 세계민족악기전시관, 평화랑갤러리, 남문갤러리, 나미갤러리, 문화원, 공예원, 행복원미술관, 유니세프홀, 안데르센그림책센터 등의 문화공간과 함께 모든 객실이 갤러리로 꾸며진 호텔정관루 등의 편의시설이 있다. 문화예술사업 담당기관인 남이섬문화재단에서 연간 600여회의 공연과 연극, 축제, 전시회 등을 펼치고 있어 국내 관광지 중 가장 많은 문화공연이 진행되는 곳이다.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배용준과 최지우가 남이섬의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과 은행나무 길을 걸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앞섬이라는 뜻의 남섬(南島)으로도 불렸던 남이섬 지명의 유래는 남이섬 북쪽 언덕의 돌무더기에 남이장군이 묻혀있다는 오랜 민간전승에 기인하여 자연스럽게 정착된 것이다. 다산 정약용의 저서 천우기행(穿牛紀行) 및 산수심원기(汕水尋源記) 등에 따르면 이러한 민간전승 내용과 함께 일찍이 남이섬을 남이서(南怡嶼)로 부른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島(도)가 큰 섬을 가리키는데 반해 嶼(서)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작은 섬을 뜻한다. 남이섬 설립자인 수재 민병도 선생이 1965년 남이섬 조성 초기, 남이장군의 넋을 위로하고 장군의 기상을 기리기 위해 돌무더기 주위에 봉분을 쌓고 추모비를 세웠는데, 노산 이은상 선생이 추모 글을 짓고 일중 김충현 선생이 글씨를 썼다. 한편 남이장군의 행정상의 진묘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 위치하고 있다. 남이섬 관리 측은 이곳을 친환경적인 체험 관광 문화 공간으로 되돌아가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留學生(유학생) 試驗(시험) 採點(채점)을 맡아 보던 韓美(한미) 財團(재단) 勤務(근무)時節(시절)...
This thesis focuses on the social campaign and historical role of American-Korean Foundation, a non-governmental aid agency founded during the Korean War era. The foundation was not just a simple aid agencyit was an institution with complex and unique characteristics. The objective of this thesis is to examine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American-Korean Foundation by studying its relief activities, intentions of its founders, and its influence to Korea and the United States. The foundation was established when the United Nations requested non-governmental aid agencies to give aid to Korea as the Korean War broke out. Although the foundation defined itself as a non-governmental organization, it was actually under the political influences of both governments of Korea and the United States. They were deeply concerned in the organizational structure of the foundation, and the Americans took a large part of its staff because of the Eisenhower Administration’s initiative. The foundation dispatched missions to Korea twice for on-the-spot investigation and performed relief activities based on the information gathered from the missions. Goods and funds prepared in the United States were used in many fields of Korea such as health, social welfare, and education. With the long-term perspectives, the foundation reinforced the relief activities to sustain at least the minimal level and educated its personnel to improve the effect of the activities. Especially, the Foundation invested enormous capital in educating its personnel supplementing what governmental aid agencies did not do. However, the Foundation did not use funds systematically and failed to post-manage the usage of the funds. A main role of the foundation was a relief activity in Korea, but there was another important roleto provide both Eisenhower and Syngman Rhee Administrations with the materials and opportunities for propaganda. As the Cold War settled town, they decided to aggressively use American-Korean Foundation to accomplish their political aims. Eisenhower Administration used fund raising campaign to emphasize the role of the United States as a guardian of the Free World in the Cold War and requested Americans to give donations for the foundation as direct participation to the Cold War. Fund raising campaign of the Foundation was one of the factors affecting the making of the Cold War Culture. Also, Syngman Rhee planned Korean Children’s Choir’s visit to the United States to imprint Korea to Americans. Korean media covered about the Choir’s activities many times, and Syngman Rhee tried to use the Choir as political means to gain popularity on his Administration and relieve the political situation of Korea. Korean media kept positively reporting the activities of the Foundation. As a result, the Foundation could play an important role in making favorable and humanitarian images of the United States. These images were the results of which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tried to implant in Korea through the activities of non-governmental agencies. The American-Korean Foundation’s propagating activities performed by both Eisenhower administration and Syngman Rhee engraved the order of the Cold War among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and Korea. Although the United States and Korea’s propagating activities differed in some ways, both of their activities played a significant role to strengthen the order of Cold War and stably hold Korea in that order.
韓美(한미)財團(재단)은 6.25戰爭(전쟁) 過程(과정)에서 設立(설립)된 비공식원조기관인 한미재단의 활동과 그 역사적 성격을 고찰한 글이다. 1952년부터 1955년까지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한미재단은 원조기관의 성격만으로 규정할 수 없는 독특한 기관이다. 따라서 본고는 한미재단의 구호활동을 비롯해 설립 주체들의 의도, 재단의 모금 활동과 구호활동이 한미 양국 사회에 끼친 영향을 복합적으로 살펴보면서 한미재단의 역사적 의미를 밝히고자 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비공식원조기관들에게 한국을 위한 구호활동을 요청했고 한미재단은 이러한 국제적 움직임 속에서 설립되었다. 그런데 재단의 설립이 구상되던 시점에 미국 정부와 이승만은 비공식기관에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을 투영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한미재단은 정부의 영향력을 받지 않는 비공식원조기관을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한미 양 정부의 정치적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 양 정부는 한미재단의 조직 과정에도 깊이 관련했는데, 특히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적극적인 의지에 따라 미국 측 인사가 조직 구성에서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했다. 한미재단은 한국으로 두 차례에 걸쳐 사절단을 파견해 현지 조사를 수행했고, 이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구호활동을 진행했다. 미국 내에서 기부 받은 물품 및 기금은 한국의 보건, 사회복지, 교육 영역에 사용되었다. 한미재단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대민구호활동이 최소한의 수준을 보장할 수 있도록 기초를 다지고 관련 분야의 인력을 양성함으로써 그 질을 높이고자 했다. 특히 재단은 인력 양성 사업에 상당한 비용을 투자하면서 당시 공식원조기관이 수행하지 못한 사업의 틈을 메꿨다. 그러나 그 수행 과정에서 체계적으로 기금을 사용하거나 기금 사용처를 사후적으로 관리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한미재단은 주로 한국 내 구호활동에 종사했지만 아이젠하워 행정부와 이승만에게 선전활동의 소재 및 계기를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한미재단의 기금 모금 캠페인을 선전에 활용했다. 이를 통해 자국 대중에게 냉전 질서 속에서 자유세계의 수호자 역할을 맡게 된 미국의 위상을 인식시키고 한미재단에 기부함으로써 냉전에 직접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한미재단의 기금 모금 캠페인은 미국 내 냉전문화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하나의 요인이었다. 한편, 이승만은 대외적으로 미국 대중에게 한국을 각인시키고자 어린이 합창단의 방미를 추진했다. 합창단의 활동은 국내 신문에서도 대대적으로 다루어졌는데, 이승만이 정부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불안정한 국내 상황을 수습하는데 이를 활용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국내 언론들은 한미재단의 활동을 시종일관 긍정적인 논조로 보도, 평가 하면서 시혜적이고 인도주의적인 미국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이것은 미국 정부가 비공식원조기관을 통해 수혜국에 심어주고자 했던 대미관이 관철된 결과였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와 이승만이 한미재단을 매개로 수행했던 선전활동은 구체적인 내용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미국과 한국 대중에게 냉전 질서를 인식, 강화시키는데 일조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의 선전활동은 궁극적으로 양국이 냉전 질서를 강화하고 한국을 이에 안정적으로 편입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西紀(서기) 1971년 6월 18일 龍山區(용산구) 厚岩洞(후암동) 聖堂(성당)에서 婚配(혼배)를 하고 媤宅(시댁) 형님이신 梁明生(양명생)씨 필리핀에서 WHO Malaria Eradication Training 練修(연수)한다고 하여 金浦(김포) 空港(공항)까지 가서 무사히 잘 다녀 오라고 갔다가 出國(출국)하는 場面(장면)을 보고서 그냥 記念(기념)으로 撮影(촬영)한 寫眞(사진)이다. 아득한 追憶(추억)이다.
’1972. 11. 필리핀 WHO Malaria Eradication Training Centre 수료
西紀 1980년 庚申年(경신년) 巨南祀(거남사) 竣工式(준공식)에 參席(참석)하고 용호지골 밭에서...
西紀 1980년 庚申年(경신년) 巨南祀(거남사) 竣工式(준공식)에 參席(참석)하고서...
1987년12월11일大望(대망)의 꿈을안고AustraliaSydney를가다.
Sydney 바닷가에서...
Sydney Harbour Bridge,Opera House
http://blog.daum.net/bangyang/2986
http://blog.daum.net/bangyang/607
http://blog.daum.net/bangyang/607
http://m.blog.daum.net/bangyang/86?np_nil_b=1
나이아가라폭포(Niagara Falls,les Chutes du Niagara)에서
http://m.blog.daum.net/bangyang/272?np_nil_b=-2
家族(가족) 나들이에서...
http://blog.daum.net/bangyang/646
http://blog.daum.net/bangyang/1341
http://blog.daum.net/bangyang/1342
Atlantic Bahamas Paradise Island에서
http://blog.daum.net/bangyang/2763
2009년 3월 20일 California Huntington Beach에서
http://blog.daum.net/bangyang/608
다음 2편이 계속 이어 집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