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영상은 22일 어제 많은 눈이 내린 날 아침에 동네 집주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정말이지 많은 눈이 내렸지요. 설경이 눈부시게 아름다웠습니다. 어쩌면 봄이 오기까지 마지막 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이 운동화 발목을 넘쳐 젖은 발로 찍어 봤습니다.
풍경이 아름다우니까 그 풍경 찍기에 급급하여 예술사진을 찍는다는 생각을 잊게 됩니다. 아름답다고 해서 찍어 놓고 보면 이야기꺼리가 없죠. 이것은 而化 뿐만 아니라 오래전 칸트(Kant)와 니체(Nietzsche) 그 시절에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칸트는 예술을 美學으로 생각을 했고 니체가 여기서 예술을 분리시켜 오늘날의 예술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무언가 이야기(저항과 지향)가 있도록 한 것이랍니다. 따라서 Kant의 생각으로는 어제 而化가 찍은 눈 사진도 예술이지만 니체의 생각으로는 예술이 아닌 것이지요. 而化가 그것을 깨달은 시점은 다 찍고 집에 돌아와서 그제서야 깨닫게 된 것으로 마지막에 집에서 찍은 사진을 몇 장 추가하였습니다.
봄이 오면 매화가 먼저 피는데 매화가 지기 전에 슬그머니 벚꽃이 피거든요. 그래서 매화꽃인지 벚꽃인지 자칫 헛갈리는 때가 있습니다. 매화꽃이건 벚꽃이건 이 꽃들이 피어나면 많은 사람들이 고궁을 찾아 가서 사진을 찍는데 고궁에는 온통 기와집이죠. 따라서 기와집과 매화 또는 벚꽃이 어울어져 있어 사진을 찍으면 기와집에 매화(또는 벚꽃)가 찍힙니다. 그 [기와집에 매화] 사진이 무언가 추억스러운 점도 있지만 반면에 촌스러운 사진의 대명사처럼 회자되고 있지요. 옛날 카렌다에 단골손님처럼 등장했던 그런 사진입니다. 너무나 흔한 사진이고 아무런 이야기도 없죠. 그래서 니체가 [저항과 지향]을 했을 것 같아요.
이 점에서 위 영상의 눈사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기와집에 매화]처럼 아름답고 추억스럽긴 한데 너무나 흔하고 아무런 이야기도 없는 벙어리 사진이 되기 쉽죠.^^ 따라서 어제 찍은 而化의 눈 사진은 니체의 눈에는 예술로 보이지 않을 것 같네요. 그런데 요즈음 일출시간이 7시 10분경이고 사진을 찍은 시간이 8시부터 9시니까 하늘과 눈 색갈에 약간은 푸른 빛의 翡色이 보입니다. 그냥 흰색의 눈과는 색감이 다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