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395-5 마을광장에 소재한 옥동마을 보호수이다. 수령, 스토리, 수형 등을 보더라도 보호수 지정에 손색없다 하겠다.
보호수 고유번호 15-12-2-8이고,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수종이 해송이고, 수고 12미터이며, 수령 270년, 나무둘레 5미터이다.
일명 쌍송이다. 소나무 두 그루가 자라고 있다. "쌍송은 껍질도 좋지만 수형이 빼어나다. 소나무가 힘차게 뻗어 자라난 모양이 5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형태로 그 기상이 웅장하고 장엄하여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낸다"라고 쓰여있다.
이 보호수를 쌍송정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본래 쌍송 나무 그늘 아래에 정자가 있었으나 6.25 한국전란 때 소실되었다. 현재는 정자가 없는 채로 쌍송 만 있다.
다만 안내문 연도에 오류가 있다. 내용을 보면 조선시대 고종 25년 (1877년) 문충공 송연재가 천관산 유람을 하고 지나가다 이 곳 정자에서 휴식하며 쌍송정이라 명명하였다고 쓰여 있다.
문헌에 의하면 문충공이 이 곳을 방문한 시기는 무술년이었다. 즉 1898년이었다. 안내문에 나온
연도와 20년 정도 차이가 난다. 문충공은 천관산을 생애 딱 한 번 방문했다. 따라서 예외가 없으니 연도 오류임이 틀림없다.
문헌을 보자. 연재 선생 문집 중에 《遊月出山天冠山記》가 있다. 이 작품은 1898년 윤 3월 6일에서 16일까지 월출산을 거쳐 천관산을 유람하면서 남긴 글이다.
천관산 유람에 동행한 이는 그의 삼종제인 위옥 송병완, 명중 채봉서, 치장 안성환, 자상 박기진, 윤범 김재홍, 성재 김시중, 향원 여조연, 공범 오석렬, 내옥 이경순, 익중 송홍 등이었으며, 경문 김한목, 안준식 등이 합류하였고, 영산진을 지나 영암 대월루, 도갑사, 구정봉을 올랐다가 상견성암에서 잠을 잔 뒤 구림, 만덕산 백련사, 구강포를 지나 장천재를 거쳐 천관산에 오른 일정을 서술하고 있다.
동행한 장흥위씨 인물은 위계반, 위혁기, 위계룡, 위계온, 위계문, 위계학, 위계관, 위병량, 위성규 등이다.
천관산 하산 코스는 금수굴을 지나 다시 장천재로 내려왔고 여기정을 지난 다음에 부춘정, 보성의 목미암, 모후산의 초연정, 이어 곡성의 문성공(안향) 유상을 배알하고 귀가했던 일정이었다.
동행했던 인물들 면면을 보더라도
유림의 거목인 문충공의 장흥위씨 집성촌 방촌방문은 예의상 초대형식을 띠었겠지만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연재가 방촌 여기정을 방문했으니 가는 그 길목에 있는 쌍송정 또한 지나다가 휴식 차원에서 들린 것도 가능하다.
최근 장흥문화원이 추진했던 사업 중에 장흥암각문발굴조사단에 의해서 발굴한 방촌 삼괴정 바윗돌 명문에도 흐릿하지만 무술년으로 각자되어 있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이 천관산을 유람하고 다음날 방촌삼괴정을 찾아 바위에다 그 흔적을 남겼다. 바로 대자 글씨로 '三槐亭' 그리고 왼쪽에 '淵齋宋先生 命名 戊戌 三月 二十 一日'라고 흐릿하지만 보인다. 본래 여기정이었다. 연재가 느티나무 세 그루 유래를 듣고 삼괴정이라 명명한 것으로 추정된다. 각자된 글씨 수준은 잘 써진 것이 아니다. 연재가 삼괴정이란 정자명을 지어주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연재글씨가 아닌 마을에서 연재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했을 수도 있다.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은
호가 연재(淵齋), 시호는 문충공(文忠公), 충청남도 회덕에서 송시열의 9대손으로 개항기 군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순국지사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시정 개혁과 일본에 대한 경계를 건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으로 강제 이송당하자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 자결했다.
쌍송사진 출처/ 정태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