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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문(智異山雙磎寺 眞鑑禪師 大空塔碑文)
최치원(崔致遠:857 ~ ?)
대개 도(道)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고, 사람은 국토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이 인도의 교를 믿어 불자(佛子)가 되기도 하고, 중국의 글을 배워 유자(孺子)가 되기도 한다. 반드시 서쪽으로 대양을 건너 통역을 거듭하며 학업에 종사하는데, 목숨은 배어 의지하지만 마음은 보배로운 땅에 가 있다. 그래서 빈 손으로 갔다가 가득 채워 돌아오니, 어려운 일을 먼저 하고 얻는 것을 뒤에 하는 것이다.
옥을 캐는 사람이 험준한 곤륜산을 꺼리지 않고, 진주를 찾는 사람이 깊은 여룡(驪龍)의 동굴을 기피하지 않는 것처럼 해야 그 빛이 오승(五乘)을 융합하는 불타의 지혜로운 횃불과 그 맛이 육경(六經)에 배부른 선유(先儒)의 아름다운 반찬을 얻게 된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다투어 선(善)에 들어가게 하고, 온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능히 인(仁)을 일으키게 한다. 그런데 배우는 자들이 혹 말하기를 “불타와 공자의 가르침은 유파가 다르고 본체가 상이하다. 마치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끼우는 것처럼 상호 모순되어 각자 한쪽만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시험 삼아 이를 노해보리라. 시(詩)를 해설하는 자는 문(文)으로써 사(사)를 해치지 말고, 사(사)로써 지(志)를 해치지 말라고 한다. [예기(禮記)]에 “말(言)이 어찌 한 갈래뿐이랴? 각각 합당한 바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봉 혜원(廬峰 慧遠)은 논(論)을 지어 “석가여래와 주공(周公:공자)는 출발점이 다르기는 하지만 귀착점은 한 곳이다. 지극한 이치를 채득하는데 겸응(兼應)하지 못하는 것은 물(物)이 두 가지를 다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심약(沈約)도 “공자는 그 단초를 드러냈고, 석가는 그 극치를 궁구하였다. “고 하였다. 이들은 대체(大體)를 아는 사람이라 할 만하니, 비로소 지극한 도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겠다.
부처가 심법(심법)을 말한 데 나아가보면, 현묘하고 또 현묘하여 이름하려고 해도 이름할 수 없고 해설하려 해도 해설할 수 없다. 달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손가락은 곧바로 잊게 된다. 끝은 바람을 묶는 것처럼 어렵고 그림자는 좇아가며 붙잡기가 어렵다. 그러나 먼 곳에 이르자면 가까운 데로부터 시작하는 법. 일상의 가까운 데서 비유를 취한들 무슨 잘못이 있으리? 또 공자가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말을 않고자 하노라.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라고 하였다. 이는 곧 정명(정명)이 문수보살에게 말없이 대하고, 석가가 가섭에게 은밀히 전한 것과 같다,. 수고롭게 혀를 놀리지 않고서도 마음이 맞아 심법을 전한 것이다.
하늘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말을 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좇아 나가리? 멀리서 현묘한 도를 얻어와 우리나라에 널리 빛낸 이가 어찌 다른 사람이랴? 선사가 바로 그분이시다,. 선사의 법휘(法諱)는 혜소(慧昭)이고, 속성(속성)은 최씨이다.
그의 선조는 한족(韓族)으로 산동지방의 벼슬아치였다. 수(수)나라 군대가 요동을 정벌하다가 많은 사람이 예맥(예맥)에서 죽게 되자, 그 중에 뜻을 굽히고 우리 백성이 된 자들이 이었다. 당나라 때에 이르러 사군이 통일됨에 선사의 선조는 지금의 전주 금마인이 되었다. 아버지 이름이 창원(창원)으로, 가정에서 출가의 수행을 하였다. 어머니 고씨가 대낮에 잠이 들었는데, 꿈에 인도의 승려가 나타나 “저는 어미의 자식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고는 유리항아리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선사를 잉태하게 되었다. 선사는 태어나서 울지 않았으니, 일찍부터 소리를 낮추고 말을 삼가는 좋은 싹을 보인 것이다. 이를 갈 나이가 되자, 나뭇잎을 향으로 삼아 피우거나 꽃을 꺾어 공양을 올리는 놀이를 하였다. 간혹 서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 해가 기울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좋은 자질이 백 천 겁 이전에 심어진 것을 알 수 있으니, 발돋움을 해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머리 땋은 아이 적부터 관을 쓴 어른이 되도록, 그 뜻이 부모님의 은혜를 갚는데 간절하여 잠시도 잊지 않았다. 그러니 집에는 한말의 곡식도 없고, 또 한 뙤기의 땅도 없어서 농사 지을 방도가 없었다. 음식 공양을 오직 노력에 의지하였으니, 생선을 팔아 조석 봉양을 마련하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다. 그물을 엮는데 손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서도 마음은 벌써 물고기 잡는 법을 깨달아 능히 음식 공양의 재료를 풍성케 하였으니, 진실로 효성이 다하는 옛 노래에 들어맞는다.
부모의 삼을 당함에 이르러, 흙을 져다가 무덤을 만들고 말하기를 “길러 주신 은혜는 힘으로 갚아야 하지만, 오묘한 진리를 어찌 마음으로 구하지 않으리? 내 어찌 매달린 조롱박처럼 한창의 나이에 발자취를 묶어두겠는가? 라고 하였다,. 드디어 정원(정원) 20년 (804년) 세공사를 찾아가 뱃사람이 되기를 구하여 서쪽으로 가는 항해에 올랐다. 여러 가지 천한 일에 능하여 험한 길을 평지처럼 여겼다. 자비의 항로에 노를 저어 고통의 바다를 건넜다. 중국에 도착해서 우리 사신들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각자 뜻이 있으니, 이제 작별하고자 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길을 떠나 창주(滄洲)에 이르렀다. 신감대사(神鑑大師)를 찾아 뵙고 몸을 던져 반쯤 절하였을 때, 대사가 반가운 얼굴로 말하기를 “이별한 지 오래지 않았는데 기쁘게도 다시 서로 만났구려”라고 하고서, 즉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게 하였다. 그 자리에서 곧바로 인계(印契)를 받아 마른 쑥에 불길을 붙은 듯하고 낮은 언덕으로 물이 쏟아져 내리듯 하였다. 승도들이 서로 말하기를 “동방의 성인을 여기서 다시 뵙는구나!”라고 하였다.
선사의 얼굴이 검었던 탓에 승도들이 이름을 부르지 않고 흑두타(黑頭陀)라고 하였다. 이는 현묘함을 찾고 묵묵함에 처한 것이니 참으로 칠도인(漆道人)의 후신이라 하겠다. 어찌 읍중의 얼굴 검은 자한(子罕)이 뭇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했던 일에 비교될 뿐이겠는가? 붉은 수염의 석가와 파라나 눈의 달마와 더불어 영원토록 색상으로 드러내 보이리라.
원화(元和) 5년(810년) 숭산의 소림사 유리단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 어머니의 지난날 꿈과 부절을 합친 듯 완전히 들어맞았다. 이미 계율의 구슬을 빛내고 다시 학사에 돌아옴에,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다. 마치 강색이 천초보다 붉고, 청색이 남초보다 푸르듯이 스승보다 뛰어났다,. 고인 물처럼 맑은 마음을 가졌지만 조각 구름같이 떠다니는 신세였다.
신라의 승려 도의(道義)가 먼저 중국 땅에 도를 구하기 위해 왔었다. 우연히 서로 만나 뜻이 맞았으니, 서남쪽에서 벗을 얻은 것이다. 사방으로 멀리 찾아 다니면서 부처의 지견을 증득하다가 도의가 먼저 고국으로 돌아갔다. 선사는 곧 종남산으로 들어갔다.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봉우리에 올라 송실을 먹으면서, 망상을 잊고 만유의 진리를 관조하며 고요히 3년을 지냈다. 그 뒤에 자각봉에서 나와 사방으로 통하는 길에 이르러서, 짚신을 삼아 널리 보시하였다. 그 일을 하며 겨를 없이 또 3년을 지냈다. 이에 고행도 이미 닦여졌고 다른 지방도 다 유람한 터였다.
비록 만유가 공(空)임을 보았다고 하지만 어찌 근본을 잊을 수 있으리? 대승(大乘)의 진리가 우리나라를 비추자, 흥덕대왕께서 어필을 날려 맞이하며 위로 하기를 “도의선사가 저번에 돌아왔는데 선사가 뒤이어 귀국하니 이 나라에 두 보살이 계시는구려. 옛날 흑의를 입은 두 호걸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금은 누더기 옷을 입은 두 영재를 보는구나. 하늘 가득히 자비로운 위엄에 온 나라가 기뻐 의지하니, 과인은 마땅히 동쪽 계림의 경내에 길상 가득한 사원을 세우리라.”고 하였다.
선사는 처음 상주 노악산 장백사에 가서 주석하였다. 명의의 집에 환자가 많듯,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절간이 넓었으나 사람들이 스스로 좁게 여겼다. 드디어 걸어서 강주의 지리산에 이르렀다. 두어 마리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며 앞길을 인도하였는데, 위험한 길을 피하고 평탄한 길로 가니 길잡이와 다름 없었다. 따르던 사람들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축이나 다름 없이 여겼다. 이는 선무외의 경지에 이른 삼장법사(삼장법사)가 영산에서 하안거 할 때 맹수가 앞에서 길을 인도하여 산의 동굴로 깊숙이 들어가서 가섭모니의 입상을 본 것과 사적이 완연히 같다. 저 축담유가 졸고 있는 호랑이의 머리를 두드려 불경 소리를 듣게 한 것만이 승사에 전하는 유일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에 삼법화상이 머물던 화개곡의 절터에 당우를 수선하니, 어엿한 사원이 조성되었다.
개성(開成) 3년(838년) 민애왕이 갑자기 보위에 올랐다. 그윽한 자비에 깊이 의탁하고자 옥새를 찍은 글을 내리고 불공을 드리는 경비를 보내 특별히 발원하기를 구하였다. 이에 선사는 “선정을 부지런히 닦는 데 있거늘 무엇 때문에 따로 발원하리오?”라고 하였다. 사신이 왕에게 복명하자 왕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하며 뉘우쳤다. 선사는 색(色) 공(空)이 모두 소멸되고 정(定) 혜(慧)가 함께 원융하였으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 혜소(慧昭)라는 호를 하사하였는데 소(昭)자는 성조(聖祖)의 묘휘(廟諱)를 피하여 바꾸었다.
이에 대황룡사에 주석하게 하려고 수도로 불렀다. 사신들이 여러 차례 오가며 선사를 불렀지만 선사는 우뚝한 산처럼 뚯을 바꾸지 않았다. 옛날 승조가 원위의 세 번 부름을 거절하면서 “산에 있으면서 도를 행해도 대도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깊숙한 곳에 처해서 고상함을 기른 것이 시대는 다르지만 취향은 같다.
몇 년을 이곳에 주석하자 배우기를 청하는 사람들이 벼와 삼처럼 줄을 지어 찾아와 송곳 꽂을 땅조차 없었다. 기이한 곳을 두루 찾다가 남쪽 고개 기슭에 땅을 얻으니 상쾌하여 거처하기에 매우 알맞았다. 선방을 지음에 뒤로는 노을 진 묏부리에 의지하고 아래로는 구름 덮인 간수를 내려다 보았다. 시야를 맑게 해주는 것은 강 건너 먼 산이요, 귓부리를 시원스럽게 해주는 것은 돌 틈에서 솟구치는 물소리였다. 봄날 시냇가에 핀 꽃, 여름 산길에 우거진 소나무, 가을밤 계곡에 뜬 달, 겨울 산마루를 덮은 눈 같은 것들이 사철 형태를 바꾸고 만상이 빛을 나누며 온갖 자연의 소리가 화음을 이루고 수많은 바위들이 다투어 빼어났다. 일찍이 중국을 유람했던 사람들이 이곳에 와보고는 모두 놀라 바라보며 말하기를 “혜원(慧遠)의 동림사가 우리 땅에 옮겨온 듯 연화세계(蓮花世界)를 평범한 상상으로 비견할 수 없지만 항아리 속에 있는 별천지라는 말은 믿을 만하다”라고 하였다.
대나무를 걸쳐서 물길을 끌어다 계단을 둘러 사방에 흐르게 하고는 비로소 “옥천(玉泉)으로 사호를 삼았다. 법통을 손꼽아보면, 선사는 혜능(慧能,638~713)의 현손이다. 이에 육조(六祖)의 영당을 세우고 흰 담장을 채색으로 장식해서 중생을 인도하고 깨우치는 데 널리 이바지하도록 하였다. 법화경에 이른바 중생을 기쁘게 하기 위해 라고 한 까닭에 여러 상에 색을 섞어 그렸던 것이다.
대중(대중) 4년(850년) 정월 9일 새벽녘에 문인들에게 이르기를 “모든 법은 다 공(空)이다. 나는 떠날 것이다. 한 마음이 근본이니 너희들은 힘쓸지어다. 탑을 세워 내 형체를 간직하지 말고, 명(銘)열 지어 내 행적을 기록치 말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앉은 채로 돌아가시니 속세의 나이로 77세요 승려가 된 지는 41년이었다.
이때 하늘에는 솜털구름 한점 없었는데 바람과 우레가 홀연히 일어나고 범과 이리가 울부짖고 삼나무와 향나무가 변하여 시들었다. 잠시 후에 자줏빛 구름이 하늘을 가리더니 공중에서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들렸는데 장례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그 소리를 들었다.
[양사(梁史)]에 실려 있는 “시중 저상이 승려에게 청하여 어머니의 병을 위해 복을 빌다가 공중에서 손가락 튕기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 것은 성신이 감동하고 명귀가 감응한 것이니 어찌 속이는 말이겠는가? 도에 뜻을 둔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서 서로 조문하고 정을 잊지 못한 이들은 슬픔을 머금고 울었다. 하늘과 사람이 모두 애통해하였음을 단연코 알 만하다.
관곽과 수도를 미리 준비해서 갖추도록 했으므로 제자 법량(法諒)등이 울부짖으며 시신을 받들어 하루를 넘기지 않고 동쪽 봉우리의 무덤에 묻었으니 그의 유명을 따른 것이다.
선사는 질박한 성품을 흩뜨리지 않고 기교 부리는 말씀을 않으셨다. 헌 솜옷이나 삼베옷을 따뜻이 여겨 입었고, 겨를 섞은 밥에 나물 반찬 두 가지를 넘지 않았다. 귀인과 달인이 때때로 찾아왔지만 반찬을 달리 하지 않았다. 문인들이 좋지 않은 음식이라 하여 올리길 어려워하면 “마음이 이에 있으니 거친 밥인들 무엇이 해로우랴?”라고 하였다,.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 늙은 사람이나 어린 사람을 대접하는데 한결같았다. 왕의 사진이 역마을 타고 와 명을 전하며 멀리서 법력을 기원하면 “왕의 땅에 살면서 불일(佛日)을 머리 위에 인 자치고 어느 누가 호국에 마음을 기울여 임금을 위해 복을 쌓으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마른나무나 썩은 등걸 같은 저에게 외람되게도 멀리 윤음을 전하십니까.? 역마을 타고 온 사람은 배고파도 음식을 먹지 못하고 목말라도 물을 마실 수 없으니, 아! 이 점을 염려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혹 호향을 선물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 질그릇에 화롯불을 담아 환을 만들지 않고 사르면서 “나는 이것이 무슨 냄새인지 알 수 없다. 마음을 정성되게 할 뿐이다.”고 하였다. 또 중국차를 바치는 사람이 있으면 곧 땔나무로 돌솥에 불을 지펴 가로로 만들지 않고 끓이면서 “나는 이것이 무슨 맛인지 알 수 업다. 배를 적실 뿐이다.”라고 하였다. 참된 것을 지키고 습속에 따르지 않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
선사는 평소 범패(梵唄)를 잘하였는데, 그 소리가 금과 옥과 같았다. 곡조를 빗겨서 소리를 날리면 상쾌하고 슬프고 완곡하여 능히 천상계의 모든 신선과 부처를 기쁘게 하였다,. 먼 지방에까지 흘러 전해짐에 배우려는 사람들이 마루에 가득 찼는데,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어산의 묘음을 익히는 자들이 다투어 코를 막고 배웠듯이 옥천사의 진감선사가 남긴 소리를 본받고자 한다. 이 어찌 성문(聲聞)으로 중생을 제도한 교화가 아니겠는가?
선사의 열반은 문성대왕 때에 해당된다. 임금이 측은하게 여겨 맑은 시호(諡號)로 은총을 표현하려다가 선사의 유언을 듣고 부끄러워하며 그만두었다. 36년이 지난 뒤, 문인들이 강산이 변할까 염려하여 불법을 흠모하는 제자들에게 불후의 인연을 청해옴에 내공봉일길간 양진방과 숭문대의 정순일이 두 마음 굳게 합쳐 비명(碑銘)을 새길 것을 건의하였다. 헌강대왕이 지극한 덕화를 넓히고 참된 종지를 우러러 진감선사(眞鑑禪師)라고 추시(追諡)하고, 대공령탑(大空靈塔)에 전자(篆字)를 새길 것을 허락하여 영원히 영예를 마치게 하였다. 아름다워라! 태양은 양곡에서 솟아 으슥한 곳에도 비추지 않음이 없고 해안에 향을 묻으니 오래될수록 더욱 향기롭구나!
어떤 이가 말하기를 “선사께서 명(銘)을 짓지도 탑을 세우지도 말라는 훈계를 내리셨거늘, 뒷날 제자들에게 이르러 스승의 뜻을 확실하게 받들지 못하였으니 그러기를 임금에게 구한 것인가. 아니면 임금께서 내려주신 것인가? 결국 흐니구슬에 흠집이 났도다.”라고 하였다. 슬프다! 비난하는 자 또한 틀렸구나.
이름을 가까이하지 않아도 이름이 빛나는 것은 대개 정력(정력)의 남은 결과이다. 재처럼 없어지고 번개처럼 사라지는 것이 어찌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때에 하여 명성이 대천세계에 울릴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같겠는가? 그런데 귀부가 아직 비석을 등에 이기도 전에 왕이 갑자기 승천하였다. 금상이 뒤를 이어 즉위해 훈호가 서로 응답하듯 부탁한 일에 뜻이 맞아 좋은 일을 그대로 따랐다.
이웃 산의 절 가운데 또 옥천사(玉泉寺)가 있어 이름이 중복되어 뭇 사람들의 귀에 혼란을 일으켰다. 같은 이름을 버리고 다른 이름에 나가고자 하면 옛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따라야 한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그 절이 위치한 곳을 살피게 하니 절의 문이 두 줄기 간수(間水)에 임해 있다고 하였다. 이에 “쌍계사”라고 이름을 지어 하사하였다. 그리고 거듭 신에게 명하여 “선사께서는 행적으로 이름이 났고 그대는 문장으로 벼슬길에 나아갔으니 마땅히 명(명)을 짓도록 하라.”고 하였다. 나 치원(치원)은 배수(배수)하면서 “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물러나 생각을 해보니 지난날 중국에서 이름을 얻어 중구 사이에서 살진 것을 씹고 기름진 것을 맛보았다. 그러나 성인의 도에 흠뻑 취해보지는 못했으니 깊은 우물 안의 깨어진 벽돌 사이에서 뛰노는 개구리처럼 부끄럽도다. 하물며 불법의 진리는 문자를 떠난지라, 말을 붙일 만한 곳이 없다. 굳이 말한다 해도 묵으로 향하던 수레가 하루 만에 남쪽의 영(郢)으로 가는 격이다. 다만 국왕의 외호와 문인들의 대원으로 문자가 아니면 여러 사람 눈에 밝힐 수 없어서 드디어 감히 명(銘)을 짓고 쓰는 두 가지 일에 종사하여, 날다람쥐처럼 없는 재주에만 힘써본다.
돌에다가 새기는 일이 부끄럽고 두려워할 만하지만 도란 억지로 이름한 것이니 무엇이 옳으며 무엇이 그르리오? 붓자루를 멈추고 붓끝을 감추는 것을 신이 어찌 감히 할 수 있겠습니까?
거듭 앞서 말한 뜻을 펼쳐 삼가 명(銘)을 엮는다.
입다물고 고요히 명상하며 불타에게 마음을 돌린다네.
근본이 보살에 익숙했으매 오직 한평생 불법만을 넓혀왔네.
용감하게 호랑이 굴을 더듬었고 멀리 고래 물결 건넜도다.
가서 비인(秘印)을 전해 받고 와서는 신라를 교화시켰네.
깊숙한 곳 찾아 승경을 골라서 바위 비탈에 절을 지었다오.
물 달을 보고 심회를 맑게 하고 구름 샘물에 흥을 부쳤지요.
산은 성품과 더불어 고요하고 골짜기는 범패와 함께 응답하네.
외경에 부딪혀 막힘이 없었으니 기심을 없앤 것 이로써 증명되리.
도로써 다섯 임금 협찬했고 위엄으로 많은 요괴를 꺾었도다.
말없이 자비의 그늘 드리우고 드러나게 아름다운 부름 거절했네.
바닷물이 저절로 물결쳐 움직이나 산이 어찌 동요하리오.
사념이 없고 심혜가 없어서 다듬지도 않고 아로새기지도 아니했네.
음식에 두 가지 반찬 없었고 복장은 반드시 갖추는 일 없으셨지.
비바람 그믐밤 같은 속에도 시종이 일치했다오.
지혜의 가지가 바야흐로 뻗어나는데 법계의 기둥 별안간 무너졌도다.
동학은 처량하고 연라는 초췌해졌네 사람은 갔으나 도는 남아서 끝끝내 잊을 수 없으리.
상사가 소원을 개진하니 대왕께서 은혜를 베푸셨네.
등은 해역에 널리 전하고 탑은 돌로서 높게 솟았네.
수천 겁의 세월이 흘러도 송문에 길이 빛나리라.
광계(光啓) 3년 (887년) 7월 모일에 세웠다.
승(僧) 형영(夐榮)이 글자를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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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문
출처: 김태식, 이익주,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992.[1]
신라국 고 지리산 쌍계사 교시 진감선사 비명과 서
전(前) 중국 도통순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이며 자금어대를 하사받은 신 최치원 왕명을 받들어 글을 짓고 아울러 전자(篆字)의 제액을 씀.
무릇 도(道)란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으며 사람에게는 나라의 다름이 없다. 이런 까닭에 우리 동방인들이 불교를 배우고 유교를 배우는 것은 필연이다. 서쪽으로 대양을 건너 통역을 거듭하여 학문을 좇아 목숨은 통나무 배에 의지하고 마음은 보배의 고장으로 향하였다. 비어서 갔다가 올차서 돌아오며 어려운 일을 먼저하고 얻는 것을 뒤로 하였으니, 또한 옥을 캐는 자가 곤륜산의 험준함을 꺼리지 않고 진주를 찾는 자가 검은 용이 사는 못의 깊음을 피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드디어 지혜의 횃불을 얻으니 빛이 오승(五乘)을 두루 비추었고 유익한 말[가효]을 얻으니 미각은 육경(六經)에서 배불렀으며, 다투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선(善)에 들게 하고 능히 한 나라로 하여금 인(仁)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러나 학자들이 간혹 이르기를 “인도의 석가와 궐리의 공자가 교를 설함에 있어 흐름을 나누고 체제를 달리하여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박는 것과 같아서 서로 모순되어 한 귀퉁이에만 집착한다” 하였다. 시험삼아 논하건대 시(詩)를 해설하는 사람은 글자로써 말을 해쳐서는 안되고 말로써 뜻을 해쳐서도 안된다. 예기에 이른바 “말이 어찌 한 갈래뿐이겠는가. 무릇 제각기 타당한 바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산(廬山)의 혜원(慧遠)이 논(論)을 지어 이르기를 “여래가 주공, 공자와 드러낸 이치는 비록 다르지만 돌아가는 바는 한 길이다. 극치를 체득함에 있어 아울러 응하지 못하는 것은 만물을 능히 함께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심약(沈約)은 말하기를 “공자는 그 실마리를 일으켰고 석가는 그 이치를 밝혔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 대요를 안다고 이를 만한 사람이라야 비로소 더불어 지선(至善)의 도(道)를 말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심법(心法)을 말씀하신 데 이르면 현묘하고 또 현묘하여 이름하려 해도 이름할 수 없고 설명하려 해도 설명할 수 없다. 비록 달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달을 가리킨 손가락을 잊기란 끝내 바람을 잡아매는 것 같고 그림자처럼 가서 붙잡기 어렵다. 그러나 먼 데 이르는 것도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비유를 취한들 무엇이 해로우랴. 공자가 문하 제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 말하지 않으련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고 하였으니 저 유마거사가 침묵으로 문수보살을 대한 것이나 부처님이 가섭존자에게 은밀히 전한 것은 혀를 움직이지도 않고 능히 마음을 전하는 데 들어맞은 것이다. ‘하늘이 말하지 않음’을 말하였으니 이를 버리고 어디 가서 얻을 것인가. 멀리서 현묘한 도를 전해와서 우리 나라에 널리 빛내었으니 어찌 다른 사람이랴. 선사(禪師)가 바로 그 사람이다.
선사의 법휘는 혜소(慧昭)이며 속성은 최씨(崔氏)이다. 그 선조는 한족(漢族)으로 산동(山東)의 고관이었다. 수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정벌하다가 고구려에서 많이 죽자 항복하여 변방(우리나라)의 백성이 되려는 자가 있었는데 성스러운 당나라가 4군을 차지함에 이르러 지금 전주의 금마사람이 되었다. 그 아버지는 창원(昌原)인데 재가자임에도 출가승의 수행이 있었다. 어머니 고씨(顧氏)가 일찍이 낮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서역 승려가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아미(阿(방언으로 어머니를 이른다)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 유리 항아리를 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선사를 임신하였다.
태어나면서도 울지 아니하여 곧 일찍부터 소리가 작고 말이 없어 빼어난 인물이 될 싹을 보였다. 이를 갈 나이에 아이들과 놀 때는 반드시 나뭇잎을 사르어 향이라 하고 꽃을 따서 공양으로 하였으며 때로는 서쪽을 향하여 무릎 꿇고 앉아 해가 기울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듯 착한 근본이 진실로 백 천겁 전에 심어진 것임을 알지니 발돋움하여도 따라갈 일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부모의 은혜를 갚는데 뜻이 간절하여 잠시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집에 한 말의 여유 곡식도 없고 또 한 자의 땅도 없었으니 천시(天時)를 이용하는 것으로 음식을 봉양함에 있어 오직 힘 닿는 대로 노력하였다. 이에 소규모의 생선 장사를 벌여 봉양하는 좋은 음식을 넉넉하게 하는 업으로 삼았다. 손으로 그물을 맺는데 힘쓰지 않았으나 마음은 이미 통발을 잊은 데 부합하였다. 능히 부모에게 콩죽을 드려도 그 마음을 기쁘게 하기에 넉넉하였고 진실로 양친(養親)의 노래[采蘭之詠]에 들어 맞았다. 부모의 상을 당하자 흙을 져다 무덤을 만들고는 이내 “길러주신 은혜는 애오라지 힘으로써 보답하였으나 심오한 道에 둔 뜻은 어찌 마음으로써 구하지 않으랴. 내 어찌 덩굴에 매달린 조롱박처럼 한창 나이에 지나온 자취에만 머무를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정원 20년(804), 세공사(歲貢使)에게 나아가 뱃사공이 되기를 청하여 배를 얻어 타고 서쪽으로 건너가게 되었는데 속된 일에도 재능이 많아 험한 풍파를 평지와 같이 여기고는 자비의 배를 노저어 고난의 바다를 건넜다. 중국에 도달하자 나라의 사신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각기 뜻이 있으니 여기서 작별을 고할까 합니다” 하였다. 드디어 길을 떠나 창주(滄州)에 이르러 신감대사(神鑑大師)를 뵈었다. 오체투지하여 바야흐로 절을 마치기도 전에 대사가 기꺼워하면서 “슬프게 이별한 지가 오래지 않은데 기쁘게 서로 다시 만나는구나!” 하였다. 급히 머리를 깎고 잿빛 옷을 입도록 하여 갑자기 인계(印契)를 받게 하니 마치 마른 쑥에 불을 대는 듯 물이 낮은 들판으로 흐르는 듯 하였다. 문도들이 서로 이르기를 “동방의 성인을 여기서 다시 뵙는구나!”라고 하였다. 선사는 얼굴 빛이 검어서 모두들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지목하여 흑두타(黑頭陀)라고 했다. 이는 곧 현묘함을 탐구하고 말 없는데 처함이 참으로 칠도인(漆道人)의 후신이었으니 어찌 저 읍중의 얼굴 검은 자한(子罕)이 백성의 마음을 위로해 준 것에 비할 뿐이랴. 길이 붉은 수염의 불타야사(佛陀耶舍) 및 푸른 눈의 달마(達磨)와 함께 색상(色相)으로써 나타내 보인 것이다.
원화 5년(810년) 숭산 소림사의 유리단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 어머니의 옛 꿈과 완연히 부합하였다. 이미 계율에 밝았으매 다시 학림(學林)으로 돌아왔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니 홍색이 꼭두서니보다 더 붉고 청색이 남초보다 더 푸른 것과 같았다. 비록 마음은 고요한 물처럼 맑았지만 자취는 조각 구름같이 떠돌아 다녔다. 그 때 마침 우리나라 스님 도의(道義)가 먼저 중국에 와서 도를 구하였는데 우연히 서로 만나 바라는 바가 일치하였으니 서남쪽에서 벗을 얻은 것이다. 사방으로 멀리 찾아다니며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증득하였다. 도의가 먼저 고국으로 돌아가자 선사는 곧바로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갔는데 높은 봉우리에 올라 소나무 열매를 따먹고 지관(止觀)하며 적적하게 지낸 것이 삼년이요, 뒤에 자각(紫閣)으로 나와 사방으로 통하는 큰 길에서 짚신을 삼아가며 널리 보시하며 바쁘게 다닌 것이 또 삼년이었다. 이에 고행도 이미 닦았고 타국도 다 유람하였으나 비록 공(空)을 관(觀)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근본을 잊을 수 있겠는가.
이에 태화 4년(830년) 귀국하여 대각(大覺)의 상승(上乘) 도리로 우리 나라 어진 강토를 비추었다. 흥덕대왕이 칙서를 급히 보내고 맞아 위로하기를 “도의(道義) 선사가 지난 번에 돌아오더니 상인(上人)이 잇달아 이르러 두 보살이 되었도다. 옛날에 흑의를 입은 호걸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누더기를 걸친 영웅을 보겠도다. 하늘까지 가득한 자비의 위력에 온 나라가 기쁘게 의지하리니 과인은 장차 동방 계림의 땅을 길상(吉祥)의 집으로 만들리라” 하였다.
처음에 상주(尙州) 노악산(露岳山) 장백사(長栢寺)에 석장을 멈추었다. 의원의 문전에 병자가 많듯이 찾아오는 이가 구름같아 방장(方丈)은 비록 넓으나 물정이 자연 군색하였다. 드디어 걸어서 강주의 지리산에 이르니 몇 마리의 호랑이가 포효하며 앞에서 인도하여 위험한 곳을 피해 평탄한 길로 가게 하니 산을 오르는 신과 다르지 않았고 따라가는 사람도 두려워하는 바가 없이 마치 집에서 기르는 개처럼 여겼다. 곧 선무외(善無畏) 삼장이 영산에서 여름 결제를 할 때 맹수가 길을 인도하여 깊은 산속의 굴에 들어가 모니(牟尼)의 입상을 본 것과 완연히 같은 사적이며, 저 축담유(竺曇猷)가 조는 범의 머리를 두드려 경(經)을 듣게 한 것 또한 그것 만이 승사(僧史)에 미담이 될 수 없다. 이리하여 화개곡의 고(故) 삼법화상(三法和尙)이 세운 절의 남은 터에 당우(堂宇)를 꾸려내니 엄연히 절의 모습을 갖추었다.
개성 3년(838)에 이르러 민애대왕이 갑자기 보위에 올라 불교에 깊이 의탁하고자 국서를 내리고 재비(齋費)를 보내 특별히 친견하기를 청하였는데, 선사가 말하기를 “부지런히 선정(善政)을 닦는 데 있을 뿐, 어찌 만나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사자(使者)가 왕에게 복명하니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워 하면서도 깨달은 바가 있었다. 선사가 색과 공을 다 초월하고 선정과 지혜를 함께 원만히 갖추었다 하여 사자를 보내 호를 내려 혜소(慧昭)라 하였는데 소(昭)자는 성조(聖祖)의 묘휘(廟諱)를 피하여 바꾼 것이다. 그리고 대황룡사에 적을 올리고 서울로 나오도록 부르시어 사자가 왕래하는 것이 말고삐가 길에서 엉길 정도였으나 큰 산처럼 꿋꿋하게 그 뜻을 바꾸지 않았다. 옛날 승조(僧稠)가 후위(後魏)의 세 번 부름을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산에 있으면서 도를 행하여 크게 통하는데 어긋나지 않으려 합니다”라고 하였으니 깊은 곳에 살면서 고매함을 기르는 것이 시대는 다르나 뜻은 같다고 하겠다.
몇 해를 머물자 법익(法益)을 청하는 사람이 벼와 삼대처럼 줄지어 송곳을 꽂을 데도 없었다. 드디어 빼어난 경계를 두루 가리어 남령의 기슭을 얻으니 앞이 탁 트여 시원하고 거처하기에 으뜸이었다. 이에 선려(禪廬)를 지으니 뒤로는 안개 낀 봉우리에 의지하고 앞으로는 구름이 비치는 골짜기 물을 내려다 보았다. 시야를 맑게 하는 것은 강 건너 먼 산이요, 귓부리를 시원하게 하는 것은 돌에서 솟구쳐 흐르는 여울물 소리였다. 더욱이 봄 시냇가의 꽃, 여름 길가의 소나무, 가을 골짜기의 달, 겨울 산마루의 흰 눈처럼 철마다 모습을 달리하고 만상이 빛을 바꾸니 온갖 소리가 어울려 울리고 수많은 바위들이 다투어 빼어났다. 일찍이 중국에 다녀온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머물게 되면 모두 깜짝 놀라 살펴보며 이르기를, “혜원공(慧遠公)의 동림사(東林寺)가 바다 건너로 옮겨 왔도다. 연화장 세계는 범부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지만 항아리 속에 별천지가 있다 한 것은 정말이구나” 하였다. 대나무통을 가로질러 시냇물을 끌어다가 축대를 돌아가며 사방으로 물을 대고는 비로소 옥천(玉泉)이라는 이름으로 현판을 하였다. 손꼽아 법통을 헤아려 보니 선사는 곧 조계의 현손이었다. 이에 육조영당(六祖靈堂)을 세우고 채색 단청하여 널리 중생을 이끌고 가르치는데 이바지하였으니 경(經)에 이른바 “중생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화려하게 빛깔을 섞어 여러 상(像)을 그린 것”이었다.
대중 4년(850) 정월 9일 새벽 문인에게 고하기를 “만법이 다 공(空)이니 나도 장차 갈 것이다. 일심(一心)을 근본으로 삼아 너희들은 힘써 노력하라. 탑을 세워 형해를 갈무리하지 말고 명(銘)으로 자취를 기록하지도 말라” 하였다. 말을 마치고는 앉아서 입적하니 금생의 나이 77세요, 법랍이 41년이었다. 이 때 하늘에는 실구름도 없더니 바람과 우뢰가 홀연히 일어나고 호랑이와 이리가 울부짖으며 삼나무 향나무가 시들어졌다. 얼마 뒤 자주색 구름이 하늘을 가리우더니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가 나서 장례에 모인 사람이 듣지 못한 이가 없었다. 곧 『양사(梁史)』에 “시중 저상(褚翔)이 일찌기 사문을 청하여 앓고 계신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다가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를 들었다”고 실려 있으니 성스러운 감응이 보이지 않게 나타난 것이 어찌 꾸밈이겠는가. 무릇 도에 뜻을 둔 사람은 기별을 듣고 서로 조상하고 정을 잊지 못한 이들은 슬픔을 머금고 우니 하늘과 사람이 비통하게 애도함을 단연코 알 수 있었다. 널과 무덤길을 미리 갖추어 준비하게 하였으니 제자 법량(法諒) 등이 울부짖으며 시신을 모시고는 날을 넘기지 않고 동쪽 봉우리의 언덕에 장사지내어 유명을 따랐다.
선사의 성품은 질박함을 흐트리지 않았고 말에 꾸밈이 없었으며, 입는 것은 헌 솜이나 삼베도 따뜻하게 여겼고 먹는 것은 겨나 싸라기도 달게 여겼다. 도토리와 콩을 섞은 범벅에 나물 반찬도 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귀인들이 가끔 찾아와도 일찍이 다른 반찬이 없었다. 문인들이 거친 음식이라 하여 올리기를 어려워하며 말하기를 “마음이 있어 여기에 왔을 것이니 비록 거친 밥인들 무엇이 해로우랴” 하였으며, 지위가 높은 이나 낮은 이, 그리고 늙은이와 젊은이를 대접함이 한결같았다. 매양 왕의 사자가 역마를 타고 와서 명을 전하여 멀리서 법력(法力)을 구하면 이르기를, “무릇 왕토(王土)에 살면서 불일(佛日)을 머리에 인 사람으로서 누구인들 마음을 기울이고 생각을 다하여 임금을 위하여 복을 빌지 않겠습니까? 또한 하필 멀리 마른 나무 썩은 등걸같은 저에게 윤언(綸言)을 더럽히려 하십니까? 왕명을 전하러 온 사람과 말이 허기져도 먹지 못하고 목이 말라도 마시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하였다. 어쩌다 호향(胡香)을 선물하는 이가 있으면 질그릇에 잿불을 담아 환을 짓지 않고 사르면서 말하기를, “나는 냄새가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마음만 경건히 할 뿐이다”가고 하였고, 또 한다(漢茶)를 공양하는 사람이 있으면 돌솥에 섶으로 불을 지피고 가루로 만들지 않고 끓이면서 말하기를 “나는 맛이 어떤지 알지 못하겠다. 뱃속을 적실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참된 것을 지키고 속된 것을 꺼림이 모두 이러한 것들이었다.
평소 범패(梵唄)를 잘하여 그 목소리가 금옥같았다. 구슬픈 곡조에 날리는 소리는 상쾌하면서도 슬프고 우아하여 능히 천상계의 신불(神佛)을 환희하게 하였다. 길이 먼 데까지 흘러 전해지니 배우려는 사람이 당(堂)에 가득찼는데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산(魚山)의 묘음을 익히려는 사람들이 다투어 콧소리를 내었던 일처럼 지금 우리나라에서 옥천(玉泉)의 여향(餘響)을 본뜨려 하니 어찌 소리로써 제도하는 교화가 아니겠는가.
선사가 열반에 든 것은 문성대왕 때였는데 임금이 마음으로 슬퍼하여 청정한 시호를 내리려다 선사가 남긴 훈계를 듣고서는 부끄러워하여 그만두었다. 3기(紀)를 지난 뒤 문인들이 세상 일의 변천이 심한 것을 염려하여 법을 사모하는 제자에게 영원토록 썪지 않고 전할 방법을 구하였더니 내공봉 일길간인 양진방(楊晉方)과 숭문대의 정순일(鄭詢一)이 굳게 마음을 합쳐 돌에 새길 것을 청하였다. 헌강대왕께서 지극한 덕화를 넓히고 불교를 흠앙하시어 시호를 진감선사(眞鑑禪師), 탑명을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 추증하고 이에 전각(篆刻)을 허락하여 길이 영예를 다하도록 하였다.
거룩하도다! 해가 양곡(暘谷)에서 솟아 어두운 데까지 비추지 않음이 없고, 바닷가에 향나무를 심어 오래될수록 향기가 가득하다. 어떤 사람은 “선사께서 명(銘)도 짓지 말고 탑도 세우지 말라는 훈계를 내리셨거늘 후대로 내려와 문도들에 이르러 확고하게 스승의 뜻을 받들지 못했으니 ‘그대들이 스스로 구했던가, 아니면 임금께서 주셨던가’ 바로 흰 구슬의 티라고 할 만하다”고 하였다. 아! 그르다고 하는 사람 또한 그르다. 명예를 가까이 하지 않아도 이름이 드러난 것은 선정을 닦은 법력의 나머지 보응이니 저 재처럼 사라지고 번개같이 끊어지기 보다는 할만한 일을 할 수 있을 때 해서 명성이 대천세계(大千世界)에 떨치도록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러나 귀부가 비석을 이기도 전에 임금이 갑자기 승하하고 금상이 이어 즉위하시니 질나발과 저가 서로 화답하듯 뜻이 부촉에 잘 맞아 좋은 것은 그대로 따르시었다. 이웃 산의 절도 옥천이라고 불렀는데 이름이 서로 같아 여러 사람의 혼동을 일으켰다. 장차 같은 이름을 버리고 다르게 하려면 마땅히 옛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지어야 했는데 절이 자리잡은 곳을 살펴보게 하니 절 문이 두 줄기 시냇물이 마주하는데 있었으므로 이에 제호를 하사하여 쌍계(雙溪)라고 하였다.
신에게 명을 내려 말씀하시기를 “선사는 수행으로 이름이 드러났고 그대는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니 마땅히 명(銘)을 짓도록 하라”고 하시어 치원(致遠)이 두 손을 마주대고 절하면서 “예! 예!”하고 대답하였다. 물러나와 생각하니 지난번 중국에서 이름을 얻었고 장구(章句) 속에서 살지고 기름진 것을 맛보았으나 아직 성인의 도에 흠뻑 취하지 못하여 번드르르하게 꾸민 것에 깊이 감복했던 것이 오직 부끄러울 뿐이다. 하물며 법(法)은 문자(文字)를 떠난지라 말을 붙일 데가 없으니 혹 굳이 그를 말한다면 수레를 북쪽으로 향하면서 남쪽의 영(郢)땅에 가려는 것이 되리라. 다만 임금의 보살핌과 문인(門人)들의 큰 바램으로 문자(文字)가 아니면 많은 사람의 눈에 밝게 보여줄 수 없기에 드디어 감히 몸은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맡고 힘은 오능(五能)을 본받으려 하니 비록 돌에 의탁한다 해도 부끄럽고 두렵다. 그러나 ‘도(道)란 억지로 이름붙인 것’이니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재주가 없다 하여 필봉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신이 어찌 감히 할 것인가. 거듭 앞의 뜻을 말하고 삼가 명(銘)을 지어 이른다.
입을 다물고 선정(禪定)을 닦아 마음으로 부처에 귀의했네.
근기가 익은 보살이라 그것을 넓힘이 다른 것이 아니었네.
용감하게 범의 굴을 찾고 멀리 험한 파도를 넘어,
가서는 비인(秘印)을 전해받고 돌아와 신라를 교화했네.
그윽한 곳을 찾고 좋은 데를 가려 바위 비탈에 절을 지었네.
물에 비친 달이 심회를 맑게 하고 구름과 시냇물에 흥을 기울였네.
산은 성(性)과 더불어 고요하고 골짜기는 범패와 더불어 응하였네.
닿는 대상마다 걸림이 없으니 간교한 마음을 끊음이 이것으로 증명되도다.
도는 다섯 임금의 찬양을 받았고 위엄은 뭇 요사함을 꺾었도다.
말없이 자비의 그늘을 드리우고 분명히 아름다운 부름을 거절했네.
바닷물이야 저대로 떠돌더라도 산이야 어찌 흔들리랴.
생각도 없고 걱정도 없으며 깎음도 없고 새김도 없었네.
음식은 맛을 겸하지 아니하였고 옷은 갖추어 입지 않으셨네.
바람과 비가 그믐밤 같아도 처음과 끝이 한결같았네.
지혜의 가지가 바야흐로 뻗어나는데 법의 기둥이 갑자기 무너지니,
깊은 골짜기가 처량하고 뻗어나는 등라가 초췌하구나!
사람은 갔어도 도(道)는 남았으니 끝내 잊지 못하리라.
상사(上士)가 소원을 말하니 임금이 은혜를 베푸셨네.
법등이 바다 건너로 전하여 탑이 산 속에 우뚝하도다.
천의(天衣)가 스쳐 반석이 다 닳도록 길이 송문(松門)에 빛나리라.
광계(光啓) 3년 7월 어느 날 세우고 중 환영(奐榮)이 글자를 새김.
■판독문
출처: 김태식, 이익주,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992.[2]
有唐新羅國故知異山雙谿寺敎諡眞鑑禪師碑銘 幷序」
前西國都統巡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漁袋臣崔致遠奉敎撰幷書篆額」
夫道不遠人人無異國是以東人之子爲釋爲儒必也西浮大洋重譯從學命寄刳木必懸寶洲 虛往實歸先難後獲亦猶采玉者不憚崑丘之峻探珠者不辭驪壑之深遂得慧炬則」
光融五乘嘉肴則味飫六籍竟竟使千門入善能令一國興仁而學者或謂身毒與闕里之說敎也分流異體圜鑿方枘互相矛楯守滯一隅嘗試論之說詩者不以文害辭不以辭害志」
禮所謂言豈一端而已夫各有所當故廬峰慧遠著論謂如來之與周孔發致雖殊所歸一揆體極不兼應者物不能兼受故也沈約有云孔發其端釋窮其致眞可謂識其大者始可」
與言至道矣至若佛語心法玄之又玄名不可名說無可說雖云得月指或坐忘終類係風影難行捕然陟遐自迩取譬何傷且尼父謂門弟子曰予慾無言天何言哉則彼淨名之黙」
對文殊善逝之密傳迦葉不勞鼓舌能叶印心言天不言捨此奚適而得遠傳妙道廣耀吾鄕豈異人乎禪師是也禪師法諱慧昭俗姓崔氏其先漢族冠盖山東隋師征遼多沒驪貊」 有降志而爲遐甿者爰及聖唐囊括四郡今爲全州金馬人也父曰昌元在家有出家之行母顧氏嘗晝假寐夢一梵僧謂之曰吾願爲何阿(方言謂母)之子因以瑠璃甖爲寄未幾娠」
禪師焉生而不啼迺夙挺銷聲息言之勝牙也旣齔從戱必火賁葉爲香采花爲供或西嚮危坐移晷未嘗動容是知善本固百千劫前所栽植非可跂而及者自丱弁志切反哺跬步」
不忘而家無斗儲又無尺壤可盜天時者口腹之養惟力是視乃裨販娵隅爲贍滑甘之業手非勞於結網心已契於忘筌能豊啜菽之資允叶采蘭之詠曁種棘負土成墳迺曰鞠」
育之恩聊將力報希微之旨盍以心求吾豈匏瓜壯齡滯跡遂於貞元卄年詣歲貢使求爲榜人寓足西泛多能鄙事視險如夷揮楫慈航超截苦海及達彼岸告國使曰人各有志請」
從此辭遂行至滄州謁神鑑大師投體方半大師怡然曰戱別匪遙喜再相遇遽令削染頓受印契若火沾燥艾水注卑邍然徒中相謂曰東方聖人於此復見禪師形貌黯然衆不名」
而目爲黑頭陀斯則探玄處黙眞爲漆道人後身豈比夫邑中之黔能慰衆心而已哉永可與赤頿靑眼以色相顯示矣元和五年受具於崇山少林寺瑠璃壇則聖善前夢宛若合符」
旣瑩戒珠復歸橫海聞一知十茜絳藍靑雖止水澄心而斷雲浪跡粵有鄕僧道義先訪道於華夏邂逅適願西南得朋四遠參尋證佛知見義公前歸故國禪師卽入終南登萬仞之」
峯餌松實而止觀寂寂者三年後出紫閣當四達之道織芒屩而廣施憧憧者又三年於是苦行旣已修他方亦已遊雖曰觀空豈能忘本乃於大和四年來歸大覺上乘照我仁域」
興德大王飛鳳筆迎勞曰道義禪師曏已歸止上人繼至爲二菩薩昔聞黑衣之傑今見縷褐之英彌天慈威擧國欣賴寡人行當以東雞林之境成吉祥之宅也始憩錫於尙州露岳」
長柏寺毉門多病來者如雲方丈雖寬物情自隘遂步至康州知異山有數於菟哮吼前導避危從坦不殊兪騎從者無所怖畏豢犬如也則與善无畏三藏結夏靈山猛獸前路深入」
山穴見牟尼立像宛同事跡彼竺曇猷之扣睡虎頭令聽經亦未傳媺於僧史也因於花開谷故三法和尙蘭若遺基纂修堂宇儼若化成洎開城三年」
愍哀大王驟登寶位深託玄慈降璽書餽齊費而別求見願禪師曰在勤修善政何用願爲使復于王聞之愧悟以禪師色空雙泯定惠俱圓降使賜號爲慧昭昭字避」
聖祖廟諱易之也仍貫籍于大皇龍寺徵詣京邑星使往復者交轡于路而岳立不移其志昔僧稠拒元魏之三召云在山行道不爽大通棲幽養高異代同趣居數年請益者稻麻成」列殆無錐地遂歷銓奇境得南嶺之麓爽塏居最經始禪廬却倚霞岑俯壓雲澗淸眼界者隔江遠岳爽耳根者迸石飛湍至如春谿化夏徑松秋壑月冬嶠雪四時變態萬象交光百」
籟和唫千巖竟竟秀嘗遊西土者至止咸愕視謂遠公東林移歸海表蓮花世界非凡想可擬壺中別有天地則信也架竹引流環階四注始用玉泉爲牓屈指法胤則禪師乃曹溪之玄」
孫是用建六祖影堂彩飾粉墉廣資導誘經所謂爲悅衆生故綺錯繪衆像者也大中四年正月九日詰旦告門人曰萬法皆空吾將行矣一心爲本汝等勉之無以塔藏形無以銘紀」
跡言竟坐滅報年七十七積夏四十一于時天無纖雲風雷欻起虎狼號咽杉栝變衰俄而紫雲翳空空中有彈指聲會葬者無不入耳則梁史載褚侍中翔嘗請沙門爲母疾祈福聞」
空中彈指聖感冥應豈誣也哉凡志於道者寄聲相弔未亡情者銜悲以泣天人痛悼斷可知矣靈函幽隧預使備具弟子法諒等號奉色身不踰日而窆于東峯之冢遵遺命也禪師」
性不散樸言不由機服煖縕黂食甘糠麧芧菽雜糅蔬佐無二貴達時至曾不異饌門人以墋腹進難則曰有心至此雖糲何害尊卑耋穉接之如一每有王人乘馹傳命遙祈」
法力則曰凡居王土而戴佛日者孰不傾心護念爲君貯福亦何必遠汚綸言於枯木朽株傳乘之飢不得齕渴不得飮吁可念也或有以胡香爲贈者則以瓦載煻灰」
不爲丸而焫之曰吾不識是何臭虔心而已復有以漢茗爲供者則以薪爨石釜不爲屑而煮之曰吾不識是何味濡腹而已守眞忤俗皆此類也雅善梵唄金玉其音側調飛聲爽快」
哀婉能使諸天歡喜永於遠地流傳學者滿堂誨之不倦至今東國習魚山之妙者競如掩鼻效玉泉餘響豈非以聲聞度之之化乎禪師泥洹當」
文聖大王之朝上惻僊襟將寵淨諡及聞遺戒愧而寢之越三紀門人以陵谷爲慮扣不朽之緣於慕法弟子內供奉一吉干楊晉方崇文臺鄭詢一斷金爲心勒石是請」
獻康大王恢弘至化欽仰眞宗追諡眞鑑禪師大空靈塔仍許篆刻以永終譽懿乎日出暘谷無幽不燭海岸植香久而弥芳或曰禪師垂不銘不塔之戒而降及西河之徒不能確奉」
先志求之歟抑與之歟適足爲白珪之玷嘻非之者亦非也不近名而名彰蓋定力之餘報與其灰滅電絶曷若爲可爲於可爲之時使聲震大千之界而龜未戴石龍遽昇天」
今上繼興塤篪相應義諧付囑善者從之以隣岳招提有玉泉之號爲名所累衆耳致惑將俾弃同卽異則宜捨舊從新使目示其寺之所枕倚則以門臨複澗爲對乃錫題爲雙溪焉申」
命下臣曰師以行顯汝以文進宜爲銘致遠拜手曰唯唯退而思之頃捕名中州嚼腴咀雋于章句間未能盡醉衢罇唯愧深跧泥甃況法離文字無地措言苟或言之北轅適郢第以」
國主之外護門人之大願非文字不能昭昭乎群目遂敢身從兩役力效五能雖石或憑焉可慙可懼而道强名也何是何非掘笔藏鋒則臣豈敢重宣前義謹札銘云」
杜口禪那歸心佛陀根熟菩薩弘之靡它猛探虎窟遠泛鯨波去傳秘印來化斯羅尋幽選勝卜築巖磴水月澄懷雲泉寄興山與性寂谷與梵應觸境無硋息機是證道贊五朝威摧」
衆妖黙垂慈蔭顯拒嘉招海自飃蕩山何動搖無思無慮匪斲匪雕食不兼味服不必備風雨如晦始終一致慧柯方秀法梀俄墜洞壑凄凉煙蘿憔悴人亡道存終不可諼上士陳願」
大君流恩燈傳海裔塔聳雲根天衣拂石永耀松門」
光啓三年七月日建 僧奐榮 刻字」
첫댓글 당해동고진감선사비
http://www.g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7047
금당 이야기는 비문에 없다
불사리 이야기도~
1917년, 숭양산인, <지리산록(智異山錄)>
절 동쪽은 비전(碑殿)으로 고운이 짓고 글씨까지 쓴 진감의 비가 있으니 당(唐) 희종 광계3년(887)이다.비 앞에는 팔영루가 있고 관포 어득강(1470-1550)의 팔영루 시가 현판에 걸려 있고
비를 모셔둔 비전이 있었다고함
1616년, <성여신>방장산선유일기
비전(碑殿) 문 밖에는 돌로 된 비석이 있었는데, 곧 최고운이 짓고 쓴 것이다. 진감선사를 위하여 지은 것인데, 문장이 절묘하지만 간간이 난해한 곳이 있었다. 줄줄이 이어진 빼어난 글씨는 글자 글자마다 정신이 깃들여 있고 기력이 있어서 어루만지며 아낄 만하였다.
비전(碑殿) 문 밖에는 돌로 된 비석이 있었는데, 곧 최고운이 짓고 쓴 것이다.{碑殿門外 有石碑 乃崔孤雲所撰所書者也] 원문 그대로 국역되었네요.
"세워진지 천년 이상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비석과 지붕돌의 일부가 깨지고 손상된 부분이 있긴 하지만 현대까지 거의 온전하게 전해졌으며 비석에 적힌 비문도 역시 잘 남아있는 편이다"
"현재 남아있는 비문에는 위 이미지에서 볼 수 있듯 비석의 좌측 부분이 훼손되어 있는데다가 여기에 건립연대를 알 수 있는 부분이 적혀 있었어서 현재로썬 직접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1725년(조선 영조 1년)에 만든 목판에 비문의 내용을 옮겨 적어놨는데, 여기에 비문이 훼손 되기 전의 내용이 남아 있어 진감선사탑비의 건립연대를 알 수 있었다'
https://naver.me/IDouahPt
https://naver.me/FXKTLAjn
또한 혜소는 불교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사회의 여러 계급에까지 널리 보급하고 조직화한 승려이기도 하다.
이후 이 범패는 수행의 한 방법으로 선사들이 많이 사용하였으며, 신라 말기 선종禪宗이 염불사상을 수용한 것도 범패와 큰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평소 진종사상眞宗思想을 사모하였던 범패를 수행의 방편으로 이용한 것이었으나, 후세인들이 오히려 선보다는 범패 쪽으로 힘을 기울여 속화俗化된 일면도 없지 않다.
그는 또 중국으로부터 차나무를 들여와 지리산 일대에 재배하였으며, 의술에도 깊혜소의 법을 이어받은 도헌道憲은 문경에 봉암사鳳巖寺를 창건하고 희양산파曦陽山派를 개창하였다.
최치원(857~?) 868년 당나라 유학 길에 올라 885년에 귀국을 한다.
진감선사가 입적하고 36년 뒤인 887년에 진감선사대공탑비의 비문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