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로 제목을 붙인 『장자』 번역서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변무」騈拇에서 따온 것입니다. 먼저 예시문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다고 하더라도 늘여주면 우환이 되고, 학의 다리가 비록 길다고 하더라도 자르면 아픔이 된다. 그러므로 본래 긴 것은 잘라서는 안 되며 본래 짧은 것은 늘여서도 안 된다. 그런다고 해서 우환이 없어질 까닭이 없다. 생각건대 인의仁義가 사람의 본 성일 리 있겠는가! 저 인仁을 갖춘 자들이 얼마나 근심이 많겠는가.
길다고 그것을 여분으로 여기지 않고 짧다고 그것을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 이것이 자연이며 도의 세계입니다. 엄지발가락과 둘째발가락이 붙은 것을 가르면 울고, 육손을 물어뜯어 자르면 소리치는 것(騈於拇者 決之則泣 枝於手者 ?之則啼)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장자가 주장하는 것은 인의仁義는 사람의 천성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천天이 무엇이며 인人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장자는 간단명료하게 답하고 있습니다. 하백河伯의 질문과 북해약北海若의 대답 형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何謂天 何謂人 北海若曰 牛馬四足 是謂天 落馬首 穿牛鼻 是謂人
―「秋水」
소와 말의 발이 네 개 있는 것 이것이 천天이요, 말머리에 고삐를 씌우고 소의 코를 뚫는 것 이것이 인人이다.
원문은 소개하지 않습니다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인위人爲로써 자연自然을 멸하지 말며, 고의故意로써 천성天性을 멸하지 말며, 명리名利로써 천성의 덕德을 잃지 말라. 이를 삼가 지켜 잃지 않는 것을 일러 천진天眞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한다.”
장자의 천과 인이 이와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예시문에서 여러분이 느낄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장자』는 수많은 이야기를 어떠한 형식에도 구애받음이 없이 그야말로 거리낌 없이 풀어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자유로운 서술 형식과 전개 방식입니다. 이러한 형식은 장자 사상과 가장 잘 조화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요와 자유와 자연을 본령으로 하는 장자의 사상을 담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형식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장자』는 대단히 높은 문학적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문장에서 그 문학성을 주목해보기 바랍니다.
노魯나라 교외에서 갈매기를 잡아 묘당廟堂에 모시고 구소九푑의 음악과 태뢰太牢의 요리로 대 접했더니 3일 만에 죽었다. 백락伯樂이 말을 잘 다루고, 도공陶工이 점토를 잘 다루고, 목수가 나무를 잘 다룬다고 한다. 말을 불로 지지고, 말굽을 깎고, 낙인을 찍고, 고삐로 조이고, 나란히 세워 달리게 하고, 마구간에 묶어두니 열에 둘 셋이 죽었다. 점토와 나무의 본성이 어찌 원圓과 곱자와 먹줄에 맞고자 하겠는가.
위 구절에서 우리는 인위적인 규제와 형식을 거부하는 장자 사상의 핵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인人을 거부하고 천天과 합일해야한다는 것이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자연을 피하려는 둔천遁天의 형벌이다. 천인합일의 도를 얻음으로써 천제天帝의 속박(縣解)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 못하다.”
아내가 죽었을 때 장자는 술독을 안고 노래했다는 일화가 수긍이 갑니다. 인간의 상대적인 행복은 본성의 자유로운 발휘로써 얻을 수 있지만 절대적인 행복은 사물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절대적 행복과 절대적 자유는 사물의 필연성을 이해하여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장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의 필연성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즉 도道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과의 합일合一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자의 이리화정以理化情입니다. 도의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합일하여 소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도를 깨닫는 것은 이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요. 정서적 공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지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이해가 못 된다고 해야 합니다. 정서적 공감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상태입니다. 장자의 이리화정은 가슴으로 느끼는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은'나’를 강조하면서도 그‘나’를 잃어버리고 살아간다. ~ 현대인은 이러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믿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철저하게 유위문화(有爲文化)를 믿는 까닭이다.
사람의 냄새는 몸에서 나는 놈보다 마음에서 풍기는 것들이 더 역해서 냄새가 맛으로 변하여 맵고 짜고 떫고 시어서 마음속이 마치 쉰 밥통같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장자》가 주는 재미나 놀라움이란 절대의 자유 그것이다. 아무것에도 걸림없이 그저 유장하게 사는 일들이 엮어져 있어서 자유로운 생활이 어떤 것인가를 만나보게 한다. 《장자》는 무엇이든 있는 것이면 스스로 있는 것으로 본다. 스스로 있는 것은 자연이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장자는 소의 네발이라고 일러준다. 그리고 문화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 장자는 소의 코뚜레라고 일러준다. 소의 네발은 소를 얼마나 편안하게 하는가, 하지만 소의 코뚜레는 소를 얼마나 힘들게 얽어매고 아프게 하는가.
자유와 자연은 같은 말이다. 자연은 스스로 그렇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 그대로인 것은 자유 그대로인 것이다. 완전한 자유를 인간은 왜 빼앗기고 마는가? 자기를 고집하기 때문이며 공적을 보다 많이 이룩하려는 욕망 때문이며, 자기의 이름을 높이려는 야심 때문이다.
자연이 보장하는 자유는 무한하다. 사물의 변화에 종속되지 않고 항상 사물과 함께 노닐 수 있기 때문이다. 온갖 것을 동일하게 보는 자연의 자유는 욕망을 넘어서 있는 자유(自遊)이다.
“ ~ 자연은 내게 모습을 주었네. 그리고 삶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였고 늙음으로 나를 편하게 하였고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해주네. 그러니 내 삶을 좋다고 함은 바로 내 죽음도 좋다함일세”
태어나면 태어나서 좋고 죽으면 또한 죽어서 좋다. 삶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와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이보다 더 쉽게 누가 이야기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자연을 따른다 함은 스스로를 잊는다 함이다. 스스로를 잊는다 함이란 스스로의 욕망을 버린다 함이다. 욕망을 버림으로써 자기 실현이 가능하며 그렇게 실현된 자기는 무심(無心)하며 무유(無爲)함을 말하게 된다.
하늘이나 땅은 자기를 모른다. 만일 하늘이나 땅이 자기를 고집한다면 만물은 모두 천지의 노예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천지는 만물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둘 뿐이다.
사람은 자신이 조롱을 당하면 화를 낸다. 남이 자기를 비아냥거려도 사람은 참지를 못한다. 사람들은 다 그만한 그릇의 마음새를 가지고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노릇을 하면서 대단한 명예가 멍들었다고 분을 참지 못하는 거다. 아웅대면서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대적하려고 한다.
자기의 감정에 주인이 된 사람은 자기를 잊을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자기의 감정에 노예가 되는 사람은 자기를 잊지 못하는 사람인게다. ~ 나를 잊어버렸다는 자기는 분명 자신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었음을 우리는 알게 될 수도 있다.
“당신은 사마귀를 아시지요. 그 놈은 제 팔뚝을 휘둘러 수레와 맞서 보려고 합니다. 제 힘으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몰라 그러는 게지요. 자기 재능의 훌륭함만을 자랑하려는 게지요. 경계하고 삼가야지요. 당신 자신의 훌륭함을 자랑하여 상대방에게 거역하면 위험합니다.”
삶이 변덕스러운 것 역시 사는 일이 서툰 탓이다. 마음잡고 마음에 따라 사는 사람은 삶의 길을 바꾸어 새 길을 다시 서툴게 걷지 않아도 된다. 삶이 막막할 때는 트이게 하면 되고, 삶이 고달프면 낙락하게 하면 된다.
이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 마음을 쓸 때는 남김없이 쓰고 마음을 거두어도 될 때는 마음을 풀어 주면 된다.
우리는 왜 성급하고 억척스럽고 악착스럽게 삶에 매달리는 것일까? 아마도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는 강박관념 탓이 아닌가 싶다. 산다는 일은 어느 날인가 갑자가 죽음으로 마감해야 한다는 공포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죽음과 삶을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만 본다면 삶의 욕망과 죽음의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살맛을 앗아가고 말 것이 아닌가. 죽음이란 것도 있고 삶이란 것도 있을 뿐이지 그것이 서로 대립하고 아우성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삶의 욕망이나 죽음의 공포가 우리를 메마르게 하지는 못할 것이 분명하다.
항상 불행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그 늪에서 빠져 나오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그 길은 어디에 있을까? 바로 자기가 없는 쪽으로 나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를 버리면 행복하게 된다.
내 몸 속의 간이 쓸개보다 더 중하다고 여길 것인가. 다 같이 중하다고 누구나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이 곧 마음을 밝게 하고 가볍게 한다. 살고 죽는 것을 잊어버리고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짓을 잊어버리면 한계가 없는 곳으로 뻗어나간다.
남에게 마음을 주는 일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속을 내보이거나 털어내야 하는 까닭이다. ~ 열 번을 잘해 주어도 한 번만 잘못하면 잘한 열 번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더라도 그 사랑을 잃는 경우가 있다. 삼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 아무리 목이 말라도 한 사발의 물이면 족하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한 그릇의 밥이면 족하다.
참새는 참새만큼 먹어야 하고 돼지는 돼지만큼 먹는 법이다. 먹는 것도 이처럼 알맞게 먹어야 하고 그 양을 넘어서면 뒤탈이 나는 법이다.
지금 세상은 형벌을 면하는 게 고작일 뿐, 행복은 깃털보다 가벼워도 담을 줄 모르고 불행은 땅보다 무거워도 피할 줄을 모른다. 그만두게 그만뒤~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마음을 가볍게 하는 것이다. 불행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다.
마음은 참으로 묘하다. 산천에 흐르는 물은 고여 있기만 하면 썩어 버리지만 마음은 흐리기만 하면 썩어 버린다. 마음이 살아서 숨을 쉬려면 고여 있어야 하고 마음이 상해서 썩어지려면 한사코 흘러야 한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소인(小人)은 정신없이 쏘다녀 마음을 잃어버리고 대인(大人)은 때때로 가만히 마음을 가누어 그 마음이 거울이 되게 하여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연습을 하는 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