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믿음과 사랑으로 사는 노아의 방주
창세 6,5-8; 7,1-5.10; 마르 8,14-21
연중 제6주간 화요일; 2019.2.19.; 이기우 신부
오늘 독서는 노아의 이야기입니다. 카인의 후손들이 죄를 저질러 세상에 악으로 가득차자 하느님께서 세상과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심판하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하지만 셋의 후손인 노아만은 하느님의 눈에 들었을 정도로 의로웠기 때문에 노아를 포함한 가족 8 사람과 동물의 암수컷들을 홍수 심판에서 구하시기로 하셔서 노아는 커다란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2세기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주교였던 치쁘리아누스는 잔혹했던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쓴 ‘주 기도문 해설’에서, “교회는 노아의 방주와 같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 교회 안에 들어와야 구원될 수 있다.”는 일종의 격문을 동시대인들에게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보증으로서 교회가 노아의 방주임을 내세울 수 있으려면 그 교회가 믿음의 공동체여야 한다는 필요조건이 있습니다. 그저 세례를 받고 교회 안에 들어와 있다고 해서 구원의 보증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겁니다. 오늘 복음이 이러한 이치에 적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몇 날 며칠 동안 듣던 군중이 안쓰러워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지만, 사실 이 기적 사건은 그 상황의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최후의 만찬에서 세우실 성체성사를 염두에 두신 분명한 예표적 행동이었습니다. 성체성사는 믿는 이들을 배불리 먹일 영적이고 보편적인 에너지 충전의 기회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마련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체성사에 참여하여 예수님의 살로 축성되고 변화된 성체를 받아 모시고 그로 인해 주어지는 힘을 가지고 세상에서 희생적 사랑을 십자가로 알고 살아가는, 부활의 삶이야말로 구원의 충분조건입니다.
제도로서의 교회는 인류 역사상 시간적으로 가장 오래되고 공간적으로 전 세계에 널리 퍼져있으며 내용적으로 보더라도 영적으로나 법적으로나 가장 체계적인 조직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일이야말로 교회의 선교나 사목 활동이 세상의 죄에 맞서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확장시킬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희생적 사랑을 실천하는 부활의 행동을 전개하지 못하면 결코 교회는 구원의 방주로 자처할 수 없습니다. 함량 미달인 제도 교회가 그저 교회 밖에 구원 없다는 식의 안하무인적 교만한 자세로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거나 감동과 매력을 주기는커녕 혐오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역사는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닙니다.
교회가 노아의 방주처럼 구원의 보증으로 자처할 수 있으려면 단지 형식적 믿음만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믿음이 구원이 필요조건이요 사랑이 구원의 충분조건이라면, 이 두 조건을 다 채우는 그리스도인들이 요한 바오로 2세가 말하는 신비가일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환시를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의미를 찾고 정의를 기본으로 추구하는 보람 안에서 살며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면서도 희생적 사랑을 추구하기를 멈추지 않는, 그리고 그런 삶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보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현대적인 신비가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약하고 깨달음이 아둔한 제자들에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고 야단치셨지만, 매일 같이 성체를 영하는 우리는, 적어도 주일 미사 때마다 성체를 영하는 신자들은 의미를 보면서 하느님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하고, 정의의 보람을 느끼면서 하느님을 듣는 귀를 가져야 하며, 희생적 사랑을 추구하면서 하느님을 보고 듣는 신비가가 되어야 합니다.
첫댓글 살아움직이는 개인 교회인 제가 믿음과 사랑을 실천하는 충분조건의 교인 내지 교회인가? 자문하면~~ 유구무언입니다.
그게 정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