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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버지의 깃발 ]
태평양 전쟁도 막바지에 접어든 1945년 2월19일, 미 해병대는 이오지마섬 해안에 상륙합니다. 화산섬 이오지마에 대한 공격은 일본 본토를 공격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엄청난 희생 끝에 2월23일 미 해병대는 섬 남쪽에 위치한 수리바치산을 점령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병사들은 수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꽂습니다.그 모습을 담은 한 장의 사진은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원한 상징처럼 남게 됩니다. 그러나 미 해병대가 수리바치산에 성조기를 꽂은 뒤에도, 이 전투는 약 한달 간 더 지속되었습니다. 섬에서 악귀같이 저항하던 일본군 대부분은 사망했으며, 미 해병대 역시 수천 명이 전사했습니다.
명장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이 이오지마 전투를 배경으로〈아버지의 깃발〉이라는 명작을 탄생시킵니다.영화 <아버지의 깃발〉은 제임스 브래들리와 론 파워즈가 이오지마 전투에 참가한 미군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쓴 동명의 책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제임스 브래들리는 영화에 등장하는 사진 속 주인공이자 위생병인 존 닥 브래들리의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깃발〉은 브래들리가 인터뷰를 진행하는 현재와 이오지마섬에서의 전투, 그리고 깃발을 꽂고 나서 미국 순회공연에 나선 세 병사들의 이야기, 이렇게 세 시점에서 번갈아 진행됩니다. 과거에 대한 현재의 기억이 영화의 중요한 골격이 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단순한 전쟁영화와는 차원을 달리 하고 있습니다.
이오지마 전투 이후, 깃발을 꽂았던 병사들 중 살아남은 세 사람의 삶과 기억에 초점을 두는 이 영화는 심도있는 질문들을 던지고 있습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영웅은 어떻게 조작되고 소비되는가. 매스컴과 권력은 영웅 신화에 어떻게 공모하는가 등등.영화가 과거와 현재를 유려하게 교차되는 동안 기억과 실체, 환상과 실재에 대한 질문들이 끊임없이 제기됩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병사 세 명이 힘겹게 언덕을 오릅니다. 포탄 소리와 함성 소리가 주위에서 마구 울려 퍼집니다. 이는 이오지마 전투 현장처럼 보이려고 미국 어느 도시의 스타디움에 모형 산을 세워놓고 연출하던 장면입니다 .이 포탄 소리는 실은 폭죽 소리였고, 세명의 병사들 주위에 울려 퍼지던 소음은 관중들의 함성 소리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되던 당시, 이들은 지금 전쟁기금 마련을 위해 순회공연을 하면서 전쟁터의 장면을 흉내내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이때 관중들에게 화답하던 브래들리는 문득 위생병을 부르는 화급한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듭니다.
* 세사람의 병사(왼쪽부터 아이라,브래들리,개그넌)
영화는 브래들리의 환청을 따라 그의 과거였던 이오지마 전투 현장으로 순식간에 이동합니다. 영화는 이런 방식으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와 전쟁 기금 모금을 위해 기획된 쇼를 오고 갑니다. 그러므로써 영화는 전쟁터와 민간 세계, 즉 양극단의 시공간과 상황을 한 덩어리로 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명의 병사들 중에 특히 아메리카 인디언인 해병대원 아이라 헤이스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압축한 인물이기도 하죠. 비록 그는 미국 사회의 인종적 타자이지만 백인들과 함께 조국인 미국을 위해 싸우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두 백인 병사들과 달리 거짓으로 영웅이 된 사실을 견딜 수 없어 합니다. 결국 그는 전장으로 다시 소환됩니다.
전쟁이 끝나고 겨우 살아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는 백인 주류 사회에 편입되기는커녕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가난한 농부로 일하며 하루하루 겨우 먹고 삽니다. 감옥도 들락거리면서...길거리에서 그를 알아보는 관광객들이 그에게 푼돈을 던지고 사진을 찍자고 할 때만이 그가 한 때 조국을 위해 싸운 영웅이었다는 사실을 깨우쳐 줄 뿐입니다.
그는 마구간에서 시체로 발견됩니다. 이스트우드 갑독은 영화 속 누구보다 극적으로 굴곡진 삶을 이어간 인디언 아이라를 통해 미국을 떠받치는 영웅 신화는 물론이지만 국가에 대한 신념을 냉소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 영화 뒷얘기
* 스필버그와 촬영장의 이스트우드
스티븐 스필버그 제작,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아버지의 깃발>은 처음부터 여러 가지 면에서 화제를 불러모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스필버그와 이스트우드가 함께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색 사연이 화제였습니다.
<아버지의 깃발>은 2000년도에 출간되어 6주간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고 46주간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대열에 오른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조 로젠탈의 사진 속 깃발을 세웠던 군인 중 한 명이 이오지마 전투를 회고하는 형식으로 쓰여진 이 베스트셀러를 읽자마자 영화를 제작하고픈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깃발>의 판권은 이미 누군가 한 발 앞서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누군가가 바로 스티븐 스필버그였습니다. 그런데 아쉬움을 달래던 이스트우드에게 이 작품의 감독을 맡아달라며 바로 그 스필버그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이스트우드는 예전 사석에서 스필버그에게 <아버지의 깃발>을 꼭 영화로 만들어 보고 싶고, 또 그렇게 해보라고 권유했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우연찮게도 한 편의 소설을 가지고 똑같이 영화화를 생각하고 있었고, 이를 완성시키기 위해 서로가 적격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미 세계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스필버그는 이스트우드의 탄탄한 경력과 제작자로서의 자세를 고려해 볼 때 분명 좋은 작품이 나올 것을 확신했습니다.
또한 영화의 깊이와 폭, 자신감, 완성도에 있어서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고 주제의 다양성이나 감정 포착 등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그에 대한 신뢰로 감독을 제의했고 영화의 완성 후에는 이 영화의 숨은 보석은 바로 이스트우드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 수리바치산 벙커에서 기관총을 난사하고 있는 일본군
* 실제 닥 브래들리
* 실제 인디언 아이라
* 실제 르네 개그넌
[ 간략한 줄거리 ]
2차 대전 막바지 태평양 전쟁은 점차 끝나가지만 미국과 일본은 점점 더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 중의 하나가 이오지마 섬이었습니다.
1945년 2월 23일 마침내 섬에 상륙한 미해병대는 섬 점상인 수리바치 섬에 성조기를 꽂습니다. 이때 찍은 사진 한장이 미국 본토를 뜨겁게 달굽니다. 여섯명의 미국 해병대가 이오지마에 성조기를 세우는 모습을 포착한 사진입니다. 매스컴과 정부는 그 사진이 전쟁에 지친 미국 국민들에게 애국심과 희망의 상징이 될 것으로 직감합니다.
국민들의 감정적 동요를 더 고양시켜 전쟁을 지속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정부는 사진의 주인공들 중 전사자를 제외한 세명의 본국 귀환 명령을 내립니다. 위생병 존 닥 브래들리, 아메리카 원주민인 아이라 헤이스, 그리고 르네 개그넌. 이들은 전 국민으로부터 영웅으로 대접 받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곧 전쟁 채권을 광고하는 순회공연에 투입되어 전국을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영웅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마음 한 구석으로 괴로워합니다. 특히 전쟁에서의 참혹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아이라와 닥은 계속되는 영웅 행세에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별로 참혹한 기억을 갖지 않은 래니는 거부감없이 영웅 행세를 지속 해나갑니다. 반면에 아이라와 닥은 이런 행사를 그만두고 싶어하지만 전쟁 자금이 필요한 미 행정부는 그들을 계속 행사로 몰고 다닙니다.
* 존 닥 브래들리
결국 아이라는 그들을 떠나 부대로 돌아갑니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그들은 영웅 취급을 받을 수 있었지만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그들은 잊혀진 영웅이 돼버리고 맙니다.영화는 닥의 아들이 아버지의 행적을 따라가는 것으로 진행됩니다. 아버지가 왜 영웅이라 불리는 것에 거부감을 갖었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아들은 아버지의 옛 전우들 혹은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죽기 직전 닥은 아들에게 바다에서 수영했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것은 닥이 전우들을 기억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는 물장구치며 바다에서 수영하던 지극히 평범한 모습으로의 그들을 기억합니다.
아버지로부터 이 얘기륻 들은 아들은 아래와 같이 독백을 합니다.
"이 세상에 영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을 뿐. 그 분들이 영웅이란 호칭에 거부감을 일으킨 이유를 이젠 알겠다. 영웅은 우리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릴 위해 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한 한 방식인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그들에겐 그들이 겪었던 상처와 고통은 전우들을 위한 희생과 상처였다.
조국을 위해 싸웠지만 전장에서 함께 피 흘린 전우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다. 진정 그들을 기리고자 한다면 그들의 참모습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아버지가 그들을 기억하듯이."
[ 이오지마 전투 ]
2차 세계대전 최대의 해전이자 인류 최대의 해전이기도 했던 1944년 6월 18일의 마리아나 해전, 이 해전에서 미군은 일본 연합함대를 제압하면서 태평양 전쟁에서 확실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 해전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미 해병대의 사이판 상륙은 미국의 전략적 의도에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결국 7월에 사이판과 티니안 등 마리아나 제도 일대가 모두 미군의 수중에 장악되었습니다. 이로써 일본 대본영이 설정한 절대국방권의 태평양 중심축이 단번에 붕괴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전쟁 발발 3년 8개월여 만에 미국은 일본 본토로 가는 출구를 활짝 열어 제꼈습니다.이어서 11월 24일부터 고대하던 B-29의 일본 본토 폭격이 개시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중국 서부에서 이륙한 B-29의 규슈 폭격 등이 틈틈이 있었지만 중국에서 발진하는 것과 도쿄 코앞에서 발진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달랐습니다. 사이판, 티니안, 괌 등 마리아나 제도의 모든 섬들에 비행장이 들어서고 B-29 폭격기들이 도쿄를 강타하게 된 것입니다.그런 미군 입장에서 이오지마는 매우 골치 아픈 존재였습니다.
몇 대 되지도 않는 일본 전투기들이 이곳에서 이륙해 사이판 등을 기습 폭격하는 일이 수시로 있었던 겁니다. 더군다나 도쿄 폭격을 위해 발진한 B-29 폭격기들의 이동루트 안에 이 섬이 들어있다는 것도 문제였습니다.역으로 생각하자면 이오지마를 미군이 점령한다면 사이판 등의 기지에 대한 일본의 위협이 완전 사라질 뿐더러, 이오지마라는 기가 막힌 전진기지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 멀리 수리바치 산이 보입니다
일본 공습의 와중에 피탄 당한 B29 폭격기들의 임시 활주로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이오지마는, 일본제국의 본토였다는 점이었습니다.사실 이오지마는 19세기 말엽에야 일본 영토가 된 무인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열대작물 재배나 어업 등으로 생활하는 이주민들이 유입되면서 전쟁 기간 동안에는 약 1,000명 내외의 일본 민간인들이 거주했습니다.
이 섬은 행정적으로도 일본제국 도쿄도지사의 관할구역이었습니다. 일본제국의 본토. 이것이 의미하는 상징적 의미는 매우 컸습니다. 개전 이래 최초로 미 지상군 병력이 일본제국의 본토에 상륙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곧 일본도 본격적으로 전화에 휩싸이게 된다는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실제 일본은 개전 이래 전쟁의 참상을 본토에서 직접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42년의 두리틀 폭격대의 폭격 이후로는 폭격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본토에 대한 폭격이 재개된 건 1944년 6월 15일의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규슈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그다지 심한 수준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절대국방권이 무너지고, 사이판에서 B-29가 도쿄 등을 공습하는 위기상황에서 미 지상군이 아주 작지만 일본제국 본토에 대한 상륙까지 이루어진다면? 일본으로서는 별로 유쾌한 그림은 못되었을 겁니다.이와 같이 이런저런 현실적이고 상징적 이유가 겹쳐지면서 미군은 이오지마를 공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일본도 이미 이오지마에 대한 미군의 공격이 조만간 있을 것임을 예상하고 방어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 일본군의 필사적인 방어 준비
구리바야시 타다미치는 태평양 전쟁이 터지면서 27군 참모로 홍콩 공격에 참전했고, 이후 일본제국 육군 2사단장을 역임했습니다. 그리고 1944년 5월, 그는 도조 수상의 간곡한 부탁과 함께 109사단장으로 임명됩니다.
109사단이야말로 바로 이오지마 방어전을 위한 사단이었던 것입니다. 떠나기 전 그는 천황을 알현하여 하직인사를 올립니다. 천황도 명예로운 일이라며 그를 격려했습니다. 보내는 사람이나 떠나는 사람이나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 지 매우 잘고 있었을 것입니다.구리바야시 중장은 미군을 완전히 격퇴하겠다는 계획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 영화에서...
냉철한 현실주의자인 그는 어마어마한 물량과 화력을 지닌 미국을 상대로 발악을 해봤자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전 병력이 의미있게 싸우다 죽자는 방향으로 생각을 고쳐 먹고 있었습니다.의미있는 죽음이란 바로 가능한 한 많은 미군을 저승길 동반자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기존의 일본군의 전투패턴은 패배가 분명해지면 그 유명한 자살 돌격을 감행하다가 기관총 등 집중사격을 받고 몰살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구리바야는 이런 무지막지한 자살돌격 패턴을 배제합니다. 그리고 이오지마 전체를 요새화하는 데 집중합니다.우선 이오지마에 거주하던 1,000명 가량의 민간인들에 대한 전면적인 철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이오지마 각 곳에 그 악명 높은 땅굴을 파고 참호를 건설했고 곳곳에 엄폐호를 만들었습니다. 땅굴로 이어진 이 거대한 요새는 웬만한 포격, 폭격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탄탄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은 이 땅굴 길을 따라 후방이나 적 배후로 이리저리 쉽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 이오지마 융단 포격과 폭격
공세로 나선 미군의 물량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습니다. 우선 지상군은 해병 제3, 4, 5사단 3개로 구성된 해병대 제5수륙양용군단이었고 군단 총병력은 거의 7만 명을 웃돌았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미군은 수비를 맡고 있는 일본군 병력의 3배의 수준이었습니다. 이들을 운반하기 위해 수송선 43척, LST 63척, LSM 31척이 투입되었습니다.
지상군만 이 정도에다가 해군은 그야말로 가공할만한 규모였습니다. 전함 8척과 순양함 19척, 구축함 44척이 선단 호위 및 함포지원을 위해 동행했고, 항공지원을 위한 호위항공모함도 12척에 육박했습니다.1945년 2월 16일부터, 전함 6척, 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6척으로 구성된 대함대가 이오지마에 대한 대대적인 함포사격에 나섰습니다. 17일에 수비대 해안포대의 포격을 당해 순양함 펜서콜라가 격침당했지만 이 포대도 당장에 박살이 났습니다.
* 무난했던 상륙, 그러나...
2월 19일 새벽 2시. 전함의 함포사격을 신호탄으로 다시 한 번 무시무시한 함포사격이 퍼부어졌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포격이 섬 구석구석을 강타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 진지는 탄탄하게 구축되어졌고 또한 지하에 있던 탓에 무사했습니다. 그래서 포격에 노출되어 날아간 진지는 몇 개 되지 않았습니다.
8시 59분을 기해 해병 제5군단이 섬의 남쪽 해안으로 상륙을 개시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구리바야시의 지침대로 일단 미군의 그대로 상륙을 허용하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미군이 상륙해서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끝장내겠다는 전술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본군의 속임수를 눈치 못 챈 미군은 해군이 하도 융단포격을 하는 바람에 자기들 전공까지 다 해치웠다며 불만을 토로하는 웃지못할 일도 벌어졌습니다.그러나 그들이 어느 정도 전진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일본군의 집중 사격이 퍼부어졌습니다. 철저하게 엄폐된 기관총 진지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고, 동시에 포격을 개시했습니다. 단 한 번의 사격으로 해병 5군단의 선두부대는 그야말로 끔찍한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 영화에서...인디언 병사 아이라
이 위기에서 해병대를 구해준 건 공군이나 해군이 아니라 바로 탱크였습니다. 일본군은 돌진해오는 탱크들을 대전차지뢰와 대전차포 등으로 3~4대를 격파했지만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아무리 포탄을 쏴대도 끄떡없이 밀려 들어오는 셔먼 전차에 놀라 공황에 빠지고 말았습니다.결국 어느 대전차포 중대장이 몸에 폭탄을 두르고 전차에 달려들어 자폭까지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탱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통로를 개척했습니다. 해병대는 가장 큰 위기를 넘기며 눈앞에 있던 진지들을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미 하루동안 500명이 넘는 전사자가 발생하였습니다.
* 영화에서...
* 최남단의 수리바치 산 공략
상륙한 미 해병대의 눈앞에 닥친 목표는 섬에서 가장 높은 고지이자 최남단에 위치한 수리바치 산을 공략하는 거였습니다. 수리바치 산의 일본군 수비대는 상대적으로 병력이 적었음에도 산 곳곳의 바위들을 교묘히 이용하며 필사적인 방어전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가장 중요한 목표로 잡은 해병대의 공격도 이에 못지않게 매우 치열했습니다.
* 영화에서...
수리바치 산은 특히 바다에 바로 접해 있어 해군 함포사격의 직격이 가능했다는 것은 일본군에게는 불행이었습니다. 먼저 가공할 함포사격은 일본군의 수리바치 산 방어에 어려움을 안겨 주었습니다. 육로로는 미 해병대가 화염방사기로 진지를 태우고, TNT로 바위를 통채로 무너트리며 진지 내의 일본군을 압사시키는 철저한 방식으로 차근차근 정상에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방어가 어려워지자 일본군 생존자들은 전원 미군의 포위망을 은밀히 뚫고 본대에 합류하기 위해 북쪽으로 탈출했습니다.2월 23일 10시 20분, 이 사실을 확인한 미군은 즉시 수리바치 산 정상을 확보했습니다 그런데 산 밑에서 보니 뭔가 불만이 있었습니다. 산 정상에 게양했던 성조기가 꾀죄죄하고 작았던 것입니다.
* 국기를 바꾸고 있는 해병대원들
그래서 즉시 원래 성조기보다 훨씬 크고 깨끗한 새로운 성조기를 정상으로 올려 보내 게양했는데 마침 이 모습을 AP의 종군기자가 촬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해병대의 국기 게양 사진이었습니다.
* 이 사진을 찍었던 로젠탈 기자
* 영화에서...깃발을 꽂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는 로젠탈(오른쪽)
* 이오지마 북부에서의 혈전
그러나 정작 전투는 지금부터였습니다. 수리바치 산을 중심으로 한 이오지마 남단은 미군이 무사히 확보했으나 일본군의 주 방어선은 섬 북쪽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오지마를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서는 미군은 섬 북부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군은 사전에 구리바야시 중장의 지휘하에 철저하게 준비한 상태였고 이제 최후의 일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영화에서...
이미 미군은 수리바치 산을 공략하면서 혹독한 교훈을 배웠습니다. 일본군은 매우 튼튼한 동굴진지로 도배를 하며 미군에 만만찮은 피해를 강요했으나 구리바야시 중장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미군은 골치 덩어리 진지들을 하나하나 점령하는 대신, 발견하는 진지 입구마다 TNT 폭약을 설치, 폭파시켜 입구를 무너트리고 화염방사기로 불세례를 퍼부어대면서 모든 진지들을 완전히 무용지물로 만들었습니다.
보이는 입구마다 화염방사기를 맨 병사가 앞으로 나서며 최대출력으로 화염을 내뿜었던 것입니다. 안에 있는 일본군은 그야말로 통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수류탄을 까 집어넣고 다시 또 폭약을 터트리고를 반복했습니다. 이러면서 일본군 방어선은 이제 하나씩 빠르게 무너져 갔습니다성조기를
* 성조기를 올려보내는 병사들
그러나 여전히 진격은 미 해병대 입장에서는 매우 지지부진한 것이었습니다. 섬 북부 전역을 관측할 수 있는 382 고지에서 벌어진 전투는 미군은 계속 격퇴당하다가 마지막에야 간신히 제압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미군은 3월 9일, 꾸역꾸역 일부 병력이 북부 해안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 영화에서...
살아남은 나머지 일본군은 섬의 최북단 일부로 패퇴해 그 은신처가 매우 좁혀졌습니다. 미군은 늘 하던 방식대로 화염방사기, 수류탄, TNT를 있는 대로 쏟아 부으며 일본군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붙였습니다.결국 일본군은 3월 26일 잔존병력 전원이 매우 그들답게 만세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구리바야시 중장이 그때까지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최후의 자살 공격에서모두가 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만세 돌격에 참여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죽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죠.
* 이오지마 전투 이후
미 해병대는 이오지마 섬 공략전에서 무려 6,821명의 전사자와 19,189명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최일선에 섰던 소부대들 중에는 아예 대대적인 재편성이 필요한 부대들이 속출했습니다. 일본은 제국육군 109사단이 말 그대로 깡그리 전멸했습니다.미군으로선 이전까지 전투 중 가장 끔찍했던 1943년의 타라와 전투를 가볍게 능가하는 대규모 인명피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오키나와에서도 똑같은 일을 당합니다. 실제 이오지마 전투 당시 구리바야시 중장의 방어계획은 오키나와나 일본 본토에서도 고스란히 채택됩니다. 미군이 일단 들어오면 철저하게 같이 죽자는 방식 말이지요.그러나 이오지마 전투는 충분히 그 값어치가 있었습니다. B-29의 발진기지인 사이판은 더 이상 공격받지 않았습니다.
* 영화에서...
B29 폭격기에 의한 일본 본토 대공습이 본격화되면서 그 가치는 더더욱 커졌습니다. 공습 도중 피탄 당한 폭격기들이 이오지마의 비상 활주로에 무사히 착륙하면서 상당한 수의 B-29 폭격기들과 승무원들의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절대국방권 붕괴에 뒤이어 제국 본토가 미국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이제 일본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본토대결전을 준비해야 하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습니다.
* 로젠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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