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팔가자 (小八家子) 4
글 김광한
각 종교마다 성지(聖地)가 있다. 불교문화권에 속해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32본산을 비롯한 유명한 말사(末寺)와 부도(浮圖), 그리고 문화재같은 보물이 소장된 사찰이 될 것이고 가톨릭의 경우 이땅에 천주교가 들어왔을 당시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장소, 즉 절두산이나 새남터, 또는 해미, 황새바위 같은 곳이 성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즉 가톨릭에서의 성지는 순교자의 피로 얼룩진 장소를 말한다고 할 수 잇다. 유럽의 경우, 기적을 행한 샘물이 있거나 성인들을 배출한 교회, 기적을 행한 성인이 살던 장소와 문화재적인 가치가 있는 교회같은 곳이 성지가 될 수가 있다. 이런곳을 다녀오는 것은 일반 여행과는 달리 순례라고 한다.
1993년 김현욱 박사가 소팔가자를 다녀오고나서 김박사는 이곳을 성지화할것을 구상했다. 그러나 개인 한사람으로 이뤄질 일이 아니었다. 김박사는 매년 순례단을 이끌고 소팔가자를 오가면서부터 성역화 사업을 시작했다.그로부터 4년후, 1997년 8월 22일 서울 가락동 천주교회 최선웅 주임신부와 17명의 순례단을 이끌고 소팔가자의 현장을 오가면서 이분들에게 그곳의 성지화를 역설했다. 그곳이 북방선교의 중심이 되어서 중국내의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갈 유일한 기회라고 이분들을 설득해서 그 답을 얻어냈던 것이다. 더구나 그곳을 성인 김대건이 머물면서 부제품을 받고 그곳 현지인들의 신앙교육과 사제가 될만한 사람들을 선발하여서 공부시켜 사제를 만든 곳이기 때문에 성지화로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이해시킨 것이다.
여건이 좋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넉넉한 물질이 뒷바침되지 않으면 안되었다.그래서 우선 김박사는 김대건 성역화 추진위원회를 구성, 성역화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 자금을 모으기로 했다. 자금을 모은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1997년 10월, 소팔가자 교당의 김국련 신부와 사목회장, 그리고 길림성 능안현 합륭진 정부관계자들을 서울로 초청, 김박사는 이들을 통해서 북방 선교의 중요성과 김대건 신부의 순교정신을 기리기 위한 "김대건 성역화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본격적으로 성역화에 필요한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 가락동 최선웅 주임신부를 비롯한 신자들 27명이 성지 순례단의 일환으로 6박 7일 예정으로 소팔가자 교당을 답사, 교당안에 김대건 신부의 동상과 교당까지의 진입로 9.7킬로미터의 도로 포장 공사에 대한 조인식을 합륭진 인민정부애서 가졌다.
중국에서는 누구의 동상도 세울 수가 없는 것이 방침이었으나 김대건 신부는 정치와는 무관ㅁ한 사람이기에 가능했다.동상이 섬으로서 김대건 신부를 가깝게 할 수 있고 또 생각으로만 존재한 김대건의 실제를 대하는 것이기에 이 동상 제막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