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적 세계의 순수성 표출하던 시인
서민들의 절망적 이야기를 타전하다
장이지(본명 장인수·37)는 열 살 때까지 전남 고흥의 외가에서 성장했다. 외할아버지와 장기를 자주 두곤 했던 그 시절, TV ‘가요무대’에서 흘러나오는 노랫말을 적어서 할머니에게 건넸던 기억이 있다. 외가에서 운영하는 읍내 식당엔 10대 후반에서 20대에 걸친 배달원 형들이 꽤 있었다. 그 형들과 어울려 놀면서 말을 배웠던 그는 이렇게 돌이킨다. “어머니 슬하에서 배운 말도 말이지만, 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제 말 어미였지요.”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어머니는 우산도 없이 등교한 아들을 위해 오렌지색 우산을 들고 마중 나왔다가 한 아이가 비를 맞고 걸어가는 것을 보고 우산을 아이에게 들려준다. 훗날 시인이 된 아들은 그 시절 어머니의 고운 마음씨에 기대어, 그 마음씨의 존재를 믿으며 시를 쓰고 있다. 성균관대 국문과 3학년 때 짝사랑하던 여자친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시를 습작했던 그는 사랑에 실패한 대신 2000년 월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니, 그 마음씨의 존재는 동화적 세계의 순수성으로 환원돼 표출됐다.
“오늘 밤 나는/ 또 다른 나를 떠나보낸 것이다/ 흰 눈은 후일담처럼 가라앉고 쌓여/ 고즈넉이 반짝거리는데,/ 또 다른 나는/ 은하철도 999호에 몸을 싣고/ 우주 저편 남십자성을 향해 떠난 것이다./ (중략)/ 검은 돛을 올려라. 나는 빈 배./ 호졸근한 내 둥근 어깨 너머로/ 999호는 유성처럼 멀어져가고/ 격려하듯 깨끗한 눈발 몇 개가/ 내 어깨를 두드린다.”(‘백하야선(白河夜船)’ 부분)
첫 시집 ‘안국동울음상점’(2007)에서 그가 만들어낸 인공 낙원은 은하철도999의 철이와 테디 곰 인형과 처키 인형과 중국 영화 ‘용문객잔’의 한 장면으로 장식돼 있다. 하지만 장이지라는 어린 왕자는 정작 인공 낙원의 숙명적 덧없음처럼 이 동화적 기표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검은 돛을 올려라. 나는 빈 배”라는 시구처럼 그는 다시 비어 있는 기반 위에 현실적인 세계를 담기 시작했으니 그 결과물이 두 번째 시집 ‘연꽃의 입술’(2011)이다.
“5·18 사태 때 저는 다섯 살이었고 고흥에 있었습니다. 5·18은 저에게 체감할 수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오히려 대학에 와서야 5·18에 대해 듣게 되었는데 충격이었지요. 1996년 노수석이 연세대에서 시위 도중 사망했는데 그것도 충격이었습니다.”
터무니없는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 도중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숨진 노수석과 조선대 부속중학교 동창이기도 한 장이지는 두 번째 시집에서 리얼리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시절은 FTA. 사람들은 농부들이 죽을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기뻐했네. 고깃값이 내릴 것이라고. 시절은 FTA. 모두 화를 내는 듯했지만 시인 녀석들은 그걸 시로 쓰지는 않았네. 나 같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항아리를 들여다보는 소녀에게 말해주어야지. 나 같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농부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하늘이 자꾸 머리 위로 떨어지고 구름아저씨는 계속 괜찮다는 말만 하시네. 괜.찮.아.// 아저씨, 뭐가 괜찮아요! 닥치고 코밑에 빠진 콧물이나 좀 닦아요!”(‘사이코지만 괜찮아-한양호일(漢陽好日) 2’ 부분)
장이지는 우리 사회엔 아직도 민중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한양호일’ 연작을 썼다고 한다. 서민들은 날이 갈수록 삶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고 있는 요즘, 그는 서민들의 절망적인 이야기에 해학정신을 가미한 시들을 타전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바깥이 없다고 해버리면, 돈이 군림하는 세계는 더 공고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바깥이 있다고, 가령 순수증여가 있다고 믿으면, 돈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있으며, 우리는 그런 것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결심을 기꺼이 할 수 있게 됩니다. 문학이 존재하려면, 타인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독자의 존재를 우선 믿어야 합니다.”
세 번째 시집을 준비 중이라는 장이지는 인간이 때 묻히며 살아가는 ‘장소’와 그 ‘장소’에 내장된 기억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 체제 하에서 사람들이 ‘때 묻혀 길들여온’ 장소를 하나둘 상실해가고 있는 요즘, 그의 시집은 동시대를 함께 숨 쉬고 함께 아파하는 지음(知音)의 처소로 빚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