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판전진경(秋史板殿眞景)
유재영
몽당붓 일천 개에 구멍 뚫린 벼루 열 개
선생 병중 칠십일과(七十一果) 돌아보면 길 밖의 길,
죽음도 두렵지 않는 일흔한 살 필법이여
위리안치 세월만큼 금욕의 마른 갈필
세한의 칼바람도 붓 한 자루 못 꺾었다
정좌한 선생 일생은 척추 곧은 조선 정신!
운명처럼 받아든 판전(板殿)*이란 두 글자
모든 욕심 내려놓고 동자승 보법으로
마지막 파임을 긋자 피가 뛰는 대동맥
* 판전(板殿): 추사 돌아가시기 사흘 전에 쓴 서울 봉은사 화엄경판각 현액. 선생은 노년에 경기도 과천(果川)의 과지초당(瓜芝草堂)에 머물면서 봉은사에 자주 들리곤 했는데, 구전에 따르면 이 글씨를 사망하기 사흘 전에 썼다고 한다. 만년의 순수한 모습이 드러나 있는 듯한데, 세간에서는 이 글씨체를 ‘동자체(童子體)’라고 부른다. 파란의 생애를 겪으면서도 학문과 서화에 침잠했던 선생의 진중한 모습이 담겨 있는 듯하다. 편액 왼쪽의 낙관에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 일흔한 살의 과가 병중에 쓰다)”라고 했는데, 여기에 ‘과(果)’는 선생이 노년에 과천에서 살면서 사용했던 호인 과도인(果道人)․과노(果老)․노과(老果) 등에서 나온 것이다.
《가히》2023. 창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