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9]
한국 남동부 해안에 있는 울산이란 도시에서 자란 아주머니는 군인인 남편 우디를 따라 일본으로 가서 좀 살다가. 나중에는 미국 조지아에 정착해서 20년을 살았다. 혹시 한국 남부지방 출신에 미국에서도 남부에서 죽 살아온 탓에 아주머니의 성격이 더 직설적으로 변한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속마음은 알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는 내가 어릴 때부터 봐온 다른 한국 여자들과 달랐다.
누구누구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린 그들은 따뜻하고 인자했다. 반면 아주머니는 자식이 없었고, 아빠나 나와 이야기할 때 저만치 거리를 두었다. 아주머니의 그런 차가운 태도에 우리는 저절로 몸이 얼어붙었다. 아주머니는 주방 조리대 위에 채소나 과일이 썩어갈 때까지 내버려두는 습관이 있었다. 부엌에 초파리가 꼬이기 시작했다.
당시에 엄마는 면역력이 위험할 정도로 약화돼 있었기에 아버지와 나는 아주머니가 사용하는 재료 중 혹시라도 상한 게 있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아빠는 아주머니에게 감 때문에 벌레가 꼬이지 않냐고 잔소리했고, 아주머니는 발끈해서 아빠가 공연히 예민하게 군다고 비웃었다. 어느 날 저녁 식탁에서 나는 엄마 옆에 내 자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내 수저를 엄마 맞은편 자리로 밀어내고 자기가 그 자리에 앉는 것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엄마한테 한글로 쓴 장문의 손편지를 건넸다. 그러고는 아빠와 내 앞에서 그걸 혼자서만 조용하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엄마는 세 장짜리 편지를 반쯤 읽어내려가다가 말고 훌쩍거리면서 아주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마워, 언니." 엄마가 말했다. 아주머니는 숙연한 미소로 화답했다. "뭐라고 쓰여 있어?" 아빠가 물었다. 엄마는 말 없이 계속 읽어내려갔다. 약기운만 아니었으면 우리가 불편해하고 있단 걸 눈치챘을 테지만, 당시 엄마의 상태로는 우리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냥 우리끼리 하는 얘기해요." 아주머니가 대신 대답했다. 이분은 왜 여기 있는 거지? 남편이 그립지도 않은가? 60대 여자가 조지아에 있는 집을 두고 여기 와서 아무 보상동 없이 한 달이 넘도록 우리와 같이 사는 건 좀 이상하지 않는가? 나는 아주머니에게 내가 모르는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그냥 내가 망상에 빠진 건지 그보다 더 나쁘게는 이 여인이 나보다 엄마를 더 잘 보살펴서 질투심에 사로잡힌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아, 그처럼 사심 없이 돕겠다고 나선 사람을 그리도 못마땅해했다니, 나란 사람은 대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었던 건지.
갈수록 약이 독해지면서 엄마는 시종일관 졸고 더 둔감해져서 소통하기가 어려워졌다. 엄마는 이제 슬금슬금 모국어로 말을 해서 특히 아빠를 더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30년 동안 능숙한 영어로 말해온 엄마이기에, 엄마가 영어로 바꿔 말하는 걸 까먹기 시작해 우리가 소외되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시시때때로 아주머니가 영어로 통역해달라는 아빠의 말을 무시하고 한국말로 대답할 때면 아주머니가 그 상황을 이용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진통 투여량이 늘어날수록 엄마가 우리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는 게 두려워져 그동안 어떻게든 약 투여량을 끌어 내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우리가 통증의학과에 다녀온 뒤로는 그 씨름을 그만두었다. 고통이 정말로 4 이하가 아니고 6이야? 나는 스프링 노트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그 기록을, 하루에 25마이크로그램짜리 펜타닐 패치에 액상 하이드로코돈을 추가해야 했던 때의 횟수을 숨기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엄마의 상태가 보기보다 나쁘지 않다고 우기고 싶었다. 엄마가 고통받는 것도 싫었지만 엄마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도 너무 싫었다.
첫댓글
지인 아주머니가 이방인이 되어버린
미셸과 아빠의 감정을 이해하지요
그러나 환자에게는 아플때 자기를 이해하며
간병해 주는 분을 좋아하더라는 걸
미쳐 알지 못하는거겠지요
다 경험이 없는 것이라는 걸 훗날에야 깨닫게 되겠지요
언니 9번째 글 감사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