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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장진호 전투 종합 분석 평가
세계 동계 전투 사상 길이 남을 장진호 전투가 벌어졌던 개마고원 장진호 일대는 고도 천 미터 이상의 험준한 산악고지로 형성되었다.
기온은 주간 평균 25도, 야간 체감온도 영하 40도로 적군, 아군 모두 전 병력 태반이 심한 동상에 시달렸다는 기록이다.
당시의 혹독한 추위로 인해 수랭식 중기관총은 부동액을 채워도 불통이었다.
경기관총은 얼어붙어 불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상황이 있든 없든, 주기적으로 아무데나 사격을 해야 했으며, M1소총은 윤활유가 얼어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수시로 도포를 해야 할 만큼 혹독한 추위였었다.
공중에서 낙하산으로 투하되는 보급품도 얼어붙은 지면의 충격으로 파손되는 바람에 4분의 1만이 사용가능했다.
대부분의 차량도 동파되어 사용불가능 했으며, 지표면도 굳게 얼어 참호와 축성에 커다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동상과 설사였다.
군화와 양말이 얼어붙어 탈착이 어려웠고, 부상자를 위한 링거나 마취약 등 수액이 얼었으며, 얼어붙은 전투식량을 그대로 섭취해 심한 장염과 설사로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저 체온으로 인해 무감각해진 팔, 다리의 끝 부분이 파랗게 잉크 색으로 썩어드는 증상이 동상의 초기 증세였다.
이쯤에서 생명을 구하려면 동상부위를 속히 절단할 수밖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거의 매일 밤 중공군의 기습으로 인한 수면부족은 이들을 지칠 대로 지치게 했다. 심지어 이 고통을 피해 자폭할 정도의 극한상황의 연속이었다.
미 해병대는 어떠한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전사한 전우의 명예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부상자와 시신을 회수하는 오랜 전통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을 거두기 위해 또 다른 희생이 늘어만 갔다.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14일간 미 해병 제1사단은 전, 사상자 3,637명, 비전투 전, 사상자 3,657명, 도합 7,294명의 손실을 기록했다. 이 중 비전투사상자 대부분은 동상환자였다.
이에 비해 중공군은 37,500명 전 사상자를 냈는데 그중 22.500명은 해병 지상군에 의해, 15,000명은 항공기 공격에 의한 것이었다.
남은 중공군의 3분의1은 동상으로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중공군 9병단은 사실상 괴멸되었다. 전투력을 상실한 9병단은 그 이후 다음 작전에 투입될 수 없었다.
9병단의 괴멸은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은 어마어마했다. 1951년 초에 시작된 중공군의 3차 공세는 경기도 안성까지 유엔군을 몰아붙였다. 다수의 군사전문가들은 그 때 중공군 9병단까지 공격에 참여했다면 아마 유엔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그만큼 9병단의 괴멸적 손실은 중공군에게 뼈아픈 것이었고 유엔군에게는 다시 재 반격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이렇게 된 중심에는 세계 최강의 전력인 미 해병1사단의 투혼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전 세계 언론은 이러한 성과를 가져 온 미 해병1사단에 격려와 찬사를 쏟아 부었다. 해병1사단은 10배나 많은 중공군을 패퇴시키고 장비의 대부분과 부상병 전원을 데리고 철수해서 세계 전 사상 불멸의 한 페이지를 기록했다.
언론은 해병1사단 뿐 아니라 스미스 소장 개인에 대해서도 뜨거운 찬사를 보냈다.
한 해병은 언론에 “나는 스미스 소장을 지옥에라도 따라 갈 것이다. 그는 우리가 거기서 빠져나오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 언론인은 스미스를 두고 “ 이 해병은 저돌적인 전사라기보다는 연구하는 대학교수처럼 보인다. 미군 전체에서 그 보다 인간의 가슴을 움직이는 지도자는 없다.”고 썼다.
장진호 전투에서 보여준 스미스의 병력의 집중배치와 야전 활주로 공사와 전투 요충지에 설치한 탄약과 보급품 적재소는 지휘관으로서 앞을 내다 본 매우 치밀한 전략으로써 추후 진행된 전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식사라든지 잠자리라든지 모두 사병들과 같은 대우를 받음으로써 부하들이 진심으로 따를 정도로 솔선수범했다.
한국으로 치면 스미스는 미국의 이순신 장군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었다. 이와 같이 스미스 장군은 한국전쟁에서 한국을 구해낸 진정한 영웅이었다.
스미스 장군과 해병1사단은 흥남 앞바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도일 중장이 지휘하는 해군 선단에 승선해서 부산에 도착한 후 육로로 마산으로 향했다.
마산에서 쉬면서 스미스는 전사한 장병의 부모와 가족에게 일일이 편지를 썼다. 마산에서 해병들은 크리스마스를 보냈고, 본국에서 보충병 3,400명이 도착했고 장비도 보충되었다.
12월 26일 매튜 리지웨이 중장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워커 장군의 후임으로 8군 사령관이 되어 한국에 도착했다.
리지웨이와 스미스는 서로 존중하는 사이였다. 패배 심리에 젖어 있는 육군을 재정비해서 반격을 해야 하는 리지웨이는 전의에 충만한 해병1사단에 기대하는 수 밖에 없었다.
스미스는 리지웨이 장군에게 다시는 알몬드의 지휘를 받지 않겠다고 말했고 리지웨이는 이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1951년 1월 8일 스미스는 대구에 자리 잡은 리지웨이의 사령부를 방문했다. 해병1사단은 포항지역에 출몰하는 공산 게릴라를 소탕하는 작전을 맡게 됐다.
1사단은 1951년 2월 중순까지 이 지역에 출몰하면서 미 육군과 한국군에 많은 피해를 주던 인민군 10사단 병력을 소탕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2월 12일 스미스는 14일 후 24시간 내에 부대를 충주로 이동하라는 긴급한 명령을 시달 받았다.
충주 지역을 방어하던 알몬드 소장이 지휘하는 10군단이 중공군에게 또 다시 패퇴했기 때문이다.
2월 11-12일간 중공군과 북한군은 눈보라 치는 기상에도 불구하고 총 공격을 개시해서 횡성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 3개 사단이 붕괴했고, 미 2사단의 주력 전투부대가 거의 괴멸되고 말았다.
미 8군은 또 다시 위급한 상황에 처했고, 리지웨이는 해병1사단 외에는 믿고 의지할 만한 부대를 갖고 있지 않았다.
2월 16일 해병1사단은 충주로 향했다. 해병1사단은 브라이언트 무어 소장이 지휘하는 9군단의 일원으로 공격의 중심에 서고, 왼편은 한국군 6사단이, 오른쪽은 10군단이 포진했다.
원주에서 횡성에 이르는 도로는 진흙 길이었다. 9군 사령관 무어 소장이 전방 시찰차 헬기로 이동하던 중 헬기가 추락해서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다.
리지웨이는 스미스에게 9군단을 임시로 지휘하도록 했다. 9군단 참모들은 스미스가 9군단을 지휘하는 것은 반겼지만 워싱턴의 육군본부는 서둘러서 이태리에 있던 윌리엄 호지 장군을 후임자로 파견했다.
그런데 이태리에서 ,한가하게 쉬고 있던 장군을 낯선 한국 전쟁에 투입한 것은 합리적인 조치는 아니었다.
전쟁 중에도 육군은 자신들의 자리 지키기에 열중했던 것이다.
스미스는 1사단장으로 다시 복귀했고, 3∼4월에 1사단은 8군과 함께 38선을 다시 돌파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4월초에 1사단은 강원도 산간지역에서 중공군을 몰아내고 38선을 돌파했다. 이 때 맥아더는 도쿄에서 날아와서 지프를 타고 해병1사단 본부를 잠시 찾아 스미스와 리지웨이를 만났다. 4월 11일에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파면되었고, 리지웨이는 후임이 되었다. 8군사령관에는 밴플리트 장군이 임명되었다.
스미스도 본국으로 가게 되었다. 1사단 후임 사단장으로 제럴드 토머스 소장이 임명되었고, 스미스는 캠프 팬들턴 기지 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
4월 25일은 1사단장으로 스미스가 보낸 마지막 날이었다. 왜 스미스가 예상보다 일찍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
여기에는 하와이에 있던 세퍼드 중장 등 해병대 내에서 장진호 전투의 영웅 스미스를 견제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스미스는 10개월간 인천, 서울, 장진호, 포항, 원주-횡성, 춘천-화천 등 전투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한 1사단 장병들에게 짧지만 감회어린 이임사를 남기고 떠났다.
이어 부산 공항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서 훈장을 수여받고 도쿄, 미드웨이,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 근교의 알메다 해군기지에 도착해서 가족과 재회했다.
캠프 팬들턴에 부임하기까지 한 달간 휴가를 얻은 스미스는 샌프란시스코 프레스 클럽, 모교인 버클리 등에서 연설 초청을 받았고, 자연히 뉴스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한국전쟁의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워싱턴의 해병대 본부를 방문하고자 했지만 해병대 본부는 요청을 거부하고 캠프 펜들턴으로 곧장 부임하라고 했다.
스미스는 군 내부의 이 같은 정치적 행위들에 환멸을 느끼고 다시는 한국전쟁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에서의 공로에 따라 스미스는 중장으로 승진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스미스가 중장이 되면 해병대 사령관 후보가 거론되는 데 부담을 느낀 케이츠 사령관은 스미스의 승진을 거부했다.
캠프 펜들턴으로 돌아온 스미스는 한국에 파병을 앞둔 장병들을 한국 실정에 적응할 수 있도록 훈련시켰다. 그 방법의 일환으로 한국의 지형과 마을을 본 따서 만든 코리아 빌리지를 캠프 펜들턴에 만들었던 것이다.
스미스는 가족과 함께 기지 근처에서 살면서 오랜만에 가족과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1953년 7월 스미스는 버지니아 노포크에 위치한 대서양 함대 해병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한달 후에 중장으로 진급했다.
1955년 9월 스미스는 전역 신청을 했고, 전역하는 날 대장으로 진급해서 아내인 에스터가 계급장을 달아 주었다.
스미스가 전역 신청을 앞당겨 하게 된 이유는 케이츠 후임으로 해병대 사령관이 된 세퍼드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역 후에 스미스는 아내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남쪽 끝에 자리 잡은 로스 알토스에 정원이 있는 집을 사서 은퇴생활을 즐겼다.
1962년 에스터의 건강이 나빠졌고, 1962년 5월에 아내가 소천 했다. 스미스는 에스터가 남겨 놓은 가구를 그대로 두었고, 정원을 가꾸면서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며 혼자 살았다.
그리고 거실에 있는 가죽 소파의 뒤에는 그의 생애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한국의 장진호 전투 지도가 걸려 있었다.
장진호 전투에 스미스는 그가 군인으로서 쌓아올린 모든 역량을 한 점도 남김없이 쏟아 부었다. 결코 후회할 수 없는 일생일대의 한판 승부였다.
그 결과로 10배가 넘는 중공군 9병단은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었고 유엔군은 평택에서 다시 반격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1977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밤, 스미스는 평상시와 같이 잠자리에 들었지만, 영영 깨어나지 못하고 장진호 전투의 진정한 영웅은 향년 8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스미스는 종교적인 사람이었고 고급 장교들 사이에서 성행하던 파티 같은 사교 모임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신 그는 전사한 부대원들의 유가족에게 정성스럽게 위문편지를 손수 썼고, 은퇴한 후에도 전사한 부대원들의 묘소를 자주 찾았다.
그는 가죽점퍼와 번쩍거리는 군화를 신고 다니는 다른 고급 장교들과 달리 항상 부대원들과 같은 평범한 복장을 하고 다녔다.
시간이 나면 수시로 책을 읽어서 부대원들은 그를 ‘교수’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고, 병사들은 그의 미들네임 이니셜 ‘P'가 교수(Professor)일 것이라고 농담을 하곤 했다.
사실 그의 풍모는 군인이기보다 교수에 가까웠다. 그는 다른 고급장교들처럼 새로운 임지에 발령을 받으면 자신이 알던 장교를 참모로 데려오기 보다는 자기에게 주어진 장교들을 정확히 파악해서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부대를 이끌었다.
그는 사관학교 출신의 엘리트 장교들이 주류를 이루는 육군보다 장교와 부사관 및 사병 간에 격의가 없이 평등한 해병대를 좋아했다.
그는 정치적 연줄을 이용한다든가 하는 생각을 해 보지도 않았고 항상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했던 참된 군인이었다.
스미스는 당시 탄생한 한국 해병 연대를 자신의 네 번째 연대로 생각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출범 당시부터 미 해병1사단으로부터 훈련을 받고 같이 전투에 참가한 한국 해병대는 한국 육군과 달리 매우 용맹해서 후퇴하는 적이 없었다.
스미스는 그런 한국 해병대를 매우 칭찬하고 아꼈다. 한국전쟁 당시에 올리버 스미스가 미 해병1사단장이었음은 우연이라기보다는 신의 뜻이었고 한국과 미국국민에게는 크나큰 축복이었다.

첫댓글 비우미님 감사합니다. 아직 연재가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흥남철수작전의 한국인 쉰들러 현봉학의사의 얘기와 레너드 라루 빅토리호 선장 스토리가 남아 있습니다 ㅡ끝까지 함께 해 주십시요.
전쟁의 방법을 모르는 우리들에게
오늘글은 평이 들어가서 아주 부드럽게 보았습니다.
워커 장군은 저래서 돌아가셨군요.
워커 힐의 이름이 여기서 유래 되었구요.
그 잘생기고 일잘하는 금수저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파면되다니 어처구니 없습니다.
스미스장군의 승진을 거부한 일도 있구요.
어디나 아무리 잘 해도 주위에 인간의 호불호가 있어서
실력도 좋아야하지만 주위사람들 운영도 잘 해놓아야
승진도 할 수 있고 술수도 부려놓아야 할 듯합니다.
전쟁후 한국해병대까지 잘 지켜주셔서
현재의 귀신잡는 해병대로 발전한 듯합니다.
한국 참전 10개월이었지만
그분에 한국참전의 실전은 잊지못할 추억이 되었습니다.
77년 12월의 별은 졌습니다.
참 감동깊게 625실전을 보았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625때 한국군 문관으로 참전하셔서
전쟁은 한번도 격어보지 않으셨답니다.
그져 올라가고 내려가고 뒤에서 일하셨다고 하시더군요.
이렇게 장진호 전투는막을 내리는군요.
수고 마니 하셨습니다.
기만용용님이 안 보이시는데 혹시 아프시고 계시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이 글에 항상 댓글을 달아 주셨는데 아주 걱정이 됩니다. 혹시 아시는 분 있으시면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