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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무사 253
장인(丈人)
남자들의 대부분은 점심에 약속을 하지 않는다. 뭐 금전이 관련된 사업상의 일이라면 몰라도. 그리고
사업적인 만남도 밤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술 한잔을 곁들인 식사 앞이라면 어떤 대화라도 자연스레 풀리는 법이니까.
“이것 참......”
머리를 벅벅 긁으며 청빈로를 터널터널 거니는 장추삼의 얼굴엔 왠지 모를 무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내 적성에 이런 약속은 무리라고.`
그럼 뭐 할 건가. 지상 명령인데.
무리든 뭐든 따질 계제가 아니다. 일 다경이라도 시간을 어겼다간 평생을 후회할 테니 그저 빨리 가
는 수밖에.
막상 봉황루 앞에 서자 저절로 한숨이 나와서 장추삼의 어깨가 축처져 버렸다. 보나마나 엄청난 책망
이 뒤따를 게 뻔하고, 변명할 여지가 없으니 분명 재미적은 자리에 될 터.
`고역이다, 진짜.`
힘없이 휘장을 걷으며 들어가는 그의 모습은 공부 한 자도 안하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서생과도 같았
다.
“어라? 추삼이가 이 시간에 웬일인가.”
“웬일 맞아요.”
봉황루에 들어서자 반갑게 맞이하는 노칠이었지만 오늘은 그조차도 귀찮다.
“귀빈실 남는 자리 있죠?”
축 처진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한 노칠이 그의 말을 되새기고 깜짝 놀랐다.
`지금 이층 귀빈실이라고 한 거 맞아?`
힘없는 얼굴로 이층 계단을 오르던 그가-세상에, 장추삼이 봉황루의 이층을, 그것도 귀빈실을 찿다
니- 뭔가에 홀린 얼굴로 서 있는 노칠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했다.
“이따가 잘생긴 서생 하나 올 테니 안내 부탁해요. 그전에는 아무것도 시키지 않을 거니까 그리 아
세요.”
“알았네.”
대답을 하며 돌아서던 노칠이 `거참, 이상하다`를 연발했다. 이것저것 귀찮아서 그냥 무시하려 했지
만 노인네의 혼잣말이 아무래도 걸렸다.
“뭐가 그리 이상해요?”
“아니, 아까도 어떤 젊은이가 이층 귀빈실을 찿으면서 나중에 누구올 거라고 안내를 부탁하더군. 자
네와 다른 점은 나중에 올 사람의 인상착의 정도랄까?”
“......?”
“그 사람은 무정한 바보 날건달을 안내해 달라더군.”
무정한 바보 날건달?
장추삼의 미간이 좁아졌다.
봉황루 이층의 귀빈실은 총 다섯 자리. 그 모두가 칸막이로 막혀 있는 관계로 출입구룰 볼 수 없기에
약속이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만날이의 인상착의를 점소이나 일하는 이들에게 일러주어 안내를 부탁한
다.
귀빈실은 막혀 있기도 하지만 방음 또한 잘되어 있는 터라 안에서의 말이 흘러나가지 않을뿐더러, 밖
의 소리 또한 차단되기에 누가 와서 말을 해도 알아듣기 힘든 특성이 있으니까.
그런데 봉화루쯤 되는 음식점이라면 당연히 손님이 많을 수밖에 없고, 일하는 이들도 손님 하나하나
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
해서 안내를 부탁할 때는 그 사람의 인상착의를 되도록 정확하고, 알기 쉽게 묘사해 줘야 한다. 자리
값까지 줘야 하는 귀빈실을 빌렸다 함은 남에게 방해받기 싫어서일 것이고, 모르는 이가 불쑥 얼굴을
내밀면 기분이 좋을 리 없으니까.
그런데 무정한 바보 날건달? 이런 뜬구름 잡기가 어디 있는가?
장추삼의 표현도 다소 추상적일 수 있었지만 그건 나름대로 우건의 특성을 잘 살린 얘기였다. 그가
보통 잘(?)생겼는가!
“이상한 손님이네?”
“그러게 말일세. 내 이곳에서 그리 오래 일했지만 그 공자처럼 잘생기고 차가운 사람은 처음 봤다네.
뭐가 그리 열받았는지 냉기 풀풀 뿌리며 할 말만 하고 또각또각 계단을 오르더군. 거치적거리는 것은
무엇이든 박살 내버릴 기세였어. 인상착의를 얘기할 때 바보라는 말에 유난히 힘을 들었다네. 쯔쯔...
나중에 올 이의 운명을 대변하는 듯하더군.”
“쿠, 쿨럭!‘
고개를 갸웃거리던 장추삼이 노칠의 말에 콱 사레가 들렸다.
“지, 지금 뭐라고 했어요? 냉기 풀풀 뿌리는 미공자라고요?”
“아무렴. 사람 구경 하도 많이 해서 나름대로 미의 기준이 높다면 높은 이 노칠이 오늘 개안을 했지.
점소이 녀석들이 뒤에서 쑤군거리는 걸로 봐서 전에도 들렀던 모양인데 말이야.”
`에이, 설마?`
약속 시간까지는 이직도 한 식경은 넘게 남아 있다. 자기야 지은 죄가 있어서 일찍 왔다지만 그 편에
서는 벌써 와서 기다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 공자, 몇 번으로 갔는데요?”
일단 신경은 쓰인다.
“삼번이라네. 아아, 추삼이. 괜히 얼굴 보려고 얼쩡거리지 말게나. 다시 말하지만 그 공자, 오늘 사
람 하나 제대로 잡을 기세였어.”
“으음......”
왜 이리 찜찜할까.
`에이, 설마!`
뭐라고 구시렁거리는 노칠에게 다시 한 번 부탁을 하고 이층에 오른 장추삼이 주위를 한번 울러보다
가 삼번 탁자에 눈을 돌렸다.
물론 탁자는 막혀 있었다. 그렇지만 간간히 차를 홀짝홀짝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고, 어쩐 일인지 그
음향은 서릿발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에이, 설마~`
열심히 설마를 찿는 그가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사항이 있었으니, 설마라는 놈은 꽤나 자주 사람을
잡는다는 사실이다.
다른 탁자에 털썩 앉아 기다리면 그만인 것을 설마를 찿으면서도 삼번 탁자가 신경 쓰여 빙빙 돌기만
하던 장추삼이 끝내 미친 척하고 삼번에 들어서기로 했다.
뭐, 아니면 그냥 머리 한번 긁고 잘못 찾아왔네요, 하면 그만 아닌...
`가만!`
만약 그렇게 되면?
`나 스스로 무정한 바보 날건달이 되는 거잖아!`
무정한 바보 날건달이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체면을 지키고 기다리느냐, 아니면 바보 날건달이 돼서
찜찜함을 삭초제근(朔草際根)하느냐.
`에라!`
달리 바보 날건달인가? 갑갑하고 머리 아픈 거 참지 못하는 그다. 옆 탁자 신경 쓰며 죽치고 앉아 있
으라면 차라리 목을 매고 말 거다.
끼익-
“어이구, 실례......”
“늦었군요.“
쿠쿵!
차분히 가라앉은 우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장추삼은 혼이 다 빠져 나갔다.
“어, 어떻게 벌써 와 있는 거요?”
“차 마시고 싶어서요. 왜요, 안되나요?”
이젠 빼도 박도 못한다, 자신은 무정한 바보 날건달이었던 거다.
“아, 앉아도 되겠소?”
“그럼 올라타라고 의자가 있나요?”
한마디 한마디가 다르다. 잔주먹 수준이 아니라 이건 하나하나가 결정타다.
“탐색전도 없구먼, 끄응......”
“몸 성히 잘 돌아왔군요. 하긴, 그러니까 팔자 좋게 늘어져 있었겠지. 가슴 졸이며 걱정한 사람만
멍청이가 돼버렸지 뭐야.”
“나도 별로 마음이 편치 않았......”
“오, 그래서 침상과 밥상을 종횡무진하며 등 따습고 배부른 나날을 즐겼던 거로군요? 마음이 편치
않은 이는 그렇게 지내는 거였구나,”
같이 마음이 안 좋았는데 왜 나만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했지, 라며 툴툴거리던 우건이 종
을 흔들어 점소이를 불렀다.
“일단 차나 마시죠.”
점소이를 부른 그녀가 또 차를 시키려 들자 장추삼이 급하게 말렸다.
“여태까지 마신 차를 뭐 하러 시키오? 이르긴 하지만 저녁을 시키도록 합시다. 오늘 내가 거하게 한
턱 쏘겠소!”
미인들이 맛있는 음식에 약함은 막고불변의 질리. 장추삼의 호기로운 선언도 이에 기인했다.
“그건 너무 당연한 거 아니에요? 걱정 말고 우선 차부터 먹자고요. 여기 용정차 좀 가져다줘요.”
그러고 보니 우건이 여태 마시던 차는 손님들이 음식을 기다리며 흔히 마시는 오차였다.
점소이가 주문을 받고 나가자 괜히 미안해진 장추삼이 우건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어떻게든 말을 풀
어보려 했다.
“차를 마시러 왔으면 진작에 주문을 하지 그랬소? 이 집의 오차 맛을 뻔히 알면서.”
“난들 오차 따위나 홀짝이고 싶었겠어요? 어떤 날건달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받은 즉시 맨발로 뛰어
오리라 생각했던 사람이 약속 시간 다돼서 어기적거리며 걸어올 줄은 몰랐던 거죠.”
차라리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건데.
`가만?`
생각해 보니 억울하다. 자신은 편지를 받자마자 날아왔다. 그런데 시간의 공백이 생겼다는 건?
“이 얼음덩어리가 농땡이를 부렸구나!”
그의 분노에 찬 독백은 우건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뭔가 오해를 하는 모양인데 난 편지를 받자마자 달려왔다오. 그러게 전달자를 잘 선정......”
“남자가 쫀쫀하게 변명이나 하고, 보기 안 좋아요.”
차가운 응대. 어차피 떨어질 곳도 없었던 분위기지만 이건 아예 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젠장, 어떻게든 반전을......`
해야 하는데 도무지 방법이 없다. 그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같은 상황의 한없는 반복에 슬슬
짜증이 난다.
보통 남녀의 싸움이 커지는 이유는 서로 간의 엇갈림에 있다. 처음 성낸 쪽이 한껏 해대고 풀어지려
는 무렵이면 잘못을 한 쪽이 틀어져 있기 마련이고, 그래서 시발점과 전혀 다른 주제로 번져 버리곤 한
다.
적당히 성내고 적당히 풀어지면 좋으련만 인간이란 동물은 적당히란 단어와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다.
`대체 날 왜 부른거야?`
서서히 치겨드는 성질머리.
혼을 내든, 성질을 부리든 말은 섞어줘야 할 것 아니가!
품어두지 못하는 장추삼의 성격상 기분은 그대로 얼굴에 반명되었고, 눈치 빠른 우건이 그의 얼굴을
보고 이마를 찌푸렸다.
`뭐야, 남자가 이 정도 가지고 삐친 거야?`
이제 슬슬 얘기를 나누려고 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줬더라면, 조금만 더 살갑게 말해 줬더라면 못
이기는 척하고 풀어졌을 텐테.
`요 정도의 투정도 받아주지 못하고 토라졋다는 거야? 밴댕이 같은 남자!`
이 정도면 많이 참은 거다. 한마디만이라도 예쁘게 건넸다면, 한 번이라도 웃어줬다면 어떤 욕이라도
감내했을 텐데.
`아무리 잘못을 했다고 해도 일단 상대의 말은 들어줘야 할 것 아니야. 이런 여자와 함께라면 평생이
암흑 동굴일 거야.`
주문한 차를 탁자에 내려놓던 점소이가 둘이 뻗어내는 살인적인 기세에 하마터면 동사할 뻔했다.
“일단 진정하고 내 말을 좀 들어주오.”
“......”
“말 듣기 싫소?”
“......”
“에잇, 뭐든 말을 해보라니까. 사람 답답하게 뭐 하는 거요?”
남녀의 싸움에서 골이 깊어지는 두 번째 유형.
바로 여자의 침묵이다.
잘못을 한 쪽이 남자든, 여자든 보통의 남자들은 대화를 통해 일을 해결하려 들지만 여자는 다르다.
감정이 뒤틀려 있는 상태에서 그들은 절대로 입을 열지 않는다. 물론 이것이 상대방을 무시해서거나,
그 자리에 있기 싫어서는 아니다.
그저 조용히 있고 싶을 뿐인 거다. 해서 현명한 남자들은 이런 경우에 잠자코 여자의 말문이 트기를
기다리는 쪽을 택한다.
아무리 윽박지르고 난리 부려봐야 수동적으론 절대 열리지 않는 게 여자의 입이고 시간이 지나면 제
스스로 풀어버리니까.
그러나 다혈질의 남자들은 이걸 `무시, 또는 `대화 의사 없음`쯤으로 받아들이고 버럭 화를 내버린다.
바로 이 무정한 바보 날건달처럼.
“말 좀 하자니까! 입에 꿀이라도 바른 거요?!”
“......”
`진짜 이 여자가 뭐 하자는 거야!`
짜증이 날 대로 났지만 아무튼 남자가 여자를 울리는 것은 썩 보기 안 좋은 일이라 고개를 처박은 장
추삼이 지겨움을 달래기 위해 딴생각을 했다.
`비천혈서는 모두 열 장. 문파 역시 열이라고 보면 되고, 수시인들은 하나라고 보면 되나? 아니지.
하나로 보기엔 무리가 있어.`
발까지 달달 떨어가며 삼매경에 빠진 그의 모습이 우건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가뜩이나 안 좋은 상태
에 이런 모습은 그야말로 기름이다.
“많이 피곤한가 봐요? 그럼 댁에 가서 쉬시지, 뭐 하러 딱딱한 의자에서 그러고 있어요?”
한껏 비꼬아줬지만 장추삼은 세월아,네월아, 고개까지 끄덕여 가며 탄 청에 여념이 없었다.
“이봐요! 그럴 거면 집에 가라니까요!”
번뜩.
숙였던 그의 고개가 쳐들려지자 빽 고함을 질렀던 우건이 흠칫 입을 다물었다.
차갑게 얼어붙어 있는 장추삼의 눈빛. 언제 그녀가 이런 응시를 받았겠는가. 문득 미안해졌지만 그에
수반되는 반발감이 더 컸기에 우건은 홱 고개를 돌렸다.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던 장추삼이 찻잔을 들며 힘없이 뇌까렸다.
“가지 말라고 해도 갈 건데, 시킨 차는 들어야 할 것 아니오.”
하고 말을 끝냈으면 좋으련만 뒤이은 그의 한마디는 상황을 아예 최악으로 몰고 가버렸다.
“...차 값이 얼만데.”
쨍!
“그깟 차 값 내가 내면 될 거 아니에요!”
“어? 그냥 가오? 이 차 꽤나 비싼 건데?”
울먹.
`어덯게 저런 말을!`
뒷등을 보인 여자에게 저리도 야박할 수 있을까.
`이게 아닌데.`
장추삼 역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의도는 이게 아니었는데 잘 못 끼워진 첫 단추의 여파처럼 도
무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돼버렸다.
`미치겠네.`
다시 고개를 처박고 볼만 실룩거리는 장추삼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보던 우건이 장탄식을 토하
고 천천히 칸막이를 밀었다.
이때!
“서로에의 어설푼 기대가 종종 어그러진 결과를 낳곤 하지. 처음부터 바란 것이 없었다면 무엇이든
너그럽게 받아들였을 것을.”
느닷없는 전음성. 그런데 목소리의 주인은 황당스럽게 가짜 한혈흑의존이 아닌가.
`뭐야?`
놀란 장추삼이 주위를 둘러보다 네 번째 귀빈실에서 눈길을 멈췄다. 저 아저씨가 왜 저기 있는 건가.
그러나 의문을 가질 사이도 없이 흑의인의 전음성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한 번의 엇갈림 때문에 평생 함께할 추억을 미완성 채로 포기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바보짓이 아닐까.”
“......!
뭔가 가슴을 세차게 밀려온다.
“마음속으로 반문해 보게나. 지금 이 순간을 일생 동안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고.”
뭔가 뜨거운 것이 밀려온다.
“그러고도 아직 앉아 있는 건가! 이런 천하에 옹졸한 친구!”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장추삼이 일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막 발을 떼고 있던 우건의 손목을 강하
게 움켜잡았다.
빙글 돌아서는 그녀를 따라 점점이 흩뿌려지는 눈물방울들이 이슬처럼 난간에 맺혔다.
“난!”
몸은 돌렸지만 얼굴은 아직도 그를 외면하고 있었기에 답답했지만 장추삼은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토
했다.
“난 아직 당신의 이름도 모르오!”
일견 짧고도 평범한 얘기.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무한한 뜻을 헤아린 우건이 눈물을 흘리는 얼굴로 가
만히 미소 지었다.
역시 이 남자는 야박한 인간이 아니다. 단지 서툰 사람일 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
“이렇게 세워둘 건가요?”
“음?”
눈을 한번 꿈벅인 장추삼이 급히 우건을 데리고 탁자고 돌아왔다.
“미, 미안하오. 그런 말을 내뱉다니 난 역시 최저의 인간인가 보오,”
버벅이는 그를 찬찬히 뜯어보던 우건이 손을 내밀어 장추삼의 투박한 두 주먹을 꼭 쥐었다.
“그렇게 몰아간 건 저였지요.”
“아아, 그렇게 말하면 내가 미안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게 되잖소. 그냥 바보 날건달의 사과를 받아주
구려.”
진심이다. 이럴 땐 그냥 받아누는 편이 낫다.
“그럼 마음껏 사과하세요.”
“엥?”
“사과한다면서요? 마음껏 해봐요.”
상체를 세우고 허리에 손을 얹은 그녀의 당당한 모습이 너무나 앙증 맞아서 하마터면 와락 끌어안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눌러 참은 장추삼이 의자에서 재차 일어나 포권의 예를 취했다.
“양양의 옹졸하고 못난 장추삼은 오늘 우건 소저에게 커다란 결례를......”
“됐어요. 이만 자리에 앉으세요.”
“아니오, 잘못을 했으면 제대로 된 사과를 해야 하오! 해서,머리 숙여 사죄드리고, 가슴 깊이 뉘우
치는 마음에서 또 한번 사과하고, 그래도 안 되면 다시 한번 사과를 할 용의가 있고......”
“됐다니까요!”
중언부언 늘어놓던 그가 우건의 비명과도 같은 제지에 말을 멈췄다.
“그럼 진심으로 사과를 받아준 거요?”
“그래요! 그러니까 제발 좀 앉아요. 이상한 염불 외지나 말고.”
이런 음충맞은 사람, 하며 곱게 눈을 흘기는 우건을 보며 장추삼은 스스로에게 기가 막혔다.
어찌 저리도 어여쁜 여자와 다퉜다는 건가!
“이해가 안 되네, 정말.
“뭐가요?”
“그대처럼 고운 여자에게 한순간이나마 몹쓸 말을 하다니,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나 보오.”
반짝.
우건의 눈이 빛났다.
“그렇게 내가 예뻐요?”
자고로 여자치고 예쁘다는 말 싫어하는 사람 없다. 미인이든 아니든.
“당연한 걸 가지고 왜 묻는 거요? 소저는 거울도 보지 않소?”
“정말요?”
“속고만 살았나. 아니 주위에서 예쁘다고들 난리 부리지 않았단 말이오?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들의
심미안에 결정적인 결함이 있는 거요.”
그의 투덜거림에 우건이 다시 장추삼의 손을 잡았다.
“다른 이는 상관없어요.”
“......?”
“다른 누가 뭐라던 당신에게 어여뻐 보이면 된 거예요.”
벅벅.
쑥스러워서 장추삼이 마구 머리를 긁었다.
“이가 생겼나, 왜 이리 가려운 거지?”
“호호호!”
좋긴 좋은데 어색하다.
사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부분이 더 많았다. 몇 차례 만났고 술도 한잔했었지
만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하긴, 본명도 모르는 상태에서 뭘 얘기하겠는가.
“짐작은 했지만 역시 우건이라는 이름은 가명이었구려.”
“당연하죠. 저같이 괜찮은 여자에게 그런 멋대가리없는 이름이 가당키나 해요?”
“지당한 말이오. 우건이 뭐야, 우건이!”
“그래도 나름대로 괜찮은 이름 아니에요, 우건?”
“뭐가 나름대로 괜찮소? 비올 때 두르는 헝겊이 어떻게 괜찮다는 거요?”
“나름대로 괜찮은데?”
끝까지 우기는 우건의 표정에서 뭔가 당혹스러움을 느꼈지만 장추삼은 막무가내였다. 자기 스스로도
멋대가리없는 이름이라고 해놓고 이제 와서 웬 딴소리?
“별로 안 괜찮은데......”
“괜찮다니까요!”
“에휴, 좋소. 괜찮은 이름이오.”
무슨 놈의 변덕이 팥죽 끓듯 잦은지. 이럴땐 그냥 져주는 편이 만수무강에 도움이 된다.
여자란 알면 알수록 모를 동물이다.
장추삼의 백기 선언에 적이 만족한 우건이 살살 웃으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 제 이름을 맞혀봐요. 맞히면 열흘간 연락 두절한 거 봐줄게요.”
“쿨럭!”
차 한모금을 들이키던 장추삼이 입속의 내용물을 그대로 뿜어냈다.
어거지 아닌가. 이름을 맞히라니. 그런 재주가 있었다면 진즉에 돗자리를 폈을 거다.
좋잖은가. 얼굴 한번 보고, 몇마디 툭 던져 주면 되는 직업. 거기다 용하다는 소문까지 돌면 수입도
꽤 짭짭하다도 들었는데.
“저기, 소저...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나 본데......”
“물론 거저 맞히라는 건 아니에요. 암시 하나 줄게요.”
“오, 그게 뭐요? 소싯적에 수수께끼 풀기라면 또 장추삼이가 빠지지 않았지. 청빈로에서 장해미(張
解謎)라고 하면 다 통했었다니까.”
무순 얘기만 나오면 소싯적에 당 뭐뭐. 여태 그가 댄 이 가명들을 줄 세워놓는다면 호북성을 한번 드
르고 남을 터였다.
아무리 봐도 이 버릇은 구제 불능이다.
“장해미? 그렇게 수수께끼를 잘 풀었다고요? 그럼 이 문제는 쉽겠네요. 제 이름은 허명에 있답니다.
그럼 맞혀보세요.”
“엥?”
이럴 수가, 암시가 너무 적다.
그 눈치를 챘는지 우건이 까르르 웃었다.
“왜요, 더 저요? 알았어요. 저랑 너무나 잘 어울리는 말이에요. 됐죠?”
`내 참.`
안 주느니만 못했다.
하지만 기대에 찬 눈망울-인지 장난스러운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을 차마 무시할 수 없고 해서 장추
삼은 또 다시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우건에 암시가 있다고? 비 우자에 두건 건 자, 비 우자에 두건 건 자, 젠장... 그게 뭐 어쨌다는 거
야!“
머리를 감싸 쥐고 고심하는 장추삼을 고소한 얼굴로 바라보며 우건이 기분 좋게 차를 홀짝거렸다. 열
흘간의 속앓이를 보상받는 얼굴로.
장해민지 뭔지는 모르지만 소싯적에 장추삼이 수수께끼를 잘 풀었다는 말은 사실이다. 친구들끼리 그
런 문제를 내고 놀 때면 가장 먼저 답을 대는 쪽이었으니까.
`벌써 머리에 곰팡이라도 핀 거냐. 퍼득, 하고 떠오르는 게 없잖아.~
사람은 자기의 관심사에 따라 움직이는 법이다. 예전의 어린 시절의 그는 수수께끼를 좋아했지만 성
인으로의 장추삼에게 그런 놀이는 잊혀진 지 오래.
당연히 순간적인 재치는 둔감해지고, 내면적인 분석력이 발달한 상태다.
“끄응......”
“포기예요? 그냥 답 말할께요?”
“싫소!”
아직 시퍼런 자존심.
맘대로 해요, 남는 게 시간이니까, 하고 약 올리는 우건이 얄미워서라도 반드시 맞히고 싶었지만 도
통 알 길이 없다.
딱 한 줄기의 암시만이라도 주어진다면 자신있는데.
그때 또다시 광명이 날아들었다, 귓전으로.
“이런 답답한 사람. 보나마나 파자(破字)가 아니겠는가.”
“맞다!”
자기랑 어울리니, 어쩌니, 하는 말에 현혹되어 간단한 속임수에 넘어갈 뻔 했다.
그나저나 저 아저씨, 남의 말 엿듣는 취미가 있었나?
`정 소저 말마따나 진짜 변태 아냐?“
번번이 고맙기는 한데 어쩐지 수상하다.
`아냐, 일단 눈앞의 문제에 집중하자!“
파자라고 했다, 파자.
말 그대로 파자라함은 글자의 자힉을 나누거나, 합치거나 하여 맞히는 놀이다. 비와 두건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단어니까 둘을 합친다는 소린데.
비를 앞에 두거나 두건을 앞에 둔다고 해도 글자가 되지 않고, 그렇다고 두건을 비 위에 올리거나,
아래에 둬도 글자가 이루어지지 않는데.
`가만?`
그대로는 절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문자. 그렇다면 만들어야 한다.
찻물을 조금 따라 雨 와자 巾 자를 쓴 장추삼이 뚫어지게 두 단어를 바라보았다.
있는 그대로라면 만들어지지 않는 문자? 그럼 그 틀을 탈피해야 한다는 말이다. 고정관념의 파괴라면
귀가 닳도록 막상 실행에 옮기자니 힘들다.
오래도록 그렇게 두자니 물기가 서로를 끌어당겨 두 문자가 이상하게 엉키려 들었다. 처음의 단어가
이지러지는 걸 무심히 보던 장추삼이 문득 제 머리를 딱 때렸다.
“이제 알았다!”
“정말요?”
놀라면서도 반가워하는 얼굴. 맞히기를 기대한 걸까, 포기하기 바랐던 걸까.
“후후... 그야말로 우건 안에 모두 들어 있었구려. 파자라는 건 바로 알았는데 글자그대로 조합을
하자니 답이 안 나오지.”
뻔뻔스런 거짓말. 말하자면 스스로 찔려 사번 귀빈실에 귀를 쫑긋 세웠지만 다행히 가짜 흑의존은 아
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뻔한 것 아니오. 두 문자를 병렬해서는 어떻게 해도 문자가 되지 않고, 그렇다고 두건
이 올라가도 말이 되지 않으니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그게 뭔가요?”
정인의 사랑 고백이라도 듣는 여인처럼 살살 웃으며 우건이마지막 말을 재촉했다.
“비 오는 곳에서 두건을 써야겠지. 물론 살짝 눕혀서 말이오. 고로......”
검지손가락을 세운 장추삼이 우건을 향해 쭉 내밀고 판관처럼 선언했다.
“소저의 방명(芳名)은 눈 설(雪), 설 소저요.”
“와아~”
짝짝짝!
유유상종(類類相從).
별로 대단한 문제도 아니었건만 박수까지 쳐가며 과장된 모습으로 좋아하는 우건이나, 득의양양해서
뱀처럼 목을 세우는 장추삼이나, 그 나물의 그 밥이었다.
그렇게 박수를 치던 우건, 아니 설이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어쩐 일인지 몰라도 장추삼이 자신을 가
리킨 그대로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뭐가 잘못됐나요?”
“이럴 수가!”
“왜요? 왜 그래요?”
“정말 이름 그대로구나!”
느끼함이 철철 흐느는 대사. 사번 귀빈실에서 헛구역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장추삼이 설을 띄우
기에 전념했다.
기회는 아무 때나 오지 않으니까.
복사꽃처럼 붉어진 우건의 두 볼. 효과가 있다!
“소저를 표현하는 데 이보다 어울리는 단어가 어디있을까. 누군지 몰라도 작명하신 분은 굉장한 안
목과 훌륭한 인품을 가지셨을 거요.”
“으허험!”
`뭐야, 저 아저씨?`
사호 실에서 난데없는 헛기침 소리가 들려와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말이 좋아 귀빈실이지, 이게
뭔가.
`방음 잘된다고 자부하더니 말짱 헛소리네. 옆 탁자 소리가 다 들리잖아.“
한껏 잡았던 분위기가 날아갈까 노심초사했지만 설은 그소리를 듣지 못한 듯 여전히 밝게 웃었다.“
“아버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에요.”
“그렇구려. 역시 부전여전이오!”
“커허허험!”
이번 헛기침은 아주 천둥 소리를 방불케 했다. 그러나 장추삼은 이를 무시하고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설의 아버지를 계속해서 띄워주었다.
자고로 자기 아버지 칭찬해서 싫을 사람 없으니까.
“으음... 아, 아무튼 뵙지 않아도 아버님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겠소. 작명 하나만으로도 말이오.”
“어허험` 커험!”
분명 전음이 아니었다. 뭘 잘못 먹었즌지 연신 헛기침을 해대는데 자꾸 말허리가 잘리니 짜증이 용솟
음친다.
묘한 건 설의 반응이다. 분명 그녀도 듣고 있으련만 설은 저 괴사망측한 소리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거 내 귀가 잘못된 건가?`
“배고프지 않소? 한참 떠들었더니 점심 밥이 다 꺼져 버렸네. 저녁 식사 합시다.”
신경 쓰이는 소음에서 탈출한 방안으로 식사를 제안한 장추삼이었는데 우건 역시 밝게 화답했다.
“맛난 거 사줘요!”
음식을 시킬 때까지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최고조였다. 그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불쑥.
느닷없이 칸막이가 젖혀지며 얼굴 하나가 고개를 삐죽이 내밀었다.
말할 것도 없이 가짜 흑의존이었다.
“깨가 쏟아지는군. 허허허.”
“......!”
이건 조금 너무하다. 어떻게 남의 탁자에까지 난입한다는 건가. 몇미디 충고가 고마워서 여지껏 아무
런 말을 하지 않았더니 이젠 점입가경이다.
아무리 여자 앞이라지만 더는 못 참겠다.
“지금 뭐 하는 거요! 밥 먹으러 왔으면 조용히 식사나 할 일이지, 왜 남이 탁자를 기웃거리느냔 말이
야! 멀쩡하게 생긴 아저씨가 정말로 맛이 갔나?!”
벌떡 일어선 장추삼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탁자가 덜덜 떨렸다. 내공을 싣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의 기세라면 누구라도 오금이 저릴 터. 그런데 흑의인은 누구나가 아니었다.
“자네는 다 좋은데 입이 너무 걸어서 탈이야. 그 점 유의하도록 하게.”
이 판국에 충고라니.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마치 아들에게 훈시하는 아버지처럼 흑의인은 근엄하게 한마디를 던졌고 이 말
은 장추삼의 인내력으로 버틸 수 있던 마지막이었다.
“아저씨, 나 지금 무지하게 참는 거거든? 정말 한번 해보자는 거라면 각오 단단히 해두는 게 좋을
거야.”
“어허, 저 폭급한 성격머리하곤. 갈대처럼 연약한 사내도 문제지만,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대책없이
날뛰는 경우는 더 곤란한 거야. 알아 듣겠나?”
알아듣긴 개뿔.
`정말 이 아저씨가 뭘 잘못 먹고 미친 게 아닐까?`
어디 남의 집에 와서 감 놔라, 배 놔라인가?
“만약 아까 보내준 축고를 믿고 그러는 거라면 확 까발리면 되거든? 고맙긴 했지만 이제 그만 우려
먹고 나가시오.”
“충고라뇨?”
담담하게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하던 우건, 아니, 설이 문득 물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큰마음을 먹고 장추삼은 아까 흑의인이 보내준 몇 번의 전음에 대해 모조리 털어놨다.설으로서는 실
망스러울지 몰라도 저리 치사하게 나오는데 도리가 없다.
“그랬군요.”
장추삼의 고백 아닌 고백이 끝나자 차분히 가라앉은 음성으로 설이 대답했다.
“그럼 나가는 저를 붙잡은 것도, 파자를 해석한 것도 모두 전음 때문이었다는 얘기네요.”
`아, 진짜 미치겠네.`
그런 말을 듣고 좋을 여자가 없다. 하물며 모든 일이 누가 시켜서라고 생각한다면?
경색된 분위기, 벗어날 뾰족한 수도 없다. 오늘 참 일 꼬이는 하루라고 생각 들자 왜지 흑의인이 얄
밉지가 않았다. 그저 운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비록 저 아저씨의 충고가 깨달음을 주었지만 내 마음은 처음부터 하나였소.”
그런데 왠지 따랏서 차분하게 장추삼이 담담하게 설을 내려다보았다,
“쫓아 나갔든, 파자라는 말을 듣고 이름을 알아냈든 간에 당신이 싫었다면 이런 잔재주 따위는 부리
지 않았을 거요. 말주변이 없어서 별다른 얘기는 못하겠고... 이런 내가 싫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
장추삼과 흑의인을 번갈아 보던 설이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도 진지한 장추삼의 태도도 태도려
니와 벌써부터 각 잡으려는 흑의인이라니.
“아무튼 대단한 사람이네요?”
“음? 그게 무슨 말이오?”
뚱딴지 같은 설의 대꾸에 장추삼의 눈이 커졌다. 의도와 전혀 다른 대답이 아닌가.
“대단하지요. 정말 대단해요.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고 허락을 받아 내다니, 당신이 아니고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예요.”
`뭔 소리야? 웬 허락?`
계속 이어지는 뜬금없는 소리에 장추삼이 입술이 슬슬 삐져 나오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
르겠고, 뭐가 좋아서 저리 방긋방긋 미소 짓는지도 모르겠다.
방금 전까지 냉랭하더니 금방 저리 웃다니. 여자라는 동물이 아무리 천변만화(千變萬化)하다지만 오
늘 도대체 몇 번이나 얼굴을 바꾸는건지.
“아무튼 아저씨, 그만 가보시오. 내 다음에 거하게 한잔 살게요.”
뒤숭숭한 장내를 수습하기 위해 장추삼이 일단 불청객을 쫓아내기로 했다. 그럼 뭐든 정리가 될 것
같다.
이때 설의 뜬금없는 소리가 이어졌다.
“세가 사람들이 알면 기절을 할 걸요, 그쵸?”
“대체 무슨 말이야!”
저 아저씨의 난입 이후 상태가 많이 안 좋다. 정신적인 충격을 받을걸까, 알 수 없는 소리나 해대고.
헤실헤실 웃기까지 하는 걸로 보아 문제가 심각하다.
“설 소저, 냉수라도 한 잔 쭉 들이킴이......”
“그만 장난치시고 자리에 앉으세요. 곧 음식 온단 말이에요.”
그녀의 눈길 방황은 흑의인을 향해 있었다. 그렇다면 둘이 아는 사이였다는 건가? 또, 둘이 여태 장
난을 쳤다는 거고?
`그럼 지금까지 날 가지고 놀았다는 거야?`
기분이 상활 대로 장추삼의 얼굴이 납덩어리처럼 굳어지려는데 설의 다음 말이 귓전에 내리 꽂혔다.
통렬하게.
“자꾸 그러시면 나중에 세가에 가서 죄 말해 버릴 거예요, 아버지.”
콰콰쾅!
아
버
지
!
`아버지, 아버지.......`
간단한 말이다. 쉽고, 누구나 사용하고,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단어다.
`아버지, 아버지......`
그런데 오늘따라 저 말이 너무나 버겁다. 아니, 저 단어에 눌려 압사할 판이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래서 파자라는 걸 알았던 거다.
그래서 헛기침을 그리도 맹렬하게 해댄 거다.
그래서 동네 촌장님처럼 성가실 정도로 참견을 해댄 거다.
`가만?`
거슬러 올라가면?
그래서 망아지만한 딸내미를 찾아왔던 거다.
그래서 날건달이라면 이를 갈았던 거다, 뭐 얼마 전까지 건달이었다는 걸 부인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래서 호북에 온 거고, 그래서 청빈로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거다.
그래서... 장추삼이라는 이름 석 자에 저리도 놀랐던 거다.
화? 그런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화는 무슨!
장추삼은 제가 해야 할 처신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경우에 말이다.
털썩.
“몰라뵈서 송구합니다, 어르신.”
무릎을 끊고 고개를 팍 숙인 그가 마음속으로 장탄식을 터뜨렸다.
“일단 자리에 앉게.”
주객전도. 이제 주도권은 완전히 흑의인에게 넘어가 버렸다. 저체가 밝혀지자 그는 위풍당당, 장내를
압도하고 있었다.
하나 어쩌겠는가. 죽으라먼 죽는시눙까지 해야 할 판국인데.
“예.”
일어선 장추삼이 의자를 빼서 조용히 착석했다.
“우리 설이에게 얘기 많이 들었네.”
이거 순 구라다. 흑의인은 어제 처음으로 설을 만났고 대화를 나눈 시간은 일 다경이 채 되지 않았다.
둘이 약속 장소 잡은 게 `얘기 많이 들은` 축에 속할 리는 없지 않은가.
“그렇습니까!”
이를 알 리 없는 장추삼은 고무되... 려다 흠칫 입을 다물었다.
그간 자신에게 늘어놓았던 날건달에의 적개심, 어디서 바롯되었겠는가?
`이상하네. 설 소저가 내 험담을 하진 않았을 텐데.`
그저 딸내미를 잃는 것에 대한 거부감의 발로?
단순히 그렇게 치부하기엔 너무 격렬한 반응이다.
`어디서 괴상한 소문을 엿들었나?`
그건가 보다. 사람들은 소문에 무지 약하니까. 자기가 신뢰하는 사람이 전하는 얘기는 콩으로 팥죽을
만든다고 해도 믿으니까.
그래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괜히 미워하고 흉보는 게 사람이고, 이건 오히려 나이가 많은 이들이
자주 범하는 우(愚)다.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장추삼의 모습을 미래의 장인을 대하는 어려움 정도로 파악한 흑의인이
살짝 기분 좋아져서 부드렇게 말을 거냈다.
“너무 긴장하지 말게나. 할말도 많은데 이리 딱딱한 분위기라면 뭘 할 수 잇겠나?”
“예......”
어느 놈일까, 하며 부녀가 말한 세가의 인물 가운데 가상의 하나을 열심히 씹던 장추삼에게 흑의인이
딸자식 내주는 부모의 통상적인 질문을 던졌다.
물론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럼 형제자매가 몇인고?”
“삼 형제 가운데 막내입니다.”
라고 대답한 장추삼의 눈꺼풀이 슬쩍 내려갔다.
`얘기 많이 들었다더니.`
형제자매도 모르면서 얘기는 무슨.
“그럼 형님들은 뭘 하고 있는가?”
“두 분 모두 이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순간 흑의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건 설 역시 마찬가지였고, 장추삼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렇군. 심리가 컸겠네.”
“......”
괜히 안절부절해진 설의 모습에 장추삼이 쓴 맛을 다셨다. 말을 한 적이 없으니 모르는 건 오히려 당
연한 일이다.
뭘 미안해하는 거지.
“아버님이 표사라고 들었네. 양양의 자랑 신견용쟁 장유열 대협 말이야.”
이때 장추삼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저희 아버님은 비록 대협까지는 아니지만, 최고의 가장입니다.”
“최고의 가장이라......”
문득 흑의인은 한번도 본 적 없는 장유열이라는 가장이 무척이나 부러워졌다. 최고의 가장, 아들에게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부러운 분이로군, 자네의 부친.”
“......”
왠지 무거워진 분위기. 흑의인 역시 답답했는지 나름대로 활기찬 대답이 나올 만한 질문을 던졌다.
“그래, 자네 꿈이 뭔가? 설마 그냥 표사로 남을 생각은 아니겠지?”
무위로 보나, 하면서 미소 짓던 그는 장추삼의 간단한 대답에 그만 할 말을 잊어야 했다.
“그냥 표사할 겁니다만? 별달리 재주가 없거든요.”
“뭐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그의 태도에 장추삼이 어이없어했다.
“어라, 왜 화를 내시는 겁니까? 날건달을 그리 미워하시기에 드린 말씀인데. 그럼 표사 때리치고 건
달 짓이나 할까요?”
“이런 답답할 때가 있나!”
일어서서 가슴을 탕탕 치던 흑의인이 손가락을 치켜들고 장추삼을 똑바로 가리켰다. 얼마나 기운차게
가슴을 쳤던지 음식물을 담은 접시들이 출렁출렁 춤을 췄지만 장추삼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이구 아프겠다.`
“무릇 청춘이라 함은 모든 걸 가질 패기와 열정이 사랑 꿈틀거릴 시기건만 어떻게 자네는 그런 한심
한 소리를 내뱉는다는 건가! 젊은이가 그리 웅심이 없어서야 어디에 써먹겠느냔 말이야!”
“저희 표국에서는 잘만 써먹던데요?”
멀뚱멀뚱 눈알을 굴리며 태연스레 대꾸하는 장추삼의 태도는 그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표국이라니! 그런 좁은 곳에서 젊음을 허비하겠다고? 자네, 그것밖에 안 되는가!”
벅벅.
열내는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기에 머리를 긁던 장추삼이 나름대로 기분을 맞춰주려 머리를 짜냈다.
아마도 흑의인은 이런 대답을 원했던 것이 아닐까.
“그럼 이동 실회행이라도 할까요? 오,그거 좋겠다! 중원 전체의 표국에서 청부를 받고 실회행을 한
다면 전국 각처를 돌아다닐 수도 있고, 젊음도 허비하지 않아서 좋고, 그야말로 일석이조로군요!”
“그런 말이 아니야! 머리 속에 뭐가 들어 있나, 자네는!”
“저도 제 머리까지는 열어보지 않아서 모릅니다만?
으드득.
`이놈 다른 건 몰라도 몸 움직이는 것하고, 깐죽거리는 건 고금제일의 수준이 아닌가.`
흑의인이 기가 막혀 장추삼을 빤히 바라보았지만 별로 트집 잡을 것이 없었다. 제 아들이라면 말대꾸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갈구했지만 아직은 어정쩡한 사이니 뭐라 하겠는가.
설은 둘의 대화를 방관자라도 된 듯 느긋하게 관망하고 있었다. 특별히 나설 만한 구석도 없고, 나설
이유도 없고 해서였다.
“그럼 자네, 무공을 왜 익혔는가?”
“예?”
“왜 무공을 익혔냐고? 왜 강호인이 됐느냔 말일세. 그냥 평범하게 살았으면 될 것을 힘들게 무공를
익혀서 힘든 사건에 휘말렸느냐고?”
“그건 순전히ㅣ 어쩌하다가입니다. 무공을 익힌 것도 그렇고, 희한한 사건에 말려든 것도 그렇고.
세상 어느 누가 짜증나는 일에 얽히고 싶겠습니까? 에휴~ 전생에 죄를 많이 지었나 봅니다.
통절한 탄식. 하지만 이 말은 흑의인으로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그는 아예 발까지 구르
며 흥분했다.
“뭐라고? 어쩌다 무공을 익혀서, 어쩌다 일에 휘말렸다고? 그런 천고의 몸놀림을 가지고 고작해서
표사나 해먹겠다고? 자네 사부님이 들으면 아마도 피눈물을 흘리실 게야!”
“무슨 말씀입니까? 제 사부 영감은 그저 편안하게 살라고 충고했습니다만?”
“이익!”
쿵!
매고 있던 검을 탕 내리친 흑의인이 자리에 털석 앉아 냉수를 마구 들이켜다 성이 차지 않았는지 점
소이를 불러 술을 가져오라고 했다.
“답답한! 답답한!”
삼류무사 254
사흘간의 기다림
분이 풀리지 않아 식식거리는 흑의인을 물꾸러미 바라보던 장추삼이 지금까지의 얼굴을 버리고 착 가
라앉은 음성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도 어르신의 말씀과 같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제가 이런 사건에 휘말려 들기 전입니
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무학을 익히는 목적이 반드시 천하제일을 다투거나, 아니면 강호의
대영웅이 되기 위해서입니까? 어르신께서도 그런 생각으로 무학을 익히신 겁니까?”
“음?”
예상치 못한 반격. 갑자기 진지해진 장추삼의 물음에 흑의인이 저도 모르게 아주 먼 옛날의 어느 오
후를 떠올렸다.
그 날은 그 년도 들어 가장 추웠던 겨울날이었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그는 방 안에서 빈둥거리다 그
의 아버지에게 불려가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는 몇 마디 충고를 듣고 소영당의 당주와 연무장으로 나가
야만 했다.
너무 추워서 토끼털 옷을 입으려 했지만 간단한 경장을 제외하고 모조리 벗어야 했기에 바들바들 떨
면서 도착한 연무장에는 소영당주 말고도 두 당의 당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간단한 보법이라며 보여준 몸 움직임, 어린아이로는 도저히 흉내 내기 어려운 변화였지만 이
를 따라 하지 못하면 얼어 죽게 생겼기에 그는 눈물 반 콧물 반의 얼굴로 열심히 발을 놀렸다.
콧물이 고드름처럼 매달리고 눈물이 얼어붙어 볼까지 퍼석거렸지만 세 당주는 차가운 눈길로 그의 움
직임을 재촉하기만 했다.
넘어져서 무릎이 까져도, 힘이 들어서 눈발에 드러누워도, 그들은 한 치의 미동도 없이 그의 다음 동
작을 기다렸다.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찾았지만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부친의 음성은 어디에도 없었다.
새벽녘까지 이어진 첫 연무는 그렇게 괴로웠고, 끝내 혼절한 그는 꼬박 이틀을 앓아누웠지만 몸을 추
스르자마자 또다시 연무장으로 불려가야 했다.
그날부터 하루에 세 시진 이상은 조식을 해야 했으며 날이 밝으면 몸을 움직여야 했다. 정말이지 무
학의 무자만 나와도 치를 떨었던 시절.
‘허, 참......’
스스로를 돌아보니 할 말이 없다.
‘생각해 보니 그렇군. 무학을 익혔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조차 잊어 버리고 있었어.’
그런데 막상 묻는다면 대답할 자신이 없다. 무학을 익힌 이유 말이다. 왜냐고? 무슨 대단한 포부로
시작한 연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야 둥 떠밀리듯 시작했고, 어느 정도 나이를 먹어 세상 이치를 알게 되었을 땐 세가 일에 매
달려 그런 걸 따질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하고픈 말이 뭐가?”
“별로요. 다만 무학이라는 걸 익혀서 불행해지느니 무학 익힌 티를 덜 내고 행복해지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덤빈 이들이 부지기수인데 저 같은 얼렁뚱땅까지 천하제일인
이네, 무림 대영웅이네, 하는 것에 도전하명 강호가 너무 빡빡해질 것 같다는 거지요.”
또다시 사내가 왜 그리 패기가 없냐고 성을 내렸던 흑의인이 장추삼의 물처럼 담담한 눈길을 받고 목
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꿀꺽 집어삼켰다.
`허, 이여석......`
남자답고, 무학 좀 강한 정도가 아니라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관조(觀照) 적 안목까지 갖추었다니.
“무학 익힌 티를 덜 내서 행복해지겠다......”
“예.”
“강호가 너무 빡빡해질 것 같다......”
“예.”
“그럼 자네는 왜 싸우고 있나. 무엇 때문에 싸우는 거지? 말은 부처님 반토막처럼 늘어놓으면서 결
국 무림이라는 이전투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사실 아닌가?”
흑의인의 질문에 장추삼이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무림인이라서 싸우는 게 아니라......”
숨을 한 번 고른 그가 먼 곳을 응시하며 낮게 뇌까렸다.
“사람답기 위해서 싸우는 겁니다.”
사람답기 위해서.
흑의인은 장추삼이 정확하게 어떤 싸움을 왜 벌이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가 아는 거라곤 하
남에서 한 여인을 위해 흑월회의 여고수와 맞서 싸웠다는 정도?
본인임을 확인한 후, 강호삼서의 소문을 취합하고 어느 정도 싸움의 이유를 짐작했지만 그건 어디까
지나 가정에 불과하다.
늘 장난스러운 얼굴의 뒤편에 어떤 침전물들이 녹지 못하고 가라앉아 있는지, 그것들의 잔해가 어떤
연유로 생겨났는지.
몇 명을 가슴에 묻고, 몇 번의 사건을 겪었는지. 그 결과 어떤 사고를 정립시켰는지.
그리고...
`사람답기 위해서 싸운다......`
뭔가 건드릴 수 없는 의지를 느켜 흑의인이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내는 겅험이 일천하고 말이
거칠지 몰라도 확실한 주관으로 삶을 보고 있다.
“허허, 자네는 나를 몇 번이고 놀라게 하는군.”
빙그레 웃으며 흑의인이 잔을 내밀었다.
“내가 너무 성급했어. 아직 자네를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그려.”
말없이 잔을 든 장추삼이 씨익 웃으며 설을 돌아보았다. 이 정도면 합격이지,라고 하듯.
그러나 그 잔은 그의 입으로 들어갈 운명이 아니었다.
우당탕탕!
거칠게 칸막이가 젖혀지며 육중한 몸 하나가 밀려 들어 왔다.
“뭐야!”
벌떡 일어난 흑의인이 노화를 터뜨리려 할 때 장추삼이 급히 제지했다. 난입한 사람이 다른 이라면
그가 먼저 나섰을 것이나 지금은 다르다.
“노칠 아저씨?”
배를 부여잡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노칠이 아무에게나 손짓을 하며 뭐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입에
서 터져 나오는 건 더운 입김뿐이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눈으로 흑의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냉수 한 잔을 따라 헉헉거리는 노칠에게 건넨 장추삼이 그의 등을
슬슬 쓰다듬어 주었다.
경우 밝은 노칠이 이렇게 손님의 탁자를 덮쳤다는 건?
“헉헉, 하아~ 하라~”
벌컥벌컥 냉수를 들이키고 숨을 돌린 노칠이 문득 눈을 돌려 장추삼을 발견하고는 그 앞에 무너져 버
렸다.
“어이구~ 추삼이, 이를 어쩌면 좋은가!”
“무슨 일인데 이리 난리요?”
무릎을 굽혀 봉황루의 상징과도 같은 노인의 어깨에 손을 얹은 장추삼이 노칠의 눈가에서 흐르는 눈
물을 보고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에 흠칫 몸을 떨었다.
찌릿!
`뭐야, 이 서늘한 기분은?“
“가자, 긴장 좀 풀라고요. 산전수전 다 겪어서 미끈한 마룻바닥처럼 잘 닦인 노칠 아저씨답지 않게
웬 호들갑이오?”
“이 사람아,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닐세.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란 말이야!”
“아래층에서 물정 모르는 취객 놈들이 주정이라도 부린답니까? 허, 참. 오늘 운들이 안 좋네. 이 장
나으리가 와 계신 걸 알았다면 그런......”
근원 모를 불안감을 잊기라도 하려는 듯 과장된 호기로 껄걸 웃는 장추삼을 보던 노칠이 아예 털썩
주저앉아 바닥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이 친구야, 그런 넉살을 부릴 때가 아니야. 지금 복룡표국에 난리가 났다고!”
“복룡... 표국에 난리가 났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아 반문하며 장추삼이 피식 웃엇다. 복룡표국에 난리가 났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내 차라리 황궁에 변고가 일어났다면 믿겠지만 우리 복룡표국에 닌리가 났다
는 건 그야말로 믿을 수 없네. 영감님, 별것 아닌 표물 강탈 같은 거 가지고 이리 호들갑을 떨었다면
오늘 음식 값은 받을 생각도 하지 마요. 이 자리가 장추삼이 일생에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데.
당금 무림에서 복룡표국을 어찌할 세력이 과연 몇이나 될까? 표국 전체의 힘을 다 합한 것보다도 몇
배 강한 실회조원들이 고스란히- 잠시 화산을 방문하러 간 하운을 빼더라도, 그 정도만으로 공포스러운
전력이다- 남아 있는 복룡표국을 어느 누가 함부로 건드릴까.
뭐, 십오 개 대파라면 몰라도 그들이 머리에 활을 맞지 않은 이상 그런 바보 행동을 벌일 리 없다.
“언놈이 우리 복룡표국에 엉겨?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하세......”
“어이구, 이 사람아. 그게 아니라니까! 무림맹에서 왔다고, 무림맹 말이야.”
“무림맹?!”
순간 흑의인이 번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장추삼은 뚱한 표정으로 노칠을 흝어 보았다.
무림맹? 거기가 뭐 어쨌다는 건가?
“아니, 무림맹이 왜 우리 표국에 왔다는 거요? 우리랑 거긴 상관없는 동넨데?”
표물 때문에 왔나, 하던 장추삼이 순간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노칠이 비록 음식점 주방장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줏대도 있고, 사리분별이 정확한 사람이다. 거기다
담량으로 말하자면 웬만한 장정 못지 않을 거다.
그런 그가 이렇게 놀라서, 그것도 양양의 자랑이자 최고의 성세를 누리고 있는 청해복룡표국을 언급
하며 이리도 수선을 떤다는 건?
무슨 말인지 차근차근 얘기해 봐요. 대체 우리 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거요?“
실체 모를 막연한 불안감.
“무림맹에서......”
“얼른 말해 봐요!”
노칠의 어깨를 잡고 거칠게 흔들며 장추삼이 그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무림맹에서... 복룡표국을 점거한다고 했다네. 그리고 이효 국주도 표국주의 권리를 상실한다고 하
네.”
“뭐요?”
불안감의 실체는 바로 이것이었나.
“그 새끼들이 뭔데 우리 표국을 점거하고 국주 권한을 정지시켜? 지들이 무순 황제라도 돼!”
으르릉거리던 장추삼의 귓전에 노칠의 탄식과도 같은 한마디가 걸렸다.
“그들은 무림첩을 가지고 왔어.”
“무림첩? 그까짓 게 뭐 어쨌다고!”
“이보게, 무림첩으로 집행된 일이라면 그리 간단하게 말할 것이 아니야.”
흑의인이 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제야 노칠은 장추삼의 일행에게 눈길을 주었고, 흑의인을 보고
는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까 네 번째 귀빈실을 빌릴 때는 몰랐는데 이제 보니 엄청난 기도를 감춘 고인이 아닌가.
“무림맹에서 일개 표국의 일을 간섭했다는 건 그만한 근거가 있다는 얘기고, 무림첩까지 동원한 행
사라면 섣불리 나설 계제가 아닐세.”
장추삼도 들은 풍월이 있기에 무림첩이 가진 의미 정도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바다. 일단 집
행 명령이 떨어지면 강호에서는 절대 법으로 군림하는 무림맹 최후의 집행 문서.
그러나...
“무림첩? 그게 뭐 어쨌다고 그러는데? 난 받아 들일 수 없어! 아니, 이숙께서는 뭐가 무섭다고 받아
들이셨다는 거야? 정말 답답하게!”
더운 콧김을 마구 흩뿌리던 장추삼이 노칠의 기묘한 표정을 보고 눈썹을 치켜 세웠다. 할 말은 있는
데 차마 꺼내놓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얼굴.
뭔가 더 있다!
“아저씨, 할 말 있으면 모두 해요. 누구 복장 터져 죽는 꼴 보고 싶어요?”
“그, 그게......”
“그게 또 뭐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다그치는 장추삼을 외면하고 노칠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차갑게 식어버
린 음식물처럼 냉각된 분위기는 어렵사리 꺼낸 그의 말에 산산이 깨져 나갔다.
“이 국주는 그만 실신을 했다고 하네. 충격 때문이라고 하지만 선지피를 몇 번이고 토했다는 소문이
들리는 걸로 보아 곡 그것만은 아닌 듯하더군.”
“뭐!‘
쾅!!
두 주먹으로 바닥을 내려친 장추삼이 벌떡 몸을 세웠다. 그저 일어선 것뿐인데 장추삼의 기세가 하도
압도적 이어서 노칠은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어디 있어, 그자식들. 내 오늘 반쯤 죽여 버린다.”
“함부러 행동할 상황이 아니라니까.”
흑의인의 제지를 쓴웃음으로 비켜서며 그의 입술에서 무감정한 단어들이 조합을 이루었다.
“저를 말리시려면 이 자리에서 때려 눕히세요. 의식이 완전히 끊길때까지 말입니다. 아니라면 기어
서라도 갈 겁니다.”
“이런......”
막을 수 없다.
“죄송합니다. 다음 기회에 다시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지요. 그럼 이만......”
하고 돌아서려는데 일층에서 때 아닌 소란이 일었다.
여기 장추삼이라고 왔지, 하는 소리와 함께 계단으로 올라오는 급한 걸음 소리가 들리는다 싶더니 이
층으로 올라온 초로의 사내 하나가 숨을 몰아쉬다 장추삼을 발견하고 그의 앞에 떡 버티고 섰다.
그는 비록 늙고 힘없는 노인이었지만 만약 자신의 앞을 타 넘는 것이 있다면 그무엇이라도 막아설 듯
형형한 안광을 빛냈다.
장추삼의 앞에 철벽처럼 막아선 사내, 그는 바로 복룡표구의 표사 장유열이었다.
“아...버지?”
“혜란이가 여기 있다고 해서 급히 왔다. 그래, 어딜 가려는 게냐?”
무뚝뚝한 얼굴로 장유열이 물었다. 그의 얼굴은 눈에 띄게 초췌했지만 흥분한 장추삼은 아버지의 얼
굴을 제대로 볼 여유가 없었다.
“어디라니요?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다영히 표국이지요?”
“가서 뭐 하려고?”
“뭐 하긴요? 무림맹에서 왔다는 작가들의 상판을 뭉개 버려야지요. 기분도 꿀꿀한데 잘 걸렸다.”
스산한 장추삼의 비소를 묵묵히 바라보다 장유열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이효의 생각대로 녀석은
반쯤 미쳐 있고, 이대로라면 뭔 일을 내도 크게 낼 판이다.
여기서 잡길 천만다행이다.
“그들은 벌써 돌아갔느니.”
“그놈들이 갔다고요? 어디로 갔다는데요?”
꼬치꼬치 캐묻는 장추삼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장유열은 짐짓 얼굴을 굳혔다. 천방지축의
아들이 한 번 날뛰기 시작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를 일이고, 그건 절대적으로 피해야 한다.
“낸들 알겠느냐? 어차피 사흘 후에 다시 오겠다고 했으니 그때 만날 일이지. 뭐 하고 있느냐, 손님
들을 맞는 모양인데 어서 자리로 돌아가거라.”
“아버지?!”
아버지의 완강한 차단에 장추삼이 답답한 마음을 풀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그놈들이 그렇게도 무서웠습니까? 아니, 그들이 대체 뭔데 그렇게 움츠
러든 거예요? 양양의 자랑인 신견용쟁은 어디로 간 겁니까!”
“쓸데없는 소릴랑 집어치워라.”
장유열의 볼에 세 가닥 선이 파였다. 신견용쟁... 아스라이 잊혀져 가는 하나의 호칭. 그리고 시작된
강호와의 인연.
“세월이 무섭긴 무섭군요. 신과도 맞섰던 아버지께서 그런 인간들에게 등을 보이시니 말입니다. 흐
흐... 아무튼 전 표국에 가봐야겠습니다. 이숙께서 선지피를 토하셨다는데 아무리 봐도 단순한 혼절이
아닌 걸로 보여요. 뭔가 문제가 있어.”
이대로는 못 있지, 하며 몸을 돌리는데 장유열이 아들의 팔을 강하게 잡아챘다. r그의 얼굴은 분노와
슬픔이 얼룩져 이젠 알 수 없는 무엇이 되어 버렸다.
“나 역시... 분하고 슬펐다. 나 역시... 너무나도 억울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무림인인 걸 어
쩌겠느냐. 힘이 문제가 아니라 율법으로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을. 이 아비가, 이제 황혼을 넘겨 죽을
날만 기다리는 장유열이가 알량한 목숨을 부지하려 그들에게 대항하지 않았겠느냐?”
아버지의 눈물, 그리고 늙은 표사의 탄식.
“너만 화를 낼 줄 안다고 생각하느냐! 너만 분노하고 슬퍼할 줄 안다고 생각하느냐! 네게 숙부 같은
분이겠지만 이 아비에게는 친형제와도 같은 분이 국주님이시다. 그분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을 때 고개
만 쳐박고 있었던 내 심정을 어찌 네 녀석 따위가 알겠느냐!”
“아버지......‘
분수처럼 토해진 눈물로 장유열의 노안이 홍건히 젖었다. 두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떨던 장추삼이
부친의 슬픈 초상 앞에 그저 입술만 깨물어야 했다.
“국주님은 마지막까지 네걱정을 하셨다. 이렇게 천방지축인 네놈을 말이야!”
“젠장!”
쾅!
그 시간에 농담 따먹기나 하며 희희낙락 즐거웠던 자신이 싫었다.
“제기랄!”
쾅!
이런 순간에도 엎드려 바닥만 내려쳐야 하는 자신이 너무도 싫었다.
“빌어먹을!”
콰앙~!
그러면서도 앞을 가로막는 모든 현상이 눈앞에 선명히 떠오른다는 사실이 끔찍하게도 싫었다.
이렇게 더러운 흐름으로 가는 건가, 무림이라는 곳은.
바닥에 엎드려 마구 땅을 치는 장추삼의 곁에 문득 단아한 향기가 머물렀다.
“아버님 말씀대로 사흘간은 관망을 하며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도록 해요. 당장 무슨 문제가 벌어진
것도 아니고, 섣부른 판단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설의 다독임에 힘없이 고개를 돌린 장추삼이 아버지의 흔들리는 어깨를 감싸 쥐려다 들었던 손가락을
차곡차곡 접었다.
아버지는 남자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가슴속에서 흐르는 사나이의 절규가 말없이 눈으로 흘러내리는
거다.
“아버지......”
“장부의 복수는 십 년도 가하다고 했다. 단 사흘을 기다리지 못해서야 어찌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겠
느냐.”
사흘...
사흘이라는 시간이 무척이나 길 것 같았지만 장추삼은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이때 꿈결처럼 들려온 설의 전음.
“기질여풍(基疾如風)하고, 기서여림(基徐如林)하고, 침약여화(侵掠如火)하고, 부동여산(不動如山)하
라, 난지여음(難知如陰)하고, 동여뇌진(動如雷震)하라......”
빠르기는 바람과도 같고, 고요하기는 숲과도 같이 하라 상대를 칠때는 불과 같이 타오르고, 움직이지
않을 때는 산처럼 굳건하라. 숨을 때는 어둠속에 잠긴 듯하다가도, 움직일 때는 벼락처럼 내리쳐 상대
에게 손쓸 틈을 주지 말라.
손자병법(孫子兵法) 군쟁편(軍爭篇)의 한 토막.
`풍림화산(風林火山)......`
마른침을 한 번 삼킨 장추삼이 설을 돌아보자 그녀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풍림화산......`
허송세월을 보내기엔 사흘이라는 시간이 부족하겠지만 무언가를 절실히 기다리는 이에겐 너무나 더딘
세월이다.
마음을 가라앉히라고 장유열이 아무리 충고를 해도 장추삼의 마음은 콩밭에서 돌아올 줄을 몰랐다.
저간 사정을 전해 들은 정혜란도 나름대로 맛난 음식으도 그의 기분을 풀어주려 애썼지만 별 효험을 보
니 못했다.
“에휴~ 그냥 자요, 자!”
“잠이 와야 자지.!
“염소 만마리만 세봐요. 없던 잠도 절로 생겨날 테니까.”
“그전에 지루해서 죽겠네.”
보다 못한 정혜란이 잔소리를 해댔지만 장추삼의 반응은 심드렁 그 자체였다.
“그럼 책이라도 보던가요.”
“이 판국에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 있어? 가뜩이나 글하고도 담 싼 사이구먼.”
삥.
나름대로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에잇, 그럼 마음대로 해요! 조급증에 굶어 죽든, 산채로 박제가 되든 간에 알아서 하라고요! 무슨
남자가 말마다 꼬리를 잡는 거야?”
쳇쳇거리며 횅 하니 나가 버리는 그녀를 멀거니 바라보던 장추삼이 벌러덩 누었다. 입속이 바짝바짝
타 들어가는데 갈증을 느끼지 못하겠다.
부동여산
그거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엉덩이는 들썩들썩, 눈앞은 빙글빙글, 좀처럼 안정을 찾기 어려우니.
이제 하루가 갔다. 정황으로 보아 이효는 그의 말과 다르게 점혈을 당했음이 틀림없고 그의 능력으로
손을 써보지 못했다는 건 수법의 고절함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반증이다.
이효도 한가락 하는 무인, 점혈에 대한 기본이 없을 리 없으니까.
그리고 때맞춰 들어온 무림맹의 압력.
`우연일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시기가 너무 절묘하다.
마치 어제 점심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받은 두 장의 봉서와도 같이. 스물여덟 해를 살면서 편지 한
통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아차!`
첫 번째 편지. 경황 중이라 잊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아직 개봉하지도 않았다.
부스럭.
두 통의 편지 가운데 개중 두툼한 녀석을 꺼내 조심스레 겉면을 찢어내자 안에서 두 개의 내용물이
나왔다. 하나는 일반적인 편지, 또하나는 여러 겹의 양피지.
`뭐냐, 이거?`
발신인을 대충 짐작하고 있는 마당이라 양피지의 정체에 관심이 쏠렸다. 하지만 일단 편지부터 보기
로 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어디 보자.`
추삼아, 보거라...
“역시 내 예상은 틀린 적이 없다니까.”
첫머리에서 여실히 드러나듯 편지를 보낸 이는 그가 짐작한 대로 지청완이었다. 장추삼이 아는 사람
가운데 그런 살벌한 기도를 연출할 노인이라면 단연 지청완이었고, 모습을 감추고 편지를 전달한다는
건 뭔가 피치 못할 이유가 숨어 있다는 얘긴데.
`이번 무림맹의 행사?`
충분히 설득력있는 가정이다. 그렇다면 지청완은 그들의 움직임을 사전에 포착했다는 건가?
생각이 많으면 머리만 복잡한 법. 잡념은 일단 치우고 뒷내용으로 눈길를 가져가며 접힌 양피지를 왼
손으로 꽉 쥐었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었다.
직접 찾아가서 전달해야 옳으나 양양의 공기로 보아 내가 이 봉서를 네게 전하지는 못할 듯하구나.
너도 짐작은 하고 있겠지만 지금 삼백 년간의 잠에서 깨어나려 하고 있다. 발단이야 무엇이든 이미
시작된 일이고 그것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는 그 방향성이 거대한 두 개의 흐름이라는 것이고, 팔파는 공동으로 무언가를 도모하고 있는데
확실하지는 않으나 무림맹을 중심으로 움직일 듯하구나.
“돗자리를 펼 사람은 따로 있었군.”
그리고 또 하나의 암류. 네가 직접 상대했기에 잘 알고 있는 자들의 모임이 그것이다.
하남을 근거로 힘을 축적해 왔었던 그들에게 비천혈서는 일종의 신앙과도 같은 것이라 그것을 위해사
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태세나 다행히 그들은 혈서 가운데 석 장만을 넣은 상태였다.
“석 장이라고?”
문득 왼손 가득 들어오는 양피지의 눅눅한 촉감이 이질적이라 기분이 묘해진 장추삼이 그것들의 장수
를 헤아려 보았다.
`하나, 둘... 셋!`
무언가 쿵 내려앉는 느낌.
급히 편지의 뒤 구절로 눈을 돌린 그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내가 그들에게서 이것을 탈취한 이유는 사건의 뒤에 있는 배후자들을 끌어내고자 함에 있다. 우리끼
리 아무리 치고 받아봐야 모든 것을 조종하는 이를 돕기밖에 더하겠느냐.
이런 꼭두각시 놀음이나 즐길 만큼 편안하게 전개되는 형국이 아니다. 일의 진행은 생각보다 급박하고.
막을 힘은 미약하다.
석 장의 양피지가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는 나도 모르겠다. 이것들의, 즉 비천혈서가 어떤 작용을 할
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미 시작됐네요, 에휴.....”
네가 이 양피지, 즉 비천혈서의 내용를 짐작하고 있었을지라도 모르고, 아니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구나.
읽어보지 말라고 해봐야 궁금하면 꼭 읽을 놈이고, 제발 읽지 말라고 고사를 해도 내키지 않으면 거
들떠도 보지 않을 게 뻔하니 별다른 얘기는 하지 않겠다.
이걸 어떻게 보관해야 할지도 말해 줄 필요 없으리라 본다. 네가 할 일을 잘 아리라 믿으니까.
불행히도 상대해야 할 적이 하나가 아니다. 하남의 적들도 벅찬데 무림맹까지나 서게 되어 일보(一
步), 일보가 힘든 상황이구나.
서로를 믿는 도리밖에는 별다른 대책이 없다. 각자 최선을 다하도록 하자.
힘든 가을이 될 듯하구나. 부디 몸 건강하거라.
“이 동네에 있으면서 무슨.”
마지막의 인사말에 장추삼이 입을 삐죽 내밀고 왼손으로 만지작거리던 양피지들을 펼쳤다.
처음 종이를 펼친 그가 저도 모르게 가느다란 신음성를 토했다.
`마침내 이 이름이 나오는구나......`
망연히 천장을 올려다보던 장추삼이 곧 숨을 가다듬고 두 번째와 세 번째도 연속으로 펼쳐 보고는 무
거운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예상은 대충 들어맞는데......”
대체 이것들만이 왜 비천혈서인가.
첫 번째 양피지에 적힌 글귀.
태을검선(太乙劍仙) 단리고학(單利孤鶴)-오월초이틀.
설명할 필요 없이 단리혜의 조부이자 백 년전에 율법자로 추정되는 이의 칼을 받아내지 못하고 한 줌
고혼이 된 검객.
당대의 최강자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둘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삼선이라 칭송을 받았건만 어
둠의 율법자가 펼친 월광살무의 두 번째 변화 아래 덧없이 쓰러져 간 무인.
예상을 했던 전개다. 그리고 한구석에 찍힌 기묘한 직인까지도. 문양을 봐서는 바로 알아보기 어렵지
만 알아내는 일 또한 여반장일터.
두 번째의 양피지는 장추삼의 예상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대변해 주었다.
첫 번째의 그것보다 많이 낡아 귀퉁이가 푸석푸석 닳은 양피지에는 장추삼의 기대대로 그가 전혀 모
르는 별호와 이름이 적혀 있었다.
희한한 기대지만 이것이야말로 그가 바라 마지않았던 전개엿다.
화정염도(火精炎刀) 가두인(家斗寅)-이월 아흐레.
“정 소저어~!!”
“왜요? 어디 나간다는 소리는 씨알도 먹히지 않으니까 관두는 게 좋을 거예요.”
퉁퉁! 달그락달그락.
뭘 하는지 달그락거리며 정혜란이 얼굴도 내밀지 않고 응답했다. 그녀는 장유열의 특별한 지시를 받
고 장추삼의 문밖출입을 감시하는 상태였다.
그래 봐야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든다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어이구~ 그게 아니라 화정염도라는 인물 알아? 가두인이라고 말이야~”
“화정염도?”
뚝.
일을 멈췄는지 소음이 그치고 잠시 뒤에 정혜란의 의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레리? 어디서 그 이름을 들었네요? 무림행 나갔다 오더니 견문만큼은 정말로 넓어졌네?”
“글세, 그게 누구냐니까?”
“그... 있엇어요. 칼을 하도 빠르게 써서 불꽃처럼 도를 피워 냈다는 사람이에요. 가만 보자~ 한 이
백 년쯤 전의 인물이지. 아마?”
“이백 년 전?”
이백 년전 이란다. 그러니 알 도리가 없지.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냥 검도가들에게 전설 같은 인물이니까 기억하는 거죠.”
“그래?”
이백 년 전의 전설적인 무인. 그렇다면이 문양은?
“성가시게 해서 미안한데 구파에서 구름 몇 개가 둥둥 떠다니는 문양을 징표로 삼는 곳이 어디야?”
“그거 청성이잖아요? 궁금한 것도 많네. 촉지사절(蜀地四絶)도 몰랐어요? 청성천하유에서 아득함을
구름의 담담함으로 표현한 거라고요. 그래서 청성의 장문인부도 구름문양에서 비롯된다고요.”
촉지사절.
예전 촉 지방의 네 군데 명소를 일컫는 말로 아미천하수(蛾眉天下秀), 검각천하웅((檢閣天下雄), 삼
협천하기(三峽天下寄), 그리고 지금 언급된 청성천하유(靑城天下幽)를 말함이다.
`청성천하유......`
화정염도 옆에 선명히 찍힌 구름 문양.
“어라, 그러고 보니 화정염도가 이름을 떨치게 된 계기가 아마도 청성의 도사들을 여럿 벤 후라고
했었지? 모르긴 몰라도 당시에 커다란 문제였을 텐데. 하기야... 이백 년 전의 일이니.”
“그게 무슨 말이야?”
달그락달그락.
벌떡 일어선 장추삼을 볼 수 없었기에 정혜란은 하던 일에열중했다.
“나도 잘 몰라요. 뭐,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정도? 그래도 이백년 전의 일이 아직까지 인구에 회자
되는 걸로 보아 청성의 일반 문도가 깨진 것 아니겠죠? 그런데 왜 이백 년 전의 일에 그리 열을 내
요?”
“아, 아냐.”
이로써 확실해졌다, 비천혈서의 정체는.
무려 삼백년간 이어 온 피의 굴레가 어떻게 굴러왔었는지 말이다.
`그렇다면......`
세 번째의 양피지를 확인하려다가 관두고 장추삼이 눈을 감았다. 이렇게 되면 화산의 것도 존재한다
는 말이고, 그건 꺼림칙한 일이다.
아직은 말할때가 아니다. 조금 더 명확해지면, 그래서 모든 일을 엮어낼 수 있을 때라야 밝힐 일이다.
화산과 팔파와의 거리감. 구파 공동체에서 한발 뺀 이유도 여기에서 기인하는 걸까? 그렇다면 화산의
원로들은 과거를 어떻게 하려는 걸까?
수많은 의문이 쏟아져 내렸다. 그렇지만 마땅한 대답은 아직 그의 몫이 아니었고, 장추삼은 도피처로
오수(午睡)를 선택했다.
모든 것이 천천히 드러나고 있다.
이제... 하루 남았다.
마침내 사흘이 지났다. 장유열은 이른 아침부터 장추삼의 동태를 살폈으나 아들은 사흘 전의 얘기를
까맣게 잊어버린 사람처럼 별말없이 아침 상을 받았다.
다른 점이라고는 자신보다 일찍 일어나 있었다는 정도?
밥을 먹을 때도 평소의 한담을 조금 늘어놓고 열심히 음식물을 집어 삼켰으며, 밤을 다 먹고도 제 방
에 들어가서 알 수 없는 노래를 늘어놓으며 빈둥거렸다.
“그런데 출근 안 하세요?”
라고 물은 게 표국에 대한 물음의 전부였다.
이효의 특별한 부탁이 아니더라도 뒤숭숭한 복룡표국에 가봤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사흘째 출근하지 않았던 터.
“일이 정리되거든 나갈 참이다.”
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렇군요. 그럼 그렇게 하시던가요?”
역시 심드렁한 대답.
오시가 가까운 시간까지 그렇게 장추삼은 빈둥거렸다. 그러나 해가 중천으로 자리를 옮길 무렵 그는
천천히 옷을 입었다.
평상시의 외출처럼 담담한 얼굴, 담담한 몸가짐으로.
“어딜 가려는 거냐?”
“어디긴요, 당연히 표국이죠.”
아들의 대답에 장유열이 뭐라 하려다가 손을 내저었다. 약속한 시간은 흘렀고,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뭔가 변수를 기다린 듯한 이효였는데.
“가서 뭘 어쩌려고 하느냐.”
“설마 제가 그 대단한 무림첩을 싹 무시하고 난리 부리기야 하겠어요. 그저 지켜보는 거죠, 청해복룡
표국의 휴식기를.”
“물론 집행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엄중히 따져 묻겠지만 말입니다.”
“이놈아!”
“걱정할 것 없다니까요? 저는 다만 적법한 절차를 무시한다면 적법한 방법을 상대한다는 거예요. 그
놈들도 그랬다면서요, 무림첩의 권한을 무시하는 거냐고. 적법하게 집행되는 문서나으리를 신주단지처
럼 떠받들었다니 설마 실수를 하실 리 없잖아요?”
할 말이 없다. 욱하는 성격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논리 정연한 말을 배웠을까.
그래도 왠지 걱정이 앞선다.
“부디 표국에 누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네 자신에게도 위험하지 않도록 잘 처리하기 바란다.
너무 커버린 아들. 이제 그는 아들의 뒷등에 대고 걱정스런 잔소리나 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
부였다. 한편으로 자랑스러웠고, 한편으로 씁쓸했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세월이라는 것을.
“물론 저도 신사적이고 싶죠. 그런데 꼭 인간들 가운데 이성적으로 판단하려는 사람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종자들이 있더군요.”
“음?”
목을 우드득 꺽은 장추삼이 흰 이를 보이며 씨익 웃었다. 장난스러움 가운데 스산한 무엇을 짙게 드
리워서 보던 장유열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때로 사내는 가슴으로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가슴을 퉁 두드린 장추삼이 정혜란에게 수인사를 보내고 집을 나섰다.
위험하고 위태로운 곳으로 가는 아들인데 어쩐지 장유열은 엉뚱한 걱정을 했다.
“저 녀석이 큰일을 내지 말아야 할 텐데.”
담담하기로는 장추삼 못지 않은 얼굴로 부엌에서 나온 정혜란이 장유열의 옆에 서서 태연스레 걱정을
했다.
“그러게요. 장 가가, 가슴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할 텐데.”
평범한 시골집에서 무림행의 오십여 일류고수가 그렇게 불쌍한 처지가 되었다. 물론 이 사실을 아는
건 장유열과 정혜란뿐이었다.
첫댓글 비천혈서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