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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무사 255
일촉즉발(一觸卽發)
복룡표국의 문 앞을 막아선 오싶여 기의 인마는 마치 먹구름 같았다. 철갑기마대의 갑주는 햇살에 반
사되어 그 흉험한 암흑으로 주위의 모든 것을 차단할 듯했다.
그래서 소문을 듣고 하나둘 몰려온 동네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고 발을 뺏기에 복룡표국의 정문은 평
소보다 한산하기만 했다.
그래서 장추삼도 겁을 먹기로 했다.
“어이구, 이거 겁나서 죽겠네. 어떻게 이리도 무서울 수가 있단 말인가!”
누구나 다 들리는 혼잣말을 내뱉으며 저벅저벅 걸음을 옮긴 그가 복룡표국의 정문, 더 정확하게 말해
철갑기마대의 정면에서 걸음을 멈췄다.
“누구요? 복룡표국에 볼일이 있다면 돌아가는 게 좋을 거요. 오늘부로 이 표국은 폐쇄됐으니.”
우웅우웅~
공력을 실은 금지령이기에 일반인이 아니라 웬만한 무림고수라도 흔들릴 만했다. 그래서 장추삼의 두
눈도 휘둥그레졌다.
“벌써 폐쇄된 거요?”
“아니오. 곧 집행될 것이오. 그러니 어서 돌......”
“아직 안 됐으면 됐네.”
하고 말 하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가 여유로운 걸음으로 인마를 헤치고 걸음을 옮겼다.
“무림인이 아니라서 봐주려고 했더니! 귀하는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 거요?”
쿠궁!
아까 입을 열었던 무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고동규(高銅奎)라는 자로서 점창의 속가제자 가
운데 유일하게 단홍검식(丹紅檢式)을 대상했다는 인물로 그 검학이 본파의 제자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는 무인이다.
철갑대의 부대장이기도 한 그의 추상(秋霜)같은 제지에 장추삼이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 뒤돌았다.
“거참 이상한 사람이네. 이봐요, 까만 갑옷. 아니다, 모조리 까만 갑옷이구나. 말을 바꿉시다. 이봐
요, 말을 바꿉시다. 이봐요, 말 많은 까만 갑옷. 아까 당신이 분명히 말했잖소. 아직 폐쇄 안 됐다고.
아니오?”
장추삼의 힐난에 고동규가 순간 말문을 잃었다. 말인즉슨 옳다. 아직은 폐쇄되지 않았으니 복룡표국
에의 출입을 제한할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설령 무림맹의 원로들이라도.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쁠까. 단지 말 많은 까만 갑옷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으, 으음......”
“덥소? 그런 신음성이 절로 난다는 건 몸이 매우 안 좋은 상태라는 거요. 선선해지기는 하나 아직
그런 차림새로 돌아다니면 더위 먹기 딱 좋다오. 사람이야 그렇다 쳐도 말못하는 미물은 뭐 죄야?”
‘저, 저놈이!“
고동규의 이 가는 소리가 천지를 울렸지만 깐죽깐죽 입을 놀리던 장추삼은 제 할 말 다 했다는 듯 싹
안면을 바꾸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이때...
촹! 촹!
두 개의 장창이 그의 앞을 열십 자로 틀어막았다.
“뭐야?”
정문 앞에 서 있던 두 명의 기마대원이 장추삼의 앞을 가로막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놈인지 몰라도 좋게 말할 때 썩 발길을 돌리거라. 네놈 같은 한량에게 볼거리나 제공하자
고 우리가 이리 서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뭐?”
장추삼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분명히 기분 나쁜 얼굴인데 뒤따라 오르는 입꼬리는 또 뭐가?
‘이거거든! 바라던 바다. 제발 한 방만 날려다오, 제발!’
그러나 생각은 생각. 그는 자못 기분이 상한 것처럼 손가락으로 장창를 마구 뒤흔들며 소리소리를 질
렀다. 누가 보면 역모 죄에 걸린 충신 집안의 아들이 한심한 관졸들에게 항의라도 하는 기세였다.
“너희들이 뭔데 남의 길을 막는 거냐! 대명천지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아아, 천하의
정의를 수호하는 대 무림맹에서는 뭐하는 건가, 이런 사마외도가 마구 날뛰는데!”
“무림맹?!”
창을 들이민 두 장한이 서로를 바라보다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이놈, 이게 보니 아주 바보가 아닌가!”
“그러게 말이야.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고 이 소란을 떨었다니!”
둘의 호쾌한 대소가 그치기를 참을성있게 기다린 장추삼이 겨우 웃음을 멈춘 사내들의 얼굴을 바라보
며 툴툴거렸다.
“뭐가 웃긴 거냐? 내 말 가운데 우스개라곤 하나도 섞여 있지 않았거늘. 너희들은 불한당에다 정신
까지 나간 사마외도가 틀림없구나! 이놈들아, 협(俠)에 죽고, 의(義)에 사는 무림맹에서 이 사실을 안
다면 너희들은 성치 않을 것이다!”
천하의 정의를 수호하는 대무림맹. 협에 죽고, 의에 사는 무림맹. 일견 칭송하는 것 같지만 가만히
음미해 보면 조소의 냄새가 풀풀 풍겼다.
하지만 그들은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놈아, 네 녀석이 뭘 하는 놈인지 알 바는 없지만 그래도 세상 돌아가는 정도는 알거라.”
“허허, 우리의 차림새를 보면 바로 알던데... 혹시 무림맹의 최강 전투 조직이라는 철갑기마대에 대
해 들어본 적이 없느냐?”
그들의 물음에 장추삼이 코웃음을 쳤다.
“에이, 아무리 물정 어두운 나지만 설마 하니 협에 주고, 의에 사는 대무림맹의 대표적인 무투 조직,
철갑기마대를 모를 리가 있나?”
“그럼 철갑기마대의 고유한 복장에 대해서도 들어봤겠군 그래?”
“물론이다. 그들은 용과 같고 범 같은 기상을 가졌으며, 은연중에 만인을 압도하는 기세를 뿌린다고
했지. 또한 그들은 전신에 묵빛 철갑을 두르고 타고 다니는 말까지도 같은 색의 갑주를 입혔다고 했다.
그 모습을 한번 본 이들은 절로 고개를 숙인다고 들었지.”
장황한 장추삼의 설명을 기꺼이 듣던 그들이 뻔히 그를 바라보았다.
“근데 왜 그렇게 날 바라보는 거냐? 철갑기마대가 뭘 어쨌다고?”
“허허, 이놈. 물정을 모르는 데다 눈까지 어두운가 보구나.”
“네놈이 말한 바를 상기하면서 두 눈 부릅뜨고 우리를 보거라.”
인심 쓰는 양 장창을 치운 그들이 턱을 세우며 느긋한 표정으로 장추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라? 이제 보니......”
이제야 놈이 뭔가를 알아챘나 보다.
“그래, 이제 뭔가를 좀 알겠냐?”
“한심한 놈 같으니.”
“이제보니......”
손가락으로 그들을 가리키며 주춤주춤 물어서던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희 사마외도 놈들은 철갑기마대까지 사칭하려는구나!”
“뭐?”
‘뭣!“
어이없어 반응을 보이지 못하는 그들에게 장추삼의 연노 같은 호통이 이어졌다.
“생각해 봐라! 철갑기마대라고 하면 그 행사가 공명정대하며 용 같고 범과도 같은 기상을 지녔다고
했다. 그리고 묵빛 감옷만 보면 절로 굴복의 기분이 든다고 했는데 어딜 봐서 너희들과 같다고 하겠느
냐?”
“그런데 이놈이!”
“허허, 뭐 이런 경우가 있나!”
그들의 허탈한 대꾸도 장추삼의 말을 막지 못했다. 그는 이제 소리를 지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악을
쓰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비슷한 옷만 입었다고 어찌 너희 같은 소인배들과 철갑기마대가 같을 수 있을까. 용과 범? 지금의
너희들을 보면 그저 교(狡)와 같고, 활(猾)과 같지 않은가? 그리고 절로 사람을 굴복시키는 기상이 아
니라 힘으로 누르려 드니 어찌 너희들을 철갑기마대에 비교할 수 있겠느냐! 철갑기마대가 이말을 듣는
다면 그야 말로 땅을 치고 통곡을 하리라!”
자신의 가슴에 내려치는 기막혀 하는 장추삼의 과민 반응도 반응이었지만 무엇보다 교와 활에 비교
당한 철갑기마대원들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교와 활이라고 했다. 이 두 짐승은 부수에서도 알 수 있듯 작은 개처럼 생겼다고 하는데 두짐승 모두
치사하고 간특하기가 그짝을 찾아 보기 어렵다고 했다.
특히 활이라는 짐승은 그야말고 더럽기 짝이 는 놈으로서 이놈은 호랑이를 만나게 되면 몸을 움츠려
공처럼 만든다고 한다. 그러다 호랑이가 어흥, 하고 입을 열기 무섭게 그 입속으로 뛰어 들어가 곧장
뱃속으로 들어가서 내장을 파먹는다고 한다.
결국 내장을 다 파먹어서 호랑이가 죽으면 그때야 구멍을 파고 밖으로 나온다고 하니 이 얼마나 간교
한 짐승인가.
그제야 이들은 이 정체 모를 녀석이 자신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과 무림맹과 철갑기마대를
팔아 이부러 망신을 주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노옴~!
“네놈이 감히......
오십여 기의 철갑대가 일제히 발산하는 노기는 정말이지 끔찍한 살기로 장추삼을 난타했다. 그야말
로 일촉즉발의 상황.
말들은 주인들의 채근에 더운 콧김을 뿜어냈으며 기마대원들은 장창을 갈무리하고 허리춤에서 일제히
칼을 빼 들었다.
“네놈이 감히 백주대낮에 우리를 모욕하고도 몸 성할줄 알았느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네 녀석이 딱 그 짝이로구나. 대놓고 우리 철갑기마대와 무
림맹을 회롱한 것이니 믿는 구석이 있을터. 만약 명호가 있다면 서슴지 말고 대라!”
“난 당신들과는 달리 믿는 구석 같은 건 없어. 느냥 그런 것뿐이야.”
저 하늘 높은 줄모르는 당당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기마대원들의 동요에 눈살을 찌푸리던 고동
규가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아하니 청해목룡표국의 폐쇄에 불만이 있는 듯한에 표국에서 일을 하는 자든, 아니든 자네의 이
러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생각은 하고 있는 건가?”
그의 한마디에 흥분했던 기마대원들도 치켜들었던 칼을 내렸다.
`이런......`
석어도 준치요, 물어도 준치라더니. 무림맹최강의 무투 조직은 그저 힘만 센 것이아니었다. 속이 뒤
집어질 만한 야유인데 어느새 평정을 찾으려는 움직임이라니.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표국에서 일을 하고. 안 하고는전적으로 내문제니 그쪽에서 알 바 없어. 다만 이렇게 우르르 몰려
서 남의 집 대분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꼴이 보기 싫어서 한마디 한 것뿐이야. 여름도 지났는데 까만
똥파리떼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는 걸 감상한다는 건 썩 보기 안 좋은 일이거든. 당신들도 파리 싫지?
시도 때도 없이 왱왱거리고, 이리저리 다 참견하고.”
이제 교와 활을 지나 똥빠리까지 전락한 철갑대의 위상. 장추삼의 얄밉도록 나른한 뒷말이 평정심을
지키려던 고동규의 마지막 인내심을 무너뜨렸다.
“화나나 봐? 그럼 화내. 아, 그리고 내 걱정은 하지마. 내 비록 이런 몸이지만 똥팔리 떼에 쫓겨 무
림맹 따위로 피신할 만큼 약골은 아니야.”
크게 기지개를 켜던 장추삼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고동규뿐 아니라 철갑대 전체의 반응은 방금 전
과 확연한 차이를 보였으니까.
말들의 투레질 소리는 더없이 빨라졌으며 주위의 온도가 마치 겨울 한파라도 몰아친 것처럼 급강하했
다.
몸으로 발산하는 분노가 아니라 마음으로 표출하는 노기.
“감히......”
고동규의 차가운 한마디에 장추삼의 곁에 두 대원이 장창을 곧 추세웠다.
“망해가는 표국의 불쌍한 떨거지라 생각해서 손을 쓰지 않았거늘, 네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구나. 그
것이 소원이라면 철저히 밟아주마.”
이제 다 됐다.
“다 좋은데, 망해가는 표국이라고?”
실실 웃던 장추삼이 청해복룡표국의 현판을 바라보았다. 용이 날아 오르는 기세로 웅혼하게 써 있던
여섯 개의 글자가 오늘따라 더없이 정겨워 왈칵 눈물이라도 나올 것만 같았다.
`젠장, 더럽게도 멋들어지네.`
숨을 한번 훅 몰아쉬고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진정시키며 장추삼이 또박또박 잘라 말했다. 그저 평범
한 얘기였건만 화자의 의지가 글자마다 배어 있기에 말은 어느새 하나의 실체가 되었다
“귓구멍 후비고 똑바로 들어. 이표국은 절대로 망하지 않아. 그리고 폐쇄되지도 않아. 무림맹, 아니
무림맹 할아버지가 와도 안돼. 내 말 알아들어?”
마치 연인에게 속삭이듯 현판을 바라보는 그 모습 그대로의 독백은 무언가 가슴 울리는 깊이가 잇었
지만 불행히 철갑기마대에겐 전달되지 않았다.
“복장을 보아하니 제 아비가 이곳에서 일을 하는 모양인데, 삼류표국의 삼류표사 아들 놈이 어디서
삼류무공이나 익혀와서 거드름을 부리는구나. 아무튼 태생은 속이지 못한다더니.”
그의 오른편에 서 있던 기마대원이 키극거리자 왼편의 기마대원이 맞장구쳤다.
“어차피 하류인생이 다 그렇지 뭐. 세상 돌아가는 것 모르고 그저 위만 탓하는 버릇이라니. 저러니
밑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는 거지.”
번쩍.
현판을 바라보던 장추삼의 눈에서 귀화가 타올랐다.
“삼류표국에 다니는 삼류표사의 아들에 하류인생이라......”
빙글.
몸을 돌린 그가 새하얗게 웃었다.
“당신들 이름이 뭐야?”
“네놈이 본 공자들의 이름은 알아서 뭐 하려느냐?”
차가운 장추삼의 시선이 계속 깐죽거리는 오른편의 사내에게 꽂혔다.
“으음......”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등골이 서늘해진 사내가 괜히 크 소리로 자신을 알렸다.
“나, 나는 무당의 속가제자 유종휘라고 한다! 일검으로 벼락도 쪼갠다는 분전검객(分電劍客) 유극광
어르신이 내 아버님이시지!”
대꾸없이 눈만으로 왼편의 사재를 쫒은 그의 재촉에 최면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반대쪽 인물도 입을
열었다.
“난 청성의 속가제자 단목준이라고 한다! 쌍장으로 능히 폭포를 거스린다는 역류장(逆流掌) 단목서
보(端木西堡) 어르신의 넷째 아들이다!”
장추삼은 잘 모르고 있지만 유광득과 단목서보라고 하면 그 일대에서는 꽤나 알아주는 무인들이다.
그들의 가문 역시 명문이라 할 만하고, 그런 전통으로 그들의 자제가 철갑기마대에 입대하게 된 것이다.
사실 무림맹의 중추 세력은 거의 친분관계에 의해 선발된다고 보면 옳다.
호부 밑에 견자 없듯, 일반적으로 명문가에서 좋은 동량들이 배출되는 경우가 많고 무림맹에서는 그
들을 중용하는 것이 좋다.
기왕이면 다홍치마.
그렇기에 명문무가끼리는 그들만이 세계가 공고히 굳어 있고, 그들만의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거의 관습화되었다.
더 높은 지위를 향하여, 더 높은 세력을 위해서.
“누가 당신들 이름 석 자 알자고 했지, 아버지 이름 알자고 했나?”
“......!
“......!”
순간 유종휘가 단목준의 얼굴이 까매졌다.
역류장과 분전검객이라고 하면 능히 강호백대고수에 드는 실력자들로서 무림인이라면 누구자 한 수 양
보하는 이름이거늘.
“이봐, 유종화와 단목준.”
장추삼이 친구처럼 둘을 호명하자 둘의 어깨가 절로 떨렸다.
“당신들, 하류인생이 뭔지나 알고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으윽......`
통상적인 대답을 하려 열던 둘은 장추삼의 압박감에 말을 잇지 못했다.
“삼류표사면 하류인생이고, 삼류무사면 하류인생인가? 그런 건가. 앙?”
“저, 저기......”
“난......”
“거기, 무슨 말들이 그리 많은가!”
고동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알아서 혼 좀내주겠거니 하고 나뒀는데 한가하게 농담이나 하고 있다
니. 맹에 돌아가면 정신 교육을 시켜야겠다.
순간 장추삼이 몸을 비스듬히 틀어 고동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은 가만히 있어.”
“헉.”
일변도 기도. 방금 전까지 동네건달 같던 자엿는데 몸을 한 번 돌리자 이런 분위기라니. 무학을 떠나
수많은 경험으로 다져서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않는 고동규까지도 그의 한마디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
았다.
분위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무인의 분능으로 알 수있다, 이자는 위험하다는 사실을. 그저 강한 자 수
준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뭐,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그러나 이미 쏘아낸 활처럼 분위기는 고조된 상태. 말 한마디로 되 돌릴 상황이 아니다. 물러날수도,
물러나서도 안 되는 상황.
무슨 일이 있더라도 명예를 지켜야 한다.
팽팽해진 기운을 느켰는지 장추삼도 두 얼간이와 더는 노닥거리지 않았다.
이 정도면 의도한 바는 모조리 맞아 들어갔다.
권위와 뒷배경으로 머리를 가득 채운 저 머저리들에게 본 때를 보어 주면 된다.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어버리면 무림맹의 공신력이라는 것도 땅에 떨어질 테니까.
이제... 시작이다.
"그럼 공인된 일류인생과 비공인 하류인생이 한번 더럽게 어우려저 볼까?“
이때 표국 문이 급히 열렸다.
"여기서 뭐 하고 있나!“
`이런......`
뜻밖의 방해자가 그의 의도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철 당주님......”
“지금 그게 무슨 짓이야! 어서 들어오게! 사과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사과는 무슨 사과요?”
집법당주 철무웅의 턱수염이 바르르 떨렸다.
“자네가 지금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알고나 있나! 저분들은 삼십여 년 만에 발송된 무림첩을 적
법한 절차에 따라 집행하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는 철갑기마대원들이란 말이야! 자네가 시비를 걸 이유
가 없다고. 실례되는 행동일랑 그만두고 어서 들어오게.”
“으으......‘
철무웅이 개입된 이상 그가 벌이는 싸움은 더 이상 그만의 싸움이 될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복룡표
국이라는 이름이 들어가게 될 것이고, 그건 개인의 시비를 넘어서 버려 무림첩에 대한 반항으로 비화될
수 있다.
당연히 피해야 할 전개, 아슂지만 여기서 일단 후퇴해야 한다.
`제기랄......`
“어서 들어오래도!”
주먹을 꾹 쥔 장추삼이 고개를 숙였다.
“하필 이럴 때......”
어깨를 늘어뜨리고 그의 옆을 스쳐 가는 장추삼의 어깨를 밀치는 척하며 철무웅이 빠르게속삭였다.
“명분없이 일을 도모했다간 모든 게 끝장이라네.아직 때가 아니야.”
“......”
이건 어니다. 아마도 표사들 역시 뭔가를 도모하려는 듯한데 그건 더욱 커다란 희생을 부를 뿐이다.
놀란 장추삼이 뭐라고 하려는데 철무웅이 문을 막아서며 철갑대에게 정중히 포권을 했다.
“물정 모르는 우리 표사 하나가 정당한 법 집행 중인 철갑기마대원들에게 결례를 범하게 되어 집법
당주로서 대신 사과드리오. 철갑대 여러분께서는 아량을 베플어 부디 용서해 주길 바랍니다.”
“음?”
고동규가 뭐라고 하려는데 철무웅과 지근거리에 있던 유종휘의 얼굴이 벌게졌다.
일개 표사라니. 일개 표사에게 그런 압박감을 받아, 생전으로 굴욕감을 느꼈단 말인가.
“부하가 죄를 범했으면 상관이 벌을 받아야지.”
단목준이 키득거리며 창머리를 거꾸로 해서 철무웅의 배를 맹렬히 찔렀다.
퍼억!
`커억!`
우당탕~
문 앞까지 튕겨 나간 그가 입에서 한줄기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면서 겨우 상체를 세웠다. 나무 끝으
로 맞았는데도 이 정도의 타격이라니.
철갑기마대는 과연 허명이 아니었다. 가문 좋고 뒷배경이 든든하긴 해도 그들은 이 동네에서 제 아버
지나 열심히 파는 기고만 따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철 당주님!”
몸을 돌린 장추삼이 급히 철무웅을 부축했지만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의지 빼면 시체인 이 털보
중년인이 근엄하게 명령했다.
“뭐 하는 거야! 자네는 내 명령이 눈에 차지도 않는 건가! 속히 들어가라도 일렀다!
“철 당주님......”
“어서!”
문득 장추삼은 복룡표국이 왜 호북 제일의 표국을 발돋움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효 한 사람의 노력
만으로는 절대 이런 결실을 얻지 못했울 터였다.
여기 철무웅 같은 사람이, 제이, 제삼의 철무웅들이 복룡표국의 중추가 되어 어떤 어려움이라도 꿋꿋
이 헤치고 나왔던 거다.
“그럼 저는 이만......”
굽혔던 무릎을 쭉 편 장추삼이 처음으로 철무웅에게 정중히 포권을 했다. 그저 잔소리꾼에, 입 싼 털
보중년인는 이 모습을 간단한 손짓으로 받았다.
“자네에게 처음 받는 인사 같구먼.”
“원한다면 매일 해드리도록 하지요.”
씨익 웃은 그가 장추삼의 어깨을 짚고 일어선 순간 또 하나의 창끝이 알아들었다. 이번엔 단발이 아
니라 연환초였기에 그는 손쓸 사이도 없이 순간적으로 다섯 차례나 가격 당해야 했다.
“끄으윽!”
헛바람 소리를 내며 간신히 버틴 철무웅이 눈을 부릅뜨고 전방울 쏘아보는 장추삼의 어깨를 밀쳤다.
“갈 겁니다, 갈건데... 한마디만 하고 가지요.”
이를 악문 장추삼이 유종휘와 담목준을 보고 짧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명심해라, 우리 표국의 계산법은 가액의 열 배다.
“뭐?”
“아직도 저놈이!”
발작하려는 둘을 무시하고 정문으로 장추삼이 표국으로 들어가자 몸을 가까스로 바로 하며 철무웅이
재차 포권으로 사과를 했다.
“이만 진노를 푸시지요. 곧 무림첩의 집행도 있고 하니 저도 들어가 봐야게습니다.”
“무슨!”
“당신 마음대로......”
“그만들 두게!”
분이 풀리지 않은 유종휘와 단목준을 제지한 고동규가 철무웅에게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왠지는
몰라도 그는 큰 짐을 덜은 기분이었다.
문고리를 잡는 철무웅에게 유종휘의 빈정거림이 들려왔다.
“그 병신 같은 자식이 표사 나부랭이였다니, 깜빡 속았지 뭐야?”
단목준도 빠드득 이를 갈았다.
“뭐? 가액의 열 배?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더군. 오늘은 당신을 봐서 넘어가지만 다음번이 보면
국물도 없다고 전해.
운 좋은 놈, 하며 킬킬거리는 그들에게 들리라는 것이지 철무웅의 낮은 뇌까림이 아지랑이처럼 슬쩍
피었다 사라졌다.
“가액의 열 배라면 남는 장사를 한 게로군, 나는.”
표국은...무덤가도 같았다.
살아 있는 것이 산 것이 아니었고,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이 죽어 있는 상태.
표국은... 산 자들의 무덤이었다.
`이게 뭐야!`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강요된 이 빙결의 늪을 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추삼은 이 침묵
의 바다에서 천천히 유영하는 편을 택했다.
목적지 없는 방황처럼 지겹고 힘든 것도 없지만 일단은 이효에게도 가지 않았고, 실회조에 들르지도
않았다.
이효는 만나주지 않을 게 뻔하고, 실회조원들과의 대면은 이 시점에서 꺼림직 꺼림칙했다.
그들을 보면 무슨 말을 할지 모를 자신이 위험하기도 했고.
`나 역시 뒷배경에 치우쳐 힘을 빌려 하는, 그런 더러운 근성이 있었구나.`
솔직히 그들과 함께라면 무림맹이고 나발이고 다 깨부술 것만 같았다. 그만큼 든든했고, 믿을 만큼
실회조원들은 개개인이 실력자들이었다.
그렇다고 식객이 아니다. 엄연히 복룡표국의 식구들이다. 그들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장추삼뿐만
아니라 표국의 모든 이에게 안도감을 주고 있다.
그것이면 됏다. 더 바라는 건 무리다.
표국을 떠돌던 장추삼이 문득 표물 하역장에서 발길을 멈췄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표물을 분류하는 쟁자수들과 책자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목이 터
져라 고함을 지르던 총관님의 발길에 몸살을 앓았겠지.“
그러나 지금은 개미 새끼 한 없이 텅빈 공허로 장추삼의 쓸쓸한 마음을 벗해주고 있었다.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잡초들만이 앞으로의 일들을 서로에게 속삭이며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는 듯했다.
“그래. 이곳을, 이 활기찬 서민들의 대지를 저 더러운 날파리들의 말발굽에 내줄 수는 없어. 이곳은
복룡표국의 이백여 식솔의 고향이니까.
스스로에게 보내는 다짐.
“맞는 말이다.”
어디선가 차가운 음성이 스치듯 다가왔다.
“왔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장추삼이 인사를 대신해서 북궁단야에게 손을 한번 까닥 흔들었다.
`음?`
느긋하게 걸어오던 북궁단야는 이 반응에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녀석?`
고개를 살짝 기울인 그가 뭐라고 하려다가 곧 관두고 장추삼의 곁에 나란히 섰다.
“이런 곳을 조금 후에 재수없는 자식들이 점거한다니. 내눈에 흙이 들어가도 봐줄 수 없는 일이
오.”
고개를 끄덕임으로 대답을 하고 장추삼을 빤히 보던 그가 먼 곳으로 눈을 던졌다.
“그때 만나서 어땠는가?”
“......?”
뜬금없는 말에 장추삼이 북궁단야를 쳐다 보았다.
만나다니, 누굴?
“편지 전해준 날 말이다.차미 치매기가 있나?”
“아......”
하고 입을 벌리던 그가 쳇, 하고는 고개를 도려 버렸다. 이건 북궁단야로서 도저히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라 그는 장추삼의 얼굴을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뭘 하려거든 똑바로 좀 하쇼!”
“뭐.”
“기왕 편지를 전해줄 거라면 받은 즉시 줬으면 좋았잖소. 괜히 늦엇다고 잔소리만 들었소이다.
이러니 좋은 일하고 욕먹는다는 말이 생겨난 거지, 하며 투덜거리는 장추삼을 망연히 바라보던 북궁
단야가 편지를 부탁한 누구를 생각하며 가슴 깊이 탄식을 터뜨렸다.
“받은 즉시 가져다준......”
“남자가 쫀쫀하게 변명이나 하고, 보기 안 좋소.”
물론 이 말은 설이 자신에게보낸 힐난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때 장추삼의 속이 뒤집어졌었고 이번
에 북궁단야의 속이 뒤집어졌다.
`이 녀석이 제 화를 푼답시고 오라버니를 아주 망가뜨렸구나.~
한탄스러웠지만 어쩌겠는가. 자기 동생이 저지른 일인 것을.
“그래 미안하게 됐다. 미안하게 됐으나 긍얘기는 관두고......”
“자기 불리하면 꼭 됐느니, 뭐니 하면서 말꼬리를 돌리더라.”
여전히 툴툴거리던 장추삼에게 북궁단야가 평소처럼 말을 건넸다, 평소처럼.
“관두자고 했다.‘
`히익!`
얼음 굴에 빠진 느낌이라 재빨리 얼굴색을 바꾸며 장추삼이 입을 내 밀었다. 왜 이 인간만 보면 주눅
이 드는 걸까, 하고 속으로 되뇌이면서.
“그, 그래요. 관둡시다, 뭐... 지난 일인데......”
진즉에 그럴 것이지, 하는 얼굴로 멀리 하늘가에 시선을 둔 북궁단야가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자신
은 전혀 관심없는 것처럼.
“그래, 얘기는 잘 풀렸나?”
“......?”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얘기가 잘 풀렸냐니. 무슨 근거로 그런 질문을 던졌다는 건가.
“뭘 말이오?”
`이런......`
아까 시금털털했던 반응이 이해가 되었다. 둘은 아마도 깊은 얘기를 나누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그러
니 아직 가족 관계를 밝히지 않았을테고.
“아니다. 됐다.”
손을 젓고 어디론가 가려던 북궁단야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장추삼의 웅얼거림이 심상치 않았기 때
문이다.
“그나저나 그양반이 그 어르신일 줄은 꿈에도 몰랐네. 아무튼 정소저는 사람 보는 눈이 없어.”
`그 양반이 그 어르신? 정혜란 소저가 사람 보는 눈이 없다면?`
정혜란을 업고 가던 길에 그녀가 들려준 짧은 일화는 힘 좋은 북궁단야를 그만 주저앉힐 뻔했다. 만
약 그랬다면 여자 하나 업지 못하는 비리비리한 남자로 전락할 순간이었다.
그녀가 말한 변태 사건. 단순한 용모파기로서 바로 알았다. 세가에서 나온 누구라는 사실을. 너무 재
미있어서 두고두고 생각하며 음미할 참인데.
`설마 그곳에 가셨다는건가?`
그렇다면 상황 종료다. 저 건방진 날건달이 요즘 들어 마음에 들기 시작한 건 사실이나 아직까지 도
장을 찌어주고픈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건달 놈의 혼잣말은 그분이 벌써 녀설을 만났고, 반허락을 했다는 걸 강하게 암시하지 않는가.
`벌써......`
북궁단야로는 이 만남에 대한 정보를 얻을 도리가 없었다. 장추삼의 집에서 노닥거리던 그가 장유열
의 급한 귀가에 놀란 사이도 없이 늙은 표사의 입에서 날벼락과도 같은 소리를 들어야 했고 북궁단야는
바로 표국으로 귀환해야 했다.
어느새 그의 마음에도 복룡표국은 커다란 의미로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실회조 전체 회의.
고담이 주최한 이 회의에서 사흘간은 관망을 하되 외부에서 믈리적인 어떠한 시도라도 한다면 즉시
응전하기로 결론지었고, 북궁단야를 위시한 전원은 표국에서 한 발자국도 나서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이런 일이1`
그가 동석했더라면 얘기는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다 된 밥인걸.
`아무튼 이번 일 끝나고 보자.`
찌릿!
서릿발 같은 북궁단야의 눈빛을 느끼고 장추삼이 볼을 불룩이 부풀렸다.
`아니, 저 인간은 또 웬 심술이람? 천변만화하고 지랄맞은 성격이 딱 누구 같구나.`
며칠 전에 만난 남장여인을 생각하고 둘의 유사점을 찾은 장추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편지 전달자도 꼭 비슷한 사람을 고른거다.
`역시 인간은 신비한 존재야.`
그래도 어떤가, 예쁘기만 한걸.
“우헤헤......”
혀를 내밀고 바보처럼 실실 웃는 장추삼을 보는 북궁단야의 표정은 그야말고 참담했다.
그분께서 저 모습을 보셨어야 했다. 그분은 저 녀석의 십 분의 일도 파악하지 못하고 계심이 틀림없
다. 그러니까 반승낙을 내린 거다.
기가 막혀 하늘을 우러러던 북궁단야와 바보처럼 웃던 장추삼이 어느 순간 딱 눈을 맞췄다.
`쳇!`
`역시 저놈은!`
누가 뭐랄 것 없이 서로를 외면하고 두 사람은 간절하게 한 사내를 그리워했다. 그가 있으면 서먹한
자리라도 어떻게든 유지가 될텐데.
이때 정문에서 거대한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뭔가를 힘있게 내리치는 소리였는데 일정한 시간대를 유지하는지라 묘한 긴장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저것들이!”
“왔나 보군.”
장추삼이 발끈해서 뛰어나가려는데 북궁단야가 한 걸음 먼저 나섰다.
“복룡표국주 이효는 무림첩을 받들라!”
몇십 명의 합창과 함께 표국의문이 활짝 열리며 위풍도 당당하게 네 명의 남 녀가 안으로들어왔다.
“저들이 팔파공동문하인가.”
냉소로 이들을 맞이하는 북궁단야였으나 네 남녀는 미처 그를 보지 못했다. 그들은 표국의 정면에서
이효의 집무전이 열리기만을 기다렸으니까.
잠시 그들을 보던 북궁단야가 장추삼을 팔을 잡고 장내가 훤히 보이는 전각 위로 뛰어올랐다. 지금은
이들과 마주쳐서 좋을 것이 없었으니까.
웅성웅성.
몇 명 남아 있지 않던 표국의 식구들이 조금스레 얼굴을 내밀고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았다.
둥한 얼굴로 네남녀를 바라보던 장추삼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곧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뭐가 그리
우스운지 그의 웃음은 금방이라도 대소로 바뀔 것 같아서 북궁단야가 서둘러 제지해야만 했다.
아직은 이들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기 없으니까.
“뭐 하는 건가, 이런 떼에?!”
그래도 웃음을 멈출 줄 몰라 한참 배를 잡던 장추삼이 겨우 웃음을 거두고 썩은 미소를 얼굴에 걸어
둔 채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저기 바보들 가운데 하나에게 따끔한 충고를 내렸건만 아지도 셀레 발이치고 다니네?”
“저들을 만난적이 있다고?”
북궁단야의 전음에 고개만 끄덕인 장추삼이 별다른 부연 설명은 하지 않고 그들의 다음 행동을 날카
로운 눈으로 지켜 보았다.
`이럴 때는 딴사람 같구나.`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차갑디차갑게 데워 몸 전체에 골고루 전달하려는 양 그는 미동조차 없이
네 명을 쏘아보았다.
“복룡표국주 이효는 뭘 꾸물거리는가! 어서 무림첩을 받들라!”
네 사람 가운데 수장인 군가휘가 공력을 돋우어 표국 전체를 울릴만큼 큰 소리로 그들의 방문을 고
했다. 그러나 집무전에서는 묵묵무답,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뭐하는 건가! 우리가 집무전까지 들어가서 직접 명하는 수고를 끼칠 셈인가!”
군가휘의 으름장에 장추삼이 피식 웃었다.
“팔파공동문하라, 대단한 위세로구먼.”
“그래 봐야 허깨비지.”
북궁단야의 차가운 응대. 둘의 의기투합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만큼 둘은 팔파공동문이라는 이름
에 거부감을 느끼는 터였다.
“정 나오지 않겠다면......”
“지금 나가오!”
집법당주 철무웅의 외침에 군가휘가 입을 닫았다.
삐꺽.
잠시 뒤, 집무전이 열리고 이효가 철무웅과 집사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걸어나왔다. 정신적인 충격
으로 쓰러졌던 거라면 아직까지 저런 모습은 아닐 터였다.
“단심주...그 빌어먹을 사슴여자.....”
“사슴여자?”
이번에도 북궁단야의 물음에 대꾸를 하지 않은 장추삼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사숙의 말대로 적은 둘
이다.
그런데...
`이건 뭔가 이상해. 일이 터진 시점이 너무 공교롭단 말이야.“
단심주에 이은 무림첩. 이렇게 절묘한 연수합격이 어디 있겠는가. 마치 십장생과 무림맹은 짜고 치는
골패(骨牌)처럼 합심해서 복룡표국을 윽박지르고 있다.
정(正)돠 패(覇)를 대표하는 두 단체가 어느 순간 같은 암시가 걸려 둘 다 호북의 군소표국을 죽이자
고 작심을 했을 테니 둘 가운데 하나가 다른 하나를 끌어들였을 테고.
어디가 주체였는지도 뻔했다.
“멍청한 무림맹 놈들!”
그말에 대해서는 한없는 동감을 표하는 바라 북궁단야도 고개를 끄덕였다.
“복룡표국주 이효가 무림첩을 받드오.”
힘겹게 입을 연 이효의 입술은 보기 안쓰럽게도 이곳저곳이 터 있었다. 태양이라도 떨어뜨릴 것만 같
았던 사내의 얼굴이 저리 망가졌다니.
우두둑.
습관적으로 장추삼이 목을 소리나게 꺽었다.
“당신은 팔파공동문하란 이름이 그리 만만하게 보였던가? 감히 우리를 기다리게 하다니, 세상 우습
게 돌아가는군.”
군가휘의 옆에 서 있던 젊은 사내가 날카롭게 외쳤다. 그는 오청지보다 네댓 살 많아 보였는데 일반
인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으며 무엇보다 매부리코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조 조류는 또 뭐야?”
“콕콕 쪼는 걸 즐기는 걸 보니 아마도 태생이 닭인가 보다.”
여간해서 흥분하지 않는 북궁단야였는데 응대하는 그의 목소리에서도 은은한 노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보시오.!
참다못한 집사. 오조영이 고개를 쳐들고 매부리코사내에게 소질 질렀다.
“귀하께서 보는 눈이 없는 게요? 우리 국주님은 대단히 위중한 몸이시오! 깨어 있는 것조차도 벅찬
상태란 말이외다!”
“당신은 뭔가?”
매부리코사내가 같잖다는 듯 웃었다.
“청해복룡표국의 집사 오조영이라 하오!”
“집사~?”
픽 웃은 매부리코가 희끗 몸을 움직였고 어느새 그는 오조영의 멱살를 틀어쥐어 들어 올리고 있었다.
“켁! 켁!”
발이 땅에서 떨어지며 오조영은 숨이 막혀 가쁜 숨을 내쉬었다.
“이보게, 오 집사......”
매부리코가 그의 얼굴까지 오조영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가까이 했다.
“똑바로 들어. 여긴 당신 같은 잡졸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야. 한 번만 더 헛소리를 지껄였다
간......”
휙하고 오조영을 땅바닥에 패대기친 매부리코가 슬쩍 손을 흔들었다.
콰앙!
끓어앉아 있던 이효의 앞에 깊은 구멍 하나가 파였다.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었기에 비산된 흙먼지
를 그대로 뒤집어쓴 이효가 처량하게 웃었다.
“명을 받는 이는 나이거늘 왜 이에게 화풀이를 하는 거요?”
“아직도 자존심은 살아 있다는 건가!
“그만두게. 우리가 지금 싸우자고 온 것은 아니니.”
매부리코의 발작을 제지한 군가휘가 비참한 몰골이 되어버린 이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
다.”
“사형은 너무 관인한 게 흠이오. 키키키......”
묘하게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제자리로 돌아가던 매부리코는 문득 서늘한 느낌을 받앗다.
`뭐야?“
그러나 도무지 근원지를 알 길이 없어서 그는 그저 고개만 갸웃거려야 했다.
“거지 같은 표국에서 무슨 시간을 이리도 오래 끄는 거요? 어서 끝내고 갑시다!”
이상한 느낌에 기분이 영 찜찜해져서 매부리코가 군가휘를 재촉했다. 역시 이런 시골 동네는 올 곳이
못 된다고 생각하면서.
“자, 이국주. 약속한 시간이 되었소. 이제 무림첩을 집행해야겠소. 전에 집행 이유와 절차에 대한 설
명은 마쳤으니 중복할 필요는 없다고 보오.”
`이렇게 끝나는가......`
장추삼도, 부궁단야도 마른침만 삼킬 뿐이었다. 힘으로 한다면야 어떻게 될지도 모르지만 명분이 없
기에 그저 참아야 한다.
여기서 나서면 무림첩에 대한 항명이고, 그건 무림공적이 됨을 스스로 자처하는 격이니까.
“사흘간이나 말미를 주었으나 정리가 마흡하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오. 그럼 집행에 들어가겠소.”
단호한 말과 함께 군가휘가 품에서 무림첩을 꺼내 들어 펼치자 이효가 고개를 조아려 군가휘의 발에
머리를 자져갔다.
“제발 이틀, 아니 단 하루라도 더 말미를 주시오. 아직까지 처리 못 한 일이 너무 많소이다.
“글쎄 저렇다니까!
괴조처럼 끽끽거리며 이상한 웃음소리를 낸 매부리코가 쭈그리고 앉아 이효의 머리를 툭툭 쳤다.
“이보시오, 국주. 무인으로의 마지막 자존심 정도는 지켜야 할 것 아닌가? 그러고도 사나이라고 자
처할 수 있나?”
그러나 그는 이효라는 사내를 놀랐다. 표국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존심 따위는 몇 번이라도 던져 버
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청해복룡표 국주라는 사실을.
머리를 꼿꼿이 드는 것만이 사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아직 몰랐다.
“더는 못 참아!”
장추삼이 일어서려 하자 복궁단야가 어깨를 눌렀다.
“뭘 어쩌자는 건가? 네 기분 하나로 표국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겠다는 말인가!”
안다. 지금 나서면 절대로 안 된다는 사실을. 그러나 이대로 두고 보는 것도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 같고, 삼촌 같은 사내가 저런 굴욕을 당하고 있는데 이렇게 방관만 하고 있어야 하다니. 차라
리 두눈을 파내고 싶었다.
삼류무사 256
일대제자(一代弟子)
매부리코의 빈정거림을 눈으로 제지한 군가휘가 문득 도도히 불어 오는 가을바람 한줄기에 눈을 살짝
감았다.
너른 공터이기 때문이었을까. 바람은 죽어 있던 대지를 한번 훑고 빙그르 돌다 제 흥에 못 이긴 듯
허공으로 말려 올라가며 아련히 여운을 남겼다.
너른 잔혹한 성정의 사제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뜯어 말리고픈 마음도 없었다.
사실 힘이란 다소의 과격성이 가미될 때 그 효과가 배가 되는 법이고, 그런 껄끄러운 역할을 알아서
해주는 사람을 말링 이유는 없다.
물론 사제를 마음에서부터 생각하다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제지해야 한다. 그러나 말이 사제지간이지,
엄연히 사문이 다른데 어찌 사제일까.
겉으로야 번지르르 좋게좋게 지내지만 돌아서면 경쟁 관계요, 어찌 보면 치열하게 냉전을 벌이고 있
는 이들이 판파공동문하가 아닐까.
그래도 일단은 일을 해야겠기에 적당한 터울을 주고 군가휘가 사제를 말리려고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이었다.
끼이익-
천천히 복룡표국의 정문이 열렷다.
`음?`
군가휘의 눈썹이 역 팔 자를 그렸다. 평범한 소음인데 왈칵 밀려오는 거부감은 무엇인가?
복룡표국의 문이 열린 게 뭐 그리 대수일까. 표국으로 사람을 절대 들이지 말라고 철갑기마대원들에
게 지시를 내린 적도 없고, 내릴 이유도 없었다.
수많은 문이 열리고 닫히거늘.
`뭔가......`
이질적이었다. 하루에도 몇백, 몇천 번은 열렸을 복룡표국의 정문이건만.
`뭔가 다르다.`
고개를 땅바닥에 처박은 상태에서 이효가 머리를 들어 정문 쪽을 바라보았다. 사십여 년을 하루같이
들었던 소리인데 그 역시도 지금의 개문(開門) 소리에서 이질적인 무엇을 느꼈던 것이다.
그의 뿌연 망막으로 한 사내가 잡혔고 그는 잠시 주위를 돌아보더니 잠깐 신형을 굳혔다.
“하 형이다!”
“하 형이 틀림없군.”
다른 이에게 설렘을 주는 이는 흔치 않다. 자기 과시에 불타올라 이 얘기, 저 얘기를 마구 주워 삼켜
서 억지로 있어 보이려는, 또는있 음을 주입시키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존재만으로도 타인으로 하여금
기대감을 품게 할 이는 거의 없다.
“뭘 하려고 하 형이 저러지?”
“글세... 지금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군.”
사실 뭘 하려고, 가 아니다. 그렇게 말은 하고 있지만 장추삼이 정말로 품었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또, 지금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는 북궁단야의 말엔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을까.
그건 아마도...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탄식과도 같은 독백과 함께 네 명의 남녀를 쓸어본 하운이 이효에게 다가가 부축을 했다.
“일어나시지요. 이리 계시면 어떻게 합니까?”
“아...그냥 내버려 두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하하... 철 당주님, 의자라도 하나 가져다주세요.”
군가휘들이 어리벙벙해하는 가운데 하운은 이효를 부축하여 볕이 잘 드는 자리로 데려갔다.
“넌 뭐냐?”
매부리코의 사내, 팔파 가운데 공동의 진전을 이은 매정방(梅丁妨) 이 그런 그를 보다 어이없다는 듯
킁,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발자국 나섰다.
“나 말이오? 이곳에서 이하는 표사라오.”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로 매정방의 삐딱한 물음을 응대한 하운이 철무웅이 급하게 가져온 의자로 이효
를 조심스레 안내했다.
“아주 가관이로군. 가지가지 다해라.”
오청지가 팔짱을 끼고 픽픽 웃었다.
그러나 하운은 이들의 반응 따윈 아랑곳 없다는듯제 할 일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한술 더 떠 환약
하나를 꺼내 이효에게 까주기까지 했다.
“드시지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니다.
“허......”
난감한 이효가 어쩔 줄 몰라 하운과 군가휘를 번갈아 보았다. 비록 처참한 몰골로 구겨져 있었고, 지
금이야 사람답게 앉아 있지만 그는 아직 무림첩을 받지 않은 상태다.
“난 해야 할 일 있다네.”
이때 이효는 이 세상에서 가장 찬란하면서 굳건한 미소를 보게 되었다. 눈가에가는 주름이 잡힐 만큼
씩 웃은 하운이 힘없이 늘어져 있는 이효의 손을 잡으며 빠르게 귓속말을 전했다.
“그 일,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 자네가......“
대답을 듣지 않고 쭉 몸을 편 하운이 멍하니 서있던 네 청년에게 빙글 돌아섰다.
“오래 기다리셨소.”
“이보시오,이국주!”
마침내 군가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어봐야 결국 집행될 법이고, 미률 사안도 아니란 말이오. 이깟 깜짝 놀음이
얼마의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거요?”
“깜짝 놀음?”
하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 지금 내가 깜짝 놀음을 한다고 생각하는 거요?”
그의 태도는 워낙 억울해 보여서 누가 보더라도 군가휘가 모함을 했다고 보여질 판이었다.
“이 표국에서 일하는 표사인 듯한데, 당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오. 더는 신경 쓰지 말길 바라오.”
군가휘의 차가운 대답. 그러나 하운은 여전히 웃었다.
“그건 당신 생각이고, 나 역시 이 표국에서 일하는 처지이니 표국의 대소사에 나설 권리가 있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기나 하고 말하는 건가!”
먼 길 떠났던 표사가 물정 모르고 덤벼든다고 생각해서 군가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뭘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복룡표국은 아니, 표국주는 지금 무림첩을 받고 있는 것이다. 당신 같
은 조무래기가 나설 자리가 아니란 말이야.”
표사라면 무림첩이 가지는 의미 정도는 알고 있을 터, 당연히 하운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인지 하운
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뭘 모르다니? 당신은 상당히 자기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군. 나는 이 자리에서 무림첩에 관
한 얘기가 오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오.”
“역시......”
북궁단야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추삼이 잽싸게 물었다.
“뭐가 역시오?”
“봐라, 하형이 신고 있는 신발을 말이야. 군데군데 까지고, 검게 그슬린 흔적이 있지 않나. 저것은
풀숲이나 나무 사이가 아닌, 인공적인 건축물 사이로 경신술을 펼쳤을 때 생긴 흔적임에 분명하다. 고
속으로 생긴 마찰열의 결과물이지.
그의 말대로 하운의 신발은 누더기처럼 헤어져 여기저리 거멓게 탄 흔적이 보였다. 간판과도 같았던
오관의 단정함은 다 어디로 갔는지 흐트러진 머리와 구겨진 의복, 그리고 비처럼 흘러내리는 땀방울.
“대체 어디서부터 달려온 거야?”
장추삼의 중얼거림에 북궁단야가 유심히 하운의 어깨를 보더니 천천히 자리에 앉으며 감탄 섞인 대답
으로 그의 단아한 동료에게 경의를 표했다.
“내가 보기엔 성내로 들어서자마자일 거다.”
무림인이라고 아무 곳에서나 경신술을 펼치는 것은 아니다. 순간적으로 말보다 빠를지 몰라도 지구력
에서 아무래도 차이가 있고, 괜히 힘을 뺄 필요도 없기에 통상적으로 말을 타고다닌다.
또한 일반인들의 앞에서는 되도록 무공을 펼치지 않는 것을 기본적으로 하기에 성내에서 경신술을 쓰는
경우은 극히 드물다.
그 말은 하운이 얼마나 급하게 달려 왔는가를 입증하는 것이니, 벌건 대낮에 많은 사람을무시하고 경
신술로 달려 왔으며 또한 무림첩에 관련된 사안임을 인지하고도 저리 당당하게 개입했다는 건.
“근데 하 형은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인가 보네?”
“그건 또 무순 소리냐?”
뜬금없는 장추삼의 중얼거림에 장내를 주시하던 북궁단야가 고개를 돌렸다.
“보라고. 저 두툼한 겉옷을 말이오. 두꺼운 옷이 아니라 한겹을 더 걸쳐 입었잖소. 별로 춥지도 않
은 날씬데. 달려와서 그러나?”
`흠!`
확실히 하운은 최소한 두 겹 이상의 겉옷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봤을 때 이질적이었던 거다.
무림인들이 일반인들보다 추위를 덜 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기본적으로 보통 사람들보다 운동을 많이 하는 측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기본 공부인내가심법
자체가 몸속의 기운을 전신으로 도인하는 걸 기본으로 하기에 강호인들은 추위에 무척 강하다 하겠다.
정말로 추운 경우라면 진기를 일주천하는 것만으로 웬만한 추위 정도는 이겨낼 수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내가 고수인 하운이 저렇게 옷을 껴입은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 하겠다.
`몸이 안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이해하기 어렵군. 무슨 일이지?`
그러나 이런 소소한 것에 신경 쓸 만한 상황은 아니라 북궁단야는 의문을 일단 접었다. 지금 누가 옷
을 몇 겹 입었다는 사실이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무림첩이 발동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행동을 취하고 있다는 건가?”
오청지가 날카롭게 물었다. 군가휘의 망연함을 대신하려는 듯한데 아무래도 이 약관의 청년은 뭔가
많이 뒤틀려 있는 듯했다.
“그렇다고 분명히 말을 했소만?”
너무도 태연한 웅대에 군가휘가 하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비록 지치고 피곤해 보이지만 눈가에 서린 웃음만큼이나 여유로운 행동거지, 그리고 만인을 담아낼
것만 같은 눈동자.
“실례지만 귀하의 명호를 알고 싶소.”
이런 자가 절대로 일반 표사일 리 없다!
“미안하지만 귀하에게 그걸 꼭 밝혀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소.”
“어째.......”
북궁단야가 픽 웃었다. 요즘 들어 웃음이 잦아졌다는 걸 자신은 알고 있을까?
“하 형이 누굴 닮아가는군. 처음에는 그리 단아하던 사람이 저런 식으로 깐죽깐죽 상대방을 조롱하
다니. 이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군.”
“누굴 닮는다는 거요?”
깐죽깐죽이가 묻자 북궁단야는 대답하기도 싫어서 장애로 눈을 돌렸다.
“누구 말하는 거냐니까?”
계속 깐죽이가 깐죽거리자 무시하려던 북궁단야의 눈꼬리가 치솟았다.
“너 바보냐!”
띵-
젠장.
며칠 전에도 들었던 소리. 그런데 여기 와서까지 또 듣게 되다니.
“나 바보 아니오!”
바보깐죽이가 으르릉거리기까지 하자 아예 외면하고 북궁단야는 천천히 동료의 행적을 쫓았다. 왜인
지는 모르지만 무척이나 느긋한 마음으로.
무림에서 명호는 생명과도 같다. 그렇기에 생면부지의 타인이 요구한다고 해서 바로바로 대주는 바보
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이들은 다르지 않은가.
“이봐, 우리가 누군지는 알고 있나?”
매부리코, 매정방이 빙글빙글 웃었다.
사실 그는 화끈한 무엇을 기대했었다. 그래도 한 세력을 멸하는 일이니 최소한의 반항 정도는 보일
거라 내심 기대했었다.
하나 이게 뭔가. 국주라는 자는 땅에 머리를 조아리며 시일을 늘려 달라고 구걸이나 하고, 부하라는
작자들을 어디로 숨었는지 종적조차 묘연하다.
그가 생각하는 강호는 이런 게 아니었다. 땀과 피가 넘치며 생과 사를 오가는, 그런 짜릿함을 전신
가득 느낄 수 있는 곳.
해서, 맥 빠져 있는 그였는데 헐레벌떡 나타난 표사 하나가 나름대로 즐거움을 선사하려 한다. 그래
서 마지막으로 확인을 하려는 것이다.
그의 기백을.
“우리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묻잖나.”
하운이 눈썹을 찡긋 올렸다. 땀이 바람을 타고 증발하며 느끼는 시원함이 마음에 들었고, 아직은 녹
슬지 않은 두 다리의 강건함이 마음에 들었다.
시간에 닿지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당신들이 누구인지는 그리 중요한 사항이 아닌 걸로 아는데?”
“큭큭큭...맞아, 맞는 말이야.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그의 괴상한 웃음과 함께 오청지의 새된 목소리가 섞였다.
“우리는 팔파공동문하라 한다. 들어는 보았겠지? 여기 계신 이분은......”
“됐소, 됐소.”
오청지가 군가휘 쪽으로 손바닥을 눕히며 장황한 소개를 하려 들자 하운이 손을 내저었다.
“팔파공동문하. 그래 알고 있소. 그런데 당신들이 팔파공동문하라는 사실과 무림첩의 집행에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거요?”
팔파공동문하임을 알면서도 전혀 거리낄 것이 없다는 태도.
무엇보다...
‘저자는 처음부터 우리를 당신들이라고 칭했다. 만약 알면서도 그랬던 거라면 어떻게 이해해야 하
나.’
주지하다시피 구대문파의 일대 제자들은 일반 강호인들보다 높은 항렬로 인정받는다. 명문(明文)적으
로 그리 적시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자연스레 굳어진 관행이고, 일이백 년 쌓인 전통도 아니기에 일반
무림인들이라면 승복하지 않는 이가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 눈앞의 청년은 그런 걸 완전히 무시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이라는 말 자체에서 그는 자신들과
눈높이를 똑같이 가져가고 있었다.
하나 오청지에겐 하운의 태도가 목에 걸린 가시와도 같았다. 그는 이 동네가 싫었고, 이번 일이 싫었
으며, 이렇게 당당한 사람들이 싫었다.
늘 존중받아 왔던 이들의 상대적인 박탈감일까? 아니면 철부지의 치기일까?
“물론 우리가 팔파공동문하라는 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소. 하지만 무림에는 나름대로 내려오는
관습 같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요?”
발끈한 오청지를 철모르고 날아다니는 가을 모기 보듯 바라보던 하운이 잠시 눈을 깜빡이다 크게 팔
을 돌리며 기운차게 목을 꺾었다.
“시원하군.”
“거참......”
“또 뭐요?!”
“아무리 봐도 그놈이 하는 짓거리와 꼭 같아. 어쩌다 저리된 거지?”
“글쎄 그게 누구냐니까?!”
“눈으로 보면서도 모르나? 정말 바보인가?”
“나 바보 아니라니까!”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 건가!”
오청지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악에 받쳐 뭐라 한마디 더 하려는데 몸을 슬슬 풀던 하운이 문득
질문을 던졌다.
“권위가 뭐라고 생각하시오?”
“뭐,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
“권위라는 것에 대해 묻는 거요. 뭐라고 생각하는지 한번 들어봅시다.”
또 무슨 말을 지껄이고 싶은 게냐!“
하운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소리만 지르는 오청지의 모습은 실체 없는 무언가에 쫒기는 몽
유병 환자와도 같았다.
그러나 하운은 결코 추적자 따위가 아니었기에 그런 그의 다급함을 이해하고 씁씁한 얼굴이 되어 지
그시 눈을 감았다.
“무림의 대소문파에서 구파의 일대제자들에게 경의를 표한 건 어디까지나 구파에 대한 경의의 표시
였을 뿐, 각 제자들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오. 권위란 그런 것이오. 원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존
중해 주는 것,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것. 권위이라는 마물에 사로 잡혀 스스로 그 굴레에 빠졌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존중하지 못하는 법이라오.”
“뭐!”
얼굴이 벌게진 오청지의 대꾸를 무시하고 하운이 군가휘에게 눈을 돌렸다.
“관습이라고 했지만 구파에 대한 존중 자체가 지켜도 그만이고 지키지 않아도 그만인 것. 무릇 인간
이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평등한 존재이거늘, 어찌 소속 문파에 따라 우열을 가르려 드는 건지... 정
말 이해하기 어려운 사고 방식이구려.”
누구에게 말한 걸까.
하운의 담담한 독백은 청명한 가을 하늘처럼 모두의 가슴에 어떤 장막을 걷어내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군가휘도 자신들의 행위가 조금은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건 무림첩의 발동과 아무런 상관 없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말은 잘......”
“가만!”
매정방의 말을 자르고 군가휘가 하운을 빤히 쏘아보다 이효에게 고개를 돌렸다.
힘겨운 얼굴로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가뿐 숨을 몰아쉬는 초로(初老)의 군소표국주. 강직한 기재 정도
는 인정할 부분이지만 고작 그것만 가지고 이런 인물들을 담아낸다는 건가.
아니면 그가 모르는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얘긴가.
`하긴, 나와 상관없는 일이지.`
군가휘는 눈앞의 청년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지만 그것에 구애받지 않기로 했
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청해복룡표국의 표사들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좋은 말이고 가슴 깊이 새길 고언이오. 보아하니 무림에 관해 잘아는 사람인 듯 한데 무림첩의 정
당한 집행을 방해하면 그 역시도 죄를 물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소?”
하운이 싱긋 웃었다.
“물론이오. 당연히 알고 있지.”
군가휘도 따라 웃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자행하고 있는 행동이 나중에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생각해 보았소?”
하운의 미소가 짙어졌다.
“무림첩의 정당한 집행이라고 한정했소만?”
군가휘의 미소가 그대로 얼어 붙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정당하지 못한 법 집행을 하고 있다는 건가! 답답한 사람이로군. 여기 무림
첩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가!”
그가 무림첩을 꺼내 들었다. 그에 따라 뒤에 도열해 있던 세남녀가 무릎을 끓었고 의자에 앉아있던
이효도 겨우 일으켜 무릎을 굽히려 들었다.
발동하지 않은 무림첩을 대하는 강호인은 무릎을 끓어야 한다. 그건 관습이 아니라 약속이었고, 그래
서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불문율이었다.
“아니, 왜 몸을 움직이십니까? 그냥 자리에 앉아계시지요.”
일어선 이효를 억지로 의자에 앉힌 하운이 무림첩을 무심하게 바라 보았다.
`이런......`
군가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미안하오만 이번 무림첩의 발동에 대해 다시 한번 말해 주겠소?”
그가 뭐라고 하기 전 하운이 툭 물움을 던졌다.
뻔한 얘기의 반복이 지겨워서 군가휘가 이효에게 눈짓을 했으나 초로의 표국주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눈을 꼬옥 감고 있었다.
“지겹군, 정말이지 지겨워.”
“나도 이 대화가 그리 흥미롭지 않은 바요.”
“크크크......”
군가휘와 하운이 주고 받는 말을 듣던 매정방이 키득거렸다. 그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단지
근질거리는 손을 해소시키면 그만이었으니까.
아예 일이 더 커지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다시 한번 말해 주는 건 어렵지 않으나 당신은 무림첩의 행사를 더디게 한 죄를 받아야 할 거요.”
“기꺼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미소.
문득 군가휘는 저 남자의 미소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
말이다.
“당신도 이번 건에 대해 국주와 같은 이의를 제기하는 모양인데 본무림첩에 맹주 직인이 찍혀 있지
는 않소. 그러나 무림법 제이조에 따라 무림맹주의 권한을 정지시킨 구파의 원로 분들이 맹주를 대리하
여 무림첩 발동에 대해 의결했던 것이오.”
무림첩에도 꼿꼿이 무릎을 펴고 있는 하운을 냉엄하게 바라보던 군가휘가 일갈했다.
“이제 됐는가! 어서 무림첩에 복종하라!”
일목요연한 설명. 더 이상의 반항은 없을 터.
그러나 하운은 몸을 돌려 이효에게 다가갔다.
“국주님, 이제 안으로 들어 가시지요. 가을바람이라고는 하나 이럴때는 별로 좋지 않습니다.
“끝까지... 당신은 정녕 무림맹과 등을 지겠다는 거요?”
“강호에 몸을 담은 이로서 어찌 무림맹과 등을 질 수 있겠소? 내게 그만한 간담은 없다오.”
“그럼 지금 뭐 하자는 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군가휘를 올려다 보던 매정빙이 흙을 툭툭 털면서 일어났다. 드디어 바라던
대로 얘기가 전개되는 것 같다.
“지금 저자는 이리저리 말을 돌려서 시간만 끌고 있잖소? 그냥 힘을 보여 줍시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니 방법이 있겠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명백히 무림법을 어기고 있으니 나로서도 별 다른 도리가 없구려. 그럼...
“
이때 고개를 돌린 하운이 양팔을 벌리며 입도 떡하니 열었다.
“이렇게 억울할 때가! 누가 무림법을 어겼다는 거요? 설마 나를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킥킥킥... 계속 저런 식이라니까. 저 허풍장이의 말을 끝까지 들어봐야 열만 받을 거요.”
매정방이 까마귀 울부짖듯 웃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방금 전까지 온화했던 미
소가 차가운 냉엄함으로 변해 있었다.
“허풍장이라고 했나?”
그저 물은 것뿐인데 매정방은 등골을 타고 오르는 한기에 주춤 뒤로 물러났다.
“누가 누구더러 허풍장이라는 건가? 그런 종잇쪼가리를 들고 호가호위하는 당신들? 아니면 잘못된
무림첩과 과잉 해석된 무림법에 관해 지적하려는 나를 말하는가?”
뒷짐 진 하운이 공력을 돋우어 근엄한 목소리로 낭랑하게 일갈했다.
“팔파공동문하의 네 명과 밖에서 도열하고 있는 철갑기마원 전원은 들으라! 이번에 급조된 무림첩은
그 구성 요건에 중대한 하자가 있으므로 무림법 제오조에 따라 무효임을 선언한다!”
일개인의무림첩 무효 선언.
“뭐라고?”
“뭣이!”
군가휘가 얼굴을 굳히고 오청지가 한 발 나섰다. 그러나 매정방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전히 하운을
쏘아보고만 있었다.
그들의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하운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여, 철갑기마대원들은 속히 맹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고, 팔파공동문하의 네 명 역시 귀환하라.”
“큭큭... 무슨 개소리지? 무립첩이 무효라고? 이건 정말 우스운 말이 아닌가?”
고개를 숙이고 킥킥 웃던 매정방이 긴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그러나 하운은 할 말 다 한 사람
처럼 몸을 돌려 이효에게 다가갔다.
“아직도 안 들어가셨군요. 바람이 차니 어서 들어가시라니까요. 당주님, 뭐 하십니까? 어서 국주님
을 안으로 모시라니까요?”
불쌍한 건 철무웅이었다. 그는 이 돌연한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눈둥자만 굴
리고 있었는데 하운의 부름을 받자 눈만 둥그레 떴다.
그가 쭈뼛쭈뼛 다가와 이효를 부축하자 하운이 빠르게 속삭였다.
다 잘될 겁니다...
평범한 위로였건만 철무웅은 순간 모든 것이 잘 풀릴 것만 같았다. 왠지는 모르지만 분명 다 잘될 거
라고.
“당신은 자신이 지금 어떤 망발을 행하는지 알고 있는 건가.”
쿠쿠쿠-
군가휘의 장포가 부풀어 올랐다.
“이자는 내가 혼을 낼 터이니 사제들은 호북 청해복룡표국에서 일어난 반란에 관해 맹에 알려라. 이
죄는 엄중히 다스려야 할 것이다.”
역시 팔파공동문하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그의 기세는 압도적인 것이었다. 힘없이 앉아 있던 이
효의 몸이 절로 흔들렸고 바닥의 먼지들이 요동쳤다.
“그만!”
하운이 슬쩍 손을 떨치자 기세들은 마치 무형의 막에 가로막힌 듯 더 이상의 진행을 보이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서로 부딪쳐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으음......’
세 명의 팔파공동문하는 이 한 수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공력을 불러 실제적인 물리력을 행사하는
건 일류고수라면 가능한 일이다. 지금의 군가휘처럼.
그러나 실체가없는 실체화된 공력의 진행을 단번에 가로막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기세란 눈으
로 보이지 않기에 같은 기세로 막아 낸다는 건 그야말로 양자강에서 바늘 찾기니까.
‘이, 이자!’
군가휘가 미간을 좁혔다.
‘장내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
오청지는 뻗었던 발을 움츠렸다.
매정방의 썩은 미소는 여전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혀를 날름거렸다. 입술이 말라 붙나 보다.
“힘 자랑 하고 싶으면 맹에 돌아가서나 하시구려. 남의 앞마당에서 이러고 있지 말고.”
쿵!
‘으윽!’
그의 한마디에 주춤 물러선 군가휘가 답답한 가슴을 누르며 놀란 눈으로 아직도 인자하게 웃고 있는
하운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서, 설마 어기전성?’
어기전성(御氣傳聲).
말 한마디에 뜻한 기세를 실어 상대방을 압박한다는 초상승의 공부. 특정한 초식이나 수법이 아니기
에 막연히 초고수들이나 시전 가능한 공력으로 자리매김한, 그야말로 아득한 신기루와도 같은 무공.
“훅, 좋다. 믿는 바가 있으니 이런 일을 벌이리라 생각했었지.”
가슴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선 군가휘가 표국의 정문을 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철갑기마대원들은 안으로 진입하라!”
끼이익-
표국의 정문이 열렸다.
뭔가 텅 빈 음향. 아까처럼 무거운 느낌이 아니라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는 듯한, 그런 맥빠진 소리였
기에 어쩐지 군가휘는 가슴 한구석이 찌릿해졌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두두두-
기세 좋게 밀려들어 오는 백여 기의 인마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햇빛을 모조리 집어삼키려는 듯 까
맣게 번들거리는 그들의 진격은 분명 위압적이었다.
두둑.
철갑기마대 전원이 표국 안으로 들어와 네 청년의 뒤에 도열하며 마지막 기마대원의 말이 발굽을 멈
추자 군가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역시 위세란 만들어가는 것인가.
“지금부터 내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기마대원들은 복룡표국을 완전히 장악해라. 만약 행사에 불응하
는 움직임을 보이는 이가 있다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응징하라. 이는 무림법에 명시된 정당한 무림첩
의 행사이니 철갑대원들은 거리낌없이 행동해도 좋다. 불응자가 과도한 반항을 할 시에는......”
그가 하운을 바라보고 차갑게 말을 맺었다.
“목숨을 취해도 좋다!”
그러자 하운이 기마대원들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물론 정당한 무림법의 행사라면 상대방의 반항 정도에 따라 목숨을 취할 수도 있소. 그 정도의 직
권도 없어서야 어찌 기동대라 할 수 있을까. 다만......”
그 역시 군가휘를 바라보며 온화하게 웃어주었다.
“정당한 집행이란 경우에 한한다는 게 문제겠지.”
“더는 참을 필요 없습니다, 사형. 집행에 들어가시지요!”
하운을 노려보던 군가휘가 손을 치켜들었다. 저 손이 내려가면 복룡표국은 개국(開局) 사십여 년 이
래 초유의 대란을 맞이할 상황.
꿀꺽!
놀랍게도 장추삼을 뛰쳐나가지 않았다. 그의 왈왈한 성격한 이런 경우는 그냥 자리를 지킨다는 건 그
야말로 놀라운 일일진대.
그는 마른침을 삼키고 다음의 상황을 기다렸다. 마치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흐음!”
손을 돌려 칼자루를 움켜쥐기는 했으나 북궁단야 역시 제자리에서 큰 움직임으로 보이지 않음은 마찬
가지였다. 차갑도록 투명한 두 눈에 옅은 열기가 감돈 건 어떤 연유에서인지 모르지만.
군가휘의 손이 내려가려는데 하운이 피식 웃었다.
“당신은 지금의 집행이 적법한 절차라고 믿는 것이오?”
대답없이 군가휘가 철기마대원의 수장과 눈빛을 교환하자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하운이 품에서 무언
가를 꺼내 높이 쳐들었다.
할 수 없지, 라는 듯.
“또 뭐야?”
매정방의 까마귀 소리 같은 비아냥은 하운의 목소리에 그대로 묻혀 버렸다.
“이곳에 모인 모든 이, 특히 무림맹에 관련된 이들은 똑똑히 들으시오!”
멈칫!
손을 든 그대로 군가휘가 하운과 정체 모를 종이에 눈길을 주었다.
“뭐 하세요! 그냥 집행하시라니까요!”
오청지의 어리광과도 같은 재촉에도 그는 손을 결코 내릴 수 없었다.
뭔가, 뭔가 마음에 걸린다!
이자는 그저 허풍선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하운의 낭랑한 목소리가 장낸를 감싸 안았다.
“본 파는 이번 무림맹에서 발행했다는 무림첩에 심각한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이번 무림첩의 구
성 요건이라는 구파의 합의, 과연 어느 면에서 구파의 합의라고 할 수 있는가! 본 파의 어느 누구도 본
도장이 아는 한 의결 회의에 참석한 적이 없거늘, 무엇을 근거로 하여 구파의 합의라 말할 수 있는
가!”
“그게 무슨 말......”
군가휘가 뭐라고 하려 했지만 하운은 그대로 읽기를 계속했다.
“무립법 이조에 명시된 맹주의 유고, 기타 확인되지 않은 장기간의 부재 시 강호의 중요 의결 사안
이 발생될 때 맹주의 권한을 한시적으로 정지시키거나, 사안에 따라 맹주 직을 완전히 박탈할 수 있다
고 했다! 주지하다시피 맹주의 부재 시 구파의 원로가 중요 사안을 의결할 때는 전원 합의를 원칙으로
한다! 그런데 어찌 팔파만이 모여 이런 의결을 감행했단 말인가!”
쿠쿵!
팔파만의 의결. 이것이 사실이라면 무림첩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고 봐도 옳다. 의결 기권 자체가
법을 어긴 격이니까.
군가휘들이 망연히 하운을 바라보는데 그는 무감정하게 다음 대목을 읽었다.
“이에 본 파는 무림맹주 만승검존의 지위를 원상 보존할 것과 이번 일에 엄중 항의의 표시로 이번
집행에 관련된 전원을 문책할 것을 통보하는 바다!”
전세를 완전히 역전되었다.
가까스로 항의하려는 군가휘들의 입은 하운의 마지막 말에 완전히 봉해졌다.
“이상 화산 장문 구양승.”
쾅!
화산 장문인의 추상같은 일갈이 편지 너머로 살아 움직이는 듯하여 오청지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
츠려야만 했다.
그러나 이대로는 물러날 수 없다.
"당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찌 편지 한 장을 믿는단 말이오!“
이 말에 하운이 빙긋 웃었다.
“편지의 진위를 확인하고 싶은 거요, 아니면 내 정체를 확인하고 싶은 거요?”
“우리는 당신을 믿을 수 없다!”
군가휘가 나름대로 강단있게 목소리를 내려 했지만 목소리의 떨림을 주체하지 못했기에 그의 말은 심
하게 떨렸다. 뭔가 크게 잘못 돌아간다고 생각했는데 어찌 이런 변수가 숨어 있었단 말인가.
“흐음......”
편지를 접어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던 하운이 오른손을 들어 겉옷을 움켜잡았다.
“그럼 이건 어떨까?”
뭘 어쩌려는 건가, 하고 눈을 굴리는 군가휘들에게서 눈을 돌린 하운이 이효를 슬쩍 보고, 어안이 벙
벙해 있는 철무웅에서 한 번 웃어 보였다.
다 잘될 겁니다...
그리고 그가 겉옷을 힘차게 벗었다.
펄럭~
흩날리는 천 아래로 또 하나의 옷이 드러나자 장내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숨겨진 그의 허리띠에 선명히 그려져 있는 다섯 개의 매화 문양은 화산의 다섯 명밖에 없다는 일대제
자를 상징하는 것일 터.
번쩍!
가슴 한복판에 새겨진 세 개의 꽃송이(三現梅花)는 옷을 뚫고 금방이라도 허곤에 날아오를 것만 같았
다.
누가 모르랴, 저 문양이 육백 년 화산을 대표하는 고유의 상징임을.
누가 모르랴, 저 문양을 당당히 아로새길 수 있는 사람은 화산뿐 아니라 전 무림에 오직 하나밖에 없
음을.
누가 있어 이 앞에서 한 치라도 의심을 품으랴!
옷을 벗고 몸을 빙글 돌린 이가 멀리 화산이 보이는 섬서 쪽으로 깊이 포권을 올렸다.
“이상 장문 도장의 글을 대독(代讀)한 이는 화산의 대제자 하운임을 밝히니 무림동도는 장문 도장의
뜻을 헤아리기 바라오!”
바라오, 바라오, 바라오...
울려 퍼지는 메아리처럼 번져 오는 알 수 없는 전율.
네 명의 청년은 마치 석상이라도 된 양 움직일 줄 몰랐다.
무림첩에 그리 당당한 모습으로 맞섰던 이유가,
우리를 그토록 측은하게 바라보던 눈빛의 의미가,
만인이 질식한 법한 분위기에서도 홀로 고고하게 미소 짓던 여유가,
그 모든 담담함이 바로 이것이었나.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일대제자만이 가질 수 있는 관록이라는 건가.
“대단하군. 크하하하하!”
군가휘가 대소를 터뜨렸다.
“권위가 어쩌니 했지만 결국 귀하도 권위라는 마물에 사로잡힌 사람이잖소? 그러니 이런 연출을 하
는 게지. 안 그렇소?”
군가휘의 트집에 하운이 고개를 들어 엉뚱한 곳을 바라보았다.
“권위가 뭔지는 모르지만......”
혼잣말인데도 그의 목소리는 마치 옆에서 크게 소리치는 것처럼 장내를 울렸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끌어올려진 소리라 그런 것일까.
“권위를 모르기에 남에게 권위를 내세우지 않아서 좋은 사람들. 권위를 모르기에 권위에 구속받지
싫어하는 사람들. 그래서 부당한 권위에 언제든 맞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하운이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하, 이런 이들과 함께인데 어찌 권위와 친해질 수 있을까? 안 그렇소, 북궁 형, 장 형?”
잠시의 침묵.
그가 바라보는 전각 위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두명의 사내가 뛰어내렸다.
“뭐야,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하하, 방금 전에야 알았지 뭐요. 숨어 있는 사람들이 그리 큰소리를 내면 누가 모르겠소?”
이게 무슨 말인가! 군가휘들로서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거늘!
“그야 하 형이 하도 멋을 부리니까 아침 먹은 걸 올릴 뻔한 거지! 어울리지 않게 무슨 옷을 벗어 던
지고 난리를 부린 거야?”
지금 생각해도 속이 다 메슥거리네, 하고 툴툴거리던 사내가 오청지의 하얗게 질려가는 얼굴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어이, 구면이로군. 우린 꼭 꿀꿀한 상황에서만 맞닥뜨리는군 그래.”
“다, 당신은!”
오청지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군가휘는 그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심통 맞은 사내와 같이
내려선 장발의 청년이 쏘아내는 기도에 그는 혼이 다 달아날 지경이었으니까.
“이제 정리가 된 건가?”
맑은 가을 하늘을 단숨에 동결시킬 정도로 시린 음성을 내뱉은 청년이 철갑기마대를 한 번 보고 군가
휘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니면 볼일이 더 있는 겐가.”
‘후욱!’
이런 압박감은 난생처음이라 군가휘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단 한 마디만으로 산대방을 질식
시킬 듯한 사내.
“다, 당신들은 또 누군가!”
“문밖에서 옹기종이 모여 있던 숯검둥이들에게 아까 말했는데? 여기 표사라고.”
장추삼이 오청지에게 눈을 돌려 기마대의 맨 앞에서 얼빵한 모습으로 서 있는 유종휘와 단목준에게
눈을 한 번 찡긋거려 주었다.
“안 그래?”
‘으으......’
기마대의 두 사내는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가자 꽁무니를 빼고 싶어졌다. 알고 보니 이 군소표
국은 사실 용담호혈(龍潭虎穴)의 괴 집단이 아닌가!
첫댓글 용담호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