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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1일 토요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제1독서 : 에페 4,1-7.11-13
복 음 : 마태 9,9-13
그때에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따라오라고 부르시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분을 따라갑니다.
절 하나로 부르심과 응답이 끝납니다.
성경에 나오는 부르심의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짧지 않나 싶습니다.
이 한 장면 안에는 세리를 부르시는 예수님께서 한 편에,
그런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세리 마태오가 다른 한 편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가 하는 일을 보시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십니다.
그는 남들에게 공공연히 죄인으로 여겨지는 사람이었고, 자비가 필요한 사람이었으며,
그래서 그에게 베풀어지는 자비를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내세우며 자비 따위는 필요 없다고 여기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한편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시는 것으로
그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세리인 자신에게 아무런 질문도 없이,
그가 어떤 결심을 하였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회개는 하였는지 물으시지도 않고
곧바로 당신과 함께 있도록 불러 주시는 분이 마태오에게는 분명한 구원자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신다는 것은 그에게 걸림돌이기보다,
오히려 자신이 따라가야 할 분을 알려 주는 표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태오도 다른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자기가 부당하다는 것을 말씀드리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부당함을 다 아시면서도 따라오라고 하신다는 것이 명백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마태 9,9)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베푸시는 자비입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시라면 따라갈 만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전에 유명했던 건배가 있었습니다.
이 건배사를 술집만 가면 쉽게 들을 수 있었지요.
그것은 ‘우리가~’, ‘남이가!’라는 건배사였습니다.
‘우리는 남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진짜 우리는 남이 아닐까요?
아무리 같은 직장, 같은 성당, 같은 단체에 있다고 해도 남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나 외에는 모두 ‘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남이 아니니, 뜻을 같이하고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라는 생각은
독선적인 이기주의가 아닐까요?
나와 네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 생기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회 안에는 ‘다름’이라는 것을 잘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나와 다름을 도저히 함께하지 못할 사람으로,
나의 적 또는 원수로 대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종종 이상한 항의를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어쩌면 그럴 수 있냐?’면서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람이 오히려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 다름을 왜 인정할 수 없는지, 여기에 자기 말이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면서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서 정당성을 이야기합니다.
그 모습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반성합니다.
‘나도 이런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구나.’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보다 ‘우리는~ 남이다!’라는 구호를 외쳐보면 어떨까요?
다름을 인정할 때 비로소 함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하나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다른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 그리고 나의 목소리나 뜻을 조금 낮추어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이 모범을 보여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남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는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직업은 세리로 당시의 모든 유다인은 세리를 죄인으로 간주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이제 마태오는 그 부르심에 응답해서 자기 집에 기쁘게 맞아들입니다.
그 역시 어떤 판단 없이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에 반해 바리사이들은 말합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거부부터 하는 그들의 모습에 우리의 모습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죄인 곁에 예수님도 함께 계실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간주한 죄인에게서 멀어지려고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고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태 9,9)
사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라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보고 부르셨을까요?
우리의 잘난 모습이나 능력, 혹은 우리의 선함이나 봉사 정신,
아니면 당신께 대한 충성이나 믿음 등을 보고 부르셨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신명기>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을 주시고 너희를 선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너희를 사랑하시어 구해내셨다.”(신명 7,7-8)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호의와 자비'를 입어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과 호의를 입은 이들이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호의를 베푸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르심 받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애를 입은 이들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단지 죄인인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죄인’임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용서해야 하는 일을 하는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용서받은 죄인’이란 용서하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마태 9,12)
사실 예수님께서 죄인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그들과 타협하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두둔하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크신 자비요, 신의요, 호의였습니다.
용서요, 사랑이요, 곧 하느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 하심은
바로 이토록 너희도 죄인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 받은 그 사랑과 호의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팡세>를 쓴 파스칼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며,
하나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죄인이다.”
오늘 만약 우리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긴다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의 친구인 그분을 친구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진정 죄인이라면, 먼저 죄의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일곱 번 용서하기에 앞서, 일흔 번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용서해야 하는 사람이기에 앞서, 용서를 청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마태 9,12)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라시는 바를 알게 하시고,
당신이 바라시는 것을 바치게 하소서.
희생 제물이 아니라 제 행실을 바치게 하시고,
제 자신이 자비의 산제물이 되게 하소서.
당신께 바치되, 제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내어놓게 하소서. 아멘.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나 지금이나 천대를 받고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태오라는 인물은 세금 징수원으로 천대를 받는 사회계급에 속해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세리를 부정하게 돈거래 하는 사기꾼이나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부르시고 그 집에서 함께 음식을 나누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마태5,44-46). 하신 말씀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9,11)하며
비위에 거슬린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매일 다짐하지만 흔들비쭉인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이 계시니 행복합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이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사무12,13). 하고
자기 죄를 고백함으로 용서를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루 옷을 걸치고 흙을 뒤집어쓴 채 단식을 하여(느헤9,1) 회개하였습니다.
요나도 죽음의 뱃속에서 살려달라 외쳤더니 그 호소를 하느님께서 들어 주셨습니다(요나2,3).
세리도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8,13). 하고 기도했고,
자캐오는 주님의 부름을 받고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남을 속여 먹은 것에 대해서는 그 네 곱절을 갚아 주겠다고 말씀을 드렸고,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19,8-9)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십자가 위의 오른쪽 죄수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저를 기억하여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여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23,43). 는 확답을 들었습니다.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가운데 자비를 입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에게 의사로서 다가가셨고,
외적인 병을 치료하는 것을 뛰어넘어 뿌리를 다스리시고,
진정 회개하는 죄인에게 구원의 기쁨을 허락하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져 이웃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밉살스러운 사람은 더 큰 사랑으로 더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보기 싫어도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의 의무”(로마13,8공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초대받았고,
“사랑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상대의 실수를 이해하고 도와줄 방법을 아는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그러므로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에페소서4,1-2),
최선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9,13). 하신
말씀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 은혜를 기억하는 날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여행을 가면 꼭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 있습니다.
스마트폰, 지갑, 면허증, 노트북입니다.
노트북은 매일 강론을 준비하기에 가지고 다닙니다.
노트북을 10년 가까이 쓰다 보니 가끔 문제가 생기곤 합니다.
이번 여행에서도 노트북은 작은 문제를 보여주었습니다.
인터넷을 무선으로 연결해야 하는데 비행기 모드에서 바뀌지를 않았습니다.
저의 실력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다행히 사목회 총무님이 친절하게 문제 해결 방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총무님이 알려 주는 대로 노트북을 작동하니 비행기 모드가 풀리고, 인터넷 연결이 되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은사가 다양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이는 가르치는 은사를, 어떤 이는 예언하는 은사를,
어떤 이는 신령한 언어의 은사를, 어떤 이는 치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주변을 보면 하느님께로부터 다양한 은사를 받은 분들이 있습니다.
총무님처럼 컴퓨터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치 있는 말과 따뜻한 말로 모임을 풍요롭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과 철저한 준비로 모임을 이끌어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게는 친절한 이웃을 보내 주셨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노인과 바다’와 같은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헤밍웨이는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점심을 먹지 못할 때도 있었고, 공원의 벤치에서 밤을 보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헤밍웨이는 글을 쓰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헤밍웨이에게 글을 쓰는 것은 삶의 목적이었고, 존재의 의미였습니다.
헤밍웨이는 힘들고 어려울 때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 넌 지금까지도 늘 글을 써 왔고 앞으로도 글을 쓸 거야.
네가 할 일은 오직 진실한 문장을 딱 한 줄만 쓰는 거야.
네가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문장을 써 봐.”
헤밍웨이가 위대한 작가가 된 건 그의 천재성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진실한 한 문장을 쓰려는 그의 치열한 작가 정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성 마태오 사도는 ‘마태오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마태오 복음사가의 글을 통해서 예수님의 생애를 알 수 있습니다.
20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마태오 복음사가의 글은
지금도 생생하게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글이 생각날까요?
예수님의 족보, 동방박사의 방문, 이집트로의 피난이 있습니다.
그 장면 장면들이 아름다운 문학의 소재가 되었고, 우리 삶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산상 설교에서는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 주고 있습니다.
저 역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깊은 위로를 얻습니다.
더 높이 날려는 ‘갈매기의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하느님 나라의 비유는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시간과 공간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삶의 변화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는 예수님의 말씀,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부족한 저에게 위로의 말씀이 되었고, 제 삶의 지침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께서는 몸소 고통을 겪으심으로써 우리들의 고통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예수님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의 의미를 체험하셨고,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이 없었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이토록 생생하게 체험할 수 없었을 겁니다.
위대한 작가인 헤밍웨이처럼 되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성 마태오 사도는 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도로, 예언자로, 복음 선포자로,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실 겁니다.”
“나를 따라라” 그는 예수를 따라나섰다.
조욱현 토마 신부
마태오 사도는 본래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걷는 세리였다.
이 직업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매국노와 같은 미움을 받는 직업이었다.
이러한 세리가 예수님께 불림을 받고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다.
마태오는 60-90년 사이에 마태오 복음서를 아람어로 저술하여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다.
마태오는 동방으로 가서 순교하였다고 하는데
에티오피아나 페르시아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부르신다.
마태오는 즉시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마태오는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셔서 음식을 대접하였다.
여기에 마태오는 지금까지 함께 일하며 사귀었던 친구들도
함께 초대하여 식사하였던 것 같다.
그들을 부른 것은 주님을 따라나서기 전에 그들과 인사를 하는 기회를 만들었을 것 같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자리하게 되었고,
또 그렇게 된 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난한다.
제자로 삼는 것도 너무나 큰 죄인인 세리를 뽑고, 노는 것도 그런 부류하고만 논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한 마디로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2-13절)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을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 모두가 당신의 자녀로서 살기를 바라시고 부르신다.
거기에 대한 응답이 마태오처럼 즉시 일어나서 그분을 따르듯이
응답을 할 것인지 아닌지는 각자 인간의 응답에 달렸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우리 자신이 부족하고 죄스러운 인간임을 느끼지만,
주님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는 회개하는 삶이 있다면 그것으로 주님께서는 기뻐하신다.
마태오와 같이 세관에 있는 것이 지금까지 편안하고 안정된 것이었겠지만,
용감하게 그 자리를 떠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려고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언제든지 첫발을 내딛기가 어려운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착각 때문에
우리는 이를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러한 생각을 버리고 과감히 일어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변화되어 가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님의 뜻 안에 머무르려 노력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하셨다.
마태오 사도와 같이 매 순간 용감한 결단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마태오야, 그간 세리로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느냐?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우리 모두 이 땅 위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어쩔 수 없이 크고 작은 죄를 범하고,
그로 인한 상처와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0년, 40년 전에 지었던 죄, 이제는 그만 떨치고 작별하면 좋으련만,
아직도 똑같은 죄를 고백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제게 생각만 해도 큰 위로로 다가오는 인물이 있으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마태오 복음사가입니다.
마태오라는 이름 앞에는 언제나 하나의 수식어가 따라다니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세리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직업이 세리라는 것은 곧 죄인을 의미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조직폭력배나 고리대금업자였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가오면 얼굴을 마주치기가 싫어서 멀리 돌아갔습니다.
그가 지나가고 나면, 오늘 하루 재수 옴 붙었다며, 불편해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지,
요 주의 인물, 진상, 속물, 인간 말종으로 각인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세리로 일하던 시절 마태도 역시 뜨거운 피가 도는 인간인지라,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분명히 의식하였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인간도 아닌 삶, 세상의 보통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된 삶,
비참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아가던 세리 마태오에게
어느 날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오는 어느 순간 특별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신비스럽고 세상 따스한 누군가의 눈길을 느꼈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한없이 자상한 얼굴에,
측은지심 가득한 눈동자의 예수님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눈빛은 세리 마태오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부드럽고 따뜻한 시선이었습니다.
그분의 눈길은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마태오야, 그간 세리로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느냐?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네 심정 다 안다.
네 잘못 하나도 아니란다. 너무 자책하지 말거라.
아무 걱정 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나와 함께 새 인생을 시작해 보는 거야.”
이윽고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향해 결정적인 초대의 말씀 한 마디를 던집니다.
“나를 따라라.”(마태 9,9)
이어서 던지는 말씀, 제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죄 속에 깊이 파묻혀 살아 가서는 안 될 일입니다.
죄를 지어야 하느님 자비의 바람이 불어온다고 밥 먹듯이 죄를 짓고 또 지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일부러 죄를 지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한량없이 베푸시는 자비에 대해서도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자비의 배경에는 진실과 정의가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정의가 없으면 자비도 없습니다. 자비와 무책임이나 불의 사이의 경계선을 명확히 그어야 합니다.
불의한 일을 지속적으로 저지르는데도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는 방임주의보다는 엄중하게 대응하는 것이
더 주님 자비와 가깝지 않을까요?
자녀가 무슨 짓을 하든 허락하는 부모는, 무책임한 것이지 자비로운 것이 절대 아닙니다.
따라서 자비에는 어느 정도 엄격함이 포함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인내하지만, 많은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릇된 자비의 형태를 비판하는 올바른 목소리에도 마땅히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9,13)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저와 함께 미사를 드렸던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미사를 집전하면서 참회 양식 ‘다 양식’을 할 땐,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부분을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으시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9,13참조)라고 덧붙여서 기도합니다.
그 까닭이란 어느 때부턴가 잘 모르지만
제가 하느님 앞에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실존적인 체험뿐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의 자비에 대한 저의 확신에서 나온 고백이라고 봅니다.
그분의 자비가 아니고서는 어떤 누구도 하느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그리스도의 자비를 필요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들이고,
이 자비 안에서 과거와 똑같은 길이 아닌 참된 생명이
충만한 상태의 새로운 길을 걸을 수 있고 하느님과 참된 친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마태오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으로 히브리식 이름은
'레위'(마르2,14참조)이며, 직업은 세리(루5,27)였습니다.
세리는 직업상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또한 세리는 본의 아니게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했으므로,
반종교적이고 이교도적인 사람으로 취급당했습니다.
그런 마태오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너라, 하시고 그를 당신의 제자로 선택하십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당연한 삶의 자리가 아닌
조금은 비정상적인 자리에서 삶을 살아온 그에게 예수님의 초대는
참으로 뜻밖에 찾아온 은총의 기회였고 선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또한 마태오를 부르심으로 당신이 세상에 오신 그 근본적인 뜻을
가르치고 일깨울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기회를 맞이한 것이라 봅니다.
이 놀라운 은총의 사건, 하느님 무상의 선물 앞에서 마태오는
이 기쁨을 친구들과 함께 나누고자,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점에서
그는 복된 사람이라고 보여 지며, 친구들을 잔치에 초대하였지요.
그래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9,11)라고 추궁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죄인들이라며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런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서슴없이 죄인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관원들과 죄인들의 친구로구나!”(마태11,19;루7.34)하는 비방을 들으셨겠습니까!
그런데 유대인 경건자가 그렇게 처신한 이유는,
율법이 아닌 다른 길들은 참된 길이 아니기 때문이며,
바른길을 벗어난 죄인들은 하느님의 길을 저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회개하여 돌아서지 않는 한
하느님은 죄인에게서 멀리 계시다, 하고 확실히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죄인이요 병자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와 호의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바로 그 때문에
예수님은 먼저 솔선해서 죄인들을 향해 나아갔고 함께 어울렸던 것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들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9,1213) 는
말씀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행업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가 인간을 구원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다 경건한 이들의 잘못은 율법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스며들 공간을 근본적으로 차단해 버린
그들의 폐쇄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사고와 행동이었습니다.
주님은 죄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해서
대자대비하시며, 하느님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또한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세상은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아멘.”
“혹시 저더러 따르라는 말씀입니까? - 변화의 시작
박상대 마르코 신부
교회는 오늘 사도이자 복음사가였던 마태오 성인의 축일을 기념한다.
마태오의 죄인에서 성인에로의 길은
어느날 자기 동네 어귀에서 한창 세관 업무를 보던 중에
예수님의 부름을 받는 데서 시작되었다.
마태오는 갈릴래에 지방 가파르나움 출신으로
12사도들 가운데 자신이 집필한 것으로 전해오는
마태오복음서 때문에 누구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前職인 세리는 당신 유대사회에서 죄인과 다름없는 직업이었다.
그가 오늘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제자로 따라나선 것이다.
세리 마태오의 소명 사화와 예수께서 마태오의 집에서 다른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눈 이야기는 마르코와 루카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마르 2,13-17; 루카 5,27-32)
마르코와 루카는 여기서 마태오를 ‘레위’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으며,
마르코는 그를 일컬어 ‘알패오의 아들’로 좀 더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12사도 명단에는 그냥 ‘마태오’로 적고 있다.(마르 3,18)
따라서 마태오 복음의 원저자는 마르코복음의 두 부분을 참조하여
‘레위’라는 이름을 자신을 지칭하는 마태오로 바꾸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승에 의하면 마태오는 동방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선교하다 42년경에 순교하였다고 한다.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한 말씀에 즉각 따라나선 마태오다.
단 한 구절의 간략한 이 대목은 사실상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가파르나움 도읍의 나들목에 자리를 잡고 로마제국을 위해 각종 세금을 거둬들이는
세리 마태오는 이미 당대의 상업적 죄인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만약 내가 세리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이 설마 나를 향한 말씀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왜? 본인 스스로가 죄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의 이 대목을 기록한 마태오 복음사가 스스로가 자신을 죄인의 부류에 넣고 있다.
그러나 ”나를 따라오라.“는 우렁찬 낯선 이의 목소리에
도대체 누구를 부르는 것인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을 것이다.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마태오는 자신을 가리키며
”혹시, 저 말입니까?“하고 반문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태오의 半信半疑가 믿음으로 기울었다.
이미 여러 제자들뿐 아니라 무리를 거느리고 다니시는 예수께서
분명히 자신을 지목한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드디어 기회는 왔다.
언젠가는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한 세리의 직업을 벗어던지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래서 마태오는 아무런 미련없이 예수를 따라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마태오가 보인 예수추종의 두 번째 행동은 예수와 제자들,
그리고 다른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식사에 초대한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를 두고 트집을 잡은 일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그들의 불평과 트집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는 일에
‘죄인’이라는 굴레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음을 가르쳐 주신다.
더욱이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3절)는
말씀으로 예수 자신의 죄인을 위한 파견 사명을 밝혀 주셨다.
뿐만, 아니라 유대사회에서 약하고 소외되고 고통받던 사람들에게
‘율법의 굴레’를 씌워 죄인으로 취급하고,
자신들은 율법이 규정하는 제사를 드림으로써, 거룩하다고 자처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호세 6,6)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선포하셨다.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예수 안에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
하느님의 말씀과 행동의 핵심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과
스스로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대한 자비와 용서이다.
이로써 예수님 시데에 죄인으로 분류되었던 세관원이 제자의 반열에 들게 된 것이다.
이 땅에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이래로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일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되었다.
걸어 다니시고 말씀하시며 행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자연과 마귀와 죄 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권위로써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선물을 이 땅에 선사하시는 것이다.
남을 不淨 하다고 하여 자신이 淨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남을 죄인으로 규정한다고 자신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
세리 마태오와 같이 오직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며
‘나를 따르라’는 거룩한 부르심을 추종하여 사랑과 바지와 용서를 스스로 실천할 때
하느님 앞에 거룩한 자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