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으로 노래하는 사람들 이야기
닫힌 눈을 마음으로 열다
소경의 꿈 - 1
“앞이 안 보이자 DJ(디스크자키) 소원 이뤘네요.”
얼마 전에 방영된 KBS ‘다큐3일’프로에 이영호씨가 나왔다. 참 오랜만이다. 영화감독 이장호씨의 친동생이라면 혹시 기억할까. 대학 등록금을 아낌없이 형한테 건네 ‘입봉(Elevation)’작 <별들의 고향>을 만들게 해줬다는, 자신도 영화배우로 잠시 이름을 날린 그였다. 그가 미국에 영화유학을 가 박사과정을 밟던 중 시력을 잃었다. 알고 보니 어려서부터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었단다. 귀국한 뒤 소식이 없다가 라디오방송 DJ로 돌아온 것이다.
DJ라면 디스크자키(Disk Jockey), 즉 라디오 프로그램이나 디스코텍 따위에서 가벼운 이야깃거리와 함께 녹음한 음악을 들려주는 사람이 아닌가. 앞이 안보여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일이다. 왕년에 디스크자키의 꿈 가져보지 않은 사람 어디 있을까마는, 이영호가 영화배우나 명감독이 됐더라면 필경 DJ 되긴 글렀을 것이다.
타고난 맹인도 마찬가지겠지만, 멀쩡한 눈으로 사물을 보다가 갑자기 앞을 못 보는 중도맹인의 고통은 어떨까. 12세 때 사고로 시력을 잃은 이탈리아 가수 안드레아 보첼리(Andrea Bocelli)의 경우가 그랬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고 점자를 익혀 사탑(斜塔)의 도시 피사(Pisa)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후 법학박사학위까지 땄다. 수년 간 법정 선임변호사로도 활동했으나, 맹인에게 율사(律師)의 길은 편편찮았다.
“노래는 입으로 하는 것이지, 시력하곤 상관이 없거든”
변호사를 그만둔 보첼리는, 취미로 익힌 피아노솜씨로 야간에 재즈 바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벌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당대 최고의 테너 프랑코 코렐리(Franco, Corelli)가 그의 연주와 노래를 듣고 성악을 권했다. 그리고 그의 멘토를 자청한 것이다. 타고난 재능이 있었던 탓일까. 코렐리로부터 사사한 보첼리는 이듬해 산레모가요제를 석권하고, 1996년에 영국의 파페라(Popera)가수 사라 브라이트만과 부른 <타임 투 세이 굿바이(Time to Say Goodbye)>가 전 세계를 놀라게 하면서 국제적인 스타로 발돋움한다.
그는 ‘파페라’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으며, 여러 장의 솔로 음반을 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주빈 메타 ‧ 로린 마젤과 같은 세계적인 명지휘자들과 오페라 <라보엠> ‧ <토스카> 음반을 녹음하기도 했다. 2003년에는 푸치니 페스티벌에서 정명훈 지휘로 오페라 <나비부인>에서 미군 중위 핑커톤(Pinkerton)역을 해내기도. 2000년 소프라노 조수미와 함께 첫 내한공연을 가졌으며, 2003년엔 자서전을 출간했다.
187cm의 훤칠한 키에, 올해 55살의 안드레아 보첼리가 아직도 맹인인줄 모르는 그의 노래를 듣는 팬들도 많다니 놀랍다. 비록 앞은 아보이지만, 음악의 세계에서 팝과 클래식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가 부럽기도 하고 측은한 생각도 든다.
(註 : 안드레아 보첼리가 사라 브라이트만과 부른‘Time to Say Goodbye'. 진한 감동을 안겨준다.)
소경의 꿈 - 2
중남미 카리브 해(海)에도 어엿한 미국영토가 있다.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 ‘부유한 항구(Rich Port)'라는 뜻을 지닌 섬나라다. 2010년 지진으로 초토화된 아이티(Haiti) 부근의 미국 자치령(Commonwealth)인데, 식민지와 주(州)의 중간 격(格)인 이 나라는 원래 스페인령이었다. 그러나 1898년 미국과 스페인 간의 전쟁 끝에 미국에 넘어갔다.
푸에르토리코 주민은 미국 시민권은 있지만 대통령 선거권은 없고, 외교와 국방은 미국이 맡는다. 인구 330만의 이 조그만 섬나라에서 불세출의 맹인가수 호세 펠리치아노(Jose Feliciano)가 태어났다. 선천적으로 앞을 볼 수없는 장님이다. 9살 때부터 기타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18살 때 뉴욕으로 진출, RCA(Radio Corporation of America) 레코드사에 발탁되어 계약을 맺으면서 그의 운명은 180도 달라진다.
전설에 가까운 어쿠스틱 기타(Acoustic ‧ 일종의 통기타)솜씨에 소울 풍의 목소리로 동양적인 애수와 포근함을 노래했다. 호세는 히트곡 <비(Rain)>, <사랑이 있었네(Once There Was A Love)>등으로 32개의 골드앨범과 6회에 걸친 그래미상을 거머쥐고 슈퍼스타에 등극한다. 1945년 9월 10일, 태어나면서부터 앞이 안 보이는 신체적 장애를 극복한 그가 67회 생일을 맞는 2012년 9월 10일 한국을 방문했다.
놀랍게도 호세 펠리치아노의 소망은‘남북한 통일’이었고, 한민족에 대한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온 것임을 밝혔다. 그는 제2회 파주포크페스티벌 무대에 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광주, 부산을 거쳐 임진각까지‘통일기원’전국 투어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그보다 7살 아래인 이용복은 이를테면 ‘한국의 호세 펠리치아노’. 호세를 가장 근사하게 답습한 대한민국 가수다.
8살 때 사고로 시력을 잃어 맹아 학교에 입학한 이용복은 1970년 고등학교 2학년 때 가수로 데뷔한다. 처음엔 장애인이라는 점 때문에 주목을 받았으나, 이듬해 신인 가수상을 석권하면서 재능을 인정받는다. 독특한 12줄 기타의 기타리스트로서도 탁월한 솜씨를 보인 그는 <그 얼굴의 햇살을>, <줄리아>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으며 1972년과 1973년 연속으로 MBC 10대 가수상을 받았다. 장애를 극복하고 우뚝 선 아티스트로 전제덕을 어찌 빼놓을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는 생후 보름 만에 시력을 잃는다. 전제덕이 인천의 시각장애전문학교인 혜광학교에 다닐 때 김덕수가 그의 음감(音感)을 알아채고 사물놀이패에 데려다 장구를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라디오에서 우연히 듣게 된 투츠 틸레만스(Toots Thielemans)의 하모니카소리에 넋을 잃는다. ‘하모니카의 전설’ 투츠는 벨기에 출신으로, 5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가 재즈의 거장 베니 굿맨(Benny Goodman)과 공연을 한 하모니스트가 아닌가.
전제덕은 재즈하모니카를 익힌 지 8년 만에 예술의 전당 무대에 섰고, 국내외에서 많은 유명아티스트와 협연을 가졌다. 단 한 뼘의 하모니카가 전제덕의 신체적 장애를 한방에 날려버린 것이다. 그가 ‘한국의 스티비 원더(다음 편에 소개)'로 불리는 까닭도, 비록 앞은 못 보지만 세계적인 재즈 음악가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리라.
(註 : 플라멩코 기타의 전설, 호세 펠리치아노의 집시(The Gypsy)를 비디오로 링크한다.)
소경의 꿈 - 3)
I can't stop loving you.
(그대 사랑 멈출 수 없어요.)
‘소울의 전설’ 맹인가수 레이 찰스가 불러 밀리언셀러가 된 이 노래는 원래 그의 노래가 아니었다. <상심의 바다(A Sea of Heartbreak)>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컨트리 가수 돈 깁슨(Don Gibson)이 1957년에 작사 작곡해 부른 것. 5년 뒤 레이 찰스(Ray Charles)가 소울 풍(風)으로 바꿔 대박을 터트린 것이다.
문자 그대로 영혼의 음악인 소울(Soul Music)은 미국의 노예제도에서 싹터, 50년대 말 새로운 흑인 음악으로 자리를 잡았다. 흑인들의 눈으로 사회 비리를 고발하고 투쟁 정신을 고취하는 감성과 메시지 전달에 무게가 실려 음색 또한 흐느끼는 듯 격정적이다. 후에 독자적인 장르로 자리매김한 레게(Reggae)에도 솔 뮤직의 요소가 스며있다.
레이 찰스는 1930년 미국 조지아 주(州) 올버니에서 태어났다. 같은 이름의 올버니(Albany)는 뉴욕의 주도(州都)이자 캘리포니아, 호주에도 있어 헷갈린다. 그는 7살 때 녹내장으로 시각을 완전히 잃어 미션스쿨에서 익힌 가스펠 음악(Gospel Song)을 배경으로 재즈와 R&B(리듬 앤 블루스)를 발전시킨다. 10대에 이미 자신의 재즈 그룹과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구축했다.
Take This Chains from My Heart and Set Me Free
(내 마음의 사슬을 풀어주고, 나를 자유롭게 하소서)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시력까지 잃었지만 절망하지 않고 음악적 재능으로 이름을 떨쳤어도 장애는 끝내 ‘멍에’로 남는 것일까. 그는 마약 중독으로 수차례 체포되고 이혼의 아픔을 겪는 등 어두운 시절을 보낸다. R&B 음악의 황제 레이 찰스는 2004년 6월 급성 간질환으로 타계했다. 그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올랐고, 히트곡 중 하나인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Georgia on My Mind)’는 고향 조지아 주의 공식 주가(州歌)로 남아 있다.
그보다 20살 아래인 맹인가수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는 1950년 5월 미시건주의 작은 마을에서 미숙아로 태어났다.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과다산소로 실명이 되고 만다. 놀랍게도 스티비는 어릴 때부터 하모니카와 피아노, 드럼 등 여러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그가 10살이 되던 1960년에는 유명 그룹사운드의 오디션에 합격하여 <멋진 음악(I Call It Pretty Music)>이란 싱글을 처음 발표한다.
특히 1969년에 내놓은 싱글 <지난날의 너와 나, 그리고 추억(Yester Me, Yester You, Yesterday)>은 무려 10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리면서 스티비 원더가 천재 아티스트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지난 2010년 내한공연 때도 올림픽 공원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Yester-me Yester-you yesterday
지난날의 너와 나, 그리고 옛 추억(意譯)
사전에도 안 나오는 단어들이 보인다. 조어(造語)지만 그럴듯하다. “우리가 꿈에 그리던 이 세상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하며 세월의 덧없음을 노래한 것일까. ‘지난날의 영광(Yester-glow)’과 ‘지난날의 꿈(Yester- dream)’도 등장한다. 이런 식이라면 영어 참 쉽다.
그 역시 장애인으로써 사생활은 큰 변화를 겪는다. 70년대 들어 계속 상위권 차트를 기록하면서도 아내와의 불화로 파경에 이르고, 설상가상으로 화물트럭에 치어 사경을 헤매다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이 일을 겪은 후 그는 앨범 <내 마음의 음악(Music of my Mind)>를 만들어 자신의 기적적인 재생에 감사를 표시하기도 했다.
시각장애를 극복하고 최정상에 우뚝 선 레이 찰스와 스티비 원더는 둘 다 작곡 작사 노래하는 가수(Sing-a-song-writer)이자 영혼으로 소통하는 가수로, 오래토록 우리 모두의 심금을 울려 줄 것이다.
<끝>
(註 : 스티비 원더의 <Yester me, Yester you, Yesterday>는 들을 때마다 추억을 되새기게 해준다.)
이 글은 [정영수]씨(http://blog.naver.com/longar2/ )가 중앙매스컴사우회 카페 http://cafe.daum.net/jasawoo에 올린 글이다. 정영수씨는 중앙일보 편집부국장을 역임한 칼럼니스트이다.
그 칼럼의 내용도 좋지만 음악을 곁들여 들으면 더 좋아 다시 읽게되는 소중한 글이다. 세 편으로 나누어 올린 글이지만 이 곳에서는 함께 모았다. 중앙매스컴사우회 카페는 회원에게만 공개되는 곳이라 링크는 하지 않는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좋은 글, 음악 감사합니다. 지중해님~ 좋은 게시물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