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 1장 9~14절/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오늘은 우리나라의 고유 명절인 구정입니다. 많은 가정에서 차례를 지내거나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형제들이나 친지들을 만나는 시간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가장 우리의 삶에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관계입니다. 관계를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관계를 잘 맺을 때 행복하고 기쁜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반면에 관계가 나빠지면 모든 일상이 피곤하고 짜증이 나기 쉬워집니다. 관계가 깨어지면 단순히 사람들과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우리가 믿음을 지켜 나가는 일에 있어서도 중요한 일입니다.
1.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맺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만을 위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기 원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만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만을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인간의 죄 짐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하여 져 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는 자들을 가리켜 영접하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서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와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이 땅의 삶이 기쁘고 행복한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의 삶을 나그네와 같은 삶이라고 말합니다. 언제 우리는 이 땅의 삶이 끝마칠지 알지 못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임마누엘의 축복을 받았으니 항상 기쁘게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서 승리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과 같이 명절을 맞이하였을 때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내 삶이 행복한 것을 보여 줌으로서 그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2. 하나님과의 관계는 믿음의 형제나 자매와 올바른 관계로 발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임하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9~10절에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 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생을 바쁘게 살고 있지만 혼미한 세상을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면 자신의 인생이 바뀌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에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는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말씀합니다. 오늘 이 세상에서 아직도 빛으로 나아오지 못하고 흑암가운데 갇혀 살아가고 있는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에게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빛에 거하도록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잘 해보겠다는 열정은 좋으나 예수님을 바르게 알 수 있도록 관계를 맺지 못하면 오히려 우리의 열정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안겨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나그네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햇빛과 바람이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시합을 했다고 합니다. 바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처음에는 산들바람으로, 조금 더 강한 바람으로, 나중에는 더 센 바람으로 불어서 나그네의 옷을 벗기려고 하였지만 오히려 나그네는 자신을 옷을 단단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해는 따뜻한 볕을 쬐어주었더니 스스로 옷을 벗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강요나 강압에 의해 무엇인가 이룰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각 사람을 인정해 주고 그가 하는 일들을 격려해 주고 바르게 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특별히 명절에 사람들을 만나기 싫다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들을 귀찮게 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들에 대해 격려하고 인정해 주지는 않으면서 이것, 저것을 묻는 것이 싫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관심이라고 말하지만 지나친 관심이 오히려 상대방에게 고통을 안겨 준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갖고 있는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에게도 좋은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축복하는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3. 믿는 자들과의 교제는 궁극적으로 세상을 향하여 우리의 눈을 돌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서부터 변화가 나타나기 원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교회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택하신 이유도 그들을 통하여 세상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기호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축복의 시간은 바로 이러한 명절을 통해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을 만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증거함으로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세상을 향하여 나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가정에 구원받을 영혼들이 한 사람이라도 예수를 믿고 축복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원망과 미움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참 사랑을 이해할 수 있도록 축복하고 사랑하는 시간을 갖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사도 요한이 복음서를 쓰게 된 목적이 있습니다.요한복음 20장 31절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을 쓴 이유를 설명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그의 이름을 힘입고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면 우리의 생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나와서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만 실상은 거짓된 예언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요한 사도를 통해 이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 예수님은 영원하십니다. (Jesus is eternal)
예수님은 천지 창조 이전부터 계셨던 분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약속하셨습니다.(12절) 예수님이 영원하시기에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과 연결이 되어 집니다. 영생의 소망이 있기에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믿어야 하고 그 말씀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2.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Jesus is God)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지신 분이요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요한은 선포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때에 천사가 마리아와 요셉에게 나타났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태복음 1장 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를 줍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두려워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순종하며 가지 못하고 항상 그릇된 길로 가는 버릇이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하나님과 같아지고 싶어하는 욕구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은 하나님-인간이십니다. (Jesus is the God-Man)사도 요한은 선포합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은 하나님을 직접 보았다고 증거합니다.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과 같이 요한 사도는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뵈었고 삼년의 공생애를 함께 하였기 때문입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심을 통해 우리 가운데 계심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이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1) “말씀이 육신이 되어” (14a)1절에서 사도 요한은 말씀이 태초부터 존재하시는 신성을 가지신 분이며 동시에 그 자신이 하나님이시고 이 세계를 창조한 분이라고 소개하였는데 지금은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말씀이 육체로 되었다는 것은 말씀이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의 몸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실 수 없고 육체로 나타난 나사렛 예수는 실체가 아니라는 영지주의 이단 사상이 널리 퍼졌는데 요한을 이를 강력하게 반박합니다.신약성경에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갈라디아서 4장 4절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2)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14b)거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스게노’는 원래 ‘텐트를 치다. 거주하다’는 말로서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성막에 거하는 것을 연상시키는 단어입니다. 출애굽기 25장 8절에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출애굽기 29자 46절에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광야에서 거하신 하나님이 신성을 가지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 가운데 임재하여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문법적으로는 거한다는 말은 ‘잠깐 동안 장막을 쳤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분은 이 땅에 영원히 살기 위하여 오시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목적이 있기에 오셨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다가 다시 하늘에 오르셨습니다.하나님의 속성은 전지전능하심입니다. 인간의 특징은 약함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약하기에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에서 인간의 약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물론 예수님이 인간이시나 우리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분은 죄가 없으시다는 사실입니다. 죄가 없으셨으나 우리의 죄를 대신 지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육신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은 영원한 신비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사람이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릴 때 육신으로 계셨고 부활하신 후에도 부활체로 바뀌기는 하였으나 육신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볼 수 있었습니다. 승천하실 때도 그 육신으로 하나님께 오르셨고 그 육신을 가지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것은 우리 죄를 그 몸으로 담당하기 위함이요 우리를 이 육신을 가진 채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하기 위함입니다.
3)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14c)예수님이 거처를 정하신 ‘우리’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열두 사도를 가리킵니까?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4절에‘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고 하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기에 ‘우리’는 바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는 어디에 거하십니까? 그를 믿는 신자들의 공동체에 거하십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요한은 신자들이 공동체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출애굽기 33장 22~23절절에는 모세가 하나님을 보기를 원할 때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구약에서 영광은 하나님의 얼굴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조차 얼굴을 보이지 않은 것은 모세를 사랑한 까닭입니다. 죄를 갖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음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이 예수님의 영광을 언급하였다는 것은 예수께서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신 분임을 말해줍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과 영광을 여러 번 언급하였습니다.요한복음 2장 11절에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한복음 11장 4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요한복음 7장 39절에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한복음 12장 16절에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요한복음 13장 31절에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구약과 다른 것은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멀리 계신 간접적으로 보는 하나님이거나 모세와 같이 특별히 택함을 받은 사람들과만 대화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신자들이 직접 경험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4)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14d)
신명기 21장 23절에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구약에서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려 죽은 자들을 일컬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이유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십자가를 통해 인류의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해 내신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의 상징인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말합니다.
독생자는 ‘야히드’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 70인역에는 모노게네스(monogenes)라는 단어로 번역하였고 우리말 개역성경에서는 ‘독생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일심으로’로 쓰인 ‘야히드’는 유일하다는 뜻입니다. 종류가 하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창조와 계시의 중보자인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서 육신이 되어 하나님을 계시하고 그의 구원을 이루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시고 100% 사람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아주 unique한, 독특한 존재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말씀합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이름은 오직 예수뿐이라는 말입니다. 5)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4e)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시고 찾아오시고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며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을 끝까지 지키셨으나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깨뜨렸습니다. 돌아오라고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지만 그들이 거부하니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들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백성들은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셔서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예배를 받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여전히 악을 행하자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400년 동안 침묵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안하시고 쉬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낼 준비를 하셨습니다. 때가 되어 아들이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인간의 요청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죄와 허물로 영적으로 죽은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삶과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자와 신실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연약한 자들을 한 번도 물리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4장 18절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스스로 알 수 없지만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예수를 경험한 요한은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을 보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도 믿음의 공동체는 예수님이 바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로서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계신 신성을 가진 존재이며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성육신 하신 분입니다. 그는 영원하신 분이요, 하나님이시오, 사람이신 유일무이한 아주 독특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1. 영접해야 합니다.주님에 대한 태도는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분을 거부하든지 영접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하면서 예수님이 처음 오셨을 당시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지금도 주어집니다.(12절)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하시면서 예수님은 자녀의 특권을 현재에 영생을 소유함으로써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믿음의 공동체만이 예수의 영광을 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부터 받아 그 은혜를 풍성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그 공동체가 교회요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과 삶을 함께 나누며 그분에게 배웠던 것처럼 모든 신자들을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배우며 본받으며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란 궁극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제자들의 모임입니다. 어떤 인간도 예수 밖에서는 자신의 본질을 깨달을 수 없으며 아무리 오래 살고 이 땅에서 업적이 많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 삶이 의미가 있습니다.
2. 본받아야 합니다.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과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닮기 원합니다. 그분의 생각을 닮고 그분의 삶을 닮기 원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여주기 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메시야입니다. 구원자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오신 그분을 영접하고 그분과 동행하기 원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통하여 일하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일생동안 신뢰할 만한 분입니다.빌립보서 2장 6~8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바울은 성육신하신 주님을 설명하면서 자기를 비우고,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자기를 낮추셨다고 합니다. 비운다는 말은 용기에 있는 것을 다 비워 버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자발적으로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의 겸손으로 가득 찬 삶이었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에도 그는 겸손하여서 나귀의 어린것을 타셨습니다.(슥 9:9)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겸손을 보이셨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 돌라가신 것, 이보다 더한 겸손은 없습니다. 이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신 것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예수님은 범죄자와 같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 하나님을 섬길 뿐더러 서로를 섬기고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살 때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셨던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시고 높이실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섬기는 믿음의 공동체는 주안에서 하나가 되어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에게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그분이 스스로의 결단과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을 심방하십니다. 주를 의지하는 자들에게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이 주님의 베푸신 사랑과 은혜를 우리의 이웃들에게 보여주고 나누기 원합니다.
3. 기다려야 합니다.일세기에 경건한 유대인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누가 오는 것을 기다립니까?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지금은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립니다. 그분이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셨기에 우리에게 영생이 보장되었습니다. 그분은 하늘에 올라가신 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 그분 앞에 서게 됩니다. 더 이상 고통이 없고, 죽음이 없고 복잡한 가정불화가 없는 곳, 더 이상 상처와 아픔이 없는 곳에 있게 됩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그 끈질긴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섭니다. 영원토록 그분 앞에 있게 됩니다.
로마서 8장 35절(새 번역)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3절에는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깨어 있으라.’는 말은 ‘오실 주님을 항상 준비하는 삶’을 말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언제 오실지라도 반가이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베드로후서 3장 8~10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려면 지금 땀을 흘려야 합니다.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의 시간을 드리고, 재능을 드리고, 재물을 드리면서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이제부터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과 동행하며 빛의 자녀로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첫댓글 가족과 함께 행복한 설 명절 보내시길~~~^*^
깜장색 토끼 해가 시작되네요. 울 님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샬롬.
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잠언 22장 21절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