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산 나무할아버지 임창봉
“흙과 나무는 속이지 않는다. 나는 여생을 나무와 함께 살련다.”
30년동안 사재 200억원을 투자해 대전 서구 장안동 장태산휴양림을 조성한 독림가(篤林家) 임창봉(林昌鳳) 씨는 1973년 토건업으로 번 돈을 모두 나무를 심고 가꾸는데 쏟았다.
임 씨는 당시 어지간한 재력가들은 서울 강남지역 등 부동산투기에 혈안이 됐던 시절에
임 씨는 나무와 숲에 대한 철학과 애정을 고스란히 실천하며 30여년 동안 23만 여평의 장태산을 조성해 왔다.
장태산이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정착할 무렵인 2000년 11월경 그는 국제통화기금(IMF)사태를 겪으면서 휴양림 때문에 빌어 쓴 40여억원에 대한 이자부담을 견디지 못해 장태산을 금융권에 넘겨야 했다.
특히 일부 종교단체가 이곳을 사들이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는 “장태산을 시민의 품에 넘기고 싶다”며 4명의 아들을 설득해 부채탕감을 조건으로 장태산 전체를 大田市에 넘겼다.
평생 터전을 시민에게 내 준 임 씨는 이후 장태산 한 구석 컨테이너에서 생활해오다 결국 당뇨병 등 합병증에 시달리다 81세의 나이로 2002년 생을 마감했다.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역의 황량한 땅에 혼자서 도토리 나무를 심어 푸른 산을 만든 엘지아르
부피에 노인의 얘기는 유명하다. 임창봉 선생은 한국의 부피에 노인이다. 이런 분의 일생을
아니 한국이 자랑할 위대한 분의 얘기를 자라는 세대들에게 들려줄 전기를 쓸 사람은 없는지 아쉽기만 하다.
아래를 크릭하시면 부피에 노인에 관한 30분짜리 에니메이숀을 보실 수 있습니다.
神이 내린 나무심는 일꾼 부피에 노인과 박정희
첫 번째 민간휴양림 장태산 휴양림 임창봉 대표
[0호] 2004년 08월 27일 (금) 11:03:00 허우영 namu@woodkorea.co.kr
내 여생을 나무와 함께 살련다
첫 번째 민간휴양림 장태산휴양림 임창봉 대표님
대전 장태산 휴양림은 국내에서 개인이 만든 첫 번째 휴양림이다. 전 재산을 세금 안내고 자식에게 물려줄 방법만 연구하는 세상인데 나무할아버지 임창봉 선생은 30년 전 부터 민둥산에 나무를 심느라 전 재산을 다 썼다.
징용탈출에서 육사2기로....
“왜정 때 논산 신도안에서 태어나 소학교를 졸업하고 京城電氣學校를 다녔습니다. 그때가 왜정말이라 징병·징용이 있었는데, 난 나이가 많아서 논산군 징용대상자였어요. 나라 뺐긴 것도 서러운데 일본 놈들 위해 일하는 게 싫어서 부산으로 가는 기차에서 탈출했습니다.”
일본어를 배웠기에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유혹도 있었지만 일본에 충성하기 싫어서 부산행 징용열차를 탈출해 해방 전까지 대전 주변에서 도피생활을 했다.
“해방이 되자마자 서울로 올라가 태릉에 있는 광복군 국내지대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이 육군사관학교의전신인 국방경비대였고 박정희 전대통령이 내 동기입니다.”
육사2기 출신이지만 좌익계열에 실망해 낙향했고 온양의 방위군학교를 졸업하자마자 6.25동란을 맞았다. 그는 전쟁에 육군 소위로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집에 돈이 넘쳤지만.....
“휴전이 되니까 돈은 없고 부모님을 모셔야 했어요. 서울에서 토목 건설면허를 취득하고 대전에 내려왔는데 전쟁으로 모든 시설이 파괴돼 일거리가 넘쳤습니다. 임창봉이 어떤 사람이라는 게 알려지니까 나를 믿고 여러 곳에서 일을 줬고 집에는 돈이 넘쳤죠.”
토목업으로 많은 돈을 벌었으나 쓸 곳이 없었다. 일본에 유학 간 막내아들을 보기 위해 건너갔다가 계획적으로 잘 가꾸어 놓은 숲을 보니 조국의 헐벗은 산이 자꾸 떠올랐다.
“일본은 쓸 수 있는 나무만 잘 심어놨더라고. 동남아도 가봤는데 역시 우리나라만 비교가 안되더군….그래서 나도 나무를 잘 심어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지. 자식들에게는 전 재산을 나무 심는데 쓸 것이니 너희들은 너희들 힘으로 살라고 말했습니다.”
‘누가 이렇게 잘 가꾸었습니까!’
“30년이 지나니까 이렇게 울창하게 자랐습니다. 미국산 속성수인 메타세콰이어를 심었는데 잘 크니까 기분이 좋아요. 우리 단풍나무는 눈이 많이 와도 잎이 붙어 있어서 보기에도 아주 좋습니다.”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는데도 국산 단풍나무의 잎은 여전히 튼튼했다. 산 정상에 이르기까지 경사각이 평균 70도로 힘든 편이나 산책로 주변의 빼어난 경관과 맑은 공기 때문에 저절로 힘이 솟는다.
“IMF때 농협에서 빌려 쓴 돈의 이자를 못 갚아 경매처분결정이 내려진 겁니다. 법은 꼭 지켜야 하는 거니까 마음 아프지만 산의 일부라도 팔아서 갚아야죠. 여든이나 먹은 난 살만큼 살았고 맑은 공기를 많이 마셨으니 하늘에서 오라고 해도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이 여기서 편히 쉬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로부터“누가 이렇게 잘 가꾸었습니까”란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항상 좋아진다는 나무할아버지. 독감 후유증으로 잘 걷지도 못하고 당뇨병까지 앓던 그에게 경매처분결정은 큰 충격이었다. 자신의 건강보다 다른 사람들이 맑은 공기를 마시지 못할까 걱정하는 우리의 나무할아버지.
서운할까봐 다 안아줘야 해
“나무라는 것이 해마다 어찌 잘 자라는지. 이 놈을 안아보면 저 놈이 쳐다봐서 저 놈도 안아줘야 해요. 안아보면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도 좋아져요. 요즘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정상까지 올라가기 힘듭니다. 녀석들이 섭섭해하겠는걸요.”
나무와 흙은 거짓말을 못한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삼림욕하고 캠핑하고 눈썰매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면 이런 곳이 많아졌으면 할 뿐입니다. 꼭 지켜야하는데….”
사람을 기만하지 않는 흙과 나무. 그런 이유로 여생을 나무와 함께 살련다는 임 창봉 나무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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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산 휴양림 설립자
성명: 임 창봉
1939년 3월 京城電氣學校 3년 졸업
1945년 9월 반공, 반탁 건국 청년 운동 참가
1950년 6월 6. 25 사변으로 육군소위 임관 최전방 소대장 (자원입대)
1954년 4월 휴전 후 장교 3차 명예 제대
1960년 9월 국가 기술 자격 토목기사 면허 취득
1962년 3월 유신건설 설립 대표 역임
1970년 11월 종합건설,문화건설 창설대표 역임, 1982년 4월까지
1970년부터 조림 및 산지 개발에 착수
상 벌
6.25 사변 참천 종군 기장
반공, 반탁 건국 운동 공로장
민정당 총재 표창
녹화사업 공로 표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