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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무사 257
표국의 계산법
세 청녕은 서로 농담을 주고 받으며 천천히 일행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단 세명의 청년이
기세에 무림맹 최고의 무투 조직이라는 철갑기마원이 위축되고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아!`
군가휘가 심유한 눈으로 장내를 살폈다. 기세는 이미 상대방에게 넘어간 터. 무림첩의 정당한 또한
완전히 부정된 상태.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더 이상의이 모험을 할 필요는 없다.
“좋소, 이대로 물러가겠소. 하지만 한가지 약속를 받아야겠소.”
“놀고 있네.”
심통스런 청녕이 그의 말을 바로 잘라 버렸다.
“뭘 잘했다고 약속를 받아? 아니, 그냥 보내주기나 한데?”
그러나 군가휘는 무던히도 참고 대화의 주체를 이효로 돌렸다. 이들 세 청년들보다야 늙고 힘없어 보
이는 -지금의 이효를 본다면 누구라도 그리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표국주를목표로 잡은 거다.
이들이 아무리 날뛴다고 해도 일단 표국에 몸담은 이상 표국주의 명령에 복종할 테니까.
“이번 일을 불문에 붙인다면 우리 역시 조용히 물러나겠소. 하산의 항의야 위의 분들이 처리하실 일.
울리 팔파공동문하는 그저 복룡표국에서 벌어졌던 불미스러운 사건을 서로 잊었으면 하오.”
“서로 잊자고 하셨소?”
이효가 철무웅의 어깨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서로 잊자... 쿨럭, 쿨럭, 좋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했지. 서로 잊도록 합시다.”
“이숙!”
장추삼이 발끈했지만 이효는 듣지 못한 듯 전명의 팔파공동문하들 만을 바라보았다. 군가휘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릴 때 느의 나직 하나 단호한 뒷말이 이어졌다.
“대신 귀하께서 우리 표국에 입힌 손실은 보존해 주셔야겠소. 이정도는 당연히 요구할 수 있다고 생
각하오. 어떻소?”
“감히 우리에게 조건을......”
군가휘가 으드득 이를 갈았다. 하지만 주객전도(主客顚倒)의 사황. 빨리 타개하는 편이 낫다.
“조, 좋소. 뭘 보존해 달라는 거요?”
겨우겨우 입을 여는 군가휘에게 냉엄한 눈을 던진 이효가 집사 오조영를 시켜 업무 일지를 가져오라
일렀다.
오조영이 일지를 가져오는 동안 장추삼들은 서로 쾌할하게 농을 즐겼으나 네 명의 팔파공동문하로서
의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언제 그들이 이런 대접을 받아보았겠는가.
성미 급하고 자존심 강한 매정방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갈 무렵에야 오조영이 일지를 들고 이효의 집무
전에서 나왔다.
집무전에서 장내까지의 거리는 고작해야 십 장도 안 되는 거리이거늘 집사의 걸음. 걸음이 왜 이리도
더디게 느껴지는지.
오조영이 일지를 바치자 의자에 다시 앉은 이효가 업무 일지를 꼼꼼히 살피며 뭔가를 계산하기 시작
했다.
“흐음... 이 정도일 줄이야!”
인상을 찡그리며 이리저리 생각다던 그가 오조영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묻고는 생각하기를 반복하다 주
판까지 꺼내 열심히 두드렸다.
“망부석이 따로 없구나!”
팔팍공동문하의 불쌍한 처지에 장추삼이 키득거렸지만 매정방 정도가 돌아보았을 뿐 나머지의 청년들
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계산하던 이효가 일지를 무릎에 놓고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은 그,대로 군가휘에게 말을 던졌
다. 마치 낭독하는 판관처럼.
“그럼 지금부터 삼일간 우리 청해복룡표국이 입힌 손해에 대해 말하겠소.”
“어떻게 삼 일이오! 우리는 나름대로 시간을 주지 않았소!”
군가휘의 항의에 이효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생각해 보시오. 철갑기마대원들이 정문을 완전히 봉쇄하고 있었던 형국인데 어떤 간 큰 인물이 표
물을 맡기러 오겠소?”
말인즉 지당한지라 군가휘로서는 얘기를 꺼내지 아니한만 못핱 처지가 되었다.
“삼일간 표물을 받지 못한 것에 관한 보상은 한 달을 기준으로 하여 그 가운데 삼 일치를 계산하기로
했소. 그래서 나온 가액 백팔 십 냥 정도로 추산되오.”
“백팔십 냥?”
그 정도야, 하고 웃으려던 군기휘들에게 이효의 말이 계속해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삼 일 전의 소요로 인하여 제때에 배송되지 못한 표물들과 그제와 어제로 잡혀 있던 표물들
의 손괴(損壞) 역시 배상되어야 하오. 전달 시기를 놓쳤을 뿐 아니라 배송되지 못한 표물 가운데는 신
선도를 요하는 물건도 많았으니까.”
“으음......”
“어제의 표물 운송 건은 모두 네건, 표물의 가액은 총 칠십다섯 냥이오. 그리고 그제 배송되지 못한
총액은 육십 냥, 삼일 전에는 큰 믈건이 하나 있었군. 신원을 밝히기는 어렵지만 높으신 분께 진상드리
기 위해 전복과 남만 과일들을 부탁했었소.”
“남만 과일에 전복까지?”
장추삼의 눈이 둥그레졌다. 그야말로 명품 가운데 명품 아닌가. 그냥 전복이라고 한 걸 보면 말린 전
복이 아니라 싱싱한 상태 그대로 였을 터.
“아이고, 아까워. 그걸 그대로 썩혔단 말이야?”
그의 신소리에 이효가 빙긋 웃었으나 네 명의 청년에겐 견디기 힘든 무엇으로 다가왔다.
“그것을 포함하여 삼 일 전 가액의 백두 냥, 하여 일간의 총액이 이백삼십일곱 냥이오.”
“끄응......”
매정방의 입에서 한숨과도 같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한시라도 빨리 이를 매듭짓고 싶은 군가
휘로는 이 정도라도 다행이라 여겼다.
“그럼 모두 합쳐서 사백열일곱 냥을 변상하면 된단 말이잖소.”
“그건 표면적인 문제고... 귀하들께서 우리 표국에 입힌 정신적인 측면 역시 간과할 수 없잖소? 그
렇다고 표물을 대신 운송해줄 것도 아니고.”
군가휘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래, 이번엔 또 얼마요?”
“흐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어찌 산정해야 할꼬? 가만 보자......”
한참을 생각하던 이효가 일지를 들어 내려쳤다.
“강호동도들에게 돈만 밝히는 수전노처럼 비춰질 수 있으니 그냥 우리 표국의 전 인원에게 한 냥 정
도의 보상을 하는 걸로 끝내도록 합시다.”
으드득!
이를 갈던 군가휘가 겨우 참아내고 핏발 선 눈으로 물었다.
“표국위 총 인원이 몇이오......”
“이백스물 두명이오.”
“좋소. 그럼 이백스물두 냥까지 합쳐서, 총 육백삼십아홉 냥인 거군.”
육백삼십아홉 냥이라면 어마어마한 액수라 하겠다. 일반적으로서는 감히 입에도 담지 못할 만큼 커
다란 돈이어서 장추삼의 입도 떡하니 벌어졌지만 군가휘는 지불의 약속을 하고 있다.
이는 무림맹을 믿기도 하려니와 그들 네 명 자체가 워낙 돈 많은 집안의 제자들이기에 가능한 경우였
다.
“그럼 그리 알겠소. 금액은 반드시 열흘 이내로 보내 주도록 하겠소.”
하고 돌아서려는 군가휘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던 이효가 살짝 입을 열었다.
“잠깐!”
“또 뭐요!”
왈칵 짜증이 일어 군가휘가 소리를 질렀다. 창피함에 일을 묻어두려 참고 있지만 -사실 그 자신의 경력
에 남을 오점을 지우려는 일환이지만- 이런 식이라면 더 이상 견디기 어렵다.
“귀하들은 귀하들의 방식대로 셈을 하는 경향이 있나 본데 여긴 표국이고, 우리 표국의 사람들은 표
국만의 계산법이 있다오.”
“그게...뭐요”
잔뜩 깐 목소리였지만 이효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진 못햇다. 그가 굴복한 건 무림첩이었지 팔파공
동문하나 철갑기마대가 아니었으니까.
“표행을 방해받을 시에는 그 주체자에게 가액이 열 배를 보상하는 걸 원칙으로 함은 표국을 운영하
는 누구라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오. 귀하들은 표국의 사정에 대해 들어본 바가 없는 모양이구려.
“열 배!”
“정신적인 피해의 보상아야 놔둔다고 치더라도 표행과 표물에 관련된 부분은 계산이 잘못되었소. 앞
서의 총액은 사백열일곱 냥이 아니라...”
“사천백칠십 냥이라?”
군가휘가 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제 보니 국주께서는 애초부터 우리를 그냥 보내지 않을 속셈이었군?”
그렇다. 사천 냥이 넘는 돈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 이효는 처음부터 이들을 이대로
보낼 마음이 없었다.
“허참!”
장추삼이 고개를 요리저리 돌렸다.
“또 왜 그러시오?”
하운의 물음에 그가 장난스럽게 답했다.
“아니, 아까 나도 똑같은 말을 저기 똥파리 무사들에게 해줬었거든? 이런 걸 두고 이심전
심이라고 하나 봐?”
“좋게 넘어가려니까 정말이지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날뛰는구나, 이효!”
“허허, 본인은 통상적인 표국의 계산법에 관해서 말을 했을 뿐이라오. 귀하들께서는 이런 계산법이
익숙하지 않겠지만 이건 일반적인 일이라오.”
“우리가 무서워서 피한다고 생각하나 본데... 국주는 커다란 오판을 한 거요.”
군가휘가 잘라 말하자 두 명의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일행가운데 유일한 홍일점인 여성은 아
무런 말 없이 제자리를 지켰다.
“사매, 뭐하는 건가?”
소림을 서문으로 둔 눈이 깊은 여인, 차하연은 망연히 군가휘를 바라보다 깊은 한숨과 합께 포권을
올렸다.
“사형, 우리의 행사가 온당치 않음은 이미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요구가 비록 과하다고는 하
나 우리의 율법을 강요한 것처럼 이들도 이들 나름의 법을 가지고 생각하는 터, 들어주지 못한다고 힘
으로 몰아붙이는 우를 범발 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나바 사람이더라니까.`
자추삼이 콧등을 실룩 움직였다. 그녀는 장추삼과의 대면 이후로 많이 변한 듯 보였다. 비록 무림맹
에서 시킨 일이라 마지못해 따라다녔지만 차하연은 처음부터 국외자처럼 비껴서 있었다.
“그래서 발을 빼겠다는 건가?”
이런 비열한, 이라고 소리치던 군가휘의 입은 북궁단야의 차가운 한마디로 가로막혔다.
“명분없는 싸움에 동료까지 끌어 들이려는 저의 옹졸함은 뭐라 말인가.”
“네, 네놈은 또 뭐냐!”
긴 머리를 손으로 슬쩍 치우며 북궁단야가 짧게 대답해 주었다.
“말했잖은가, 이곳 표사라고.”
거대한 압박감. 그런데 하운 역시 북궁단야를 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는 마치 해일처럼
덮치는 기세로 상대방을 압박했거늘, 이제는 깊은 심연의 고요로써 적의 전의를 원칙적으로 눌러 버리
다니. 북궁형에게 어떤 깨달음의 시간이 있었던 게로구나.
군가휘의 눈에서 귀화가 타올랐다. 사실 그는 차하연을 점찍어 둔 상태였고, 이번의 일 역시도 그녀
와 함께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단 한 마디의 실수로 졸지에 옹졸한 인간으로까지 전락해 버린 거다.
“오냐, 빠지려거든 빠져라. 그러나 너는 내가 용서치 않으리라.”
악에 받친 그가 북궁단야에게 성큼 다가갔다.
이로써 시작이었다.
팔파공동문하와 강호삼성의 첫 번째 격돌은.
군가휘가 칼을 빼 들자 북궁단야 역시 거대한 검을 뽑아 들 듯 허리춤에서 꺼냈다.
`역시 북궁 형의 검은 부담스럽게 크군.`
싱긋 웃는 하운에게 독사처럼 혀를 날름거리는 매정방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런 인간은 크게 혼이 나지 않으면 언제고 많은 이의 눈에서 피눈
물을 잡아 뺄 사람이라는 것을.
지금도 뭔가를 노리면서 쉼없이 눈알을 굴린다는 사실을.
“당신은 내가 상대해 주겠소.‘
매정방이 스산한 눈으로 하운을 바라보았다.
“팔파와 화산은 형제기간인데 굳이 섞을 이유가 있겠소이까, 사형.”
`역시......`
전형적으로 비겁한 인물이다. 자신의 쪽이 강할 때는 무엇이든 할 것만 같더니 이제 비세로 돌아서
곧바로 꼬리를 말아버린다.
그러나 하운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두배는 나이가 많은 사람의 머리에 발을 얹고 음산하게 미소 짓던 포악함을 내킨다면 그
자리에서 목숨이라도 취할 듯 사이하게 빛나던 눈동자를.
일진미풍에 눈을 껌뻑이면서도 입가를 축이던 혓바닥의 불길함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리 말하니 마치 우리가 전부터 무척이나 살가웠던 사이 같구려. 하지만 난 반드시 그대와 검을
섞어야만 하겠소.”
“꼭 그럴 것까지야......”
“아니면 그대의 머리에 발을 올리고 몇 번 두드리는 것으로 끝낼 수도 있지만.”
순간 비굴하게 웃던 매정방의 얼굴이 밀납처럼 굳었다.
“정히 피를 보고 싶단 말이오?”
“안심하시오. 이 겨룸은 문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그대는 기꺼이 전력을 기울여도 좋소.”
“흐흐흐......”
매정방의 혓바닥이 또다시 날름거렸다.
그는 사실 하운이 화산의 대사형이란 사실에 적잖이 놀랐지만 별로 두렵지는 않았다. 물처러 담담한
분위기와 선한 미소, 그 어느 것에서도 위압적인 힘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분명 화산은 이 일과 상관이 없다고 했소??
역시 매정방에게는 화산이 두려웠을 뿐이었다.
?화산의 무인은 두말을 하지 않소.?
?큭큭큭!?
기묘한 웃음으로 주위를 어지럽히던 매정방은 귀기로운 눈을 굴리며 칼을 빼 들었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요. 화산의 대사형.?
?얼마든지.?
여전히 온화한 미소. 그러나 장추삼은 이 선한 사내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었다. 그래
서 나서지 못했던 거다.
?아깝다! 저 자식은 내가 찍어뒀는데!?
괜히 머리를 긁적이던 장추삼이 오청지를 보고 탄식을 터뜨렸다. 하필 남아도 이런 어린애란 말인가.
이미 한번 손봐준 전력이 있거늘.
?야, 너! 괜히 까불면 이번에는 진짜로 죽여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냥 찌그러져 있어라!?
이빨을 드러내고 화풀이하듯 으르릉거린 장추삼이 오청지를 무시하고 우두커니 서 있는 철갑기마대와
정면으로 마주 섰다.
잊어버릴 뻔했는데 생각해 보니 할 일이 있었다.
?우리 계산할 것이 있었지??
기마대원들이 움찔 물러서려는데 장추삼이 손을 휘휘 저으며 앞으로 나섰다.
?에이, 왜 그러시나? 공인된 일류인생의 두 분이 썩 나서서 계산을 끝내자고!?
?그런데 저놈이!?
유종휘가 눈살을 찌푸렸다.
?제 놈 두려워서 이러고 있는 줄 아나!?
단목준의 긴 목에 핏줄이 섰다.
그들은 하운의 뒷배경과 북궁단야의 대해와도 같은 무게감에 질려 있었다. 그래서 방금 전의 장추삼
을 까맣게 잊었다.
한마디로 장추삼 정도는 눈에도 차지않는 상태였다.
?얼른 나오라니까? 아니면 내가 뛰어들어 갈가??
?건방진 놈!?
푸르륵!
유종휘가 힘차게 고삐를 움켜지자 흑마가 앞발을 힘차게 치켜들었다. 일반 말보다 삼 분지 일 배는
커서 더욱 강인해 보이는 말발굽은 흡사 장정 하나는 우습게 눌러 버릴 것 같았다.
?오, 이제 나서는 거야??
기마대원들에게서 한 발 나선 유종휘가 하운과 북궁단야를 살피고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저들이 나
서지 않는다면 이런 떨거지 얼마든지 자신있었으니까.
?네놈이 죽으려고 환장을 한 모양이구나. 가만히 있었으면 곱게 돌아갔을 것을.?
?가만히 돌아간다고? 그 꼴은 내가 또 못 보지.?
장추삼이 실실 웃자 유종휘가 장창을 들어 불쑥 찔렀다.
핑!
?이크!?
말을 하는 와중에 가한 기습이라 정말로 악독했건만 장추삼은 여유있게 피했다.
?이봐, 기습을 하려거든 어깨에 힘이나 주지 말던가. 그리 단단하게 어깨 근육을 뭉치면 천하의 바보
라도 방비를 할 거야.? ?이런......?
암수였거늘. 상대는 그저 그런 표사가 아니가 보다.
?네놈의 이름이 뭐냐??
?그건 알아서 뭐하게??
유종휘의 얼굴이 굳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자는 평범한 표사 나부랭이가 아니다.
오십 명의 철갑기마대와 대치하고도 유들유들 농을 주고받는 배짱. 그런 와중에도 상대의 움직임을
근원적으로 파악하는 눈썰미.
?이름을 대라!?
막연한 불안감은 점점 실체화하여 종내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으로 그의 마음을 꾸역구역 채웠다.
걸나 장추삼은 태연자약,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는 도시 이 상태가 마음에 들
지 않았다.
어서 계산이나 끝냈으면 좋겠다.
?아따, 웃기는 일류인생이네. 아까 당신이 그랬잖아. 별 볼일 없는 삼류무사라고. 그러니까 그냥 삼
류무사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둘의 대화를 눈여겨보던 철갑기마부대장 고동규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저 건달 같은 자의 행동거지를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있어서였다.
?날건달 같은 말투에 무림맹주 앞에서라도 할 말은 다 할 듯한 당당함. 그리고 근접박투가들만이 지
니는 날카로운 눈썰미... 거기다 호북의 표룡표국에서 적을 둔 이라면??
생각을 종합하던 그가 삼류무사라 자처하는 사내에게 문득 질문 아닌 질문을 던졌다.
?귀하는 혹시 강호삼성 가운데 괴성이라는 장추삼 대협이 아니오??
움찔!
그의 말에 씩씩거리던 유종휘가 그대로 굳었다.
날건달 삼류무사는 고동규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툴툴거렸지만 그 말의 의미는 실로 간단치 않았다.
?어느 놈이 괴성이라는 괴상한 별호를 갖다 붙였는진 몰라도 내가 장추삼아리는 건 맞아. 그런데 이
상한 사람들이네. 사람 이름이 뭐가 그리 중요해서 알려고 기를 쓴 srj야??
장추삼!
이 날건달 같은 사내가 바로 강호삼성 가운데 귀신과도 같이 주먹을 휘두른다는 남자다.
그렇다면...
공동규의 시선을 느겼는지 장추삼도 한참 어우러져 있는 두 싸움터로 고객를 돌렸다.
?당연히 저기 온화한 척하면서 사람 복장 뒤집는 사내가 하운이고, 괜히 멋있는 척하면서 긴 머리 나
풀거리는 인물이 북궁단야지. 그렇지만 우리를 삼성이네, 뭐네 하면서 뭉둥그려 말하는 건 정말 못마땅
하다고.?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복룡표국의 실회조에 관해.
아니, 생각을 했지만 애써 무관심하려 gopT을지도. 어떻게든 얕잡아 보려 했는지도. 무림맹의 이름
아래라면 두려울 것이 없었기에 이렇게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인정하지 않으려, 마음에서부터 밀어냈는
지도.
?저, 정말 당신이 그 괴성 장추삼이란 말이어??
싹 달라진 말투. 그러나 장추삼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이 목적은 오로지 계산이고, 어서 끝내고 늘어
지게 잠이나 자고 싶었다.
?생각해 보니 삼 일간 잔 시간이 겨우 열 시진도 안되잖아. 젠장.?
뭐가 그리 불만인지 연신 투덜거리던 그가 비실거리는 유종휘를 보며 짜증스럽게 손짓을 했다.
?얼른 오라니까? 아까 살벌하던 기세는 다 어디로 도망간 거야? 나 지금 무지무지 피곤하니까 빨랑
계산이나 끝내자고.?
?무, 무슨 계산 말이오??
?아~ 씨!?
부들거리며 말ㅇ르 버벅이느 유종휘에게 장추삼이 꽥 소리를 질렀다.
?아까 당신한테 분명히 말했잖아! 표국의 계산법은 가액의 열 배라고! 아까 우리 당주님에게 한 방
선사했으니 당신은 열 방만 맞으면 돼.?
?여, 열 대!?
기겁하는 유종휘에게 코웃음을 친 장추삼이 어느새 기마대의 뒤로 돌아가 있는 단목준을 턱으로 가리
키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나마 당신은 처지가 나은 편이지. 꼬랑지 말고 숨어 있는 저 사람은 무려 쉰 방인걸??
?흐에엑!?
단목준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오십 방이라니. 그이 정신이 아득해질 때 고심하던 고동규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잘못 건드린 법집이다. 이건 그냥 벌도 아니고, 한 번 찔리면 목숨까지 위태로운 말벌집이었다. 그리
고 말벌은 그 침을 결코 집어넣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나 어찌겠는가. 이미 일은 벌어진 것을. 바보 같고, 미련하고, 한심하지만 그이 수하들이 벌인 것
을.
부하를 외면할 만큼 옹졸한 부대장은 아니었기에 고동규의 한숨은 짙은 안개와도 같았다.
?장 대협... 내 비록 천하의 대협객은 아니나 수하를 내칠 만큼 비겁한 인물 또한 아니라오.?
?그래서? 당신도 나랑 싸우겠다는 거야??
장추삼이 귀찮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지만 고동규의 굳건한 얼굴엔 한줄기 미소마저 스쳤다.
?수하의 잘못은 대장의 잘못.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망발을 부린 수하지만 그 역시 본인에겐 자식
과도 같은 인물들이니 어쩌겠소. 우리 철갑기마대원 전원은 대협과 맞설 수밖에 없소이다.?
?흐음......?
팔짱을 끼고 고동규를 유심히 바라보던 장추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남자는 사내다. 사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덕목과 의지를 겸비하고 있으니 비록 재수없는 무림
맹의 사람이라고 하나 능히 존중받을 만하다.
그래서 그가 두 팔을 벌리며 살짝 웃었다.
?좋소. 당신들이 떼거지로 덤비든, 한 명씩 덤비든, 난 상관없으니까 마음대로 하시오.?
고동규 역시 장추삼을 전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의지야 그렇다고 해도. 상대방을 인정하자마자 바로 감
정을 풀어버리는 담백함은 그저 힘이나 뒷배경만 믿고 나대는 멍청이들과는 차원이 달랐으니까.
?강호삼성 가운데 괴성 장추삼이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라고들 하더니, 역시 괴이하면서도 무척이나
인간적인 인불이로구나.?
이 자리가 술자리였다면.
아쉬웠지만 그건 나중의 문제. 지금은 목숨까지 위태로운 대결을 펼쳐야 할 때다.
?전부 다는 아니오. 오십 명의 철갑기마대원이 한 사람을 공격했다고 한다면 자자손손 창피한 기억으
로 남을 것이오. 그렇다고 우리 개개인이 대협과 맞설 만한 무위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니......?
그가 뒤쪽에서 발발 떨고 있는 단목준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나 이 불쌍한 사내는 어떻게든 나서지
않으려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이런 천하에 한심할 때가......?
부하의 비열하도록 처량한 몸부림을 보면서 고동규가 불끈 창을 꼬나 쥐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가 나
서서 처리하고 싶었지만 다른 대원들의 사기도 있고 해서 겨우 눌러 참았다.
?너무 나태했구나. 너무나 나태했어.?
철갑기마대가 조직된 이후 제대로 된 싸움을 거의 치러본 적이 없었다. 싸울 상대가 있어야 싸워보든
지 할 것이 아닌가.
물론 국지전은 몇 차례 치렀었다. 그러나 상대들은 반항다운 반항 한번 하지 않고 굴복하기 일쑤였다.
자연히 대원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져만 갔고, 그들의 기세는 단단한 성벽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강대한 적의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지는 유리성과 같았구나.?
신기루였다. 그들이 쌓아 올린 신화는 그저 바람앞에 허무하게 무너질 모래성이었다.
?어서 나서라. 단목준! 너는 네 동료들에게 부끄럽지도 않느냐!?
분노에 ckas 고동규의 부름에 단목준이 비실비실 기어나왔다. 그는 요리조리 눈알을 굴리며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듯했는데 아까의 거만한 모습과 넘도 큰 대조를 보이는지라 장춘삼이 입숭을 깨물었다.
?그리고 유종휘!?
유종휘는 비록 넋이 나가 있었지만 뭔가를 결심한 사람처럼 기꺼이 앞으로 나섰다.
?자, 형ㅈ네들이여. 전우의 잘못은 같이 짊어진다고 했다. 상대는 무림을 떨쳐 울리는 강호삼성 가운
데에서 전설의 육천염을 꺾은 괴성 장추삼 대협이다. 그러나 아무리 장 대협이라고 해도 눈앞에서 형제
를 내어줄 수는 없지 않은가. 비록 잘못한 전우라도 치죄(治罪)를 남에게 맡기기엔 우리의 자긍심이 너
무도 높다.?
고동규의 연설은 움츠러들었던 철갑기마대원들의 자긍심을 되살리기에 충분했다.
?역시 무림맹이로군.?
그저 허명이나 쫓는 바보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했거늘, 대장의 한마디에 눈빛부터 달라지더니 이제 그
들의 사기는 완전히 충만되었다.
하나 장추삼으로서는 그 편이 더 나았다. 비루먹은 똥개 신세의 약골들을 두드리느니 제대로 된 싸움
으로 빚을 받아내는 쪽이 마음 편할테니까.
?그렇지만 우리 모두가 나선다면 강호의 동도들이 어지 생각할까? 아니, 동도들보다 우선 우리 자신
이 낯부/그러워 무림에 얼굴이나 비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개개인으로 장 대협을 감당할 수준도 아
니다. 해서 죄를 저지른 유종휘와 단목준, 그리고 대원을 다스리지 못한 본인과 나머지 여섯 명으로 대
협과 손을 섞으려 하니 뜻있는 자는 나서서 이 고동규의 한 팔 힘이 되어다오!?
?우와아아아!?
드높은 함성. 대장의 힘있는 얘기에 고무된 철갑기마대원들은 너 나할 것 없이 앞으로 나서며 서로
자리를 맡겠다고 자청했다.
?고맙구나, 정말 거마워!?
아직은 포기할 때가 아니다. 이들과 함게라면 언젠가 큰일을 이루어 낼지도 모른다. 비록 잠시의 권
태에 몸을 맡겼지만 그들의 열정과 의지는 내면 깊숙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오늘이야말로 철갑기마대가 진정한 무림맹 최고의 무투 조직으로 거듭난 날이라는 걸 그들은 알고 있
을까?
?좋다! 모두들 데리고 싸움에 임하고 싶으나 약속된 자리는 여섯뿐이니 이 점 양해하라. 선발은 이
부대장에게 일임해 주기 바란다!?
?와아아아!?
완벽에 가까운 결속 속에 고동규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원 하나하나를 호명하기 시작했다. 비록 장추
삼과 복룡표국에 누가 되는 행동을 했을지언정 전투를 앞두고 사사로운 감정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무림인이란 그런 거다. 일단 싸우면 이겨야 한다. 그게 지상 과제고, 지상 명령이다.
무림에게 패배는 곧 죄악이니까.
여섯을 모두 선발하고 몸을 돌린 고동규가 장추삼에게 포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드리오. 우리 철갑기마대는 아홉으로 펼치는 창진(槍陣)으로 장추삼 대협과 겨루
어볼까 하오. 이름은 금선구궁(擒仙九宮). 개진을 하고부터는 생사대적이니 그 점 유의해 주길.?
금선구궁. 신선마저 가두어 버린다는 아홉의 방위라는 뜻이니 살벌한 이름만큼이나 무서운 진식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하나 장추삼은 장추삼. 목을 소리나게 꺾은 그가 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아무래도 좋으니까 어서 시작하자고.?
두두둑.
황진을 일으키며 아홉 필의 말이 일제히 방향을 틀어 장추삼을 에워쌌다.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
았던 단목준의 눈빛은 방금 전까지와 천양지차, 나름대로 형형하게 빛났으니 사기란 있다가도 없고, 없
다가도 생기는 허상인가 보다.
그만큼 고동규의 연설은 그들에게 깊은 의미로 다가왔던 것이다.
?개진(開陣)!?
부대장의 일갈이 떨어지자 여덟 명의 대원은 신속하게 방향을 전환하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음??
두두두두- 이들은 두 겹으로 장추삼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전방의 네 명이 오른편으로 신속하게 돌고,
후방의 네 명은 왼쪽으로 빠르게 돌았다.
그리고 진두지휘자인 고동규는 앞 열과 뒷 열에 불규칙적으로 끼어들었다 빠지기를 반복했다.
넷과 다섯, 다시 다섯과 넷의 엇갈림 속에 무림맹 수뇌부들이 고안해 낸 최강의 대일인마상창진(對一
人馬上槍陣) 금선구궁이 발동했다.
슉슉!
빠르게 찔러 들어오는 네 가닥의 창에 장추삼이 빙글 몸을 돌려 사방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슉!
이때를 기다렸을까? 어느새 전열에 올라와 있던 고동규가 창을 내밀었는데 어찌나 빠르던지 앞서 뻗
어 나온 네 가닥보다 먼저 다다를 지경이었다.
?이런?
급히 철판교의 수법으로 몸을 눕힌 장추삼이 허리의 반동을 이용하여 몸을 틀어 올렸다. 아무리 수발
이 빠르더라도 창을 거둘 시간은 필요할 터.
그러나 그의 앞으로 또다시 네 가닥의 창이 번뜩였다.
이는 금선구궁의 무서움이니, 전열의 인원이 창을 찌르고 그것을 거두기 전에 후방의 네 명이 비집고
들어오며 다시 한 번 창을 찌르는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빈 각은 만들어놓은 터,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횡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기에 어디가
비어 있는 각인지 알기 어렵다.
장추삼으로서도 이번 공세는 매우 당혹스러운 것이라 순간 어쩔 줄을 몰랐다. 전혀 예상을 하지 못했
기에 방비 또한 무리.
그래서 그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츙츙츙!
창들은 헛되이 하늘을 가르고 창을 내지른 철갑대 전원은 일순 할말을 잊었다.
놀랍게도 장추삼은 허리를 펴던 그대로 정지해 버렸다. 그래서 그들의 치명적인 이차 공격은 헛되이
하늘을 가른 것이다.
인간의 신체구조상 허리를 뒤로 젖히면 앞으로 나오려는 관성이 있다. 거기다 철판교의 수법처럼 지
면에 잇닿을 정도로 굽혔다면 이미 펴지기 시작한 몸을 통제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그들의 눈앞에 불가능이 펼쳐진 거다.
하나 이대로 놀라고만 있을 철갑대가 아니었다.
?재차(再叉)!?
후열의 네 명이 전방으로 올라서며 그 탄력을 빌어 거두어들이던 손을 다시 내뻗었다. 물론 이번엔
아래를 겨냥했다.
팍!
장추삼의 몸이 그대로 더 가라앉아 버렸다.
?이런!?
정지한 상태에서 두 다리를 그대로 한일 자로 벌려 땅에 가라앉아 버린 것인데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이보다 효과적인 회피는 없을 터였다.
두둑!
빈공간으로 다시 밀고 들어온 네 개의 창. 그러나 이번에는 장추삼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하압!?
앉은 그대로 허리를 뒤로 완전히 젖혀 두 손바닥으로 지면을 짚은 그가 물구나무서듯 몸을 일으키며
양 발을 엇갈려 날아오는 창을 감아챘다.
와드득!
창신(槍身)과 창신들이 만나며 거북스런 마찰음을 파생시켰고 순간적으로 전달된 압박에 네 명의 창
수는 그만 무기를 놓칠 뻔했다.
그러나 무기를 놓친다는 건 패배와 진배없는 일.
그들이 장추삼의 인도에 따라 힘을 빼는 척하다 일순간 강하게 저항했다. 그에 따라 창과 창들이 마
찰하며 또 한 번 쇠 긁히는 소리가 났다.
가각!
피륙으로 구성된 인간의 몸으로 어찌 철창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철갑기마대원들이 사용하는 창은 창신이 나무로 되어 있는 일반적인 창과 달리 창극에서부터 전체가
철로 이루어진 완전한 철창이었다.
별수없이 장추삼은 창을 틀던 반대편으로 힘을 한번 실어 이들의 힘을 분산시키고 그 틈을 이용하여
재빨리 일어서는 편을 택했다.
가까스로 창을 회수한 창수들이 후미로 물러서자 난데없이 고동규가 진격해 들어왔다. 일견 무모한
동작처럼 보였지만 그를 따라 들어오는 네 개의 창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장추삼을 노렸기에 그리 만만
한 성질이 아니었다.
?제길!?
기본적으로 창은긴 거리를 이용하여 상대방을 제압하는 무기다. 긴 거리만큼이나 크고 무겁기에 당연
하겠지만 다루기 어려운 무기다.
거리를 확보해 준 만큼 사용자에게도 악조건이 주어짐은 정한 이치일 터. 하여 창을 다루는 무기들은
그 수가 나날이 격감되는 형편이다.
그래서 백일도(百日刀), 천일검(天日劍), 만일창(萬日槍)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군대에서는 창병처럼 효율적인 부대가 없었다. 백병전이 벌어지기 전 일렬로 도열하여 긴 창
으로 찔러 들어가면 그 거리의 허용성은 십분 발휘되는 것이고, 그래서 창병은 군대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 부대로 자리매김했다.
어차피 전문적으로 무술을 익혀서 싸우는 전투가 아니기 때문에 단 한 치라도 효용성이 있으면 그쪽
이 유리함은 당연하지 않은가.
거기에 마상이라면 창의 효과는 극대화된다고 하겠다. 육중하고 다루기 어려운 악조건을 말의 기동성
으로 보완하면 그만큼 약점이 줄고 장점이 늘어날 터.
?젠장, 황궁 출신이라도 있다는 거야??
투덜거림은 싸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를 잘 알지만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투덜거림은
어쩔 도리가 없어서 장추삼이 불만스러운 눈으로 장내를 쏘아보았다.
척 보기에도 고동규의 진격은 숨을 돌리기 위한 허초임에 틀림없었고, 그래서 장추삼은 별다른 신경
을 쓰지 않았다.
문제는 창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방법. 천고의 보법이라는 추뢰보도 지상전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이
렇게 마상에서 내려다보는 이들에게 무슨 효과가 있을까.
사실 장추삼으로는 말을 타고 달려드는 적들을 처음 상대하기에 더 당황스러웠던 거다.
난다 긴다는 강호의 고수들과 손을 섞어보았지만 말을 탄 이들과의 조우는 처음이니 당연히 조급했고,
정신이 없었다.
?젠장, 이거 골치 아프네.?
그의 고심을 아는지 여전한 얼굴로 찔러 들어오는 창들은 장추삼을 맞추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시시각
각으로 방위를 차단했다.
이대로라면 엔젠가 한 번은 잡힐 터.
그 다음은 연환 공격일 게 뻔하니 잡히는 즉시 승부가 난다고 봐도 옳다.
그렇다고 무작정 달려들 수도 없는 것이 철갑주로 중무장한 이들이기에 정확한 타격을 가하지 못하면
도리어 역습을 당할 게 뻔했다.
이것이야말로 철갑기마대의 두 번째 무서움이다. 어설픈 공격은 단단한 철갑주로 튕겨 버리니, 상대
방이 받는 정신적인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모자란 기동력은 기마술로 보충하는 것이고.
?확 말을 잡아버려??
그건 자존심상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름대로 동물 애호가임을 자처하는 장추삼으로서 어찌 죄없는 짐
승에게 손을 댈 수 있을까.
사실 위험하기도 하다. 말발굽에 잘못 찍히기라도 하는 날이면 사나흘 자립보전 가지고는 해결하지
못할 정도의 상해를 입을테니.
?어쩐다......?
문제는 거리!
창과의 거리만 좁힐 수 있다면 해볼 만한 싸움이다!
?거리, 거리, 거리!?
날아드는 창을 가까스로 피하던 장추삼이 뭔가를 느끼고 돌연 빙글 몸을 돌렸다.
?가만??
거리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상대방이 한 걸음 다가서도 자신이 한 걸음 물러서면 그의 행동은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다.
바궈 말한다면 자신이 한 걸음 다가섰을 때 상대방이 한 걸음 다가서면 효과는 두 배가 된다.
또한 거리라는 말 자체는 시간이다.
장추삼은 처음으로 산무영을 밟았던 늦은 봄날을 떠올렸다. 그리고 밉살스런 사숙의 미소와 예쁜 모
양의 여섯 가닥 독화살도.
거리는 말 그대로 시간이고, 시간은 곧 순차적인 개념이니까.
그렇다면 한순간만 잡으면 된다. 지금까지 겨뤄본 결과 이들은 대단히 훌륭한 합격술을 보이고 있으
나 한 가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한순간만 주어진다면 그걸 확인해 볼 것이다.
그때 후열로 자리를 내준 전위가 뒤로 빠졌다. 당연히 나선 후방의 인물들이 창을 내뻗었다.
?저기!?
파박!
네 명의 창수 가운데 가장 먼저 손을 뻗었던 인물을 무시하고 가장 가까이 전열에 이른 인물에게 한
달음으로 다가선 장추삼이 창을 박차고 올라서며 왼쪽 무릎으로 턱을 가격했다.
?큭!?
늘 옆으로 피했던 장추삼이기에 마주 달려오리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던 터.
소리도 내지 못하고 뒤로 넘어지는 사내를 밟고 허공으로 몸을 띄운 그가 분분히 무기를 올리는 창수
들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횡(橫)에서 종(縱)으로의 전환이라면 경무기(輕武器)로도 어려울 판국인데 중무기(重武器)로 시도를
하니 그 움직임이 눈에 선히 들어왔다.
그들의 문제점은 바로 이것이다.
횡으로의 찌르기에는 대단히 강한 면을 보이지만 허공으로의 공격, 즉 종으로의 찌르기에는 익숙하지
못했을 것이고 장추삼의 도박은 대성공이었다.
스륵.
몸을 띄워 올렸다고는 하나 순간적으로 신형을 잡아 뽑았기에 창수들은 장추삼의 움직임을 너무 크게
그려냈고, 그 착시 현상은 거리감의 상실로 이어졌다.
다급하게 전환된 투로, 그리고 잘못 계산된 거리.
솟구치는가 싶었는데 어느 결에 떨어져 내리는 장추삼에게 이들은 어미 잃은 병아리와도 같은 신세였
다.
퍽!
가장 늦게 올라오는 창날의 주인에게 한 방을 선사한 그가 뒤이어 고개를 돌리는 사내의 뒷목을 질끈
즈려밟아 주고는 세 번째의 사내를 보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당신은 다르지??
몸을 틀어 공격을 하지 않고 지면에 착지한 그가 허둥거리는 유종휘의 전면에 불쑥 몸을 드러내며 오
른손을 맹렬하게 떨쳤다.
파바방!
정확히 아홉 번.
작렬하는 유성우의 세례에 유종휘가 정신을 놓는데 장추삼의 왼손이 느릿하게 그의 이마를 툭 쳤다.
?이렇게 열 방이다.?
쿠당.
말에서 떨어진 유종휘와 게거품을 물고 있는 세 명의 사내. 순간적인 겨룸이 이런 결과를 도출했고,
고동규로서는 손쓸 여지도 없었다.
순식간에 깨져 버린 금선구궁. 아니, 금건달구궁(擒乾達九宮).
가만히 서 있던 장추삼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창들을 발로 찼다.
?그러게 위도 생각했어야지. 사람이라고 하늘에서 놀지 말라는 법있나??
떼구르르...
그의 발에 차인 창 하나가 주인을 찾아 헤매이듯 바닥을 열심히 굴렀다.
?허!?
고동규의 한숨은 패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여태가지 자신했던 진법인데 단 한 번 보고 그 약점까지 파악하는 장추삼의 안목도 안목이려니와, 우
물 안 개구리처럼 안주했던 자신들에의 한심함이 밀려와 뜨꺼운 입김으로 표출된 것이다.
철갑주에의 맹신.
이른바 장점이 단점이 되어버린 경우인가.
?대협의 금언 각골명심하겠소. 그러나 싸움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오.?
?음??
말에서 내린 고동규가 철갑을 끌러 미련없이 벗어 던졌다. 철갑기마대만의 장점을 모두 거둔 행위.
이것은 뭘 의미하는 것일까?
?지금의 철갑대로 대협을 어찌할 수 없음은 분명하오. 그러나 우리도 철갑대이기 이전에 통상의 무인.
이대로 겨루어보고 싶소.?
?이대로? 잘 모르나 본데 내 전문이 원래 지상 막싸움이라고.?
지상 막싸움.
?아하하하하!?
오랜만에 통쾌한 웃음으로 고동규가 긴장감을 덜었다. 장추삼이라는 자, 보면 볼수록 매력이 있지 않
은가.
?인연이 닿아서 다음번에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한 잔 가지고는 안 되겠다. 적어도 하루는 족히 날을 새야겠다.
그러나 지금은 생사를 결할 적의 신분이니 이런 상상은 그야말로 일장춘몽 같은 것.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마주할 상대가 아니다.
오히려 한 수 배워야 할 입장이거늘, 잡생각이라니.
삼류무사 258
유교학반(惟敎學半)
그가 둔중한 철장을 말에 얹어두고 가벼운 장창을 꺼내 들었다. 기마의 효용성을 버린 지금 철장을
사용하는 건 미친 짓이다.
뒤따라 네 명의 기마대원도 갑주를 벗었는데 단목준의 손은 유달리 더뎠다.
장추삼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유종휘에게 더도덜도 없이, 꼭 열 방을 먹였으니까. 그렇다면
자신의 운명은 오십 방이라는 건데.
?끄으윽......?
기절한 가운데에도 간간히 신음성을 질러대는 유종휘를 보며 그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얼마나 아팠
으면 혼절 중에도 앓는다는 건가. 그러나 동료들은 의연한 모습으로 경창(輕槍)을 꼬나 쥐고 있다. 여
기서 물러났다간 평생 비겁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저들과 자기는 다르다!
?난 오십 방이라고!?
울고 싶었다. 하지만 울 수도 없다.
이때 고동규의 전음이 들렸다.
?너무 겁내지 말거라, 단목대원 비록 비세라고는 해도 우리에겐 여태 익힌 무공과 서로에 대한 믿음
이 있지 않나.?
단목준이 고동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고동규는 묵묵히 경창을 쓰다듬고만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음.
?믿어라, 너를. 그리고 너의 창을! 아직 진 것이 아니다. 패하지 않았다는 것은 언제든 이길 수도 있
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우우욱......?
눈물이 나려 했지만 단목준은 손톱을 손바닥에 박아 넣으며 참아냈다.
그저 부대장으로서의 책임감일까?
아니면 스스로에 대한 도전일까?
둘 가운데 그 어떤 것이든
저 사람을 보자니
내 자신이
너무나도
너무도...
?부끄럽구나.?
고개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던 단목준이 창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전면으로 나섰다.
?자아~ 오라!!?
그의 우렁찬 외침에 장추삼이 어이없어서 혀를 불쑥 내밀었다.
?얼레. 뭐냐??
일변한 기세에 어리둥절한 그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다 죽어가던 인간이 저런 모습이라니, 갑자기
약이라도 먹었다는 건가.
그에 다른 대원들도 크게 사기가 고무되어 창을 들고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사실 고동규는 필승까지는 아니더라도 해볼 만한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방금 전에야 철갑주를 너무
믿었으며 장추삼의 실력을 전혀 몰랐다.
한마디로 방심 때문에 힘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어이없이 무너졌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전
투의 양상이 다른 전개로 펼쳐질 수 있다.
괴성의 실력을 눈으로 확인했고, 그들의 사기는 어느 때보다 충만했으니까.
?그럼......?
짧은 인사말과 함께 고동규가 한 발을 딛자 나머지 대원들이 흩어지며 장추삼을 둘러쌌다.
?음??
그들의 진용을 눈여겨보던 장추삼이 문득 어떤 검진을 떠올렸다. 비단 다섯 명이라서 아니라 진세 자
체가 그 검진과 매우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무림맹의 최강 무투 조직이라더니, 무공 방면으로는 이것저것 모두 공유하는 건가??
그들이 그려내는 창진은 무당의 오행검진과 너무도 비슷했다.
그런데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 철갑기마대는 자타 공인 무림맹의 기동 타격대다. 자연 개개인의
무학뿐만 아니라 일 대 다수, 또는 다수 대 일의 전술을 기본적으로 익혔던 것이다.
하여, 인원 수의 가감에 따라 펼치는 진세가 자동적으로 변하는 법이고, 그건 머리버다 몸이 먼저 따
라줄 만큼 열심히 익혀왔던 터다.
둘일 경우면 양의위(兩義位), 세 명이라면 삼재진(三才陣), 네 명일 경우는 사상영(四象影), 그리고
다섯일 경우라면 오행진(五行陣)......
물론 이것은 각 파의 최고 진세만을 모은 것으로, 이 정도의 절기들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함은 무
림맹에서 이들에게 쏟은 정성과 기대가 어느 정도였는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서로가 다섯임을 알고 자연스레 오행의 진을 구축한 것이다.
만약 장추삼이 오행진의 정수 가운데 정수를 접했고, 싸워서 이기기까지 했다는 걸 알았다면 이들이
지금과 같은 진용을 짰을까?
?그거 어디서 많이 본 진용일세??
고동규는 별말없이 창을 올려 들었다. 하도 유명한 오행검진이라 그 껍데기는 여기저기에 유통되고
있는 형편이므로 어딘가에서 이와 비슷한 진세를 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웅-
이번에도 고동규를 정점으로 네 명의 창수가 사방으로 퍼졌다. 방금 전의 금선구궁과 같은 짜임새라
고 부를 수도 있지만 장추삼이 보기엔 역시 다섯 노인네가 펼쳤던 검진이었다.
?역시 그거로군.?
뿌드득.
목을 한 번 비틀고 손을 탈탈 턴 장추삼이 진식의 발동과 함께 비쾌하게 앞으로 나섰다.
쿠르릉!
하나 더하기 하나는 절대 들일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듯 이들 다섯이 만들어내는 진식은 개개인의
미약함을 보완하기에 충분했다.
그렇다.
그가 보기에는 그저 미약함을 보완해 주는 정도였다.
파악!
장추삼의 우측에 선 사내가 창을 힘껏 찌르자 막대한 압력이 밀려들어 왔다. 이에 가슴을 보호하면
뒤로 몸을 돌리는 그의 앞을 가로막는 또 한 명의 창수.
그는 튀어나오며 태산압정식으로 장추삼에게 창을 내려쳤다. 그저 찌르기만의 용도가 아니라는 듯 그
의 창은 위력적으로 장추삼을 윽박질렀다.
그러나 이는 그가 익히 알고 있던 변화였다.
?금생수(金生水)라면 내려치는 힘이 부족해! 조금 더 위맹하게 봉을 다스리라고!?
?......!?
?......!?
일순간 두 창수는 모든 동작을 정지하고 입을 따 벌렸다.
어떻게 금생수를 안단 말인가! 이 진식은 무늬만 오행진이 아니거늘, 어찌 단번에 파악한단 말인가!
그들은 장추삼의 무당 난입 사건을 알 리가 없었다. 무당에서는 쉬쉬하는 일이고, 장추삼 본인이 떠
들고 다니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작은 일을 이루고 마치 대단한 척 이리저리 나대는 인간들이라면 인간 군상들 가운데 그가 최고로 경
멸해 마지않는 종자들이니까.
그는 이 진식이 만들어낸 최고의 조화를 보았기에 이들이 만들어내는 변식은 눈 감고도 잡아낼 수 있
었다. 이는 다섯 사내에게 불행이었지만 그저 불행만으로 남을지는 알 수 없는 일.
순간적으로 멈칫했지만 이들은 곧 정신을 차리고 태산압정식으로 나려진 창을 힘것 들어 올리자 장추
삼은 천왕탁탑식의 공세를 받게 되었다.
스륵.
비단결처럼 몸을 움직여 위로 올려치는 공세를 피하는 그에게 왼편에서 불규칙적인 찌르기 하나가 교
묘한 변화로 장추삼을 공격했다.
?토생금(土生金)이라면 좌측 창수는 불러오는 변화를 더욱 가중시켜야지! 적어도 상대방으로 하여금
두 번 이상 몸을 움직이게 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
그래 가지고는 파리도 못 잡겠다, 하면서 여유만만하게 몸을 놀리는 장추삼의 움직임에 고동규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문득 신형을 움직이던 장추삼이 제자리에 섰다.
?이봐들!?
그의 부름에 다섯 창수는 움찔 몸을 굳혔다. 싸우다 말고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몰라도 그들을 불러
세운 창추삼은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이건 영 아닌데 말이야...??.?
묘한 건 다섯 사내. 그들은 마치 마법이라도 걸린 사람들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거 처음부터 다시 해.?
머엉-
무슨 말인지 몰라 황당해하는 그들에게 눈까지 내리감고 생각에 잠겨 있던 장추삼이 발을 탁탁 두드
리며 손가락으로 허공에 무언가를 그려냈다.
?당신들, 다섯 명이 지금 손발을 맞추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무당의 오행검진을 응용한 것 같은데 그
래가지고야 오행검진의 다섯[五] 자만 베낀 거지 어디 그거랑 비교나 할 수 있겠어??
?으음......?
고동규가 억눌린 신음성을 토했다.
?오행검진이라면 기본적으로 진식이 발동되는 순간 사람의 혼을 다 잡아먹어 버릴 듯한 기운을 풍겨
야지. 그런 압박감은 줘야 상대방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할 거 아냐. 그런데 당신들은 뭐야? 흐리멍텅
해 가지고, 압박감은 커녕 기분 좋은 미풍이 불더군.?
장추삼의 신랄한 비판에 다섯 사내가 목을 움츠렸다. 마치 말 잘 듣는 학동처럼.
?그리고 오행검진의 진정한 위력은 다섯 개의 작은 잔이 서로 상생하면서 전체를 보완하는, 그야말로
유기적인 보완 관계를 이루는 형태... 라고 저기 있는 사람이 말했단 말이야.?
한참 칼을 놀리고 있는 하운을 슬쩍 돌아본 장추삼이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아무튼!?
뭔가 쑥스러워서 다섯 사내를 외면한 그가 괜히 소리를 질렀다.
?다시 해, 처음부터!?
네 명의 창수들은 고동규를 보았고 그들의 부대장이 눈썹을 세우며 창을 다시 고쳐 잡는 것도 보았다.
?뭐 하는가, 어서 진용을 재정비하라!?
고동규는 비단 읮만 굳건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나서야 할 때와 물러날 때를 알았으며, 내칠 때와
배울 때도 알았다.
묵묵히 그가 진세의 중앙에서 서자 다른 이들도 어기적거리며 진용을 다시 짰다.
우웅~
?뭐야, 그게! 그런 식이라면 똥강아지도 들어와서 변을 싸고 가겠다!?
우웅-
?내 참, 그리 말을 해도 못 알아들어? 뱃데지에 힘을 꽉 주고 여긴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 하는 마
음을 가지라니까!"
쿠르르-
?오, 이제 좀 낫네! 좀 더 힘을 실어! 조금 더 자신을 믿으라고!?
쿠오오오!
앆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세. 그들의 창진은 견고 성벽처럼 장추삼을 둘러쌌다. 이에 적이 만족한
그가 팔을 빙빙 돌리더니 중앙으로 뛰어들어 갔... 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왔다.
쿠웅!
무형의 막이 장추삼을 거칠게 밀어냈고 그는 그 막을 찢으려다 돌아온 것이다.
?흠.?
이정도면 만족이다. 이정도는 돼야 무당의 노인네들도 얼굴을 펼거다.
?이봐, 중아의 당신. 당신이 열쇠라는 거 잊지 마.?
마지막 충고를 남기고 고동규가 고개를 끄덕일 사이도 없이 장추삼이 천고의 보법 산무영을 밟았다.
촤르륵-
여섯 명의 그로 분열된 장추삼이 제각기 한 사람씩을 맡아 맹렬히 돌진해 들어갔다. 이에 놀란 창수
들이 급히 무기를 들어 허공에 호선을 그려냈다.
?놀랄 시간이 어디 있어? 자신을 생각하지 말고 동료를 보완한다는 마음을 가지라니까! 이 진식의 별
명이 상부상조진(相扶相助陣)이라고. 알아들어? 상부상조진.?
상부상조진... 물론 이건 장추삼이 급조한 이름이다. 그러나 합격을 하는 이들에게 이보다 좋은 충고
가 어디 있을까.
그의 말은 즉각적으로 효과를 거두었는지 자신을 가리기에 급급했던 창수들이 서로의 빈틈을 메우며
수세에서 서서히 공세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좋아!?
흥이 난 장추삼의 발이 부산해졌다.
그런데 그가 이들을 가르치는 이유가 뭘까? 원래가 성인군자라서? 그야말로 청빈로 똥개들도 뒤집어
지면서 웃을 얘기다.
그는 그저 고동규- 그가 보기에 진식의 중앙에 서 있는 철갑대의 우두머리-가 마음에 들었고, 그렇기
에 그가 펼치는 진식의 허술함을 일깨워준 것뿐이다.
그것가지고, 라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왜, 장추삼은 그런 인간이니까. 한 번 사람이 좋으면 그냥
좋기에 그가 줄 수 있는 건 다 퍼주는 성격이니까.
하나 가르치면서 반은 배운다[惟敎學半]라는 말이 있다. 좋은 의도로 시작된 일이라서 그럴까. 장추
삼에게도 이 겨룸은 매우 유용한 것이 되었다.
파박!
산무영의 공세에서 서로를 보완하며 수세를 벗어난 창수들이 도리어 반격을 해오자 그가 급제동을 걸
어 모든 잔영을 거두어들였다.
팍!
?허억!?
최고조의 속도로 추뢰보를 밟아 전면으로 돌진하자 오른편의 창수는 기겁을 했다. 무기를 사용할 시간
조차 주어지지 않을 만큼 빠른 접근이었기에 그는 입만 떠억 벌렸다.
츙!
이때 옆에서 위맹한 찌르기가 들어왔고, 장추삼은 반 바퀴 회전하며 옆으로 물러서야 했다.
가르친 대로 이들은 서로를 멋지게 보완하고 았지 않은가!
?좋아!?
더는 떠벌리지 않고 그도 신중한 눈으로 전방을 경계하는 한편 후방에서 슬슬 파생되는 예기(銳氣)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츙츙!
역시 후방에서 공격이 들어왔다. 이들은 장추삼의 좌후(左後)와 우후(右後)에서 비교적 동일한 속도
로 찔러 들어왔는데 장추삼으로서도 그 순차(順次)를 정확히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빙글.
몸을 돌린 그가 산무영을 밟는다 싶었는데 어느새 추뢰보로의 전환을 했는지 신형의 이동 속도가 낙
뢰와도 같았기에 배후를 공격했던 창수들은 허탈할 지경이었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그렇게 이동하면서 오른손을 슬쩍 들어 올린 그가 어깨를 흔들어 좌후의 창수에게 순간적으로 무려
아홉 개의 권력이 날아들었다.
?차압!?
언제 돌아 들어왔는지 또 하나의 창수가 힘차게 창을 휘둘러 아홉가닥의 권기를 막아서고 공격당하던
최후의 창수가 뒤로 빠지며 중앙에 서 있던 고동규가 불쑥 앞으로 나섰다.
?어라??
고동규는 어던 공세없이 장추삼의 족적을 쫓아 신형을 이동시켰는데 그렇게 되자 자연 나머지 세명은
뒤로 처진 꼴이 되었다.
뭔가 오행검진이 나기게 된 상황.
이때 오른편 뒤로 처져있던 창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면서 창을 휘두르자 장내에는 막대한 압력이
파생되었고 미처 방비하지 못한 장추삼은 황급히 신형을 이동시켜야 했다.
?오!?
이것은 물론 오행진이 아니었다. 이들은 순간적으로 두 사람을 뒤로 빼내어 오행진을 해체해 버리고
삼재진형으로 진세를 변형시킨 터였다.
제법인데?
장추삼이 씨익 웃었다.
이 웃음, 문제가 크다. 그가 싸움 가운데 이렇게 웃었다면 크게 신났다는 거고, 제대로 한번 힘을 쓰
겠다는 신호와도 같은 거다.
삼재진이 뭔지는 모르지만 진식의 기본적인 성질을 이해하기에 변형에 흔들릴 그가 아니었다.
옆으로 신형을 돌렸던 그가 단 한 발을 딛음으로써 삼재의 틈에서 빠져나와 그들의 뒤로 처져 있던
창수에게 다가섰다.
그러자 같이 물러났던 창수가 장추삼을 막아보려 움직여Twel만 이미 동료는 그에게 전면을 내준 상태
였다.
장창의 유리함과 불리함을 잘 파악한 공격법이니 창을 쥔 손의 방향으로 파고들었을 때 웬만한 고수
가 아니고서는 즉각적인 반격을 하기 어렵다.
창이 그리는 궤적은 검의 그것과 비교도 할 수 없으리만치 크고 느리니까.
?늦었다!?
고동규가 마음속으로 비명과도 같이 탄식하며 몸을 돌렸다.
쾅!
느닷없이 들려온 폭음.
뒤로 물러서 있던 둘 가운데 장추삼을 무찔러 가던 창수가 들고 있던 창을 집어 던지자 그도 황급히
신형을 움직여야 했다.
비무같이 되어버린 싸움이지만 저 창에 제대로 맞으면 재미적을 테니까.
그 순간을 빌어 다시 오행을 그려냈고, 장추삼은 제자리로 돌아왜야 했다. 일순간의 교환이었지만 그
들의 발전을 보여주는 한 수였다.
?던질 줄이야.?
툴툴 웃던 그가 전열을 가다듬는 다섯을 빤히 보았다.
더 이상 해줄 것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펄펄 뛰어다녔더니 슬슬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프다.
무엇보다 무지무지 졸리다.
?끝내자고.?
나른한 그의 말에 다섯 사내가 침을 꿀꺽 삼켰다.
괴성은 이번 격돌로 승부를 지으려고 한다. 비록 배우는 입장이었지만 승부만큼은 양보하기 싫다. 염
치없다고 해도 할 수 없다.
왜?
여긴 무림이니까.
그들 역시 긴장 속에 서서히 공력을 모았다. 어느 정도 데워진 몸과 맞춰진 손발은 최상의 몸 상태를
이끌었기에 최고의 공수를 주고받을 수 있으리라.
콰릉!
대답 대신 그들은 진세를 발동시킴으로써 장추삼의 호의에 감사했다.
?음!?
지음은 안지만 그들의 대답을 이해한 장추삼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뭘 하려는지 모르지만 지금으
로 봐서는 그저 방임이었다.
하나 다섯 사내는 장추삼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꼈기에 결코 태만하지 않았다.
어던 상황에서도 최고의 공격을 퍼부을 사람이고, 어던 수세에도 유유히 빠져나갈 인간이 바로 괴성
장추삼이라는 인불이니까.
?간다.?
짧은 한마디.
그리고 장추삼이 움직였다.
터벅.
그가 다가온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섯 사내는 나름대로 힘을 모아 오행진의 절초, 일음일양지위도(一
陰一陽之謂道)를 그려냈다.
쿠르르...
다섯 개의 창이 어우러져 거대한 기운을 파생시켰다. 여태꼇 그들이 만들어낸 그 어떤 공세보다 강력
하고도 장악력있는 공세였기에 대하는 이가 그 누구라도 절로 모골이 송연할 만한 공격이었다.
스르륵.
자살 행위인가?
장추삼은 그들의 공세 속으로 자신을 힘없이 밀어 넣었다. 마치 빨려 들어가듯 다섯 창수들이 만들어
낸 기운으로 발을 디딘 그가 기운과 기운이 맞닿을 시점에서 어깨를 슬쩍 움직였다.
파바방!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며 그를 기점으로하여 다섯 창수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케엑!?
?컥!?
털썩털썩 지면으로 나뒹구는 그들을 무심히 바라보던 장추삼이 자신의 발 밑을 바라보았다.
어지러이 찍힌 족적. 놀랍게도 그 흔적들은 여태까지 벌어졌던 격돌의 자국들을 모두 지우고 새롭게
덧입혀져 있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족적이 한 번의 움직임으로 만들어졌다는 건가?
?이것이었군, 기형.?
그 족적, 장추삼에게는 뼈아픈 기억으로 남은 유일한 패배의 흔적과 동일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완전히 같다고 볼 수 없었다.
왜?
?끄으응......?
제일 먼저 일어서는 창수의 눈은 쇠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듯 부어 있었다.
?무슨 권법이......?
아이고, 하며 눈을 부여잡은 그가 비틀거리는데 또 한 명의 창수가 일어서며 가슴팍을 꾹 눌렀다.
?권법은 무슨......?
투덜거리는 그의 가슴팍에는 분명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다들 뭔 소리야??
고동규가 겨우겨우 일었섰는데 그이 왼쪽 볼엔 장추삼의 신발 자국이 그대로 찍혔고, 그래서 두 창
수들이 아픈 와중에도 킬킬거렸다.
그랬다. 이들 다섯은 모드 다른 공격으로 당했던 거다. 지금가지의 싸움과는 전혀 다른 결과. 그렁다
면 상대가 약했기에 가능했던 결과일가?
문제는 이 동작들이 모두 한순간에 이루어졌다는 거다.
이런 무시무시한 복합 무공을 펼친 당사자는 멀리 하늘을 보다 입을 쭉 내밀었다.
?저거 또 나와 있네.?
그곳엔 태양의 시간에 어울리지 않게 희미한 자태로 달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애초부터 싸움이 되지 않았다.
매정방의 검세는 비록 위맹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공동의 복마검법(伏魔劍法)이었지만 시전자의
악독한 성품 탓인지 능히 강마검법(降魔劍法)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러 사기가 짙었다.
뱀처럼 날름거리는 혓바닥은 그 효과를 증폭시켰고, 그래서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
런데 상대가 안 좋았다.
하운 매정방의 검식을 마치 파헤치기라도 하듯 무려 칠십여 초나 담담히 받아냈다. 판관처럼 냉정한
눈빛으로 그의 움직임과 검세를 살폈는데 그 이유는 당사자만이 알 일이었다.
?공격을 해라, 대사형!?
약이 오른 매정방이 길길이 날뛰었지만 하운은 물처럼 담담하게 손을 움직였다.
광활한 숲의 고요 속으로 침전되는 나뭇잎 한처럼 공동의 제자는 화산의 벽을 좀처럼 뛰어넘지 못하
고 혼자서 아등바등 몸부림쳤다.
?지금 나를 희롱하는 거냐! 어서 공격을 해라!?.
독기를 풀풀 뿌리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손을 놀리던 하운이 문득 고개를 돌려 소림의 제자와 종남의
제자를 바라보았다.
그 사선은 너무도 투명했기에 두 남녀는 자신들의 마음속까지 투시 당하는 같아 얼굴을 붉혀야만 했
다.
?어딜 보는 거냐! 내가 그리도 만만하다는 거야!?
어, 만만해.
물론 말로 하지는 않았다. 그저 하운은 그를 십 리도 못 가서 퍼져버린 망아지를 대하듯 바라보았을
뿐이고, 그걸로 충분했다.
?이런... 죽일!?
이를 갈아붙인 매정방이 크게 경호성을 지르며 맹렬하게 검을 휘둘렀다. 그래봐야 삽질이었지만.
아니, 삽질도 아니었다. 삽질이라면 결과물이라도 있는 법인데 매정방의 칼질은 그저 보기 흉한 칼춤,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여유롭게 칼을 받아내던 하운의 얼굴에 권태가 흘렀다.
그순간!
?기회다!?
칼을 휘두르던 매정방이 품에 손을 넣어 재빨리 무언가를 뿌렸다.
휙!
띵!
악독한 심보의 허무한 결론.
나른하든, 한눈을 팔든, 하운은 하운이었다. 그는 이제 완성을 바라보는 무인이다. 암기 나부랭이에
몸을 맡길 만큼 허술하지 않은 사람이다.
튕겨져 나간 비도(飛刀)를 바라보던 하운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앙증맞도록 작은 칼의 끝에는 초
록색 액체가 번들거리고 있지 않은가.
공동파 자체가 아무리 정사지간이었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당당히 구파에 이름을 올린 상태. 제자에게
이런 비도술을, 또한 이런 비도를 줬을 리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이제 됐소.?
무심한 한마디와 함게 하운의 검이 천천히 이동했다.
츠츠츠...
신선의 서체(書體)처럼 현기롭던 그의 검적이 악마의 호곡성을 부르며 피와 죽음의; 움직임으로 둔갑
했다.
?으아아!?
난생처음 보는 악마의 검식 앞에 매정방은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검은 하운이 그려
내 월광살무에 갈가리 찢겨 나갔다.
?죽어!?
아무리 거부하려고 해도 천천히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발작처럼 검을 휘두르는 매정방에게 월광살
무는 사신의 속삭임처럼 차그차근 다가왔다.
치이이...
월광살무에 노출된 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근원적인 공포,. 타인을 우습게 여기는 이들일수록 자기 자
신을 사랑하는 생리대로 제 목숨에 대한 매정방의 집착은 실로 놀라울 지경이었다.
?아악!?
머리를 조아리며 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그가 숨을 몰아쉬었다.
?나, 나를 어지하려 들면 공동의 모든 문인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누구냐! 팔괴공동문하
란 말이다! 어서 검을 치워라!?
츙츙츙!
?으아악! 살려줘! 제발 살려줘!?
협박을 하던 그가 계속해서 파공성이 들리자 땅에 머리를 박고 바닥을 기었다.
츙츙!
?아아악!?
츙!
?악!?
소리 지르던 그가 뭔가 이상해서 슬쩍 고개를 드니 한가롭게 뒷짐을 지고 칼을 흔들어서 공기 소리
를 내고 있는 하운의 씁쓸한 미소가 들어왔다.
?이... 이익!?
부들부들 어깨를 떠는 매정방을 무시하고 한가로이 손을 휘두르던 하운이 검끝을 벌레와도 같은 인간
의 머리위에 얹었다.
?당신은 공동의 수치다.?
뭐라고 항변하려 그가 고개를 쳐드는데 하운의 서글픈 독백이 이어졌다.
?여기서 놓아주어 봤자 또 그런 식으로 살아가겠지. 하지만 어쩌겠나, 사람의 목숨을 좌우할 만한 권
능이 주어지지 않은 나를 탓할 뿐.?
칼을 치운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썩 이 자리에서 물러나시오! 안 그러면 정말 베어버릴지 모르니까!?
눈알을 굴리던 그가 주이를 한번 살펴보고 쏜살같이 일어나 표국을 빠져나갔다. 그때까지 매정방은
두 명의 동료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벽이란 이런 것인가.
벌서 몇 차례의 격돌을 벌였지만 북궁단야는 단 하나의 움직임으로 군가휘가 불러온 모든 초식 을 부
숴 버리고 있었다.
?타아앗!?
현란한 빠르기와 표홀함이 장점인 소청검법(小淸劍法)을 전력으로 펼치며, 군가휘가 웅혼한 내공을
바탕으로 빠르게 앞으로 달려들었다.
챙!
한줄기 사선이 그려지고, 그의 검법은 형체도 없이 깨졌다.
?다시!?
무정한 북궁단야의 음성.
?후웁!?
아미의 비전심법이라는 무상금광신공(無想金光神功)을 일으키자 군가휘의 전신은 황금빛으로 뒤덮여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칼을 고쳐 잡은 그가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포옥검(抱玉劍), 귀중한 것을 품는다는 뜨처럼 그의 검은 장엄하게 북궁단야를 압박했다. 물론 안겼
다가는 큰일나겠지만.
챙!
또다시 그려진 사무귀일에 포옥검은 아무것도 안지 못하고 깨져 나갔다.
?다시.?
으드득.
이를 갈던 그가 매정방의 줄행랑을 보고 허탈해졌다.
?무엇을 위해 여기 왔을까??
무림첩의 집행을 명받았을 때는 감루(感淚)까지 흘렸었다. 팔파공동문하라고는 하지만 강호행은 전무
했었고, 그저 벽 보고 수련이 전부였다.
명예욕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과시욕도 물론 있었다. 그건 가진자의 권위라고 생각했으니까.
철갑기마대르르 대동하고 나선 첫 강호행이기에 그 자신감은 실로 대단했다. 그대가지는 세상에 두려
울 것이 없었다.
아니, 단 반 시진 전까지만 해도.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은 허상이란 걸 알았다. 힘이란 어느 곳에도 존재했었고, 그가 지녔다는 힘은 아
무런 도움의 되어주지 않았다.
?후욱! 후욱!?
군가휘는 마침내 아미의 비전이라는 난피풍검법을 펼치기로 했다. 아직 완전히 소화해 내지는 못한
검식이라 시전을 주저했던 검식.
그러나 저 냉정한 사선을 돌파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펼쳐 보이리라.
찬연한 금광과 함게 군가휘의 장삼이 펄럭펄럭 뒤놀고, 그의 마음 또한 굳건해졌다. 비록 여기서 패
하더라도 할 만큼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스르릉-
그가 검을 천천히 중극으로 이동시키자 비단처럼 펼쳐지는 검적의 gis란함에 북궁단야 역시 지금가지
의 여유를 버렸다.
이름까지는 몰라도 지금 펼쳐지는 검법은 위력을 떠나 그 변화만으로도 일절이라 칭할 수 있었다.
그,렇게 검적을 쫓던 북궁단야가 어느 시점에서 크게 검을 휘둘렀다.
챙!
쿠당당!
전력을 다했는지 이번에는 군가휘가 나뒹굴었다. 그는 변화를 쫓아 몸과 마음을 날렸고, 그 결과는 매
우 훌륭했기에 북궁단야로서도 힘을 제어할 수 없었다.
?아번은 괜찮았다.?
패배한 후 적에게 듣는 칭찬. 과연 칭찬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게 다요.?
주저앉아 허탈하게 웃던 군가휘가 칼을 내동댕이쳤다.
허무했다. 이십구 년을 살아오면서 오늘처럼 자신이 무력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거늘.
?이제 모든 게 끝이로군.?
툴툴 웃는 그를 냉정하게 바라보던 북궁단야가 칼을 갈무리하고 몸을 돌렸다.
무인이 꿈을 접든, 자살을 하든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북궁단야는 단지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
(天外天)을 보여준 것이다.
단초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할 이우가 그것이다.
이래야 복룡표국이 안전할 테니까. 이래야만 복룔표국의 위상이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
?내가 없더라도......?
그가 걸음을 옮기는데 군가휘가 힘없이 물었다.
?한성 북궁단야, 맞소??
우뚝.
걸음을 멈춘 그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군가휘의 뜻 모를 중얼거림에 북궁단야의 검미가 치켜 올라갔다.
과연이라니?
그의 의문을 짐작했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군가휘가 입을 열었다.
?맹에서 청해복룡표국을 폐쇄시킨 이유는 물론 이 국주와 비천혈서의 상관 관계도 있지만 표국의 실
질적인 힘이라고 불리는 실회조, 그들 가운데에서도 강호삼성을 떠보는 것이었소.?
?떠본다??
?그렇소. 맹의 원로들은 강호삼성의 정확한 색을 아직 모른느 듯 했고, 지닌 바 힘을 파악하고자 하
는 느낌이었소. 더 솔직히 말해......?
잠시 숨을 고른 그가 툭 뱉듯 말을 맺었다.
?확실히 편을 가르려는 의도였던 것 같소.?
?타초경사(打草驚蛇)??
이 말대로라면 무림맹의 원로들은 강호삼성이라 불리는 세 청년을 두려워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복룡
표국을 건드려 이들을 깨웠다는 말인데.
편을 갈랐다는 건?
?무림맹, 무서운 곳이로군.?
이들 세 명을 그토록 두려워했다면 이 정도의 전력가지고는 어림도 없다는 걸 충분히 인지학 있었을
무림맹이다.
복룡표국에는 세 청년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런데도 이들만 보냈다는 얘기는 그들의 결정에 승복하지 않았을 경우, 제압의 목적이 아니라 반란
을 조장했다는 것 아닌가.
그렇게 된다면 무림첩의 명분도 명분이려니와 무림맹은 상처 입은 제왕으로 만인의 동정을 사게 되고,
강호삼성은 그야말로 죄질이 무거운 무림공적으로 전략해 버리는, 그런 치밀한 각본이 이번 무림첩의
발동에 숨어 있었다는 얘기인데.
?자신들의 제자와 기동 타격대까지 버릴 정도였다는 건가??
그정도로 강호삼성이 무서웠을까? 그건 말이 안 된다. 무림맹은 그런 약골의 모임이 아니다. 그들은
삼성의 힘이 아닌 다른 무엇을 겁내고 있다.
북궁단야는 자신의 행적을 돌아보았다. 북경에서 하남으로의 여로, 그리고 사천.
그들의 싸움은 크게 두 번, 아니, 세 번, 아니, 네 번, 아니...
육천염을 상대했던 무룡숙에서의 일전, 당문을 지키기 위해 사방신을 비롯한 십장생의 일인인 건암이
라는 자를 상대한 게 두 번째의 싸움.
하운과 북궁단야의 싸움은 그게 다였다.
그 어디에도 무림맹을 위협할 만한 일은 없었다.
?이런!?
장추삼...
하남의 소림사에서 혈전이야 보기 좋게 깨졌다고 들었다. 또한 지청완이 나서서 무마되었고.
그리고 무당!
오송과 싸움은 문제가 아니다. 북궁단야 자신이 직접 보았기에 잘 아는 바대로 좋은 분위기에서 끝맺
은 일이고, 문제될 만한 것은 없었다.
전혀.
?전혀??
그리고 무당 장문과의 독대!
?그것이로군!?
무슨 얘기가 어떻게 오갔는지 아직도 함구하고 있지만 그것이야말로 무림맹에서 강호삼성을 주시하는
이유일 터였다.
한쪽에서 청년 하나의 귀를 질질 끌고 오는 장추삼이 보였다. 그는 철무웅과 가액의 열 배가 어쩌고
하고 있었는데 천진한 미소를 보자니 어떤 음모의 그림자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녀석이 비천혈서에 관해 말을 했을 거라는 건 짐작하겠지만 과연 그것 때문에 이들까지 버려가며 우
리의 의중을 떠야만 하는 건가??
얼굴을 굳힌 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뭔가 모르는 일이 더 있다. 뭔가 숨겨진 것이 더 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기에 북궁단
야의 눈은 시유하게 깊어갔다.
한쪽에서는 여전히 가액의 열 배에 관한 토론이 한창이었다. 장추삼과 철무웅의 호탕한 웃음소리는
복룡표국에 드리웠던 암운이 걷힘을 알리는 신효였으나 북궁단야의 이마에 걸린 주름을 펴지는 못했다.
비천혈서... 아직 풀리지 않은 무엇이 있다.
그게 모든 일의 해답일지도.
삼류무사 259
지청완의 과거
강호에 불어닥친 충격적인 소문에 모든 무인이 술렁였다.
무림맹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강호삼성을 보유한 복룡표국은 알개 표국의 위치에서 무림을 움직이
는 거대한 핵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사건.
무림맹에서 화산파를 제외하고 독단적으로 무림첩을 발동시키려다 미수에 그쳤다.
이 일은 강호인들로 하여금 무림맹을 항의 방문하게 만들 정도로 큰 반응을 일으켰다.
강호의 영원한 지주였던 무림맹, 그들의 불합리한 실력행사에 당연히 무림인들은 분노했고, 한탄했으
며, 배신감까지 느낀 것이다.
무림맹에서는 부랴부랴 사과 성명을 발표했으나 사건의 피해자인 화산은 아직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
어 그 진위에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첫 번째의 소문.
이번 무림맹의 행사를 막은 것은 강호삼성 가운데 유성 하운으로, 그는 화산의 대사형이었다!
왜 그가 산문에서 나와 표사로 일을 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으나 하운은 표국에 틀어박혀 나오
지 않았다. 화산 역시 일체의 설명이 없었고,
두 번째 소문.
무림맹 최강의 무투 조직이라는 철갑기마대 오십 명 전원이 강호삼성 가운데 괴성 장추삼의 일권을
받아내지 못했으며, 팔파공동문하의 둘도 한성과 유성에게 일패도지당했다!
이는 많이 과장되었지만 그렇게 나버린 소문이고 철갑기마부대주 고동규가 그렇게 시인했기에 강호삼
성의 위상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물론 복룡푝구은 위기에서 기사회생했음은 물론이고, 모든 무림인의 선망 어린 눈길을 받았다. 항간
에는 표사 직을 희망하는 무림인이 부쩍 늘었다는데 이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단 하나의 사건이 불러온 두 가지의 소문.
강호는 바야흐로 크게 요동첬고 어딘지 모를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결과는
아닐진대 마치 그렇게 돼야 하는 것처럼 무림이라는 거대한 숲은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 * *
?꼭 그래야만 하겠으냐??
?예.?
냉엄한 질문에 우렁우렁한 대답이 뒤를 받았다.
?지금 같은 시기에 꼭 그래야만 하겠느냔 말이다.?
?사형께서 뭐라고 말씀하셔도 제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맥천은 물끄러미 광목을 바라보았다. 그의 사제는 돌처럼 단단하게 제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너도 알겠지만 혈서까지 도난당했다. 물론 범인이 누군지는 짐작하고 있으나 이만큼은 우리의 위치
가 위협받고 있다.?
?.......?
대답없는 광목에게서 눈을 돌린 맥천이 수백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흑월회에 침입자가 든 건 십오 일전, 공교롭게도 그날은 모두가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회를 지키던
무사들은 침입자를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우리의 맹서를 잊어버린 게냐? 너게 있어 그렇게 값어치가 없었던 게냐??
?값어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쯤은 사형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저 이대로는, 이런 마음으로는
무얼 해도 저를 속이는 일일 뿐이라는 겁니다.?
탁자에 얹은 손을 꾹 쥔 맥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칼날같이 날카로운 눈매에 옅은 주름이 맺혀T지
만 그는 애써 냉정을 가장하고 창가에 놓인 작은 분재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무엇이 너를 회의하게 만들었느냐??
물뿌리개로 화분들을 돌보며 지나가는 투로 맥천이 묻자 광목이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송구스럽지만.......?
?편안하게 말해라.?
수백의 도움에 힘을 얻었는지 광목이 부리부리한 눈을 자신의 두 주먹에 고정시키고 숨 호흡을 한 후
입을 열었다.
"저의들은 무조건적으로 사형들을 믿었습니다. 고아였던 신세를 거두어주셨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사형들은 그저 저희에게 태양과도 같았고, 길잡이였으며, 미래였습니다.?
광목의 입가에 한줄기 미소가 어렸다.
?그때는 아무런 의심이 없었지요. 저희는 사형들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됐고, 들으라는 것만 들어도
행복했으며, 보라는 것만 보아도 즐거웠습니다.?
그이 회상에 맥천도 과거로의 여행을 떠났다.
그때는 정말 그랬었다. 아무런 의심이 없었던 시절. 그들은 비록 음지에 있었으나 드러난 태양보다
자유로웠으며, 언젠가는 태양을 안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맹서도 찬란했던 겁니다. 모두의 마음이 하나였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하나가 아니라는 말이냐? 형제들을 잃었다는 것 때문에??
챙!
물뿌리개가 깨지며 맥손의 손을 타고 물줄기가 쏟아졌다.
?형제들을 잃어서... 그게 어떻게 사형들의 책임이겠습니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일이겠지요.?
?그럼 뭐가 문제라는 말이냐??
손바닥에 박힌 파편을 빼지도 않고 맥천이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엔 처연한 무엇이 흘렀으나 그건
나타날 때보다 빨리 사라졌다.
?제가 왜 싸워야 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음??
맥천이 움찔 몸을 굳힐 때 광목이 두 주먹을 들어 올려 툭툭 부딪쳤다.
?만약 키워주고, 가르쳐 주신 보답으로 사우라고 명하신다면 얼마든지 싸울 용의가 있습니다.용병처
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형제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최소한 싸워야 하는 이유정도는 서로가 공유를
해야 할 텐데... 과연 그랬습니까??
그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마른침만 삼키던 맥천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유라.......?
어쩌면 광목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위의 네 형제들이 젊어진 무게를 아래 동생들과 나누었으면서도
넷은 결코 설명을 하지않았다.
대사형의 배신 때문에? 그건 아니었다.
?어느새 우리들은 서로를 가르고 있었던 건가??
노태상을 모셨던 위의 항렬들과 대면한 적 없는 아랫동생들은 알게 모르게 선을 그어놓고 따로 놀고
있었던 건 아닐까?
?만약 내가 보내주지않겠다면 어쩌겠느냐??
?물론 가만히 있을 겁니다. 제 목숨은 사형들이 구해주신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하지만 정희는 더 이
상 형제가 아닐 겁니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말을 하던 이도, 말을 듣던 이도 모두 침묵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들었다.
?그래, 어디로 갈 셈이냐??
문득 던져진 수백의 질문.
?정해진 곳은 없습니다. 다만 뭐든 정리가 된다면 반드시 사형들게 돌아오겠다는 정도입니다.?
?돌아오겠다.......?
말을 끌던 맥천이 손을 내저었다. 이만 나가보라는 소리.
?감사합니다!?
땅에 구멍이 파일 정도로 머리를 박은 광목이 벌떡 일어섰다.
?교교도 함게 떠나다고 했느냐??
?예. 녀석은 학을 뒤어넘어야만 얼굴을 들 수 있을 거라 말했습니다. 사실은 학의 체취가 배어 있는
이곳을 견디지 못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백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저렇게 마음을 굳혔는데.
문가로 걸음을 옮기던 광목이 문득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죄송... 합니다.......?
그러나 두 사내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양 그대로 앉아 있었다.
광목이 문을 닫고 나가자 까지 낀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던 맥천이 허허롭게 웃었다, 정말로 허허롭
게.
?처음으로 돌아가는구나.?
?그렇군여, 사형.?
수백 역시 투명한 웃음으로 맥천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었다.
?나름대로 녀석들에게 잘해줬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것저것 요구했나 보다. 그러려고
데레다 기른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사형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수백의 말에 잠시 생각에 빠졌던 맥천이 뜻 모를 소리를 토했다.
?만약 그가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붕괴되었을까??
?사형!?
수백이 자르고 들어오자 맥천의 상념은 거기에서 그쳤다.
?그래, 모두 부질없는 가정이지.?
바람은 바람에서 그친다. 상상은 현실이 아니기에 상상으로 남는 것이다.
?복룡표국은 그렇게 정리가 되었다는 건가??
갑자기 사무적으로 변한 맥천이기에 수백은 조금 안도했고, 조금 안쓰러웠다. 저헝게라도 스스로를
다잡지 않으면 안 되는 사형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애당초 무림첩은 무리였던 거지요. 물론 화산이 암묵적인 동의를 했더라면 몰라도, 한
마디로 그들은 수를 잘못 읽은 겁니다.?
?이해가 안 돼. 무림맹에서 그런 무리수를 둘 필요가 있었나??
?글쎄요......?.
맥천과 수백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
왜? 왜 그런 발상을 한 걸까? 그리고 누구의 재가가 떨어졌다는 건가?
?진행하는 일은 잘되고 있고??
?그야 오사제가 알아서 할 일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그 일은 우리의 생각도 아니었고.?
그들의 생각이 아니었다면?
?아래 사제들의 불만도 일견 이해할 수 있어. 나 역시도 노태상께서 어떤 생가을 하고 계시는지 알도
리가 없다.?
?음.......?
수백이 낮은 침음성을 흘렀다.
처음의 맹서. 그러나 이제 서서히 희석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들은 돌아갈 곳이 없고, 돌아
가 봐야 반길 이도 없었다.
그래서 앞으로 가야 한다. 비록 그곳이 파멸로 가는 입구라 할지라도.
* * *
모든 일이 정리된 복룡표국은 다시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으나 이효의 건강이 나빠진 관계로 모든 일
은 집사 오조영과 집법당주 철무웅이 맡아서 운영했다.
이번 일로 표국이 이상한 유명세를 탄터라 들어오는 표물은 늘었는데 표행을 나설 이는 그 인원 그대
로였다.
물론 표사들을 더 뽑아야겠지만 국주가 자리보전을 하고 있는 마당에 그런 큰일을 마음대로 벌일 수
는 없었다. 해서 두사람의 머리는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거기 뭐하는 건가! 그렇게 굼떠서야 언제 표물을 싣고, 언제 표행을 나서겠다는 거야!?
?이 표물은 가액이 무려 백이십 냥 짜릴세. 행여 부딪치기거나 구르기라도 하는 날이면 큰일이 나니
부디 조심, 또 조심해야 하네.?
철무웅의 관록과 오조영의 꼼꼼함이 어우러져 둘은 이효의 공백을 효과적으로 메웠지만 표사들의 거
정스러운 눈망울에서 근심을 걷어줄 수는 없었다.
복룡표국의 상징은 실회조였지만 복룡표국의 정신은 이효였고, 그가 없는 표국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
으니까.
짐을 싣는 쟁자수들도, 병장기를 손질하는 표사들도 모두 한마음으로 이효의 쾌유를 빌었다.
* * *
장추삼도, 하운도, 북궁단야까지도 이효가 당한 점혈을 풀 길이 없었다.
고담의 말대로 단심주라는 점혈법은 점혈 상태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흔적을 남기지 않았기에 당연히
해혈법 같은 것을 찾기 어려웠다.
?이거 어떻게 하지!?
이효의 방에 둘러앉은 세 청년 가운데 장추삼이 씨근덕거렸다.
?도저히... 알 길이 없구려.?
하운이 고개를 저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정심한 내력을 지닌 그도 모른다면 누가 해혈법을 알겠는가.
?점혈지는 알겠지.?
북궁단야가 잘라 말했다. 지극히 원론족인 말이었지만 이는 가장 타당한 얘기로 시선자가 해혈법을
아는 것은 무림의 상례다.
문제는...
?그놈을 어디서 찾느냔 말이지!?
장추삼이 탁자를 내려쳤다. 그때 사슴여자를 붙잡았더라며 뭔가 나왔을지도 모를텐데.
표국의 일이 끝나자마자 암루에 들이닥친 장추삼들은 녹미랑이 며칠 전에 종적을 감췄다는 말만 듣고
쓸쓸히 물러나야 했다.
녹미랑을 십장생의 일원이라고 가정한다면 이곳 청빈로에 십장생의 일원이 적어도 둘 이상 암약했었
다는 얘기. 그렇다면 언제부터였다는 건가.
하운이 고개를 젖혔다.
?운조!?
화산의 정신이자 그가 존경하던 치무환검존을 불귀의 객으로 안내한 무인. 그리고 이제는 표국주의
혈도를 짚어 복룡표국을 흔드는 인물.
꼭 한 번 만나야 할 사내다. 만나서 그 잘난 무학을 견식해야겠다.
장추삼도 운조라는 이름에 이를 갈았다. 뭐, 너무나 당연한 말이겠지만.
북궁단야는 이들과 달랐다. 이효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그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운조를 보고 싶었다. 국
주쯤 되는 사람을 이 지경까지 밀어 넣은 가공할 무학의 실체를 받아보고 싶었다.
동상이몽(同床異夢).
이러쿵저러쿵 떠들고 있지만 그들의 눈은 이효의 수척한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대로라면
며칠을 버티지 못할 터였다.
드르륵.
문이 열리며 민경추가 탕제를 들고 들어왔다.
?아직도 계시군요.?
세 청년이 급히 일어섰다.
?밤이 늦었는데... 이만들 들어가서 쉬세요. 이제부터는 제가 지킬테니.?
그녀는 아들같은 청년들을 그윽하게 바라부며 미소 지었다. 자식을 낳지 못해서일까? 민경추에게 세 청
년은 그만큼 각별했다.
그들이 물러갈 때까지 자리에 서 있던 그녀가 장추삼을 마지막으로 문이 닫히자 의식을 잃은 부군을
바라보며 참았던 눈물을 토해냈다.
?이대로 쓰러져서는 안 됩니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최악을 딛고 일어서지
않았습니까. 제발 이대로 무너지지 마세요.?
흐느끼며 부군에게 머리를 묻은 그녀가 문득 탕제 쪽으로 눈을 돌렸다.
?휴우...나까지 이러면 안되지.?
눈물을 소매로 훔치고 민경추가 탕제에 손을 가져가려는 순간 홀연히 불어오는 미풍에 그대로 정신을
놓았다.
스르륵.
꺼지듯 나타난 신형 하나.
그는 한참 동안 이효를 바라보더니 나직막이 한숨을 쉬었다.
?네가 나 때문에 이런 곤욕을 치르는구나.?
위엄과 관록이 묻어있는 목소리. 이런 음성은 흔치않다. 만인의 위에 서본 인물만이 가지는 자연스러
운 권위라고 할까?
이효의 소매를 걷어 진맥을 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간단한 추궁과혈을 가했다.
?으음.......?
혼절에서 눈을 뜬 이효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영상을 잡으려 미간에 내천 자를 그렸고, 그는 곧 자리에
서 일어서려고 버둥거렸다.
?노, 노야!?
?미안하구나. 네게는 정말로 미안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억지로 상체를 세우려는 이효를 다시 눕히며 지청완이 고개를 숙였다.
이 점혈에 걸렸다면 죽을 만큼 괴로웠을 텐데 그는 내색조차 하지않고 일어서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지청완은 이효에게 계속적으로 추궁과혈을 베풀며 탄식처럼 말을 이었다.
?예상대로 네가 당한 점혈법은 만상혈(萬象穴)이다. 누가 이것에 단심주리는 끔찍한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지만 이건 만상혈이야.?
?그걸 어찌......??
?왜 모르겠느냐, 이걸 창안한 분이 나의 둘째 사형이셨거늘.?
지청완의 이사형. 무림맹주 만승검존의 둘째 사형에 관한 얘기가 처음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분은 무공의 기본을 일체의 깨달음에 근거한다고 보셨지. 그래서 인간의 무학은 정신 세계의 산물
이라고 여기어 내면을 두드리는 소리에 집착하셨다.......?
지청완의 둘째 사형은 고도의 깨달음만이 무학의 극을 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잡티 하나 없는 마음
으로 받아들인 돈오의 소리가 진정한 길을 열어주리라 믿었다는 거다.
?하지만 대사형의 생각은 달랐지. 그분은 무학이란 것 자체가 인간의 몸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니 무
공의 기본은 사림의 신체를 얼마나 완벽하게 단련시키느냐에 달렸다고 여기셨다.?
지청완의 첫째 사형. 그의 생강은 둘째와 다르게 내면적인 것보다 외면적으로 드러난 인간의 몸 자체
에 관심을 두었고, 인간의 수련 여하에 따라 무학의 완성을 추구하리라 믿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두 분의 사이가 안 좋았던 건 아니다. 그저 보는 바가 달랐을뿐. 문제는 두 분의 관점이
너무나도 달랐기에 작은 합의점조차 도출하지 못했다는 거다.?
정신과 육체를 강조했던 둘은 무학을 익히는 시점에서까지 대립을 보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정신을 추구했던 쪽에서는 무학의 기본 틀이 완전히 서 있는 사람에게서 내면의 소
리를 들을 기회가 많다고 보았다.
반면 육체를 추구했던 쪽은 무학을 거의 배우지 않은, 그야말로 신체 건강한 일반인이 차라리 낫다고
여겼다.
어설프게 단련된 몸보다는 무학을 전혀 모르는 몸이 수련의 결과를 더 빨리 흡수할 것이고, 괜한 아
집을 부리지 않을거라 생각한 것이다.
?두 분의 대립은 끝이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토론은 날이 가고 해가 가도 그칠 줄을 몰랐지. 거러다
나온 결론이 각자의 방법대로 교육을 시켜보는 것이었고 그 결과물이 바로 나다.?
?예??
?허명뿐인 적미천존이지만 적미천존은 분명히 나의 내면에 있다.?
무슨 말일까? 적미천존이 만승검존이라는 건 자신이 해준 말이면서.
?후후... 놀랄 만도 하지. 그렇지만 알고 보면 간단하다. 만승검존은 적미천존 이후의 결과물이다.
즉, 적미천존으로서의 나는 대사형의 수련법에 따라 만들어진 무인이고, 만승검존으로서의 나는 이사형
의 수련법에 따라 생겨난 무인이지.?
열린 창문으로 먼 하느을 바라보던 지청완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나 나는 어느 하나도 완성하지 못했다. 대사형의 신체 활용술도 그럭저럭 이었고, 이사형의 공
심법 또한 완전히 익힐 수 없었다. 서글프지만 그것이 나의 한계였다.?
반쪽짜리 무인.
지청완의 회한은 이효에게 이어졌다.
?노야.......?
?그래서 네게 무학 몇 수를 가르쳤어도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은 거다. 반쪽짜리 무인이 무슨 제자를
받겠느냐.?
그렇게 마을 잇던 지청완이 어느 순간 이효의 상체를 세웠다.
?만상혈 역시 이사형의 작품이다. 인체에 존재 하나 절대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삼백육십여섯째의 혈
도, 시혈(時穴)을 짚음으로 시전자라도 풀지 못하는 문제를 대사형에게 제시했던 거지.?
쿠르르-
지청완의 장포가 크게 부풀었다. 그는 전 공력을 끌어 모아 열 손가락으로 보냈다.
?시혈은 말 그대로 시시때때로 생겨났다 없어지는 혈도다. 어쩌면 혈도가 아닐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사형은 찾아냈고, 그것을 짚었었다.?
말을 하면서도 지청완은 이효의 몸을 계속해서 문질렀다.
?그 문제를 받아 든 대사형은 이틀을 고심하고 곧 해답을 찾았다. 거건 바로.......?
지청완의 눈이 번뜩이며 그의 손이 춤을 추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바박!
사람의 시력으로는 절대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비쾌한 움직임. 만약 천고의 동체 시력을 가진 이가 있
어 지청완의 손을 쫓는다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붉은 머리의 노인은 정확히 삼백육십다섯 차례 손가락을 놀렸다고.
마지막으로 인중을 찌른 그가 의자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그건 바로... 삼백육십다섯 개 혈을 동시에 열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시
혈 자체는 의미를 잃고 그 존재가 소멸되니까.?
삼백육십다섯 개 혈의 동시 타통(同時打通).
말이 쉬워 동시 타통이지, 어찌 인간의 몸으로 일시간에 삼백육십다섯 번이나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
단 말인가.
이효는 그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 운공에 빠져 있었다.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지청완이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닦고 진기를 돌려보았다.
?역시!?
아무리 신체 활용이 극대화되었다고 해도 순간적으로 그만한 힘을 쏟으면 당연히 후유증이 남는 법.
거기다 이 수법은 삼백육십다섯 차례의 지력이 모두 동일해야 효과를 발휘한다.
그렇기에 모든 공력을 쏟아 부어야 하고 내력의 칠 할 이상은 당분간 회복하기 어렵다.
당분간... 이말은 하루가 될 수도 있고, 한 달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얼마나 지났을까. 삼매경에 빠져있던 이효가 번쩍 눈을 떳다. 그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지청완이
희미하게 웃자 그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노야! 저 때문에 이런 고생을!?
?아니다. 너야말로 나 때문에 이런 곤욕을 치렀구나.?
만상혈을 알고 있는 사람은 강호를 통틀어도 열 사람이 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청완이 우려했던 일
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만상혈일까?
짐작이 가지 않는 바가 아니었으나 지청완은 내색하지 않았다. 이제 겨우 기운을 차려가는 이효이기
에 괜한 말로 걱정을 안겨줄 수는 없었다.
?이제 됐다. 편히 쉬거라. 내일 아침이면 그럭저럭 거동할 만해질 것이다.?
힘겹게 일어서는 지청완의 앞에 이효가 넙죽 엎드렸다.
?노야, 제 평생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지청완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지금 이효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을 했고, 그렇기에 가슴이 저려
왔다.
?제가 비록 모자라고 한심한 놈이란 건 잘 압니다. 하나 노야께서 거두어주신다면 평생을 영광으로
삼아 정진하겠습니다.?
그들이 만난 지 어언 십팔년.
크고 작은 일들을 겪으며 서로에게 의지했지만 그 누구도 먼저 꺼내지 않았던 얘기.
?너는 십팔 년 전부터 나의 제자였다, 효야.?
?노야!?
?허허허... 노야가 아니지 않느냐??
이효가 격동 어린 눈으로 지청완을 올려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구배지레르르 올랴T다.
오십이 넘은 제자를 받는 황혼의 끝 자락 사부.
그들의 의식을 지킨 이는 달빛 한 점이 전부였다. 그래도 두 사람은 더없이 행복했다. 십팔년이나 끌
어온 일이 이제 해소되니 아니 기쁘겠는가.
그래서일까. 창문으로 그들을 엿보던 달님이었는데 어느새 구름 속으로 몸을 숨겼다. 두사람만의 자
리를 마련해 주려는 듯 한동안 모습을 감췄던 달은 아홉 번의 절이 끝나고 지청완이 이효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창가에서 무심한 바람이 잠시 머물다 사라졌다. 두 사제의 말없는 오한(오한)의 시간은 그렇게 무르
익었고 시간은 무시;a하게 흘러가며 기??? 꺼리를 남겼다.
탄식이라는 이름의.
* * *
수풀을 헤치고 나오며 지청완이 맑은 가을 달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이효의 집무전에서 담을 넘지 않
고 유일하게 외부로 연결되는 야산으로 지청완과 이효가 자주 이용하는 통로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가??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만상혈을 사용했다면 둘 중 하나일테고, 그 가운데 한 가지의 가정이 맞다면
무림은 커다란 회오리에 빠질 터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청완은 문득 심술궂은 사질을 그려보았다. 대사형의 마지막이자 가장 완벽한 작품.
그런데 성격까지 영판 닮았으니.
?허허.......?
왠지 즐거웠다.
?즐겁소??
쿵!
놀란 그가 고개를 돌리자 삼 장(三丈)밖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수풀에 가려 얼굴이 잘 드러나지 않
았으나 그의 존재감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누구냐??
그러나 지청완이 누군가? 무림맹주 만승검존이 아니던가!
그의 일갈에 풀잎들이 파르륵 떨렸다. 일부러 내공을 실었기에 청자의 간담이 서늘해질 터.
?그렇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내가 누군지 곧 알게 될 거요.?
지청완은 목소리를 흘려들은 듯 사내가 여유롭게 웃었다.
?나서라고 했다!?
이번에는 천지가 울릴 정도로 크고도 위맹한 외침이었다. 일컬어 사자후(獅子吼)라고 했던가.
?허허, 무림맹주 만승검존의 부름이니 어찌 거역할 수 있을까??
사내가 수풀을 헤치며 천천히 걸어왔다.
?오랜만입니다.?
달빛을 받아 서서히 드러나는 그의 얼굴을 보던 지청완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만상혈은 네 소행이었느냐??
?만상혈은 모르겠고, 단심주는 제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역시...
지청완은 마음이 무거웠다. 만상혈을 시전한 이유가 자신을 부르기 위한 덫이었다면 그가 어떤 행동
을 취할지까지 계산해 놓았다는 얘기다.
단심주의 해혈, 그 결과를 알았더라면...
?대단하군. 원래 머리가 좋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까지인 줄은 미처 몰랐다.?
?그리 높게 평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만 이건 제생각이 아닙니다.?
?뭐라고??
지청완의 놀람이 재미있는지 싱긋 미소 지은 사내가 살짝 입을 열었다.
?그분의 작품입니다.?
?으음.......?
우려했던 가장 나쁜 결과. 지청완의 한숨에 사내가 몸을 돌렸다.
?뭐, 피장파장이지요.?
?무슨 말이냐??
사내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회에서 석 장의 혈서를 탈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날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벌일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요.?
?으음......?.?
변명은 무의미하다. 뻔히 알고 들어오는데 뭐라고 할 것인가?
지청완의 굳은 얼굴을 무감정하게 바라보던 사내가 빙글 몸을 돌렸다. 너무 자신만만하여 현 무림맹
주는 흡사 자신이 허깨비가 되어버린 느낌었다.
?자, 가시지요. 그분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딜 간단 말인가??
?가보시면 압니다. 삼십 년 만의 해후라고 단정하실 필요는 없으니 이대로 가시면 됩니다.?
?후후후.......?
낮은 목소리로 웃던 지청완이 발을 한 번 굴렸다.
쾅!
우르르...
그가 디딘 곳엔 꽤나 커다란 웅덩이가 파였고, 따거죽마저 조금 갈라졌다.
?내 비록 다소의 공력이 손실되었다고 하나 이대로 끌려갈 성싶으냐??
하나 사내는 움푹 패인 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실소를 머금었다. 너무나도 차가워서 그대로 얼어붙
어 버릴 듯한 빙소(氷笑)를.
"고작 이 정도로 저를 겁주시려는 겁니까??
너무나 여유로운 사내의 태도에 지청완이 얼굴을 굳혔다.
이건 허세가 아니다. 힘을 지니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일종의 권리처럼 느껴졌기에 늙은 무림맹주는
마른 침을 삼켜야 했다.
그렇지만 그에게도 기백은 있다. 꺾이지 않는 신념이 있단 말이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
쿠쿠쿠-
진기를 모으자 지청완의 전신에 옅은 서기가 어렸다.
?오, 마지막까지 해보겠다는 거요??
사내가 뒷짐을 진 채로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쾅!
지청완이 불러일으킨 서기의 정가운데를 사내의 암영기가 두드렸다.
?크윽!?
이를 악물고 버텼으나 미친 듯이 뒤노는 기혈을 억제하지 못하고 지청완의 신형이 흔들렸다.
?이제 알겠습니까??
?이놈!?
그의 호통에 사내가 다시 한 번 턱짓을 하자 또 한 번의 충격이 지청완을 엄습했다.
쾅!
?커억!?
마침내 지청완의 입이 벌어지며 피분수가 솟구쳤다.
?이제는 아시겠소??
?나, 난 아직.......?
?공력의 삼 분지 이 이상을 허분한 몸으로 어찌 제 상대가 되겠습니까? 사실대로 말하자면 온전한 상
태에서도 저를 감당하기 어려울 판인데.?
?건방진 놈!?
?이런이런!?
비틀거리면서도 이를 악물고 버텨내는 지청완을 딱하다는 얼굴로 응시하던 사내가 고개를 한 번 젓고
장심에 힘을 모았다.
?정녕 끌고 가야겠습니까??
으득-
이를 갈아붙였으나 그건 아니 한만 못한 반항이었다. 사내는 이ㅃ라빠진 사자를 어르는 조련사처럼
때론 날카롭게, 때론 부드럽게 채찍을 휘둘렀다.
힘과 정신의 채찍을.
?어서 결정하시오. 맨 정신으로 걸어갈지, 아니면 개처럼 끌려갈지를.?
?네놈에게 이런 수모를 당하느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는 편을 택하겠다!?
?허허허.......?
세울 발톱도 없는데 여전히 으르렁거리는 지청완에게 측은한 얼굴로 뭐라 하려던 사내가 곧 입을 닫
고 손을 들어 올렸다.
어차피 말로 들을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
?자신의 처지가 늘 그때라고 생각하면 곤란하오, 삼공자.?
차가운 한마디와 함게 그가 손을 흩뿌리려 했다.
이때...
?그 손이 움직이는 순간 어깨부터 날아갈 것이다.?
?음??
이토록 차가운 음성도 있을까?
사내는 자신보다 더욱 차분하고, 더욱 투명한 울림의 목소리를 지닌 남자가 있음을 처음으로 알았다.
?누구냐??
?당신이 운조인가??
달빛을 밟으며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청년이 되물었다. 그이 긴 머리는 밤바람에 휘말려 마치 폭풍
후에 몸을 맡긴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누구냐고 물었다!?
뜻밖의 방해자에게 이빨을 곤두세운 운조가 사납게 울부짖었다. 여태까지의 여유는 어디로 갔는지 그
의 외침은 진한 피 내음을 흩뿌렸다.
?나는... 북궁단야라 한다.?
<11권 끝>
첫댓글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