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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무사 12권
삼류무사 260 고독(孤獨)
고독(孤獨)
장발청년의 어투는 무척이나 특이했다. 자신의 이름을 언급함이 분
명한데 뭔가 지극히 관조적인 느낌이라 생면부지의 타인에 대해 얘기
하는 듯했다.
"북궁단야.. 라........"
그 말을 받은 사내의 반응 역시 특이했다. 북궁단야라는 이름의 무
게는 현 무림에서 결코 무시하지 못할 아니, 매우 각별한 위치에 있다.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위험스러운 삼성의 일원.
그 차가움으로 폭염마저 얼려 버린다는 한성일진대 그에게는 그리 부
담스럽지는 않았나 보다.
"아, 여기가 호북이었지."
"복룡표국의 터전이기도 하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둘의 대화는 지극히 건조했다.
북궁단야의 차가운 눈망울을 물그러미 바라보던 사내가 문득 재미있
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이 손을 쳐내면 어깻죽지를 베어버린다고 했
나?"
피식.
그의 말에 북궁단야가 짧은 조소를 흘렸다.
"실험해 보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아니, 아니."
고개를 두어 번 저은 사내가 얄궂은 미소로 차가운 응대를 슬쩍 비
꼈다.
"나 같은 졸부에게 하늘 같은 강호삼성의 위명을 의심할 만한 담량
은 없네. 다만...."
다소 작위적이던 사내의 표정이 한순간 가을 달만큼이나 스산해졌
다.
"무림맹주의 목숨 값으로 팔 하나라면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
라는 생각이 드는군."
우뚝.
걸음을 멈춘 북궁단야가 눈썹을 쫑긋 모았다.
녹록치 않은 상대다. 쥐고 있는 칼자루의 힘을 십분 활용하는 지혜
나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도 한 점 흔들림 없는 태도까지.
그러나 북궁단야도 침착하기로 따진다면 누구에게 꿀릴 사람이 아
니다. 불리하고 위태로운 상황이지만 그의 평정심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모든 일에는 결과가 있다."
그의 뜬구름 잡는 말에 사내의 얼굴이 굳었다. 어느 정도의 동요를
기대했거늘 이 청년은 너무도 담담하지 않은가, 마치 꽁꽁 얼어붙은 시
냇물처럼.
"그게 최선이든 최악이든 받아들어야겠지."
저벅.
멈췄던 걸음을 옮기며 청년이 고개를 살짝 치켜들었다. 만월을 받아
나부끼는 머리카락은 사신의 외투였고, 어깨에 매달리 채 소리없이 흔
들리는 거검은 염왕의 지팡이와도 같았다.
"세 발자국을 떼기 전까지 결정하라."
"허!"
그의 단순명료한 말에 사내가 탄식을 터뜨렸다.
해볼 테면 해봐.
못 알아들은 것도 아니다. 어떤 의미인지도 잘 알고 있다.
"한성(寒星)?'
역시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얼음장 같은 차가움으로 전신을 무장했다고 들었는데 이제 보니 빙
산의 밑바닥에는 화룡(火龍) 한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지 않은가.
저벅.
한 걸음째.
분위기로 지고 들어가긴 싫었지만 사내는 인정해야만 했다. 결코 이
청년을 범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저벅.
두 걸음째.
다가온 북궁단야를 보던 사내가 슬쩍 눈을 감았다.
저벅.
세 걸음째.
그리고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괜시리 눈을 감았던 사내가 흐릿한 가을바람 한 줌에 눈꺼풀을 조금
들어 올렸다.
"왜 그러고 있는 건가?"
세 발자국 떼면 뭔가를 보여주겠다더니, 하는 얼굴로 싱글거리는 사
내를 보던 북궁단야가 어깨를 한번 움찔 들어 올렸다.
"최악을 받아들인다고 했지, 바란다고는 하지 않았을 텐데?"
"하하하!"
멋지게 한 방 먹었군, 하며 손을 내린 사내가 문득 북궁단야를 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 사내는 일종의 도박을 한 셈이었다.
북궁단야가 말한 세 걸음은 서로 간에 최적의 공수가 가능한 거리였
고 두 걸음째에서 슬쩍 눈을 감은 이유는 의사 타진이었다.
강기공 위주의 무학을 지닌 사내였기에 북궁단야의 큰 칼이 지닌 장
점을 상쇄할 자신이 있었고, 아무리 최악의 결과를 각오했다고는 하나
지인의 상해를 목격한다면 단 한 치라도 틈을 보일 터였다.
사내에게 그 한 치 이상은 필요없었고.
그런데 북궁단야는 그냥 걸어온 거다. 말 그대로 말이다.
일견 쉬워 보이는 행동이지만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걸었기에 어지
간한 강심장들도 딛기 어려웠던 삼 보(三步).
"대단한 원군을 준비해 두셨구러."
사내의 빈정거림에 뭐든 대꾸하고 싶었지만 이대로 무릎을 꿇지 않
는 것도 최선이었기에 지청완은 그저 가쁜 숨을 내쉬었다.
특별히 대답을 바랐던 질문도 아니었다. 빈정거린 말에 무슨 의미를
두겠는가. 그래서 사내는 늙은 무림맹주에게 미련없이 눈길을 거두
었다.
일은 그의 의지와 무관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하지만 그렇다고 휩
쓸려 갈 수도 없는 노릇.
"빠질 수는 없겠나. 이 일에서 말이야."
"훗!"
사내의 말에 북궁단야가 코웃음 쳤다. 물론 빠지리라 기대하지도 않
았다. 이리도 쉽게 몰러서려면 애당초 나서지 않았을 거다.
적어도 사내가 보기에 북궁단야란 자는 그랬다.
"뭐든 확실한 것이 좋지."
사내가 몸을 반쯤 틀어 북궁단야에게 동의를 구했다. 무심히 가라앉
아 있던 북궁단야의 두 눈썹이 잔 경련과 함께 역팔자를 그렸다.
"확실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보이는데."
"맞아, 맞아!"
박장대소를 터뜨린 사내가 한결 기분이 좋아진 얼굴로 어깻죽지를
한번 흔들었다.
"전부 아니면 전무. 쉽게들 지껄이는데 의외로 야박하기 짝이 없는
얘기야. 정나미 떨어진단 말이지."
천천히 뇌까리는 사내의 얼굴에 한 꺼풀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북궁단야의 얼굴은 무심히 가라앉아 결코 떠오를 줄 몰랐다.
소슬바람 몇 줄기가 산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돌아다니자 가을 햇살
에도 굿꿋이 버티던 나뭇잎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서로의 몸을 바삐 탐
닉했다.
작은 비명성과 함께.
한가롭게 이들의 소란을 음미하던 사내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엄지
와 중지손가락을 부딪쳐 맑은 음향을 만들어냈다.
따악-
고승의 목탁 소리처럼 청아한 울림은 밤바람을 타고 온 산을 누볐
다.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묵묵히 그의 부산스러움을 지켜보던 장발의 청년이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 곧 고개를 저었다.
억지로 친할 필요 없다.
애써서 이해하려 할 필요 없다.
진심이 담겨 있지않은 위로는 던질 필요 없다.
'누구나 사정이란 게 있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 속사정을 일일이 헤아릴 만큼의 오지랖을 가진 북궁단야
도 아니다.
이럴 땐 그저 외면하는 것이 최선이다.
"아, 지루했나?"
집 앞에 산책 나온 사람마냥 한가로이 사내가 묻자 북궁단야 역시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조금."
"그것 미안하게 됐군."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뭔가 중얼거리던 사내가
지청완을 쓱 쳐다보다 함숨을 토하며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렸다.
"왜 그리들 힘들게 사는 건지."
".........?"
무림맹주의 의아한 시선을 뒤로하고 사내가 불쑥 나서자 북궁단야
도 그때까지의 짧은 감상을 뒤로한 채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전무 아니면 전부인 놀이를."
이때 메마른 웃음소리가 둘의 대치를 가르고 들어왔다.
"이 친구, 자리를 맡겨뒀더니 아예 주인 행세를 하고 있지 않은가?"
둘의 시선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모아졌다.
바스락.
마른 나뭇잎을 밟으며 북궁단야만큼이나 키가 큰 사내가 휘적휘적
걸어왔다. 이고 있는 달빛에 눌려 벌릴 정도로 깡마른 몸집의 남자는
입가에 걸치고 있는 조소처럼 죽어버린 걸음거리로 둘에게 다가왔다.
뚝.
마지막 걸음을 멈춘 남자가 퀭한 눈으로 두 사람을 응시하자 묵묵히
지켜보던 사내의 얼굴에 쓴 고소가 피어났다.
비쩍 마른 체구, 무얼 바라보는지 알 수 없는 눈동자, 창백한 피부,
그리고 어정거리는 발걸음.
'저자는 마치.........'
괴담에서나 등장하는 강시 같지 않은가!
'아무튼 복룡표국이라는 곳, 갖가지 인간 군상들의 집합소라더니.'
홀연히 나타난 남자가 그저 강시의 외형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권태로운 눈을 보자니 어떤 과거를 지녔는지 몰라도양지의 인간
형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가만 보면 저 친구도 특이해.'
강시사내의 출현에 전의를 거두고 일체의 행동을 유보하는 북궁단야.
음지의 인간형은 분명 아닐진대 그렇다고 양광에 익숙한 도련님 또
한 아니니 머리좋은 그로서도 도시(都是) 정체를 분간하기 어렵다.
이들을 거느리고 있는 청해복룡표국주 이효.
호북 제일의 표국을 이끌고 있다는 화려한 외면의 뒤안길엔 누구도
마주 보기 어려운 아픔을 감추고 있던 인물. 그럼ㄴ서도 누구보다 강
한 의지로 세상과 맞서 싸우는 사람.
단 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톱니바퀴처럼 치밀한 사내의 가슴에 잠시
나마 뜻 모를 균열을 안겨주었던 존재가 바로 이효였다.
삼성의 일원이자 현기 어린 검식을 구사한다는 신비로운 청년 하운.
그가 당금 무림에서 최고의 성세를 구가한다는 화산의 대제자였을 줄
누가 알았을까.
그리고 장추삼.
장추삼.....
그를 떠올리자 사내는 머리가 다 아파왔다.
'이런, 너무 한가롭지 않은가.'
사내가 문득 제 머리를 툭 쳤다.
상황은 그의 의도를 완전히 비껴가고 있다. 복룡표국의 인적 구성에
대한 고찰이나 할 때가 아니란 말이다.
그 모습이 어쩐지 재미있었는지 강시의 입꼬리가 묘하게 뒤틀렸으
나 그건 나타날 때보다 빠르게 사라졌고, 곧 그의 입가엔 다른 의미의
곡선이 그려졌다.
"큭큭큭..."
치렁치렁한 머리를 손으로 천천히 걷어내며 강시와도 같은 인물이
툴툴 웃자 어쩐지 사내는 찜찜한 기분이 들어 윗니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건 아니지, 이건 아니야."
그의 이유없는 힐난은 북궁단야에게로 모아졌는데 사내로는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지만 당사자의 입장은 달랐나 보다.
"그렇습니까."
뭔가 미안해하는 대꾸임이 분명한데 북궁단야의 말투는 지극히 담
담했다. 그래서 강시는 기분이 좋아졌다.
"자리를 부탁한 기억은 있어도 사람까지 부탁한 적은 없었어. 안
그런가?"
"음?"
사내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일렁였다. 그러나 둘은 그런 반응 따윈
상관없다는 듯 여전한 표정으로 한담과도 같은 대화에 열중했다.
"어때, 내 말이 틀렸나?"
"후, 맞소이다!"
북궁단야의 짧은 한숨에 강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이나 기계적
으로.
"그럼 됐네. 자넨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여긴 어디까지나 내 몫이니
말이야."
그들의 말을 유심히 듣던 사내가 느닷없이 껄걸 웃음을 터뜨렸다.
"와하하하! 대단해, 역시 대단해!"
이런 웃음을 어디에 비교하면 좋으까? 굳이 대라면 반상(盤上)의 절
반 이상을 점하고 끝내기를 밟던 와중에 단 한 수로 판을 그르친 사람
의 허허로운 광소?
아무튼 그렇게 웃던 사내가 지청완을 힐끗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
었다.
" 내 삼공자에 대해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 인물을 그렇게까
지 오랜 시간 동안 내쳤다니. 정말 이해하기 어렵소이다. 정말이지 말
이야."
무슨 말일까.
"이만하면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았다는 고사(古事)보다도 기막
히지 않은가! 이효... 여기까지 염두에 두었다는 건가!"
사내의 추리는 정확했다. 이효는 처음부터 자신에게 가해진 점혈이
지청완을 불러들이기 위한 꼬임수라는 걸 짐작했었다.
점혈의 이름이나 유래 따위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사내의 행동 - 지
청완과의 관계를 캐묻는 것에서부터 압도적인 무력으로 단지 혈도만 짚
고 보낸 일까지 - 을 미루어보아 숨어 잇는 무림맹주에게 던질 낚싯밥
으로 자신이 선택되어졌음을 간파한 거다.
그래서 혼절에서 깨어나자마자 고담에게 내치(內治)를 부탁하고 적
괴와 기타의 실회조원들로 하여금 외치(外治), 즉 표국으로 통하는 산
길을 부탁했었다.
물론 실회조원 가운데 둘 이상이 같이하라는 명령과도 같은 부탁과
함께.
"이거야 원, 나름대로 그물을 던져 둔 어부라고 생각했거늘, 알고 보
니....."
킥킥 웃던 사내가 문득 강시에게 시선을 던졌다. 금방이라도 휘어져
버릴 것 같은 키에 염세적인 웃음을 징표처럼 달고 다니는 무인.
그리고 병장기를 소지하지 않았다 함은.
"유령장 적괴. 맞나?"
"어."
단순한 대답. 여전히 조소를 입에 그린 그대로 적괴가 되뇌었다.
"적괴 맞아."
자신의 이름을 음미하듯 가만히 서 있던 적괴가 슬적 몸을 돌렸다.
"운.조."
찌릿!
사내, 즉 운조의 가슴에 무형의 비수 하나가 박혔다.
그저 이름 한번 부른 정도인데.
'이것 봐라?'
적괴. 물론 대단한 무인이다.
강호에서 장법으로 천하를 오시한다는 열 명 가운데 한자리를 차
지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아무런 세력이나 기반없이 혈혈단신으로 음
모중중의 무림을 무려 십 년이 넘게 종횡했다는 것은 단지 무공이 강
한 인물 정도로 치부하기 여러운 무엇을 지녔다는 얘기다.
그렇다. 그 정도다.
그 정도의 무인이다. 적어도 운조가 보기에는.
그 정도로 강하고 대단한 것까지는 인정하겠지만 거기까지가 전부
다.
그런데....
'이건 뭐지?'
압박감? 적괴에게?
코웃음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어쩐지 운조는 눈썹을 모으고 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적괴가 맞다니까...운조."
뭔가를 재촉하듯 이름을 불러대는 적괴의 재촉에도 그는 여전히 생
각에 잠겨 있었다.
'저자, 단순한 침입자에의 적대감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뭔가가 있
다.'
한 토막, 한 토막씩 잘려 뱉어진 이름의 이면에 숨겨진 적의(敵意).
굳이 묻지 않더라도 밑바닥까지 전달되어지는 분노의 울림.
'그래 봐야.......'
적괴가 아니겠는가. 무림십장에서 중간 정도를 달린다는, 기껏해야
남궁가의 덜떨어진 검수 몇을 다그친, 그 정도뿐인 무인 아니겠는가.
그런데 압박감이라니. 강호의 찬란한 다섯 개의 별 가운데 하나를
떨어뜨린 자신이거늘.
"둘이라... 그것도 좋겠지."
문제는 적괴 쪽이 아닐 터었다. 달빛을 머금은 거검으로 묵묵히 자
리하는 장발청년, 한성 북궁단야야말로 그의 위험인자일 터였다.
하나 운조의 생각은 적괴의 한마디로 망상이 되어버렸다.
"하나지."
"하나?"
운조의 대꾸에 적괴가 툴툴거렸다.
"여기 당신과 나 말고 누가 또 있나?"
북궁단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느낌의 말 때
문은 물론 아니었다. 적괴는 북궁단야를 현 시점에서 완전히 배제시키
려 하고 있다.
배제? 이건 배제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제외였다. 철저한 격리.
'이토록 강렬한 집착의 이유가 무엇이오, 적 대협.'
"안 그런가, 북궁?"
"허...."
그의 탄식은 적괴에게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했나 보다.
"난 대답을 듣자고 물었지 자네의 감상 따위나 즐기려고 입을 열지
않았어."
"그렇지만 적 대협!"
"이봐, 북궁."
속삭이듯 적괴가 입을 열었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이고 싶을 때가 있다. 난 지금이 그런 경우야.
자네라면 이 정도의 고독쯤은 이해해 주리라 믿어. 안 그런가?"
'알 수 없지만........'
적괴는 지금 일생일대를 걸고 있다. 이런 사람에게 구구절절한 얘기
는 공염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관전까지 막지 않겠다면."
"결과에 따라 움직임을 달리하지 않겠다면."
"바란다면."
"와하하하!"
언제 적괴가 이런 웃음을 지어보았을까. 그 자신도 기억하기 어려운
오래전이었을까.
"이쪽은 대충 정리가 되었는데?"
"이쪽은 정리할 것도 없었네."
새삼스럽게 묻긴, 하려던 운조의 미간이 구겨졌다.
"설마?!"
"만약 동북쪽 그늘 숲에 은신하고 있던 형체를 말하는 거라면 그 설
마가 맞지. 나름대로 공을 들인 듯한데 불쌍하게도 말짱 허당이더군.
숨 호흡 하나 관리하지 못하면서 은신은 무슨 놈의 은신."
동북쪽이라면 마을로 통하는 얕은 산길. 숲이 울창하며 지대 또한
낮은지라 운조 역시 그리고 왔다. 그 말은 은신자 역시 마을에서 왔을
확률이 높다는 얘기다.
'실수다. 설마 하니 따라올 줄이야.'
그늘 숲과 이곳의 거리는 대략 사십여 장, 아무리 고수라도 은신을
파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순찰을 돌던 사람이라면 또 모르지만.
그런데 이상하다. 그가 아는 녹미랑이라면 호흡 때문에 은잠이 깨질
리가 없다. 은신술의 고하를 제쳐 두고라도 지닌 바 공력의 심후함을
가정해 볼 때 작정을 하고 숨은 그녀를 적괴가 발견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렇다고 다른 누구를 대입할 수 있을까?
"녹미랑?!"
불안했을까. 운조의 부르짖음은 그답지 않은 낮은 떨림을 수반했다.
"미랑!"
약간의 분노로,
"미이랑~!"
조금 더 큰 안타까움으로,
"미라앙~!"
사라락.
나뭇가지들의 마찰음 하나 없이 옷깃 소리 아름답게 어떤 형체가 멀
리서 나타났다. 일반인들이야 단지 그림자 정도로 인식하겠지만 운조
정도의 안력이라면 저 어둠의 응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설마 했거늘!'
스르륵.
달빛을 길 삼아 빠르게 다가오는 녹미랑을 바라보며 망연한 얼굴이
되어버린 그가 주위의 두 사람도 잊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넌 대체!"
이어지지 않는 말을 눈빛으로 대신했지만 녹미랑의 걸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정화수(井華水) 한 그릇 올려놓고 머리 조아리며 속이나 끓일 여자
로 보였나요, 제가?"
"그런 말이 아니잖나! 이건....."
빠른 걸음으로 세 사내의 앞에 다가온 그녀가 머리를 손으로 매만지
며 허탈하게 웃었다.
"역시 여인네에게 은신은 별로 아름답지 못한 일이로군요. 머리가
이렇게 헝클어져 버렸네요."
이런 순간에도 정인에게는 아름다워 보이고 싶었을까.
'지금도 눈이 부실 만큼 예쁘다, 사매.'
그러나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는 일.
"머리 모양이나 말할 계제가 아니다! 어서 돌아가라! 아, 아예 하남
으로 내려가!"
머리를 만지던 녹미랑이 씁씁하게 웃었다. 그 처연함은 본래의 아름
다움에 더해져 흡사 월궁(月宮)의 항아(姮娥)가 속세로 놀러 나온 듯했
다.
"저도 하남이 그리워요. 사형들, 사매... 그리고 우리들의 작은 쉼터
가 얼마나 그리운지........."
"그러니까 돌아가라는 것 아니냐! 지체 말고!"
"........."
대답없이 먼 산을 바라보는 그녀가 답답했는지 운조의 목에 굵은 핏
대가 곤두섰다.
"너는 내가 이런 자리조차 감당하지 못하리라 여겼더냐? 나를 그리
도 믿지 못했더냐?"
호통을 친 운조가 몸을 돌려 북궁단야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불타는 눈망울을 직시할 이는 이 순간, 아니, 언제까지라도 없을 듯했
다.
"이 여자는 지금의 상황과 무관하다. 그러니 가는 길을 막지 마라.
이건 경고가 아니라 명령이다."
멀뚱한 얼굴로 둘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적괴가 고개를 돌렸다. 왠
지 지금만큼은 운조라는 사내의 마음이 그의 썩은 가숨을 은은히 건드
렸으니까.
"큭큭... 난 상관없어."
이렇게 되고 보니 북궁단야의 처지가 우습게 되어버렸다. 그는 적괴
와 다른 입장이었고, 사건의 단서를 쥐고 있는 녹미랑을 이대로 보낼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대세를 따를밖에.
'알 수 없는 일이다.'
흘러가는 추이야 어쩔 도리가 없겠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르
는 의문까지 제어하진 못하기에 북궁단야의 미간에 가는 선이 몇 겹
잡혔다.
녹미랑, 이름 그대로 사슴처럼 아름다운 여인[鹿美]이라는 뜻이다.
실지로 보기에 썩 괜찮기도 하고.
또한 그녀가 십장생의 일원이라는 가장 명확하면서도 명료한 증거이
기도 한 이름이다.
'그런데... 왜?'
저런 형편없는 은잠을 보인다는 건가. 이런 적지에서 말이다. 이런
말 하기 머하지만 그녀가 행한 은신이라는 건 펼치지 않은 편이 나을
정도로 형편없었으니까.
북궁단야는 그가 겪었었고, 또한 들어온 바의 십장생들을 떠올려 보
았다.
절대오존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치무환검존을 불귀의 객으로 만든
운조, 그 자신을 절체절명까지 밀어 넣었던 우직한 사나이 건암.
장추삼의 말을 액면에서 서넛 정도 뺀다고 해도 설명만으로 전율적
인 묘교교라는 여인, 그리고 알 수 없는 사내 기학.
'기학........'
그 얼간이는 시간이 날 때마다 떠벌리곤 했다. 현 무림에서 기학이
라는 사내를 감당할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고. 자신은 이긴게 아니라
이겨진 거라고.
태양광무존 또한 십장생의 일원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가히 일당백
의 소수 정예 초고수 집단이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저 여인은 뭘까. 일반적인 상식에 - 물론 십장생이라는
틀에서의 일반론이지만 - 크게 못 미치는 무공과 무모한 행동.
튀는 것은 단지 용모와 몸매인데.
하지만 그는 이런 상념을 곧 접어야먄 했다. 운조와 적괴는 지금 상
황을 한가로이 분석할 만큼의 여유 따위는 없었으니까.
운조의 말없는 재촉에 북궁단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뜻대로."
그놈이 알면, 하며 한숨을 푹 쉬는데 느닷없는 교소가 장내를 날카
롭게 갈랐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녹미랑이 옷깃으로 입을 가리며 낮
게 속삭였다.
"남자들이란 정말이지 제멋대로야."
북궁단야와 적괴의 얼굴에 의아함이 피어날 무렵 운조의 얼굴이 딱
딱하게 굳었다.
"정녕 내 말을 듣지 않을 셈이냐."
"저도 이번 겨룸의 구경꾼 자리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저쪽도 구경꾼이 하나 있으니까 비기는 셈 아닌가요? 그리고
사형."
뭐라고 하려는 운조의 입을 막고 녹미랑이 다시 한 번 웃었다. 이번
의 미소는 처음과 전혀 다른 성격이라 앞서의 얼굴을 그려내기 어려울
정도였다.
"저를 믿지 못하시는 거야 뭐라고 할 바는 아니지만 앞으로 이런 모
습 보이지 마세요. 그건 제가 아니라 우리에 대한 모욕이랍니다."
이런 모습, 아마도 북궁단야들에게 녹미랑의 퇴로를 보장하라던 걸
말하는 얘기일 터.
"내가 아니라 우리...라."
순간 운조는너무도 부끄러워 감히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정인이기 이전에 한 명의 무인이었으니까.
그녀는 자신의 사매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십장생이라는 이름으로
뭉친 동료였으니까.
그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스스로 숨 쉬고 있는 하나의 개체였으니
까.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운조가 어깨를 한번 들썩이며 하소연처럼 중
얼거렸다.
"우리 쪽도 이렇게 정리가 되었군."
"나쁘지 않아."
무슨 말일까.
강시의 뜻 모를 한마디에 운조는 기분이 썩 좋아졌다. 그래서 이렇
게 화답했다.
"그리 봐주니 고맙군."
그들 둘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서로의 관전자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
"......!"
드디어 짧고도 긴 얘기의 종착역이다. 방관이라는 방법으로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은 자리를 피하고 나머지 두 명의 무인은 생
사를 건 싸움에 임하기 위해 전면으로 나섰다.
"덫을 놓은 입장에선 매우 불리한 싸움으로 보이는데. 선점했던 모
든 이점을 포기하는 결과가 아닌가."
"이점 따윌 바란 게 아냐. 난 단지 운조라는 인물을 만나고 싶었을
뿐이니까."
이 집착, 분명 뭔가 있다. 운조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그런데 왠
지 묻고 싶지는 않다. 궁금하지 않아서는 아닌데 어쩐 일인지 듣고 싶
지 않다.
"후회하게 될 거야. 그 호기심을."
호기심이라......"
툴툴 웃던 적괴가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러자 마치 고목 나무가 자
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느낌이라 운조는 묘한 감흥에 사로잡혔다.
"어쩌면 자네는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조금은 다를지도 모르겠군."
"다르면 어떻고, 같은면 어때?"
라고 중얼거린 적괴가 슬쩍 뒤를 돌아보고 천천히 쌍장을 들어 올렸
다.
잘 보게, 북궁단야.
스릉!
대저 무인들은 기본적인 기수식만으로도 스스로의 강함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공력을 불러일으키든 아니면 일변한 기세만으로.
그러나 적괴는 마치 세수를 하기 위해 손을 올린 사람처럼 외면적으
로는 어떠한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운조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고요함 속의 굽이침을.
"하앗!"
그가 주먹을 꽉 쥐고 양 허리에 붙이자 폭풍과도 같은 기운이 전신
을 에워쌌다.
때맞춰 적괴가 뭔가를 털어내듯 손을 흔들자 운조의 어깨가 꿈틀 움
직였다.
꽝!
움찔 몸을 휘청거린 운조의 입가에 가는 사선이 그려졌다.
"설마 이게......"
"아직 많이 남았어. 기대해도 좋아."
무뚝뚝한 얼굴로 말을 받았지만 적괴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전력은 아니더라도 그의 이번 한 수는 나름대로의 위맹함을 품
은 것이었거늘.
'단지 몸 한 번 까닥거린다는 건가.'
물론 몸 한 번 까닥은 아니었다. 기세 싸움의 일환으로 그냥 받아
냈지만 운조 역시 뛰노는 기혈을 억누르느라 혓바닥을 잘근 씹어야 했
다.
'이런 미친 짓은 다신 못하겠는걸.'
하지만 이 정도라면.....
숨 돌릴 틈 없이 한 발 나선 적괴가 오른손을 빠르게 흔들자 운조 역
시 이번에는 태만하지 않고 발을 굴러 자리에서 물러났다.
퍽!
그가 물러선 자리에 작은 웅덩이가 파일 만큼의 장력이 쏟아져 내렸
다.
'음?'
공격을 피한 운조였건만 대지에서 전해지는 울림에 서늘한 기분으
로 급히 몸을 틀어야만 했다. 그가 생각한 적괴의 공세는 이 정도가
아니었기에.
"가라!"
아니나 다를까. 적괴의 왼손은 운조의 일차 동작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쏘아졌고 그것이 단 한번도 끝까지 펼쳐진 적이 없다
는 전설의 연환초, 한설오식의 시발점이었다.
움직임의 크기와는 다르게 온유한 장력은 운조의 앞에서 곧 꺼져야
만 했다. 그의 암영기는 이미 최공조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고, 적괴의
공세는 이를 누를 만큼의 세기는 없었으니까.
'이것이 동풍낙화(冬風落花)?'
스산한 겨울발마에 꽃들이 진다는 한설오식의 일초 동풍낙화는 평
범한 초식명처럼 운조에게 위협을 가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방비를 할 정도는 되었고 적괴로서는 그 정도로 충분했다.
운조가 기를 끌어올려 동풍낙화에 맞서는 찰나에 이미 적괴의 오른
손은 허공에서 묘한 선을 그려내고 있었다. 처음부터 왼손과는 독립적
이었던 것처럼.
휘익!
여전히 온유했지만 밑바닥에서 훑고 올라오는, 기분 나쁜 기세가 운
조를 위협하자 그는 암영기로 몸을 두텁게 감싸며 한 걸음 옆으로 비
켜서려 했다.
하나,
쿵!
가슴을 정통으로 가격당한 신화의 주인공은 이해하기 어려운 얼굴
이 되었다.
'뭐지?'
충격이 대단해서만은 아니었다. 그의 놀람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으
니까.
"하앗!"
기세가 올라서일까. 그답지 않게 커다란 경호성을 내지르며 적괴가
양손을 쭉 내뻗었다. 순간 펼쳐지는 눈보라의 환상은 운조의 정신을
혼란에 빠뜨렸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그야말로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다. 별반 손 교환도 없이 슬슬 밀
리다가 완전히 선기를 빼앗겨 버렸다.
특히 적괴의 두 번째 초식, 점점응호(漸漸凝湖)는 부지불식간에 결빙
되는 겨울 호수처럼 속도를 예측하기 어려웠고 그 한 방으로 전세는
완전히 적괴의 수중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러나 운조에겐 전의 상황을 반추할 여지가 없었다. 그의 눈앞을
가득 메운 눈보라의 환상, 한설오식의 세 번째 초식 망현풍설(妄現風
雪)을 상대해야 했으니까.
'멋지구나!'
드러내 놓고 찬사를 보낼 형편이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
로 만족했지만 북궁단야는 적괴의 매끄러운 연환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령장이라고 했다. 처음에 그 별호를 들었을 때는 외적인 요소가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하고 스스로 결론지었었고 그건 여타의 실회조
원들도 공감했었다.
크고 작은 몇 차례의 싸움을 함께하긴 했으나 실회로에서 상대한 이
들은 적괴가 몸을 풀기도 전에 개구리처럼 배를 뒤집기 일쑤였고 그렇
게 지내면서 유령장은 어느새 적괴의 외피처럼 그대로 굳어졌다.
하나 이제 보니 유령장은 그야말고 적괴라는 무인을 가장 잘 대변하
는 별호가 아니겠는가.
귀신처럼 다가와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상대를 압박해 버리는 장
법, 그리고 생각의 종착역을 짐작하기 어려운 무표정한 얼굴.
무리한 싸움이라고 여겼던 자신의 판단이 부끄러울 지경이라 일견
미안하면서도 일견 기분이 좋아졌기에 북궁단야는 그의 옆에 초조한
얼굴로 두 손을 모으는 여인의 초상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불리하다고 여겼던 승부에서 우위를 점하는 경우보다 그 반대의 경
우를 지켜보는 이가 느끼는 감정이 어떨지는 상상할 필요도 없다.
만약 북궁단야가 조금 더 삶을 살았더라면 모르지만 그는 이제 서른
이었고 멈춰 서서 숨을 고르기보다 한걸음이라도 더 내디딜 나이였다.
"하아앗!"
기합성은 무저갱으로 흘러내리고 상황은 짙은 안개 속을 헤매고만
있었다. 질 거라는 생각을 하는 건 절대로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답답
했고, 그래서 더 화가 나는지도 모른다.
선공을 하자니 이어지는 뒤의 초식을 신경 쓰지 않을 도리가 없었고
그렇다고 얌전한 학동마냥 차례대로 초식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기에
상황은 꼬여만 갔다.
어찌어찌 틀어막은 망현풍설이었는데 그 다음에 몰아친 초식은 처
음의 동풍낙화였고, 울혈을 참아가면 받아낸 후에 점점응호가 아니라
다시 망현풍설이었으니 변화를 따라가다가는 속도에 당할 판이고, 속
도를 쫓자니 뒤따를 변화가 걱정이다.
'내가 어쩌다 유령장 따위에게!'
근엄한 얼굴 뒤로 다급함을 숨겼지만 어지러워지는 손까지 제어하
지는 못했다. 그러나 적괴는 결코 서두름없이 차근차근 운조의 숨통을
조여왔다.
차라리 대놓고 붙었으면 좋겠지만 그건 운조의 희망 사항일뿐. 환
검존을 쓰러뜨린 공력에 정면으로 부딪칠 만큼 머리가 나쁜 유령장이
아니었으니까.
"계속 장난만 칠 셈인가!"
빈정거림을 담아보려 노력했지만 운조의 음성은 가는 떨림을 수반
하고 있었고 백전노장인 적괴에게 그소리는 천둥처럼 들려왔다.
'당황스러운가, 운조?'
번쩍!
대답은 불쑥 내밀어진 네 번째 냉월비탄(冷月悲歎)이었다. 겨울 달이
짓는 슬픈 탄식이 서리처럼 맺히는 밤처럼 고요하면서도 급작스러운
공격이었다.
'헉!'
느릿하면서도 끈끈한 공격에 익숙해서만은 아니었다. 유령장의 이번
일초는 강호에서도 일절로 꼽힐 정도로 빠른 공격이었기에 미리 알고
있었더라도 방비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양손을 들어 가까스로 냉월비탄을 막아낸 운조가 뒤로 세 발자국을
물러서자 언제나 무표정하던 적괴의 눈에 모처럼 어떤 느낌이 자리했
다.
'당황스러운가, 운조?'
튕기듯 자리를 박찬 그가 한 걸음으로 도약하며 왼손으로 다시 망현
풍성을 그려내자 발뒤꿈치를 땅바닥에 박아 넣으며 겨우 신형을 안정
시킨 운조의 얼굴에 처음으로 낭패의 빛깔이 떠올랐다.
이런 치명적인 공격 이후에 허무할 정도로 의미없는 변초를 그려낼
무인이 어디 있을까. 평소였다면 운조 같은 천하의 승부사가 이런 수
에 넘어갔을 리가 없었다.
"이따위 수작으로!"
그가 큰 고함과 함께 마구 양팔을 휘두르자 망현풍설의 환상은 잦아
드는 듯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운조의 목줄을 움켜쥐기 위한 적괴의
마지막 수순이었다.
"당황스럽냔 말이다, 운조!"
벼락처럼 소리를 지르며 적괴가 오른손을 힘차게 휘둘렀다.
휘르르~
차가운 바람과 함께 단 한번도 펼쳐진 적이 없다는 적괴의 마지막
초식, 한설한세(寒雪恨世)가 장내를 완전히 뒤덮었다.
차가운 눈을 맞으며 세상을 원망한다는, 극도의 염세적인 초식은 마
치 적괴의 슬픈 눈망울처럼 온 천지를 굽어보았고 그 안에 갇힌 운조
는 튼튼한 우리 안에서 퍼덕이는 새처럼 절대로 벗어날 수 없어 보였
다.
삼류무사 261 사랑과 연민
"안 돼!"
발작적으로 고함을 지르며 녹미랑이 뛰쳐나가자 적괴의 싸움 운영
에 취해 있던 북궁단야가 급히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자리로 가시오."
"비켜라!"
"우리의 자리가 아니오."
차가운 그의 응대는 녹미랑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격이었다.
"비키라고 했다! 아니면 죽여 버릴 거야!"
"휴우......"
북궁단야의 한숨이 신호였을까. 녹미랑이 펄쩍 뛰어오르며 양팔을
마구 휘두르자 운조의 것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기운이 몰아쳤다.
"그만두지 못하겠소?!"
급급히 신형을 뽑으며 북궁단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날 막지 말란 말이야!"
아귀처럼 달려들며 그녀가 울부짖자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일정한 형식 없이 휘두르는 것 같지만 녹미랑이라는 여인이 지닌 기세
는 가공함, 그 자체가 아닌가.
"방금 전까지의 기세는 허장성세(虛張聲勢)였다는 건가?"
사람이 바뀐 듯한 공력으로 북궁단야를 몰아치는 녹미랑의 얼굴은
눈물로 버벅이 되어 있었다. 곱던 눈가엔 한광이 번뜻였고, 아름답게
파이던 보조개의 호소는 세 가닥 주름이 맺혔다.
"어서 멈추지 못하겠소!"
칼집을 들어 근근히 공세를 흘리던 북궁단야가 뭐라고 말을 잇기도
전에 그녀의 위맹한 일장은 천하를 양단할 사내의 검집을 타고 흘러
손목까지 이르렀다.
'이런!'
순간 눈이 뿌옇게 흐려져서 뒤로 물러선 북궁단야가 빠르게 고개를
휘저었다. 손목의 통증은 견딜 만했지만 좁아지는 시야의 압박은 참을
수준이 아니었다.
"나를 막지 마라!"
추상같은 녹미랑의 외침일진대 점점 아득해지는 정신과 흐려지는 눈
동자에 당황한 그가 오른발로 땅을 강하게 차고 장내를 벗어났다.
뭔가 있다!
이대로라면 뭘 해보지도 못하고 끝장날 판이다. 저런 절박함에 맞설
정도의 원념도 없을뿐더러, 자꾸 풀어지는 몸은 싸움을 거부하고 있다.
그녀의 눈은 한의 차원을 뛰어넘는 그 무엇으로 북궁단야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으니까.
한을 넘어선 그 무엇을 함유한 시선.
절박함도, 한도 넘어서는 눈망울.
눈망울?
'음?'
저주받은 원혼처럼 양손을 치켜들고 빠르게 다가오는 그녀를 풀린
눈으로 바라보던 북궁단야가 칼을 빼 자신의 손등을 살짝 베었다.
따끔!
차디찬 칼날에 베어진 손등에서 시린 통증이 머리까지 전달되자 몽
롱하던 그의 정신이 퍼뜩 깨어났다.
'역시!'
이제야 사물이 제대로 보인다. 닫혀진 시야가 거짓말처럼 열리고 손
가락을 타고 흐르는 핏방울처럼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섭혼술(攝魂術)!'
그녀의 차혼제안은 실로 무서운 위력이었기에 북궁단야같이 매서운
무인도 깜빡 당해 버렸던 거다. 정인을 향한 걱정이 모종의 기세로 실
체화한 탓도 있겠지만.
쿠르르-
검을 고쳐 잡은 북궁단야가 기세를 끌어 모으자 엄청난 기세가 그의
전신을 감쌌다.
'이런!'
성난 해일처럼 치고 들어오던 녹미랑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이게 아니다. 섭혼을 일단 충격을 먹이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를 암영기로 단숨에 끝장내려던 그녀의 계획은 뜻밖의 자해로 물거
품이 됐다.
'이토록 수양이 깊었나?'
녹미랑이 생각한 만큼의 수양은 아니지만 북궁단야의 기본은 탄탄
한 편이다. 내공도 정순하고 무엇보다 하루도 수련을 거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쉽사리 깨질 차혼제안이 아니었다. 만약 그녀의 몸
상태가 완전했더라면 천하의 북궁단야라도 얼마간 고생을 했을 터였
고, 그 정도의 시간이었다면 녹미랑은 절대적인 고지에서 싸움을 펼쳤
을 거다.
몸 상태가 완전했더라면.
문득 녹미랑은 자신을 갉아먹은 어떤 여름날의 새벽이 생각났고, 처
음으로 시전했던 제백심법이 떠올랐으며, 선한 얼굴의 점소이를 그렸
다.
"제자리로 돌아가라 했소!"
"비키라고 하지 않았으나!"
칼을 들어 중극으로 검극을 이동시킨 북궁단야가 겨울 서리처럼 차
갑게 내뱉었다.
"아까처럼 되지 않을 거요."
"고작 차혼제안을 받아낸 걸 가지고 자랑하려 드느냐? 그건 단지 여
흥이었다!"
"여흥이라......"
그가 눈을 들어 원독에 찬 녹미랑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녀에게 여
흥을 즐길 만한 시간이 있을 리 만무했다. 다급한 얼굴보다 움찔움찔
움직이는 어깨가 그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좋소, 오시오."
오 자가 떨어지기도 전에 몸을 날린 그녀가 암영기를 모은 손으로
북궁단야의 오른팔을 노렸다.
슥-
가볍게 한 발 물러선 그가 손을 들어 짧게 사선을 두 번 긋자 허공에
죽음의 역팔자가 아로새겨졌다.
"아악!"
무모한 돌격이었을까. 녹미랑은 어깨에 진한 상흔을 입고 표표히 떨
어져 내렸다. 한 개의 선은 피했지만 다른 하나를 암영기로 받아내려
다 힘에 눌린 탓이었다.
다소 싱거운 결말. 흡사 이 세상을 쓸어버릴 듯한 독념(毒念)으로 달
려든 것과 달리 그녀의 패배는 허무하기까지 했다.
'역시 정상이 아니었나?'
무언가 어설픈 움직임, 다급한 초식.
어쩐지 켕기는 것이 있는지라 북궁단야가 칼을 갈무리하고 그녀에
게 다가서려 몸을 움직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순간 날개 다친 제비처럼 웅크리고 있던 녹미랑이 무섭게 몸을 일으
켜 세웠다.
"헛!"
"죽엇!"
워낙 돌발적이었고, 가장 막기 힘든 아래에서 위로 치고 올라오는
공세였기에 북궁단야는 무방비로 가슴을 내줘야만 했다.
꽝!
강한 타격이 그의 가슴팍을 두드리고 입가에 실핏줄을 머금은 북궁
단야가 붕 떠서 지면에 나뒹굴자 녹미랑의 장심에서 먹구름과도 같은
기운이 어리며 사나운 장력이 흩뿌려졌다.
"비켜! 비켜! 비켜!"
미친 여자처럼 소리를 지리는 녹미랑을 의식할 사이도 없이 강호에
서 가장 비천하다는 나려타곤으로 몸을 굴리며 장세를 피하던 북궁단
야가 품고 있던 검을 지렛대 삼아 벌떡 일어섰다.
실수였다. 제아무리 정상이 아니더라도 십장생의 일원이 그리도 쉽
게 무너졌을 거라고 생각했다니.
'자만이다, 북궁단야!'
자책을 해봐야 늦은 일. 정인에 대한 걱정과 대상없는 분노로 점철
된 그녀의 독기는 북궁단야의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의 선명함에
반사되어 더욱 짙어졌다.
땅에 검집을 박아 넣은 상태 그대로 칼을 빼 든 북궁단야가 절로 꺾
이는 무릎을 칼집으로 버티며 가까스로 힘을 모아 크게 소리를 질렀다.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녹미랑은 그의 말 따윈 상관없었기에 그대로 돌진해 들어왔
다.
'음?'
순간 북궁단야는 뭔가를 스쳐 보았고 잠시나마 검을 진 오른손에 힘
이 풀렸다. 매서운 입과 전혀 다른 그녀의 눈망울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죽어!"
그녀의 사나운 교갈에 상념은 물거품처럼 흩어졌고 그 역시 칼을 쥔
손마디에 마지막 힘을 짜내어 힘차게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 심대한 타격은 아니었지만 뛰노는 기혈을 진정시킬 새가 없었
고 녹미랑의 공세는 너무도 빨리 북궁단야에게로 날아들었다.
펑!
다시 한 번 훌훌 날아 땅에 처박힌 그를 힐끗 돌아본 녹미랑이 왠지
처연한 얼굴로 북궁단야를 내려다보다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지금의 난 무인으로도, 사람으로서도 최악이었을지 몰라요. 하지만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걸. 이해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이지
미안해요.'
그런데 치명상을 입고 나가떨어진 북궁단야가 숨을 몰아쉬며 떠올
리는 상념을 알았다면 그녀의 표정이 어떻게 변했을지 모를 일이다.
'만약 비슷한 경우라면 정 소저도 저 여인과 같은 모습이었을까?'
모를 일이다. 자존심이라면 천하를 오시하는 정혜란이 정인을 위해
서 무인의 긍지를 꺾을지.
'가만?'
그렇게 생각해 보니 혼란스럽다.
무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연히 명예를 택하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
데 방금 전 녹미랑의 암습이 밉지만은 않았던 걸까.
더 솔직히 말해 뭔가 진한 감정이 밀려오지 않았던가. 자신에게 살
수를 들이대는 적인데 말이다.
옳은 건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그때그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진정으로 옳은 걸지도 모른다. 애당
초 절대적인 진리는 없으니까. 그래서 녹미랑의 비열한 습격도 아름다
운가 보다.
그런 점에서 자신은?
엉망이다. 더 이상 나쁠 것이 없을 정도로 한심했다.
싸움에 임하는 정신 면에서 처음부터 지고 들어갔으니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보 같은......'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은데 울 여력조차 없다. 너무도 비참한데 울지
도 못하니 그야말로 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제길.....'
등을 돌리는 녹미랑이 어렴풋이 보였지만 손가락 하나 쳐들 힘도 없
었기에 북궁단야는 그저 멀어져 가는 그녀의 초상을 응시할 도리밖에
없었다.
어서 일어나요, 꺽다리!
'음?'
환청일 터였다. 그 자리에 정혜란이 올 리 없으니까. 그렇지만 뒤따
르는 그녀의 음성에 북궁단야는 감기던 눈이 번쩍 떠졌다.
일어서라니까, 바보 같은 양반!
'나도 일어서고 싶다오.'
그때 그녀의 무심한 한마디는 그에게 천상의 옥음보다 귀했다.
저대로 보낼거예요?
그렇구나!
할 일이 있다. 지금 한가롭게 누워서 달님이나 감상할 처지가 아니
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무슨 낯으로 그녀를 대한단 말인가.
'해야지.....'
온몸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들린다. 관절 어디가 어긋났는지 뼈들
이 통곡을 지르고 놀란 근육은 송충이처럼 꿈틀거린다.
가슴이 아려서 숨을 내쉴 때마다 뭔가 좍좍 찢겨 나가는 듯하다.
뜨뜻한 물에 푹 좀 담그고 망향가라도 불렀으면 그 다음에는 한숨
잤으면 그 다음에는 그녀를 만나 밥 한 끼를 얻어먹었으면.
정말 그랬으면........
문득 북궁단야는 땅바닥의 차고 딱딱한 감촉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
다. 듬성듬성 풀들이 나 있다고는 해도 초겨울의 바람을 한껏 쐔 탓에
산등성마루의 바닥은 더없이 차고 냉정했으니까.
'반드시 해야지.......'
가까스로 오른팔에 힘을 주어 검을 움켜쥔 그가 상체를 들어 올려
땅에 칼을 박아 넣었을 땐 녹미랑이 첫 번째의 전장으로 신형을 날리
려던 참이니 북궁단야가 품었던 단상은 거의 찰나지간이었다는 말일 터.
비틀거리며 일어선 그가 겨우 한마디 던졌다. 그래서 녹미랑은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고.
"거...기...까지...요."
"......?"
처절하다면 처절한 북궁단야의 모습에 그녀가 고소를 머금었다.
"이번엔 정말 죽일 거예요."
"그럽시다."
숨을 몰아쉰 그가 칼을 가까스로 고쳐 잡자 녹미랑의 눈에 스산한
한광이 어렸다. 기상은 가상하지만 이미 저자는 한계다.
"편안히 누워 있을 일이지, 제 몸 하나 가누지도 못하면서 뭘 하겠다
고."
"갈 곳이 있어서."
그의 무심한 대답에 그녀가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저승으로 보내주마!"
쭉 앞으로 돌진하는 녹미랑의 양손에 보기만 해도 섬뜩한 기운이 어
리자 북궁단야의 꺼져 가던 눈가에 희미한 주름이 몇 겹 어렸다.
한 대라도 맞으면 끝이다. 버틸 수야 있겠지만 다음의 연환 공격을
막을 방법이 없을 테니.
'뭘 한다지?'
사무귀일? 일현성화?
생각은 짧았다. 아니, 생각 자체가 없었던 사람처럼 북궁단야의 손
은 녹미랑이 달려오자마자 그대로 내쳐졌다.
슥!
북궁단야를 스쳐 지나간 녹미랑이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너, 넌......"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킨 그녀가 뭐라고 하려다 배를 부여잡으며 그
대로 쓰러졌다. 그리고 북궁단야 역시 무릎을 꿇었다.
힘든 싸움의 종착치고는 다소 어이없는 결말.
"헉, 헉!"
가쁘게 숨을 쉬던 그가 품속에서 하운이 건네준 환약을 꺼내 입에
넣고 짧은 운공에 들어갔다. 싱거운 마무리로 보였지만 당사자에게는
더없이 고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승자는 모든 걸 가질 자격이 있다.
'이제 돌아갈 수 있겠군.'
삼매지경에 빠지기 전 북궁단야가 떠올린 마지막 상념이었다. 물론
상황이 종료된 것은 아니었지만.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기에 멀리서 들려온 녹미랑의 절규는 운
조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어쩌다 적괴 따위에게!'
그러나 현실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유령장의 공세는 이제 막바지였
고 그는 한설한세의 장력을 받아내는 것도 벅찰 지경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게 다라면?
'조금만 기다리거라, 미랑!'
밀리기는 하나 그렇다고 패할 정도는 아니다. 다시 말한다면 언제든
상황은 반전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운조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었다.
이게 다라면.
장세를 막아가는 일방 장력의 흐름과 흐름을 살피던 운조가 적괴의
호흡이 이어지는 그 찰나 버럭 고함을 지르며 오른손으로 커다란 원을
그렸다.
꽝!
덧없이 흐른 적괴의 다섯 번째의 초식의 그의 왼쪽 어깨를 강하게
때렸으나 운조가 그려낸 원형에서 파생된 기운 때문에 유령장도 공세
를 이어갈 수만은 없었다.
"헛!"
뒤로 물러서는 적괴를 좇는 일방 곁눈으로 녹미랑의 동태를 살피던
운조의 눈에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북궁단야가 잡혔다.
그리고 끝장을 보려는 녹미랑의 돌진과 한번의 스침도.
그리고 낙엽처럼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정인의 초상도.
그리고...
"으아아악!"
미친 삶처럼 고함을 지른 운조가 핏발 선 눈으로 적괴를, 아니, 그
의 등 뒤에 펼쳐진 어둠을 응시했다.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언제나 그렇게
언제나 나를
가두는가.
"가둬도 좋다고 생각했다."
킥킥거리던 그가 손을 들었다. 어깨의 통증 따위는 이미 잊은 지 오
래.
"옴짝달싹하지 못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 운명이라면."
스멀스멀 피어나는 독기에 차디찬 적괴의 가슴에도 스산한 그늘이
어렸다. 이건 인간으로서 보일 기세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나를 버리겠다. 그러면 운명 따위도 없을 테니."
저벅.
양손을 들고 어떠한 방어 태세도 없이 걸음을 옮기는 운조의 모습은
마치 삶을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꽝!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적괴의 오른손이 움직이자 운조의 가슴에
장력이 날아들었다.
휘청-
몸을 한번 기우뚱거린 것만으로 유령장의 장세를 무시한 그가 다시
한 걸음 옮기자 재차 적괴의 장력이 날아왔고 이번에는 운조의 입가에
가는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게 다인가?"
왜일까. 적괴를 바라보는 운조의 눈빛이 더없이 처연했던 것은.
꽝꽝!
불쾌한 감정을 날려 버리려는 것처럼 적괴가 신경질적으로 쌍장을
흩뿌리자 운조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흔들렸지만 단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팠다.
적괴의 장력은 강호에서도 일절이라 불릴 만큼 위력적이고 그는 단
지 호신강기 하나로 버텨내고 있었으니까. 피륙으로 이루어진 사람일
진대 어찌 아프지 않을까.
그러나 가슴 깊숙한 곳에서 질러대는 비명에 비한다면.
'이건 고통도 아니야.'
저벅.
꽝!
이제는 몸을 휘청거리지도 않고 빠르게 직진한 운조가 적괴와의 거
리를 단 세 발자국 앞에 두고 그제야 걸음을 멈췄다.
'기가 찰 일이로군.'
적괴는 자신의 손을 살짝 굽어보았다.
여전한 손이고 여전한 장법이다. 여전한 힘이고 여전한 세기였다.
일개인이 맨몸으로 감내할 수준은 결코 아니란 말이다.
자학일까?
정인을 지키지 못한 자책을 몸으로 갚는 걸까?
아무튼 그렇게 멈춰 선 운조가 적괴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천천히 입
을 열었다.
"죽어라."
그의 간단한 한마디는 거역하기 어려운 힘을 담고 있어서 적괴는 순
간적으로 자살이라도 하고픈 충동이 일어 절로 몸을 떨었다.
"큭큭큭...."
흠칫 정신을 차린 그가 너무도 어처구니없어서 마른 웃음을 토했다.
"죽기 싫은데 어쩌지?"
그의 비틀린 대답에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운조가 뇌까렸다.
"그럼 죽여주지."
펑!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적괴는 무형의 어떤 것에 강타당하여 주욱 뒤
로 밀렸다.
"커억!"
입에서 피화살을 토했지만 물러나면서도 재빨리 공세를 취하는 적
괴의 모습에서 운조는 역시 강호를 떨쳐 울리는 열 명 가운데 한 명답
다고 생각했다.
펑펑!
그의 장세가 운조의 가슴을 맹렬히 때렸지만 정인을 잃은 구름은 무
심히 손을 들어 허공을 가리켰고 적괴는 지면에 몸을 처박아야 했다.
'애초에 이랬더라면.'
겉멋의 대가다. 하지만 쓰잘데기없는 대화와 무의미한 공방의 결과
치고는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그리고 후회보다 무의미한 건 아무것
도 없다.
꿈틀거리는 적괴를 무시하고 몸을 돌린 운조가 좌정한 북궁단야에
게 암경을 보냈다.
꽝!
어느새 치켜들었는지 그의 암경은 북궁단야의 검을 타고 흘러 엄한
땅거죽만 갈라놓았다.
"일어서라."
그런 말 하지 않아도 일어서려 했기에 북궁단야가 무릎을 쭉 펴자
운조가 이빨을 갈며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말했다.
"너는 시체조차 남기지 못할 거다. 이 정도로 그녀의 원(怨)이 풀릴
지 모르겠지만."
그의 낮은 으르렁거림에 북궁단야가 치켜든 칼의 끝머리로 시선을
돌렸다.
미안해야 할까? 미안해하는 게 당연한 걸까?
아니면 무림과 강호인이라는 입장적인 측면으로 당당해도 좋을까?
'하긴.......'
미안하면 어떻고, 당당하면 어떤가. 지금 그의 입장은 두 연인을 모
두 베어야 할 판이거늘.
"그쪽 사정을 봐줄 상황이 아니로군."
"봐줄 것 없다."
이제 운조의 목소리는야수의 그것을 넘어 유부(幽府)에서 흘러나오
는 것으로 바뀌어갔다.
"봐줄 것 없어."
물론 북궁단야 역시 봐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운조의 기세가 무
섭지는 않았다. 단지 조금 안쓰러웠을 뿐.
"넌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을 거다. 반드시 그렇게 된
다."
그런데 이상했다. 운조의 원념 어린 외침에 북궁단야의 마음은 더욱
더 차갑게만 식어갔고 처음의 동정심조차 남지 않았다.
솔직히 지겹기까지 했다.
"언제까지 들어줘야 하는 거지."
무심결에 흘러나온 그의 독백은 - 이건 물음이 아니었다, 그저 혼잣말
이었다 - 미친 황소처럼 식식거리던 운조의 가슴을 차갑게 두드렸다.
'지금 내가 뭐 하고 있는 건가!'
정인이 죽었다. 살해된 거다, 눈앞에 서 있는 남자의 칼을 맞고.
그래서 한탄하는 건가?
아니, 이건 한탄도 아니다. 그저 칭얼거리는 수준의 넋두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자신에게 아무리 절실한 일이라도 그것에 상관이 없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무리 절절한 다짐이라도 단지 투정으로밖
에 다가오지 않을 터였다.
우드득-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힘있게 주먹을 쥔 운조가 냉엄한 얼
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북궁단야에게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나도 언젠가는 자네와 같은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었지."
"음?"
그의 말에 담긴 진의를 생각하기도 전에 북궁단야는 소리없이 다가
서는 암경을 흘려야 했다.
찌릿!
꽝!
이화접목의 수법으로 보이지 않는 기운의 방향을 틀어놓은 북궁단
야가 손목으로 전해지는 충격에 칼을 놓칠 뻔했으나 이를 악물고 칼자
루를 움켜잡았다.
짧은 운공으로 어느 정도 기운을 차렸다고 하나 아직은 완전치 못한
상태. 그렇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
'속전속결'
그러나 운조는 망부석처럼 제자리에서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한 눈빛으로 북궁단야의 일거수일투족을 응시하고 있
었다.
이럴 땐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그야말로 경천
의 쾌속함이 없다면 한번의 움직임은 그만큼의 허점을 남기는 법이니
까.
그들의 대치가 장기화할 무렵 무언가 힘겹게 바닥을 끄는 소리가 들
리며, 건조한 음성이 두 사내가 불러온 투기(鬪氣)를 가르며 불쑥 끼어
들었다.
"상대가 틀렸다니까........"
전신에 피칠갑을 하고 여기저기 뜯긴 옷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버티
고 있었지만 입가에 걸린 조소는 언제나처럼 당당한 사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척러리는 걸음이었지만 절대로 다른 이의
어깨를 빌리지 않을 기세로 한 걸음, 한 걸음을 다가오는 사내.
그 사내는 북궁단야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조금 더 나를 지켜봐 주겠나?
"적 대협!"
왈칵 울음이라도 흘러 버릴 것 같아 북궁단야가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하려다 큰 숨을 쉬고 전면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적괴는 뭔가를 말하려 하고 있다. 알 수 없기에 공감할 길도 없지만
일단은 들어줘야 한다.
그것이 동료에게 보일 최소의 예우이기에.
"질기군."
신경질적으로 적괴를 돌아본 운조가 아무렇게나 손을 뿌리자 그야
말로 강시처럼 비틀거리던 사내가 다시 한 번 땅에 처박혔다.
우당탕-
"귀찮군."
하고 돌아서려는 운조의 눈이 조금 커졌다.
"큭큭큭....."
구겨진 휴지처럼 땅바닥을 구르던 적괴가 메마른 웃음을 흘리며 다
시 일어섰다.
"잘 봐....."
뭘 보라는 걸까! 적괴의 장법은 모두 다섯 초식으로 이루어졌고 그
전부를 견식했거늘.
우웅-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을까. 찢어진 장포가 부풀어 오르며 적괴의
얼굴에 한줄기 홍조가 어렸다.
'아!'
순간 북궁단야는 저도 모르게 그를 잡기라도 하려는 듯 손을 내뻗었
다. 지금 적외의 몸에 발현된 현상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의 손은 곧 멈춰졌다.
'저건?'
필사적으로만 보이는 적괴의 돌진이었는데 그의 입가에 새겨진 웃음
이 처음 보는 것이라 북궁단야는 어쩐지 마음 한구석에 작은 불씨가
피어나는 듯했다.
저것을 뭐라고 해야 할까.
분명 회광반조(廻光返照). 죽기 전에 마지막 불꽃을 태운다는 슬픈
현상. 그런데 적괴의 어디를 봐서 안타까울까.
회광반조란 그가 알고 있는 그런 의미가 맞을까?
"으아앗!"
괴성을 지르며 힘차게 도약한 그의 두 손에 찬연한 기운이 어리고,
그것은 나타날 때보다 빠르게 장내를 감싸 안았다.
밤이 어둠으로 고요한 것은 빛의 더함 없는 마음으로 말미맘이요...
쿠르르!
그의 여타 장법과 젼혀 다른, 어찌 보면 거룩할 정도로 따사로운 기
운이 온 천지를 휘감자 여유롭던 운조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건방진!"
그가 강력한 기세를 불러일으키며 적괴의 기운에 맞서 나갔지만 봄
햇살처럼 따뜻한 기운은 전혀 식지 않고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절대로 강하지 않으면서 너무도 강대한 기운.
이런 상태가 싫다. 뭔가를 감싸주고 이해한다는 건 운조에게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어둠의 통로만 걸어온 이에게 빛이란 거추장스러운
소음과도 같으니까.
낮이 낮으로서 고운 빛깔로 나부낄 수 있는 것은 밤의 다함 없는
사랑이라...
콰릉!
두 개의 기세가 충돌하며 공기 중에 작은 균열이 파생되었다.
고로, 내 안에 빛이 있고 내 안에 어둠이 있는데 여명을 갈구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컥!"
"쿨럭!"
두 마디 비명과 함께 물체 하나가 튕기듯 뒤로 물러나 아름드리 나
무에 등을 세차게 부딪친 후 장내는 철저한 침묵만이 흘렀다.
"여명불요(黎明不要)......"
적괴조차 짓지 못했던 그의 최후 심득은 북궁단야에게로 이어져 그
렇게 명명되었다.
나무에 등을 기댄 적괴의 표정은 지극히 평온했으나 정작 두 발로
굳건히 땅을 밀어내고 있는 운조의 얼굴은 야차처럼 구겨졌다.
불쾌했다. 마음속 깊숙이 숨겨놓은 비밀을 낱낱이 들켜버린 느낌이
라 부끄러움과 자괴감이 밀려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더 일어나 봐! 더!"
괴성을 지르며 날뛰던 그가 적괴를 향해 한 번 더 손을 쓰려는데 차
디찬 한마디가 운조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보기 싫군."
"뭐라고?!"
몸을 홱 돌린 운조가 북궁단야를 꼬나보았다.
"그렇지 않은가. 이미 쓰러진 상대에게 무슨 비아냥이냔 말이야. 숨
통을 끊을 거면 확실히 하던가."
꼴불견이다, 하며 말을 맺은 북궁단야가 뭐가 그리도 분한지 식식거
리는 운조를 외면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동료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깝게 됐구려.'
"나란히 가라!"
쿠릉!
흥분했고, 못난 꼴을 보여도 운조는 역시 운조. 그가 일으킨 기세에
북궁단야는 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만큼 강대한 기운을 한순간에 모
을 무인은 무림을 통틀어도 몇 없을 것이다.
스륵!
우연하게 반 바퀴 돌며 북궁단야 역시 태만하지 않고 마주 검을 찔
러 들어갔다.
쾅!
지축이 작은 울림과 함께 들썩였지만 두 사람은 개의치 않고 서로의
절기를 쏟아 붓기 시작했다. 딱히 저리랄 것도 없는 손 나눔이었지만.
'대단하구나!"
'역시 운조!'
감탄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비록 한 사람은 정인을 해한 불구대
천의 원수요, 다른 하나는 동료와 자신의 터전을 짓밟으려는 대적(大
敵)이지만 지닌 바 무예의 깊이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수나 교환했을까.
스치듯 흐른 시간 속으로 운조는 운조대로, 북궁단야는 북궁단야대
로 자신의 모든 것을 보이기 시작했다. 애초의 감정은 일단 뒤로하고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운조의 공세에 북궁단야의 칼이 무뎌졌고
장내의 분위기는 한쪽의 힘이 부른 기운에 완전히 눌려갔다.
"으아악!"
기세를 타서일까. 괴성을 지르며 양팔을 허리에 붙인 운조가 암영기
를 극대화하자 그의 전신은 묵빛 기운으로 둘러싸였다.
이것이야말로 전설의 검수 치무환검존을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보
낸 운조의 절기, 묵심여류(墨心如流)였지만 북궁단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쿠쿠쿠-
'위험하다!'
강대한 기운이 전신을 죄어오자 북궁단야는 평소의 습관대로 있는
힘을 오른손에 모아 검은 기세의 중심으로 돌진하려 했다.
그것밖에 방법이 없어 보였으니까.
'그런가?'
강력한 힘은 더 강한 힘으로 제압할 수밖에 없는 걸까?
문제는 그 더 강한 힘 따윈 북궁단야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는 거다.
솔직히 최상의 그였더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기세이거늘 지금의 상태로
는 절대 무리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다!
빙글 칼을 돌린 그가 오른발을 강하게 딛으며 앞으로 나서려다 문득
검극을 내렸다.
자살 행위다. 이건 그야말로 당랑거철이다. 명예로운 죽음 같은 건
다 부질없는 얘기일 뿐. 나무에 기대어 정신을 놓은 적괴의 무모해 ㅂ
였던 마지막 일초도 그런 결과를 ㅂ라고 한 행동이 아니었을 터였다.
그럼 회광반조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죽음을 목전에 둔 이의 마지막 몸부림?
삶에 대한 갈구?
집착?
...그대로 받아들여요.
'뭘? 무엇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거지?'
회광반조였다. 그러나 자신은 그걸 여명불요라고 생각햇다. 왜 그랬
을까.
늘 어두웠던 적괴. 밝음으로 나가길 은근히 바랐던 그 자신과 실회
조원들.
그리고...
회광반조라고 했다. 내 몸을 쬐었다가 튕겨 나간 빛무리들을 되돌려
다시 나를 바라본다는 말이니, 그 어디에 죽음의 그림자가 있는가.
그래서 자신은 적괴의 최후 초식에서 삶을 보았고, 관조를 보았으며
성찰적인 면까지도 엿본 게 아닐까.
어둠이 싫었던 적괴라면 물로 밝음이 지향점이겠으나 어둠을 인정
하고 그 안에서 밝음을 찾으려 한다면 외면적인 빛 따위는 허례가 아
니겠는가.
'그런 건가."
이제 북궁단야는 자신이 짊어지고 있었던 힘에 대한 고민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마음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가 그린 가장 자유로운 선을.
서걱!
묵빛 기운을 정확히 반으로 가른 선은 꼬리조차 아름답게 허공에서
흔들리다 서서히 자취르 감추었다.
"하아........"
검을 거두며 긴 한숨으로 긴장을 대신한 북궁단야가 검은 기운의 비
산(飛散)속에 여전히 몸을 묻고 있는 운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장막을 거두었다면 승자는 당신이었겠지.'
안개가 걷히듯 흩어지는 묵빛 기운 가운데 경악 어린 눈으로 자신의
배를 바라보던 운조가 쥐어짜듯 말을 꺼냈지만 좀처럼 알아듣기 어려
웠다.
"그, 그녀를....."
그 말을 끝으로 운조는 무너져 내려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잠시 서 있던 북궁단야가 나뒹굴고 있던 검집을 찾아 칼을 갈무리하
며 중얼거렸다.
"양지바른 곳이라면 이곳 호북에도 많으니 걱정하지 마시요."
"후욱, 후욱... 못난 꼴이다...."
"무슨 말이오? 오늘의 적 대협은 최고였소."
"입 발린 소릴랑 계집들에게나 하게나. 큭큭큭....."
적괴는 죽어가고 있었다. 아니, 지금까지 생명줄을 놓지 않고 있다
는 게 신기할 정도로 그의 몸은 철저히 망가져 있었다.
환약이라도 꺼낼까, 하다 북궁단야가 품에 넣었던 손을 슬며시 제자
리로 가져가자 강시 같은 사나이의 입에 건조한 웃음이 걸렸다.
"난 운이 좋군."
역시 등을 맡기기에 충분한 동료였다. 솔직히 과분하기까지 했다.
그가 환약이나 추궁과혈을 한답시고 부산을 떨었다면 섭섭했을 거다.
자신의 몸은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한계점으로 가고 있었으니까.
"헉, 헉... 그나저나 큰일이 났다."
"또 무슨 말이오?"
적괴의 앞에 꿇어앉은 북궁단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혼전 중이라고는 해도... 우리가, 쿨럭, 너무 무심했어. 맹주께서
자취를 감추는 것도 몰랐으니."
"음?"
깜짝 놀란 그가 적괴의 시선을 쫓아 지청완이 앉아 있던 곳으로 눈
을 돌렸지만 지청완의 종적은 이미 묘연해진 뒤였다.
"이런...."
그들을 믿지 못해서일까?
"관둬.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분의 퇴로를 열어드리는 것까
지가 우리의 몫이었으니까. 더 이상 생각할 것 없지 않은가."
어쩌면 그 말이 정답일 거다. 더 이상 생각할 것 없지 않은가."
어쩌면 그 말이 정답일 거다. 맹주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었을 것
이고 그건 누구도 대신하지 못할 터였다. 늘 그래 왔듯이.
"아까 운조를 날려 버린 검식... 멋졌다. 후후... 언젠가, 쿨럭, 제
기랄! 말도 잘 안 나오는군. 언젠가 자네들과 술 한잔을 하고 싶었는
데."
"지금이라도 괜찮다면."
".......?"
다소 놀란 적괴의 눈앞으로 반쯤 비워진 술병 하나가 불쑥 내밀어졌
다.
"이 친구 이거, 쿨럭, 근무 태만이야. 털보당주가 알았다면 감봉감
이라고."
"걸릴 거라면 술병을 가져오지도 않았소."
"큭큭큭, 맞아, 맞아, 안 걸리면 장땡이지."
빼앗듯 술병을 건네받은 적괴가 신경질적으로 술을 들이켰다.
힘차게 움직이는 목젖의 움직임과 다르게 급격히 사그라지는 생기.
그렇지만 적괴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비틀려 있었다.
그리고 이제 북궁단야는 그것이 낯설지 않았다. 그 안에 움츠러든
개구리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그는 어둠에 쫓기는 사슴이 아니라 어
둠을 쫓는 추적자였기에.
그는 어둠을 이미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포용한 인물이었기
에.
"내가 미친놈으로 보였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치무환검존을 이긴 상대에게 무림십장의
이름으로 달려들었다면 누구라도 고개를 저었을 테니까.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처음부터 환검존이었고 처음부터
십장생은 아니었잖나. 처음부터 유령장이 아니었던 것처럼."
"좀 쉬시오."
이번에 쉬면 아주 쉬는 거야, 하고 북궁단야의 말을 막은 적괴가 숨
을 몰아쉬다 눈을 들어 장내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이리저리 패인 흙들과 부러져 나간 나무들, 어지러이 찍힌 족적과
때론 점점이, 때론 강물처럼 흥건히 대지를 적시고 있는 핏물들.
그리고 두 구의 시체. 이승에서 맺어지지 못한 연인들의 시신이라고
칭해야 할까. 아니면 천하를 위협하는 십장생의 한 축이 무너진 광경
이라고 해야 할까.
어떤 이름을 붙이든 이 광경이 적괴의 눈으로 마지막 담을 세상이고
전부였다.
'그럭저럭 괜찮아.......'
무엇보다 자신이 한껏 등을 보일 수 있었던 동료가 함께 있었으니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그녀에 대한 단상이 떠오르자 적괴가 왈칵 눈을 감아버렸다. 쏟아지
는 달빛을 보자니 그녀의 너울거리는 춤사위가 손에 잡힐 듯 다가와
견디기 힘들었다.
"육초라고 만들었는데 형편없이 깨져 버렸어. 삼십 년이 넘도록 한
거라곤 그게 다인데 말이야."
마른 기침 속에 간간이 섞여 나오는 내장들을 보며 뭐라고 투덜거리
던 적괴가 낮게 읊조렸다.
"형편없지 않았소."
"억지로 금칠할 것까진 없다. 그래 봐야 변할 건 없으니까."
"그냥 봐줄 만은 했소."
"뭐?"
어리둥절해하던 적괴가 다시 키득거리다 이번엔 술병을 아예 거꾸
로 처박고 마음껏 술을 들이켰다.
"이 술 맛있군. 어디더라........"
"윤파파의 노상객잔에서 사 온 거요."
"맞아! 윤파파! 거기서 그놈하고 한잔했었는데!"
"그놈!"
누구도 '그놈'이 누구라고 언급하지 않았다. 인상착의를 설명한 적
도 없고, 그렇다고 어떤 암시가 주어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둘은 당연하다는 듯 그놈에 관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놈이
좋아하는 그곳과 더불어.
"나도 그놈하고 그곳에서 한잔했었소."
"흠, 그럼 그놈은 그곳과 인연이 깊군."
"어울리지 않소? 그놈과 그곳 말이오."
마주 본 그들이 서로 씩 웃었지만 곧 북궁단야는 고개를 숙였다. 어
쩐지 적괴를 마주 대할 수 없었기에.
"뭐야, 그 자세는?"
"혼자 다 먹을 거요?"
뭐라고 말릴 사이도 없이 적괴에게서 술병을 낚아챈 북궁단야가 병
입구에 묻은 피를 닦지도 않고 입에 술병을 쑤셔 박았다.
"묻었잖나."
"죽지 않으면 그만이오."
"허....."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던 적괴가 기침인지 웃음인지 분간하기 어려
운 무언가를 터뜨리고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웃기는 일이야. 자네가 그리 말하니 꼭 그놈 같지 않은가?"
"그건 욕이요."
"그건 모르겠고, 그놈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죄다 그놈처럼 변하더
군."
"병균인가 보오."
"그래? 난 그 놈이 부러웠었는데?"
당치도 않을 소리라고 하려다 북궁단야는 적괴의 눈에 어린 진심을
보고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놈이 부러웠었지. 그곳에 너무나 어울렸던 그 녀석의 모습이 말
이야."
"부러울 것도 많소."
갑자기 적괴의 숨이 가빠졌다. 달리 할 것이 없었기에 북궁단야는
적괴의 손을 잡고 진기를 밀어 넣어주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격
이지만 다소의 시간이라도 벌어줄 수 있다면 이런 수고는 아무것도 아
니었다.
"따뜻하군."
"........"
때가 왔다. 적괴의 눈은 더 이상 세상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는 이승의 사람들이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은 추운데 마음은 따뜻해. 이렇게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어딜 간다고 자꾸 그러시오."
"말장난은 관두자고."
킥킥거리던 적괴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북궁단야의 손을 마주 잡았
다.
"두 가지만 부탁하자. 들어주지 않아도 어쩔 도리가 없지만."
"세 가지도 들어드리리다."
한 열가지 부탁할까, 하며 이죽거리던 적괴가 숨이 막히는지 힘없
이 상체를 구부렸다.
"적 대협!"
"하아, 하아... 첫 번째로 국주님께 전해라. 이제 팽가 놈들과 적괴
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그리고 마지막까지 심려를 끼쳐 죄송스럽다
고."
역시 적괴의 한설오식은 팽가의 것이었나 보다. 그러나 그는 어둠을
승화시킨 여명불요로 권위적이기만 했던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무너뜨
렸다.
오대세가 그 어느 곳에서 여명불요와 같은 장법이 나올 수 있을까?
"반드시 전하겠소."
"그리고....."
북궁단야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적괴의 말이 이어졌다. 그도 직감
적으로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았을까.
"그리고... 당소저가 나에 대해 묻거든 그냥 이렇게 말해다오, 후욱,
무슨 말을 나눌 사이도 없이 가버렸다고 말이야."
"적 대협!"
"그래 주겠나?"
"적 대...."
"그래 주겠냐고 묻잖나."
그의 텅 빈 동공을 바라보던 북궁단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지 않으면 평생이라도 그렇게 바라볼 것만 같았기에.
"술 남은 것 있나....."
북궁단야가 거의 바닥을 보이는 술병을 건넸지만 적괴는 그걸 받아
입가에 가져가지 못했다.
"아직도 무겁군. 많이 마셨다고 생각했는데....."
인생도 그런 걸까. 많이 왔다고 생각했건만 알고 보면 제자리였고,
제자리라고 여겼더니 멀찌감치 건너와 있는.
"쉬고 싶군. 노래 한 자락 해주겠나?"
말해 놓고 보니 우습다. 저 긴 머리 청년에게 노래 따윈 어울리지 않
았으니까. 그리고 북궁단야가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서자 적괴의 얼
굴에 고소가 어렸다.
"뭐야, 정말로 노래라도 하려는........"
킬킬거리던 그의 눈이 더할 나위 없으리만치 커졌다. 북궁단야는 놀
랍게도 너울너울 춤을 추기 시작했으니까.
"지금 뭐 하는......"
뭐 하는 걸까?
'저건!'
내뻗었다 빠르게 들어가고, 돌아섰다 다시 움켜쥐는 손. 나섰다가
한 발 물러서고, 물러섰다고 여겼는데 어느새 앞으로 내치는 유연한 보
보.
다소 어색했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당소소의 팔황점수였다. 그녀만
큼의 유려함은 없었지만, 그녀만큼의 화사함은 담겨 있지 않았지만 북
궁단야의 팔황점수는 그녀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언제까지나 행복하길.......'
입가에 미소가 짙어질수록 그의 눈은 점점 희뿌옇게 멀어져 갔고 그
걸 아는지 모르는지 북궁단야는 치렁치렁한 긴 머리를 나부끼며 몰아
의 경지에서 춤사위를 펼쳤다.
그의 송혼무(送魂舞)가 절정에 치닫고 외톨이 무인의 미소가 더없이
짙어질 때 하늘 한구석에서 작은 한숨이 바람이라는 이름으로 적괴를
감싸주었다.
이효, 고담, 장추삼, 철무웅, 사마검군, 북궁단야, 하운, 단사민, 그리
고, 그리고,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수많은 얼굴들.
모두들...
'안녕히.'
쨍그랑!
그의 손에서 술병이 미끄러지며 산산이 깨졌지만 북궁단야의 춤은
멈출 줄 몰랐다. 젊은 검수의 눈가에 흐르는 한줄기 눈물을 말없이 목
도한 달님도 언제까지나 그렇게 제자리를 지켜줄 것만 같았다.
첫댓글 정말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아프고 슬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