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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2일 연중 제25주일(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제1독서 : 지혜 2,12.17-20
제2독서 : 야고 3,16─4,3
복 음 : 마르 9,30-37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지혜서에서는 의인들의 영혼이 불멸하며
하느님의 손안에서 평화를 누리리라고 말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가장 늦게 작성된 지혜서는
내세에 대한 희망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지혜서보다는 좀 더 이른 시기,
이스라엘에서 유다교가 외세의 박해를 받던 시대에
다니엘서와 마카베오기 같은 책들에서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나타납니다.
여러 해 전 어느 날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내세와 부활에 대한 믿음이 뚜렷해지면서
순교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을 하자
누군가 “순교자들은 내세에 대한 확신이 없었더라도
순교를 하였을 것 같은데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다니엘서 3장 17-18절에서 다니엘의 친구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불가마에서 구하여 내시지 않더라도
다른 신들을 섬기지는 않으리라고 말합니다.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친 것은 장차 받을 영광과 상급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고, 그 사랑마저도 시작은 하느님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로마 8,32)
우리에게 사랑을 부어 주셨기에,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었기에]”(8,37)
박해와 칼도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먼저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내어 주신 분,
그 사랑에 우리도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나서게 됩니다.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오늘,
순교자들이 지녔던 큰 사랑과 용기를 본받으려 한다면
먼저 순교자들이 만났던 하느님을 우리도 만나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에 응답하는 우리의 사랑이 없다면, 다만 상급을 바랄 뿐이라면,
십자가를 지는 것도 무의미할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난여름은 정말로 더웠습니다.
수도권에만 38일간의 열대야가 있었고,
열대야가 끝났어도 낮 더위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9월의 중순도 넘어가면서 좀 살 만합니다.
이렇게 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겨울을 생각하게 됩니다.
겨울 하면 겨울나무가 떠올려집니다.
봄의 화사한 꽃도, 여름의 싱싱하게 푸르던 잎도,
가을의 풍성한 열매도 다 떨어뜨리고
마치 죽은 것처럼 딱딱한 가지만 남아있습니다.
사실 아주 현명한 모습입니다.
푸르른 나뭇잎을 겨울까지도 가지고 있으면
혹독한 추위에 가지고 있는 많은 물기가 얼어서 터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나무 전체가 죽고 맙니다.
그래서 나무는 가을이 되고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
잎사귀로 들어가는 수로를 막아 버립니다.
물이 공급되지 않아서 나뭇잎은 마르고 땅에 떨어집니다.
버리는 길이 바로 자기 살길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하지만 버리기가 참 어렵습니다.
돈, 명예, 지위….
그 밖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기란
새로운 것을 얻는 것보다 더 힘듭니다. 바로 집착 때문입니다.
자기 삶에서 무엇을 첫 번째 자리에 두어야 할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기껏해야 100년입니다.
과연 무엇을 가지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제까지 많은 죽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무엇을 가져가시는 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묻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수난과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세상의 칼날에 쓰러질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의 관점으로만 판단하고 있어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까지 합니다.
그들은 모두 첫째가 중요했고, 가장 높은 자리가 중요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만 보는 집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며,
어린이 하나를 세우시고 그를 사랑으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즉, 집착을 내려놓고 겸손하고 낮은 이,
마음이 순수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많이 가지고 큰 것을 차지하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까지 짊어지는 용기와 자기 비움,
그리고 작아짐을 택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진짜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가 걸어야 할 참된 길을 제시해줍니다.
곧 '첫째가 되는 길로 모든 이의 종이 되는 길'(마르 9,35)을 제시합니다.
제1독서인 <지혜서>의 의인은 예수님을 표상합니다.
의인에게 덫을 놓는 악인들의 위협은 마치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야.”(마태 27 43)라고
비아냥거리는 유다 지도자들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 후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마르 9,34)는 문제로 논쟁을 벌인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는 이가 걸어야 할 길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가시는 것과는 달리
제자들은 자신들의 키 재기와 힘겨루기를 하며, 자신들의 야심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스승의 죽음을 목전에 둔 제자들이 벌리는
철없고 어처구니없는 어리석은 논쟁을 하고 있지 않는지 들여다볼 일입니다.
우리도 여전히 사람들 앞에서 큰 사람, 높은 사람 되어
자신의 야망을 채우려 하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야고보는 이를 잘 말해줍니다.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야고 3, 16)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야고 4,1)
반면에, '위에서 오는 지혜'와 '의로움의 열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위에서는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야고 3,17-18)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이 말씀은 '첫째'가 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진정한 첫째'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첫째'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마르 9,34)는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봅니다.
"하느님 앞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고 높은 사람인가?"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의 종이 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이의 종이 되라' 하심은
단지 자신을 비우고 ‘꼴찌’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높여 받드는 사람입니다.
다른 이를 존중하고 앞세우는 이입니다.
곧 자신을 타인 아래 두고, 타인의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의 종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르쳐주시기 위해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껴안으시며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
그렇습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되,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님의 ‘종’으로서,
주님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께 ‘속한 이’로서 자신의 일이 아니라
주인의 이름으로 주인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란 당시의 가정이나 사회에서
군림하지 못하고 지배받고 군림당하는 이의 표상입니다.
그러니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회에서 천대받고 미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군림 받는 무력한 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어린이처럼 그렇게 무력하게 죽으러 가는
바로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첫째'가 되는 길이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곧 당신처럼 그렇게 당하면서 이루는 길을 '첫째'가 되는 길로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무력하여 사람에게는 '꼴찌'가 되고, 무력하기에 하느님께는 '첫째'가 되는 길입니다.
바로 이 길이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하는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주님!
자신을 앞세우지도 위에 두지도 않게 하소서.
이기기보다 질 줄을 알며,
억누르기보다 뒤집어쓸 줄을 알고,
업신여기기보다 존경하게 하소서.
자신을 낮추되 작은 이나 무능한 이에게도
낮추고, 타인을 섬기되 낮은 이나 힘없는 이도 섬기게 하소서.
자신을 실현하기보다 자신을 내려놓고,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게 하소서. 아멘.
꼴찌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눈높이로 내려오신 주님의 사랑과 겸손을
생각하는 가운데 모두를 새롭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바실리오 성인은
“여러분에게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자랑과 희망을 하느님께 두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겸손의 의미를 잘 가르쳐 줍니다.
겸손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나는 중요한 사람이다. 하지만 나의 가치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있는 나”를 인정하는 것이 참된 겸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순하고 얌전한 사람의 모습이 겸손이 아니라
나의 능력과 성공을 기뻐하되 교만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
특히 ‘내가 너보다 더 낫다’, ‘내가 너보다 더 고참이다’,
‘내가 더 연장자다’ 하는 생각을 다스립니다.
‘일은 내가 더 했는데 나보다 저 사람을 더 알아주는구나!’ 하는 생각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아직 겸손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겸손은 자기 자신에 대해 인정받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자랑하는 것(성 아우구스티노)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 하였느냐?” 물으셨고,
제자들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은 아주 가슴 아픈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예고를 하셨는데
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전혀 엉뚱한 문제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가파르나움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생각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동상이몽’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다볼산에서 영광스러운 변모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시련이 올 때 그것을 기억하며 극복하도록 안배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수난과 죽음에 관해 관심이 없었고, 높은 자리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베드로일까? 안드레아, 아니면? 요한...
줄 끊어질까 조바심을 갖는 것은 요즘도 여전합니다.
사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다 큰 사람은 아닌데도 말입니다.
큰 사람은 품이 큰 사람이요, 하느님을 차지한 사람입니다.
우리 신부들도 인사 철이 되면 누가 어느 본당으로 가나?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자리가 어디든 주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열두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 고 말씀하셨는데
꼴찌가 되고 종이 되라는 말은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 꼴찌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섬긴다는 것은 나 중심으로 살지 않고 상대방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가지고 그의 행복과 완성을 위하여
나의 정성과 노력을 다하고 심혈을 기울이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은 남을 위해 희생할 줄 압니다. 그래서 사랑은 위대합니다.
어떤 분이 사업이 잘되어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분이 돈을 많이 벌었다고 참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성공했다는 것은 그 재물을 어떻게 잘 썼느냐가 결정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배려하고 희생하며 헌신 봉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섬기기 위해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셨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2,6,-8).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며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살되, 세상에 끌려다니지 않고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우리의 모습이 빛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빛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세우시고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여라!’ 하신 이유는
어린이의 단순함과 순진무구, 천진난만한 모습을 받아들여라! 하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어린이는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부모나 다른 사람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고 그에 의지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앞에선 인간은 하느님께 온전히 낮추어 의탁하는 존재,
하느님의 사랑과 도움에 힘입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또 하나, 당시 사회에서는 어린아이는
미성숙한 존재로 인간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껴안으며 말씀하신 모습은
사랑의 행위요, 구원을 이루는 모습입니다. 파격적인 행동입니다,
소외되고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 꼴찌가 되고, 종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내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할 수밖에 없고 그러기에 그분을 힘입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부디,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퀴즈를 내겠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큰 꾸중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1). 남의 험담을 하는 사람 2). 험담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 3). 험담을 듣고 있는 사람.
험담을 듣고 있는 사람입니다.
듣고 있는 사람만이 악한 말을 멈출 수 있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험담을 하는 사람은 이미 나쁘게 말하려고 작정했기 때문에 스스로 제어할 능력이 없습니다.
듣는 사람만이 대화의 흐름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듣는 사람에게 가장 큰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매맞을 사람이 있는데 맞아도 많이 맞을 사람이 있다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누구의 험담을 듣지 마십시오.
혹 듣게 되면 흐름을 바꾸십시오. 바꾸지 못하면 응분의 책임이 따르게 됩니다.
험담은 세 사람을 죽이는데 첫째는 말하는 당사자입니다.
그는 하느님 눈앞에서 죽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인 말을 싸움 붙이고 욕을 보이고
남들의 사생활에 수군거리는 데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죽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고 주목할지 모르지만,
나중에 결국 자신도 그의 먹이감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그를 피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면 결국에는 자신의 가치도 그만큼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험담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죽습니다.
사실이냐 아니냐, 진실이냐 거짓이냐를 떠나서
다른 사람에게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힐 수 있고
그의 명예는 회복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으로 듣는 사람입니다.
험담을 듣는 것은 험담하는 것보다 더 나쁩니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듣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감추고 남을 험담하고 깎아내리며
자기 자랑을 하여 스스로를 높이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시기와 질투, 이기심을 멀리하여 겸손으로 의로움의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나를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랑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은 ‘본당의 날’입니다.
본당의 날을 지내면서 4행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본당의 날에 우리는 무엇을 할까요? 당연히 친교를 나누어야 합니다.
의로우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혼인 잔치에 초대된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오늘 본당의 날에 잔치를 벌였습니다.
맛있는 점심이 준비되었습니다.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었습니다.
‘족구, 피클 볼, 포인트 게임, 길거리 노래방, 찬양 팀 공연, 경품추첨’이 있습니다.
모두들 잔치에 참여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이분들은 열정과 땀으로 한국의 초대교회를 이끌었습니다.
이분들은 박해를 받아 순교함으로써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신 진정한 ‘영웅’들입니다.
오늘은 한국교회의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관악산 줄기에 삼성산 성지가 있습니다.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 주교, 성 베드로 모방 나신부,
성 야고보 샤스땅 정 신부님’의 묘소가 있는 성지입니다.
이분들은 박해의 시기에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조선의 정부는 외국인들이 선교를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신자들에게 외국인 신부의 거처를 밝히라고 고문을 하고, 죽였습니다.
범 주교님은 신자들의 고난이 큰 사실을 알았고,
다른 두 신부님에게도 신자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도록 자수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이렇게 외국의 사제들은 1839년 새남터에서 순교를 하였습니다.
서울 가회동에는 복자 최인길 마티아의 발자취가 있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중국에서 온 선교사 주문모 신부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신부님을 대신해서 관원들에게 잡혀갔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중국말을 잘하는 역관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최인길 마티아가 중국인 사제가 아닌 것을 알게 된 관원들은 더욱 가혹하게 고문을 하였고,
결국 최인길 마티아는 1795년에 순교하게 됩니다.
사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최인길 마티아의 뜨거운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사제들은 신자들을 위해서 순교를 하고, 신자들은 사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스럽습니다. 이분들이 한국교회의 영웅들입니다.
신자들에게 짐을 떠넘기려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사제의 작은 허물을 크게 부풀려서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강론 준비에 소홀한 신부, 성사를 정성껏 준비하지 않는 신부,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는 신부, 세상의 일에 더 관심을 두는 신부들은
삼성산 성지에 계신 외국인 신부님들의 마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려 하지 않는 신자, 가진 것을 이웃들과 나누지 않는 신자,
자기의 십자가를 남에게 지우려는 신자,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다니는 신자들은
복자 최인길 마티아의 헌신적인 삶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의 도움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높은 곳도, 천사도, 권세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 깊은 존경을 드립니다.
한국 최초의 사제이기도 하지만 순교로써 신앙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사랑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고, 길 위에서 순직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역시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조들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그와 같은 삶이 현재의 제도와 불의한 세력에 의해 탄압과 고통을 받는다 할 지라도
신앙인들은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부활하여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환난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잡혀 넘어갈 것이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의 독서와 복음도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신비를 계속 일깨워주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예수님은 누구시냐?” 하는 문제이다.
베드로는 십자가 없는 영광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여 스승의 수난을 거부했던 것처럼
오늘도 제자들은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를 듣고 같은 태도를 보인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마르 9,32).
오늘 복음을 보면 수난 예고를 듣고도 제자들은 깨닫지 못한다.
제자들이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으니 다른 군중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그 여정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 길은 아무도 제지할 수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31절).
“넘어가다, paradidotai”라는 동사는 수동형으로서
예수께서 이행하지 않을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을 암시한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승리가 있다.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31절).
이렇게 승리의 빛이 비치고 있지만, 사도들은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32절).
메시아의 고통은 그들에게 터무니없고 부활의 영광도 체험해 보지도 않았고
상상도 안 되는 엄청난 사건이다. 두려움에 싸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32절).
복음은 메시아의 수난 앞에 두려움에 싸여 있는데,
제자들은 누가 제일 높은지를 다투는 장면을 소개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길과 인간의 길이 얼마나 다른지를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버리기까지 스스로 낮추시는 데 반해,
사도들은 걸레 조각 같은 명예 다툼에 몰두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초라하게 만들고 있다.
이 같은 일은 우리 공동체에서도 흔히 일어날 수 있다.
만일에 그렇다면 교회의 참모습은 상실될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35절).
이것은 무질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 공동체나 교회 안에도 다른 형제들을 보살펴줄
첫째 자리를 차지할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고 하신다.
다만, 첫 자리의 의미와 권위의 의미를 뒤집어놓으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든 면에 있어서 자기보다 낫다고 여겨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사람만이 첫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형제들을 위해 십자가에 자신을 바치는 행위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당신의 왕권을 획득하셨다.
참된 권위라는 것은 봉사와 사랑에서 비롯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공명심으로 가득 찬 적대감이나 천박한 감정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교회는 고사하고 그 어떤 인간 공동체도 제대로 이루지 못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 그들 가운데 세운 뒤
그를 안으시며 그들의 본보기로 제시해 주신다.
이렇게 어린이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은 당시의 상황에서 혁신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37절).
여기에는 두 가지 사실을 담고 있다.
첫째는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던 어린이들과 같이 ‘꼴찌’가 되는 것이
당신 자신을 비천한 사람들과 동일시했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는 점이다.
즉 사도들이 예수님의 참된 증표가 되려면
어린이와 같이, 보잘 것 없는 꼴찌가 되어야 하고 그때 첫째가 될 것이다.
두 번째는 모든 어린아이는 무한한 가치와 품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과 같은 보잘것없는 이들 안에 신비롭게 현존하신다.
즉 배고픈 이들, 목마른 이들, 병든 이들, 감옥에 갇혀있는 이들 등
그들 가운데 항상 현존하신다(참조: 마태 25,31-46).
바로 그들의 품위와 가치를 존중해주시고
그들의 나약함을 감싸주시기 위해 그들 가운데 계시다.
그래서 그 어린이들이 당신의 사랑과 아버지 사랑의 성사라고 하신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37절).
어린아이의 미소와 사랑스러움과 같은 단순한 사실들의 가치를 발견한다면
2독서에서 말씀하시는 참된 지혜가 이루어질 것이다.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야고 3,17)는
겸손되이, 항구히 원함으로써만 가질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 지혜가 우리 마음에 올 때 “평화로운”(야고 3,17) 그 지혜는
우리와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한 ‘평화’의 풍성한 열매를 가져다줄 것이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야고 4,1-2).
윗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어리석은 욕망이 인간의 마음과 사회에 야기하는
부패의 면모를 이보다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함을 느낀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이 가르침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이 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표징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과 봉사를 통한 세상의 변화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의 변화이며 기적을 이루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봉사와 사랑(꼴찌)을 통하여 진정한 권위(첫째)를 드러낼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너를 존중하고 인정해 줍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젊은 수도자들의 선생 역할을 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초단기간에 세상의 물을 쫙 빼고 멋진 수도자로 탈바꿈시키려는 욕심에
도에 지나친 요구도 참 많이 했습니다.
제 코도 석 자인데, 저도 제대로 실천 못 하면서
형제들을 몰아붙이던 기억이 떠올라 씁쓸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그래도 제 마음 안에는 어떻게든 형제들의 초보 수도 생활을
일취월장시키려는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구도 많았고 기대치도 높았습니다. 그 결과 갈등도 많았고 실망도 컸습니다.
12사도를 당신의 최측근 협력자로 부르신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열두 제자 한명 한명을 두고 따져보니 한 마디로 오합지졸, 당나라 군사들이었습니다.
대체로 가방끈도 짧았고, 뭔가 내세울 것도 마땅히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묻는 것조차도 두려워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제자들이었지만
아직도 세속적인 야심으로 가득했고, 예수님을 통해 뭔가 얻어내고,
한 자리 차지하고픈 기대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제자단의 모습이 오늘 복음 안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카파르나움으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길에서 한바탕 논쟁을 벌였습니다.
논쟁의 주제는 일종의 서열 싸움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분노에 앞서 큰 서글픔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높아지지 말고 낮아져라, 커지지 말고 작아져라,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섬겨라,
그렇게 목청껏 외쳤건만, 아직도 서열 싸움을 하고 있으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십니다.
아무리 말로 교육을 시키려 해도 안 되니, 특별한 교육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살암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코 9,37)
어쩌면 오늘 우리도 그 옛날 극도로 미성숙했던 제자들,
틈만 나면 내가 높으니, 네가 높으니, 서열 싸움을 하는
제자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너를 존중하고 인정해 주면 좋으련만,
수시로 나와 그를 비교하고, 어떻게든 상대의 위에 서려고
발버둥 치는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말씀을 하시리라 확신합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코 9,35)
순교는 과연 행복한 선택인가?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한국 순교 성인들의 업적을 기리고 본받으려는 마음을 갖는 날입니다.
그런데 요즘 순교는 조금 남의 이야기이고 어리석은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하시지만,
사실 사람은 어떤 것이 ‘행복’으로 보여야 선택합니다.
자살까지도 이 세상이 너무 고통스러워
더 행복해지는 길이라 여기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교의 길로 가려면 순교가 참으로 행복으로 보여야 합니다.
만약 죽을 때도 후회가 없다면 그 삶은 행복일 것입니다.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다섯 가지(The Top Five Regrets of the Dying)』라는 책을 쓴
브로니 웨어(Bronnie Ware)는 죽기 직전 사람들이 후회하는 것들 중에
공통된 다섯 가지를 찾아냈습니다.
첫째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한 것`입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 기대에 맞춰 자신의 삶을 살았던 것을 후회했습니다.
둘째는 `일을 너무 열심히 한 것`입니다.
대부분 남성환자들이 이러한 후회를 했습니다.
이들은 직장 생활 때문에 아내, 자녀들과
따뜻한 가정생활을 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셋째는 `감정 표현에 솔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타인들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숨긴 것이
어쩌면 지금의 `병`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었습니다.
넷째는 `옛 친구들의 소중함`입니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오랜 친구들이 보고파 연락을 시도했지만,
그들의 연락처조차 알 수 없어 절망스러웠다고 합니다.
마지막은 `내 행복을 위해 노력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많은 행복을 위한 선택을 하며 살았지만,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면 순교자의 삶을 이 다섯 가지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최초에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오게 한 광암 이벽 성조를 봅시다.
그는 정약용이 친구로서 인정할 정도로 천재였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 연구를 통해
천주교가 진리임을 깨달았고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일하는 것보다 진리에 더 심취했습니다.
진정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찾았습니다.
이승훈을 중국으로 보내 세례를 받게 하고
자신은 스승인 권일신, 권철신까지 설득하여 박해받는 상황에도 천주교 신자를 늘렸습니다.
아버지가 문중의 꾸중을 받고 오자 아버지는 이벽을 집에 가둡니다.
그리고 배교하라고 강요합니다.
이벽은 솔직히 자기감정을 털어놓고 집에 갇혀 죽습니다.
아버지에게 독살을 당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주위에 친구들이 많았을까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문에 같은 유배나 순교의 길을 가야만 했지만,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외에도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등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수많은 목숨을 함께 할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은 누구의 행복도 아닌 자기 행복을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내가 행복이라고 믿는 길을 갔기 때문에 후회가 있을 수 없습니다.
75년간 하버드에서 연구한 행복은 돈이나 명예가 아닌 ‘관계’였습니다.
주위에 생명의 은인이 많이 모이는데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쓰나미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을 자신이 사는 언덕으로 올라오게 하려고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것 때문에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주위에 많다면
그 사람은 집을 잃었어도 사람을 얻었기에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 의원 선우경식 원장은 수십만 명의 환자를 거저 치료해 주었지만,
가난한 그 환자들이 자신에게는 행복을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맞아준 철거민들과 학생들은 그분을 생명의 은인처럼 좋아했습니다.
이태석 신부나 마더 데레사 주위의 많은 이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모읍니다.
나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게 하는 수많은 사람을.
그래서 십자가의 삶은 행복의 유일한 길입니다.
교회는 섬김과 더불어 발족하다.
서공석 요한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따로 가르치신 바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유대교 전통이 가르치던 것과는 다른 가르침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한다.’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그들 앞에 세우고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또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복음서들은 모두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세 번 예고하신 것으로 말합니다.
오늘 복음도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니까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다 알고 예언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예수님을 온전한 인간이라고 말하는
그리스도 신앙의 근본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그 사회의 권력자나 기득권층을 거슬려 말하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도,
미래에 닥칠 일을 소상히 알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는 복음서의 말씀을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직접 하신 말씀 그대로라고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더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고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본인이 미리 알고 계셨으면,
그분의 죽음은 참다운 죽음이 아닙니다. 잠시 죽는시늉을 한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인간은 죽음 후의 일을 모릅니다.
신앙인은 죽어서 하느님에게 간다고만 믿고 죽어갑니다.
예수님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고 그분을 부르면서 죽어가셨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당신의 시선에서 놓치지 않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참으로 죽으셨다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 사도신경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셨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죽음의 나라인 저승으로 간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사도신경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은
여니 인간의 것과 같은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당황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분의 부활을 기다린 흔적은 복음서들 안에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발현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들은 믿지 않았고(마르 16,14),
예수님이 실제 나타나셨을 때도 그들 중 “더러는 의심을 품었습니다.”(마태 28,17).
부활은 제자들이 기대하고 기다렸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서들이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세 번씩이나 예고하신 것으로 기록한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초기 교회는 예수님의 죽음이 ‘당신을 내어 주고 쏟으신’ 결과였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들은 성찬을 거행하면서 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복음서들이 기록될 무렵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이 우연히 체포되어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당당히 십자가를 향해 가셨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내어주고 쏟는 사랑의 삶을 사셨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요한 13,1) 결과가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그분이 당신의 죽음을 세 번씩이나 예고하신 것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 다음에 나오는 것이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어린이 하나를 껴안으시면서 어린이를 받아들여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시대 어린이는 보잘것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세상에도 섬김은 있습니다. 우리는 높고 강한 사람을 섬깁니다.
노예가 주인을 섬기고 병사가 상관을 섬깁니다.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섬깁니다.
약자가 강자의 그늘에서 살고, 강자의 권력과 재물에 힘입어 발전하는 수단입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의 질서 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권하시는 것은, 전혀 다른 질서입니다.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신 분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권좌에서 사람들의 섬김을 받고 군림하시는 양식으로 계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권력자가 사는 양식입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을 우리가 전능하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분은 자비와 사랑에 전능하시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자비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비와 사랑에 상대방이 보답할 것을 기대합니다.
하느님은 보답을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어린이를 등장시켰습니다.
어린이는 보답하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또한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무런 보답이 없는 곳에,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또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섬김과 더불어 발족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이 오셔서 교회가 발족하였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는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실 협조자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내가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섬김을 생각나게 하고 실천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 섬김 혹은 봉사라는 단어는 많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신분의 서열이 있습니다.
과거 로마제국과 유럽 봉건사회에서 얻어온 권력과 지배를 상징하는 신분이고,
그것에 따른 복장과 호칭들입니다. 그런 것이 유령과 같이 교회 안에 아직도 살아 움직입니다.
그런 것에 짓눌려 성령은 예수님의 말씀을 교회 안에 살려내지도 못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꼴찌가 되어’ 섬겨야 한다는 복음 말씀은 교회 안에 실천으로 살아나지 못하고
창백하게 퇴색된 문자로 성서 안에 남아 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가르치고 실천하신 바를
우리 안에 다시 살아나게 하는 하느님의 숨결이십니다.
우리는 세례와 견진에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우리 안에 ‘꼴찌가 되어’ 섬기겠다는 마음이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의 욕심에 짓눌려 죽어 계시지 않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약자 앞에 무자비하면서 이웃에 대한 우월감으로 우리가 살고 있다면,
‘꼴찌가 되어’ 섬기는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살아계셔야 합니다.
‘꼴찌가 되어 모든 이를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실천안에 살아나야 합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