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0일 무순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곧장 고이산성에 보게 됩니다. 고이산성은 무순시내에서 아주 가깝고, 남문 주변까지 차가 도착하므로, 정확히 남문 입구에서 내리게 되면 곧장 성벽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처음 제가 고이산성을 답사했을 때는 성이 어떻게 생겼는지 조차 알지 못하고 그냥 이곳이 고구려의 중요한 성이었다는 것만을 확인하고 사진도 거의 못 찍고 돌아섰던 기억이 있습니다. 고이산성에 대해 미리 알고 가지 않는다면, 그저 평범한 산자락을 보고 왔다는 것 외에는 기억될 것이 없을 지도 모릅니다.
고이산성은 무순시 북쪽 고이산에 있습니다. 해발 230m의 장군봉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동성과 서성으로 구분되고, 동성과 서성 남쪽에 남위성, 서북쪽에 북위성, 동남쪽에 고리모양의 이중성(또는 3중성)을 배치해 여러 성이 결합된 복잡한 평면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주성은 동성으로 둘레가 2,800m이며, 4곳에 문이 있습니다.
신성은 처음에는 동성을 쌓고, 동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서성을 비롯한 주변성들이 축조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서성 등을 합친 성의 전체 둘레는 4㎞가 넘습니다. 서성은 평상시 활동공간이 아닌 유사시 동성을 보조하던 구역입니다. 동성의 남문은 남쪽 골짜기 입구에 있는데, 그 앞이 남위성 구역입니다. 남위성은 동성의 남문 쪽 방어를 위해 축조한 것인데, 현재 남위성 성벽은 상당부분 훼손되어 있습니다. 현재 남위성 쪽에는 멀리서도 보이는 높은 전탑이 하나 서있는데, 고구려와 무관한 요금대의 팔각전탑입니다. 관음각이라는 사찰도 고구려와 무관하므로, 이곳은 방문하지 않겠습니다.
성에서 나온 유물은 동성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는데, 약 500개 이상의 무기를 비롯한 철기와 100개 이상의 온전한 질그릇, 화폐, 수레 부속품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고이산성 동벽에서 1,5㎞ 떨어진 곳에는 100기의 무덤이 있는 시가구묘지가 있습니다. 기와와 막새 등의 출토품이 신성에서 나온 것과 같아, 신성 사람들을 위한 묘소로 봅니다.
현재 동성의 남문과 북문을 지나는 도로가 뚫려 있는데, 이 도로는 무순에서 철령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과거에도 중요한 교통로였습니다. 또한 현재 고이산성 남쪽에는 혼하가, 북쪽에는 심양에서 길림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혼하를 따라 내려가면 요하와 요동평원으로 나갈 수 있고, 혼하를 거슬러 올라가면 남잡목, 신빈으로 이어지는데 지금도 남잡목을 거쳐 환인, 집안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신빈 지역에서 성장한 건주야인의 누루하치도 무순을 거쳐 심양, 요양으로 진출했던 것처럼, 신성은 고구려의 요동진출 거점이면서 철령 등 서북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한 요충지였다고 하겠습니다.
고이산성에서 동쪽으로 32㎞ 떨어진 무순시 장당현 고려영자촌에는 철배산성이 있습니다. 철배산성은 고구려의 남소성으로 비정되는 곳인데, 누루하치가 이곳에 계번성을 쌓고, 행궁을 두고 서쪽 진출을 노렸던 적이 있습니다. 1619년 명군은 계번성을 향해 심양에서 무순을 거쳐 공격해옵니다. 또 명의 북로군은 해서여진의 여허 부족과 함께 연합해 건주야인을 공격해 옵니다. 이들은 철령에서 무순방면으로 진군해왔습니다. 누루하치는 쳐들어오는 명군을 지금은 대화방수고(큰 저수지)에 수몰된 사르후에서 대파합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만주족은 청을 세울 토대를 마련하게 됩니다. 당시 만주족과 명의 진군로를 살펴보면, 무순 지역이 심양, 철령, 신빈으로 이어지는 대단히 중요한 교통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구려 시대에도 무순에 위치한 고이산성은 고구려가 모용선비, 부여, 거란, 돌궐 등과 대결하기 위한 중요한 요충지였다고 하겠습니다.
서기 293년 봉상왕이 도성 밖에 있다가 모용선비의 기습을 받고 위기에 처했을 때 신성태수 북부 소형 고노자가 500기병으로 그를 맞이하고, 적을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모용선비의 군대를 막는 요충지로 신성은 이때부터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신성은 551년 9월 돌궐군의 공격을 막아내었고, 612년 수나라와의 전쟁, 645년 고-당 1차 전쟁, 667년 고-당 3차 전쟁 등에서 고구려 요동방어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성이었습니다. 특히 645년 전쟁에서는 이세적, 이도종이 이끄는 당군을 철저하게 방어함으로써, 건안성과 함께 고구려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성입니다.
하지만 667년 배신자 사부구가 성주를 결박하고 성문을 열어 항복함으로써 함락됩니다. 신성이 항복하자 주변 16개 성이 모두 당나라에게 항복한 것으로 볼 때 신성은 주변의 여러 성들을 거느린 대성, 즉 지방장관인 욕살이 주둔한 성으로 여겨집니다. 신성은 요동성, 건안성, 오골성 등과 함께 요동 지역의 가장 핵심적 성이었습니다.
고이산성은 역사적으로는 대단히 중요하지만, 답사하기에는 그리 좋은 성은 아닙니다.
대부분이 토성이라서 성벽과 자연 능선을 구분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성벽 축조 방법을 잘 볼 수 있는 곳은 동성의 남문과 동문 주변입니다. 성벽은 산등성이 위에 흙을 덧쌓는 방식으로 축조했는데 다져진 흙의 한층 두께는 8~10㎝ 정도입니다. 동성의 동문 방향 북쪽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있는데 현재 남은 높이가 8m, 밑 너비 24m 정도입니다. 또 동성과 서성의 경계벽 남쪽 구역은 큰 돌로 먼저 한 줄로 돌벽을 쌓고 위에 흙을 다져 쌓았는데, 높이가 5m 되는 곳도 있습니다. 동성 남문터 양쪽에는 옹성시설이었던 높이 10m의 판축흙벽이 남아 있습니다.
또 남문 서쪽에 수문시설이 있는데, 현재 물도랑 옆에 큰 돌들이 남아있습니다. 동문터 남쪽 벽은 돌로 계단식으로 5~6단을 쌓았습니다. 동문 넓이는 약 5m로, 통로의 3단 돌계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동성 서북쪽 장군봉 위에는 흙으로 15m 높이로 쌓은 장대터가 있습니다. 동성 안에는 3개의 샘물이 있는데, 동문 서쪽 샘물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고이산성을 제대로 답사를 하려면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만, 서성과 남위성, 북위성, 이중성 등 부속 성들은 생략하고, 동성의 남문과 동문 주변을 집중해서 보고 가급적 1시간 안에 짧게 답사를 하겠습니다. 늦어도 3시경에 무순을 떠나야, 철령시 최진보산성까지 답사를 할 수가 있을 듯합니다.
아래 사진 가운데 5~9 사진은 구글 이미지 사진을 퍼온 것입니다. 지난 번과 중복을 피하고 다양한 이미지를 보여드리기 위해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