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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2장1~14절/아브라함의 순종의 믿음
구약의 갈보리 사건으로 불리는 이삭 희생 제사 사건과 관련된 말씀으로 창세기 22장1~8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산으로 가서 이삭을 번제로 바칠 것을 명령하시는 것으로 시작하여 아브라함이 3일 길을 가서 이삭을 희생제사로 드리려는 시간 까지를 말하고 22장 9~14절에서 아브라함이 실제 이삭을 희생 제물로 드리려는 순간에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어 이삭 대신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숫양을 희생 제물로 드린 사실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2장 15~19절에서 제사를 마친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두 번째 부르시고 땅과 후손의 언약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 최대의 사건이었던 이삭의 희생 제사 사건은 한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또한 반대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믿음과 순종의 절대 경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를 통하여 구약 선민 이스라엘 민족의 최초의 직계조상으로 뿐 만 아니라 모든 세대의 영원한 믿음의 아버지로서 지위를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삭 희생 사건을 이해함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정도를 시험하기 위한 표면적 목적과 아물러 인간의 구원을 위한 구속의 필요성과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 수난을 통한 성취를 보여주고자 하였던 궁극적인 목적까지 동시에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아울러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만 아니라, 이삭의 믿음과 순종도 깨닫고 살아야 한다. 이삭은 자신을 제물로 받치려는 아브라함의 의중을 파악한 후에도 노쇠한 아비를 거슬리고 빠져나올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지만, 이삭은 묵묵히 자신의 아비와 그 아비의 하나님이요 자신의 하나님이기도 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마지막까지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 믿음을 보인 아브라함과 이삭의 순종과 인간들, 자신보다 인간을 더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울려 빚어낸 이삭 희생 제사는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 정착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그 마지막 과정이 비로 불레셋 왕 아비멜렉과의 언약을 체결하므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1장 22절에서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의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면서 서로의 관계를 회복하고 언약을 체결하여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가나안 땅에 거하는 아브라함에게는 이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때에 하나님을 아브라함을 불러 시험합니다.
1절에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시는 경우는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성숙함과 순종의 지순함을 친히 확인하고 확증하시고자 거룩한 시험대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성도는 시험을 당할 때 왜 이러한 시험이 찾아왔을까 의아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일생생활 가운데 당하는 시험 뒤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려줍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용납되는 일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면 우리에게 닥친 모든 시험을 이길 힘을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함 이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확인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부르시는 목적은 바로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받치라” 하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명령을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이런 시험의 목적은 시험 받는 자를 연단하여 그가 하나님을 더 잘 알고 깨닫도록 하기 위함 이었습니다(출16;4, 신8;2, 시26;1~3)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진정한 의도는 이삭을 죽이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지를 알아보는데 있습니다(12절) 따라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 시험을 통해 아브라함의 신앙을 얼마나 크게 성장시키고 또 얼마나 큰 복을 주실까? 하는 것에 대해 큰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모습은 통해서 감동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 항상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즉각적이고 명쾌하게 응답했다는 사실을 통해 당시에 아브라함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매우 예민하게 대처하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깨어 있는 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를 기뻐하시며 그런 자와 친밀히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눅12;37)
2절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의 시험은 물질이나 명예나 권세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인간적으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청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이기도 한 아들이었습니다. 이삭은 낳은 아브라함은 너무나 기뻐서 큰 잔치를 베풀며 많은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였습니다. 그의 모습 하나 하나가 그에게 기쁨이요 감사였습니다. 웃음이 끝나지 않은 행복이었습니다. 그런 아들은 하나님께서 제물로 드리라고 하신 이유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려는 의도도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삼으시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를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 못 박아 희생 제물로 죽이실 것을 미리 보여주기 위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요3;16)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갖고 있던 지극한 부성애와 아들로 인해 아브라함이 누리고 있었던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던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향하여 오직 당신만이 그들의 가장 큰 소망이요 기쁨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시16;2)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받치라는 곳은 모리아 땅이었습니다. 모리아의 위치는 아브라함이 거하던 브엘세바에서 삼일 길의 거리에 있었습니다(4절) 그 정확한 위치는 밝히지 않으나 예루살렘에 위치한 구릉 지역으로 훗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나타났고(삼하24;16) 솔로몬의 성전을 건축하였던 지역(대하3;1)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그 곳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를 원하셨습니다. 번제는 “올라간다.” 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희생물을 태운 연기를 하늘로 올라가게 해서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는 제사의 한 방법” 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요구는 단순한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해와 상식을 뛰어넘는 명령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요구를 지금 아브라함에게 하셨습니다. 이는 자기를 부인하는 온전한 복종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는 온전한 헌신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인간적인 판단과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욕심과 자아를 죽여서 절대 믿음, 절대 순종을 행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한 순종을 결심하고 이행합니다.
3절에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주신 곳으로 가더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엄청난 명령을 받고 이상할 정도도 담담하게 순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다음날도 아브라함의 일상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다음날 이른 아침에 아브라함의 행동을 보면 순종의 채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즉각적이고 절대적인 순종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채우고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챙겨 모리아 산으로 출발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기 위해 세심하고도 면밀하게 준비를 했으며 또한 행동도 신속하게 행하였습니다. 참된 믿음과 순종은 단순히 생각과 말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노력하고 행동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4절에“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 본지라”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이 있는 예루살렘까지 약75km 거리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삼일 길을 가는 곳이기는 하지만 아브라함이 가는 길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러 가는 길입니다. 이러한 길을 삼일 동안 가는 시간에 아브라함의 내면의 갈등은 엄청난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이 여정을 세상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스스로 제물을 삼고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를 향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행진의 그림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흘 길 여정이 끝나고 이제는 이삭을 제물로 받쳐야 하는 모리아 산이 가까워졌습니다. 모리아 산이 보이기 시작한 지점은 하나님의 번제 장소로 지적하신 곳으로부터 약 5km 떨어진 곳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곳에서 모리아 산을 바라보면서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려야 하는 마음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이곳이 내가 지시한 땅이라고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 그곳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려야 하는 장소이기도 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을 바라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비록 어떤 고통이 될지라도 순종하겠다는 결심을 굳게 한 순간이었습니다.
5절에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은 드디어 하나님이 지시하신 산이 도착하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곳에 도착하였다는 것은 기쁨도 슬픔도 아니었습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기쁨도 있으나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드려야 하는 순간이 온 것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제일 처음 한 일은 자신의 신복들과 구별을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 자기 부자만 오르고자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종들이 나귀를 지켜야 했으며, 또한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고 할 때에 그들이 인간적인 생각으로 아브라함을 훼방하거나 장애가 되는 일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모리아 산에서의 행사는 아브라함 혼자서 스스로 수행하여야 할 의무였으며, 무엇보다 하나님께 소중한 제물을 받치는 현장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서 갈 것이라는 결심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결심은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인간의 생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졌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졌을 때 성도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눅9;23)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말한 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이삭을 드리는 아브라함이 행위를 “믿음” 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아브라함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다(히11;17~19)는 말씀의 해석을 생각해 볼 때에 철저한 아브라함의 순종의 믿음이었음을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11;6)
6절에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 당시의 이삭의 나이가 몇 세였는지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보편적으로 12~16세 정도의 나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갈 수 있으려면 16세 정도였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청년 이삭이 자신의 어께 위에 자신을 태울 번제 나무를 지고 가는 이 장면에서 장차 자신이 달려 돌아가실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게 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산에 오릅니다. 구약 성경에서 불은 “심판”이나 “정화”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칼은 사람을 살상하거나 동물의 몸을 쪼개는데 사용한 도구입니다.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불과 더불어 칼을 준비했던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독자 이삭을 죽여 각 부분의 각을 떠 번제단 위에 놓고 불을 붙여 바치는 번제의 과정을 조금도 차질 없이 마치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을 속행하기 위해 도구를 준비하는 아브라함의 태도에서 그의 결연한 의지와 굳건한 신앙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모리아 산에 오르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께 드릴 번제였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번제를 드리려는 마음 외에도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받쳐야 하는 아버지의 착잡한 마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7절에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를 있거나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모리아 산에 오르면서 이삭은 아버지를 부르면서 그냥 “아버지” 라고 말하지 않고 “내 아버지” 라고 부름을 통해서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가 매우 친밀하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삭의 이런 부름에 아브라함은 더욱 마음이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믿고 따라오는 아들을 제물로 드려야 하는 일이 아브라함 자신에게는 믿음의 행위요 믿음의 제사일지 모르나 아버지의 손에 의해서 죽음을 당해야 하는 아들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를 부르면서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하고 묻습니다. 이삭의 이런 질문을 보면 아브라함은 평시에 제사를 드리는 절차나 방법을 아직 나이가 어린 이삭에게 잘 가르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은 “번제 드릴 어린 양을 찾을 것이 아니라 열방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신할 때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시79;10)고 물었던 것처럼 불신앙에 빠진 유다 백성들이 예레미야를 향해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하고 묻는 것처럼 자신들이 찾는 대상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 혹은 대책이 있는가? 를 묻는 질문을 할 때 주로 사용된 의문 대명사입니다. 따라서 이삭은 아직도 자신이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받기 원하시는 것은 바로 내 자신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대신할 “번제할 다른 양”을 찾아 헤매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8절에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결국 하나님께서 모리아 산의 번제를 직접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제물로 쓸 것을 손수 준비하였다는 아브라함의 확신에 찬 고백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것입니다(히11;1) 아브라함의 이러한 신앙고백 속에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아름다운 예언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요1;29,36)
9절에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주신 곳에 이른지라”
아브라함과 이삭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장소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이삭은 자신이 제물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 혼자서 고독하게 이러한 괴로운 일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철저히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는 순종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명령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아브라함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곳에 도착하였음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위대함은 이와 같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창12;1~3)
우리가 순종하는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자신의 믿음의 결단과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결단할 때 철저하게 자신의 내면과의 싸움을 하기에 얼마나 고독한 싸움인지를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하여 모리아 땅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에 이르러 자신의 신복들과도 구별합니다. 철저히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지시한 곳으로 올라갑니다. 이때 사랑하는 아들, 이사이 질문합니다.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에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여기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번제할 어린 양은 일차적으로는 뒤에 나오는 숫양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리라는 말씀은 양은 여호와를 통하여 준비되리라. 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번제할 어린 양으로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번제할 어린 양으로 골고다의 언덕에 나아가 온전히 죽으셨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는 불에 구워 먹습니다. 남은 것은 불에 태웁니다. 예수님은 어린 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성령의 불로 태워 자신을 온전히 번제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살과 피를 우리를 위해서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믿으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순종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십자가를 말씀하실 때 십자가 후에 부활하실 것을 동시에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 후에 많은 열매를 맺을 환상을 보시며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으셨습니다. 부활의 확신을 갖고 죽으실 수 있었습니다. 많은 순교자들이 기쁨으로 순교하여 불에 타 죽고 사자의 밥이 되어 죽고 돌에 맞아 죽고 총에 맞아 죽고 매를 맞아서 죽습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자녀와 아내와 남편과 부모를 땅에 두고 순교의 길을 갑니다. 이들은 어떻게 이런 고난의 길을 갈 수 있을까요? 이들은 고난 후에 부활의 영광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활 신앙을 주사 십자가의 길을 가게 도우시기를 축원합니다.
9~10절에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 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번제를 드리기 위한 일련의 준비가 진행되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제단이요 아들, 이삭의 번제에 필요한 제단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잡기 위한 괴롭고 고통스러운 준비를 하면서도 이미 하나님이 지시하신 방법대로 단 주위에 나무를 배열하였습니다. 참된 제사는 인간의 필요나 상상력에 의해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로 그 방법을 좇아 오직 하나님만을 의식하며 드려지는 것이 참으로 신령한 제사입니다(요4;21~24)
아브라함은 이 일을 순종하고자 먼저 이삭을 결박합니다. 아브라함은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당시에 이삭은 혈기가 왕성한 나이였고(약16세) 아브라함은 100세를 넘긴 노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삭을 묶을 수 있었던 것은 이삭이 아버지의 결박을 거역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이삭의 철저한 순종과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신뢰,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번제물이 되는 것이 아버지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이 밑바탕이 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실로 절대 믿음은 절대 평안과 절대 복종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삭의 침묵 속의 순종은 장차 성부 하나님의 뜻을 좇아 묵묵히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켜 제물로 삼으려고 칼을 손에 잡고 아들, 이삭을 동물을 잡아 번제로 드리는 것처럼 잡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에 대한 인간적 욕정을 단호히 떨쳐 버리고 그를 단칼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희생 제물로 드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는 자신에 대한 완전한 부인이며 철저한 자아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마16;24)
11~12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순종할 때 아브라함의 믿음에 감격하시고 놀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합격 통치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졌다고 인정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경외심을 인정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아낌없이 드리는 것을 보고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아낌없이 드리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사자는 아브라함을 연속해서 부릅니다. 이렇게 반복되게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이 급하셨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관계가 친밀한 관계였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은 긴급하게 불러 사랑하는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아브라함의 아름다운 순종을 인정하셨고, 언약의 증표인 이삭의 생명을 보존 하심으로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곧 이삭을 통해 자손을 풍성케 하시겠다는(창12;2, 17;6~8)언약이 불변함을 더욱 확고히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을 때도 먼저 그의 이름을 부르셨고 그 후에 아브라함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만 전달하시기 전에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의 대답 역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아브라함의 순종적인 응답은 아브라함의 삶에 축복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급하게 찾으시면서 ‘네 손을 대지 말라’(12절)말씀합니다. 즉 칼을 잡은 손을 내리치면 이삭이 죽음을 맞이하는 시간에 하나님은 멈춤을 명령합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손에 든 칼을 이삭에게 조금도 가까이하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하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에 조금도 의심 없이 믿음으로 순종하려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께서 달라고 하시면 언제든지 돌려드린다는 하나님 중심의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셨다. 하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믿음도 하나님 중심의 믿음으로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순종하는 성도가 되길 소망합니다.
13~14절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에 오르면서 ‘하나님께 드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을 때 ‘하나님이 친히 제물을 준비하실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대로 숫양 한 마리를 준비하셔서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살리기 위해 준비하신 숫양은 훗날 인류의 대속 제물로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예표 합니다(히11;19)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한 것은 곧 훗날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성취된 것입니다. 역대하 3장 1절에 보면 이곳 모리아 산이 예루살렘이라고 나옵니다. 이 양은 바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그 예수님을 다시 살리십니다. 아브라함은 죽었다고 생각한 이삭을 얻은 기쁨에 충만했습니다. 무엇보다 아브라함은 부활의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전에는 영생의 하나님을 믿었다면 이제는 부활의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을 믿고 영원히 죽지 않을 뿐 아니라 죽어도 사는 믿음을 체험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요구에 언제라도 따를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하여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가지고 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께 드린 제단, 즉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 양으로 제단을 쌓고 ‘여호와 이레’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 속에는 장차 건축될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질 각종 제사가 예시하는 바와 같이 갈보리 언덕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제물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기록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이 절정이며 구약의 많은 사건들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시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