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멋진 날
신상숙
여름이 기울어가는 어느 날, 다섯 명의 여자가 일상에서 탈출했다. 전날 수확한 붉은 고추를 식초에 희석한 물로 씻어놓고, 조리 기구 사용이 서툰 남편의 식사 준비도 해 놓았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물기가 대충 마른 고추를 채반에 담아서 건조기로 옮기는데, 등줄기로 흐르는 땀방울이 장난이 아니다. 그럼에도 집을 떠나는 해방감과 홀가분함이라니, 그냥 좋기만 하다.
매주, 한자리에 모여서 말씀 공부하던 여자들이 30여 년이 훌쩍 지나셔야 강화 민박집에서 일박하기로 한 것이다. 논산에서 올라온 그녀와 일상을 미뤄 둔 채, 우리들은 젊은 날의 순수함으로 되돌아가 맘껏 수다를 떨었다. 나보다 나이가 한 참 아래인 자매가 운전하는 차 속에서도 아이처럼 들떠서 어쩔 줄 몰랐다. 더구나 내가 운전하지 않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동검리 식당에서 마음의 점을 찍은 후, 이층 커피숍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마시는 블랙커피의 맛이라니, 바다를 배경으로 단체 사진도 찍고 혼자서도 찍고, 마치 수학여행 나온 학생이나 다름없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성가대에서 봉사할 때, 새로 부임한 J수녀님이 바로 지금의 그녀다. 오르간 반주도 직접 하면서 성가 발성 연습까지 여간 정성을 들이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주 일회 그룹 성서 모임 때도 가르치는 수녀님이나 배우는 우리들이나 은총과 기쁨으로 가득 채워진 나날이었다. 내 배움의 성장도 그때 정점을 이루었으리라.
이렇게 함박눈이 내리는 날에는 잡다한 생각이 사라지고 옛날의 그 수녀님 생각으로 웃음꽃이 솔솔 피어난다. 어느 날, 성가 연습을 마치고 성당 마당으로 나온 우리에게 함박눈이 쏟아지는 게 아닌가. 이 멋진 날, 장난기가 발동한 우리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맨손으로 수녀님에게 눈 뭉치를 던지기 시작했다. 사제관에서 이를 지켜보시던 본당 신부님도 밖으로 나오시어 겁 대가리 상실한 여자들에게 눈덩이 세례를 받으시며 즐거워하셨다. 손이 시려오는지 발이 시려오는지도 모르는 채, 개구쟁이처럼 장난치는 이 광경을 사진 찍는 사람도 있었으니, 그 사진 내 사진첩에 여태 보관 중이다. 지역 신문 한 페이지에 나올 법한 정겨운 눈싸움 이야기가 잠잠한 건, 우리 성당이 민가에서 한참 떨어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어서다. 우리 본당에서 소임을 마치고 타 본당으로 떠난 후에도 여전히 소식 전하던 수녀님이 30여 년의 수녀원 생활을 접으셨다 한다. 하지만, 나는 이유를 묻지 않고 그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친구처럼 온갖 고민 다 들어 주던 그녀가 아직도 내 마음속에는 영원한 맨토로 수녀님으로 남아있어서다.
세끼를 꼬박 챙겨 드시는 남편과 농사일 때문에 여행이라는 단어조차 낯선 나날이다. 한데, 이 바쁜 와중에 그녀가 휴가를 내고 논산에서 올라온다니, 그 덕분에 다섯 여자에게 1박2일 함께 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동검리에서 즐겁게 보낸 후 정수사 아래 숙소로 돌아와 두 다리 쭉 뻗고 푹 쉬었다.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한 식당까지 왕복 걸어서 3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다. 나이 든 여자들의 길거리 수다가 누가 보거나 말거나 다. 저녁 식사 후, 늘 엄마 걱정하는 자동차 운전 담당 자매는 다음 날 아침 다시 오기하고 엄마가 계신 통진으로 떠나갔다. 해서, 남겨진 여자끼리 더운물이 펑펑 나오는 정갈한 민박집에서 자정이 넘도록 수다를 떨었다. 수십 년 차곡차곡 모아놓은 사연들이 세상 밖으로 뛰쳐나올 기회가 주어졌으니, 배꼽 잡는 수다로 새벽이 밟아오는 줄도 모른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식사는 민박집에서 제공하는 구운 식빵과 쑥 개떡, 그리고 음료수로 해결했다. 전날부터 내리던 가을비가 아침까지 계속 내린다. 그 때문에 아침 운동 삼아 정수사에 오르려던 계획은 포기하고, 전등사로 향했다. 우산을 쓰고 전등사로 오르는데,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뭔 사람이 그리 많은지 우산과 우산이 부딪칠 정도다. 방문객을 위해 사찰에서 준비해 놓은 화장실에는 ‘해우소’ 라고 명패가 붙어있다. 방문객이 머무는 곳마다 해우소가 있어서 방광이 허술한 난 여간 다행한 게 아니다. 많은 사람의 발길이 들락날락하는데도 화장실 내부가 어찌나 깨끗한지, 숨은 봉사자들에게 저절로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가을비가 계속 내리는 관계로 절 구경을 대충 끝내고 내려올 수밖에, 내려오는 길 양쪽으로 즐비한 묵밥 집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식단은 묵사발과 산나물로 채워졌는데, 도토리와 산나물은 자기네가 직접 채취한 거라니 믿거나 말거나 다. 1박 2일의 꿀처럼 달콤한 시간이 뭐가 그리 바쁜지 쏜살같이 달아났다. 수녀님, 우리 본당에서 소임 할 때부터 무척이나 아팠다 한다. 세상에나! 처음 들어보는 병명이다. 옆에 있을 때 잘했어야지 아픈 줄도 모르고 지나쳤으니, 그때 내 눈치가 엄청 아둔했나 보다. “다음 여행지는 제주도로 합시다.” 라는 내 말에 “그리하세요.” 휴대전화 속 그녀의 대답이 텃밭에서 방금 딴 노랑참외처럼 싱그럽다.
첫댓글 작가 쌤
수고해쓔~~
근디 서방님 떼어 놓고 잘다녀 와쓔?
나는 8박9일을 혼자 강지랑 밥해먹으며 아내를 여행 보냈는데
와~ 써방님 간뎅이가 넘 큰디
ㅎㅎ
산문 잘쓰셨어요
오늘도 뽜이팅!
나들이 잘 못하는 병 땀시
사회 활동을 모두 접었습니다.
허니, 이 남자 성화랍니다.
@햇살타고, 마리아 나이먹어도 그러면 자식들에게도 왕따되요 교육시키세요 저의 외삼촌도
삼시 세끼 집에서 밖에 나가도 짜장연도 못사먹고
ㅜ.ㅜ 그러니
자식들에게도 왕따
결국 치매가 오니 더 왕따 당뇨약
콩 짚어먹듯 먹다가 저혈당으로 무지개다리 건너 가셨는데 외숙모님은 상복 안 입시고 있다가
장례식날 잠깐 입으시고 끝나고 집에와서 바로 벋으셨어요
애고 얼마나 지겨웠으면 연애 결혼했는데 그땐 몰랐나
ㅎㅎ
사연은 모르겠지만 ...
교육시키세요 라면 끓이는 것부터 ~~
건강한 주말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