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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4일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잠언 21,1-6.10-13
복 음 : 루카 8,19-21
그때에 19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20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오늘 복음인 루카 복음서 8장 19-2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와
군중 때문에 가까이 오지 못하고 밖에 서 계실 때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시고,
11장 27-28절에서는 군중 가운데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행복하다고 말할 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복음 환호송 참조).
오늘의 화답송인 시편 119(118)편에서도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176절에 걸쳐 율법에 대하여 말하는 이 시편은
“행복하여라.”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은
복음의 여러 곳에서 말하듯이
자신을 버려야 하는 길이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길이지만,
그것은 또한 행복의 길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고 어리석어 보이는 길인데도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하느님 외에는 다른 무엇도 나를 지배하지 못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처럼 “저는 이 길을 좋아하나이다.” 같은 표현들이 나오게 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
주님과 뗄 수 없이 결합 된 삶의 방식으로 이해될 때,
그 길은 기꺼이 달려갈 길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을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라고 일컬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군중이
예수님의 식구들보다 더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할 수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곁을 내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결합 되어 새로운 가족을 이룹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2016년,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일명 김영란법이 시행되었습니다.
즉, 공직자 등에 대한 부정 청탁 및 금품 수수를 금지하는 법입니다.
이 법은 사회를 더욱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 제정된 것임을 모두가 잘 알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법이 시행된 후,
‘어떻게 하면 법에 걸리지 않는지, 법망을 피할 수 있는지’ 등의
문의가 쇄도했다고 합니다.
또 관련자들을 대상으로 특강도 이루어지고 피할 수 있도록 하는 책도 출판되었습니다.
법의 기본 정신과 취지는 보려고 하지 않고,
걸리냐 걸리지 않느냐를 따지는 상황이 너무 우스워 보입니다.
그리고 작년(2023.2)에 물가 상승률 감안 및 내수 진작 차원에서,
이 법을 손질하는 방안(음식값 3만 원을 5만 원으로 인상)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기사를 읽기도 했습니다.
청탁 금지를 위한 것인데, ‘5만 원 정도는 괜찮다’라는 생각이 과연 옳은 것일까요?
주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정도는 괜찮다’라며 죄짓는 것에 익숙해진다면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힘듭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데 적극적인 모습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악과 타협해서는 주님께 절대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악에 가까워질 것이고, 이로써 주님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라고 알려줍니다.
이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기대했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당연히 어머니와 형제들을 만나기 위해 밖으로 얼른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가족을 부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가장 근본적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단순히 혈연, 민족, 인종보다 더 중요한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 관계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외면하면서,
세상의 것만을 추구하고 타협한다면
하느님과는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과의 새로운 가족 관계가 될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악과 타협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데 적극적인 우리가 되어,
하느님과의 참 가족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여전히 어제 복음의 맥락에 이어
(렉시오 디비나의 맥락에서 보면,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선포와 경청,
등불의 비유-묵상과 기도, 영적 가족-관상),
'말씀을 실행하는 이'가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된다는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여기서 '이 사람들'이라고 불린 이들은 누구인가?
곧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제자들과 어린아이와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를 당신과 동일시 하셨습니다(마태 10,40; 루카 9,48; 마태 25,40).
그러나 '내 어머니'라고 칭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단지 십자가 아래서는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하고 맡기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을 가리켜
'내 어머니'라고 부르며 당신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는 이들’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뽑으실 때도
“그들이 나와 함께 있기 위함이다.”(마르 3,14)라고 말씀하셨고,
최후만찬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받아들이기 어렵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달콤하지 않아도, 손해 보더라도,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함께 하는 동행자요 동반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과 함께 있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입니다.
다른 누구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입니다.
성당에 와 있다고 해도,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그분의 말이 합당하지 않아 보여도,
때에 따라서는 자신이 손해 볼 줄을 빤히 알면서도,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음과 사랑으로 따르는 이들입니다.
늘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더 나아가, 예수님의 가족은 '말씀을 듣고 순명하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 이가 아니라,
부르신 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자신의 뜻을 버리는 이요, 임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들 안에서 잉태된 말씀이 탄생 됩니다.
그러니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 ‘어머니’가 됩니다.
비로소 ‘말씀을 탄생시키는 말씀의 어머니’가 됩니다.
곧 ‘말씀을 이루는 이’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자매가 됩니다.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됩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당신 말씀 아래에 있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주님!
저희가 당신으로 하여 모였고 당신으로 하여 함께 살아오니,
늘 당신 집 안에 함께 있게 하소서!
함께 있되, 당신 말씀을 귀 기울여 듣게 하소서!
귀 기울여 듣되, 순명하여 실행하게 하소서!
오늘도 저를 약하고 가난하게 하시어, 당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새로운 형제자매의 관계 형성
반영억 라파엘 신부
가끔 신자 분들께서 신부님은 형제가 어떻게 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아들 딸, 아들 딸, 아들’입니다.
남녀의 밸런스도 좋고 3년 터울도 좋습니다” 하고 말씀드립니다.
그러면서 우리 신자공동체를 생각합니다.
미사 때마다 “형제 여러분” 이라고 하면서 진정 형제로 살아가고 있는가?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가 진정 형제자매로서의 끈끈한 정을 누리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아쉬움이 많습니다.
‘손이 안으로 굽는다’고 영적으로 맺어진 형제의 관계가
육적으로 맺은 관계보다 결코 더 낫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루카8,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를 소중하게 생각하셨지만, 영적인 형제를 우선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태10,37).
따라서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19,29)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혈연의 관계보다도 믿음의 관계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과의 영적인 결합과 통교가 중요합니다. 그리하면 이웃과의 관계도 새롭게 형성됩니다.
예수님 말씀은 부모 형제를 멀리하라는 것이 아니라 얽매이지 말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투신하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다 채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 형제, 자매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
주님께서 우리 혈연의 부모나 형제에게도 새 형제, 자매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주님의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자, 옆 사람보고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하고 인사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또 나는 그분을 신뢰하리라.”
또 “보라, 나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다”(히브2,12-13).
사실 영적으로 형제인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마태12,50),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요한1,12),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로마8,14),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갈라3,26), 거룩하게 된 사람(히브2,11-12)입니다.
심지어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말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함이 없이 살았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형제애를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성서는 1권의 책이지만, 73권의 책이기도 합니다. 구약이 46권 신약이 27권입니다.
이 성서의 제목 중에 사람의 이름이 들어간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 사무엘, 다니엘, 이사야와 같이
구원의 역사에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 책의 제목이 됩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전한 사람들이 책의 제목이 됩니다.
대부분이 남자의 이름이지만 여자의 이름으로 된 책도 2권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에스테르와 룻입니다.
에스테르는 페르시아 왕국의 왕비였습니다.
에스테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려는 하만의 음모를 알았고,
하느님께 의탁한 에스테르는 용감하게 왕 앞으로 나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으로부터 구하였습니다.
룻은 이방인이었습니다.
룻은 남편이 죽어서 다시 고향으로 갈 수 있었지만, 시어머니 나오미를 섬겼습니다.
룻은 보아즈를 만나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오벳이고, 오벳은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를 낳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나라의 왕비였던 에스테르를 통해서도 역사하시고,
이방인 여인이었던 룻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하느님 앞에 지위의 높고 낮음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업적의 크고 작음도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혈연의 차이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저의 사제 생활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처음 본당 신부로 갔던 곳은 경기도 적성성당입니다.
그곳은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미사 예물과 사무장 급여를 교구에서 지원받았습니다.
주방을 도와줄 식복사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3년간 저와 함께 지내면서 청소, 세탁, 식사를 도와주었습니다.
평일 미사에는 5명 정도 나왔고, 주일미사에도 50명 정도 나왔습니다.
군인이 오거나, 서울에서 손님이 오면 늘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태권도를 시작했고, 농산물 직거래도 했고,
비디오 대여도 했고, 차량 봉사 팀도 만들었습니다.
3년이 제게는 행복한 시간이었고, 부족한 능력이지만
교우들과 알콩달콩 사목의 기쁨을 알았던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사목 체험을 발표했고, 그 소식이 교구에 전해져서
다음 임지는 교구청이 있는 명동이 되었습니다.
저는 교구에서 교육 담당 업무를 맡았습니다.
사목국에서의 업무는 적성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구역장 교육에 지구마다 700명이 넘게 왔습니다.
남성 구역 봉사자 교육에는 2,000명이 넘었습니다.
예산 규모도 달랐고, 만나는 사람도 달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적성에 있을 때도 하느님의 방법으로 저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명동에 있을 때도 하느님의 방법으로 저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부르는 것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잘 따르기 위한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예수님은 늘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하느님께서는 응답하셨고,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소외된 이들,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부지런한 것은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안다는 것입니다.
조급하다는 것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언제인가는 단단한 바위에 구멍을 만드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주어진 일에 충실하면, 단단한 바위에 구멍이 나듯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이 떠오릅니다.
“가을에는 풀잎도 떨고 있습니다.
끝내 말없이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바람은 텅 빈 들에서 붉은 휘파람을 불며 떠나는 연습을 합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가을을 좋아합니다.
누군가 따뜻한 손을 잡아줄 사람을
만날 것 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손을 내미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가 될 것입니다.
누가 내 아내이며 내 형제들이냐?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가족이 되는 방법을 알려 주신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 그분의 가족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신다.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항상 강생하시는,
그래서 나에게 있어 그 말씀이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이들을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으로 만든다.
예수께서는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21절) 하신다.
예수께서 어머니를 공경하지 않으셨다거나, 당신 가족들에 대한 사랑을 부정하신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부모님과 형제들을 최우선으로 사랑할 의무가 있다.
이 말씀으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더욱 들어 높이셨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낳아주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신앙이 구세주를 낳아주실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과 같이 믿음을 갖고 산다면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전해주는 마리아와 같이 된다.
이렇게 우리는 그분의 형제도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분의 어머니도 될 수 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성모님을 칭송하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우리가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낳아줄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성모님의 모습이다.
우리는 여기서 왜 신앙인들이 마리아를 공경하는지, 또 마리아를 닮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마리아와 같이 살 때 우리는 올바로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를 닮는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올바로 전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 당신의 가족이 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알았다.
오늘과 같이 각박하고 이기주의적인 사회에서는
진정으로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요구된다.
예수님의 가족이 되기 위하여 우리의 생활을 다시 한번 반성하며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신앙을 점검하도록 하자.
즉 나의 삶이 얼마나 주님의 뜻에 맞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 보면서
새로운 결단을 내리도록 하여야 한다. 언제나 주님의 가족으로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언제나 깊이 새기고 곱씹고 묵상해야 할 예수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이 때로 의아할 때가 있습니다.
정확한 진의를 파악하기가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랜 시대적 간극, 문화나 언어 습관의 차이가 될 수도 있지만,
때로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몰이해로 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 우리의 시선이 지극히 인간적이거나 편협 돼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대표적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나자렛 출신으로 마리아에 의해 잉태되시고 출산 되신 한 인간 존재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인해 잉태되신 하느님의 외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지극히 인간적인 동시에 신적인 존재이십니다.
작은 고을 나자렛에 머물러, 혈육이나 지연에 묶여 평생을 지내셔야 할 분 절대 아니십니다.
예수님을 혈육이나 인연, 지연이나 학연을 초월하는 크신 분,
세상 만물, 인류 전체를 주관하고 구원하실 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정황을 고려하면서 다음의 예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위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와 사촌들을 폄하 하거나 무시하는 발언이 절대 아닙니다.
물론 아직 예수님의 애매모호한 말씀의 진의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시점에서 들으면 큰 상처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묵상하다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성모님을 향한 극찬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세상 무수한 신앙인들 가운데 성모님처럼 주님 말씀을 충실히 듣고 묵상하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적극적으로 실행한 사람은 다시 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족의 결속력도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핏줄보다도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공동체의 결속력이 더 크다는 말씀입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우리는 자칫 핏줄이나 지연, 학연 등이
우리 공동체의 결속력을 좌우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북한과 같은 사상과 체제 속에서 산다면 가족이 가족을 고발하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관계는 공동체를 만듭니다.
우리가 어떤 결속력이 있는 공동체에 머무느냐에 따라 우리 행복이 결정됩니다.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에 머물러야 하고 그 사랑의 말씀이
결속력의 근원이 되는 공동체에 머물러야 행복할 수 있게 됩니다.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가장 돋보이는 두 주인공은
루크 스카이워커와 다스 베이더 (이전 아나킨 스카이워커)입니다.
루크는 평화 수호자들 편에서 일하고 다스 베이더는 악의 원흉인 다스 시디어스의 부하입니다.
결국 루크와 다스 베이더가 맞붙게 되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다스 베이더가 루크의 아버지라는 설정입니다.
다스 베이더는 원래 아나킨 스카이워커였습니다.
그는 강력한 제다이 기사였지만 어머니를 잃고
자신이 사랑하는 쌍둥이를 임신한 아미달라까지 잃게 될까 봐
평화만 유지하는 일에 점점 신물을 느낍니다.
자신의 힘을 점점 자기와 가족을 지키는 데 쓰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마음을 잘 아는 시스가 그에게 힘을 주었는데,
그 힘을 이용하려면 더 분노하고 더 악해져야만 했습니다.
결국 점점 변하게 되는 아나킨을 떠난 아미달라는 혼자 남녀 쌍둥이를 낳고 죽습니다.
세상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 다스 베이더는 더 극악무도해집니다.
다스 베이더의 두 자녀는 각자 다른 곳에서 몰래 키워집니다.
둘 안에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엄청난 포스가 작용하고 있었고
결국 루크도 제다이가 되어 아버지와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전투에서 손목이 잘리고
자신이 다스 베어더의 아들임을 알게 된 루크는 혼란에 빠집니다.
자신과 함께 싸우던 레아 공주도 자기 동생임을 알고는
아버지를 설득하겠다고 다시 나섭니다.
시스는 스스로 찾아온 루크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다스 베이더와 대결을 시킵니다. 다스 베이더가 이번에는 루크에게 쓰러집니다.
그러나 루크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편에 서라는 시스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그러자 시스가 루크를 죽이려 합니다.
이때 부상을 당한 다스 베이더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악의 중심인 시스를 죽입니다.
이렇게 예언대로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악과 선의 균형을 다시 찾는 인물이 되어 죽습니다.
사람들은 왜 이런 이야기를 재밌어할까요?
이 이야기 안에는 선과 악을 선택해야 하는
하늘에서 오는 ‘말씀’과 ‘혈육의 관계’가 대결합니다.
결국 혈육이 하나로 뭉치려면 어쩔 수 없이 둘 다 악인이 되던가
둘 다 선인이 되는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부모는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을 창조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입니다.
자녀가 눈이 빠지면 다시 넣어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자녀를 만들 줄 모릅니다.
만약 자동차가 자신을 만들지도, 고치지도 못하는 원숭이의 목소리를 더 좋아하고
사람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의 운명은 뻔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한 이의 목소리를 따라야
온전한 창조된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하느님과 같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창조자는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우애 있게 지내기를 원합니다.
모든 창조는 사랑으로 이루어지기에
그 피조물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게 창조자의 뜻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원하는 그 뜻은
사제가 되건, 결혼하건, 모두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는 핏줄만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새로운 공동체가 생깁니다.
그 뜻을 따르지 않는 가족은 핏줄이 같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보다는 결속력이 줄어듭니다.
악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같은 핏줄이라도
선을 따르는 사람과 원수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는
아버지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고발합니다.
아들은 가진 옷을 다 아버지에게 주고
자신의 아버지는 이제 하늘의 아버지라고 하며 수도자의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저희 아버지는 처음에는 제가 사제가 되는 것을 반대하셨지만,
나중에는 그것을 허락하시고 충실한 신앙인이 되셨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 안에 모여야 합니다.
그래야 핏줄도 유지될 수 있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43년 전 일본 나가사키 우라카미 주교좌 성당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사제서품을 받고,
이내 저는 광주 화정동 피정센타의 피정 지도자의 소임을 받고 활동하면서
‘성직자, 수도자 부모님 피정’을 지도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성직자·수도자 어머님들의 모임(=현 광주대교구 농심회)이 결성되었는데,
제 어머니도 다른 교구 사제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모임에 참여하셨죠.
그런 계기로 다른 신부님들의 어머님들로부터
아들 신부들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때론 함께 만나시던 사제의 어머니께서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가
아들 신부의 환속 때문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제 어머니에겐 걱정 아닌 걱정이 생기셨고
그래서 늘 저를 위해서 사제의 기도를 열심히 바치셨습니다.
저로 인해 부모님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시고 세례를 받으셨지만,
참으로 열심한 신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사시다가 하느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살다 보면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소중한 존재는 바로 가족임을 깨닫습니다.
이를 더 심화시키면 성직자·수도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분은 하느님이시겠지요.
수도자이며 사제인 저의 경험으로 볼 때,
수도자·성직자들은 부모와 가족들을 떠났다고 말하기보다
오히려 부모와 가족을 되찾은 것이라 봅니다.
흔한 표현으로 신부나 수도자보다 더 효자가 없다, 하는 표현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닌 것이 수도자나 사제에게는
영원히 부모와의 관계 이외의 어떤 가족이 없습니다.
형제도 자매도 결혼하면 다 자기 가족이 생기지만,
수도자에게는 참으로 남는 것은 부모님뿐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부모님에게서 멀어졌지만,
하느님 때문에 부모님께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되었으며,
혈연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 새롭게 부모님과의 관계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젊은 날의 저에게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부분이었습니다.
이는 결국 복음의 내면을 깊이 숙고하지 않은 저의 체험 부족과 연륜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물론 첫 장면, 곧 어머니와 형제들이
“군중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고”(8.19), 또
“밖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라는 표현이 제겐 너무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이런 구도로 보자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어머니와 형제들은
가장 먼 밖에, 멀리 서 있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아무튼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왜 예수님을 찾아왔는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 이전의 내용들 곧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등불의 비유를 통해서 볼 때,
하느님의 말씀인 씨를 뿌리고 꾸준히 열매를 맺는 사람과
주님의 말씀을 등불처럼 실천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게 될 것입니다.”(8,15.18)라는
말씀을 전제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비추어 볼 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과의 참된 가족 관계는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루카 사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을
새로운 가족 범주에 포함하려고 의도적으로 어머니와 형제들을 끌어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한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은 혈연적 관계이면서도
예수님에게서 가장 먼 자리에 위치해 놓고
상대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의 중요함과
그 실행 여부가 바로 새로운 하느님의 가족 구성원이 될 수 있는 조건임을
이런 영적 원근법을 사용해서 표현하고 있다고 봅니다.
아무튼 다시 오늘 복음을 유심히 살펴보면,
예수님과 형제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사람 때문에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었고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 아들인 예수님께 다가설 수 없는 어머니 마리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런 어머니의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린 한 사람, ‘그 어떤 이’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8,20)하고 환기喚起시켜 드립니다.
어쩌면 그 ‘어떤 이’의 의도는 만나야 하는 가족을 만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
예수님께 귀띔해 주었으리라 봅니다.
아마 우리도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이런 상황을 알았다면 ‘그 사람’처럼 했으리라 봅니다.
물론 이런 생각 자체가 지나치게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인간적인 관계를 뛰어넘은 새로운 영적 관계를 여는
새로운 지평이며 이를 위한 포석이라고 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답변은 인간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엄청 불편한 느낌으로 다가오겠지만,
신앙적이고 영적인 면에 집중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
사실 성서학의 발전으로 성서의 중요한 영성의 본질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곧 주님을 따르는 것이며,
이 따름의 요소는 떠남과 버림인데 이러한 추종 영성의 모범인 분은
다름 아닌 어머니 마리아이십니다.
이미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선택과 주님을 잉태한 순간부터
‘주님의 여종’으로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듣고 실천해 오신 분이셨으며,
그 순간뿐만 아니라 아드님 예수의 마지막 삶의 순간, 십자가 밑까지 동행하시면서
인간적이며 모성적인 측면에서는 수용할 수 없는 모질고 힘든 순간도
신앙으로 이 모든 일을 하느님의 뜻으로 수용하고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표현은 역설적으로 당신의 어머니를 비하하는 말씀이 아니라 칭송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이후에 이 말씀을 전해 듣는 우리 모두에게
당신 어머니와 같이 인간적인 관계와 인습에서 벗어나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는
강한 의향을 드러내는 말씀이라고 봅니다.
그러기에 우리 또한 단지 말씀을 들음으로만 듣지 않고
들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실천할 수 있는 신자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신자信者란, 곧 말씀이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고,
말씀이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존재입니다.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
<주님, 저에게도 저를 낳아주신 부모님이 계셨고,
그분들과 저는 혈연으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신앙적으로 하느님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순례자였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한 하느님의 백성이며 가족이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