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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무사 266 집안싸움
피식 웃고 일어서던 장추삼이 어느새 다가와 있는 인영을 그제야 인
식하고 두 팔을 벌렸다. 이때 북궁단야의 눈이 쫙 찢어진 건 누구도 몰
랐고.
"아이고, 설 소저! 밤바람도 차가운데 왜 이러고 계시는 거요. 어서
침소로 드시구려."
"안 그래도 피곤한 참이에요."
설이 방그레 웃자 입이 헤벌레 벌어진 그가 문득 북궁단야를 돌아보
고 고개를 숙여 소곤거렸다.
"어쩌다가 저런 인간하고 동행하게 된 거요?"
"아, 제가 댁에 갔을 때 마침 오셨더군요. 오실 만한 곳이 여기라고
정 언니가 알려주셔서 같이 오게 되었답니다."
우연한 동행이로군, 하면서 북궁단야를 다시 돌아보고 또 고개를 낮
춘 장추삼이 재차 속삭였다. 이번에는 더욱 은밀하게.
"내 원래 사람 욕하는 걸 즐기는 편이 아니지만 저 사람은 성격이 매
우 더럽다오. 가끔은 같은 직장 동료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라니
까."
"오, 저 사람 성격이 그리 안 좋나요?"
킥킥거리며 말을 받는 설에게 가슴까지 쳐 보이며 답답해하던 장추
삼이 또 한 번 속삭였다.
"허우대 하나는 예술이지만 성격 면으로 볼 땐 마두도 저리 가라라
오. 아무튼 가까이 하지 않는 편이 여러모로 설 소저에게 이로울 거
요."
"그렇군요!"
역시 설이다. 저 번드르르한 외모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있다.
희희낙락한 장추삼이 이때다 싶어서 북궁단야를 마구 씹어대기 시
작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당한, 즉 사실 그대로의 얘기들을 말했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얘기의 방향은 전혀 다른 곳으로 튀었다.
"무림에서 저 인간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오? 한성이랍디다, 한성.
딱 듣기로는 차가운 별, 어쩌고 해서 꽤나 멋들어진 별호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알고 보면 그런 의미가 아니라오."
"그런 의미가 아니면요?"
웃음을 참지 못해 터질 듯 부푼 볼로 계속 말을 받는 설의 태도가 조
금 의아스러웠지만 액면가에 대한 실망쯤으로 치부하고 장추삼이 계속
밀어붙였다.
설 소저만큼은 저 인간과 관련되게 하고 싶지 않다!
"한마디로 말해서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냉혈한이
라는 거지. 무슨 말인지 알겠소? 저 반반한 외면 뒤에 얼마나 무서운
것이 도사리고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요. 그래서 나도 저 인간하
고 어쩔 수 없이 동행하게 될 경우 반경 일 장 밖에서 행동한다오."
반경 일 장? 개가 웃을 소리다.
"거기다 치사하기란 이루 말할 나위가 없어서 빨래터 아낙들이 저
인간하고 대화를 나누면 큰 깨달음을 얻고 더 더욱 쫀쫀해진다고 하오.
어떻소, 무섭죠?"
처절한 표정 연기까지 곁들여서 말을 했는데 설의 대답은 예상 밖이
었다.
"아니요, 웃겨요."
그리고 그녀는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는데 마치 둑이 장맛
비에 무녀져 내리듯 와르르 쏟아지는 느낌이라 장추삼으로는 수습이
곤란한 지경이었다.
"아, 아니, 뭐가 우습다는 거요! 내 말을 우스개 정도로 받아들이는
거요?!"
"아니, 아니, 오호호호! 아이고, 나 죽어!"
끝내 배를 잡고 무너져 내리는 그녀를 망연히 바라보던 장추삼이 흠
칫해서 티나지 않게 시선을 돌렸다. 물론 북궁단야에게로.
'다행이다. 저 인간, 여기의 일은 신경 쓰지 않고 있군.'
그는 하운과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분위기로 봐서 매우 진지
한 얘기일 거라는 느낌인지라 장추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자기 욕한 거 알았다간?
'끔찍하군. 생각하지 말자.'
그때 데굴거리던 설이 겨우 일어섰다.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과 부여
잡은 배를 봐서 그녀의 웃음이 어느 정도까지 지속되었는지 짐작케 할
수 있었다.
"아아, 재미있다. 그리고는요?"
"쉿!"
손가락을 들어 입을 막는 시늉을 한 장추삼이 북궁단야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말했잖소! 저 양반 성격 더럽다고!"
여전히 키득거리던 설이 웃음기 어린 얼굴 그대로 몸을 돌리자 순간
위기감을 느끼고 장추삼이 그녀를 제지하려 했다.
"뭐 하는......"
"거기 성격 나쁘고 냉혈하기까지 한 양반! 이리 좀 와보세요."
'켁!'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힐 때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그렇게 조심하라
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설은 야멸차게도 북궁단야를 소리쳐 불렀다.
"음?"
빙글 돌아선 북궁단야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하자 설은 손짓
까지 해가면서 신이 나 빙글거렸다.
"쫀쫀한 양반 이리로 좀 오라니까요? 아, 치사하고 성격 안 좋으면
말귀까지 어두워지나?"
'아아, 난 끝장이야!'
머리를 조아리고 주저앉은 장추삼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하늘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저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이런 시험에 들게 하시나이까? 하
늘이시여, 정말이지 야속하옵니다!'
"반경 일 장 접근불가 양반! 여기요, 여기!"
"반경 일 장 접근불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죽을상을 쓰고 있던 장추삼의 귀가 꿈틀 움직였다.
거냐, 라고 했다. 물론 나이가 많은 이로서 적은 이에게 사용할 수
있는 하대다. 그러나 이런 말을 서슴없이 나눈다는 건.
'아, 아는 사이였잖아. 그것도 매우 친한!'
장추삼이 절망의 구렁텅이로 마구 달려가고 있을 때 밤바람만큼이
나 차가운 기세로 북궁단야가 다가왔다.
"자, 왔다. 이제 그 불가사의한 단어들을 풀어주지 않겠느냐?"
"불가사의까지나."
까르르 웃으며 다시 배를 잡은 그녀가 장추삼을 가리키며 입을 벌렸
다 닫기를 반복하자 북궁단야의 검미가 우뚝 일어섰다.
"이자가 뭐, 네게 해코지라도 했느냐?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
면......"
"내가 설 소저에게 해코지를 할 사람으로 보이오!"
버럭 소리를 지른 장추삼이 허리에 손을 척 붙이고 북궁단야를 마주
보았다. 비록 켕기는 것이 있지만 여기서 죽어 들어갈 수는 없다.
그녀가 보고 있다!
"사나이 장추삼, 비록 잘난 것 없고 내세울 것 없는 청춘이라지만 적
어도 여자에게 해코지나 할 위인은 아니란 말이야! 사람 아무데나 취
직시키지 마시오!"
짝. 짝. 짝.
무감동한 얼굴로 박수 치는 북궁단야의 얼굴에 진한 권태가 끼어 있
었다.
뿌.드.득
화답하듯 이를 갈아붙인 장추삼이 목을 소리나게 꺾고 두 주먹을 말
아 쥐었다.
참을 만큼 참았다. 이만큼이면 정말이지 오래도 참은 거다. 나이 많
다고 봐줬더니 - 사실 이유 모를 압박감에 쫄았던 터였지만, 일단 그 부
분은 넘어가기로 하고 - 사람을 아주 띄엄띄엄 보다 못해 길거리에 굴
러 다니는 짱돌처럼 뻥뻥 차댄다.
이제 결전의 순간이 왔다.
"훗!"
그의 마음에 화답이라도 하려는 듯 북궁단야 역시 짧은 비웃음과 함
께 칼집을 하운에게 건네고 몸을 돌렸다.
'젠장......'
보통의 검수들은 검을 놓았을 때와 검자루를 쥐고 있을 때가 다르
다. 당장 싸우자는 순간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이 인간은 뭐냐고!"
위축? 그런 그림자조차 찾기 어려우니.
까닥까닥.
검지손가락으로 장추삼을 가리킨 그가 어서 오라고 신호를 보내자
검집을 들고 멍청하게 서 있던 하운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왠지 몰라도 한번쯤 이런 순간이 필요했다고 생각했기에. 그리고 조
금 솔직히 말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아니, 무엇보다...
둘 가운데 누가 강할지 궁금해서!
북궁단야의 앞에 서면 늘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꼬리를 내리는 장추
삼이지만 알고 보면 천하제일인의 수염이라도 뽑을 인간이 또한 장추
삼이다.
진검 승부로 붙는다면 지금처럼 한 방향적으로 얘기가 흐르지 않을
터였고, 제 아무리 운조를 꺾은 북궁단야라고 해도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 강호초출 무대포와의 승부는 단언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상념은 뒤로하고 하운 역시 무언가 결연한 눈이 되어 검집을 땅에
박고 전신에 흐르는 긴장을 이완시키기 위해서 숨을 크게 들이켰다.
촤촤촤촤-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려는 듯 어디선가 돌풍이 일어 마른 가지들
을 훑고 지나가자 형용하기 어려운 음향이 매섭게 몰아쳤다.
저벅저벅.
두 주먹을 불끈 쥔 장추삼이 일직선으로 북궁단야에게 걸어갔다.
스윽.
이에 북궁단야의 입가에도 기묘한 선이 하나 그려졌다. 반드시 비웃
음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표정이.
우뚝.
북궁단야와 딱 일 장 정도의 거리를 남겨두고 돌연 신형을 멈춘 장
추삼이 눈을 들어 무림을 떨쳐 울리는 차가움[寒]의 대명사와 대치했
다.
꿀꺽.
기대감일까, 긴장감일까. 하운의 목젖을 타고 흐른 침의 의미가 채
마르기도 전에 장추삼의 신형이 돌연 촛불처럼 꺼졌다.
스륵.
발뒤꿈치만을 의지해 몸을 반 바퀴 돌린 북궁단야가 돌아 들어가는
그를 잡아내려 했지만 북궁다야의 움직임을 눈치챈 장추삼이 그대로
돌진할 리 만무했다.
팍!
돌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모든 움직임을 일순간에 정지시킨 장추삼
이 관성에 의해 도는 신형을 추스르는 북궁단야의 역방향으로 다시 뛰
었다.
쉽게 말해서 원래의 위치로 복귀한 건데 말로는 별거 아닌 듯하지만
한쪽으로 쏠리는 힘을 무시한 채로 행한 움직임이라 일반적으로 불가
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휘청!
다시 돌아간 그를 눈으로도 쫓기 벅찬지라 북궁단야가 겨우 장추삼
에게 신형을 돌리려 했을 때 상황은 이미 종료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무슨 짓거리를 한 거냐."
제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장추삼의 입에서 탄
식보다도 진한 독백이 터져 나왔다.
그가 한 발만 더 뻗었더라면 북궁단야는 그야말고 개망신의 진수를
보였으리라. 말로 하지 않아도 처절하게 일그러진 북궁단야의 표정에
서 이번 격돌의 결과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놈의 욱하는 성격은 도대체 고쳐지지 않네. 정말 미안하오."
여기서 끝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문제는 지금 중얼거리는 인간이
바로 장추삼이라는 데 있었다.
"봉사를 상대하는 편이 낫지. 칼도 없는 칼잡이랑 뭔 놈의 싸움이
야?"
칼잡이라는 말이 거슬리지만 여기까지도 봐줄 만은 했다, 아니, 참
아줄 만은 했다.
그리고 툭 내뱉은 다음 말.
"쪽팔리게."
"오냐."
즉각적으로 화답하며 북궁단야가 하운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칼을
확 빼앗아 들었다.
"쪽팔리면 안 되지. 사나이 장추삼이 북궁단야 정도의 검 앞에서
쪽팔려서야 쓰나? 그런 면에서........"
촹!
소리도 투명하게 칼을 뽑아 든 북궁단야가 칼을 중극으로 놓고 기합
을 질렀다.
"타아아압!!"
휘르릉-
전신에서 발산되는 기도가 능히 천지를 가둘 것만 같았고 검극을 타
고 흐르는 검기 역시 태산이라도 양단 내버릴 듯하여 장내는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겠소?"
하운의 탄식 어린 말에 북궁단야의 검끝이 조금 흔들렸으나 잠시의
망설임은 더욱 견고해지는 검기로 보충하며 차가운 사나이의 화답엔
무심한 서리마저 깔려 있었다.
"나란 놈은 골수부터 무인이라 받은 치욕은 힘으로밖에 돌려주지 못
한다오."
'치욕은 얼어죽을.'
그런 게 치욕이라면 난 치욕의 뻘에서 뒹구는 개구리냐, 하고 싶었
지만 한기를 풀풀 흘리는 북궁단야를 더는 자극하고 싶지 않아서 잠자
코 하는 양을 지켜보던 장추삼에게 한줄기 선이 다가왔다.
스릉-
별로 빠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위협적이지도 않았기에 순간의 방심
을 불러일으킬 만한 수준의 검적(劍跡).
"흡!"
그러나 장추삼의 감각은 무섭게 반응했고 그의 몸은 감각의 인도에
따라 어느새 산무영을 펼쳐 내고 있었다.
촤르륵-
분명 산무영인데 이전처럼 급속한 분열은 아니었다. 눈이 부시리만
치 찬란한 움직임이 아니어서 예전의 산무영을 기억했던 하운으로는
다소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런... 피곤한 건가?'
그런 하운의 염려처럼 장추삼의 보법은 어쩐지 활기찬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 충격적인 급제동으로 북궁단야의 혼을 빼놓았던 방금 전
의 기세와 지금의 장추삼은 분명 차이가 있었다.
"그런 식의 움직임은 봉사나 상대하기에 딱 맞을 거다. 쪽팔리고 싶
나, 장추삼?"
검적을 거두고 중극으로 칼을 갈무리한 북궁단야가 차디찬 어조로
꾸짖었다. 그 역시 장추삼의 몸놀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여기 오리랖 넓은 사람 하나 또 있네?"
피식 웃고 장추삼이 먼 산 중턱을 바라보았다.
"호오?"
서릿발 같은 북궁단야의 비웃음에 장추삼 역시 장추삼 방식대로 대
답했다.
"쪽을 누가 팔지 결정하자고."
"바라던 바다."
북궁단야의 근육이 불컥불컥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검은
은은한 푸른 빛으로 장내를 스산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무섭군, 하고 빈정거리고 싶었지만 이 빛은 결코 가볍게 볼 성질의
것이 아니라 장추삼의 눈도 침전되어 갔다,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움직
임을 조망(眺望)하기 위해.
이제부터의 싸움은 우군끼리의 비무를 넘어설지도 모른다. 아직 북
궁단야나 장추삼은 무의 궁극을 바라본 적도 없고, 바라볼 위치도 아니
다.
그들이 알고 있는 방식은 가장 효과적으로 적을 제압하는 것, 그 이
상도 이하도 아니다.
시작이야 어떻든, 그전까지의 관계야 어떻든, 한순간의 실수로 서로
를 해할 여지가 충분하다는 거다. 적어도 둘의 손과 검에는 그만한 힘
이 있으니까.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피어나는 찜찜함의 정체는 무엇
일까?
'아니야! 싸우는 놈이 찜찜함은 무슨! 이건 어디까지나 동료에의 연
민일 뿐이라고!'
마음을 다잡으려고 장추삼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흠."
그의 전의가 전달되었는지 칼을 두어 번 휘두른 북궁단야가 검자루
를 쥔 손을 가슴으로 끌어올려 정중하게 검례를 보냈다.
"천산의 북궁단야가 장추삼 공자에게 비무를 청하오. 비록 동료지만
한 번도 제대로 손을 섞어보지 못했기에 이번 겨룸은 그 의미가 남다
를 것이오. 그리고 이번 겨룸에 개인적인 감정은... 있소."
장추삼도 질세라 포권으로 응대했다.
"호북 양양의 장추삼이 얼음, 아니지 북궁단야 공자께 비무를 청하
오. 이번 겨룸은 순전히 개인 감정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히는 바이오.
이상."
마지막의 한마디에서 오는 압박.
이죽거리는 주둥이를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헛기침으로 감정을 다스
린 북궁단야가 다시 검을 들어 중극으로 이동시켰다.
비록 깐죽거리는 걸 천직으로 여기는 밉상 놈이지만 놈의 주먹은 의
외로 매섭다. 그리고 발은 미꾸라지보다 원활한 움직임을 보일 터였
다.
"후읍!"
그것으로 전초전은 끝났다. 어떤 의미를 나눴는지 서로의 가슴에 간
직한 채 북궁단야와 장추삼은 얼굴이 벌게져서 전투에 임했다.
스르륵.
시작은 북궁단야였다. 그는 무릎을 거의 굽히지 않고 일직선으로 쭉
들어왔는데 커다란 움직임을 취하지 않았음에도 장추삼은 피할 방위가
모조리 막힌 느낌이었다.
단지 전진만으로 방위를 차단할 기세.
이런 순간에 침착할 사람 그리 많지 않다. 사실 침착이고 뭐고 생각
할 시간조차 없었지만.
"흥!"
한 발 옆으로 물러서며 장추삼이 콧방귀를 뀌었다. 내심의 당황을
어떻게든 표현한 건데 제 성격 남 주지 못한다고 이런 식의 반응이 나
와 버렸다.
'우습다는 거냐?'
듣기에 따라 충분히 경멸조로 들릴 의성어. 그래서 북궁단야의 눈에
서린 스산함도 한층 깊어졌다. 그 기운이 그대로 검극에 전해졌음은
당연한 일.
빙글.
유려하게 반 바퀴 회전을 하며 중단의 검을 사선으로 살짝 치올리자
아련한 검의 궤적이 장내를 갈라놓았다. 여타의 검식에서는 보기 어려
운 올려 베기 식이라 일순 장추삼의 얼굴에도 당황이 어렸다.
"타아!"
왼발로 강하게 땅을 박차고 그 반발력을 이용하여 퉁기듯 뒤로 물러
서며 자유로운 오른발을 무릎 관절만으로 아홉 번 휘두르자 장추삼의
주위엔 마치 거대한 날개가 둘러쳐진 듯했다.
파바박!
발로 펼치는 유성우. 처음의 주먹이 아홉 번째의 그것과 거의 동일
한 속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힘으로 따진다면 오히려 위였다.
그런데,
팡! 팡!
뭔가 전해져 오는 것이 없다. 검적도, 북궁단야도 없었다. 그 자리엔
차디찬 공기만이 존재했다.
'이런!'
마지막 발길질을 멈춘 그대로 우뚝 선 장추삼이 새삼스러운 얼굴이
되어 북궁단야를 망연히 쳐다보았다.
'이 남자.....'
기세만으로 장내를 휘어잡는 정도는 일류고수라면 누구나 할 수 있
는 일이다. 물론 자신보다 떨어지는 무인에 한해서.
기세만으로 방위를 차단하는 것은?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절정을 향
해 치닫는 무인이라면 그 움직임의 예측 또한 불가능하기에 역시 가능
하다고 하겠다.
이른바 정중동(靜中動)의 경지랄까.
그러나 기세만으로 검적을 만들어낼 검도고수는?
장추삼이 알고 있는 한 존재하지 않았다. 기세는 어디까지나 기세일
뿐, 기세의 실체화라는 말도 어디까지나 상대방에게 가해지는 압박감
의 강도를 의미하는 정도를 말함이다.
물론 하운 역시 검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수지만 그의
검과 북궁단야의 검은 전혀 다른 성질이라 둘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하운의 검은 상대를 윽박질러 굴복시키는 성질의 중검법이 아니다.
부지불식간에 적의 허점을 찌르고 들어오는, 그런 유연함을 가진 선
경(仙境)의 검이랄까?
한마디로 그는 실체화할 기세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무인이기에
이런 경우엔 제외하는 편이 옳으리라.
그런데 장추삼은 분명히 느꼈다. 검의 흐름을, 그 예리한 호선을.
이 세 명의 젊은이들 가운데 가장 강한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나 주
저할 것이다. 물론 가장 못생긴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나 한 사람을 지
목하겠지만.
그리고... 가장 감각이 좋은 사람을 꼽으라면 그 역시 앞서의 인물을
지목할 것이다.
그런 그가 느꼈던 실체감이다. 이건 절대 기세만이 아니었다는 얘기
다. 북궁단야는 어느새 기세를 실체화하는 고수로 거듭난 거다.
"으음......"
동료의 벌전을 마냥 좋아만 할 수 없는 처지, 아니 두려워해야 할
입장이라 장추삼의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은 그 무게가 남달
랐다.
장추삼의 얼굴에 서린 당혹감을 즐기듯 바라보던 북궁단야가 중극
의 검을 정수리까지 들어 올렸다.
우우웅-
검극이 수평을 이룰 듯 뒤로 젖혀지며 완전한 상단의 형태를 취하자
대기가 미친 듯이 요동을 쳤고 그의 머리가 사자의 갈기처럼 곤두섰다.
일도양단의 기개!
'섬뜩하잖아, 젠장!'
아군일 때는 더없이 든든했는데 검을 마주하고 보니 이렇게 위협적
으로 바귈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그런제 장추삼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구겨졌던 그
의 안면은 눈가를 근거로 해서 어떤 파문이 일었고 그것이 볼을 지나
입가를 머물다 전체로 퍼지면서 환한 빛으로 뒤덮였다.
소리 내어 웃은 건 아니다. 그러나 그는 표정으로 외치기 시작했다.
이 정도는 되야지!
그리고 북궁단야도 검극에 맺힌 기운으로 말하고 있었다.
전부를 보여주마, 너라면!
터벅.
장추삼이 어깨의 모든 힘을 풀고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휘잉-
한줄기 바람이 흐느적거리며 북궁단야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곤두선 그의 머릿결에 잔물결이 일었다.
터벅.
다시 한 발.
그래도 북궁단야는 미동조차 없었다. 잠시 흘러왔던 바람도 둘이 내
뿜는 기세에 꼬리도 남기지 않고 총총히 떠났다.
그렇게 좁혀진 거리는 이제 손을 뻗으면 닿으리만치 가까워졌다.
그리고...
스팟!
한줄기 검적과 함께 둘이 엉켰다 그대로 멈춰섰다.
장추삼의 왼손은 북궁단야의 손목 아랫부분에 머물러 있었고 오른
손은 굽힌 무릎을 누른 상태였는데 일견 기마 자세처럼 보이기도 했다.
탁!
팅!
그가 주먹 쥔 왼손을 살짝 흔들자 검명도 아름답게 북궁단야의 손을
떠난 검은 달빛을 받아 반짝 빛을 발하며 허공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헛!"
"어마!"
관전하던 하운과 설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함성이 터져 나왔다. 검
수의 어깨를 점했다 함은 권격가의 완승을 의미하는 것.
과연 그럴까?
"젠장!"
투덜거리며 장추삼이 뒤로 물러서서 바닥에 떨어져 있던 북궁단야
의 검을 집으려 몸을 숙였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잘려 나간 그의 겉옷이 들어왔다.
"옜소!"
검을 떨군 검수건만 북궁단야 역시 부끄러운 기색 없이 그의 애검을
받았다.
"흠!"
받아 든 검신을 쓰다듬는 그의 얼굴에도 못내 아쉬운 무언가가 흘렀
다. 그러나 아쉽기로 따지자면 장추삼이 더했다, 표정 연기만으로 볼
때.
"처음부터 그대로 쥐어박는 건데. 괜히 피한답시고 움직이다가. 난
너무 착해서 탈이야."
뻥ㅡ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벴어야 했거늘. 그랬어야 방정맞은 주둥이가
더는 꿈틀거리지 않았을 텐데."
물론 이 소리를 넘길 장추삼이 아니다.
"어이구~ 전후를 봐야지. 내가 옆으로 피하지 않고 그대로 들이밀
었다면 그 잘난 얼굴에 한 달은 넘게 갈 피멍이 만발했을 거라고. 뭘
좀 알고 말씀을 하셔."
북궁단야의 입가에 가느다란 사선이 그어졌다.
"피한다고 깝죽거릴 때 그대로 내리그었다면 네 녀석은 자신의 소화
기관을 직접 견식했을 거다. 물론 지금처럼 종알거리지도 못했겠지."
"내리긋기는, 얼어죽을. 그전에 지신(地神)님과 조우하면서 감읍의
눈물을 한 사발은 쏟았을걸?"
쿠르르르-
열받는 걸 말로 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도
있다.
북궁단야 같은 이는 물론 후자다.
그가 다시 기세를 모으자 눈살을 찌푸리던 장추삼이 문득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생각해 보니 한구석에 서 있는 설은 뭐란 말인가. 졸릴 텐데 엄한 싸
움판에 끼어 오도 가도 못하고 시간만 죽이는 형국 아닌가.
"아~ 씨, 내 동틀 때까지 상대해 줄 테니까 상관없는 사람은 돌려
보내자고!"
"상관없는 사람?"
하고 주위를 둘러보던 하운이 설을 발견하고 아, 하며 고개를 끄덕
였다. 장추삼과 북궁단야를 모두 알고 있는 여인이라는 점에서 그 정
체가 궁금하긴 했지만 형국이 형국인지라 일단 돌려보내는 것이 급선
무가 되어버렸다.
"저... 소저, 시간도 시간이려니와 소저 같은 분이 계실 분위기가 아
닌 듯합니다. 이만 댁으로 돌아가심이."
"분위기가 어때서요? 좋은데요, 재미도 있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하는 설을 멍청하게 보던 하운이 자추삼에
게 고개를 돌렸다.
이 아가씨 뭐냐, 는 얼굴로.
"설 소저......"
잔뜩 들어갔던 투지가 일순간에 풀려 버리는 발언인지라 장내에서
한발 빼고 설에게 성큼성큼 다가간 장추삼이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았다.
"아까도 말했잖소.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저
사람은 성격이 이상해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단 말이오. 지금 장
난하는게 아니라니까!"
그의 간곡한 말에 화답한 건 설이 아니었다.
"그 손 놓지 못하겠는냐!"
말 한마디로 천하를 뒤흔든다면 이런 경우를 두고 얘기하는 걸까.
중극에 머물던 검극을 상단으로 끌어 올리며 북궁단야가 엄하게 일갈
했다.
우웅-
결코 큰 소리가 아니었는데 장내의 공기가 은은한 떨림을 보인다는
것은 화자(話者)의 공력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의미한다.
물론 장추삼도 반응했다. 이런 상태에서 어찌 반응을 보이지 않으
랴. 그래서 상황에 맞추어 최대한 어울리는 문구를 사용했다.
"놀고 있네."
"뭐?"
어처구니없어하는 북궁단야를 곁눈질하며 장추삼이 여전한 목소리
로 종알거렸다.
"저 보시오.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구제 불능은 바로 저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라오. 여태껏 나이 때문에, 달랑 두 살 많은 것 때문에
참아줬더니 아주 기고만장 아니겠소. 설 소저는 걱정하지 마시고 어서
들어가시오. 내 오늘 실회조, 아니, 복룡표국, 아니, 청빈로, 아니, 전
무리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서 저 성격 이상자의 나쁜 버릇을 고치고
말겠소!"
제가 무슨 오빠라도 되는 거야, 하며 결연한 표정으로 몸을 돌리던
장추삼이 설의 천진하면서도 다소 바보스러운 대답에 어리둥절한 얼굴
이 되어버렸다.
"오빤데요?"
"에?"
"오빠 맞다고요."
여전히 해맑은 얼굴로 웃고 잇는 설을 보다가 다시 손을 잡으며 장
추삼이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 착하디착한 아가씨는 조금만 친하면 다
오빠인가 보다.
"물론 나이 많은 남자를 여자가 부르는 호칭이 오빠라는 사실을 모
르는 바가 아니오. 그런데 저자는 마치 친오빠처럼 굴지 않소? 저런
건 잘못된 형태로서........"
"친오빤데요?"
"에?"
이때 장추삼은잠시 생각을 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바로 이어
지는 설의 이야기는 그런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친오빠 맞다니까요?"
'친... 오... 빠......'
순간 장추삼은 몇 개월 전의 밤을 떠올렸으며 그때 설의 고운 자태
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리고 그녀가 했던 한 토막의 말까지도.
"하지만 저에게는 아주 무서운 오라버니가 계세요."
그리고 자신은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난 더 무서운 사람 많이 겪었네. 북궁 얼음 덩어리가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아...
'생각해 보니.'
북궁단야에게 고참으로서의 일권을 얻어맞은 날이 - 이거 구라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지만 그냥 넘어갔다 - 두 번재 강호행을 떠나던 날, 즉
설을 울린 다음날이었다.
그래서 한 번 더 울리면 죽을 줄 알라는 뜬금없는 소리를 했던 거다.
그렇게 짜 맞춰보니 지난 몇 달간의 수수께끼가 하나하나 풀려간다.
왜 저 얼음 덩어리를 보면 본능적으로 머리를 숙여야 했는지.
왜 저 얼음 덩어리가 뜬금없이 설의 편지를 가져왔는지.
왜 저 얼음 덩어리가 자시을 특별 취급 했는지.
그리고 장인 후보와의 유사점까지도!
'그랬던 거였구나.'
하운 역시 뜨악한 얼굴로 세 사람을 번갈아 살펴보다 입가에 작은
웃음을 피워냈다. 소리없이 머금은 미소가 실체화하며 목젖에서부터
전신을 돌아 세상 밖으로 낭랑하게 퍼져 나오자 무거웠던 공기가 다소
누그러들었다.
"아하하하하하!"
얘기가 그렇게 되었던 거였군, 하며 한참을 웃던 하운이 전투 태세
를 풀지 않고 있는 북궁단야에게 손짓으로 검을 내리라는 시늉을 했다.
"관두시구려. 집안싸움도 격해지면 돌이키기 어려운 법이랍...."
"웬 집안싸움!"
사자의 울부짖음일까. 영역을 침범당한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는 사
람 때문에 하운의 말문이 막혔다. 놀랍게도 포효하는 쪽은 북궁단야가
아니었다.
장추삼이었다.
"뭐가 집안싸움이란 말이야, 하 형! 말을 좀 가려 하라고!"
"내가 잘못했소이다, 내가 잘못했어."
손사래를 친 하운이 슬쩍 뒤로 빠졌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질 일
없으니까.
"설 소저......."
힘없이 뇌까린 장추삼이 뒷말을 차마 잇지 못하고 한숨만 거듭해서
내쉬었다. 듣기 좋은 음악도 여러 번이면 소음이라는데 같은 장난이
두 번이나 중첩되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거기다 저 얼음 덩어리와 연관이라니.
상황은 처음의 그것과 전혀 다른 분위기였고 어색하기는 모두 마찬
가지였다. 특히 북궁단야로는 장추삼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선점한
후라 그저 무게 잡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어찌할 바 몰라 인상만 구기던 장추삼이 어깨를 축 내리고 몸을 돌
렸다.
"관두자고. 난 먼저 갈 테니."
그가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자 그때까지 멍청하게 서 있던 설 역시
종종걸음으로 뛰어갔다. 눈짓으로 둘에게 다음에 보자는 시늉을 하며.
"화나셨어요, 장 가가?"
".........."
"장 가가, 장 가가!"
".........."
"아잉~ 장 가가~"
".........."
울먹.
........!
"제가 잘... 못... 했...."
"울지 마요, 좀!"
"그래도 제가 잘... 못....."
"울지 말라니까!"
뚝.
"앞으로는 그런 장난치지 말아요. 사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네...."
".........."
헤벌쭉~
........?
"역시 장 가가예요! 울 오라보니 콧대가 납작해졌지 뭐예요?"
딸자식이나 여동생은 키워놔 봐야 남이라더니.
"별로요. 사실 한성의 말도 그리 틀린 건 아니었으니까. 그가 독하
게 마음 먹었더라면 승부는 모를 일이었소. 역시 그 경지는 요원한
건가."
"그 경지라고요? 뭔데요? 뭔데요?"
"말로 설명하기는 조금 그렇고... 아무튼 그런 게 있소이다. 뭔가
빠진 게 있는데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으니 애만 타네요."
"뭔진 몰라도 우리 장 가가라면 반드시 이룰 거예요! 암요, 이루고
말고요!"
언제부터 우리 장 가가가 됐는지.
* * *
"아무튼 재미있게 되었구려. 이제 어쩔 거요?"
"뭐가 말이오."
"보아하니 둘은 떼어놓는다고 떨어질 사이로 보이지 않으니 이제라
도 장 형을 인정해라 하는 것 아니겠소?"
"어쩌다 저 녀석이 저런 바보 놈하고 눈이 맞아서... 내가 정말..."
"장 형이 어디가 어때서 그러오? 저만하면 사람 좋지, 능청맞고 뻔
뻔하니 생활 능력 보장이지, 거기다 무공 또한 고강하니 금상첨화 아
니오?"
"바보 같고, 신소리 잘하고, 거기다 주는 것 없이 미운 건 왜 빼는
거요?"
"관점의 차이요, 하하하!"
"사실과 관점과는 상관이 없다오."
"아무튼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은 사람이오. 장 형은."
"흠."
"인정할 건 인정하시구려. 그게 정신 건강에도 좋소이다"
"다른 건 몰라도 저 녀석 움직임 하나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
"그야 장 형의 주특기가 아니오."
"하 형... 예전의 녀석을 생각했다간 큰코다칠 거요. 월광살무를 피
할 때의 장추삼이 아니라는 거요. 만약 녀석이 멈칫거리지 않았더라면
난 손도 뻗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었을지도 모르오. 분하지만 녀석의
말이 절반은 맞았거든."
"음. 나도 보았소. 그런데 장 형의 머뭇거림은 절대로 북궁 형을 봐
주거나 해서 그런 건 아니었던 것 같소."
"그게 무슨 말이오?"
"글쎄요...."
삼류무사 267 균현으로
다음날 세 사람이 다시 만났지만 둘 사이에 흐르는 썰렁한 공기 때
무에 하운만 안절부절못했다.
북궁단야의 눈이 먼 산을 향해 있는 거야 어제의 대화로 이해할 수
있지만 땅바닥에서 뭐 주워 먹을 거라도 찾는 참새마냥 머리를 처박고
있는 장추삼을 보자니 난감할 따름이었다.
'으이구, 한 사람이 좀 져주면 될걸.'
물론 둘은 절대 질 용의가 없었다.
"굳이 개봉까지 갈 건 없을 듯하고... 어디부터 갈까요?"
"하 형 마음대로."
"발길 닿는 대로."
'끄응.'
하 형 마음대로, 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네 발길 닿는 대로, 라
니!
'역시 밉상이야.'
북궁단야와 혼연일체되는 순간이다.
"험험! 그렇게 추상적으로 말하면 안 되잖소. 단초를 제공한 사람이
라면 특히나 말이오."
장추삼이 고개도 들지 않고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모이 수준이 아니
라 돈이라도 잃어버렸나 보다.
"단초를 제공했으니까 나머지 부분은 나머지 사람들이 생각을 해야
지. 내가 다 하면 재미없잖아."
나머지 사람들이 되어버린 둘의 얼굴에 고요한 분노가 깔렸지만 장
추삼은 털레털레 걸음을 옮겼다.
"북궁 형의 생각은 어떻소?"
"글쎄........"
인상을 구기던 그가 장추삼을 바라보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성큼 한
발 떼었다.
"이봐, 장추삼."
"음?"
순간 장추삼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북궁단야와 만난 지 벌써
사 개월여가 흘렀지만 그가 장추삼을 이름으로 부른 적은 한번도 없었
다.
"음이 아니야. 단초를 제공했다면 한두 걸음 뒤까지는 봐놓을 성격
이라는 거 잘 안다. 쌓아놓으면 뭐 하나. 아는 데까지 말을 해봐."
여전히 냉기 뚝뚝 떨어지는 음성이었지만 직감적으로 장추삼은 알
수 있었다. 그 속에 담긴 한줄기 온기를.
"에... 뭐...."
긁적긁적.
쑥스러움에 습관적으로 머리를 긁던 장추삼이 슬며시 고개를 들고
하운을 바라보았다. 왠지 북궁단야와 눈을 마주하기 껄끄러워서.
"에이, 그런 걸 일일이 다 말로 설명해야 해! 척하면 삼천 리라는 말
도 몰라!"
"삼천 리씩이나 바라지 않소. 장 형이 아는 삼십 리까지만이라도 일
러주시구려."
하운의 정중하면서도 여유있는 음성에 장추삼의 겸연쩍음은 찌꺼기
하나 없이 날아가기 충분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동료란 좋은 것인가
보다.
"흠흠, 뭐 그렇게 말을 하니 어쩔 도리 없군. 그럼 간단하게 생각해
보자고. 어제도 말했지만 개방의 몰락을 주도한 인물들이 무엇을 바라
고, 아니면 무엇이 겁이 나서 그랬는지 알아봐야 해. 그렇다고 무림맹
의 수뇌부들에게 그걸 물을 수는 없잖아?"
만나 줄 리도 없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찾는 법이야. 뾰족한 수는 없어. 호북의 개방
총타였던 곳을 기웃거리면서 단서를 찾아낼 도리밖에는."
북궁단야가 한숨을 내뱉었다. 말은 번드르르했지만 알고 보면 맨땅
에 머리 박고 보자는 거 아닌가. 그 심정은 하운도 마찬가지였는지 멀
뚱한 얼굴이 되어 흘러가는 구름에 시선을 던졌다.
뭔가 속은 기분이다.
"그런 얼굴들 할 것 없잔아?"
'입장을 바꿔봘, 임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북궁단야와 여전히 먼 하늘가를 그리는 하운
이 못마땅했는지 입을 툭 내민 장추삼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진짜로 하나부터 열까지 말해 줘야 될 사람들이네. 아무리 개방이
맛이 갔다지만 몇백 년의 전통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무너질 것 같아?
그리고 하루아침에 와해되어 버릴 조직 같냐고?"
"음?"
"그 말은!"
허무로 가득 찼던 두 사람의 눈망울에 즉시 생기가 넘쳐흘렀다.
"뭐가 그 말은이야? 주변을 뒤지면 누군가 튀어나오겠지. 그것이 개
방이든 날파리든."
북궁단야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타초경사."
기분 좋게 끄덕이는 장추삼의 눈에도 결연한 어떤 무엇이 스치고 지
나갔다.
"각오 단단히 해두라고."
각오는 했다. 그런데 이건 정말 낙양 가서 장 서방 찾기보다 더 황당
한 일이 아닌가.
균현은 산세가 유려하고 사람들의 인심도 좋다고 하여 호북성에서
는 최고로 살기 좋은 지역으로 꼽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무당산이 있
는 것으로 유명했다.
무당산이 유명한 이유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구파 가운데에서도 소
림과 양대산맥을 이루는 무당파의 근거지이기 때문이다.
강호 전체에서도 그 영향이 지대한 무당일진대 제 텃밭에서의 위상
이 어떨지는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렇게 대외적으로 유명한 균현의 외곽으로 또 다른 명소가 있었으
니 균현의 태평로(太平路)라는 거리였다.
모든 현마다 특정의 상업 지구가 형성되어 있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
이지만 호북성 균현의 태평로는 그런 상업 지구와 조금 다른 의미가
있었다.
그곳엔 개방의 호북 분타가 사백여 년이나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
다.
독립적인 성격이 강한 개방의 특성상 - 원래 거지들처럼 얽매이기
싫어하는 직업 군이 어디 있겠는가 - 개봉부에 있는 총타만큼이나 분
타들의 역할도 중요한 것이어서 본의 아니게 무림사의 전면에도 자주
등장했던 장소이기도 했고 호북서으이 개방 분타는 몇 가지의 사건을
거치면서 여탸의 분타들보다 위상이 높아졌었다.
"뭐야, 이거?"
"내 말이 그 말이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한 명이라도 손님
을 더 끌어보겠다고 호객에 열을 올리는 점소이, 깔아놓은 좌판들과
목처도 좋게 물건를 치켜들고 온갖 미사여구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보려는 장사치들... 을 기대했건만.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하운의 허망한 눈길은 잘 정돈된 거주 지역들과 엄숙함을 풀풀 흘리
는 무도관들을 향해 있었다.
"여기 상업 지구 아니었나?"
북궁단야가 장추삼을 돌아보자 대답할 말이 없는 그도 어깨를 움찔
들어 올렸다. 말로만 들어왔기에 이 변화를 어떻게 설명하기 어려웠고
영문을 모르기는 장추삼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무도관이 두 개나 있군. 어디 보자... 백송관이라... 현판의 문양으
로 보아 무당의 속가제자쯤으로 사료되고...비호관이라, 이름 참...아
무튼 이곳은 소림에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겠군."
현판을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하운이 도장을 드나들던 몇몇 젊
은이들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얼른 돌려 버렸다.
이런 식으로 충돌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으니까.
"흠......"
주위를 둘러보던 하운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다가가 뭔가를 얘기하
기 시작했다.
"뭘 저리 얘기하는 거야?"
"오면 알겠지."
정중한 포권으로 대화를 마친 하운이 고개를 저으며 그들에게 다가
왔다. 뭔지 몰라도 대화 내용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으로 그는
얼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
"무슨 말을 했는데? 어서 얘기해요?"
"음, 그게....."
하운의 설명은 번화가였던 균현의 태평로가 이런 모습으로 바뀌게
된 이유가 이웃 동현에 있다는 것이었다.
"동현? 거기가 왜?"
"그리고 상업 종사자들이 터를 이전하기 시작했다고 하오. 아마 이
근처에 도장과 집이 하나둘 들어서면서부터라고 하오. 자고로 주택가
와 상업 지구는 궁합이 맞지 않는 법이니까."
멀쩡한 상업 지구에 갑자기 땅을 매입해서 도장을 지은 이유야 알
도리가 없지만, 하고 말을 맺은 하운이 문득 한숨을 뱉었다.
만약이지만 그의 가정이 맞다면.....
"공교로운 일이로군."
도장을 바라보며 북궁단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더 이
상의 추론은 내놓지 않았다. 왠지 그게 나을 듯해서.
맨 뒤에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장추삼이 한순간 눈을 빛
내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는 건가?"
"잠깐만."
북궁단야의 부름을 손사래로 넘긴 그가 주위를 둘러보면서 걸음을
멈춘 곳은 마을의 공터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이었다.
"여긴, 왜?"
망연히 뒤따르던 하운과 북궁단야도 우뚝 걸음을 멈췄지만 장추삼
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르르르ㅡ
이때 한 떼의 아이들이 저마다 손에 목검 따위를 들고 어디선가 나
타났다. 대략 스무 명이 조금 안 되는 인원수였는데 공터에 들어서자
마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두 무리로 나뉜 아이들은 나름대로의 규율이
있는지 아무런 말 없이 서로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양 진영(?)에서 대표 급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하나씩 나섰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쪽 편은 여자 아이였다.
"저번에 약속한 대로 오늘 이기는 쪽이 여기서 노는 거다!"
남자 아이가 호기롭게 외쳤다. 그도 그럴 법한 것이 남자 아이가 지
휘하는 무리는 여자 아이가 이끄는 무리보다 무려 세 명이 많았기 때
문이다.
"흥! 물론이다!"
여자 아이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그러나 머릿수 대문인지 아이의
음성은 조금 떨렸다.
"그런데 어쩌냐? 우리가 세 명이나 많은데? 그러지 말고 항복하면
저기 끝에서 놀게 해줄 수도 있어."
남자 아이가 배를 내밀며 자못 당당하게 외치자 여자 아이의 눈망울
이 상큼 빛났다.
"항복? 너네나 항복하지 그래? 우리는 세 명 없어도 너네 이겨!"
"오, 그러셔~?"
두 아이는 웬만한 무림고수들도 울고 갈 만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눈
싸움을 벌였다.
"쳇!"
"흥!"
눈싸움으로 별반 재미를 보지 못하자 둘은 나란히 고개를 모로 꼬고
콧방귀를 날렸다. 아마도 이런 일이 한두 번은 아닌 듯싶었다.
그에 따라 뒤에 서 있던 아이들의 눈에서도 저마다 전의의 불꽃(?)을
피워냈고 장내는 열일곱명의 투기에 의해 나름대로 후끈 달아올랐다.
"그럼 시작하자!"
"좋다! 방법은 알겠지!"
"패싸움이라도 하려는 건가?"
북궁단야가 중얼거리자 장추삼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꼬마라고 무시하면 안 되지. 패싸움을 할 거라면 목검을 내려놓을
리가 없잖아."
"음?"
아이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하운이 빙그레 웃었다.
"장 형의 말이 맞는 것 같소. 저 녀석들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승
부를 내려는 듯하오."
자기들끼리 빙 둘러앉은 아이들이 저마다 손바닥에 뭔가를 기표하
기 시작했다. 물론 손에 든 장난감들은 한구석에 모아놓고.
뭘 쓰는지는 모르지만 기표를 하는 중간중간 서로의 동태를 주시하
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표식임에 틀림없었다.
손바닥에 글자가 써질 때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비장한 얼굴이 되
었는데 그건 기표를 하는 각 진여의 수장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여자 아이 측에서는 기표 와중에 자신의 손바닥을 보며 깜짝
깜짝 놀라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수장의 눈짓에 의해 곧 표정 관리를
하면서 이를 악물곤 했다.
그리고 여자 아이는 같은 편 가운데 가장 듬직해 보이는 아이에게
마직막으로 귓속말을 해주었다.
"그러니까 중환(重桓)이 너는...."
기표가 모두 끝나자 아이들은 각자 흩어져 서로 마주 보이는 나무
앞에 빙 둘러섰고 장내의 긴장감은 팽팽히 당겨졌다.
"저게 뭐요? 무슨 숫자를 기재하고 있군. 열부터 내려가고 있는데?"
"음... 다들 모르겠군. 저건 숫자치기 놀이야. 전략과 육체, 그리고
같은 편끼리의 호흡이 어우러져야만 승리를 따낼 수 있는 그야말고 멋
진 놀이라고 할 수 있지."
아이들의 놀이에 온갖 미사여구를 처바르고 장추삼이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치기라 함은 두 진영으로 나뉜 아이들이 열부터 사람 수대로 숫
자를 내려가게 되고 숫자가 높은 쪽이 낮은 쪽을 건드리면 낮은 쪽의
점수를 흡수하게 되는 놀이다. 물론 높은 쪽으로만 점수가 이동하는
것으로 낮은 편의 아이가 가진 본래 점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같은 편의 아이들이 손을 잡게 되면 그 두 아이가 가진 점수를
합치게 되는 것이다. 둘이든 셋이든 방식은 동일하다.
물론 처음에는 상대방의 숫자를 모른다. 그러나 몇 번 접촉이 이루
어지면 상대방의 숫자는 대충 알려지게 된다. 그렇깅 연합이 필요하
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승부의 끝은?
각 진영이 지키는 나무가 바로 그 해답이다. 나무는 무한의 수를 가
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아이들이 아무리 높은 수를 획득하게 되어
도 나무를 잡은 상태에서 치면 그쪽의 점수를 모조리 받게 된다.
그러나 상대방에서 만약에라도 나무를 그냥 만지게 되면 - 손이든 발
이든 - 시합은 종료가 된다.
숫자는 일반적으로 달리기에 능한 아이가 높은 수를 가지게 되고 가
장 낮은 수의 아이들은 대부분 나무를 지키는역할을 맡는 게 상례다.
어디까지나 일반적으로.....
"준비됐나?"
"준비됐다!"
두 아이의 눈에서 섬광이 일고 아이들의 움직임이 바빠질 무렵 여자
아이의 앙칼진 소리가 장내를 쩌렁쩌렁 울렸다.
"시~ 작!"
파바박!
개시 소리와 함께 일제히 뛰쳐나간 아니들은 공터를 돌며 서로를 탐
색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벌써 손을 잡고 한 명을 쫓기 시작한 경우
도 있었지만 행동의 제약에 따라 이내 놓치곤 숨을 몰아쉬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아이들은 역시 두 수장 아이였다. 그 아이들
은 달리기도 달리기려니와 급제동부터 속임수까지, 뭐 하나 나무랄 곳
이 없었다.
특히 여자 아이의 움직임은 단연 발군이라 남자 아이 두서넛은 그냥
제쳤다. 그래서인지 여자 아이가 번적 뜨면 상대방 진영 아이들은 손
잡기에 급급했다.
"수수(秀秀)를 잡아! 수수 십 점이니까 어떻게든 같이 잡으란 말이
야!"
여자 아이의 이름은 수수였나 보다.
그녀는 남자 아이들의 연합진에도 요리조리 빠져나갔는데 수수라는
아이를 막으려다 보니 자연 아이들은 뭉치게 되었고 빈틈을 노려서 이
쪽 편에선 따로 떨어진 상대방의 아이들을 야금야금 공략해서 점수를
올리고 있었다.
"동소(童昭)가 가면 무조건 손을 잡고 내 쪽으로 내려와! 순서 알지?
아무리 빨라봐야 동소는 십 점이야! 점수에 맞춰 손을 잡아!"
그때까지 남자 아이는 겨우 한번, 그것도 단 오 점짜리 아이를 건드
린 게 고작이었으니 수수라는 아이의 전략이 얼마나 주효했는지 알 수
있었다.
"대단하군. 여자 아이라고 보기 어려운 운동 신경이야! 마치 날다람
쥐 같지 않은가!"
하운이 껄껄 웃자 북궁단야가 혀를 끌끌 찼다.
"그에 비해서 남자 녀석은 영 한심하군. 차라리 자신이 직접 나서서
막았더라면 저렇게 끌려 다니지는 않을 것을. 어차피 동점이라면 서로
를 어찌할 수 없을 테니 주위를 먼저 이용하면 되지 않는가."
"말인즉슨 옳은데 그게 아니지."
장추삼이 흐뭇한 얼굴로 여자 아이를 가리켰다.
"저걸 보라고. 수수라는 아이, 달리기나 몸놀림뿐 아니라 심리전에
도 능하다고. 한 방향으로 미친 듯이 들려들어서 그쪽 아이들의 발을
묶고 잡힐 듯 잡힐 듯 거리를 두면서 한 바퀴를 돌잖아. 그렇게 진용을
망가뜨리면서 자신은 철저히 외곽만 돌고 있다고."
장추삼의 말대로 동소 쪽의 진용응 많이 망가진 상태였다. 여기저기
뭉쳐는 있었으나 실속없는 형태였기에 멀리서 보면 그 균열이 한눈에
들어왔다.
"헉! 헉!"
역시 체력에는 한계가 있었을까. 줄기차게 뛰어다니던 수수가 나무
를 지키던 아이에게 다가가 나가라면서 등을 쳐주고 웃었다.
"이제 나가, 청민(靑珉)아."
등이 떠밀려 나가는 아니는 한눈에도 병약했고 달리기 역시 느렸지
만 곧 다른 아이가 손을 잡아주었고 잡아준 아이의 점수가 월등한지라
상대편은 주위만 맴돌 뿐 어쩌지 못했다.
"수수 쉰다! 지금이 기회야! 어떻게든 밀어붙여!"
숨을 가드듬는 일방 나무를 지키며 차가운 눈으로 장내를 주시하던
수수가 그때까지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한 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뭔가
눈짓을 던졌다.
"가자!"
눈짓을 받은 아이가 소리를 지르자 이쪽 편의 아이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힘이 빠진 아이 하나가 수수
와 자리를 바꾸자 남자 아이의 눈에 당황이 어렸다.
"이번 막아! 이번만 막으면 우리도 기회있어!"
우르르르-
처음의 기세는 어디 갔는지 사람 수가 많았던 동소 편은 연신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수는 아이들의 뒤에서 냉엄한 얼굴로 천천
히 나섰다.
아마도 체력을 보충하는 기색이었는데 간간이 듬직한 소년과 눈을
맞추곤 했다.
"가자!"
"와!"
수수의 낭랑한 일갈에 꼬마들이 한 번 더 힘을 받고 고함을 지르자
나무까지 후퇴한 동소 쪽의 진용들은 길게 손을 잡고 방어하기에 급급
했다.
"둘러싸!"
나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세 무더기로 나뉜 아이들이 빈틈을 노렸지
만 여간해서 치고 들어갈 곳을 찾지 못하고 빙빙 돌기만 했다.
수수 역시 뒤에서 예리한 눈빛을 보내긴 했지만 딱히 방법이 없어서
맴돌 뿐이었다.
너무 빨리 움직여서일까. 듬직한 아이가 그만 허약한 아이의 손을
놓쳐 버렸다. 옆에 서 있던 아이가 급히 손을 잡아주었지만 그 아이 역
시 주력으로 뛰던 편이 아니었는지 주위를 급하게 돌아보았다.
"이때다!"
긴 줄의 끝에 서 있던 동소가 벼락처럼 뛰쳐나와서 아이를 건드리자
순간적으로 정적이 찾아왔다. 만약 남자 아이가 점수를 획득하게 되면
수수의 개인기는 더 이상 어려울 판이었으니까.
"네가 몇 점인지는 몰라도 청민이가 사 점이니까 십 점이 아니라면
점수를 줘야 한다?"
동소가 환호작약 소리 질렀다. 그때까지 점수가 나오지 않은 인원은
십 점하고 사 점. 십 점을 수수로 봤을 때 사 점은 당연히 허약한 아이
의 몫일 터.
이때 수수의 입가에 한줄기 선이 지나갔다.
"청민아, 손 펴라."
우물거리던 허약한 아이가 천천히 손을 폈다.
십(十)!
"어?"
순간 동소가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옆의 아이 역시 손을 폈다.
육(六)!
수수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음성은 여자 아이답지 않게 차
분한지라 동소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네 점수는 십오 점이지?"
"그, 그럼 네가......."
싱긋.
수수도 자신의 손을 펴 들었다.
사(四)!
"치, 치사하게....."
"치~ 사? 누구한테 하는 소리야!"
해놓은 짓이 있어서 반박도 못하고 숨만 몰아쉬던 동소가 쓸쓸히 자
리로 돌아갔다. 이제 구멍이었던 아이들 둘은 모두 십점을 상회하는
점수를 얻게 되었고 동소가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판이니
형국은 그야말고 사면초가였다.
"승부났군."
북궁단야의 말에 장추삼과 하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의 머리
싸움은 단순히 몇 점 왔다 갔다 한 정도가 아니었으니까.
처음부터 완전히 지고 들어갔다는 열패감,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의
사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그건 아이들의 움직음으로 고
스란히 드러났다.
흐느적흐느적.
막는 쪽의 움직임은 마치 해파리처럼 흔들거렸고 공격하는 편은 더
욱 원활한 움직임으로 수세에 몰린 아이들을 압박했다.
"여기 간다!"
수수는 과연 사 점의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잽싸게 움직이며 동
소들의 혼을 빼놓았고 그녀의 귀계에 한번 당한 아이들은 우왕좌왕을
거듭했다.
"여기, 여기!"
중환이 역시 가장 높은 점수를 발판으로 이리저리 아이들을 몰아갔
고 끌려 다니던 아이들이 결국 빈틈을 보이고 말았다.
"가!"
빈 쪽을 가리키며 수수가 손가락질을 하자 한구석에서 우물쭈물 서
있던 청민이 몸을 움직였다.
"어림없다!"
동소와 아이들이 급히 방향을 바꾸었고 그건 수수가 바라던 바였다.
팍!
비축했던 힘을 한순간에 쏟아내듯 전력 질주로 나무에 달려든 수수
가 미처 몸을 돌리지 못한 아이들의 틉을 비집으며 미끄러져 들어갔다.
턱!
"헉, 헉!"
발로 나무를 찬 수수가 땀을 닦으며 일어서자 그 모습을 망연히 바
라보던 동소가 아이들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내 실수로 지고 말았어."
"아니야, 대장.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맞아. 다음에 한 번 더 해서 이기면 되지, 뭘!"
"그래도 사내로군."
"맞아, 어떤 쫌생이랑은 다른걸. 패배도 인정할 줄도 알고."
부릅!
북궁단야의 눈에 스산한 살기가 깔리자 애써 외면하던 장추삼이 언
덕에서 툭 뛰어내렸다.
짝짝짝!
"오, 멋졌다! 정말 재미있었어!"
그가 끼어들자 동소와 수수가 눈을 돌려 장추삼을 머리부터 발끝까
지 훑어보았다.
이건 뭐냐, 는 눈으로.
"근데요?"
수수가 한 발 나섰다. 할 말 다 했으면 가라는 식이니 넉살 좋은 장
추삼으로도 일순 말문이 막혔다.
"아... 근데가 아니라 너희들이 노는 걸 보니까 나도 옛날이 생각나
서 말이야. 숫자치기하면 이 오빠를 당할 사람이 없었거든."
"왠지 굉장한 설득력을 가진 말이로군."
"그냥 숫자치기의 화신이었다고 해도 난 믿을 거요."
이제야 장추삼이 뭘 하려는지 알 것 같아서 북궁단야와 하운이 피식
웃고 그의 다음 행동을 지켜보았다. 대충 짐작은 하지만.
"그래서요?"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고 따지듯 묻는 수수에게 장추삼이 목을 한
번 꺾고 무릎을 꿇었다. 역시 눈높이를 맞춰야 얘기가 좀 되려나 보다.
"자, 여기......."
품을 뒤져 뭔가를 꺼낸 장추삼이 그걸 들고 흔들어 보였다.
"여기 너희들 모두에게 하나씩은 돌아갈 분량의 유과가 있어. 만약
나와 내기를 해서 이기면 이걸 줄게."
어른스러워 보여도 아이는 천상 아이다. 유과라는 말에 숨길 수 없
는 관심을 보인 수수가 입맛을 다시다가 동소를 쳐다보았다.
"내기가 뭔데요?"
"그건 간단하다. 너희들 가운데 숫자치기를 가장 잘하는 열 명이 나
무를 막거나 나를 치면 된다. 물론 내게는 점수가 없지. 그리고 나는
도망 다니다가 나무를 칠 거야. 시간은 일각! 일각 동안 내가 너희
들의 나무를 치지 못하면 지는 걸로 하자."
"정말이에요?"
동소의 반문에 장추삼이 넉넉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그 정도면...."
"그건 불공평해요."
팔짱을 끼고 장추삼을 쏘아보던 수수가 손을 내저으며 그의 말을 막
았다.
"아저씨는 키가 크잖아요. 우리 머리 위로 짚으면 어떻게 해요?"
'약아빠진 녀석. 그리고 아저씨가 아니라 오빠다, 오빠!'
살짝 찌푸려지려던 표정을 가까스로 바로 하며 장추삼이 너그럽게
웃었다.
"하하, 내가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구나. 그렇다면 내가 너희들
의 머리 위로 나무를 짚으면 진 걸로 하겠다. 됐지?"
그러나 수수는 여전히 할 말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아홉 살
이란 나이에 맞지 않은 영민함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다.
"그럼 우리가 지면요?"
'어이구, 나중에 살림 하나는 똑부러지게 잘하겠네. 뭐 하나 넘어가
는 법이 없으니.'
그래도 장추삼은 웃어야 했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지면 너희들은 열 명이 한 사람도 못 이긴 바보가 되는 거지. 거기
다 맛난 유과도 먹지 못하게 되는 거고."
한 사람도 이기지 못한 바보.......
유과를 먹지 못한다.....
쿠르르르-
아이들의 전의가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수와 동소는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덥석 악수를 나누었다.
"반드시!"
"이기자!"
아마도 둘의 첫 악수이리라. 뒤에 서 있던 양편의 아이들도 서로에
게 악수를 청하고, 뭐 난리도 아니었다.
"너희 쪽에서 몇 명 나올래?"
수수의 질문에 동소가 생각에 잠겼다가 양손을 들며 몸을 돌렸다.
"네가 뽑아."
"뭐?"
"네가 뽑아. 나보다는 네가 숫자치기를 잘하니까 네가 뽑는 편이 나
아, 안 그러냐?"
그의 말에 동소 편의 아이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장
추삼이라는 대적(大敵)을 맞아 완전히 의기투합하였고 그 결과 이런 전
개까지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 누구든 덤비라고."
비아냥거리는데 이 인간보다 탁월한 능력을 보일 이는 없다. 그리고
이맘때의 아이들은 이런 원초적인 도발에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법이다.
"좋아!"
수수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아이들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어?"
마지막 이름이 불리고 동소의 얼굴에 놀라움이 피어났다. 놀랍게도
수수는 자기편보다 동소 쪽의 아이를 하나 더 뽑았기 때문이다.
"정선이는?"
"정선이도 잘하지만 양평이 더 낫다고 봐. 이게 제일 좋다고."
그녀의 공정한 선발에 다시금 아이들의 의기가 뭉쳤다.
"설마 추뢰보를 쓰는 건 아니겠지."
"내공을 실어서 하는 움직임을 보인다면 내가 즉시 나설 거요. 그건
반칙이니까."
북궁단야가 칼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나서겠다는 건 좋은데 칼을 뽑
아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장추삼을 힐끔거리던 아이들이 주저앉아 작전 회의에 돌입했다. 아
무리 자신들이 어리다고는 하나 열 명을 상대로 싸우겠다는 건 정말로
왕년에 한가락 했다는 반증일 테니까.
"그러니까 너는......"
"수수 넌 뒤로 가서......"
한참을 그렇게 소곤거리던 아이들이 만세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
났다. 그들은 비록 어리고, 이건 놀이지만 아이들의 비장함은 장
난질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자! 우리는 준비가 되었어요!"
나무를 둘러싼 아이들이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그럼 시작할까?"
까, 자가 떨어지기도 전에 동소가 뛰쳐나가 장추삼을 노렸다.
"훗!"
아이의 진행 방향으로 몸을 트는 척하다 그대로 멈추자 동소가 균형
을 잃고 고꾸라졌다.
어느새 또 하나의 아이가 장추삼을 막아섰다. 이른바 차륜전의 형태
였는데 공격에 실패한 아이는 바로 나무에 돌아가서 경계를 게을리 하
지 않으니 그야말고 공수겸전(攻守兼全)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아쭈?'
장추삼의 입가에도 희미한 선이 하나 아로새겨졌다. 단순한 놀이라
고 생각했거늘 이 아이들, 나름대로 체계적인 공세로 달려들지 않는가.
그러는 중에도 아이들은 장추삼의 속임수에 번번이 넘어지기 일쑤
였다.
"둘!"
수수의 교갈에 이번엔 아이들 둘이 뛰쳐나가 장추삼을 좌우에서 막
아섰다.
'호오?'
눈빛을 빛내며 자신의 좌우를 막은 아이들에게 감탄을 보내던 장추
삼이 한쪽으로 어깨를 움직이자 아이들 역시 움찔 몸을 움직이려 했다.
'먼저 움직이지 마! 아저씨가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
'저 녀석이, 오빠라니까!'
수수의 말에 흔들리던 아이들이 몸을 바로 했다. 이렇게 되자 난처
해진 장추삼이 헛웃음으로 답답함을 대신했다.
구경할 땐 몰랐는데 수수란 아이의 심계, 거의 교활에 가깝지 않은
가!
시간은 마냥 마냥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수
수의 눈짓을 받은 두 명의 아이가 이번에는 장추삼의 전후를 막으려고
나섰다.
'이제 보니?'
아이들은 옥쇄(玉碎)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일각의 시간만 흘려보
내면 승리는 거저 오기에 굳이 장추삼을 잡으려 들지 않는 거였다.
'그건 안 될 말이지.'
아이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그가 미처 후방으로 나머지 아이가 돌
아 들어오지 않음을 확인하고 오른발을 성큼 떼었다.
움찔!
이번은 직접적인 행동이었기에 아이들 역시 몸이 그쪽으로 흘렀고
그 틈으로 장추삼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
튕!
땅을 지지하던 왼발에 강한 힘을 실어 뒤로 몸을 뺀 그가 아이들의
당황함을 뒤로하고 나무 쪽으로 전력 질주를 하자 급급히 아이들이 막
아섰다.
"침착히!"
수수의 말이 떨어지기 전에 장추삼이 움직였다. 그쪽은 놀랍게도 수
수가 지키던 방향이었다.
"......!"
자기에게 올 줄을 미처 몰랐기에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곧 수수는
양팔을 벌리고 방어에 들어갔다.
스륵.
오른편으로 어깨를 움직이자 수수의 몸도 움찔했지만 반응하지는 않
았다.
스륵.
다시 왼편으로 틀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수수는 눈망울만 빛냈다.
팍!
순간적으로 장추삼이 사라졌다.
"어?"
수수의 시선이 당황 속에서 겨우 장추삼을 잡아냈지만 이미 그의 손
은 나무를 짚고 있었다. 물론 수수의 어깨 높이에서.
턱!
"내가 이겼다."
수수는 자신의 어깨 위로 걸쳐진 팔의 의미를 생각하는 데 조금의
시간을 할애해야만 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뭐가 어떻게냐?"
어처구니없어서 멍청하게 서 있는 수수의 이마를 퉁 때린 장추삼이
기지개를 켰다.
"간단하잖아. 아이들은 네 쪽이라면 안심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다
른 아이들과 네 거리가 조금 더 벌어져 있었지. 또한 너는 전체를 살펴
보느라 막상 내가 다가서자 주위를 돌아보지 못했어."
"으윽!"
분해하는 수수에게 장추삼이 마지막으로 충고했다.
"마지막으로 네 자만심이 날 이기게 한 거야. 설마 내 쪽으로 올
까.. 했었지? 언제나 그게 통하는 건 아니야. 하늘 위에 하늘이 있
다는 걸 명심하거라."
"그, 그래도....."
약간 귀찮았지만 패배를 믿지 못하는 수수의 얼굴에 어떤 쐐기를 박
아줘야겠기에 장추삼이 그녀의 앞에 다시 쪼그려 앉았다.
"넌 언제나 상대방을 속일 때 좌우로 몸을 움직여서 중심을 뺏곤 했
겠지.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움직임 역시 너의 방식대로일 거라
생각해 버린 거다. 좌우만 신경 쓰다 보니 오히려 정면을 내주게 된 거
야.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갔다고 할까?"
울먹.
어린아이답지 않게 수수는 눈가에 밎힌 눈물방울을 결코 떨구지 않
았다. 이런 아이들은 패배를 딛고 일어설 수 있다.
그런 그녀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바닥에 엎드
려 식식거리는 아이들을 불러 모으며 장추삼이 품에서 유과 봉지를 꺼
냈다.
"오늘 너무 재미있었다! 내가 비록 이겼지만 기분이 좋으므로 이건
그냥 줄게! 다 어서들 와라!"
아이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최종적으로 수수
에게 눈이 모아졌고 모두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눈가를 급히 훔치고는
장추삼을 외면했다.
"졌는데 왜 먹어요! 우리가 무슨 거지새끼들인지 알아요?"
"흐음....."
머리를 긁적이던 장추삼이 뭐라고 말하려는데 어디선가 장중한 음
성이 들렸다.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너희들이 우리에게 뭔가 말을 해주면 이걸
주는 걸로 하자. 쌍방 간의 교환이니 거지 취급받을 일도 없지 않겠느
냐?"
또 누구야, 하고 고개를 돌리던 수수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졌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표표히 내려서는 북궁단야의 모습에 그대로 압
도되어 버렸으니까.
'아무튼 어린애나 할머니나!'
장추삼이 속으로 꿍얼거리는데 이번에는 동소가 나섰다. 녀석도 북
궁단야가 썩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이미 한번 한 약속을 깰 수는 없어요! 그거 가지고 어서 가세요!"
"흐음....."
말인즉슨 옳은지라 북궁단야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야 했다. 요즘
애들, 어리다고 무시했다간 큰코다칠 판이다.
둘의 곤란을 나름대로 즐기던 하운이 천천히 장내로 다가오자 그때
까지 대치를 벌이던 공기가 갑자기 온화해지는 느낌이라 아이들의 시
선이 모여졌다.
"소형제들, 이 대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네. 그러니 졌다고 기
죽을 필요는 없어."
"무슨 문제!"
발끈한 장추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문제냐니? 장 형은 아까 소형제들의 몸놀림을 보면서 이미 분
석을 해둔 상태가 아니었소? 그런데 소형제들에겐 그럴 기회가 없었으
니 이 어째 공평하다고 하겠소? 안 그러오, 북궁 형?"
"그건 그렇군."
북궁단야까지 가세하자 아이들의 안색이 조금씩 펴졌다.
"아, 아니......."
"결정적으로!"
뭔가 변명하려던 장추삼을 말허리를 여지없이 잘라 버린 하운이 수
수를 가리키며 준엄하게 일갈했다.
"아까 장 형이 자기 꾀에 넘어갔다고 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오.
비록 좌우에 신경을 쓰다 보니 중앙을 놓친 경향도 있겠지만 그보다
어른과 아이의 시선 차이가 이런 결과를 가져온 거요."
"음."
맞는 말이라 장추삼도 뒷머리를 긁으면서 쩍 뒤로 물러섰다.
수수와 대치했을 때 좌우로 움직이려던 장추삼이 수수의 눈앞에서
순간적으로 사라져 보인 것은 그가 워낙 빠르게 주저앉았기 때문이기
도 하다.
그렇지만 수수의 시선, 즉 어른인 장추삼을 응시하기 위해서 올린
눈높이가 아니었다면 주저앉는 것만으로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었을까?
"착시 현상이었군."
북궁단야가 마지막으로 결론짓자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자기들에
게 유리한 방향으로 얘기가 진행된다 생각했는지 아이들이 뭐라고 종
알거리기 시작했다.
"고로 이번 대결은 없던 걸로 치고, 사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라오. 소형제들이 그에 대한 얘기를 좀 해주면 이 유과를 주
겠네. 어떤가?"
"어? 저거 저 아저씨 거 아니에요?"
동소의 말에 하운이 껄걸 웃었다.
"괜찮아, 원래 저 아저씨 것이 내 거고 내 것이 내 것인 사이라네.
우리는."
이런 경우를 두고 재주는 곰이 부리고 은자는 주인이 챙긴다고 하던
가.
얼떨결에 바보가 되어버린 장추삼이 입을 툭 내밀었지만 아이들은
공정한 지적을 내린 하운에게 완전한 신뢰감을 보였다.
아직도 북궁단야를 힐끔거리는 수수 빼고.
"으음......."
동소가 재촉하는 눈빛을 보내자 은연중에 두 무리의 통합 수장으로
등극한 수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대로 받자니 뭔가 찜찜하고 안 받
자니 아이들의 기대감이 장난 아니었으니까.
"음, 그럼 일단 찾는 사람이 누군지 듣겠어요. 괜히 우리가 모르는
사람이라면 곤란하잖아요."
"오, 그렇게 하지."
하운이 슬쩍 장추삼을 돌아보았다. 저 영악 덩어리 상대하느라 수고
했다는 존경을 담고.
"우리가 찾는 사람은 그러니까 한마디로 거지인데, 음 그냥 거지가
아니라 거지면서도 거지 같지 않은 거지...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말을 하다가 자꾸 꼬이자 콧등에 잔주름을 잡고 쩔쩔매는 하운을 대
신해 북궁단야가 나섰다. 그렇다고 그 역시 뚜렷한 대안이 있었던 것
은 아니지만.
"한마디로 조금 다른 거지를 말하는 거다. 뭔가 다른 거지 말이야.
조금 특별한 거지들. 예를 들면 풍채가 좋다던가, 아니면 눈에서 빛을
발하는....."
그 말에 아이들이 까르르 웃었다.
"에이, 그런 거지가 어디 있어요?"
"거지가 거지지, 눈에서 빛을 발하는 거지라니!"
그들의 반으에 세 명의 어깨가 축 처졌다.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아이들이 뭔가 알지 모를 거라는 착상,
여기까지는 좋았지만 불행히 착상은 착상이었다.
셋의 그런표정에 아이들도 조금은 미안했는지 서로가 본 거지들을
떠벌리기 시작했지만 그들이 바라는 거지의 상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
다.
"아아, 고맙다. 많은 도움이 되었어. 자, 이건 소형제들의 몫이야."
유과 봉지를 흔들자 아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하운의 손에서 그것을
냉큼 낚아챘다.
"이제 어쩌지요?"
"뭘 어째, 발로 뛰어야지 뭐."
"암담하군. 이건 단서 하나까지 완전히 지워놓은 상태니."
이때 한 아이가 쭈뼛쭈뼛 다가왔다. 그 아이는 아까 수수의 편에서
십 점을 가졌던 소년이었는데 걸음걸이조차 위태로워서 하운이 저도 모
르게 어깨를 잡아주었다.
"저....."
"어, 왜?"
장추삼이 하는 식대로 하운도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이런 말하면 웃을지도 모르는데....."
"괜찮다. 아무 말이나 하려무나."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용기를 내서 낯선 어른들에게 다가온 성
의가 기특한지라 하운이 청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안 웃을 거죠?"
"그럼, 그럼."
그때 이미 북궁단야와 장추삼은 심드렁한 얼굴이 되어 두어 발 앞으
로 가던 상태였다.
"아저씨들이 말하는 풍채 좋고, 눈에서 빛이 나가는 거지는 아니지
만 좀 이상한 거지 할아버지는 알아요."
"이상한 거지 할아버지라... 누굴까?"
하운의 친절한 응대에 청민도 화색이 돌아 얘기에 힘을 실었다.
"그 할아버지는 매일 울어요. 자주 보이는 건 아닌데 가끔 보면 언
제나 울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엄마 몰래 남은 밥을 주니까 제 몸을
한번 훑어보더니 침을 놔주고 갔어요. 근데 그 침을 맞고 잔기침이 없
어졌어요. 그런데 애들하고 엄마는 제 말을 믿지 않아요."
"......!"
"......!"
"......!"
셋의 눈에 신광이 일었다. 그리고 그들은 동시에 외쳤다.
"그 할아버지 어디서 봤니?!"
첫댓글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