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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5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잠언 30,5-9
복 음 : 루카 9,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2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3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4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5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6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오늘 복음의 말씀은 일상적인 생활 태도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특별히 복음을 선포하러 떠날 때의 자세에 관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러 떠날 때, 인간적인 준비와 계획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빈손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지니고 가는 것은 오직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힘과 권한”(루카 9,1)입니다.
그 힘과 권한이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합니다. 다른 어떤 준비는 없습니다.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으면, 그 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안전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저 그 순간에 주어지는 상황에 따라 복음을 선포하여야 합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서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 머물라는 말씀도,
더 좋은 곳을 찾아 옮겨 다니지 말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라는 뜻입니다.
음식도 준비하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러 떠날 때 그를 맞아 주는 이가 있다면
그렇게 주어지는 상황을 감사하며 받아들이고
더 좋은 집, 더 나은 대접을 찾아다니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오늘 복음의 말씀을 꼭 글자 그대로 따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만 하더라도 필리피 신자들 말고는 다른 이들에게서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았고
자기가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스스로 계획하고 준비하며
복음 선포의 일이 자기가 계획한 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거기에 주님께서 주신 “힘과 권한”이나 그분께 받은 파견의 자리는 없습니다.
파견은 내 계획과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힘과 권한”을 지니고 어떤 상황 속에 내가 던져지는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전에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사람’이라는 글자와 ‘사랑’이라는 글자가 너무 닮았는데,
‘사람’이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ㅁ’이 ‘ㅇ’으로 바뀌면 된다.
‘ㅁ’이 ‘ㅇ’이 되려면, 즉 모난 네모가 둥근 동그라미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 부딪혀 깎여 나가고 닳아서 둥글둥글해져야 한다.”
사람이 서로 부딪혀야 사랑이 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고, 또 공감도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서로 부딪히려고 하지 않습니다.
말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얼굴도 쳐다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관계 맺는 것을 두려워하며 혼자 사는 것이 편하다고 말합니다.
이때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자꾸 만나 소통하면서 서로 모난 부분을 깎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며 관계를 이어갈 때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먹고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도, 성당에서는 돈 나오는 것도 아닌데
자기가 왜 이런 고민을 안고 신앙생활을 해야 하냐면서 하소연 하십니다.
신자들과의 관계가 그렇게 어렵다면 잠시 미사만이라도 나오라고 말씀드리는데,
얼마 못 가 성당에서 뵙기가 힘들어집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끊어버린 것입니다.
‘사랑’에 대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람’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거부감을 가지면 가질수록, 사람과 함께 사랑도 멀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는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그리고 세상에 파견하시는데,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즉,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할 것 같은데 왜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세상의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닌 주님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직접 보여주셨던 ‘사랑’만이 있으면 충분했습니다.
이 사랑은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것으로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 아닌, 사람을 만나 소통하면서
서로 모난 부분을 깎아내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면서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아무것도 없이 세상에 파견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세상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세상의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필요한 것이 많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사랑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서로 모난 부분을 깎아내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서 ‘사랑’을 완성해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열 두 제자의 파견 장면입니다.
이는 세 가지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기 이전의 장면, 파견하시는 장면,
그리고 파견받은 이들이 그 사명을 이루는 장면입니다.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먼저 사랑으로 그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냥 보낸 것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과 권한을 부여하시어 파견하십니다.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루카 9,1)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가르쳐주십니다.
“길을 떠날 때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9,3)
그렇습니다.
길을 떠나면서 그 어떤 다른 것을 가지고 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닐 필요가 없습니다.
몸 걱정도, 치장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져야 할 것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칠 힘도 권한도, 말씀도, 예수님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도 이미 이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왜 그 권능이 우리에게서는 드러나지 않을까?
그것은 우리가 무능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바오로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이는 우리의 초라함, 우리의 무력함, 우리의 허약함이
당신의 권능을 더욱더 드러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능력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앞세우기에,
결국 그분의 권능이 드러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능력에 집착하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장면에서, 파견받은 자들이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알리고,
그 증거로 병든 자들을 고쳐 주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은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루카 9,6)
오늘 우리도 분명 예수님께 파견받은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 그분의 권능이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내 형제들에게서는 치유가 일어나고 질병이 고쳐져야 할 것입니다.
만약 나를 만나는 이들에게서 치유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내가 무능하지 않으려 하고 오히려 능력을 부리려다
하느님의 권능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까닭은 아닐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루카 9,3)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 할 것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근본에 충실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사람들은 자기의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수고와 땀을 흘리지 않은 채 좋은 열매만을 기다릴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인 줄을 알면서도 마음을 다잡지 못할 때가 많아 큰 일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예외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앉아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을 잊고 살아갑니다.
가정을 방문하여 기도해 드리고 사업장을 방문하여
격려해 드려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도 손발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지나는 길에 들러 생색만 내고는 그만입니다.
환자들을 돌보고 봉성체를 해 드리는 것을 일상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그저 미사 봉헌하는 것으로 하루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지낼 때가 많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면 삶이 풍요로워지고 그 안에서 주님의 손길을 느끼면서도
정작 그런 기회를 자주 마련하지 못하는 게으름을 부끄러워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코로나19가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지금 여기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사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그리고 오그라든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 고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소명을 잊고 세상 것에 더 집착하고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천상의 축복보다는 현세적인 축복에 목을 매는 것이 현실입니다.
천상은 나중의 일이니 지금 즐기고 인정받고 싶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하늘의 문이 이 지상에서 열린다는 것을 잊고 삽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루카9,3).하시면서
한 눈 팔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신 주님의 말씀을 일깨워야 하는 오늘입니다.
근본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을 잃으면 아무리 많은 것을 차지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 하시며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세상 것에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을 선택하는 순간들에 기쁨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세상 것에 의지하는 동안
하느님의 힘의 가능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약속을 믿고 그대로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힘이 신앙에 있습니다.
믿음에 따르는 실천과 활동을 위해 수고와 땀을 아끼지 않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누구든 만나십시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본당 주일학교에서 ‘필드트립(Field Trip)’을 준비하였습니다.
학생들은 4시에 모여서 필드트립에 대한 주의사항을 들었습니다.
학생들을 위해서 차량 봉사를 해 줄 형제님들도 함께했습니다.
저도 학생들과 함께하고 싶어서 필드트립에 참가했습니다.
이번 필드트립의 장소는 텍사스 레인저스 구장이었습니다.
뉴욕에 있을 때는 메츠와 양키즈 구장에 가곤 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기도하고, 야구장으로 향했습니다.
텍사스 레인저스는 몇 년 전에 ‘돔’구장을 신축했습니다.
야구장은 덥지 않고 쾌적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응원했고, 텍사스 레인저스는 9회 말에 점수를 내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1점 차로 이겼습니다.
이런 필드트립이 좀 더 발전하면 필드필그림이(Field Pilgrim) 될 수도 있습니다.
야구장, 농구장에 가서 학생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것도 좋습니다.
주교좌성당이나, 성지에 가서 학생들이 함께 기도하고, 서로를 알아가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3년간 ‘필드트립’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필드트립 장소는 ‘갈릴래아’ 호숫가 주변이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2000년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숫가 언덕에서 ‘행복선언’을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은 세상이 주는 행복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축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 명이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을 치유해 주셨고,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필드트립을 통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게 많은 ‘필드트립’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제가 가보지 않았던 곳으로 저를 보내 주셨습니다.
5년 전에는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로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에파타와 탈리타쿰’을 이야기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이 영적으로 메마른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주기 바랬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을 통해서 절망 중에 있는 사람은 희망으로,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은 빛으로,
근심 중에 있는 사람은 담대함으로 일어나길 바랐습니다.
팬데믹이라는 큰 장애물이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제 발의 등불이 되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함께 필드트립을 할 수 있는 동료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난 2월 13일, 저를 이곳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보내 주셨습니다.
필드트립의 장소는 다르지만 제가 해야 할 소명은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제자들에게 주셨던 소명과 같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행복이 아닌,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제게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허위와 거짓말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너무 부유하게도, 너무 가난하게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무 부유하면 교만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가난하면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이곳에서도 제 발의 등불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인생은 어쩌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필드트립’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과 함께
멋진 필드트립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자세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당신의 예언적 가르침과 치유 기적의 능력을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지니고 가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은 제자들이 자기들이 먹을 양식마저도 걱정하지 않고
세상의 온갖 염려와 세상일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라신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 다른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하신다.
복음을 전하는 데 방해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말씀이다.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양식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말라고 하심으로써,
제자들이 쓸데없는 염려로 마음이 산만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신다.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시편 55, 23)라는
말씀대로 먹을 것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돈도, 금이나 은도, 신발도 없이 보내신다.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칭송을 듣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뛰어다니며 가져다주는 은총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이사 52,7)
우리의 발은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돌아다닐 때 그들은 손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풍습에서 나그네를 마치 하느님의 천사처럼 대했다.
즉 필요한 것, 먹고 자는 것을 무료로 제공할 줄 알았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행위로 알았고 또한, 이를 통해 축복을 받았다.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음식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5절)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곳에서 묻은 먼지는 하느님의 백성을 더럽히지 않고
하느님의 집에 더러운 것이 묻어 들어가지 않도록,
새 성전으로 들어갈 때 그 먼지를 털어 버려야 한다.
뛰어나지도 않고 갖춘 것도 별로 없는 이 제자들을 통해 이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정복하실 수 있다.
나 자신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주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임을 감사하며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오늘 교회의 모습!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여름 내내 신앙학교 운영하느라 땀 흘리며 쌩고생한 형제들과 소풍을 왔습니다.
어떻게든 형제들 입에 뭐 하나라도 더 넣어주려고, 산 너머 갯바위 포인트를 다녀왔습니다.
요즘 물고기들도 약아 빠져 사람들 발길 닿는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습니다.
손맛을 보려면 발품을 팔아야 합니다.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짐이 산더미입니다.
그걸 이고 지고, 깎아지르는 비탈길을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포인트에 겨우 도착했더니, 이번에는 장대비가 인정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마땅히 피할 곳도 없고, 이고 지고 온 것을 다시 챙겨 산길을 오르며, 마음속으로 크게 후회를 했습니다.
어디 다닐 때는 어떻게든 짐을 최소화 해야 되는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목 실습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훈화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용 짐을 꾸리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기에,
이를 ‘여장 규범’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무 지나친 요구를 하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9,3)
예수님의 훈시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솟구쳤습니다.
‘그럼, 대체 어쩌라는 말씀인가요? 빵도 돈도 안 챙기면 굶어 죽으라는 말인가요?
여벌 옷도 한 벌 안 챙기면, 만나는 사람들 다 도망갑니다.’
당시 여행 중에 강도나 산짐승들을 만날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방어용 지팡이 하나는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최후의 생존 수단인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긴 여행길에 많은 돈은 아니어도 만일을 대비한 비상금은 필수입니다.
그런데 비상금 한 푼조차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에게 럭셔리한 부자의 모습이 아니라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떠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이 자신의 힘이나 세상의 힘을 믿기보다는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 유사한 말씀이 ‘열두 사도의 가르침’ 11장 6절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른 곳에 유숙할 때까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사도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목자들이 교우들로부터 생활비를 지원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 자신은 스스로 천막 짜는 노동을 해서 생활비와 전도 여행 경비를 마련했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오늘날 우리 교회와 수도회를 돌아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의 부유한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청빈의 삶, 무방비의 삶, 머리 둘 곳조차 없는
떠돌이로서의 삶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철저히 정착하고 안주했으며, 충분한 기득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인적이고 통합적으로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보내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공관복음 공통으로 주님께서는 중간에 열두 사도를 파견하십니다.
말씀으로도 가르치시고, 마귀 쫓아내고 질병을 고쳐 주시는 모범을 보여주신 다음
이제 가르침 받은 대로 그리고 본대로 가서 하라고 당신 없이 파견하시는 겁니다.
당신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어차피 주님 없이 복음을 선포해야 하니
예행연습 삼아 또는 선교 체험 삼아 파견하시는 것인데
오늘 파견에서 주님의 선교 방식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악령 퇴치와 질병 치유입니다.
악령 퇴치와 질병 치유를 나눠서 볼 수도 있지만
같이 보는 것이 주님의 통합적인 치유와 선교 방식을 이해하는 데 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구원과 선교 방식은 전인적이고 통합적입니다.
우선 주님께서는 복음 선포만 하고
질병 치유에는 무관심하지 않으신다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한때 저는 성령 쇄신 운동하는 분들이 그 기도회에서
치유 행위를 하고 그것을 자랑하는 것에 부정적이었습니다.
물론 하느님 찬미보다 치유에 더 마음이 가 있고
그것을 자랑까지 한다면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니 그것은 문제겠지요.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면 질병의 치유는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통합적인 차원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부정적으로만 볼 이유가 없고 할 수만 있다면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는 치유의 능력이 없기에 제 주변의 아픈 분들을 위해 기도만 해드리고 있는데
치유하지 못하는 것은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게도 주셨음에 틀림이 없는 그 능력을
제 믿음이 부족하여 받지 못한 것 같아서 부끄러울 뿐입니다.
오늘 복음은 분명 이렇게 얘기하잖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아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질병 치유도 통합적이고 전인적입니다.
육신의 병만 치유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악령 퇴치는 병으로 치면 마귀 병의 치유입니다.
요즘 제게는 질병과 관련하여 확신이 있고 이것을 몇 번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질병에는
육신의 병,
마음의 병,
정신의 병,
영혼의 병이 있는데
이 영혼의 병이 가장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병이고,
그러니 할 수만 있다면 이 병부터 치유해야 한다고.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육신의 병 치유에만 관심이 있고,
요즘은 그래도 마음의 병이나 정신의 병까지 관심을 두는 분들이 있는데
자신과 관련해서든 다른 사람과 관련해서든 영적인 상태까지 관심을 둬야 하는데,
악령 퇴치의 권한과 힘을 오늘 주님께서 주신 것은 이런 뜻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악령 퇴치를 할 수 없더라도
누구를 진정 사랑한다면 그의 영혼 상태까지 살피며
그를 위해 전인적이고 통합적으로 사랑하고 기도해 줘야 할 것입니다.
예수의 리더십
박상대 마르코 신부
복음 선포를 위해 떠나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내리시는 규칙은
철저하게 “있는 그대로” 떠나라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집을 떠날 땐 통상 지팡이를 휴대하였는데,
이는 맹수나 뱀, 강도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였던 것이고,
맨발로 다닐 수도 있었지만 신발은 돌길과 거친 길로부터 발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는 생각하지도 못할 예수님의 12제자들에 대한 여장규칙은
너무 엄하다 못해 야속하게 들리기도 한다.
우리가 루카복음에서 늘 받는 분위기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철저한 자비와 사랑이다.
따라서 루카는 선교여행을 할 때 선교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하느님의 보살핌과 안배에 의탁하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익히 알려진 <겅호!> <열광하는 팬> <하이파이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1분 경영> 등 수많은 베스트셀러의 저자인
켄 블랜차드(Ken Blanchard)가 필 하지스(Phil Hodges)와 共著로
<섬기는 리더 예수(The Servant Leader)>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 진다.”(마태 23,11-12)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키워드로 삼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으로 배우는 ‘섬기는 리더십’을 구상하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리더십이란,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과정으로서,
사생활이나 일터에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순간 리더십을 발휘하게 된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가정이나 교회, 직장뿐 아니라
어디에서든 예수님을 리더십 모델로 삼을 수 있다고 한다.
예수님의 ‘섬기는 리더십’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예수께서 12제자를 길러내시고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교 2,000년의 역사를 이끌어 왔다는 사실을 직시하면 입을 다물고 말 것이다.
저자 블랜차드는 ‘섬기는 리더’가 행해야 하는 구체적인 리더십의 형태는
예수께서 보여준 ‘상황대응형 리더십’으로서
제자들의 상태를 적절히 분석하여 적용하는 4가지 유형을 제시하고 있다.
상황대응형 리더십의 4가지 유형은
① 지시형, ② 지도형, ③ 지원형, ④ 위임형이다.
오늘 복음을 살펴보라.
예수께서 12제자를 파견 내용을 보도하는 오늘 복음 안에 블랜차드의 말대로
“지시, 지도, 지원, 위임”의 네 가지 유형이 모두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