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100문 100답
발행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ㅣ편집인 이춘열ㅣ삽화 박건웅ㅣ발행일 2004년 11월 15일
1편 : 이 땅에서 해원하지 못한 억울한 죽음들
1. 마산 여양리, 고양 금정굴, 경산 코발트광산, 지리산, 불갑산 등지에서 유골이 다량 발굴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분들이 죽임을 당하게 된 사연이 궁금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집단학살당한 민간인들입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피학살자들 중 대다수가 우리 국군과 경찰, 미군, 우익단체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점이고, 또 그 대부분이 우발적이 아닌 조직적 학살의 피해자들이라는 점입니다. 이들은 지리산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혹은 가족 중 누군가가 부역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혹은 형무소에 수감돼 있었다는 이유로, 혹은 국민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혹은 흰 옷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불법 학살당했습니다.
2. '민간인학살'은 '양민학살'하고는 다른 건가요?
여기서 '민간인학살'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국군, 경찰, 미군, 우익단체, 혹은 인민군에 의해 비무장 민간인이 집단학살된 사건을 말합니다. 흔히 '양민학살'이라고 말하는 사건들이지요.
하지만 '양민'이라는 말에는 비무장 민간인이라는 의미 외에 '사상적으로 건전하다'는 의미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좌익이거나 좌익혐의가 있는 사람이라면 적법한 절차 없이도 죽일 수 있다, 즉 '빨갱이는 무조건 죽여도 좋다'는 뜻으로 둔갑할 수도 있는 무서운 말인 셈입니다. 하지만 설사 좌익이었다 하더라도 적법한 절차 없이 학살하는 것은 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전시라 하더라도 이는 명백한 전쟁범죄에 해당합니다. 더군다나 당시 이승만 독재정권은 '양민증'이라는 것을 발행하여 독재권력에 우호적이거나 침묵하는 세력과 그렇지 않은 세력을 나누었고 이 '증'을 갖지 않은 국민들을 탄압했습니다. 또 지난 우리 역사에서 독재정권이 독재에 반대하는 세력에게 언제나 '빨갱이'라는 허울을 씌워 탄압, 고문, 살해했던 점을 상기한다면 '양민'이라는 용어는 적절하지 않다 하겠습니다.
3. 전쟁중에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요?
'전쟁은 언제나 학살을 수반한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전쟁의 참혹성을 다시 상기시키는 말이지 학살을 정당화하는 말은 아닙니다. 전쟁중인 적국의 국민이라 하더라도 민간인은 함부로 죽일 수 없으며 또 적군이라도 항복의사가 명백하다면 처형할 수 없는 것이 국제법의 기본입니다. 이는 아무리 극단적인 상황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생명은 최후까지 존중받아야 한다는 보편적인 상식에 입각한 조치입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학살이 더 충격적인 것은 대부분 적이 아니라 우리 군경에 의해 우리 국민이 집단학살당한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다수 국민을 '잠재적인 적'으로 규정하고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 또는 묵인했습니다. 이는 국제법과 인도주의의 측면에서도, 그리고 국민주권의 대한민국 헌법 정신에 비추어서도 결코 용인될 수 없는 전쟁범죄이자 국가폭력입니다.
4. 민간인학살이라고 해서 아무나 죽인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주로 어떤 사람들이 학살의 대상이 되었나요?
불특정 다수의 국민들이 학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6.25 직후부터 예비검속된 좌익경력자 및 국민보도연맹원, 형무소 재소자 학살은 이미 7월 초부터 진행되었고 9.28 수복 후에는 부역자 색출이라는 명분하에 인민치하에서 살아남은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했습니다. 또한 빨치산이 은거하던 산 주변의 주민들은 빨치산 내통혐의, 또는 작전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학살의 대상이 되었으며, 피난민들도 그 속에 인민군이 섞여 있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폭탄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학살된 사람들 중에는 갓난아기와 부녀자, 노인들도 많았습니다. 한국전쟁 당시의 무수한 민간인학살은 권력이 자기 입맛에 맞는 국민을 선별하고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재갈을 물리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5. 죽인 사람은 누구인가요?
100만 피학살자 중 약 10%만이 인민군에 의해 학살되었고 나머지 90%는 우리 국군과 경찰, 우익단체, 그리고 미군에 의해 학살당했습니다. 미군은 피난민임을 알면서도 무차별 폭격을 일삼았으며, 형무소 수감자와 예비검속인 처형은 군경 합동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빨치산 토벌을 목적으로 창건된 국군 11사단의 경우 지리산, 백운산 주변 마을 주민들을 대량학살하여 '학살부대'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였고, 부역혐의자 학살은 경찰과 우익단체가 주도했습니다.
6. '보도연맹' 은 좌익 조직 아닌가요?
1949년 결성된 '국민보도연맹'의 취지는 과거 좌익 경력을 가진 사람이나 그 가족을 '도와서 올바른 데로 인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승만 정권은 정권에 반대한 이들 모두를 보도연맹원으로 가입시켰고, 또 지역에서는 할당된 수를 다 채우지 못하자 사상이나 활동과 무관한 주민들을 대거 보도연맹원으로 가입시키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밀가루 배급 등을 미끼로 연맹원을 모집하고 본인의 동의 없이 가입원서에 도장을 찍어 보고하는 등 순진한 농민들이 본인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연맹원이 된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들 보도연맹원은 전쟁 발발 직후 거의 모두 예비검속되어 학살당했습니다.
7. 전쟁 발발 후 '예비검속'의 대상이 된 사람은 주로 어떤 사람들인가요?
해방 직후에 좌익활동을 했거나 좌익활동 혐의가 있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입니다. 또 국민보도연맹원도 전원 예비검속되었습니다.
8. 형무소 재소자들은 범법자 아닌가요? 이 사람들도 민간인학살에 포함되나요?
형무소 수감자들을 학살한 것은 이들이 인민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혐의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형무소에는 아직 형을 확정받지 않은 미결수도 다수 있었고 기결수 중에는 단순 잡범도 많았습니다. 미결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기결수들 역시 자신의 죄에 따라 일정기간의 징역형을 살도록 판결받은 것이지 사형을 언도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단지 적 동조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전쟁 발발 직후인 7월 초부터 약 한달 사이에 전국 모든 형무소의 수감자들이 불귀의 객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을 보호할 의무를 저버렸고, 그 과정 역시 명백한 불법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학살도 당연히 민간인학살에 해당합니다.
9. 부역자 처벌은 적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나요?
부역자 처벌의 아이러니는 죄가 적을수록 죽을 확률이 높다는 점입니다. 인민치하에서 적극적으로 인민군에 협력한 사람들은 대부분 인민군이 퇴각할 때 따라 월북했습니다. 남아 있던 사람들은 주로 피난갈 새도 없이 인민치하를 맞고 생존을 위해 시키는 일을 조금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인민치하에서 살아남은 것이 죄가 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몸을 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들 소극적인 부역자들은 경찰서나 지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은 뒤 일부 훈방되고, 일부는 서울 등지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은 뒤 극소수가 사형, 징역 등의 형을 얻도받고 대부분은 훈방되었습니다.
그러나 경기도 등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의 비호 아래 우익단체원과 치안대원들이 최소한의 법적 절차도 지키지 않고 부역혐의자나 월북한 이가 있는 집안의 가족들을 잡아다가 인근 야산이나 강변 등지에서 무차별 집단학살하는 일이 광범하게 벌어졌습니다. 즉, 적극적인 부역자는 월북하여 생존하고, 소극적인 부역자는 재판을 받은 뒤 대부분 생존하고, 혐의가 미미한 사람이나 혐의자의 가족들은 무차별 학살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10.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주민들의 피해가 조금은 있을 수도 있는 일 아닌가요?
빨치산을 토벌하는 목적 중 하나는 인근 거주 주민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군은 작전명령을 통해 "작전지역 내 인원은 전원 총살하라"는 지침을 정했습니다. 이러한 작전명령이 뜻하는 것은 작전지역 내의 주민들은 빨치산을 도울 수 있기 때문에 모두 죽여 없애고 또 빨치산의 식량과 은거지가 될 수 있는 주민들의 재산도 전소하라는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사실상 마을 주민들에 대한 살인면허였습니다.
11. 노근리 사건 같은 미군에 의한 직접 학살도 많이 있나요?
미군 폭격에 의한 피해가 없는 지역은 전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 지역은 더 이상 폭격할 땅이 남아 있지 않아 공격할 곳이 없다는 보고가 올라갈 지경이었고, 남한 지역도 전선과 무관한 무차별 폭격이 난무했습니다. 미군의 이런 행태는 인종차별적 인식에 바탕한 작전명령의 결과로서, 당시 미군에게 한국 국민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었고 적과 똑같은 피부색, 비슷한 차림을 하고 있어 작전에 혼란만 주는 사실상의 적으로 규정되었다는 점을 방증합니다. 미군이 피난민임을 명백하게 인지하고도 폭격, 학살을 자행한 사례는 노근리 사건, 포항 함포사격 등 최근에 기밀해제된 미 문서와 증언들을 통해서 꾸준히 확인되고 있습니다.
100만 민간인학살의 진상을 밝히는 일은 살아남은 우리들이 해야할 더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입니다.
100만 피학살 원혼들이 해원하고 유족들이 위로받을 수 있도록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에 동참해주십시오.
여려분의 후원회비는 폭력과 억압의 시대를 넘어 인권과 평화의 시대로 가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동시에 이승만과 미군정이 친일 민족 반역자들을 대거 고용했고 그들이 바로 백선엽을 위시한 만주군관 출신과 노덕술/ 김창룡 등 이었으며, 49년 김구 암살 이후 반민특위가 와해 되었습니다. 친일민족 반역자들의 생존은 '반공' 과 직결되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같은 만주군관출신 박정희는
남로당 간부로써 사형을 언도받고도 살아남아 한국군의 요직에 등용되는 결과를 낳게 되지요. 전시 민간인 희생은 피할 수 없는 불행 입니다. 문제는, 정통성 없는 이승만과 민족반역자들이 자신들의 생존과 기득권 유지를 위해 조직적이고 의도적으로 반 정부 세력을 대규모 학살 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멋진 한국님..우리한국현대사의 반인륜 반인권 사건들은 모두가 친일문제와 서로 연관성이 없는것이 없을정도 입니다. 멋진한국님이나 대개분들이 아직 현대사 자료를 전반적으로 접해 보지 못하셨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지요..학살의 배후나 직접적인 지휘자도 바로 악질친일파라는 증거 자료는 언론에 일부 공개된 바도
첫댓글 죄송하지만 이 내용은 반역자에 대한 언론 보도와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동시에 이승만과 미군정이 친일 민족 반역자들을 대거 고용했고 그들이 바로 백선엽을 위시한 만주군관 출신과 노덕술/ 김창룡 등 이었으며, 49년 김구 암살 이후 반민특위가 와해 되었습니다. 친일민족 반역자들의 생존은 '반공' 과 직결되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같은 만주군관출신 박정희는
남로당 간부로써 사형을 언도받고도 살아남아 한국군의 요직에 등용되는 결과를 낳게 되지요. 전시 민간인 희생은 피할 수 없는 불행 입니다. 문제는, 정통성 없는 이승만과 민족반역자들이 자신들의 생존과 기득권 유지를 위해 조직적이고 의도적으로 반 정부 세력을 대규모 학살 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김일성이 나쁜 놈이지만, 이승만은 훨씬 더 나쁜 놈이고 용서 할 수 없는 민족반역자 입니다.
멋진 한국님..우리한국현대사의 반인륜 반인권 사건들은 모두가 친일문제와 서로 연관성이 없는것이 없을정도 입니다. 멋진한국님이나 대개분들이 아직 현대사 자료를 전반적으로 접해 보지 못하셨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지요..학살의 배후나 직접적인 지휘자도 바로 악질친일파라는 증거 자료는 언론에 일부 공개된 바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