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양 신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
나병 환자들은 옆에서 쳐다보기에도 어려울 정도로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겉모습만 흉측할 뿐만 아니라 마음 또한 병이 들어서 사람들이나 사회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사람들 역시 나병 환자가 근처에 오는 것조차 꺼려하여 내쫓기가 일쑤였습니다. 이렇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따돌림을 당하고 내몰림을 당하여 철저히 소외된 사람들이 나병 환자들이지요. 바로 이 나병 환자를 오늘 예수님께서는 단 한 말씀으로 낫게 하십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이렇게 간청하는 나병환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손을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태 8,3)
그러자 대뜸 나병이 깨끗이 나았으며 예수님은 그 나병 환자에게 이런 당부를 하십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태 8,4)
오늘 복음을 잘 보면 병의 치유 과정은 대단히 짧고, 치유가 된 이후에 나병 환자가 해야 할 일에 대한 당부의 말씀이 오히려 복잡하고 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치유 기적보다는 그 후에 하신 당부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 묵상을 하고자 합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어떤 의도로 이런 당부들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에게 치유된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그런데 이 함구령은 사실 별로 소용이 없었지요.
오늘 복음의 시작에서 전하듯이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된 이 광경을 새삼스럽게 비밀에 부치라는 예수님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요? 여기에서 뿐만 아니라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런 저런 기적을 행하시고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말씀을 자주하고 계십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해하게 될 것을 염려하신 것입니다. 참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실 때가 아직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참 메시아이심이 드러나는 때는 죽음에서 살아나실 때, 바로 부활 사건이 이루어질 때입니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예수님에 관하여 무수히 많은 추측을 할 뿐이지요. 예수님께서 5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도 사람들의 관심은 세상 적인 가치에만 머물러 있었고, 이렇게 세상적인 가치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환호하는 사람들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빵에만 관심을 두지 말라고 거듭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빵만을 보려고 하지 말고 그것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을 바라신 것이지요.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사제에게 가서 치유된 몸을 보이고 모세가 정해준 대로 예물을 드리라고 당부하십니다. 레위기 13-14장에는 나병 환자가 완쾌되었을 때, 또 하느님께로부터 은총을 받았을 때 해야 하는 규정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나병 환자가 완쾌되었을 때는 사제에게 가서 치유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공증 받아야 다시 사회로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이때 나병 환자는 반드시 속죄 예물과 면죄 예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렇게 해야 다시 정결한 자가 되어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의 이 당부 말씀을 묵상하면 저절로 루카 복음 17장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길에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지요. 예수님께서는 한탄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루카 17,17)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면 더 큰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감사가 바로 신앙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미시간주를 관광하던 유람선이 사고로 뒤집혀서 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물에 빠진 사람들 중에는 수영 선수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는 사력을 다해서 사람들을 구하기 시작하여 혼자 무려 23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였습니다. 사건 후에 미국의 전 매스컴에서는 이 수영 선수의 이름이 대서특필되고 사람들은 그의 놀라운 의협심에 감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어느 주일에 한 교회 목사님이 이 수영 선수의 이웃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예로 들어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는 60대가 된 예전의 그 수영 선수가 앉아 있었고 그를 알아본 교회 신자 한 사람이 목사님께 그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목사님은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그 수영 선수에게 물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러자 예전의 수영 선수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하였습니다.
"제가 구해준 23명중 그 어느 누구 하나 저를 찾아와 고맙다고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군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 또한 없는 것입니다. 우리 본당에는 감사 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많은 신자 분들이 있습니다. 매주 주보에 실리는 감사헌금 난을 보면 많은 분들이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 드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관심 있게 살펴보면 감사 드리는 사람이 또 감사를 드린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낯선 이름이 올라오는 경우는 참 드물고 같은 이름들이 번갈아 올라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감사 드리면 또 감사 드릴 일이 생기는 것이지요. 감사는 축복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얼마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살아왔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처지에 맞게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지못해서 인색하게 드리는 감사는 참된 감사가 아니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거나 내 위안을 위해서 하는 눈속임일 뿐입니다. 가난해서, 받은 것이 없어서 감사할 일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한 마음이지요. 누구나 어떤 처지에서나 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보잘 것 없는 헌금을 보시고 그 누구보다도 많이 봉헌했노라고 기뻐하셨지요. 그후에 그 과부에게는 얼마나 많은 축복이 쏟아졌겠습니까?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감사는 축복의 근원입니다.
이 시대에 하느님의 능력과 축복이 드러나지 못하는 이유는 감사보다는 불평과 불만을 그리고 부족함만을 늘 애타게 하느님께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주신 것에 감사 드리고, 작은 양이라도 기꺼이 내 것을 나눌 때 축복은 지속이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를 고쳐 주시고 치유 이후의 나아갈 길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사제에게 가서 보인 후 예물을 올려 하느님께 감사 드릴 것을 알려 주셨지요. 그것이 은총이 지속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나병 환자는 치유를 받았을 뿐 아니라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감사하며 살아가십시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감사할 줄 아는 삶입니다. 감사하며 살 때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이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더욱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