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 톨케이트 였었다.
이젠 서울 요금소로 바뀌어 있네.
서울로 자차 운행하여 갈 때 마다 느꼈던 두려운 감정.
거대하게 입 벌린 '서울'이라는 공룡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양재 톨케이트를 들어 설 때마다 받았었다. 공룡의 이빨 사이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두려움.
형제들이 살고 있고, 여러가지 일들로 서울을 영원히 등지고 살 수는 없었다.
늘 바삐 볼 일만 보고 탈 서울을 해야 마음이 편해졌었다.
양재 톨게이트를 지나야 하는 동선이면 받았던 두려움이 싫어서
동서울 쪽. 워커힐에서 숙박을 하거나 외곽 순환로를 타고 일산으로 바로 갈 때도 많았다.
1991년 내 기억 속 서울.
그때는 내가 표현하는 공룡의 입 밖으로 스스로 도망쳐 나왔었다.
함께 자취하다가 먼저 시집 가 버린 여동생,
내 도움으로 공부하던 오빠의 취업과 자립,
몸이 좋지 않아 그만 둬야 했던 직장,
그리고 같은 하늘아래 숨 쉴 수 없는 아픔을 준...
암울했고, 삶의 가치를 찾지 못했다.
지금과 같은 자존감과 용기가 그 때는 없었다. 움추려 있었다.
고향으로 도망치는 방법 밖에..
그렇게 떠나온 서울은 내맘 깊은 곳에 감춰두고
가고싶지 않은 곳으로,
나에겐 위험한 곳으로,
절대 떠 올리지 말아야 할 곳으로 치부 해 버리고 잊고 살았었다.
몇 해 전 언니와 함께 한 서울 여행 이전에는 서울의 중심으로는 들어가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명동,종로, 을지로, 혜화동,성북동, 돈암동 그리고 신촌....
세월에 모든것이 잊혀 진 다고 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 거리들을 미디어 어느 한 구석에서라도 접하면 눈을 돌려 피해 버릴 정도였다.
삼십 삼년. 이제는 당당히, 나 답게 극복해야 할 때라 판단했고,
서울의 중심으로 들어섰다.
시청 인근으로 숙소를 정하고, 피하고 싶었던 거리를 미소띠며 활보했다.
더 이상 아픈 기억이 날 움추려 들게 두지 않을거야 라고 다짐도 해 봤다.
우연히 알게된 '월드팝친구들'은 두려움 극복에 용기를 주었다.
월팝참여는 다양한 문화를 접하기 힘든 지방 소도시에 사는
내겐 '문화충격' 같은 '사건' 이면서 새로운 도전이다.
영어공부를 다시 하니 뇌도 치매예방이 될 터.(발음은 혀가 굳어 쉽지 않아요.~~)
함께 한 분들과의 파티같은 시간이 즐거웠고, 내가 행복했고,
모두가 내게 용기를 주는 듯 미소를 지어주셨다.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서울이 내게 다가오고 있다.
계절마다 참석 하기로 혼자 다짐 하고,
내 터전에서 내 생활을 착실히 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도저히 극복하지 못 할것 같았던 서울!!!.
그러나 이렇게 난 또 극복하려 하고 있다.
It's My Life~
It's now or never~~
본 조비의 노래 처럼
내 인생이야. 지금 아니면 안돼라고...
@커쇼
네~ 건강하게 잘 지내시면서 기회가 될때마다
추억을 음미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