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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무사 268 우는 거지
장추삼들이 부리나케 쫓아간 곳은 마을 외곽의 관제묘였다.
"여기가 그 거지노인을 보았다는 곳인가?"
"그런 듯하오. 문제는 아이의 말대로 그 노인이 가끔 온다는 것이
니."
청민의 말인즉슨 관제묘에 공을 드리러 가족과 왔다가 심심해서 사
당 주위를 돌아다니던 와중에 그 울보 거지노인과 만나게 되었다는 거
다.
그 뒤로도 두어 번 더 만난 듯했지만 거지와 어울리는 것을 안 그의
부모가 마을 외곽으로 나다니는 것을 막은 모양이었다.
"그럼 마냥 기다려야 하는 거야?"
"방법이 없잖소."
투덜거리던 장추삼이 에라, 하며 자리를 차지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에 북궁단야도 검을 조용히 내려놓고 엉덩이를 붙였다.
"하 형도 앉아."
"아니, 난 주위를 좀 돌아보고 오겠소. 혹시라도 모르니까."
"어?"
장추삼이 손을 뻗기도 전에 하운이 사당을 나섰다. 이렇게 되자 관
계 껄끄러운 둘이 남게 되었다.
'우~ 이건 아니야!'
바늘방석에 앉으라면 앉겠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앉아 있지 못하겠
다. 하운이 나간 지 얼마 됐다고 벌써 숨이 턱턱 막혀오고, 손바닥에
땀이 찬단 말인가.
'끄응~ '
엉덩이를 들썩이던 장추삼이 슬쩍 몸을 일으켰다.
"저, 나도 주위를 좀 둘러....."
"앉아."
"아니, 하 형을 도와서 주위를 살펴......."
"앉아."
이 남자는 실체화시키기 명수인가 보다. 저번에는 검기를 실체화시
키더니 이번에는 말을 실체화시키고 있다.
무언의 압박감이 양쪽 어깨를 사정없이 내리눌러 엉거주춤한 상태
그대로 주저앉은 장추삼이 이리저리 눈을 굴려 사당 전체를 살펴보았
다.
솔직히 북궁단야의 눈을 피했다는 것이 옳지만.
"어이구, 저 수염 좀 봐. 미염공이라는 말이 거저 나온 게 아니구
나!"
"한두 번 보나?"
쓸데없는 능청에 여지없는 응징.
또다시 말이 없어진 장추삼이 먼 산을 보고 싶어서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는데 북궁단야가 슥 고개를 돌렸다.
뜨끔!
"정직하게 대답해라."
"뭐, 뭘 말이오?"
"정직하게 대답해라."
'같은 말 반복하기가 재미있나?'
입 밖에 내지는 못하고 속으로먄 궁시렁거리던 장추삼이 애써 고개
를 끄덕였다.
"만나게 된 계기가 뭐냐?"
"에?"
장추삼의 반문에도 북궁단야는 여전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고만
있었다.
"아, 그러니까 설 소저가 친구 녀석이 하는 고서점에서 일을 하는
관계로....."
그 뒤로 술집에서의 일을 듣기 좋게 둘러대던 장추삼이 북궁단야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눈치채고 설의 음주 사실을 쏙 빼버렸다.
그게 여러모로 좋을 듯해서.
"답답한 일이로군. 아무리 명소라고 해도 생면부지의 남자와 술집
에 드나들다니, 강호행 일 년이 아이를 아주 망가뜨렸어."
'그럼 그쪽은 절반쯤 망가진 상태로구먼?'
하필이면 그런 고서점을 택하다니, 하고 한숨을 쉬던 북궁단야가 주
먹을 쥐고 왼 손바닥을 탁탁 치며 고개를 돌렸다.
"뭐 좋다. 그건 넘어가기로 하자. 이번 질문은 정직하게 말
해라."
'그럼 여태까지는 거짓말인 줄 알았냐!'
"우리 설이가 남장 여인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
"어떻게 알다니? 아니, 그럼 여자랑 남자도 구분하지 못하는 거요?"
"그 말뜻은......"
"말뜻이고 뭐고 척 보면 알지, 그걸 생각하고 자시고 할 필요가 있냔
말이오. 뭐 덩치가 말만하고 화포 같은 소리로 꽥꽥 짖어대는 제삼의
인간형이 아니라면 바로 알아보는 거지."
척 보면 모르는 북궁단야가 한숨을 뱉었다.
이놈은 처음부터 설이 여자라는 걸 알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리 쉽게 뚫릴 변장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다.
흠을 잡을 건덕지는 없는데 왠지 얄밉다. 특히나 저 뻔뻔한 면상은
한 대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을 마구 불러일으킨다.
크게 숨을 몰아쉬어 감정을 다스린 북궁단야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여태까지의 질문은 어차피 요식 행위다. 정말 중요한 질문을 할 때가
왔다.
"우리 설이... 어디가 좋나?"
"전부 다요."
나, 자가 나오기도 전에 즉각적으로 대답하고는 쑥스러워서 장추삼
이 고개를 떨궜다. 그러나 이건 진심이었기에 당당할 수 있었다.
"전부 다 좋다면서 울리나?"
"내가 울린 게 아니오! 직접 물어보시구려!"
가슴을 탕탕 치던 장추삼이 북궁단야의 서늘한 눈에 또다시 꼬리를
내렸다. 그래도 한마디 쭝얼거림으로 억울함을 대신했다.
"나중 되면 내 심정 알게 될걸."
"네 걱정이나 해라."
코가 떨어져 나가라 콧방귀를 날려주려다 설을 생각해서 눌러 참은
장추삼이 할 일도 없고 해서 잔풀을 찍찍 뜯었다.
이럴 때는 시간이 참으로 더디게 흘러간다. 좋은 사람하고 함께라면
쏜 살보다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세월이거늘.
"네 녀석의 실체를 아는 이가 우리 가문에서 나 하나라는 것이 답답
하구나."
나의 가치를 모르는 눈 삔 인간이 누구의 가문에서 하나밖에 없겠
지.
아아, 이 말을 얼마나 하고 싶었는가. 그러나 장추삼은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다.
사랑이 뭔지.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기대했던 깐죽거림이 돌아오지
않자 북궁단야 역시 말문을 닫았다. 뭐든 대거리만 했으면 여지없이
밟아줬겠는데.
문득 장추삼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런데 첫 강호행, 두 번째던가, 아무튼 그때 말이오."
반격해 줄 거리가 있다!
"음?"
북궁단야가 고개를 돌렸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가가호호 뒤지면서 알아보았던 인물들 거의
다가 율법자로 추정되는 인물들에게 살해되었잖소?"
".......!"
북궁단야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당황감이 어렸다. 내심 쾌재를 불
렀지만 여전히 의아한 얼굴로 장추삼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우연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아. 그리고 비천혈서에 대해
서도 굉장한 관심을 보이던데 구파의 사람도 아니고 그쪽에서 무학을
사사받은 선조가 있었던 적도 없는 듯하니 알 도리가 없구려."
"알 필요 없다."
"물론 알 필요 없겠지. 그런 방법으로 우리가 아는 부분만 쏙쏙 뽑
아가고 자신의 정체나 정보는 절대로 공개하지 않으니 이보다 불공평
한경우가 어디 있겠소?"
연이어 퍼부어지는 장추삼의 공세에 얼음과도 같았던 북궁단야의
평정도 깨졌다. 반박할 말도 없는 것이 요 심통의 말 가운데 틀린 점이
라곤 발견하기 어려웠다.
그의 당혹감을 즐기면서 실실 웃던 장추삼이 느긋한 목소리로 덧붙
였다.
"설마 무림을 어떻게 해보려는 건 아니오?"
"말이라고 다말이 아니다!"
북궁단야의 일갈은 가슴 섬뜩한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장
추삼의 장난기는 그 말에 가일층 탄력을 받아 마구 튀는 상태였으니까.
"호오, 그럼 더 더욱 이상하지 않은가? 구파의 사람도 아니고 그렇
다고 무림을 어떻게 해보려는 야욕도 없다. 그러면서 비천혈서의 행방
은 쫓는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빈정거리며 기분 좋게 웃던 장추삼이 북궁단야를 곁눈으로 슬쩍슬
쩍 훔쳐보다 입가에 그려놓은 미소를 그대로 동결시켰다.
"서, 설마 모른다는 거요?"
"음......."
북궁단야의 곤혹스러운 표정, 그건 자신도 일의 전말을 모르고 있다
는 증거다. 아니, 전말은커녕 해야만 하는 이유조차 모르고 있는 눈치
아닌가.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나도 답답하다."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그게 무슨 꼴이오, 라고 말할 분위기가
아니라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장추삼이 고개를 푹 숙였다.
놀리기 작전은 실패다. 본인도 모르는 일을 가지고 흠을 잡을 만큼
한심한 인간은 아닌지라 장추삼은 맥이 다 빠졌다.
"그래도........"
그의 말은 소리없이 들어선 하운에 의해 가로막혔다.
[쉿!]
누구에게 보낸 전음일까. 장추삼은 자신이라 알았고 북궁단야도 자
기라고 알았다. 왜냐하면 들렸으니까.
[우리는 운이 좋은 듯하오.]
이번에도 둘은 자신에게 보냈다고 생각을 했다. 전음을 둘 이상의
상대에게 동시에 나눠 보낼 고수는 흔치 않으니까.
"가끔 나타난다는 그 노인께서 이리로 오고 있다오. 일단은 몸을 피
하는 것이 좋겠소. 우리가 생각하는 사람이 맞는지 틀리는지 모르니까
말이오."
후다닥!
동시에 몸을 날려 구석으로 은잠을 한 북궁단야와 장추삼이 순간 놀
라 서로를 바라보았다.
"전음을...."
"... 들었나?"
전음은 일 대 일의 비밀 대화 수단이다. 공기를 울려 원하는 상대방
의 귀에만 진동을 전달하는 고난이도의 공부이기 때문에 공력의 소모도
소모려니와 장기간 사용하는 건 무리가 따른다.
'그런 전음을 동시에 두 명에게 전달했다는 건.....'
장추삼은 문득 소림 방장이 시전했던 육합전성을 떠올렸다. 말 그대
로 소리가 사방팔방에서 울려 어디서 목소리를 보내는지 모른다는 절
정의 음공.
그 위의 공부가 육합전음(六合傳音)이라고 들었다. 전음을 두 명 이
상에게 동시에 보낸다는, 그야말로 전설상의 경지.
그리고 지금 그걸 자연스레 구사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눈앞에.
둘의 경악이 표출될 사이도 없이 사당 문이 열리며 늙은 거지 하나
가 비틀비틀 들어섰다. 봉두난발에 술병을 입에 박은,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거지였다.
그는 사당을 들어서자마자 되는대로 엉덩이를 붙였는데 몸에서 나
는 악취 때문이 아니라 그걸 누를 정도로 짙은 술 냄새 때문에 은신해
있던 세 청년은 절로 인상을 찡그렸다.
"후아~"
노인은 세월만큼이나 젖은 눈동자로 멀거니 관운장의 제단을 바라
보다 품을 뒤져 낡은 향 서너 개를 꺼내 들었다.
"오늘도 올릴 거라고는 이것밖에 없습니다그려."
향에 불을 붙이고 세 번 절을 한 그가 제단에 예를 다하고 다시 주저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꿀꺽꿀꺽!
목젖이 파도를 치고 그에 따라 노인의 눈은 한층 깊어져만 갔다. 너
무도 깊어서 절대로 돌아 나오기 어려운 곳으로 한없이 빠져들던 그의
눈에서 어느 순간 한줄기 눈물이 맺혔다.
"으흐흐....."
저리 서러울 수도 있을까. 거지노인의 울음은 결코 입에서 터져 나
오는 것이 아니었다. 심연의 밑바닥, 가슴 한가운데에서 소용돌이처럼
말아 올려진슬픔을 눈과 입이라는 수단으로 토해내고 있었다.
"흐흐흐........"
귀곡성처럼 그렇게 슬픔을 뇌까리던 그가 술병을 기울이다 남은 술
이 없음을 확인하고 바닥에 엎드렸다.
[그냥 미친 노인 아냐?]
[그냥 미쳤다고 보기에는 너무 많은 한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사연없는 거지가 어디 있어? 날 때부터 거지가 아니라면 말이야.]
장추삼과 북궁단야가 전음으로 말을 주고받는 동안 하운은 거지노
인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사연과 한이 쌓인 미친 거지는 많아도....'
그가 살짝 걸음을 옮겼다. 은잠을 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일반
인이라면 결코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은밀하게 뗀 한 발.
"누구냐!"
술에 취해 비틀거린 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큰 소리를 지르며 노인
이 일어섰다.
번쩍!
방금 전까지의 피곤과 슬픔은 어디로 갔는지 거지노인의 눈에서는
줄기줄기 신광이 번뜩였는데 저 정도의 눈빛은 아무나 가질 성질의 것
이 아니었다.
"귀신이라면 꺼지고 사람이라면 썩 나설 것이다! 비록 늙고 추레한
거지라고 하나 네놈 하나 정도는 감당할 힘이 있다!"
셋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노인이 철저한 침묵에 눌려 뒷목을 벅
벅 긁으며 주저앉았다.
"늙었구나. 이제 환청까지 들리는 걸 보니! 죽을 때가 다 된 게야!"
클클 웃으며 다시 엎어지던 노인이 그야말로 번개처럼 튀어 올랐다.
"네 이노옴!"
어느새 꺼내 들었는지 막대기를 오른손에 움켜쥔 노인의 기세는 그
야말로 고수의 풍모를 풍겼기에 기습당한 하운도 태만하지 않고 침착
하게 응대했다.
"잠시 말씀을 좀 드리겠습니다."
"쥐새끼와 말을 나눌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네놈이 어디의 사
주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오늘이 명년 네 제삿밥 먹을 날이니라!"
그의 막대기는 평범한 것이었으나 내려치는 각도와 힘이 예사롭지
않았기에 하운 역시 부지런히 뛰어다녀야 했다.
"노선배의 소중한 시간을 방해한 것에는 깊이 사과를 드리겠으니 일
단 말을 좀 나눴으면 합니다."
"그리 말하라고 시키더냐! 아무리 생각해 봐도 치졸하기 이를 데가
없구나!"
붕~ 붕~
작은 사당 안에서의 공방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둘은 사당 이곳
저곳을 누볐는데 북궁단야와 장추삼은 다행히도 천장의 대들보 위라
노인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네놈의 목을 딴 후에 기다리도록 하자!"
쀼루퉁!
지켜보던 장추삼의 볼이 부풀어 올랐다. 이건 그가 행동을 개시하겠
다는 신호였으나 불행히도 한 박자 빠른 이가 있었다.
툭.
싸움의 한가운데 아무 일 없다는 듯 떨어져 내린 북궁단야가 거검을
꺼내 노인에게 불쑥 내밀었다.
"목을 따려면 그런 걸로 되겠습니까? 이 정도는 돼야 할 텐데."
동작을 멈추고 둘을 번갈아 보던 노인이 장탄식을 터뜨렸다.
"조력자가 있었다는 게냐? 오냐, 두 놈 다 덤벼라!"
"이해가 안 되네."
역시 툭 떨어져 내린 장추삼이 노인의 경악에 젖은 얼굴을 무시하고
투덜거렸다.
"아니, 잘 드는 칼까지 공짜로 준다는데 무슨 조력자 타령이야?"
태연한 그이 말에 노인이 입에 거품을 물고 소리를 질러댔다. 둘까
지는 어찌해 보려 했는데 셋이라면 무리라고 판단한 것일까.
"이, 이놈등들이 좋다, 몇이 더 있는 게냐! 모두 나서라!"
"셋이라고요, 이게 다니까 그만 소리 질러요. 목청도 좋네, 정말."
중얼거리며 자리에 앉은 장추삼이 노인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보냈
다.
"이놈아!"
"나도 내가 놈이라는 정도는 잘 아니까 그만 부르고 어서 앉기나 해
요. 목청은 아껴두었다가 구걸할 때나 사용하고."
태연한 그의 말에 하운과 북궁단야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
다. 이렇게 되고 보니 노인 호자 뻘쭘하게 서 있는 격이라 그 역시 콧
방기를 뀌며 자리에 앉았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냐!"
"수작은 얼어죽을. 노인도 우리가 나쁜 마음을 품지는 않았다는 것
정도는 바로 알았잖소. 그만 징징거리고 이거나 마시시오."
그가 술 한 병을 던져 주자 징징거린다는 말에 발작을 하려던 노인
이 술병을 흔들어보고는 그 양에 만족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거지노인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두 가지 있었으
니 그건 바로 가득 차지 않은 술병과....
"네놈들은 어디서 온 거냐? 나를 찾아온 건 맞느냐? 그렇다면 이유
가 무엇이냐? 여기를 일러준 놈이 누구더냐? 남김없이 고해라!"
"아따, 한 가지씩 합시다."
장추삼이 손을 내젓자 으르렁거리던 노인이 말을 멈추고 술 한 잔을
하며 슬며시 세 청년을 훑어보았다.
'어디서 이런 녀석들이 튀어나온 거지?'
흥분해서 몰랐는데 차분히 살피자 세 청년의 범상치 않은 기도를 느
껴 노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 기척을 흘린 이는 그 기도가 물과도 같고 구름과도 같아서 마
주 대하기 어려웠고, 검을 내밀던 청년은 서릿발 같은 기세를 온몸에
두르고 있어 호북성 전체라도 반으로 가를 듯하지 않은가.
그리고 세 번째 녀석.
'뭐야, 이거?'
입맛을 다시면서 딴청을 부리는 녀석을 보자니 뭔가 치밀어 오르는
데 그 정체를 모르겠다.
"저희는 호북 양양의 복룡표국에서 표사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복룡표국? 얼마 전에 무림첩받았던 그 복룡표국?"
역시 거지들의 정보력은 최강이다.
복룡표국 표사들이라는 말에 한결 누그러진 얼굴로 노인이 술을 들
이켰다. 적어도 방금 전과 같은 적의는 흘리지 않았기에 소개를 한 하
운 역시 얼굴이 나아졌다.
"그래, 대무림맹과 맞섰던 천하의 복룡표국에서 보잘것없는 거지에
게 무슨 볼일인가?"
"특별히 노인을 찾아온 건 아니오."
장추삼이 쑥 나서자 거지노인이 어이없는 얼굴로 반문했다.
"뭐?"
"특별히 노인을 찾아온 게 아니라니까? 우리는 노인의 이름이나 기
타 아는 게 전혀 없단 말이오."
"그럼 뭐야?"
"뭐긴, 어쩌다 보니 노인의 얘기를 듣게 되고 그래서 말 좀 나눌 요
량으로 여기 온 거지."
치밀어 오르는 것이 조금씩 보이는데 아직도 모르겠다.
"누가 노부에 대해 언급했느냐!"
거지노인이 나름대로 최대한 무게 잡고 말을 꺼냈지만 장추삼은 픽
웃어버렸다.
"노인 바보요?"
"뭐?"
"바보냐고, 그걸 내가 말할 것 같아서 물은 거요? 순진한 거야, 아니
면 그냥 바보야?"
문득 거지노인이 인구에 회자되는 소문들을 반추했다. 무림첩과 복
룡표국, 그리고 어떤 청년들에 관해.
"쓸데없는 소릴랑 관두고 우리가 여기 온 목적을 말하리다. 그
건......."
"잠깐!"
버럭 소리를 지른 노인이 일어서서 장추삼들과의 거리를 두었다.
"이제 너희들이 누구인지 알 것 같다. 깜빡 속을 뻔했지 뭐냐!"
"엥?"
갑자기 풍기는 적의에 장추삼뿐 아니라 두 청년도 당황했다.
"요즘 두각을 나타낸다는 강호의 세 별, 강호삼성이 분명 너희들이
렷다. 맞느냐?"
"맞기는 한데 왜 열을 내고 그러오?"
"뻔뻔하기는. 이런 식으로 접근한다고 노부가 속을 줄 알았더냐!"
"뭔 소리야?"
후다닥!
장추삼의 중얼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사당 문을 박차고 뛰쳐나간 노
인이 고함을 질렀다.
"힘이 없어 피하나 결코 두려워서는 아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그의 마지막 말에 담긴 애조에 좇아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청히
앉아 있던 장추삼들이 노인이 완전히 사라지자 서로를 돌아보았다.
뭐가 어떻게 잘못된 걸까.
"난 아냐! 난 실수한 거 없다고!"
그의 시건방진 말투가 걸리기는 했지만 그것 때문이라면 말이 되지
않은다. 기분이 나쁘다고 도망갈 이유가 없으며 무엇보다 강호삼성이
라는 것에 반응을 보였으니까.
"너 어디서 거지들 두들겨 팬 적 있냐?"
제 스스로 생각해봐도 한심하기 그지없는 말이라서 얘기를 꺼낸 북
궁단야가 고개를 치켜들고 입술을 깨물었다.
거지와는 사이좋다고 빽빽거리는 장추삼의 외침따위는 귀에 들어
오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하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침울해져 손을 늘어뜨린 하운의 모습에 왠지 모를 연민과 답
답함이 교차하여 노인이 두고 간 술병을 집어 든 북궁단야가 아무 말
없이 병을 내려놓았다.
취기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이건.
서서히 어둠이 찾아왔지만 사당 안은 달님까지도 삼켜 버릴 침묵으
로 뒤덮여 있었다. 어둠을 사를 한줄기 빛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기
에 셋의 침묵은 끝 모를 나락으로 빠져만 들었고 그 와중에 하운의 눈
빛이 간혹 빛을 발했으나 이를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균현의 객잔은 비교적 깨끗했기에 장추삼은 만족한 얼굴로 잠자리
에 들었다. 생긴 거와 다르게 숙식 문제만큼은 유난을 떠는 그인지라
조금 비싼 돈을 주고라도 아름난 객잔에 여장을 푼 것이고 다행히 투
덜이는 일찍 꿈나라로 날아가 버렸다.
"저 모습을 보자니 강호삼성 가운데 가장 괴이하다는 괴성이 아니라
태성(怠星)쯤으로 별호를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태성... 침까지 흘리며 코를 고는 장추삼은 북궁단야의 말대로 게으
른 별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를 여기까지 이끈 사라미 장 형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소. 허허실실(虛虛實實)이란 그야말고 장 형을 위해 존재하는 말 같
구려."
창가에 머리를 내밀고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던 하운이 장추삼을
돌아보며 나지막이 뇌까렸다.
사건을 이끌기보다 원하지 않아도 사건과 맞닥뜨리는 사람.
"이제 어떻게 하나."
하운의 말에 북궁단야 역시 답답해져서 탁자에 놓인 물을 따라 마셨
다. 단서를 쥐고 있는 편에서 접촉 자체를 거부한다면 방법이 없는 일.
"미안하게 됐소. 나 때문에 일이 그르쳐졌으니."
"반드시 하 형 때무이라고 단정 짓기엔 무리가 따르오. 아직 그 노
인과 얘기다운 얘기를 나눈 것도 아닌데 그저 도망갔다는 이유만으로
무엇을 설명하겠소?"
그의 말에 하운이 의자로 가서 털썩 앉았다.
"말은 고맙지만 나 역시 전후 사정 정도는 살필 줄 안다오. 그 노선
배께서는 누군가의 방문을 병적으로 두려워하고 있었소. 문제는 우리
들 가운데 누구도 어떤 세력권과 관계된 사람이 없었다는 거요. 물론
나를 제외하고."
"........"
하운의 말은 토를 달 여지까지 막아버리는 것이어서 북궁단야도 턱
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무엇이 그리 두려울까.
"아무튼 빨리 일을 처리해야 하오. 호굴에 들어와서 돌아다니는 겨
이니 언제 훼방꾼이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오."
"음."
고개를 끄덕이는 하운의 어깨가 왠지 처져 있었기에 북궁단야가 그
의 팔을 힘주어 잡았다.
"그래도 힘냅시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지 않소?"
"힘을 내기는 내야 할 텐데...."
쿠르릉!
갑자기 지축을 흔드는 괴성이 들려 두 청년이 깜짝 놀랐다.
"어라?"
"저 녀석, 이제는 신경지를 개척하는군."
장추삼의 코 고는 소리는 이제 거의 음공화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
다.
"괴성(怪聲)의 탄생이로군."
망연한 북궁단야의 말에 하운도 씁쓸하게 웃었다. 둘은 오늘 저녁이
매우 길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렇다고 굳이 방을 따로 얻지는 않았다.
어차피 불면이라면 괴성이 지르는 괴성을 들으며 지내는 편도 나름
대로 좋다고 생각했으니까.
"어떻게 하긴! 다시 찾아야지!"
"무슨 재주로 찾는다는 거요? 그 노선배의 거주지가 정해져 있는 것
도 아니고 우리가 균현의 지리에 능통하지도 않은 실정인데?"
"그래도 뒤지다 보면 나와!"
바락바락 우기는 장추삼을 보며 하운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무대포의 전형이라는 건 예전에 알았지만 이건 거의 막가자 주의 아닌
가.
옆에서 팔짱을 끼고 둘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북궁단야가 하운
을 살짝 불렀다.
"그렇다고 별다른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잖소? 녀석의 말대로 일단
부딪칠 도리밖에는."
"여기가 청빈로처럼 작은 지역도 아니고, 우리가 길을 아는 것도 아
닌데 무슨 재주로 그분을 찾겠다는 겁니까? 무리라고 보오."
"그럼 어쩌자는 거요?"
둘의 소근거림을 무시하고 장추삼이 객방 문을 소리나게 열어젖혔
다.
"말만 한다고 감이 나와, 배가 나와? 목마른 놈이 우물을 찾는 법이
라고!"
시근덕거리며 객잔을 나서는 장추삼의 뒷등을 멀거니 바라보던 두
사람도 털레털레 걸음을 옮겼다. 어떤 희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
렇다고 객방에서 세월이나 죽일 만큼 남아도는 시간이 아니었기에.
벌써 하루를 보냈다고 태평로의 전경이 이제 제법 익숙했기에 장추
삼의 발걸음은 어제보다는 훨씬 가벼운 발걸음으로 골목골목을 누비기
시작했다.
"날다람쥐가 따로 없군."
"그래서 청빈로의 장추삼이 아니겠소."
사람들과 자주 부대끼는 편은 아니지만 그런 자리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사람. 사람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는 편은 아니지만 그런 상황에
서 늘 웃을 수 있는 사람.
지나가는 행상이나 가판상인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괜히 너스레
를 떠는 장추삼을 보며 두 사람은 딴청을 부려야 했다.
끼어들기에는 어색하고 외면하기에는 미안한 감이 있었으니까.
"우하하하, 이건 조금 비싸지요. 우리 청빈로로 와보시라니까? 이
정도의 물건은 발에 채일 만큼 돌아다닌다니까? 얼레? 이 아저씨가 사
람 말을 안 믿네?"
"오, 이 정도로 맛난 탕을 가판에서 먹을 수 있다니! 정말 운이 좋은
날이로군. 뭐요? 지금 나더러 금칠한다고 했소? 이 아줌마가 장난하
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음식에 관한 한 염라대왕보다도 냉철한 잣대
로...."
그리 많지 않은 상인들이어서일까?
장추삼은 물건을 파는 사람이면 족족 다가가서 때론 흥정을 하고 때
론 맛을 보면서 얘기를 붙였다. 물론 그의 속내가 어디 있는지는 짐작
이 가능했으나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이 정도면 곧 소문이 나겠군."
"다른 방도가 없으니 두고는 보겠는데 내일까지 원하는 사람을 찾지
못한다면 이곳을 뜨는 편이 낫겠소이다."
이때 장추삼이 양손 가득 탕이며 유과며 잔뜩 사 들고는 둘에게 나
눠 주며 실실거렸다.
"이건 인간적으로 맛있더라고. 청빈로의 양고모도 탕 하나는 일류숙
수 급이라고 자부하던데 이거 먹어보니까 명월 앞의 반딧불이더라고.
전에 한번 먹어본 맛을 여기서도 맛보다니. 오늘 재수가 좋을 거야!"
"지금 탕이나 먹을 때가 아니잖소."
하운이 탕을 받아 들며 인상을 쓰자 장추삼이 그의 등을 탕탕 두드
렸다.
"뭔 소리야?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잖아. 자자, 어서 들어보라고."
"허... 참."
북궁단야도 한 접시 받아 들고는 한숨을 쉬다 가져온 성의 가 괘씸해
서 한 수저 입으로 밀어 넣었다.
".......!"
".......!"
억지로 한 수저 먹은 두 청년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그저 너스레라
생각했거늘 장추삼이 내민 탕의 맛은 일반적인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 아닌가.
"어, 어찌 이런 맛이?"
"앵속(罌粟)이라도 넣은 거 아냐?"
음식에 관해서는 호불호 자체가 없는 북궁단야의 입에서까지 양귀
비를 넣은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라는 건 장추삼이 가져온 탕이
정말로 맛잇다는 반증일 터.
그들의 반응에 적이 만족한 장추삼이 고개를 숙이는 시늉을 하며 빠
르게 속삭였다.
"이건 일반적인 사람들이 낼 수 있는 맛이 아니야. 나도 여태까지
딱 한번 맛을 봤었지."
일반적인 사람들이 낼 수 있는 맛이 아니라니. 도대체 무슨 말일까.
"탕의 재료를 봐서 알겠지만 그냥 이것저것 되는대로 넣은 잡탕에
불과하다고. 그런 재료로 이런 맛을 이끌어내는 사람들이 하나 있지.
누군지 알겠어?"
정신없이 탕을 먹던 둘의 수저가 나란히 멈췄다.
"혹시?"
"그렇군!"
"구파에서 문전박대 열심히 당하다가 하루는 춥고 배고파서 다리 밑
에서 졸다가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까 어디서 나타났는지 거지노
인들이 탕 한 사발을 내놓더군. 그리고 표표히 사라졌는데 직감적으로
그들이 어떤 거지인지 알겠더라고. 무엇보다 그날 먹었던 탕의 맛은
절대로 잊을 수가 없었지."
빌어먹는다고 해서 개방 사람들이 맛없는 꿀꿀이죽이나 먹으면서
연명할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비록 찌꺼기라고는 하나 그들은
일반인들보다 폭넓은 음식을 제공받는 사람들이었고 몇백 년의 시간
동안 그런 재료들로 그들만의 조리법을 창조해서 음식을 조리해 먹었
던 거다.
개방의 탕 한 그릇이면 사흘은 배가 부르다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
니었던 것이다. 또한 개방의 거지들 가운데 구걸받은 음식을 그 자리
에서 먹는 이가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런 조리법 때문임을 알게 된 하
운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전통이란 무서운 것이다. 무공이나 예의뿐 아니라 말 한마디,
음식 하나에도 그들만의 전통이 배어 있었고 그것은 상록수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몰락이라는 그림자 속에서도.
"그 말은 이 근처 어딘가에 개방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말이거든.
노인네가 동네를 떠나지 않고 배회했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어."
할 말을 다 한 듯 고개를 쳐든 장추삼이 북궁단야와 하운의 손에서
빈 접시를 받아 들고 태연하게 반납했다. 노점상에게 공치사 몇 마디
로 표정 관리를 잊지 않은 그가 빙글 몸을 돌리자 하운과 북궁단야도
눈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은 길가의 끝에 위치한 소로였는데 짚더미와 기타 버려진 목재
등으로 막혀 있어서 언뜻 보면 사람들의 통행이 불가능해 보였다.
뒤편으로의 어둠 역시 인적을 끊는 요소로 작용함이 물론이었지만
이런 완전한 조건 자체가 부자연스러워서 두 청년은 정면을 보는 척하
면서도, 소로의 암흑으로 안력을 돋웠다.
"인기척이 분명하군."
"저런 어둠을 벗 삼아야 한다면?"
유과 하나를 으적 씹으며 장추삼이 히죽 웃었다. 적어도 이제 정신
나간 땡칠이처럼 동네를 배회하지 않아도 될 듯했기에.
"당장 방문한다는 건 무리겠지?"
장추삼의 전음에 하운이 넌지시 발길을 돌리며 손짓했다.
"노점상이 나와 있다는 것은 개방의 눈과 귀가 아직 우리를 주시한
다는 얘기일 테니 시간을 둡시다."
하릴없이 걸음을 옮기던 장추삼들이 어떤 시선을 느낀 건 맛난 탕을
사 먹고 한 시진이 채 흐르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거 봐라?"
"내색하지 마시오."
쫑긋 눈썹을 올리는 장추삼을 만류하며 하운이 걸음을 재촉했다. 이
런 대로에서 충돌이 벌어진다면 여파도 여파려니와 행동에 제약이 따
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대체 누가?
"노점 앞에서 내가 뭐 실수한 거라도 있어?"
"그걸 따질 계제가 아니다. 이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일을 추진할 건
지, 아니면 잡아서 입을 막을 건지를 결정하는 편이 생간적일 거다."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북궁단야가 인상을 구기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럼 우리 방식대로 처리하지 뭐."
우리 방식?
북궁단야와 하운이 어리둥절해할 때 뭐가 그리 신났는지 콧노래까
지 부르며 장추삼이 통통 뛰어갔다.
"어디 가는 거요?"
"어디긴? 우리 방식이 어울리는 곳이지."
"대체 그 우리의 방식은 누구의 방식인 거냐?"
허탈한 북궁단야의 질문도 장추삼의 콧노래를 멈추지 못했다. 한술
더 떠서 그는 손짓으로 장난까지 치는 형편이었으니까.
"에이~ 알면서~ "
뭘 알아, 임마!
소리 질렀으면 좋겠는데 지켜보는 눈 때문에 그저 한숨으로 답답함
을 대체한 북궁단야가 하운을 바라보자 그도 어깨를 들어 올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장추삼만이 알 일이었다.
삼류무사 269 비무첩
날듯 달려가는 장추삼이 골목으로 들어서자 급히 몸을 세우며 외쳤
다.
"소멸!"
"어?"
"음?"
그의 구령을 언뜻 이해하지 못하던 하운과 북궁단야도 소리치자마
자 연기처럼 사라지는 - 물론 은신으로 몸을 감춘 거지만 - 장추삼의
모습을 보고 즉시 신형을 숨겼다.
어떤 연습도 없었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일사불란이라는 말이 아깝
지 않았다.
후다닥!
뒤쫓던 추적자의 발자국 소리가 골목을 울렸지만 세 청년의 종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었다. 삼성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임기응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어버린 추적자가 연신 주위를 두
리번거릴 때 한구석에서 몸을 숨기고 또 다른 조력자를 경계하던 장추
삼이 꼬리가 없음을 확인하고 입가에 흰 선 하나를 그려냈다.
스륵.
이토록 유려한 추뢰보가 있을까. 추적자의 전면으로 쇄도하는 그의
움직임은 예전의 폭발력이 사라졌지만 대신에 비단결 같은 부드러움을
수반했기에 맞이하는 입장으로는 알고도 당하는 격이었다.
유(柔)와 폭(暴)의 경계.
"헉!"
추적자가 급한 비명으로 놀람을 대신했을 때 장추삼의 손은 이미 그
의 목줄을 잡아채고 있었다.
그러나...
스륵.
그대로 당할 것만 같았던 추적자였는데 그의 발이 예리한 엇박자를
그리자 장추삼의 손은 허공을 갈라야 했다.
"얼레?"
오른발을 강하게 찍어 신형을 멈춘 장추삼이 콧바람을 거세게 내뿜
었다. 아마도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인데 일견 허탈해 보였지만 그의
눈에는 또 다른 빛깔이 내재되어 있었다.
짧은 대치가 머물렀나 싶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찰나간이었고 어
느새 전면으로 나서는 장추삼과 뒤로 빠지면서 틈틈이 반격을 노리는
추적자의 공방은 점입가경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노는 걸로 보이는데."
북궁단야가 눈살을 찌푸리자,
"노는 것 같구려."
하운의 심드렁한 대답이 이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일견 박진감있는 대결 구도로 보일 수도 있는 둘의
공방이었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단 한 점의 살기도 느낄 수 없는, 정
통 맥 빠진 것이었다.
"훗!"
장추삼이 다시 공세로 전환하자 추적자의 발길도 바빠졌다. 그러나
두 청년의 눈에는 두 사람의 움직임이 그저 부산하게만 느껴졌다.
싸움 - 이 아니라 비무, 아니 비무라고도 부를 수 없는 대련 - 와
중에 간간이 '대지가 이끄는 소리를 들으려 노력했다'느니, '바람이 부
르는 소리에 이끌려 봤다'는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말들이 오갔고 그
때마다 북궁단야와 하운은 '들었다는데', '이끌렸다는구려' 하며 짝다
리를 짚고 빈정거렸다.
그렇게 한참이 흐르다 몇 번의 헛손질에 장추삼의 눈에선 스산한 어
떤 빛이 흐를 무렵 추적자가 급제동을 걸었다.
"그만! 장 대협! 그만 하겠어요!"
"그만 하겠다는데."
북궁단야가 허탈한 어조로 중얼거리자,
"그만 할 것 같구려."
역시 매가리없는 음성으로 하운이 답했다.
둘이 팔장을 끼고 쭝얼거리는 동안 추적자는 신형을 멈추고 모두에
게 일일이 포권으로 결계를 사과했다.
"미안하다는데."
"미안한 것 같구려."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둘이 중얼거렸지만 그렇다고 나서서 뭐라
고 하지는 않았다. 아니, 하지 못한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그놈의 신사도가 뭔지.
"소림의 차하연이 한순간의 호승심을 이기지 못하고 결례를 범했습
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머리가 땅에 닿을 듯 허리를 숙이며 손을 흔들어대는 그녀의 얼굴에
는 누가 봐도 진심이 어려 있었다. 여자가 이렇게 나오는데 뭐라고 하
겠는가, 그것도 저녁노을 아래에 핀 연꽃 같은 미녀인데.
"나한테 한 결례는 아니니까 상관없소. 상관없는데....."
이렇게 뒀다간 날이 저물 때까지 사과를 받을 판이라 북궁단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소저께서 우리의 뒤를 밟은 이유가 단지 복룡표국에서 손을 섞어보
지 못한 것에의 아쉬움만으로는 보이지 않으니 이걸 설명해 줬으면 하
오."
당연한 말이다. 청빈로에서부터 뒤를 밟지 않았다면 이들의 행로를
어찌 파악했겠는가.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말이다.
"아........"
숙였던 고개를 들면서 차하연이 살짝 장추삼을 춤쳐보고는 신색을
바로 했다. 그 순간 북궁단야의 눈초리 또한 미미하게 떨렸고.
"이런 말씀 드리기 외람스럽지만 세 분이 이곳 균현으로 오신 것에
무림맹, 특히 무당파에서 적잖이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아무리 무림맹의 눈과 귀가 광범위하다고는 해도 이곳에 당도한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거늘 어찌 알게 되었다는 거요?"
하운의 질문에 차하연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물론 무림맹이라고 천리안을 지닌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소협들
은 개성이 워낙 뚜렷한 분들이기에 백송관 제자들의 입방아에 오른 것
이지요."
"백송관...."
세 청년이 어이없어서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들이 백송관이라는 무
관 앞에서 꾸물거리며 시간을 지체한 것은 불과 일각여.
그 짧은 시간 동안 제보가 들어가고 지시가 내려왔다는 것이니.
"백송관에 누군가가 머물고 있다는 얘기로군?"
장추삼이 툭 나섰다.
"녹록치 않은 분이죠."
"음?"
차하연의 굳어진 얼굴은 세 청년의 구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녹
록치 않은 분이라... 팔파공동문하라는 지위에 있는 그녀가 이리 어
려워 하는 이라면?
"군가휘 사형께서 팔라공동문하의 대형 격이라고는 하나 그건 어디
까지나 입문 시기와 나이를 고려해서 대우를 해드리는 것이죠."
여기서 갑자기 군가휘에 관한 얘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군 사형도 어려워하는 이가 바로 무당 출신의 유소추(劉小秋)
사형이랍니다."
"유소추?"
"예, 유소추 사형. 팔파공동문하가 집단적으로 무학을 사사받아 동
일 항렬에 올라 있지만 개개인의 무학은 아무래도 차이가 나지요. 그
가운데에서도 단연 발군의 무위를 가진 분이 바로 유소추 사형이랍니
다. 오죽하면 제멋대로의 매정방 사형도 그분 앞에서는 언행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판이니까요."
세 청년도 유소추라는 인물에 적잖은 관심이 쏠렸다. 차하연 정도의
위치에서 내린 평가라면 당연히 관심을 가질 만한 가치가 있었으니까.
사실 유소추는 차하연이 언급하는 이상의 실력자였다. 오죽하면 팔
파공동문하라는 이름은 유소추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뒷말이 무성할 정
도일까.
속가제자만 아니었다면 차기 무당 장문감이라는 전설적인 신진고수,
그가 바로 유소추였다.
그리고 유소추가 그저 백송관이라는 무도관에 머무는 것을 말하려
는 목적이라면 이런 식으로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저희는 팔륜관(八輪關)의 절반도 통과하지 못했어
요. 팔륜관을 모두 통과하는 이은 유 사형과 임 사저밖에 없었으니까
요."
그 얘기에는 묘한 여운이 담겨 있었다. 실력이 없었다는 건지, 아니
면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건지.
하긴, 하는 얼굴이 된 세 사람이 각자 머리를 굴렸다. 그들이 보기에
도 팔파공동문하는 이름 값에 걸맞지 않는 무위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팔파를 대표한다면 그 정도로는 곤란했다. 적어도 하운의 눈
에는.
그리고 유소추라는 인물이 대두되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는 필유
곡절(必有曲折)인 법. 머뭇거리던 차하연이 모두의 말없는 재촉에 겨우
입을 열었다.
"장 소협, 혹시 무당과 어떤 마찰이라도 있었나요?"
순간 두 사람이 한 사람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또 너냐!
지적당한 장추삼은 오죽 당황했으랴. 말까지 버벅이며 그가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려 했지만 묘한 상황이었는지라 제대로 설명할 수 없
었다.
"마찰? 아, 아니, 그럴... 뭐... 마찰이라고 부를 수 있나......"
"어떤 영문인지 몰라도 장 소협을 비롯한 삼성이 다녀간 이후로 무
당의 장문인께서 폐관 수련을 참선으로 바꾸고 반은거 상태로 들어가
셨다고 해요."
"반은거?"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지만 반은거라는 말까지 나오는 걸
보면 대략 무림 활동에서 완전히 손을 뗀 정도는 확실할 터였다.
"속내야 모르지만 그런 장문을 보는 제자들의 심정이 어떨지는 뻔하
죠. 특히 유소추 사형은 당신이 그 자리에 없었음을 한탄하며 몇 날 며
칠을 자책했으니까요. 그런데 이곳 균현으로 또다시 세 분이 나타나셨
으니 이보다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어요?"
"기회?"
북궁단야가 차갑게 반문하자 차하연이 품에서 한 통의 봉서를 꺼냈
다.
"이걸 전하라고 하시더군요."
"수취인은 물론 나일 테고?"
봉서를 받아 들며 장추삼이 실실 웃엇다. 그의 표정은 처음의 그것
과 전혀 달랐기에 편지를 건네는 차하연의 손길이 가늘게 떨렸다.
직접 대면하지 못하고 글월로 인사드림을 양해 바라오.
귀하의 지난 방문에 무다의 어르신들과 형제들이 깊은 감동을 받았
다고 들었소.
이에 본인 역시 무당의 제자로서 일말의 책임을 느끼던 차, 장 소협
의 방문소식을 듣게 되어 급히 전갈을 보내게 되었소.
청명한 하늘에 대지까지 마음을 비우는 늦가울, 귀하의 균현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시간이 닿는다면 한 수 가르침을 청할까 하오.
부족한 깨달음과 손이겠지만 상대해 주신다면 본인의 모든 것을 바
쳐서 응대하리다.
아녀자의 마음처럼 변덕스러운 일교차에 몸조리 잘하시고 최상의 모
습으로 뵙길 기대하겠소.
열흘 수 신시(申時) 초, 척석평(拓石平)의 바람이 우리의 만남에 흥
겨워 맑은 소리로 노래할 것이오.
유소추
"모든 것을 바쳐서라... 무섭군."
장추삼의 어깨너머로 편지를 보던 북궁단야가 피식 웃었다.
"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닌 듯 싶소."
"복잡할 건 또 뭔데? 이런 편지는 하도 많이 받아봐서 지겹다, 지
겨워."
심각한 표정으로 하운이 턱을 쓰다듬자 장추삼이 투덜거렸다. 유소
추라는 존재를 알 리도 없거니와 그는 이런 식의 도전에 매우 익숙했
다.
물론 전부 다 뒷골목 시절의 일이지만.
"편지를 보면 알겠지만 예의를 잃지 않으면서도 당당하고 칼을 드러
내면서도 겸손하니 이런 사람은 가볍게 봐서는 안 될 것이오."
"그게 뭐 그리....."
장추삼이 뭐라고 중얼거리려 했지만 하운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냥 도전이라면 자신이 직접 올 수도 있었는데 다른 이를 통해서
전갈을 넣었다는 것은 대전까지 얼굴을 보지 않겠다는 얘기요."
단 한 점의 사감을 넣지 않겠다는 의미.
"그리고 약속 시간을 무려 열흘 후로 잡았소. 이걸 어떻게 해석해
야 할까?"
여러 추측이 가능하다. 장추삼이야말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
고 있지만 구파에 몸담고 있는 하운이기에 다양한 경우의 수가 떠올라
한숨지었다.
"아무튼 쉽게 생각해선 안 될 일이오. 이번 비무만큼은."
"흐음......."
북궁단야의 눈이 깊어갈 무렵 장추삼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뭐 하나만 물읍시다."
"예?"
"군가휘라는 사람의 나이가 어떻게 되오? 척 보기에 서른은 넘기지
않은 듯한데."
질문 내용이 황당했지만 차하연은 일단 대답을 해주었다. 별로 중요
한 것도 아니었기에.
"올해 스물여덟이세요."
그럼 나랑 동갑이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장추삼이 다시금 편지에
눈을 가져갔다.
뭔가 한마디가 걸리는데 그게 뭐더라....
찬찬히 글귀를 훑던 그가 마침내 문제의 단어를 잡아냈다.
본인이라, 본인....
"그런 사람이 나이로 따져서 대형을 맡는다면...."
중얼거리던 그가 편지를 와락 움켜잡으며 일갈했다.
"이 자식, 몇 살이야!"
몇 번을 돌아보며 차하연이 쓸쓸한 얼굴로 사라지자 장추삼이 일행
을 돌아보며 기지개를 켰다.
"으아아아~ 이제 가자고. 어라? 다들 표정이 왜 그래?"
"왜 그러냐니. 장 형은 태평하기도 하오."
"태평? 뭐가?"
"아까 차 소저의 말도 듣지 못했소? 이번의 대결은 자칫하면 무서
운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단 말이오. 거기다 척석평에 대해서 못
들은 거요?"
"관중 많은 곳에서의 싸움도 잘해, 난."
척석평은 균현을 가로지르는 강가에 위치한 벌판으로 넓기도 넓었
지만 경치도 좋아서 사람들이 자주 찾는다고 했다.
그런 곳을 비무 장소로 택했다는 것은 절대적인 자신감의 이면에
삼성, 즉 장추삼으로 대변되는 세 명의 후기지수를 공개적으로 납작
하게 해줘서 흔들리는 무당의 위상을 세우겠다는 의도가 아니겠는가.
역으로 본다면.
"상대편에서는 배수진을 쳤다는 얘기요. 알아듣겠소? 그리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이유를?"
"어, 그럼 나도 배수진을 칠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운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비켜서자 이번에는 북궁단야가 장추삼을
불러 세웠다.
"아, 또 왜?"
"아름다운 소저로군."
"음? 음... 생각없는 얼간이들 가운데 그나마 깨어 있는 사람이라고
보오. 뭐, 예쁘기도 예쁘지만."
실실 웃는 장추삼을 쏘아보다 지나가듯 한마디 던지고 북궁단야가
걸음을 옮기자 상황 파악 못하던 녀석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그럼 그렇게 전하지, 설이에게."
"그게 무슨 말이래! 난 어디까지나 객관적으로 말한 거라고, 객관적
으로!"
"오, 그말도 첨부하마. 객관적으로."
그렇게 신소리를 나누던 그들이었는데 탕을 팔던 골목으로 들어서면
서 표정이 싹 바뀌었다.
"앞으로의 결전도 있는데 괜찮겠소?"
"내 걱정은 관두라고. 궁금증으로 말라죽는 게 얻어맞아 죽는 것보
다는 나을 테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들이 골목을 접어드는데 보부상으로 보이는 이
들이 왁자지껄 떠들면서 다가왔다.
툭.
골목이 좁아서일까. 보부상 일행과 장추삼들의 어깨가 부딪쳤고 서
로 목례로 사의(謝意)를 표하면서 두 무리는 스쳐 지나갔다.
그들이 골목을 돌아 모습을 감추자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하운의 발
걸음이 차츰 더뎌지다 이내 멈췄다.
"왜?"
"음......."
잠시 자리에 서 있던 하운이 둘에게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내면서 손
에 쥔 무언가를 슬쩍 내비쳤다.
"이들은 오늘 방문을 원하지 않는 듯하오. 선 소문 후 전갈이라, 역
시 가볍게 볼 비무가 아니야."
그의 손에는 잘 접힌 종이가 들려 있었다.
* * *
"이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수백이 침울하게 묻자 맥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 허탈한 모습에 재
차 물으려던 수백도 눈을 돌려 버렸다.
"청빈로에서의 일은 소득조차 없었고 아까운 두 생명만 지워졌습니
다."
"할 말이 없구나."
"운조는 어쩌면 우리의 기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아이를 사지
로 몰아놓고도 노태상께서는 침묵으로만 일관하십니다. 이게 뭐란 말
입니까!"
수백의 다그침에 지그시 눈을 감은 맥천이 지난 일을 되새겨 보았
다.
'어디서부터 틀어진 걸까.'
처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문득 그는 한 사람을 떠올렸고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그
사람만 아니었다면, 아니, 그 사람만 함께 했더라면.
"이대로 끝인 건가......"
"그건 아니다."
수백의 독백을 강하게 부정하며 우뚝 일어선 맥천이 주먹을 움켜쥐
었다.
"이대로 끝날 수는 없다, 이대로는!"
잃은 것이 너무 많아. 다른 것은 다 차치하고라도 먼저 간 형제들
을 무슨 낯으로 대하겠는가.
맥천의 눈가에 옅은 안개가 서렸다.
"노태상이 우릴 버려도 우리는 우리대로 간다."
"그게 의미가 있을까요? 원래의 취지와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취지는 만들면 되는 것이다."
답답한 마음을 풀지 못하고 수백이 머리를 짚자 맥천이 허공을 바라
보면 입술을 깨물었다.
실패도 좋고, 좌절도 좋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이때...
"가환이옵니다, 회주!"
"무슨 일이냐?"
대전에 들어선 사내가 봉서 한 장을 꺼내 맥천에게 바쳤다.
"편지?"
고개를 갸웃거린 맥처니 사내가 사라지자 편지를 뜯어보았다.
"음?"
그의 표정에 수백도 고개를 돌렸다. 놀랄 일이 너무 많아서, 아니,
너무도 많이 놀라서 웬만한 일이라면 눈도 깜빡하지 않을 사형이거늘.
"이걸 한번 읽어보거라."
편지를 받아 든 수백의 눈도 곧 경악으로 바뀌었다.
안부를 묻는 것조차 우스우니 인사를 생략하기로 하자.
신념과 의지에서 도망쳐 버린 이로서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이미 지나 버린 시간이고 흘러가 버린 일인 것을.
그러나 이런 식으로 잊혀질 수는 없다. 나의 이상과 너희들의 의지,
그리고 신념이 한낱 모래알처럼 깨져 가는 지금 무엇이 옳은지는 각자
의 판단이겠지만 확인은 해보고 싶구나.
이미 스러져 간 형제들의 넋을 추모하려면 최소한의 자격은 있어야
겠지. 그래서 노태상과 만나야겠다.
조만간 들르마. 그때 검을 들이대든, 침을 뱉든 알아서 하려무나.
그러나 내 앞을 막을 생각은 하지 마라. 만약 그러려거든 너희들도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고.
옛노래는 어디로 가고 침울한 속삭임만 자리하는 그곳을 어떤 얼굴
로 맞이해야 할지.
못난 사형.
"침울한 속삭임만이 자리한단다. 그 위대하신 분께는 우리가 벌레처
럼 보이나 보다."
"그런게 아니라는 건 알지 않습니까?"
수백의 제지에도 맥천의 광소는 더욱 커졌다.
"웃기지 마! 웃기지 말라고! 그렇게 도망가 놓고 이제 와서 무슨
헛소리야! 좋아, 누가 옳은지 한번 부딪쳐 보잔 말이야!"
이를 갈며 광기를 흘리는 맥천을 뒤로하고 대전을 나서며 수백이 하
늘가에 시선을 던졌다.
이런 게 아니었는데...
* * *
척석평은 이름처럼 돌로 채워져 있던 벌판을 손봐서 넓힌 곳으로 군
데군데 쌓여 있는 자갈들이 아니라면 일반 평야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
을 정도였다.
늦가을의 정취를 대변하듯 맑고 시린 바람이 굽이쳐 흐르는 강물을
따라 넘실넘실 불어와 세 청년의 마음까지 맑아졌다.
다 좋은데...
"뭔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거야!"
장추삼이 입을 딱 벌리며 주위를 둘러보자 하운과 북궁단야도 고소
를 금치 못했다.
"단단히 작정을 했군."
"이 정도면 무림사에 길이 남을 대결이 아니라 길이 남을 관중 동원
이겠소."
인산인해.
어떻게 소문을 냈는지 균현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절반은 구경을 온
것처럼 척석평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몰려든 인파로 뒤덮여 있었
다.
열흘이라는 시간은 첫 번재 이유가 바로 이 점을 노린 것이었을까?
원래 벅적거리는 분위기를 싫어하지 않은 장추삼이었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 이런 소음에는 정신까지 아득해지는지라 고개를 처박
고 한숨만 팍팍 내쉬었다.
"젠장, 뭐 하자는 거야."
적응이 안 되기는 하운과 북궁단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장추삼
의 몸부림이 와 닿았던 거다.
우글거리는 사람들 틈으로 머리만 내놓고 있던 그들이 어찌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가 슬슬 뒷걸음질쳤다.
어떻게든 소란 속에서 탈출해 보자는 발로였는데 그러던 중 북궁단
야와 부딪친 사람이 - 여자였다 - 기성을 질러대면서 그들의 순박한
바람은 수포로 돌아갔다.
"어머, 저 사람 좀 봐!"
"누구?"
"세상에, 사람이 아니야!"
이 순간 셋의 마음은 한 가지였다.
신이여!
송옥과 반안을 읊어대면서 난리를 부리던 여인들이 옆에서 망연해
잇는 하운을 발견하고 광분의 강도를 높여가자 다른 이들의 시선도 그
들에게 모아졌다.
그리고 잠시의 침묵.
"강호삼성이다!"
"어디, 어디!"
"여기 강호삼성이 왔다!"
역시 특징적인가, 이들은?
인간이 지를 수 잇는 음향의 가짓수를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알아듣
기 어려운 소음을 구사하며 그들을 둘러쌌던 사람들이 장추삼을 발견
하고는 차츰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무언가 소곤거리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목소리의
높이로 봐서 절대 속삭임이 아니었고 당연히 장추삼의 귀에도 전달되
었다.
아주 잘.
"저 봐, 저기 죽을상을 하고 있는 인간이 괴성이래."
"어이구, 괴상한 거 맞네. 성격도 개차반이라며?"
"말도 마. 잘못 걸리면 뼈도 추리지 못한다고 해. 듣기로 집안도
삼류라더군."
"삼류 집안 자식이 다 그렇지 뭐. 전직이 깡패라더네 이제 무슨 표
사를 한다고 하지만 제 버릇 남 주겠어?"
'이런!'
하운이 장추삼을 돌아보았고 북궁단야의 손이 검자루로 향했다.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가장 저질적인 발언을 군중이라는 이름을 빌어
마구 생산하고 있었다. 혼자일 때는 그저 갈대처럼 나부끼다가 다수가
되면 쉬파리처럼 왱왱거리며 몰려다니는 나약한 군상.
또한 알 수 없는 적의. 대체 이 적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군
중의 적의는 철저하게 장추사에게로 모아져 있었다. 말 한마디, 표정
하나하나에도 그를 향한 조소와 비난이 응축되어 있었다.
이쯤 되면 화라도 낼 법한데 의외로 장추삼은 담담했다. 아니, 입가
에 미소가지 짓고 있었다.
"왜 날 돌아봐?"
"아, 아니오."
머쓱해져 고개를 돌리는 하운의 귀에 장추삼의 독백이 천둥소리처럼
다가왔다.
... 발작이라도 할 줄 알았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여 재차 장추삼을 보려는데 군중의 뒤편에서
열화와도 같은 함성이 몰아쳤다. 장추삼들을 맞이할 때의 신기함 같
은 차원이 아닌, 경외의 외침이.
"우와와! 무당신룡(武當神龍)이다!"
"유소추 대협이시다!"
"우리 균현의 자랑 유소추 대협이 오셨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군중들의 노골적인 적의가 뭘 의미하는지를.
그들은 아주 단순한 선과 악의 대립 구도를 그려놓고 그 위에 유소추
와 장추삼을 올린 것이다.
지역주의라는.
"이거 살짝 짜증나는데."
북궁단야가 칼자루를 쓰다듬었고,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오."
하운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래도 장추삼은 여전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가맣게 탄 속일지언
정 결코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인파를 가르면서 보무도 당당하게 나타난 인물은 유소추가 아니었
다. 그는 코가 매우 뾰족하여 한번 본 것만으로도 결코 잊기 어려운
남자였다.
"저자는?"
북궁단야가 인상을 지푸리자 하운이 고소를 머금었다.
"매정방이라는 인물 아니겠소? 그야말로 똥개보다도 못한 속물이었
는데 이곳에서는 개선장군이 따로 없구려."
그들이 뭐라고 하든 박수 치는 군웅들에게 손까지 흔들어가며 화
답하던 매정방이 장추삼들과 눈이 마주치자 입가를 올리며 묘한 표정
을 지었다.
이를테면 잘 걸렸다, 정도로 해석 가능한 표정이었는데 진위는 지금
으로선 알 도리가 없었고 지난 일이 생각나 하운의 선한 얼굴에도 한
기가 내려앉았다.
그렇게 오만을 떨던 그가 하운의 눈에서 분출되는 기세에 흠칫 몸을
떨더니 얼른 몸을 돌렸다.
"여기 유소추 대협이 오십니다! 죄송하지만 유소추 대협을 위해 자
리를 피해주십시오!"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한 사내가 걸어왔다.
'저자가 유소추?'
그를 보며 세 사람은 군중의 환호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꽉 다문 입술은 보기 좋은 한일 자로 그 기상을 엿보게 했으며 눈가
에 서린 정기가 수정처럼 밝게 빛났으니 이 어찌 대장부라 아니 할까.
육 척이 훌쩍 넘는 키였으나 떡 버러진 어깨와 잘 다듬은 팔뚝으로
오히려 당당했으며 굴강한 턱 선은 사람을 안심시키는 무엇이 있었다.
"호오."
북궁단야가 칼자루에서 손을 거두었다.
"뭔가 이상한걸?"
하운의 눈이 환호작약하여 제가 주인공인 양 날뛰는 매정방의 등
을 응시했다.
그리고 뒤이어 몇몇의 청년들이 더 들어섰는데 어제 만났던 차하연
의 착잡한 얼굴도 보였다.
"자자! 조용히 해주시오, 조용히!"
사회자처럼 나서서 사람들을 이끄는 매정방은 가끔 하운을 훔쳐보
았는데 북궁단야가 넌지시 눈알을 파버릴까, 하자 기겁을 하고는 목청
을 높였다.
"다들 아시겠지만 강호삼성 가운데 괴성 장추삼 소협이 균현을 방문
한 기념으로 우리 무당신룡 유소추 대협과 비무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우와아!!"
요란한 박수와 함성.
사람들은 이상한 열기에 취해 있었다. 그것의 정체도 모르는 채 그
저 소리 지르고 발을 굴러댔다.
"누군 소협이고 누군 대협이로군."
놀랍게도 하운이 빈정거리자 북궁단야가 새삼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
다보고는 툴툴 웃었다.
"자, 그럼 장추삼 소협!"
매정방의 호명에 또 다시 사람들이 환호를 지르고 세 청년은 어처구
니없는 얼굴이 되었다.
비무나 대결시에 먼저 나서는 건 아랫사람의 몫이다. 다른 모두는
제쳐 두고라도 예의 하나만큼은 주입식으로 머리에 틀어박는 구파의
인물들이 이런 일반적 통념을 모를 리 없다.
"아주 가지가지를 하는군."
당연하다는 것처럼 발을 구르는 관중들을 망연히 바라보던 북궁단야
가 하운에게 눈을 돌렸다.
"나가야 할까?"
"나가지 않으면 안 될 분위기로 만들어 버렸구려."
그 말에의 반응일까. 용수철처럼 튕겨져 나간 장추삼이 한쪽 구석에
섰다.
"장추삼 소협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하고 말을 시작한 매정방이 그의 일화에 대해 간략한 소개를 하고
ㅡ무립첩과 복룡표국의 얘기는 쏙 빼놓았다, 당연한 일이겠지만ㅡ 잠
시 뜸을 들인 후 자신의 진영을 돌아보았다.
"이제... 우리 균현의 자랑이자 백 년 내 무당 최고의 기재라 불리는
유소추 대협을 소개합니다. 유소추 대협 나와주세요!"
"우와아아아!"
"유소추 대협!"
매정방의 소개에 유소추가 앞으로 나서자 군중들의 흥분은 절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유소추가 매정방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는데 장
추삼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화 내용이라 눈썹이 찡긋 올라갔다.
"꼭 이렇게 해야 했나?"
"이래야 한다니까요, 사형!"
"너무 번거롭지 않은가. 우리가 무슨 광대들도 아니고."
"광대라니, 그 무슨 말씀을! 그래야 저놈들의 기를 완전히 죽이는 거
라니까요!"
"글쎄다. 난 지금의 이 희극을 이해하기 어렵다."
"벌써 그날 일을 잊어버리신 겁니까? 무당의 조사전이 통곡하고 있
다고요!"
"넌 지금 네... 아니다. 관두자."
매정방에게서 눈을 돌린 유소추가 장추삼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짧
은 눈인사를 나누는 동안 매정방은 유소추에 관해 장황한 설명을 늘어
놓았는데 세 살 때의 일부터 주워섬기는지라 언제 끝날지 모를 판이었
다.
"됐다. 넌 그만 들어가 보아라."
"아니, 조금 더 설명을......"
"내려가라 하지 않았느냐."
착 깔린 유소추의 음성에 기겁을 하고 매정방이 그들의 편으로 몸을
감추자 빙글 몸을 돌린 유소추가 포권으로 장추삼에게 예를 표했다.
"무당의 유소추라 하오. 이리 번거롭게 한 점 깊이 사과드립니다."
"잘 알겠지만 장추삼이오. 별로 번거로운 건 없소이다."
심드렁하게 마주 포권을 한 장추삼이 권태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
로 화답했다.
'듣던 대로군.'
유소추는 입가에 그려지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그는 지금 각기 다
른 세 갈래의 입장에서 장추삼에 대해 판단을 내려야 했다.
'오송 사조님들의 말씀대로라면 그야말로 장부 가운데 장부라고 했
지. 다소 건방지기는 하지만.'
무당오송이라면 장문인 이상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물론 나이
와 배분 때문에 대접을 받는 것이지만 나잇값을 해야 나이 대접을 받
는 것이고 그렇게 말한다면 오송만큼 나잇값을 하는 사람들도 드물다.
그런 오송이 판단한 장추삼이다.
'하지만 장문 사부님의 원인 모를 반은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숨을 내쉰 유소추가 뒤로 물러서 있는 그들의 사형제들을 바라보
았다.
'팔파의 사형제들은 장추삼을 비롯한 삼성에 대해 극구 언급을 회피
하고 있다. 무조건 나쁘게만 몰아가는 매정방 사제의 성격이야 익히
아는 바지만 나머지들은 뭐란 말인가.'
이때 장추삼이 목을 꺾었다.
우두둑.
"아, 본인이 결례를 범했구려. 오늘은 사과밖에 드릴 것이 없소이
다."
"됐으니까 시작하자고."
금방이라도 자버릴 듯한 목소리라 어처구니 없었지만 침착한 목소리
로 유소추가 입을 열었다.
"무당의 속가제자 유소추가 장추삼 대협에게 비무를 청합니다. 대
부분의 예는 생략하기로 하겠으며 이번 비무와 무당은 관련이 없음을
밝혀둡니다. 아울러 팔파공동문하와도 상관없는, 제 개인적인 호승심
임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거 이상하네.'
장추삼의 생각은 나머지 둘과 일치했다.
"저 친구는 오늘 같은 일을 벌일 사람이 못 돼."
북궁단야가 잘라 말했다.
"내 생각에도 그렇고."
그헐게 중얼거린 둘의 시선이 자연 누군가에게로 모아졌다.
"분명....."
"저 조류일 거요."
그 조류를 바라보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저 자식이다. 이거 끝나고 정의의 응징이 뭔지를 알려주마.'
이를 갈던 장추삼이 유소추에게 서둘러 포권을 했다. 이걸 끝내야
정의의 응징을알려주든 뭐든 할 거 아닌가.
"호북 양양의 장추삼이오. 싸우는 데 뭐 다른 말이 필요할까. 서
둘러 끝냅시다. 할 일이 좀 있거든."
하고 얼굴을 돌려 조류를 쏘아보았다.
'흐이익!'
기겁을 한 매정방이 사람들의 뒤로 숨었다.
물론 이렇게 판을 키운 건 매정방이다. 장추삼이 왔다는 소식을 듣
자마자 유소추를 충동질한 것이 그였고, 비무 장소를 이곳 척석평으로
정한 것도 그였다.
비무첩을 날리자마자 소문을 낸 이 역시 매정방이니 그가 이번 일에
들인 노고 하나만큼은 칭찬해 줄 일이다. 노고인지 집요함인지는 모
르겠지만.
원래 속 좁은 인간들일수록 망신을 당하면 잊지 않는 법이다. 그리
고 반드시 그걸 갚으려 든다.
자신과 주위에는 관대하고, 타인에게 한없는 준법을 강요하는 유형
들.
'킁! 네놈들이 감히 나를 건드려? 오늘 너희들은 성한 몸으로 균
현을 빠져나가기 어려울 거다!'
사악한 눈동자를 굴리며 매정방이 장추삼과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그럼!"
고개를 끄덕인 유소추가 검을 가슴까지 끌어 올려 검례를 취하고 검
을 빼 들었다.
"재미있겠군."
"재미라고 하기에는....."
많은 구경꾼들 가운데 커다란 모자를 쓴 두 사람이 중얼거렸다.
"자고로 싸움 구경만큼 재미있는 게 얼마 없다는 걸 몰랐나? 그리고
이런 싸움이라면 옆에서 불이 난다고 해도 포기하기 어려운 일인데."
"그래도 재미있다고는 할 수가......."
둥둥둥둥!
누가 두드리는 걸까. 북소리가 급각하게 울리고 유소추가 중극으로
검을 세우자 장내의 열기는 최고조로 올라섰다.
소음에 익숙하지 않은 장추삼이 귀를 막자 유소추가 손짓으로 고수
(鼓手)를 제지했다.
뚝.
북소리가 멈추자 장내엔 급작스런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파박!
장추삼이 돌진하면서 비무가 시작되었다. 그의 유려한 추뢰보에 뒤
로 주욱 신형을 밀며 거리를 잡은 유소추의 검이 빙글 돌아서며 한줄
기 검화(劍花)를 피워내자 장추삼은 달리던 그대로 몸을 세웠다.
촤르륵.
언제나 유려한 산무영, 처음 대하는 사람이라면 눈이 튀어나올 법한
광경인데,
"하앗!"
커다란 기합과 함께 대붕처럼 몸을 날리는 유소추에게서 당황을 찾
아보기는 어려웠다.
"이상적인 수비법이다."
하운이 중얼거리는데 뒤에서 크고 작은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맞아, 추뢰보를 펼쳤을 때 최대한 뒤로 물러서면서 사거리를 피한
건 훌륭한 판단이었지."
"추뢰보는 한 군데를 노리고 그곳을 제압하는 방식이기에 대비를 한
상태라면 피할 순 있거든."
"아니, 박옹 노선배님, 남궁 노선배님!"
작고 똥똥한 그림자는 박옹이었고, 크고 길쭉한 그림자는 남궁선유
였다.
"산무영을 펼치면 누구나 한순간의 호흡을 뺏기기 마련인데 그조차
허용하지 않으니 과연 무당에서 자랑하는 신룡이라는 건가?"
"신룡이고 토룡이고, 저건 예상하지 않고는 설명이 안 돼. 아무래
도 무당의 다섯 노송(老松)들이 뭔가 장난을 친게 틀림없다고."
"오랜만에 뵙습니다."
북궁단야 역시 잘 보이지 않는 미소를 입가에 피워내며 포권하자 박
옹이 키득거렸다.
"귀찮게 예는 무슨, 그나저나 저 녀석은 사건을 아주 몰고 다니는구
먼?"
"아니... 비무첩을 보낸 쪽은 장 형이 아니라......."
하운의 변명에도 박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워들은 바로 무당에서 또 뭔일을 벌였다며? 그래서 신룡인지 뭔
지하는 녀석이 저 난리를 부리는 거 아냐? 아무튼 저놈은!"
"일을 벌인 건 맞지만........"
해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라 한숨을 쉬던 하운이 북궁단야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저 녀석이 원래 바보에다 말썽꾼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번 일에는 다
른 무언가가 담겨 있습니다."
"다른 무언가?"
남궁선유가 심유한 눈으로 북궁단야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지금 설명드리기는 뭐합니다. 비무가 끝나면 따로 자리를 마련하
지요."
"그럼 네가 사는 거냐?"
박옹이 쏜살같이 묻자 북궁단야가 전낭을 거내 흔들어 보였다.
"이런, 몇 푼 없군요. 이거로라도 만족하신다면."
그의 너스레에 박옹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이놈까지 저놈하고 닮아가잖아! 너도 너스레를 부릴 줄 알
았더냐?"
전낭을 갈무리하며 태연하게 대답하는 북궁단야는 그야말고 장추삼
같았다.
"그래도 저는 돼지노인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만."
"허어!"
박옹의 예상이 맞는 걸까?
지닌 바 기본기도 탄탄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움직임을 예견하고
방비하는 유소추의 몸놀림에 장추삼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 봐라?'
나가는 방향에서부터 들어오는 위치까지, 유소추의 움직임에 군더
더기라곤 찾아보기 어려웠다.
"타앗!"
한 발 앞으로 뛰던 장추삼이 추뢰보를 그리는 형국에서 그대로 발을
구르자 돌진 속도가 가속되어 뒤로 물러서던 유소추를 앞지르는 형국
이 되었다.
'이런 빠르기가!'
언젠가 선보였던 가속추뢰의 완성형.
퇴로를 차단당한 유소추가 검을 들어 힘차게 휘두르자 그의 앞에 투
명한 무엇이 생겼다.
"검막" 저 아이는 당년의 오송을 뛰어넘었구나!"
남궁선유의 찬탄에 북궁단야와 하운 역시 눈썹을 쫑긋 세웠다. 그들
도 천상 검수들이기에.
검막(劍幕).
환검을 위주로 하는 검수들의 꿈이자 지향점. 일순간에 검을 서른
여섯 번 휘둘러 자신의 앞에 검의 장막을 친다는 꿈의 경지.
놀라기는 모자를 쓴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오호, 저건 검막 아닌가? 오늘 내 눈이 호사를 누리는구먼!"
"검막이라니. 역시 난세라는 건가."
검의 장막이 쳐지자 장추삼도 태만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야 했다.
턱.
한 발 앞으로 나선 유소추가 검막을 친 상태 그대로 검을 날리자 마
치 솜구름처럼 사뿐히 날아오른 검이 장추삼에게로 느릿하게 다가섰
다.
"호접검!"
검막에의 놀람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남궁선유뿐 아니라 박옹의 눈
도 찢어질 듯 커졌고 하운과 북궁단야도 숨을 몰아쉬었다.
호접검(胡蝶劍)은 말 그대로 나비처럼 검을 쓴다는 얘기겠으나, 여기
서는 다르다.
검에 강력한 회전을 주어 체공 시간을 늘리면서 원하는 곳으로 보내
는 것인데 일견 간단해 보이지만 치고 들어오는 각도와 방위가 예측불
허이고 시전자에 따라 비행 시간까지 달라진다.
한마디로 이기어검의 초입이라고나 할까.
모자를 쓴 이들도 검을 쓰는 사람들인지 호접검을 보고는 몸을 부르
르 떨었다.
"역시무당이로군. 저런 경지까지 아이를 올려놓다니."
"호접검이라면 피하는 수밖에는 없는데....."
둥실둥실 떠오는 검을 보며 산무영을 펼치려던 장추삼이 허리가 뜨
끔해서 왼발 뒤꿈치로 땅을 밀며 급히 몸을 뉘였다.
슈우-
아슬아슬하게 그의 가슴을 스쳐 지나간 호접검이 그대로 되돌아오
자 누운 상태 그대로 발바닥을 움직여 몸을 반 바퀴 돌린 장추삼이 벌
떡 일어섰다.
"합!"
파바방!
활짝 편 손으로 허공을 맹렬히 밀어내는 그의 동작에 호접의 속도가
둔화되었다. 이것은 유성우를 손바닥으로 펼쳐 낸 것인데 돌아오는
검의 각도를 대기의 흐름을 조종하여 바꾸려는 시도였다.
스륵.
검의 힘이 죽어들자 오른발을 차올리며 장추삼과의 거리를 좁힌 유
소추가 검을 받아 들었다.
"대단한걸?"
장추삼이 키득거렸다. 그의 옆구리는 길게 베어져 점점이 핏물을
떨궜고 철판교를 펼치며 당에 닿은 머리에는 흙까지 묻어 있었다.
"명불허전이오."
유소추 역시 장추삼을 치켜세웠다.
"이렇게 뻑적지근한 일을 벌일 사람은 아니니 모든 일의 원흉은 저
닭이지?"
장추삼이 곁눈으로 매정방을 보자 한숨으로 대답을 대한하며 유소추
가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집중하시오."
"난 늘 집중한다고."
힘차게 대답하며 장추삼이 뛰쳐나갔다.
촤촤촤!
호기로운 대답만큼 강렬한 기세로 달려나가던 그가 급히 몸을 세우
며 차례로 분열하기 시작했다.
'헉!'
분열로 끝이 아니었을까. 분신처럼 퍼져 버린 장추삼이었는데 그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속도로 유소추에게 달려들었다.
어느 것이 잔상(殘像)이고 어느 것이 허상(虛像)이고 어느 것이 진
상(眞像)인지.
뒤로 물러서려던 유소추가 그의 강력한 일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건 검을 들고 말고 할 새도 없었기에 무방비로 당할 판이었다.
으득.
이를 갈며 다음의 장추삼을 맞이하던 그가 큰 경호성과 함께 검을
떨쳤다.
쿠오오오!
순간적으로 피어나는 검의 파도!
"저런 걸 뭐라고 불러야 하지?"
딱 벌어진 입으로 망연히 중얼거리는 박옹의 옆에서 그보다 크게 입
을 벌린 남궁선유가 검을 툭 떨어뜨렸다. 자신의 검이 왜 이리도 약
해 보이는지.
"검의 파도, 저것은 검해(劍海)다!"
하운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처음 보는 검의 명칭을 붙일 때 북
궁단야는 자신의 검자루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지향점은 제각기라는 건가.'
검의 파도에 떠밀려 금방이라도 빠져 버릴 듯한 장추삼이 몸을 앞으
로 숙였다.
'이때다!'
눈동자를 굴리며 뭔가를 노리던 매정방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한 발만 더 와라, 한 발만!'
막강한 검의 파도에 떠밀려서 흔들리는 장추삼에게 매정방의 이런
행동이 보일 리 만무했다.
그리고 이상하게 솟아올라 있는 봉분의 의미 역시.
쿠르르!
파도가 해일이 되어 모든 것을 삼키려 들 때 흔들리는 장추삼의 눈
이 번쩍 더졌고 그 순간 매정방의 사이한 눈빛도 극에 달했다.
<12권 끝>
첫댓글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