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SHZCTwMeSa8?si=XI2lF0ho4rUDYjSO
Enrico Caruso(1873~1921) - L'alba separa dalla luce l'ombra (Victor, 1917)
L'alba sepàra dalla luce l'ombra,
E la mia voluttà dal mio desire.
O dolce stelle, è l'ora di morire.
Un più divino amor dal ciel vi sgombra.
Pupille ardenti, O voi senza ritorno
Stelle tristi, spegnetevi incorrotte!
Morir debbo. Veder non voglio il giorno,
Per amor del mio sogno e della notte.
Chiudimi, O Notte, nel tuo sen materno,
Mentre la terra pallida s'irrora.
Ma che dal sangue mio nasca l'aurora
E dal sogno mio breve il sole eterno!
Tosti, Francesco Paolo, 1846-4-9 ~ 1916-12-2
https://youtu.be/Ks_rfsKYLoc?si=8xNfiKBbMqhCro1X
Enrico Caruso Italian songs
토스티는 1846년 4월 9일 아브룻치의 오르트나 스루마네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상인인데, 아버지는 돈 주제페, 어머니는 카테리나이다. 처음에는 고향에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러나 11세 때, 왕실 등의 추천을 받아 나폴리의 산 피에트로 마이에라 왕립 음악원에 입학했다.
바이올린을 핀트, 작곡을 콘티와 메르카단테에게 배워 1866년 졸업했다. 곧바로 그 학교의 조교수가 되지만 건강을 이유로 고향에 돌아와 작곡에 전념하였다. 그때 로마의 성악 교사에게서 작품을 인정받아 사보이의 공녀 마르게리타의 성악교사로 초빙되었다. 1875년 런던에서 성공을 거둔 후 1880년 빅토리아 여왕아래에 있는 영국왕실 음악교사로서 정식으로 런던에 부임했고, 또 음악출판사 챠페르와 계약을 맺고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888년 런던에서 베르타 피앙소와 결혼, 1894년부터 왕립 음악원의 성악교수로 근무했다. 1908년 에드워드 7세로부터 남작 칭호를 받고 1913년에 런던을 떠나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1916년 12월 2일 로마에서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토스티는 성악교사였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가곡이 많고,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어에 의한 아름다운 선율을 남겼다. 당시 이탈리아는 오페라의 전성시대로 작곡이라면 오페라와 동의어였을 정도의 시대였으나 그는 유일하게 이탈리아의 근대 가곡의 창조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때까지 이탈리아에서는 가곡은 육성되지 않았고 민요만 있었던 당시였기 때문에 아름다운 선율을 예술 가곡의 수준에 까지 이르게 했던 공적은 대단히 크다. 그 유려한 선율에 대응하는 유연하며 펑명(平明)한 하모니, 서정시의 정감을 그대로 불러내는 듯한 적절한 표현은 현대에 있어서도,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토스티의 가곡은 한마디로 감미(甘美)라는 단어로 말해질수 있으리라.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 1873∼1921)
https://youtu.be/t936rzOt3Zc?si=Ir-F4ECR-jwzC63G
Una Furtiva Lagrima - Enrico Caruso 1904. Remastered
'카루소'라는 노래가 있다.
파바로티가 부르는 루치오 달라의 ‘카루소’는 무척이나 애절하게 들린다. 이 노래의 가사는 카루소의 일생을 압축해서 담고 있다. 그렇다면 카루소의 일생은 그렇게도 슬프고 불행했을까. 겉만 보면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는 20세기 초에 가장 유명한 가수였다. 카루소가 활약할 당시는 지금과 같이 상업적인 대중음악이 아직 발달하기 전이었다. 따라서 카루소는 지금에 비하면 ‘마이클 잭슨’ 정도의 세계적인 명성을 누린 가수였다. 따라서 돈도 따랐다. 개런티는 ‘백지수표’에 자신이 써넣으면 될 정도였다. 그가 생전에 레코딩으로 벌어들인 돈은 약 200만 달러. 그가 그토록 유명세를 누리며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노래를 잘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아직도 ‘역사상 최고의 테너 가수’라는 칭호가 뒤따른다. 지금 들으면 19세기적 가창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지만 그의 노래에 담긴 희로애락의 현과 묘한 뉘앙스의 변화,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풍기는 카리스마는 ‘그의 노래 그 자체’ 외에 다른 무엇으로 표현하기 불가능하다.
카루소는 나폴리의 빈민가에서 7남매의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창고 인부였다. 술주정뱅이였고, 음악은커녕 자녀들을 학교에 보낼 생각도 안하던 사람이었다. 10세부터 공장에 나가 자신의 밥벌이를 해야 했던 카루소는 저녁시간에 몰래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15세가 되어 정식 음악수업을 시작한 그는 베루지네라는 성악 코치에게서 배웠다. 베루지네는 카루소의 타고난 재능을 간파하고 그를 이용해 돈을 벌려 했다. 1894년, 베루지네가 성급하게 데뷔시키려 했던 무대에서 망신만 당하고 내려선 카루소는 이듬해 다행히 나폴리 테아트로 누오보에 별 무리없이 데뷔했다.
지휘자 빈센초 롬바르디를 만나며 인생의 행로를 바꾸게 되었다. 베리스모 오페라의 신봉자이던 롬바르디는 카루소에게서 참다운 베리스모의 구현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에게 많은 무대를 맡겼다. 빈민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카루소에게 베리스모 오페라는 체질적으로 잘 맞았을 것이다. 그의 가창도 목소리도 이를 계기로 새롭게 탄생했다.
1900년,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스칼라 가극장 무대에 오른 그는 30세가 되던 1903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등장한 이후 절정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1904년에 프로듀서 가이스버그에 의해 이루어진 유명한 레코딩은 레코드의 역사를 바꿔놓았다. 폭발적으로 팔려나가며 레코드를 상업성을 가진 매체의 자리에 확고히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상업적인 성공과 대중적인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이야말로 불행의 시작이었다. 당대의 스타들 중에서도 ‘황제 스타’ 격의 위치에 오른 그는 특급 호텔 한 층을 모두를 숙소로 쓰고, 수많은 보조자와 하인들을 거느렸다.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은 그의 개런티는 무대에서의 부담을 더해주었다. 그는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음악에서만큼은 ‘개런티에 걸맞는 훌륭한 연주를 해야한다’는 완벽주의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메트로폴리탄에서 시즌에 한두 편 주역을 맡은 것이 아니라 ‘하나만 빼고 다 맡을’ 정도였다. 따라서 그는 방대한 레퍼토리를 소화해야 했고, 무대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했기에 그에 따른 정신적·육체적 소진으로 너무 일찍 쓰러지게 되었다.
47세가 되던 1920년에 은퇴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듬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늑막염이라는 사실은 카루소가 성악가로서의 자신을 얼마나 혹사시켰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철저한 자기 관리로 60세가 넘은 지금도 별 무리없이 노래하고 있는 파바로티가 ‘카루소’를 부른다는 사실 또한 하나의 아이러니다. 그의 자취를 담은 음반은 RCA의 12장짜리 전집과 펄의 12장짜리 전집이 유명하다.
글출처: 웹사이트
https://youtu.be/YicAXrCwAeI?si=bNLlbL8JHPkOWUMO
L'alba separa della luce l'ombra-Three great versions-Schipa, Bjorling and Carus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