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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무사 13권
삼류무사 270 계략(計略)
쿠오오!
검의 해일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폭풍우를 동반한
미친 파도가 되어 대지를 삼키고 하늘까지 가둘 기세로 사정없이 몰아
쳐 왔다.
그 앞에서 선 장추삼의 모습은 당랑거철(螳螂拒轍)의 신세로 보였고
마음 약한 사람들은 고개를 돌렸다.
파박!
이대로는 당할 수 없다는 반발심일까. 어깨를 늘어뜨리고 눈망울을
빛내던 장추삼이 검의 바다로 뛰어들었다.
"뭐야, 저놈?"
박옹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남궁선유가 마른침을 꿀걱 삼켰다. 이해
하기 어려운 진행이었지만 두 노인은 놀라움 이외의 어떠한 말도 뱉지
않았다.
장추삼에의 신뢰 단지 그것뿐일까?
그들은 하나같은 마음으로 바라고 있었다. 아니, 기다리고 있었다는
편이 맞으리라.
... 또 무엇으로 우리를 기쁘게 해주겠느냐?
그리고 그는 애처로운 노인들의 기대를 저버리 만큼 강퍅한 위인이
못 되었다.
"타앗!"
몸을 한번 움찔 떨었다고 생각한 그였는데 한순간에 아홉명의 장추삼
이 되어 각기 다른 자세를 취했다. 같은 시간대에 동일인이 다른 자리
를 점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
그러나 모두의 눈엔 장추삼이 분명 아홉으로 보였고, 그렇게 남은 여
러 명의 장추삼들은 서로가 진상(眞像)이라고 항변하는 것처럼 각자 실
체적인 무엇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 이것은!'
두 명의 노인도 같은 생각이겠지만 - 그들은 전에 한번 본 일이 있었
으니까 - 처음 접하는 유소추에게 장추삼의 이 동작은 단 하나의 초식
을 연상케 하였다.
절전되었다 얼마 전에 가까스로 복원되었다는 소림의 세 가지 전설
가운데 하나.
연대구품!
'놀랍지 않은가?!'
흥미와 궁금증이 더해지자 유소추의 어깨도 자연스레 풀렸다. 이것
은 검수로서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당연한 말이겠
지만 어깨에 힘이 들어간 상태에서는 어떤 활동이든 자유롭지 못할 테
니까.
팍팍팍!
제각각의 장추삼들은 팔파의 무공에 정통한 유소추로도 생전 보지 못
한 동작을 취하면서 천둥처러 밀어닥친 검해를 밀어내기 시작했는데 미
친 파도의 한가운데에서 노를 젓는 사공처럼 여유롭기까지 했다.
'다른 무엇은 몰라도....'
저자는 최고의 무인이다!
검을 쳐내며 유소추의 입가에 부드러운 선이 그려졌다.
팍!
마지막 남은 장추삼의 잔상이 사라지며 그때까지 장내를 뒤덮었던
검의 바다도 숨을 죽였다.
"후욱~ "
짧은 숨을 토한 장추삼이 유소추를 빤히 쳐다보다 고개를 갸웃거렸
다.
"거참, 알 수 없는 노릇이로군!"
웬만하면 그냥 손을 섞겠는데 그의 의문은 너무도 강력한 힘을 지닌
지라 앞에 있던 유소추도 알 수 없는 노릇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어쩐
지 질문하긴 멋쩍어서 망연히 서 있는데 약 올리려는 듯 장추삼은 계
속해서 중얼거렸다.
"알 수가 없어, 정말로 알 수 없단 말이야."
"뭐가 말이오!"
끝내 폭발한 그가 칼을 내리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장추삼
은 여전히 고개를 젓고만 있었다.
"알 수가 없네."
"이보시오....."
유소추의 스산한 음성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입을 떡 벌린
장추삼이 오히려 그에게 반문했다.
"내가 수많은 군집과 모임을 봤지만 승냥이들이 우글거리는 소굴에서
사람이 노니는 경우는 본 적이 없거든? 당신이 보기에는 어때, 말이
안 되지 않아?"
뜬금없는 질문이라 유소추도 생각에 잠겼다.
'승냥이 소굴에서 혼자 유유자적하는 사람이라?'
역시 그건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저자는 정말로 그런 걸 본 적이
있는 걸까?
유소추의 표정에서 그런 의문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장추삼이 고개
를 돌려 유소추가 걸어나온 쪽을 돌아보았다.
"내 눈이 삐지 않았다면 지금 딱 그걸 보는 느낌이거든. 아무튼 세
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음?"
이제 보니 저자는 자신의 사형제들을 질책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한 단계 높여 봐주니 얼른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바로 응대를
하지 못하고 유소추가 헛웃음을 흘렸다.
사실 그도 싫었다. 팔파공동문하라는 권위를 이용하여 제멋대로 나
대는 사형제들과 그것을 은근히 부추기는 원로들, 그리고 이런 일들에
너무도 익숙한 무림이.
그렇지만 나서서 말을 하지는 못했다. 반대나 거부 땨위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무서워라기보다는 솔직히 귀찮아서, 그냥 되는대로였다.
어느샌가 자신도 안주해 버린 건 아닐까.
"그렇다고 사람을 짐승에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소."
"뭔 소리야! 말을 하나고 다 사람이 아니라고. 때론 말 못하는
미물이 더욱 인간적일 때가 있다는 것도 몰랐어?"
"허....."
듣기 거북한데 어쩐지 통쾌하다.
"문제는 나 역시도 짐승의 무리에 속해 있다는 거요. 아무리 부정해
봐도 그건 사실이지."
유소추의 탄식에 장추삼이 빙그레 웃었다. 그런 웃음을 보자니 예
전에 품었던,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잊혀져 갔던 무엇이 떠올라 유소추
의 마음에 잔잔한 감흥이 흘렀다.
"괜찮아. 당신은 비단 사람일뿐더러 대장부이기까지 해. 덤으로 순
진도 하고. 그러니까 서 있는 곳이 승냥이들의 소굴이든 어디든 걱정
이 없어. 다만........"
그가 말꼬리를 흐리자 유소추는 다음 말이 너무 궁금해졌다.
"다만 뭐요?"
"다만.....너무 오래는 머물지 마. 그러다 뿌리 박혀 버리면 잔뿌리
들이 얽어맨다고."
"음."
아닌 걸 알면서도 굴레처럼 덧씌워진 인정이라는 놈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뒷골목 생활을 해오면서 이런 일들을 숱하게
봐온 장추삼이었기에 이런 충고도 가능한 거다.
그는 기본적으로 무림의 거대문파나 뒷골목 흑방을 같은 부류로 취
급하고 있었으니까.
"사형, 뭐 하는 겁니까!"
"말장난이나 할 때가 아닙니다!"
뒤쪽에서 승냥이들이 우글우글 짖어대기 시작했다. 원래 이런 부류
들이 제 말하는 건 귀신보다도 잘 아는 법이다. 그러나 유소추는 여전
히 말을 이었다.
"나 역시 귀하께서 우리 무당에 이런 문제를 파생시켰다고는 보기
어렵소. 하지만 나온 결과가 이러하니 어쩌겠소."
"아... 그 문제......"
머리를 벅벅 긁던 장추삼이 두 팔을 벌렸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설명할 수가 없어. 일단은 하던 일을 마저 하자
고."
'이 남자라면........'
순간이 무서워서 피할 사람이 아니다. 정말로 말을 할 상황이 아니
기에 못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기다려 줘야 한다. 그리고 벌여놓은 판은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게 무인이다.
"반드시 알려주시리라 믿소!
"어."
짧은 말이기에 더욱 믿음이 간다. 군더더기가 없기에 없는 신뢰라도
쌓일 판이다.
이 남자에게서는........
'사람의 향기가 난다!'
문득 유소추는 장추삼의 뒤편에서 예리하게 상황을 분석하는 두 청
년을 바라보았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수정 같은 눈으로 상황을 주시
하는 사내와 입가에 매단 미소처럼 부드러운 청년.
'저들이 하운과 북궁단야.'
왠지는 모른다. 그저 이 사람들하고 차라도 한잔하고 싶은 것은.
아니,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해서........
나의 뒤를 저들이 지켜주었더라면.
저들의 한숨과 응원이 나를 위해 존재했더라면.
아니, 차라리 저들의 틈에서 나 역시 눈앞의 사내를 격려할 수 있었
더라면.
정말 그랬더라면.
'그랬더라면... 나도 우정이라는 걸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었을
까?'
유소추는 자신이 서있는 자리가 너무 가파르다고 생각했다. 밤에
힘을 있는 대로 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것만 같아서 가
까스로 버텨왔던 비탈길.
호시탐탐 떨어지기 바라던 주위의 눈들이 너무도 싫어 여기까지 왔
는데.
"저자는 악마 같은 놈이예요! 말조차 필요없다고요!"
"뽄대를 보여주세요!"
뒤쪽의 함성에 처연한 미소를 그리며 유소추가 칼을 움켜쥐었다.
"할 말은 많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듯하오."
"어."
장추삼도 몸을 반쯤 들고 주먹을 소리나게 말아 쥐었다.
"이번의 겨룸으로 끝냅시다. 왠지 오래 끌고 싶지 않소."
"난 어떤 싸움이든 금방 끝내고 싶은 사람이야."
"아하하하!"
정답과도 같은 장추삼의 응대에 유소추가 기분 좋은 웃음을 흩뿌렸
다. 얼마 만인가, 이렇게 기분 좋은 목소리로 웃어본 적이.
"자, 그럼!"
쿠르르ㅡ
사람은 사람이고 겨룸은 겨룸이다. 보기 싫은 팔파공동문하의 허울
이 있지만 무엇보다 그는 무당의 간판을 걸고 싸움에 임한 것이다.
결코 물러설 수 없다.
유소추의 결연한 기세에 장추삼도 태만하지 않고 상황을 주시했다.
편안하게 기분 가는 대로 밀고 들어갈 상대가 아니다. 아차 한 결
과를 옆구리의 통증이 잘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이자의 검은 절대로 하 형이나 얼음 덩어리 못지않아. 물론 전력
을 다한다면 몰라도 말이야.'
짧은 상념을 그렸다 지우고 장추삼이 한 발 떼자 유소추의 검이 중
극에서 상단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탓!"
일단 거리를 좁혀볼 양으로 치고 나가자 예상대로 유소추는 미끄러
지듯 뒤로 물러섰다. 추뢰보의 호흡을 알지 않고는 불가능한 움직임.
이건 분명히 장추삼을 알고, 그의 움직임을 아는 누군가가 일러주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수비법일진대.
'젠장!'
누군지 뻔하다.
투덜거림은 머리에 남겨두고 접근 거리 그대로 신형을 세운 장추삼
이 유소추의 검끝을 주시하며 빠르게 옆으로 물러섰다.
빙그르르ㅡ
기묘한 호선과 함께 유소추의 검이 내려오자 장추삼의 위로부터 거
대한 그물이 씌워졌다.
슬쩍.
오른발을 치켜든 장추삼이 유소추가 점하지 못한 지점으로 강하게
발을 내차자 불협적(不協的)인 선이 하나 가로놓여지며 유소추의 검은
더 이 상의 변환을 보이지 못했다.
"하앗!"
검결을 맺고 있던 유소추의 왼손이 살며시 쥐어지는가 싶었는데 그
의 주먹은 어느 결에 웅혼한 기운을 담고 장추삼을 위협하고 있었다.
'어쭈구리?'
주먹하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장추삼이다. 그래서 검수가 자신
에게 주먹질을 하자 자존심이 상했던 거다. 원래 제 구역을 침범 당
하면 누구나 털을 곤두세우는 법.
하나 장추삼은 크게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무당의 일절이 검
공이라고는 하지만 태극권(太極拳)으로 대변되는 권법 역시 무림 제일
을 다툰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태극권은 무당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오냐, 맛 좀... 뭐야!'
호기롭게 마주 주먹을 내치던 장추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파방!
주먹과 주먹이 부딪치며 유소추의 얼굴에 심한 경련이 왔지만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선 장추삼의 표정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제, 제기랄......'
쪽팔렸다. 주먹으로 밀렸다는 사실이.
'뭐야? 저런 주먹질이라니!'
분명 유소추의 권은 일직선으로 뻗어 들어왔었다. 그런데 어느 한
시점에서 묘한 떨림을 보이며 기묘한 호선을 그리며 돌아 흐르지 않았
던가.
"저 바보 녀석! 과신도 유분수지. 상대방은 전력을 다해 내쳤거늘
그런 해파리 촉수같은 손놀림으로 뭘 어쩌겠다는 거야."
거의 비명과도 같은 투덜거림으로 답답함을 토하던 박옹이 하운의
팔목을 쥐고 흔들었다.
"저놈 저대로 뒀다간 오늘 관 하나 짜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서 정
신 좀 차리라고 해라! 상대가 누군데 저런 만용이야!"
"예?"
하운이 놀라서 되물었다. 그들은 유소추라는 인물에 대해 단편적인
몇 가지 얘기만 들었을 뿐 구체적으로 잡힌 '무엇'까지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박옹이 인정하는 유소추라면?
"뭐가 예야? 설마 유소추라는 아이를 모르면서 판을 벌인 건 아닐
텐데 말이다!"
팔륜관을 돌파한 무당의 대표적인 후기지수라는 정도? 대체 박옹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사실 장추삼도 유소추라는 존재를 절대로 경시하지 않았었다.
경시라니? 그는 어울리지 않게 며칠 밤을 새워가며 하운과 무학에
관한 토론을 벌일 정도로 이번 겨룸에 대비를 했단 말이다. 그래서
장추삼의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던 거다.
하운이 뭐라고 하기도 던에 박옹의 속사포와도 같은 말이 터져 나왔
다.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여기 있는 남궁세가에서 가장 강하다는 칠
검이 저 녀석의 삼초를 받아내지 못했단 말이다! 그건 문제도 아니
고........"
남궁칠검이라면 남궁세가의 주력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일곱 명의
검수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삼 초를 받아내지 못한 정도로 이런 호들
갑이라면 유소추의 위상에 그리 큰 변화는 없다.
그 정도는 생각했으니까.
태연한 하운의 표정에 속이 타는지 가슴을 쾅쾅 치던 박옹이 한숨처
럼말을 뱉었다.
"문제는 녀석이 남궁칠검을 깬 수법인데... 그게 주먹질이었다는 거
다. 딱 세 번 주먹을 휘둘렀었단 말이야. 그리고 한줄기 뇌락과 함께
모든 것이 종결되었지."
"그게 정말입니까?"
"음?"
하운뿐 아니라 방관하던 북궁단야의 입에서도 저도 모르게 신음성
이 터져 나왔다. 박옹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알고 있는 유소추의
능력치 자체가 잘못 책정되어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남궁 노선배님의 안색이 저리도 침울했던 건가.'
하운이 곁눈으로 장내를 주시하는 남궁선유를 쳐다보았다. 참을 수
없는 긴장감을 전신으로 느끼는 듯 밀랍처럼 굳어 있는 표정과 방금
전까지의 감탄사마저도 잊고 있는 것을 보면 지금 그의 긴장도가 어느
정도까지인지 잘 알 수 있었다.
태극권이 아니었다. 무당의 태극권은 조화를 부리는, 변초를 위주로
하는 권법이 결코 아니었으니까. 조화를 가둘 만한 포용력으로 다가오
는 모든 것을 때론 흘리고, 때론 받아들이는 그런 웅혼한 권력이었다.
그런 우직함 때문일까?
늘 무림의 일절로 불리면서도 결코 최고의 위치에 이르지 못하는 치
명적인 단점이 있었던 권법. 대성을 이루지 않는 한 보조적일 수밖에
없었던 권법이 바로 무당의 태극권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태극권은 그러한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장
실전적인 장추삼의 권법에 결코 뒤지지 않는 위용과 기백으로 한순간
에 전세를 사로잡지 않았던가.
아니........
'정말로 무당의 태극권이었을까?'
자신을 보한다고는 하나 검으로 대표되는 병장기를 위주로 하는 무학
은 기본적으로 상해를 목적하고 있기에 진의를 알기 전에도 얼마든지
위력을 발할 수 있다.
그러나 순수하게 몸으로 펼치는 체술(體術)은 일정한 동작 이외에
그것을 이루는 마음가짐을 이해해야 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반복 학습
만으로는 강한 위력을 발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유소추가 제아무리 천재라 하나 태극권의 숨겨진 진의(眞
意)를 알기 위해서는 기나긴 참선과 그 만큼의 경험이 필요할 터였다.
"특이하군. 권법도 권법이겠지만 저자의 검로에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여러 가닥의 세월이 묻어 있어."
북궁단야가 툴툴거리자 하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격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 한 수. 문제는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
다. 겸해든 뭐든 유소추의 검에서 흘러나오는 검식은 그들이 알고 행
했던 여타의 검식과는 다른 무엇이 녹아들어 있었다.
'녹아 들어 있었다?'
스스로의 생각에 깜짝 놀라는 건 우스운 일임에 틀림없었지만 아무
튼 깜짝 놀란 하운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차하연이 밝힌 대로 유소추의 나이는 스물일곱. 적은 나이라고 하긴
뭐하나 결코 연륜을 논할 세월은 아니다. 그런 이가 자신이 펼쳐 내는
검로에 세월을 담는다?
듣기로 여섯 살에 무당에 입문해서 무당산을 벗어난 기간이 기껏해
야 팔파공동문하 수련을 위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는 유소
추다.
그리고 팔파공동문하의 수련을 위해 모였었다면 무당산에서의 수련
과 크게 다를 바 없을 터. 단지 장소적인 변화 정도랄까.
뭔가 떠오를 듯했으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워낙 급박했기에 호흡
을 가다듬고 전장으로 눈을 돌리며 하운이 낮은 탄식을 흘렸다.
'우검으로 바다를 부르고 좌권으로 낙뢰(落雷)를 일으키는 사내
라...... 장 형, 이번만큼은 전력을 다해야겠소.'
마음으로 응원을 보내는 하운의 얼굴에 작은 아쉬움이 머물렀다.
뒤로 물러선 장추삼이 숨을 고르기도 전에 그만큼을 다가선 유소추
의 검이 커다란 진동을 일으켰다.
콰르르!
다시 한 번 솟아오르는 검의 해일에 장추삼의 주위로 방벽과도 같은
울타리가 쳐졌다.
'제길. 검이면 검, 주먹이라면 주먹이라는 거야?'
일단은 뒤로 물러서야 할 판이라 급히 퇴로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물
러설 곳은 없었다. 그리고 유소추의 검은 느릿하지만 끊임없는 변화로
장추삼을 옥죄었다.
누가 봐도 유소추의 우위. 그래서인지 그의 뒤편에 서 있던 청년들
은 기성을 질러대면서 좋아했으나 두 사람의 표정은 천천히 굳어갔다.
장추삼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차하연이야 이해할 수 있는
일이나 이런 진행이라면 누구보다 춤을 춰야 할 매정방이 입술을 잘근
잘근 씹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라!"
흥에 겨워 큰 소리를 지르며 유소추가 앞으로 나섰다. 그저 한 발
디딘 것뿐인데 검과 사람이 일체가 되어 어떤 그림을 그려내니 장추삼
에게는 막강한 압력이 쏟아져 들어오는지라 숨조차 내쉬기 어려울 지
경이 되었다.
쿵! 쿠르르르!
밀어 쳤다 다시 되돌아오고, 돌아왔다 싶을 때 또다시 내쳐지는 파
도와 같이 유소추의 검로에는 일정한 격식이 있었으나 그 짜임새가 워
낙 조밀했기에 막는 것에만 급급했던 장추삼이었다.
빙글~
밀물과 썰물 같았던 검로였는데 어느 순간 유소추의 검이 허공에 멈
춰 서는가 싶더니 크게 돌아가며 강력한 검기를 공중에서부터 뽑아내
었다.
쿠릉!
"이익!"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순식간에 떨어지는 검기. 버럭 소리를 지르
며 신형을 비튼 장추삼이 교묘하게 유소추의 검을 흘렸으나 가쁜 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입으로 더운 김을 토했다.
'뭔 놈의 검 쓰는 방법이 시시각각으로 변한다냐!'
당연한 일이다. 유소추의 검법은 그가 상대했던 여타의 검수들과
차원이 다르니까. 유소추의 검은 무당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림
이나 곤륜의 것도 아니었다.
순간........
꽝!
"커헉!"
번개처럼 수결을 풀어버린 유소추가 왼손을 내지르자 장추삼은 방
비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야 했다. 이번의 일권은 예측을 했더라
도 받아낼 수 있었다고 장담하기 어려웠을 판이다.
검과 권의 이상적인 결합. 이것이야말로 무당신룡이 여타 검수들과
차별점을 시도했던 것이고, 그 하나하나에 담긴 위력을 떠나 두 가지
의 적절한 조합으로 이만큼의 위력을 이끌어낸다는 건 유소추 본인의
임기응변 또한 무시 못할 수준이라는 얘기다.
쿠쿠쿠ㅡ
가슴을 부여잡을 시간도 없다!
비무라고는 하나 승기를 잡고서 순순히 물러날 리는 없고, 유소추
역시 타고난 승부사였기에 무너진 균형이 바로잡힐 때까지 기다릴 바
보는 아니었다.
다시 고쳐 잡은 검에서 하늘이라도 두 쪽을 낼 것만 같은 검기가 파
생되었고 기혈을 고를 사이도 없었던 장춧마이엇기에 유소추의 진격은
사형 선고와 다를 바 없었다.
적어도 사람들이 보기에는.
"승부가 난 건가? 이대로는 조금 싱겁구먼. 저쪽 편에서 다른 여흥
을 준비한 것 같은데."
"다른 여흥이라니 무슨......."
커다란 삿갓 속에서 매섭게 눈을 빛내던 사람이 어느 한곳을 바라보
며 싸늘하게 웃었다.
"저기 매부리코를 한 녀석.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해서 눈동자를 굴
려대는데 그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구먼. 우습지 않은가. 제
편의 우세를 저어하는 모습이."
"그렇다면...."
"준비해 둔 무언가를 써먹지 못할까 봐 속을 태우는 게지. 모르긴
몰라도 그 하나만을 바라는 듯한데."
이대로는 승부 끝이다. 누가 보더라도 정해진 결말이고 상황은 그
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물론 어떤 한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지만.
'두 손이 따로 논단 말이지?'
가슴의 통증을 앙다문입으로 참아내며 장추삼이 유소추가 불러낸
검의 해일을 바라보다 파도의 끝자락이 넘실거릴 무렵 오른손을 힘차
게 들어 올리며 주먹을 쫙 폈다.
검으로 불러낸 해일은 하늘을 채울 것만 같은 어지러운 상념으로 가
두고(亂想天丈牢劍海),
우우웅ㅡ
거대한 무엇이 그의 손에서 발출되자 검기와 맹렬히 부딪치며 유소추
는 더 이상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아 잡은 칼에 힘을 더해야만 했다.
그리고.........
쾅쾅쾅!
유소추의 앞으로 미친 듯한 폭발이 일어나며 크고 작은 구덩이들이
생겨나자 일순 당황한 그가 신형을 앞으로 뽑아내며 커다란 경호성과
함께 수결을 푼 손을 내쳤다.
번쩍!
순간적으로 장내를 옥죄는 주먹의 낙뢰들.
이때 장추삼의 입술이 비죽 말아 올라가며 기다렸다는 듯 그의 왼손
이 불끈 쥐어졌다.
주먹으로 피워낸 낙뢰라면 유성의 비와 함께 즐겨보리라(流星雨玩拳
開雷).
파바방!
주먹과 주먹이 충돌하자 대기가 격렬히 떨리면서 커다란 파장을 일
으켰다.
쿵쿵쿵!
뒤로 세 발자국이나 벗어난 장추삼이 그보다 몇 발자국 더 물러선
유소추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헉... 대단하다고밖에, 헉... 말할 수가 없잖아. 헉헉... 칼 가지
고 노는 사람치고 주먹질 잘하는 인간, 헉... 본 적이 없었는데 이건
아주..."
유소추도 말을 좀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는 기혈이 완전 따로 놀고
있어서 숨을 몰아쉬는 것도 벅찬 판이라 눈으로 자신의 심정을 대변했
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대충 이런 눈빛으로 보면 되겠다.
"역시 저놈은 보는 재미가 있다니까! 비싼 돈 주고 천리마를 산 보람
이 있다! 우하하하!"
박장대소하며 흥겨워하는 박옹을 곁눈으로 슬쩍 바라본 북궁단야가
툭 한마디 던졌다.
"천리마?"
'아차!'
단 한마디로 선배의 쫀쫀함을 여지없이 작살내 버린 북궁단야가 박
옹을 외면하며 재차 중얼거렸다.
"나올 건 다 나온 것 같고, 그렇다고 승부의 귀결점이라고 보기도 어
려우니 이번 격돌은 그야말로 흉험하겠군."
"흐음....."
고개를 끄덕이며 하운이 왼손으로 화산의 권법 하나를 그려내 보려
다 쓴웃음과 함께 주먹을 풀어버렸다. 남이 한다고 다 따라 할 수 있
으면 어디 그게 절기일까.
남이 한다고 다 따라 할 수 있다면 절기가 아니다?
갸우뚱~
하운의 머리가 모로 꼬였다.
분명 맞는 가정인데 뭔가 떠오르려 한다. 방금 전에 놓쳤던 생각의
편린임에 틀림없는데 이번에는 조금 더 구체적인 형태를 갖춘 무엇으
로 다가왔다.
이들이 각자의 느낌을 받는 동안 멍하니 대전을 주시하던 남궁선유
가 놓쳤던 칼을 집으며 누구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도 오랫동안 안주하고 있었구나. 우리 세가, 그리고 나 역
시....'
'제, 젠장!'
말은 신나게 했지만 후들거리는 다리를 어쩌지 못하고 무릎을 짚으
며 장추삼이 신형을 바로 했다.
"준비됐으면 다시 가야지?!"
호기 하나는 죽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그가 외치자 유소추
도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몸을 세웠다.
"이를 말이겠소!"
장내의 상황 변화에 팔파공동문하에서는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대
부분이 무당신룡과 동수를 이룬 - 엄밀하게 따져 반의반 수 위를 점했
지만 그들은 절대로 그리 말하지 않았다 - 장추삼에의 경탄과 질시였
다.
그 가운데에서 단연 특이한 반응을 보이는 이가 둘 있었으니 꿍꿍이
속이 있는 매정방은 그렇다 쳐도 녹색면사를 쓴 여검수의 눈빛은 한기
를 넘어 냉기를 뿌리고 있었다.
"사형!!"
느닷없는 부름에 유소추가 뒤를 돌아보자 녹색면사녀는 아무런 말
없이 칼을 치켜들었다.
'그래, 절대로 지지 않겠어!'
힘겹게 웃어 보인 그가 팔을 빙빙 돌려 몸 상태를 확인하고는 장추
삼에게 다시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솔직하게 말해서 귀하를 무시했었소. 손을 섞어보기 전가지는 말
이오. 이 점 깊이 사과드리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어우러져 봅
시다."
뚱하게 그 모습을 보던 장추삼이 목을 다시 꺾었다.
우드득!
"오라고."
말은 당당했지만 살짝 침을 삼키며 장추삼이 숨을 골랐다.
이자는 여태까지 상대했던 인물 가운데 기학 다음으로 어려운 상대
임에 분명했고 자신 역시 젖 먹던 힘까지 짜내지 않으면 망신을 당하
리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장추삼이 흥겨워진 것은.
'이제 그걸 쓸 차례라는 건가?'
산무영이든 추뢰보든 알고 피해 버리면 그만이다. 대거리 자체를
하지 않거나 앞서서 잡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게 보법이고 움
직임만으로 잡을 상대가 아니다.
어차피 남은 거라곤 '그것' 하나다. 선택의 여지도 없다.
"후우........."
숨을 고른 그가 가슴을 펴며 바람의 흐름을 온몸으로 만끽했다.
앞으로의 싸움은 늘 이럴 것이다. 이제 움직임만으로 몰아붙일 만
한 적과의 상대는 점점 드물어질 터였다. 어느새 그는 강호의 한 축이
아니라 강호라는 거대한 세계를 이끄는 무리에 속해 있었던 거다.
그의 일거수에 무림의 호사꾼이 바빠지고, 그의 일투족에 강호를 떨
쳐 울리는 고수들이 귀를 세우게 되었다.
원하지 않았던 결과라도 자신 때문에 발생되었다면 전적으로 자신
이 떠안아야 한다. 결코 남에게 물리거나 외면할 수 없는 일이다.
피할 용의도 없다.
'바람이 좋구나.....'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바람의 내음을 쫓던 장추삼이 유소추가 검을
치켜들자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휘잉ㅡ
돌개바람 하나가 기세 좋게 흘러가고 장내는 섬뜩한 침묵이 내려앉
았다.
이번 겨룸으로 판가름날 것이다. 유소추로 대변되는 팔파공동문하
와 장추삼으로 대변되는 강호삼성의 대치는.
스륵.
장추삼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스륵.
유소추가 옆으로 한 발 비켜섰다.
그렇게 각을 재던 둘이 어느 순간 퉁기듯 나섰다.
그때.....
지금이다!
야비한 눈 하나가 반짝였다.
쾅!
"커헉!"
"헉!"
강렬한 폭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둘의 대치 한가운데서 피어오르며
유소추의 신형이 몇 바퀴를 구르다 내동댕이쳐졌다. 그리고 반대편으
로 착지한 장추삼 역시 멍청한 얼굴이 되어 입만 벌리고 있을 따름이
었다.
너무 놀라면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는 법이다. 순간적으로 굳어버
린 사람들은 짧은 시간 동안 멍하니 장내를 바라보다 누군가의 외침에
따라 분분히 움직였다.
"저건 암습이야!"
뛰쳐나가면서 매정방이 날카롭게 소리치자 그의 뒤편에 서 있던 팔
파의 나머지 일원들이 미친 사람들마냥 절규하기 시작했다.
"사형!"
"사혀엉~!"
매정방이 굳이 각인시켜 주지 않더라도 이번의 폭발이 둘의 격돌에
의한 부산물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우웅~
연기가 걷히고 면사녀의 품에 안겨 있는 유소추의 모습이 드러나자
사람들은 그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여기저기 찢겨 나간 옷가지는 그렇다고 쳐도 온몸을 타고 흐르는 피
들과 검게 그을린 상흔들, 그리고 봉두난발이 되어버린 머리, 여유롭
던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간간이 흘리는 기침에서 피가래까지 섞여 나
왔다.
"쿠,쿨럭! 나, 나는... 괜찮....."
"말하지 마세요!"
오열하던 면사녀가 유소추의 볼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울음을 보이
지 않으려 앙다문 입술에는 처연함을 넘어선 무엇이 담겨 있었기에 슬
프기보다 섬뜩함이 배어 나왔다.
"장 형!"
"무슨 일인가?"
하운과 북궁단야가 급하게 장추삼을 둘러쌌다.
"몸은? 기혈은? 어디 이상한 곳은 없는가?"
원래 이런 말은 하운이 해야 어울릴 만한 대사다. 그리고 하운 본인
역시 그러려고 했고. 하지만 숨 쉴 틈 없이 주워섬기며 장추삼의 몸을
더듬는 북궁단야의 기세는 그야말로 질풍과도 같아서 그는 그저 쓴 입
맛만 다셔야 했다.
'허....'
대저 동성의 관심은 귀찮은 법이다. 거기다 북궁단야와 같은 이의
손길이라면 더 더욱.
"아아, 멀쩡하다니까. 어울리지 않게 호들갑은 무슨."
"이게 어디 호들갑 운운할 얘기인가!"
정색을 하며 장추삼의 어깨를 주무르던 북궁단야가 어느 정도 안심
이 되었던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유소추가 누워 있는 쪽을 바
라보았다.
'이렇게도 변하는 건가?'
고소를 머금은 하운이 북궁단야의 초상을 말없이 음미하다 씁쓸한
얼굴로 망연히 서 있는 장추삼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리도 분할까.
무엇이 그리도 억울할까.
"빌어먹을, 제대로 한번 해보려고 마음먹었는데."
주먹을 불끈 쥐고 바르르 떨던 장추삼이 고개를 쳐들었다. 뭐가 어
떻게 흘러가는지 모르지만 그로서는 오로지 안타까울 뿐이었다.
정말로 한번 해보려고 했는데........
이때 유소추를 살피던 팔파의 문하들 가운데 몇몇이 벌떡 일어섰다.
그들의 눈에서 핏발이 아니더라도 풍기는 기세로 장추삼들에게의 공공
연한 적의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역시 시작은 매정방이었다.
"뭘."
장추삼의 심드렁한 대답이 더욱 얄미웠을까?
"뭘이냐니! 일을 이 지경으로까지 몰고 가놓고도 발뺌을 할 셈이
냐!"
"그러니까 뭘 이 지경으로 몰고 갔는데?"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장추삼이었는데 이것은 좋지 않은 모습이었
다. 그리고 팔파에게는 충분한 시비거리가 될 수 있었다.
"네놈이 폭발물을 장치해 놓고도 발뺌을 하려는 것이냐! 더러운 놈
같으니라고!"
"폭발물?"
하운이 입을 떠억 벌리며 반문했다.
"폭발물을 설치했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가 한 발 앞으로 나서자 예전의 일이 떠올라 주춤 뒤로 물러선 매
정방이 악에 받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저기 유소추 대협을 보란 말이오! 전신에 꽂혀 있는 철구들이 보이
지 않소? 이건 인위적인 조작으로 터뜨린 폭발물이란 말이오! 그것도
꽤나 강력한!"
그래도 말에 예의를 갖추는 걸로 보아 그 당시 호되게 당하긴 당했
나 보다.
아무튼 매정방의 외침대로 유소추의 전신엔 작은 철구들이 박혀 있
었는데 그중 깊이 파고들지 않은 몇 개를 제거하면서 면사녀가 간간이
고개를 들어 장추삼을 쏘아보았다.
웅성웅성ㅡ
충격의 여파에서 깨어난 군중들이 그제야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만
약 매정방의 말이 사실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입방앗감이었고 대부분
의 사람들은 자신이 결부되지 않은 이런 일에 대단히 민감하니까.
"세상에 저런 짓까지 하다니!"
"쭉 찢어진 눈을 봤을 때 알아봤다니까! 비겁하게 암수나 쓰고 말이
야!"
"아무튼 태생이 비천한 놈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그들의 속삭임 가운데 여과없이 흘러들어 오는 몇 개는 장추삼을 자
극하기에 충분했으나 그는 그저 눈을 꾹 감고 있었다. 평소의 장추삼
을 감안한다면 놀라운 자제력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허........"
하운이 뭐라고 하려는데 가을 하늘처럼 청명하지만 겨울 서리처럼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그걸 우리가 했다는 건가?"
말은 질문인데 너무도 평온하면서도 차가운 응대. 순간 움찔한 매정
방이 소리가 나도록 침을 삼켰다.
'여, 역시 저놈도 무서워! 하지만 네놈들은 오늘 끝장난 거야, 바로
이 자리에서 말이야!"
숨을 고른 매정방이 유소추를 가리키며 이를 갈았다.
"봐라, 폭발 지점에 두 사람이 같이 있었는데 어떻게 한 사람은 멀쩡
하고 한 사람은 저런 몰골이 될 수 있다는 거냐!"
"음."
"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묵직한 침음성을 흘리는 두 사람을 보며 의기
양양해진 매정방이 아예 방방 뛰며 열변을 토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폭발 시점을 알고 있었거나 폭발물의 산탄 지점을
한곳으로 조종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냔 말이다! 어때, 반박을
해보란 말이야!"
매정방의 외침은 사람들의 의구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가뜩이
나 장추삼들에게 안 좋은 감정을 품었던 군중들은 금방 분위기에 휩쓸
렸다.
"정확한 말이로군. 어떻게 한 사람만 멀쩡할 수가 있냐고!"
"실력이 안되니까 꽁수를 부리다니, 정말 쓰레기 같은 놈이로군."
"저런 버러지 자식!"
서서히 들끓기 시작한 민심은 금방이라도 장내에 난입할 기세까지
타올랐다. 하운과 북궁단야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지만 그들도 딱히
어떤 대응을 하지 못했다.
"웃기게 돌아가네?"
피식 웃고는 장추삼이 누워 있는 유소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죽지는 않겠지?"
"외상이 심할 뿐이오. 폭발물의 파편들은 다행히도 깊숙이는 박히지
않은 듯하오."
하운의 말대로 유소추의 기침에는 피가래가 묻어 나왔으나 그 외에
다른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기혈이 놀라 울혈이 터진 모양이
나 그 정도라면 며칠 정양하면 일어설 수준의 상해였다.
"다행이야......."
고개를 끄덕인 장추삼이 몸을 돌려 하운과 북궁단야를 돌아보며 손
짓을 했다.
"내려가."
"뭐?"
"무슨 말이오?"
당황한 둘이 반문했지만 썩은 미소로 고개를 돌리는 장추삼의 굳은
어깨는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의지가 서려 있었다.
"내려가라고, 뭔가 더러운 올가미를 덮어쓴 것 같은데 당최 구멍이
보이질 않네. 그렇다고 이건 함께해서 좋을 일이 아니잖아. 어서 내려
가라고."
"혼자 잘난 척하려는 거냐?"
북궁단야가 어이없어서 혀를 찼다.
"허허, 지금 뭐 하자는 거요. 우리가 허수아비로 보이는 거요? 이럴
때는......."
하운이 허탈한 탄식을 흘릴 때 장추삼의 단호한 음성이 그의 다음
말을 잘라 버렸다.
"이럴 때는 물러나 주는 게 돕는 거라고. 허수아비에게 뒤를 맡길
정도로 망가진 인생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내가 지금 하는 말이 뭔
지 모르는 거야?"
'음.......'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이라면 뒤를 도모하는 편이 낫다는 걸까. 장
추삼의 굳은 의지에 하운과 북궁단야가 어쩔 줄을 몰라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삼류무사 271 급선회(急旋回)
처연한 한숨과 함께 두 사람이 비무대를 내려서자 유소추를 바라보
던 장추삼이 몸을 돌려 웅성거리는 군중들과 마주했다.
'뭘 어쩌라고.'
입 밖으로 뱉고 싶은 말을 가슴에서 돌리며 장추삼이 어깨를 쭉 폈
다.
그리고 쏟아지는 말, 말, 말.....
"세상에, 저 뻔뻔한 낯짝 좀 봐!"
"사람이라면 저럴 수 없지, 암!"
"그러게 가정교육이 중요하다니까. 배워먹지 못한 놈!"
'내가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거지?"
어질.
당당하려 했는데 순간 밀려오는 현기증에 하마터면 중심을 잃을 뻔
했으나 가까스로 버틴 장추삼이 콧김을 뿜었다.
웅성웅성.
시끌시끌.
뭔가 말을 쏟아내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아니, 말들이 하나하
나 실체화하여 허공에 글자를 만들어낸다.
'어지러워.....'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 홀로 내팽개쳐진 장추삼은 그들이 만들어
낸 글자의 바다에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다.
뭐든 말을 할까?
무슨 소리든 변명을 해볼까?
그런데... 뭐라고?
형체를 이룬 글자들이 그의 앞에 둥실둥실 떠와서 하늘거렸다.
이건 증(憎)일까?
퐁~
포말조차 남기지 않고 터져 버린 글자의 위로 또 하나의 마음이 형
체를 이루며 달려들었다.
이건 오(惡)라고 불러야 할까?
퐁~
역시 터져 버리는 글자가 수천 개의 비수로 잘게 쪼개져 그의 마음
을 여지없이 난도질했다. 그리고 또 하나, 또 하나.
이건 반(反), 이건 사(邪), 이건 저(咀), 이건.......
담담하고 싶었다.
초연하고 싶었다.
그러나 역부족이다. 그는 그저 인간일 뿐이니까.
점점 희미해지는 정신 속에서 장추삼은 자신이 폭발물을 매설하지
않았을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래, 내가 해놓고도 잊어버린 거 아닐까?'
그러고 보니 요 며칠 밤잠까지 설쳐 가며 하운과 토론을 했는데 간
간이 생각나지 않는 시간이 있는 듯도 싶었다.
"편리하군."
삿갓을 깊게 눌러쓴 사람이 빈정거렸다.
"그렇군요."
또 다른 죽립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조건적인 비난이라. 당사자가 아니기에 편리하고, 당사자가 아니
기에 무조건적일 수 있다는 건가."
"당사자가 아니기에 자유로울 수도 있지요."
"진실이든 뭐든 상관없지. 어차피 이들은 제삼자니까."
"비난이든 힐난이든 마음껏 퍼붓다 언제든지 발을 뺄 수 있으니 이
보다 편리할 수가 없는 거지요."
그렇게 말을 받던 죽립인이 말을 높이는 쪽의 동태를 살피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뭔가 짚이는 것이 있거나 하는
경우일 텐데 도무지 움직일 기색이 보이지 않으니 답답하다.
그렇다고 행동을 촉구할 계제도 아니다. 그가 보고 있는 사람은 그
런 존재니까.
나서지 않을 때는 안개와도 같으나 한번 일어서면 태산까지 굽어볼
사람이니까.
'지금 상황을 즐기시는 건 아닐 텐데.'
그의 심중을 엿본 사람처럼 삿갓 안으로 짧은 미소를 그리던 죽립인
이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자, 조금 더 지켜보기로 할까?"
웅성거림은 점점 커졌다. 장추삼의 당황을 알아채지 못할 이들이
아니었고, 수세에 몰린 자를 모는 재미를 놓칠 사람들이 아니었으니
까.
"어서 이실직고하고 목을 빼라!"
누군가의 외침은 도화선이 되어 전체의 가슴을 달구어놓았다. 가뜩
이나 갈아놓은 칼인데 이제야 사용처를 발견한 이들처럼 사람들의 눈
빛은 삽시간에 변해 버렸다
'정말 내가 그랬나?'
장추삼의 동공은 점점 비어갔다.
너무 무서워서, 호승심에의 집착에 자신도 모르게 또 하나의 인격이
튀어나와 일을 벌인 건 아닐까?
이대로... 무너져 버리는 걸까......
"나, 나는........"
그가 어기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때,
"저 아저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어디선가 새된 음성이 장내를 갈랐다.
"엥?"
"뭐야?"
워낙 절묘한 순간이라 작은 목소리였지만 장내를 가득 채우고도 남
았기에 사람들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분분히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음성의 주인공을 찾은 사람들은 이내 헛웃음을 흘려야만 했다.
"아니, 너는 아랫마을 수수가 아니냐?"
"요놈, 어른들의 일에 나서는 게 아니야."
그곳엔 장추삼과 숫자치기를 하던 소녀, 수수가 또랑또랑한 눈을 빛
내며 주먹을 꽉 쥐고 서 있었다.
"얘가, 얘가? 조용히 하지 못하겠어!"
아마도 수수의 아버지인 듯싶은 남자가 소녀의 입을 틀어막으며 급
급히 주위에 목례로 미안함을 대신했다. 그의 빠른 수습에 장내는 처
음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맞아요! 저 아저씨는 비겁하지 않아요!"
또다시 터져 나온 새된 소리. 이번의 인물을 찾은 사람들 역시 허탈
해했으나 이번에는 자기들끼리 중얼거릴 뿐 대놓고 뭐라고는 하지 못
했다.
"동중학 어르신의 자제 분이 여긴 어인 일로....."
"조용하게. 어르신도 나와 계시네!"
"허참....."
동소의 아버지는 학사로서 명망이 드높았던 동중학(童仲學)이라는
사람으로서 이곳 균현에서도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지닌 바 학식과
인품이 남달라 유람 나온 황족들도 꼭 한 번 들른다는 대학사였으니
군중들의 저어함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신분의 차이.
아무튼 소리를 지른 동소가 수수와 눈을 마주하고는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 공자님이 언제 저 인간을 봤다고 두둔하시는 겝니까?"
시종으로 보이는 이가 부산을 떨었지만 동소의 얼굴엔 굳은 의지마
저 보였다.
"흠........"
아들의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동중학이 무릎을 굽히고 동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너에게 사나이라면 자신이 한 말의 책임은 반드시 져야 한다고
일렀다. 기억하고 있느냐?"
"네!"
"그래, 좋다. 그렇다면 저 사람이 비겁하지 않다고 한 이유를 물어도
되겠느냐?"
아버지의 물음에 침을 한번 꿀덕 삼킨 동소가 입술을 축이고 또랑또랑
하게 말을 했다.
"저 아저씨와 놀이를 했습니다."
"놀이를?"
"예, 숫자치기라는 것인데 발이 빠른 사람이 유리한 놀이입니다. 당
연히 저 아저씨는 어른이기에 저희보다 유리했었고 몸도 빨라서 저희
는 졌습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고소를 금치 못할 이야기. 그러나 아들의 뒷말을 기다리
는 동중학의 얼굴에서는 웃음기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저 아저씨가 이긴 것은 자신의 유리함마저 포기하고 얻은 것이었습
니다. 그러나 뒤편의 저분들."
동소가 가리킨 쪽으로 눈을 돌린 동중학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나타날 때보다 빠르게 사라졌고, 동소는 말을 하느라 아
버지를 쳐다볼 겨를이 없었다.
"저분들은 저 아저씨의 가장 작은 유리함마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
습니다. 아저씨 역시 그 말에 순순히 승복을 했고요."
'흐음.....'
머리를 갸웃거리던 동중학이 몸을 일으켰다.
"그것이 전부냐?"
"그렇습니다."
아들이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돌리고 빙그레 웃은 동중학이 다시 준
엄하게 물었다. 그러나 그의 기분은 처음과 달리 한결 가뿐했다.
"어떻게 그것이 전부일 수가 있느냐. 지금의 사안은 그리 간단치 않
다는 것을 너도 목도하지 않았더냐."
"아버지께서 이르시길 그 사람을 알려면 그의 친구들을 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런 사람들을 곁에 둔 이가 어찌 비겁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리고?"
"작은 지적에도 한 점 망설임 없이 승복하는 이라면 자신에게 떳떳
하지 못한 행동을 하고서 저렇게 서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들의 말을 곱씹던 동중학이 냉엄하게 다그쳤다.
"단 한 번을 보고서 내린 판단이다. 너무 성급하다고 생각하지 않느
냐?"
"옛 성현들께서 이르시길 진실한 사람이라면 단 한 번의 나눔으로도
그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흐음......."
뒷짐을 지고 생각에 잠겨 있던 동중학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도 이번 일에는 몇 가지의 의문점을 가진 참이었다."
누구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일까.
"만약 암수를 쓰자고 했으면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을 택할 리가 없
지. 적지나 다름없는 곳에서 말이다."
웅성웅성.
"그리고 방금 전의 수는 아무래도 불필요해 보였다. 승패가 확실히
갈린 것도 아니었는데 저런 모험을 할 필요가 있었을지. 지금까지의
겨룸은 분명 호각지세였으니까."
우와좌왕.
"이 모든 것을 떠나....."
몸을 빙글 돌린 동중학이 아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침 햇살
보다 화사한 웃음을.
"난 내 아들을 믿는다."
우르르르.....
"맞아, 그렇게 보기엔 조금 이상해."
"어 그래. 암수를 쓸 거면 따로 만나서...."
"승패도 불확실했잖아?"
이들의 동요에 하얗게 질린 매정방이 벌떡 일어섰다.
"말도 안 되오! 당장 눈앞의 부상자가 보이지도 않소! 우리 사형께
서 공력이 심후하시기에 망정이지 자칫했다간 단전까지 다칠 뻔했단 말
이오!"
단전의 상해. 그것은 곧 무인으로서의 종말을 일컬음이다.
"그럼 저런 일을 누가 벌일 거란 말이오? 우리 쪽이겠소? 아니면 저
자 측?"
그가 발악처럼 소리를 지르자 사람들이 다시 동요했다. 대상의 전
환, 그저 ~쪽과 ~측을 붙인 것뿐인데 그 효과는 실로 놀라웠다.
"맞아, 저런 일을 벌일 사람이 누가 있겠어?"
"저치의 뒤쪽에서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는 녀석들도 수상해."
"맞아, 맞아. 자기편이 질까 봐 지레 겁먹고 수를 쓴 거 아냐?"
번뜩!
북궁단야의 눈에서 한광이 쏟아지자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눈을 깔
았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가뜩이나 헐뜯을 거리를 찾는 이들에게 빌
밀만 제공할 따름이었다.
"저 봐, 저 봐. 눈빛만으로 사람 잡아먹겠구먼!"
"난 처음부터 알아봤다니까. 저놈이 분명해."
뭐 개중에....
"어머, 저 눈빛 좀 봐. 나 오늘밤부터 어떻게 해?"
라며 자지러지는 여자들도 있었지만.
"이렇게 되면....."
북궁단야가 고개를 들자.
"우리 역시 피해갈 방법이 없겠구려."
하며 하운이 기분 좋게 비무대 위로 걸음을 옮겼다. 마치 기다리기
라도 한 것처럼.
"아, 왜 올라오고 그래."
"올라오기 싫었는데 저쪽에서 청하니 별 도리가 없구려."
"부르는데 꼬리를 내리라는 건가."
장추삼의 투덜거림을 간단한 대꾸로 무마시킨 둘이 매정방을 똑바
로 쏘아보았다.
"그래, 우리가 폭발물을 설치했다는 건가?"
"근거가 뭐냐?"
둘의 합창에 매정방이 주춤거렸지만 교활한 눈동자를 굴리며 상황
을 판단한 그가 무릎을 꿇으며 흐느꼈다.
"크흐흑! 그래, 증거는 없다! 그래서 한이다! 우리의 태양과도 같았
던 유 사형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도 뻔뻔하게 얼굴을 들고 있는 네놈
들을 벌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흐느낌은 울부짖음으로 바뀌고 그에 동조하여 팔파의 나머지들도
구슬픈 울음으로 장내를 메웠다.
"도저히 좌시하지 못할 일이로군!"
우르릉ㅡ
우렁찬 음성이 들리며 장내로 몇 사람이 떨어져 내렸다.
"오!"
"사숙님들께서!"
내려선 다섯 사람을 보며 팔파의 인물들이 혼망 중에서도 너도나도
일어서서 급급히 예를 올렸다.
"됐다. 어서 소추를 돌보거라."
일행의 수장으로 보이는 냉막한 인상의 오십대 도사가 손짓으로 이
들을 제지했다.
"안색은 좋지 않으나 숨소리가 고른 것으로 보아 직접적으로 심맥을
상하거나 하지는 않은 듯하오."
"정말 다행입니다. 아미타불."
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사십대의 중년승이 안도의 한숨을 쉬자 역시
사십대로 보이는 비구니가 합장으로 화답했다. 나머지 두 명의 도사
는 아무런 행동도 없이 장추삼들을 쏘아보고 있었는데 그 기세가 실로
놀라워 웬만한 사람들은 그들의 안력을 감당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물론 장추삼들은 웬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잠시의 눈싸움을 그치고 머리에 핏빛 두건을 쓴 도사가 껄껄 웃었
다. 허리에 맨 장검만큼이나 호탕한 웃음이라 이런 분위기에는 어울리
지 않았으나 그의 행동을 제지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나이와
는 다른 ㅡ 아무리 많아봐야 사십대 초반이니 나머지 넷보다는 어려
보였다 ㅡ 대접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듣던 것보다 더한 걸물들이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도 눈빛 하나
껌벅이지 않다니!"
"사제, 지금 그런 한가한 말 따위나 나눌 분위기로 보이는가?"
"분위기는 분위기고 사람은 사람이지 않겠소이까. 역시 사형께서는
기름진 음식을 조금 더 드셔야겠소."
여유로운 웃음을 흘리는 그를 보며 장추삼이 머리를 마구 갸웃거렸
다.
'뭔가, 어디선가, 반드시 생각날 듯도 한데 당최 뭔가를 알 수가 없
다. 뭐지?'
준엄하게 핏빛 두건의 도사를 꾸짖은 사십대 후반의 도사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특이하게도 거대한 판관필을 들고 있었는데 생김새가 워
낙 우락부락해서 무기와 완벽한 부조화를 이루었다.
장내의 소란 때문일까. 잠시 인상을 구기던 냉막한 도사가 한 발 나
서며 군중들에게 깊은 포권을 했다.
"우리는 팔파공동문하의 지도를 맡았던 팔파지교(八派指敎) 가운데
다섯 사람입니다. 나서지 않아야 함을 잘 알고 있으나 사안이 사안이
고, 얘기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아 답답한 마음에 이렇게 올라섰습니
다. 부디 양해를. 무량수불....."
팔파지교!
팔파공동문하의 실질적인 감독관. 비록 무학의 수련은 종이로 된 책
이라고 하나 제각기의 교련은 이들의 손에서 이루어졌으니 이들이 각
파에서 가지는 위치가 엄중함을 대변한다고 하겠다.
한마디로 팔파공동문하의 기초를 다진 인물들. 이들의 말은 곧 팔파
장문의 의중을 대변한다고 봐도 크게 어긋나지 않으니 어찌 놀라운 일
이 아니겠는가.
냉막한 중년의 도사는 공동에서도 추앙받는 철면자(鐵面子)라는 인
물로서 놀랍도록 단호하고 정교한 검식으로 그 이름이 드높은 사람이
었다. 다만 악에 대해 지나칠 저옫로 반감을 가지고 있어 실력과는
상관없이 공동의 장교를 거론하는 자리에서 늘 뒤로 밀리지만 철면자
자신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복마검법에 가장 어울린다는 평을 듣는 인물. 그런 그였으니 이런
암습이 어찌 용서가 될까.
인사를 끝내고 빙글 몸을 돌린 철면자가 검집째로 칼을 들어 장추삼
들을 가리켰다.
"나는 공동의 철면자라고 한다. 아무리 승부가 중요하다고는 하나
무인으로서의 본분마저 저버린 행위를 어찌 설명하겠는가!"
그의 준엄한 말에 하운이 한 발 나서려 했으나 철면자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양자 하운! 그대는 아홉의 커다란 문파 가운데에서 검과 청정을
닦는 화산의 대제자로서 어떻게 이런 자리에 서게 되었는가! 화산의
조사들께 부끄럽지도 않은가!"
이렇게 되면 신분으로 밀고 나갈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화
도 날 만한 일이었고. 누구나 조상을 들먹이면 열받는 법이니까.
"이익!"
흥분해서 대신 나서려는 장추삼을 손으로 제지한 하운이 물처럼 담
담한 음성으로 철면자에게 대답해 주었다.
"이름을 거론하셨으므로 굳이 예를 표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리고 다
른 것은 모르나 이 점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철면자의 역팔자로 솟구치는 눈썹을 무시하고 하운이 몸을 돌려 북궁
단야와 장추삼을 안을 듯 팔을 벌렸다.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 화산의 조사들께서는 자랑스러워
하실 거라는 사실을."
쿠쿵!
괜히 조사를 들먹엿다가 본전도 차리지 못한 철면자가 이를 갈았다.
'정방이가 말한 대로 이놈들은 뿌리까지 썩어 있구나!'
입가의 근육을 실룩거리던 철면자가 발을 한번 구르고 식식거리자
매정방이 비척비척 일어섰다. 워낙 힘들어 보여서 암습을 받은 이가
누군지 착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사, 사숙... 그렇다고 조사전까지 말씀하신 것은 조금 과하다고 생
각합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들도 순간적인 호승심이나 동료애의 발로로 벌인 일이니 그리 몰아
붙이시면....."
"그럴 아저씨가 아니라니까요!"
아버지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수수가 빽 소리를 지르자 말이 잘
려 버린 매정방의 눈에서 희번덕 광채가 일었다.
'저 쥐방울만한 것이!'
그러나 애써 담담하게 웃으며 그가 철면자에게 거듭 포권을 올렸다.
"어쩐 일인지 몰라도 아이들마저 저자들을 따르니 이곳은 죄를 물을
장소가 아닌 듯싶습니다. 이런 장소에서 치죄를 하면 아이들에게도 좋
지 않으니 자리를 옮기심이 어떤지요?"
"치죄라......."
하운이 툴툴 웃었다. 만약 이들의 뜻대로 누명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화산의 위신 자체가 땅으로 곤두박질하게 되는
일이다.
그렇다고 누구의 도움도 바랄 수 없는 일. 이번 일은 이미 팔파에서
나섰기에 그에 반한다면 무림 전체와 등을 돌리게 된다. 박옹도 남궁
선유도 감히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도 지켜야 할 것들이 있으니까.
'미안하네, 너무나 미안해. 그렇지만.....'
연을 끊었다고는 하나 아직까지 산동으로 머리를 두고 자는 박옹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더는 가문에 누가 될 수는 없었으니까.
'모든 게 부질없구나! 지인의 억울함 하나 풀어주지 못하면서 무엇
이 세가이고, 무엇이 명예란 말인가!'
아직도 오대세가 수장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궁선유 역시
한숨과 탄식으로 답답함을 대신해야만 했다.
언제부터 팔파가 무림 전체가 되어버린 걸까. 그저 여덟 개의 문파
가 모인 것뿐인데.
"역시 정방이로구나. 좋다. 너희들의 죄는 무림맹 호북지부에서 물
을 것이다. 그러니........"
"잠깐!"
철면자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자신의 말을 자른 이가 누구인지 돌
아보지 않아도 뻔했기 때문이다.
"치죄라고 했나? 치죄(治罪)라... 죄를 다스린다는 말인데 아직 범인
이 드러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조금 이른 말이 아닐까?"
피처럼 붉은 두건을 쓴 이가 한 발 나서자 매정방의 얼굴이 썩은 감
빛이 되어버렸다.
'제길, 알고자(알苦子).'
나선 이는 청성의 청오자(淸悟子)라는 도인이었다. 또한 잡식이 많다
고 해서 흔히들 만박진인(萬博眞人)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왜 매정방은
그를 알고자라고 불렀을까.
그건 도인으로서 다소 특별한 청오자의 성격 때문에 붙여진 그의 또
다른 별칭이다.
무슨 일이든 비비 꼬기 좋아하고, 다른 이들과 동떨어진 생각으로
주위를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고 하여 붙은 별칭이 비꼬기 좋아하는 도
사라고 해서 알고자이니 청오자의 성격을 약여하게 보여주는 칭호라고
아니 할 수 없었다.
"이보게, 그게 무슨 말인가? 지금 상황을 보고도 그런 장난질을 치
려는 건가?"
"상황? 무슨 상황을 말씀하시는 거요? 소추가 쓰러져 있는 거? 그
러면 소추가 대로에서 쓰러지면 모든 행인에게 죄를 씌우도 된답디까?
거참 알 수 없는 논리로군요. 무량수불....."
이죽임을 도호로 마무리 짓는 알고자의 행동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
밀어 올랐으나 철면자는 몇 번이 헛기침으로 마음을 다스려야만 했다.
알고자의 말솜씨도 말솜씨려니와 무엇보다 그의....
"아, 알겠습니다. 제가 단어 선택을 잘못했군요. 일깨워 주셔서 감
사드립니다. 그럼 죄를 밝히러....."
"단어 선택만 잘못한다면 좋겠네만."
어떻게든 무마시키려는 매정방에게 마지막 일침을 놓고 외면하는
알고자의 태도에 나머지 넷이 입을 벌리는 것으로 감정을 대신했다.
"아, 아무튼 말은 여기까지 하고 무림의 일을 일반인들 앞에서 논하
기도 뭐하니 자리를 옮기도록....."
"그건 안 될 말이지."
또다시 말허리를 잘린 철면자가 신경질적으로 소리가 난 방향을 보
려 했으나 그는 그런 행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파라락!
한 마리 검은 대붕이 날아들 듯 장내로 내려선 인물이 고개를 돌려
철면자를 바라보았다. 아니, 몸을 돌린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표시했다.
"이런 식으로 장내가 정리된다면 사건 현장을 그대로 방치하겠다는
건데 그렇게 되면 죄를 밝힐 방법이 없지 않은가?"
"노인장은 뉘시오!"
목소리로 미루어 노인임이 분명했기에 갑작스러운 출몰이지만 마지
막 예의를 잃지 않고 철면자가 물었다.
"내가 누구인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네. 정말 중요한 것
은 사건 현장을 버려두고 가려 한다는 거야. 이건 아니지. 안 그런
가?"
"아, 그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군요. 정말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자기 머리를 툭 치며 알고자가 떠나가도록 웃었다. 반면 얼굴이 일
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매정방이 발작적으로 소리 질렀다.
"감히 여기가 어떤 자리라고 나서는 거냐! 네놈이 뭔데!"
"이봐, 단어 선택에 문제가 있어. 상대는 그래도 연세가 많은 분이
라고."
키득거리며 매정방을 뒤로 밀친 알고자가 죽립인의 앞으로 쓱 나섰
다.
"그래도 얼굴 정도는 보여주시는 것이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요? 뭐,
보이기 싫은 흉터라도 있으시다면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다행히 흉터 같은 것은 없다네. 그런데 내 얼굴보다는 사건의 해결
이 급선무가 아닐까?"
"사건의 해결은 우리가 할 거요! 노인장은 염려하시지 않아도 되
오!"
잔뜩 불쾌해진 철면자가 몸을 돌려 알고자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노
인네가 나서서 가뜩이나 정신 사나운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일을 벌
이고 있으니 답답하다.
"사제는 제발 나설 때 나서주기.....!"
"으흐흠~ 뭐가 문제인 걸까~ 어디 볼까나~"
콧노래를 부르며 폭발 지점에 쭈그리고 앉아 여기저기를 들춰보고
있는 알고자에게 철면자의 말은 그저 지나가는 개가 짖는 정도였나 보
다.
"사제!"
"아, 왜 그러십니까?"
"지금 대체 뭐 하는 건가!"
"보면서 모르세요? 사건 현장 검증합니다."
"대체 내 말을...."
"우리 이러려고 나섰던 것 아닙니까?"
'끄으~'
말인즉슨 틀린 것이 없어서 알고자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철면자가
콧김을 내뿜고 털퍼덕 주저앉았다.
'어이구! 하여간 저놈의 성격머리 때문에 장문은 죽어도 못해먹을
거다!'
사돈 남 말 하는 소리를 속으로 되뇌이며 철면자가 입을 툭 내밀고
있을 때 남들과 달리 눈에 띄게 안색이 창백해진 이가 하나 있었으니.
"한가하게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저들을 호북지부로 압송하
셔야 합니다!"
발을 동동 구르며 눈알을 굴리는 매정방을 바라보며 알고자의 입에
서 차가운 사선이 하나 스쳐 지나갔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자네의 혓바닥은 재앙 덩어리임에 틀림없군.
아까는 치죄더니 이번엔 압송인가?"
압송(押送)이라면 죄인이나 피의자를 다른 곳으로 호송한다는 의미
다. 즉 장추삼들이 최소한 피의자 신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겠고 알
고자는 이들이 피의자가 아닌 그저 용의자라는 걸 다시 한 번 환기시
켜 준 것이다.
"아, 그게 그러니까........."
"그 혓바닥 좀 간수하고 한구석에 썩 물러서 있게. 정신 산만해서
일이 되지 않잖나."
가볍게 손사래를 쳐서 매정방을 밀어내던 알고자가 무언가를 발견
하고 눈을 반짝 빛냈다.
"어? 이건 뭐지?"
쿵쾅! 쿵쾅!
머리가 두둥 울려 주체하지 못하던 매정방이 알고자의 손길에 무언
가가 딸려 나오는 순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들은 비천혈서를 소지하고 있단 말입니다!"
쿵!!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비천....."
들었던 것을 놓치며 알고자가 힘겹게 뇌까렸고,
"혈서........?"
방관적으로 앉아 있던 철면자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그리고 나머지 세 사람도 정면으로 장추삼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건 일반인들의 동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 비천혈서라고 했나?"
"세상에, 비천혈서래! 내 귀가 정상인 거 맞아?"
"비천혈서! 비천혈서라고?!"
이것은 미지에의 열광일까, 아니면 호기심일까. 다만 한 가지 분명
한 건....
"으음....."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철면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정방이는 없는 말을 지어낼 아이가 아니라고 보네. 어떻게 생
각하나?"
그가 고개를 돌려 알고자에게 동의를 구했으나 화답은 그리 아름답
지 않았다.
"그건 지금 시점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은 듯하오만?"
어깨를 쭉 올리며 입술을 뒤로 민 알고자가 흥미로운 눈으로 장추삼
들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는 이곳에 오기 싫었다. 천성적인 게으름증도 있거니와 직감
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고, 그렇게 되면 무슨 말을 갖다 붙
여 결국 '아이들 싸움에 어른들이 끼는' 모양새가 될 게 뻔했으니까.
물 맑고 공기 좋은 산에서 죽치고 도나 닦는 체질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도사적인 본분에 충실한 입장인지라 그런 자리는 딱 질색이었
다.
결정적으로 혼자 고생하고 있는 사제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 아니겠
는가.
그래서 여러 사형들이 - 그래봐야 눈 가리고 아웅하기 식의 이름뿐인
사형제간이지만 - 그리 청해도 계속 거절하다 거의 끌려오듯 이른 곳인
데 여기서 비천혈서에 관한 얘기가 나오다니.
'저 녀석.'
알고자가 보기에 매정방은 분명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나서고 - 매정방이라는 인간의 특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저 독사같은 녀석의 행동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친 면이 있었
다. 동료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는 놈이 눈물은 무슨 - 감정을 앞
세운다고 봤다.
그렇지만 비천혈서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책에
관한 언급이라면 순간적인 기분이나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사용해서
는 안 된다.
물론 확실한 근거가 뒤따른다면 몰라도.
'적어도 누울 자리를 보고 수작을 부릴 놈일 텐데?'
그래서 눈을 빛내는 알고자였는데 먼저 나선 건 철면자였다.
"으음... 비천혈서...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 역시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입을 열기는 했지만 얼른 말을 잇
지 못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철면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하운을
쫓았다.
뭐 딱히 짚이거나 바라는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한 울타리 의식이
작용한 걸까?
"지금 정방이가 한 말, 사실인가?"
"그렇다면 어쩔 거고 아니라면 어쩔 거요?"
툭 튀어나온 장추삼이 불쾌한 표정으로 입술을 말아 올렸다.
"이봐,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비천혈서라는 물건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방글방글 웃으며 알고자가 철면자와 나란히
섰다.
"그 책 하나로 수백의 무고한 생명이 이슬처럼 사라졌다네. 한마디
로 대단히 무서운 물건이라 이거지."
"나도 무림사의 한 줄 정도는 꿰고 있으니 부연 설명까지 할 필요는
없소이다."
콧방귀를 '킁' 하고 내뀐 장추삼이 팔짱을 끼었다.
"재차 묻겠네. 가지고 있는가?"
"아따, 짜증나네. 그게 당신들하고 무슨 상관이냐니까!"
"왜 상관이 없는가!"
장추삼의 권태로운 대답에 철면자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건 전 무림의 안위와도 직결되는 중대한 책이야. 자칫 잘못하다
가 삼십 년 전의 그런 참사가 또다시 발생한다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글쎄, 그걸 왜 당신들이 걱정하느냔 말이야."
"무림맹의 설립 취지가 전 무림의 안위에 대한 염려이고 나 또한 그
자리에 있는 몸으로서 당연한 일이 아닌가. 어서 말하게. 정말로 그
책을 가지고 있는가?"
"내참......"
어처구니없어서 입맛을 다시던 장추삼이 하운과 북궁단야 쪽을 돌
아보았다. 저 빌어먹을 조류가 어떻게 비천혈서에 관한 일을 알았는
지는 차치하더라도 얘기의 방향이 왜 이쪽으로 쏠린다는 건가.
"바보들인 가봐. 도대체가 말이 먹히지 않아."
"음... 그렇게 바보라고 말하긴 문제가 있소이다."
하운의 말에 북궁단야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아니, 남이 뭘 가지고 있든 부당한 방법으로 취득한 것도
아닌데 왜 남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거야? 지들이 뭔데? 웃기지도
않아, 정말!"
액면대로만 본다면 장추삼의 말이 옳다.
"물론 장 형의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오. 너무 정확해서 탈이지.
문제는 그 책 때문에 벌어진 이전의 참사에서 아직까지 자유로울 수 없
고 무림맹에서야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나서는 거라오."
하운의 장황한 설명을 멀뚱히 듣던 장추삼이 갑자기 박장대소를 터
뜨렸다.
"푸하하하! 무림맹이 나선다고? 나서는 방법이 비천혈서의 회수와
보관이라는 거야? 아아, 별로 오래 산 인생은 아니지만 오늘 들은 말
은 그야말로 '내 생애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한
걸!"
미친 듯이 웃던 장추삼이 철면자와 알고자를 바라보고는 오른쪽 입
술을 비죽이 올렸다.
"이 장추삼이라는 놈이 비록 바보이기는 해도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
길 정도로 맛이 가지는 않았거든. 비천혈서가 있든 없든 그 문제에 관
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할 것이 없어."
두 도사가 뭐라고 하려는데 그의 뒷말이 작게 이어졌다.
"다 때가 있는 거야. 나중에 하자고, 나중에......."
첫댓글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