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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7일 금요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제1독서 : 코헬 3,1-11
복 음 : 루카 9,18-22
18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9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22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오늘 독서에서는 코헬렛의 신앙이 드러납니다.
그가 모든 것을 파악하지 못하면서도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코헬 3,11) 만드셨다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고에 대한 갚음도 곧바로 눈에 보이지 않고,
모든 일의 “때”도 인간이 다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일을 하는 것이 적절한지 아니한지,
지금 일어난 이 일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인간은 다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좋은 일이라고 쉽게 판단을 하지만,
그 일이 장차 가져올 모든 결과를 다 알고서 하는 판단은 아닙니다.
시간이 더 지난 뒤에 보면 그 일 때문에 좋지 않은 결과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지금 행한 일이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가져올 모든 결과를 계산하지 않고서는
행동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한계를 지닌 인간이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제 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다 보고 알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다 파악할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비관적이고 허무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는 코헬렛의 신앙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코헬렛을 의심스럽게 볼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와 코헬렛의 차이는 우리가 큰 비극들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다고 느낀다면,
코헬렛은 훨씬 작은 일에서도 그렇게 느꼈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코헬렛은 자기가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교만을 버립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어도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제 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시는 분이심을 믿을 따름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두 아빠 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아빠 곰에게는 각기 아들 곰이 있었습니다.
한 아빠 곰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일 물고기를 잡아다 먹였습니다.
다른 아빠 곰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매일 잡아다 주는 물고기를 먹었던 아들 곰은 자기 아빠 곰이 최고라고 늘 외쳤습니다.
그러나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아빠를 둔 아들 곰은
힘든 사냥에 투덜거리면서 불평을 이야기했습니다.
왜 다른 아빠 곰과 달리 직접 사냥하는 방법만 가르쳐주냐고 했지요.
그래도 아빠 곰은 그때마다 인내를 가지고 아들을 가르쳤습니다.
시간이 흘러 두 아빠 곰은 늙었고 자기 힘으로 더는 물고기를 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물고기를 받아만 먹던 아들 곰은 투덜거렸습니다.
이 아들 곰은 물고기를 잡을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냥을 배운 아들 곰은 아빠를 위해, 자기를 위해
그리고 더 나아가 자기 새끼를 위해 사냥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이 중요한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넘어지지 않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넘어져도 일어서는 방법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실제로 주님의 훈육법은 넘어져도 일어서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통과 시련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주님과 함께했던 사람은 일어나는 법을 압니다.
계속해서 우리 삶 안에서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은
불평불만만을 이야기할 뿐,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아마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하면서 뿌듯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군중의 반응이 좋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렇게 영광만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을 들으신 뒤에,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즉,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꽃길만 있을 줄 알았는데, 가시밭길을 이야기하십니다.
이는 곧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먼저 수난과 죽음으로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지금 삶을 잘 살 수 있는지를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무조건 영광의 길만 주어지지 않습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상징되는 십자가를 짊어져야 부활이라는 참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어제 복음에서는 궁중들과 헤로데가 예수님을 누구라고 여기는지를 보았습니다(루카 9,7-9).
오늘 복음은 군중들과 제자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여기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군중들은 예수님을 단지 ‘예언자’ 차원에서 이해했을 뿐 메시아로 인식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바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당신을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고 고백했을 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습니다(루카 9,21).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선언은
이미 천사들과(2,11) 예언자 시메온과(2,26) 마귀들에게서(4,41) 선언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을 뿐입니다.
제자들 또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라고 고백하지만, 잘못 알아듣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이 바라고 있는 그리스도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곧 예수님을 민족적이고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그리스도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직접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를 깨우쳐 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몹시 당혹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바라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9,23-29).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반드시 ~해야 한다.”(Dei)라는 표현입니다.
바로 이 표현에 ‘아버지 절대 복종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맞게 될 일을 네 개의 동사,
곧 '고난을 겪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되살아난다'로 표현하십니다.
‘고난을 겪는 일’이란 한 두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로 많은 고난을 여러 차례 겪는 일입니다.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 겪는 일입니다.
그리고 기꺼이 자발적으로 겪는 일입니다.
그 고난은 여타의 다른 것이 아니라 ‘배척을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죽임을 당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 일은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벌어지고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여 겪는 일입니다.
곧 자신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분을 죽기까지 믿고 복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다시 살아나는’ 일입니다.
믿음과 복종으로 다시 살아나는 일입니다.
이는 “믿음은 행위 속에서만 믿음일 수 있다.”(본회퍼)는 말을 떠올려 줍니다.
마치 한 알의 밀알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듯이,
믿음의 복종은 결코, 시들지 않는 생명으로 되살아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반드시' 살아야 할 믿음과 복종의 삶입니다.
그래서 본회퍼는 말합니다.
“믿는 사람은 복종하고, 복종하는 사람만이 믿는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루카 9,22)
주님!
오늘도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갑니다.
당신께서 ‘반드시’ 걸어야 했던 길이기에 당신을 따르는 이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한두 번 겪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고난을 죽을 때까지 겪는 일입니다.
어쩔 수 없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흔연히 끌어안고 겪는 일입니다.
그러니 배척받으면서도 배척하지 않으렵니다.
죽어 사라지기까지 사랑하렵니다.
당신과 함께 그러하게 하소서. 아멘.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옛 예언자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내 생각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여러 활동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관해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침을 받은 것에 상응하는 답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9,20). 하고 고백했습니다.
‘하느님의 기름 부음 받으신 이’라는 이 말은 이사야의 예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이사야61,1).
베드로의 고백은 완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 고백은 힘을 잃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임금으로 정하신 분"입니다.
낚싯바늘만 있고 미끼가 없는 낚싯대, 아무리 낚싯바늘이 좋아도 고기가 물지 않습니다.
말만 있고 행동이 없으면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면 그에 걸맞은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기름 부음 받은 이’ 앞에서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내 행동 하나하나가 예수님에 대한 내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나는 주님의 손에 들린 몽당연필입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수녀님은 연필을 잡은 주님 안에서 기뻐했습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무엇입니까? 나에게 있어서 주님은 도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자신을 ‘예수님의 데레사’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을 고백하지 말고 내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이사야53,4).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받은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이사야 53,3).
‘그는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이사 53,8). 그러나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이사53,11-12). 라고
선언한 이사야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 속죄의 제물이 되시고 부활의 기쁨으로 다시 오신 주님,
그분을 우리의 주님으로, 저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기쁨이 더욱 커지시길 기도합니다.
일상 안에서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내 할 일 다 하고 짬이 나서야 그분을 생각하는 처지가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도구로 삼아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먼저 감사하고,
다른 무엇에 앞서 주님의 거처를 마련했으면 좋겠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묵시21,3).
주님께서는 나의 삶의 자리에서 나를 찾고 계십니다.
내가 그분을 찾기 훨씬 전부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불가항력(不可抗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은 불가항력입니다.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것도 불가항력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배 골프대회를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휴스턴, 오클로하마, 포트워스, 오스틴에서도 참가해 주었습니다.
160명이 참가 신청해 주었습니다.
경품도, 티켓도 잘 마련했고, 골프장도 멋진 곳으로 예약했습니다.
아쉽게도 일주일 전부터 확인했는데 대회 당일에 비 소식이 있었습니다.
일기예보는 정확했고, 비가 내리는 중에 골프대회를 시작했습니다.
비가 내리는 중에도 150명이 참가해서 골프대회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비가 오는 중에도 끝까지 함께 해준 참가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행사 준비를 위해서 애써 주신 준비위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최선을 다했으니, 결과는 하늘의 뜻에 맡기는 겁니다.
달라스 날씨가 무더운데, 비가 내리니 오히려 시원하고 좋았다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골프대회를 통해서 수익금은 필요한 곳에 나누어 주고,
교우들은 친교를 나누고, 교우가 아닌 분들에게는 교회를 알릴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저는 ‘까르페디엠(Carpe Diem)'이란 말을 좋아합니다.
라틴어인 이 말의 문자적 뜻은 “현재를 잡으라.(Seize the day)”는 말입니다.
즉, “현재를 신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라.” 그리고 “오늘을 견뎌라”는 속뜻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있음을 항상 기억하는 사람은
지금 내게 주어진 삶을 낭비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며 현재를 견뎌냅니다.
오늘은 그날을 준비하는 유일한 기회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한 이 말이 다시 소환된 것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오늘을 즐겨라(Carpe Diem)'라고 말하면서입니다.
저는 이 말을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고 번역하고 싶습니다.
골프대회 날, 비가 오는 걸 원망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계절을 바꿀 수 없다면 바뀌는 계절을 즐기는 것이 좋습니다.
비가 내렸지만 바람은 별로 없었고, 내리는 비도 과하지는 않았기에
골프대회를 잘 마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비가 내리니 오히려 차분해져서 좋았습니다.
불가항력이라는 말에서 겸손함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에서 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까르페디엠이라는 말에서 삶의 지혜를 배우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도 삶의 지혜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고통 때문에 너무 가슴 아파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고통 때문에 실망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르는 고통 때문에 좌절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욥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했다면,
하느님께서 나에게 나쁜 것을 주실지라도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에 올 때 빈 몸으로 왔으니, 이 세상을 떠날 때 빈 몸으로 가는 것도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세상의 평가와 세상의 가치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엘리야라고 하든, 세상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든,
세상 사람들이 예언자 중에 한 명이라고 하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잘못한 이웃을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라도 가주라고 하십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 해서는 안 되는 일은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위선은 따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악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참으로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은 하고, 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고,
해야 할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식별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백성의 구원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
내가 이곳에 평화를 주리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하신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8절).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십자가의 길을 향해 가시며,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셔야 하는 중요한 때에
당신의 존재를 올바로 알고 있는지 물으신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19절)
예수께서는 이 소문에 대해 무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왜? 그 소문은 언급할 가치도 없이 틀린 소문이기 때문이다.
그 답에 즉시 예수께서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20절).
하느님의 기름 부음을 받아 그리스도라고 불린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의 그리스도이신 분은 오직 한 분이시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20절) 라고 정확하고 올바르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시기 전에 예수께서는 빵의 기적으로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제자들은 그 기적에 놀랐고,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이시면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지 않도록 칭송을 받으려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분부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길이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분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죽임을 당하는 길로써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길이기에
그리스도를 다른 뜻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함구하라고 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까지도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믿기 어려워하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도 그 길을 따라 걸을 때, 우리도 영광을 입을 것이다.
제자들에게 함구하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선포해야 할 내용 가운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와 수난과 육신의 부활을 선포해야 했다.
제자들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을 선포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도 잘못하면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아
그리스도를 올바로 고백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그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 더 성숙해지고 더 큰 그릇이 되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수많은 성인성녀들 가운데 빈첸시오 드 폴처럼
기구하고 파란만장한 생애를 사신 분은 드물 것입니다.
사제품 이후 좀 더 깊이 있는 신학 공부에 매진하고 있던
빈첸시오 드 폴에게 한 가지 좋은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마르세이유의 한 귀부인이 학비에 보태라고 거금의 유산을 기증하겠다는 것입니다.
한걸음에 달려간 그는 두둑한 봉투를 건네받고 품에 간직한 채 배를 타고 돌아오던 중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해적선의 습격을 받아 돈뿐만 아니라 지니고 있던 모든 소지품마저 탈탈 털리고 말았습니다.
불행은 한꺼번에 몰려온다고,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온몸은 굵은 철사 줄에 꽁꽁 묶여 아프리카로 끌려 갔습니다.
그는 순식간에 전도양양하던 사제에서 노예 신세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는 선주의 손에서 의사의 손으로, 의사의 손에서 농사꾼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다행히 좋은 주인을 만나 기적과도 같이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젊은 사제 시절 빈첸시오 드 폴이 겪었던 특별한 바닥 체험은
그의 성소 여정을 더욱 굳건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저 같았으면 그런 불운을 겪게 해주신 주님과 해적들을 원망했을 텐데,
오히려 그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 더 성숙해지고, 더 큰 그릇이 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불행한 사람들만 만나면 빈첸시오 드 폴은 자신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 청년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이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사랑과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빈첸시오 드 폴은 당시 사회 안에서 넘쳐흐르던 고
아들과 과부들, 환우들과 임종자들, 노예들과 재소자들, 걸인들과 병든 나그네들을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여기고 섬겼습니다.
한 가장이 잘못을 저질러 교도소에 수감 되었는데,
그가 없으면 부인과 어린 자녀들이 굶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이 빈첸시오 드 폴에게 전해졌습니다.
저 같았으면, 부인과 어린 자녀들을 위해 금일봉을 전달하는 선에서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도소 당국에 부탁해 가장을 석방시켜주도록 탄원했습니다.
남은 형기는 자신이 대신 뱃사공 역할을 하며 채워주었답니다.
참으로 위대한 자비의 성인, 빈첸시오 드 폴 사제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가난’ ‘자선’하면 즉시 떠오르는 얼굴이 바로 그의 얼굴입니다.
그의 생애와 영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예수님의 모습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온통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웃들을 향해
아낌없이 조각나고 나눠진 거룩한 성찬의 삶, 빛나는 자선의 삶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웃들을 향한 자비심, 연민의 정, 측은지심이 많이도 결핍된 우리입니다.
피눈물 흘리는 이웃들, 죽어가는 이웃들의 고통 앞에서도
무덤덤한 우리를 향해 빈첸시오 드 폴 신부님은 외치고 계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스승이고 주님이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할 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9,20)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은 누구신가?, 라는 이 단순한 질문에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사실 복음서를 집필한 네 명의 복음사가들은
후대 사람들의 의문에 대해 많은 정보나 힌트를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 생애의 거의 95%는 복음서의 기록에서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구원과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음을 시사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12,8)
지금, 이 순간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신지 물으신 것처럼
우리에게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먼저 G.K. 체스타톤의 다음 글을 읽으면서 대답을 위한 힌트를 얻길 바랍니다.
『우리가 모르는 어떤 사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다.
어떤 사람은 그가 키가 크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작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그가 뚱뚱해서 싫다 하고, 어떤 이는 그가 너무 말라서 안 됐다고 한다.
누구는 그의 피부색이 너무 검다고 말하고, 누구는 너무 창백하다고 말한다.
그런 말들을 들으면 우리는 황당해한다. 이런 경우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 그가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설명도 가능하다.
그는 제대로 된 사람일지 모른다.
(...) 간단히 말해서 어쩌면 이 비범한 존재야말로 정말 평범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가장 정상적이며 중심을 지키는 사람 말이다.』
이어서 윌리암 블레이크의 다음 글 또한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대가 바라보는 그리스도의 형상은 내가 보는 형상과 전혀 반대라네.
그대의 그리스도는 그대처럼 매부리코, 나의 그리스도는 나처럼 들창코,
둘 다 밤낮으로 성경을 읽건마는 그대가 검정이라고 읽을 때 나는 흰색이라고 읽네. 』
위에 언급한 내용을 마음에 간직해 놓고 잠시 상상해 보도록 합시다.
지금 어떤 사람이 자기 방의 창문을 통해서 밖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파트가 높이 서 있어 이젠 거리를 볼 수 없지만, 거리를 바라보고 있다고 말입니다.
거리에 있는 어떤 사람이 손으로 햇빛을 가리키며 하늘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파트 건물에 가려서 그 사람이 무얼 가리키고 있는지
자신의 방 창문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어떤 것도 보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오신 지 2000년 넘은 오늘이란 시점, 시간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도 창가에 서 있는 어떤 사람과 비슷한 입장입니다.
윌리암 블레이크의 시에 잘 드러나듯이, 우리는 때론 눈앞에 보이는 예수님만을 찾고 있는지 모릅니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역사학자인 ‘바버라 터크만’이라는 분은
역사를 기술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한 가지 규칙이란
다름 아닌 『앞으로 빨리 감기를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훌륭한 역사학자는 그 역사적 사건의 분위기를 재창조해서
『독자가 마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과거 교회의 역사는 터크만의 주장과는 반대의 길을 걸어왔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이해하기 위해 ‘앞으로 빨리 감기’의 시각을 견지한 채,
복음서를 연구하고 가르쳐 왔는지 모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는 예수님의 질문을 받고
우리 모두 ‘앞으로 빨리 감기’ 식의 통상적인 대답이 아닌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듣고 보고 느끼고 만져 보면서’ 대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다.”(9,18)라는 표현처럼
무엇보다 먼저 기도 안에서 주님을 만나야만 하겠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기도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빨리 감기식의 영혼이 없는 주입된 대답이 아닌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만남을 통한 살아 있는 대답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9,20)하는 질문은 관계적인 질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 자체가
바로 우리가 누구를 믿고 있으며, 또한 내가 누구인지, 를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통해서 믿음의 핵심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이다, 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12,8)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 당신이 누구이신가를 알 수도 없고 알지도 모르지만,
아빠 하느님께서 베드로에게 가르쳐 주신 것처럼 저희도 그런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인간관계 쉽게 끊는 것도 문제지만 못 끊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전삼용 요셉 신부
베토벤과 그의 조카 카를 판 베토벤(Karl van Beethoven)과의 관계는
그의 개인 생활과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그에게 큰 정서적, 육체적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베토벤은 1815년 그의 형이 사망한 후 카를의 양육권을 얻는 데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베토벤은 카를의 어머니에 대해 깊이 불신하고 있었고
그녀가 아들을 키우기에 도덕적으로 부적합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칼의 완전한 양육권을 놓고 그녀와 길고도 격렬한 법적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 양육권 싸움은 베토벤의 시간, 에너지, 재정적 자원을 많이 소비했습니다.
그것은 수년 동안 계속되었고 종종 그의 음악 작업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의 우울증과 좌절감은 끊임없는 법적 논쟁으로 인해 더욱 악화하였습니다.
베토벤이 양육권을 얻은 후 칼과의 관계는 이상적이지 않았습니다.
베토벤은 그의 조카에 대해 높은 기대를 하고 있었고
그를 교양 있었고 도덕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칼은 까다롭고 반항적이며 베토벤이 꿈꾸던 삶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칼을 징계하고 통제하려는 베토벤의 시도는 종종 둘 사이에 긴장을 초래했습니다.
베토벤은 소유욕이 강하고 위압적이어서 그들의 관계가 긴장되었습니다.
칼에게 엄격한 양육을 제공하려는 베토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칼은 종종 삼촌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칼이 베토벤에게 끼친 가장 비극적이고 직접적인 영향은 1826년에 일어났습니다.
칼은 그에게 가해진 압력과 기대에 대처할 수 없어 머리에 총을 쏴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다행히 그는 살아남았지만, 이 사건은 베토벤을 황폐화했습니다.
그는 칼의 불행에 대해 개인적 책임을 느꼈고,
실제로 베토벤은 카를의 자살 시도 이후 건강이 악화하여 몇 달 뒤인 1827년에 사망했습니다.
베토벤의 죽음의 원인을 조카에 대한 집착으로 볼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자기 책임하에 놓으려고 하는 것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했음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조카는 삼촌의 음악을 본받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모든 책임은 베토벤에게 있는지 모릅니다.
끊어내야 할 사람을 끊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집착 때문에 얼마나 큰 피해를 보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아내나 형제, 자녀의 잘못 때문에 정치 인생을 망치기도 합니다.
만약 나라를 위한 정치를 한다면 기회가 있을 때
비록 가족이라도 그 사람을 끊어냈어야 옳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냐고 물으십니다.
다른 이들은 요한이 살아났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나 다른 예언자가 살아났다고들 하지만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에게 ‘당신이 메시아란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이르시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당신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지만
왜 여기서는 당신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시는 것일까요?
이 말씀 전에 예수님은 5,000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신나있을 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신을 따르는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함구령이란 당신을 위해 십자가를 질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당신을 안다고 말할 자격도 박탈하시는 것입니다.
자칫 당신이 이용당하여 목적을 완수할 수 없게 되고
또 그 사람에게도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쉽게 끊는 것도 문제지만 못 끊는 것은 더 큰 문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도 주교님에게 전화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저의 이름을 대면서 아주 잘 아는 사이고
책을 쓸 때 조언도 해 주었기 때문에
머리말에 저의 이름도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구에서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그 사람이 강의하고 책을 파는 것을 금하려는 때였습니다.
저는 그 신자를 압니다. 책을 쓸 때 조언도 해준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왠지 자신을 위해 저를 이용하지,
저의 생각으로는 한 발자국도 다가오려 하지 않는 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래도 인연이 중요하다고 여겨 계속 그 인연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자칫 저도 그 일 때문에 혼이 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절연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전혀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나를 아는 것에 대해 말할 자유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더 큰 일을 할 미래를 위해 그 사람을 끊어내야 합니다.
사랑은 무능력이나 우유부단 함이 아닙니다.
사명이기에 그에 어긋나는 것은 가차 없이 끊어낼 줄도 아는 일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