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100문 100답
발행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ㅣ편집 사무처ㅣ삽화 박건웅ㅣ발행일 2004년 11월 17일
3편 : 불안정한 해방정국에서 학살은 이미 시작되었다.
22.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 노동자 대학살 (화순탄광 노동자학살)
1946년 8월 15일 광주 8.15 기념식에 참석하려던 3천 화순탄광 노동자들을 미군 제40사단이 토끼몰이 하듯 쫓는 과정에서 김판석 씨 등 여러 명이 미군 총에 맞아 사망 또는 실종되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습니다. 공장 자주관리를 추구하던 당시 전국노동조합평의회에 대한 미군의 와해 작전의 일환으로, 해방 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면서 자행한 최초의 민간인학살 중 하나입니다. 이 사건 후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라는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23. 전선이 형성된 적이 없는 독도에도 폭격은 쏟아지고 (울릉도, 독도 폭격)
독도 인근 해역에서 조업중이던 어선에도 미군은 전쟁 발발 전부터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여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알려진 것만도 1947년 4월, 1948년 6월 8일, 1952년 9월 15일, 1952년 9월 22일 네 차례입니다. 우리나라의 동쪽 끝에서 일어난 독도 학살은 전선과 무관한 비전투 지역에서 발생한 것이 특징인데, 미군은 조업 어부에 대해 어떤 보호조치도 취하지 않는 등 인종차별적 시각을 드러냈습니다.
24. 대구의 진보인사를 싹쓸이하다
(대구 10.1사건)
대구 지역 중심의 1946년 '10월 항쟁' 이후 미군정과 경찰은 수천의 관련자들을 검거하여 그중 수백 명을 처형했고, 진압과 검거 과정에서도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습니다. 또 항쟁에 연루되어 형무소에 갇혀 있던 이들과 풀려났다가 뒤에 국민보도연맹에 강제 가입된 이들도 전쟁 발발 후 모두 학살당했습니다. 대구시와 인근의 가창, 월배, 본리동, 성서, 칠곡, 경산 코발트 광산 등이 이와 관계 있는 주요 학살지입니다.
25. 제주 4.3사건도 여기서 말하는 민간인학살 사건인가요?
제주 4.3사건의 비극은 1947년 3.1절 행사중인 제주도민을 미군정이 강제해산시키고 이들을 향해 발포하면서 시작됩니다. 이 발포사건에 항의하여 곧 총파업이 단행되었고 경찰과 서북청년단은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합니다. 결국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1948년 4월 3일 탄압에 항의하고 단선단정에 반대하며 봉기를 하게 되고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개방 될 때까지 무장대와 토벌대는 끊임없이 무력충돌을 거듭합니다. 이 과정에서 최소 3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합니다. 당시 미군정은 얼마 안 되는 무장대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제주도민 전체를 상대로 '빨갱이 사냥'에 나섰으며 육지에서 온 토벌대는 약탈, 폭행, 방화, 살해 등의 범죄를 수없이 저질렀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를 없애더라도 미군정에 빌붙어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고 이는 당시 경무대장이던 조병옥이 "대한민국을 위해 전 도에 휘발유를 부어 30만 도민을 모두 죽이고 모든 것을 태워버려도 좋다"라고 말한 데서도 드러납니다. 요! 컨대 제주 4.3사건은 대표적인 민간인학살 가운데 하나입니다.
26. 여순사건은 군대의 반란 사건 아닌가요? (여순사건)
1948년 10월 19일 당시 여수에 주둔중이던 국방경비대 14연대는 제주 4.3사건의 진압 출동 명령을 받고 "같은 민족에게 총을 쏠 수 없다", "미제 침략 반대", "단선단정 반대"를 내걸고 부대를 이탈합니다. 반군은 20일에 여수시를 장악하고 곧이어 순천, 구례 등 전남 동부지역 전체를 장악합니다. 하지만 10월 27일 진압군이 여수시를 완전 진압하면서 사건은 종료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학살은 오히려 진압 이후에 대대적으로 자행되는데, 진압군은 부역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수많은 민간인을 잔인하게 학살했고 산으로 들어간 잔류부대원과 공비들을 소탕한다며 마을 주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했습니다. 이렇게 학살당한 민간인의 수는 여수, 순천, 구례, 광양, 보성, 고흥 등지에서 약 1만 명에 이릅니다.
27. 지리산에 사는 죄? (산청, 함양)
빨치산 토벌차 지리산에 온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는 1949년 7월 18일 산청군 시천면 신천리 설통바위 부근에서 매복중이던 공비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국군은 이 사건을 통비분자에 의한 것으로 보고 200여 명의 마을주민을 통비분자로 몰아 학살합니다. 이 밖에도 여순사건 이후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군에 의한 주민 학살 사건은 수없이 많습니다. 이런 식으로 지리산에 사는 '죄'밖에는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28. 이발사의 외상장부가 살생부가 되다 (함양 도북마을 학살)
도북마을 학살은 1949년 9월 20일 낮 12시경 마을 주민 32명이 수동면 당그래산에서 빨치산 내통 혐의로 학살당한 사건입니다. 사건 발생 직전에 마을 이발사 정주상이 경비병에게 붙잡혀 경찰서로 넘겨졌는데 당시 지서장 최홍식은 빨치산 내통자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이 사람 저 사람을 끌어들이는 참이었습니다. 결국 이발사의 외상장부에 적힌 마을 주민 32명이 고스란히 산으로 끌려가 학살당했습니다.
29. 전신주보다 못한 목숨
(고흥 전신주 사건)
1949년 5월 3일 밤 전남 고흥군 과역면 도천리와 남양면 노송리 경계 지점에서 전신주 약 10주의 전선이 절단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빨치산은 토벌대의 연락망을 교란하기 위해 전선을 절단했고 이에 경찰들은 전신주마다 주민 한 사람씩을 붙여서 지키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전선 절단 사건이 발생하면 주민들을 빨치산 내통자로 몰아 살해하곤 했습니다. 당시 고흥경찰서에서도 5월 9일 마을 주민을 다수 연행하여 고문한 후 주민 6명을 학살했는데, 전남 동부 전역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30. 토벌대인가, 학살부대인가?
(문경 석달마을 학살)
석달마을 학살은 1949년 12월 24일 정오 24가구에 127명의 주민이 거주하던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동에 국군 2사단 제25연대 3대대 7중대 2소대의 무장군인 70여 명이 느닷없이 들이닥쳐 자신들에게 대접이 소홀하다는 것을 트집잡아 주택 24가구 전체를 불태우고 주민 전체를 마을 앞 논바닥과 마을 뒤 산모퉁이 두 곳에 모아놓고 학살한 사건입니다. 마을 뒤 산모퉁이에서는 석봉리 동회에 참석했다가 귀가하던 청장년들과 학교에서 하교하던 어린 초등학생들까지 학살되었는데, 단 2시간 만에 마을 주민 86명이 학살당했고 이 중 32명은 15세 미만의 어린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