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산읍은 예로부터 인재의 고장으로
영남문화의 중심지로서 빛나는 문화유적과 영천강변의 기름진 옥토로
일찍이 풍요를 누리며 찬란한 농경문화를 꽃피워 온 고장입니다.
세대수 : 3,149 세대
인구수 : 8,356명( 남 4,156, 여 4,200)
면 적 : 40.94㎢ ( 주거 0.75, 공업 0.05, 전 4.07, 답 7.11, 임야 23.08, 기타 5.88 )
행정구역 : 8리 49반 28개 자연마을
文 山 邑
1.沿革
조선조 전기까지는 晋州牧 東面 法輪里 屈谷里라 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法輪·屈谷里에 합하여 槽洞里라 하였다.
순종32년(1832) 이래로는 召村里 葛谷里 槽洞里(일부)라 하였고. 고종
1년(1864) 이후 구한말 때까지는 召村面(갑오경장 이후 文山面으로 개
칭) 葛谷面 槽洞面(일부)이라 하였다.
1914년 4월 1일 晋州郡 文山面 葛谷面과 槽洞面 耳谷面 松谷面 각 일
부 등을 통폐합하여 文山面이라 하엿다.
그리고 文山面 二洞一洞 槽洞面과 葛田洞 束莎洞 각 일부로서 蘇文里
라하고 文山面 象耳洞 一洞 일부로서 象文里라하고 文山面 三洞 일
부 耳谷面 堤谷洞으로서 三谷里라하고 文山面 三洞, 松谷面 亭子洞
耳谷面 魚數洞 耳谷洞 각 일부로서 耳谷里하고 葛谷面 外洞 東谷洞
松谷面 松谷洞 일부로서 安全里라하고 葛谷面 內洞 上村洞으로서 葛
村里라 하여 6里로 개편되었다.
1973년 7월 1일에는 井村面 玉山里와 冬勿里가 편입되었다
1995년 3월 1일에는 시조례제132호('95. 2. 28공포)에 의하여 邑
으
로 승격
1995년 11월 1일에는 시조례제149호('95.10.17공포)에 의하여 葛村
里는 葛谷里로 冬勿里는 斗山里로 개칭되었다.
상 문 리
1914년 진주군 문산면 상이동 일동 일부로서 상문리라 하여다
상이 : 형태가 코끼리 귀처름 생겼다고 하여 상이마을 이라고 이름 지었다 한다 옛날 진주에서 등짐 장사꾼이 새벽 일찍이 먼동이 뜨기전에 마산 방면으로 장사길을 떠나서 상이 마을에 이르면 날이 새어야 귀내고개을 넘어다고 한다 날이 새는 이 마을을 <새태> 라고 하여 이말이 널리 알려져 왔다
빈대골 :법륜사가 있던 골이다 이절은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된 사찰로서 임진 왜란때 폐사되어 산 중턱에 절터만 남아 있다 페사된 원인은
빈대가 극심 해다는 설도 이고 임진왜란때 승려가 모두 승병으로 출정하고 절은 소실 되었되어다고 하는 설이 있으나 이곳 에서는 사찰터 부근을 빈대처 라고부른다 지금도 돌밑 에는 빈대 껍질이 붙어 있다
조선조 말기 까지 13층 석탑이 남아 있어서나 상문리 2번지 소재 두방사에 옮겨져 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
애티고개: 문산면과 진성면 간의 면 경계를 이루고 인는 고개 이다
일명 귀내고개 라고도 하며 국도가 개설 되기 이전에는 길이 험하고
고개가 깊었으모로 혼자서는 도적 떠나 맹수 때문에 넘지을 못해다고 한
다
가는골 :귀내고개 아래에 위치한 가늘고 길게 꼬부라진 골짜기이며 6.25
사변당시 많은 시체가 묻힌 곳이기도 하다
중티 :상문리 동편에서 갈촌리로 넘어가는 막다른 골짜기의 고개이다
이고개의 정상에는 진양 보육원이 있으며 서쪽 아래에 중티 못이 있다
황서방 갓골:황씨 성을 가진 사람이 골짜기에 자기소유의 산이 많았다고하는데 이런 연유로 붙여진 골짜기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실밤실 :세율골이 언제부터인지 근거는 없으나 토박이로부터 바 뀌어 불러진 이름 이다 6 25사변 당시 는 골짜기가 길고 산이 무성할 뿐만 아니라 산정은 사방의 동정을 살피기 좋은 곳으로서 유일한 피난지 였다고 한다 70년때을 전후 하여 단감 배 가수원 으로 개간 되었다
후도골 :법륜고개 북쪽에 위치한 골짜기 이다 논 밭에 일 하려 나온 농
부 들이 가져다 노은 점심 참을 지나가던 길손이나 도적 들이
훔쳐 먹다가 일하던 주인이 보고 멀리서 소리치면 도망 쳤다고
하여도적을 쫓는 골짜기라고 후도골 이라 이름되었다고 한다
막대는골:상문리 동쪽에 있는 아주 험한 골짜기이다 고개만 넘어면 진성
면이다 문산에서는 막다른 골짜기라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늦은티: 경사가 완만한 늦은 고개라 하여 늦은티 라고한다 상이 마을
안골짝을 물통 골이라 한다 골짜기 막바지에 위치한 이늦은티가
문산과 진성의 경계이다 1974년에 남해안 고속도로를 개설할때
상행선 550 M 하행선 719 m 의 문산<진주> 터널이 관통되었다
깐치골 : 진성 면으로가는 국도 왼편 골짜기가 까치처름 생긴 지형이
이라고 붙여진이름 지금은 이골짜기에 진주전문대학이 있다
부치네이: 상이마을 동쪽에서 진성으로가는 국도변 골짜기 일대을 말
함 1990년초 진주에 있던 실업 전문대학을 1993년에 이곳에
옮기면서 교명을 진주전문대학 이라고 하여다
보림보리:부치네이 아래에 있다 문산에서 갈촌방면과 진성면으로 가
는 삼거리 갈림길 일대을 이르는 말이다
다악실 ;상이마을 앞선 넘어 동쪽에 닭 형태로 생긴 골짜기로서 계곡
즉 닭실인데 방언이변해 불려진 지명이다 골짜기에 계곡소류
지도 있다 80년대말 이곳에 아스콘 공장을 건립하여다
성지골: 수원이 높아 물이 마르지 않는 약수터골이라하여 성지골 이라고
한다
미마이 :상이마을 동남쪽 철도 건너편에 위치한 언덕이다 지금은 단감
밭이 되어 있다
오지미(집)터:두방사 뒷산중턱에 움막을 쳐놓고 산채도 캐고 산양을 방목
하여 생계을 유지하는 오지미 라고 별명을 가진 사람이 살던 집
터라고하여 오지미 집터라고 불려지고있으며 그분의 성은 김씨
이며 지금도 그 움막 집터가 남아있다
부동: 문산에서 제일먼저 정착된 주거지역 으로 마을 뒷산이 가마솥을
뒤집어 놓은 것같아 보인다하여 옛날 이름인 가매실을 부동이라고
부르게되었다 또 일동네 라고 불려도 부동마을 이라고 알고 있다
가매실골:지형이 가마솥처름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세월이 흐름으로
가암시골 이라고 부러기도 한다
밭뚝 ;일동네(부동)앞들에 있는 제방을 가리키는데 옛날에 남산아래쪽으
쪽으로흘려가는 냇물을 논 밭에 돌려대기 위하여만들어진 재방
이다 일동네 밭뚝이라고 하면 의례이 부동 마을 인줄 안다
댓방골 : 꼬불꼬불하고 길쭉한 경사진 골목이 부동마을과 주정마을을 갈
라놓고 있으며 옛날 언제인가는 모르지만 골목어귀에서 담뱃대
를 만드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이름이다.
적광사 : 부동마을 북쪽 서지골의 산기슭에 있는 절이다.
"서지"는의 방언인데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1930년을 전후하여 서당이 폐쇄되고
그 자리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아우실 : 부동마을의 동북쪽 등넘에 있는 긴 골이다. 와우곡(臥牛谷)의 방언
으로서 소가 누워있는 형태의 골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
쪽 산등성이는 상문리 공동묘지로 되어있다.
굴바우 : 아홉실 안골에 있는 바위굴이다. 얼마나 굴이 깊던지 굴 입구에다
불을 지피면 금산면 금호못(池) 뚝에서 연기가 난다는 전설이 있다.
새미실 : 천곡(泉谷)의 방언이다. 상이마을 남쪽 경전남부선 철도의 건너편에
위치한 산과 골짜기를 말한다.
장사바우 :「새미실」산 중턱에 잇는 바위이다. 어떤 장수가 그곳 바위 옆을
지나다가 미끄러져 얼떨결에 바위에다 손을 짚었는데 그 바위 복판에
손자욱이 지금도 남아 있다.
벅수골 : 마산쪽에서 상문리 부동마을 입구에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안
치되어있다. 이 대장군의 토속적인 방언이 「벅수」라 함으로서 붙여
진 이름이다. 매년 정월 대보름날이면 마을사람이 모여 동제(洞祭)를
모신다. 그러므로써 온갖 잡귀(雜鬼)가 마을에 침범못하고 농사도 풍
년이 평온한 마을이 되기 때문이다.
정기 : 상이마을 이북 지점을 말한다. 거기에는 200여년 된 큰 느티나무 2그
루가 있었다. 이 느티나무를 방언으로 「정기」나무라 하며 그로 인
해서 생긴 지명이며 마산 진주간 국도 확장공사 때 채벌 되었다.
주정(廚井) : 부동(釜洞)과 관정(官井)과의 경계를 이룬 마을이다.
시종골 : 주정마을과 관정마을의 경계를 이루는 길다란 길목이다. 골을 지나
마을 뒤산의 산지꼬·뒷대꼬를 거쳐 청곡사 월아산 산정으로 가는 길
목이다.
소문리(蘇文理)
1914년,진주군 문산면 일동(一洞), 이동(二洞), 조동면 갈전동( 洞面葛田洞), 속사동(束沙洞) 각 일부로서 소문리(蘇文理)라 하였다.
관 정 : 지금의 성당(聖堂)터는 본시 관가였다고 한다. 그 안에 물맛이 좋은 우물이 있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이 관정이라고 하였다 한다.
깽 문 : 일면일촌(一面一村)으로 초가집이 많기로 유명하였던 곳이다. 이 마을은 두방사(杜芳寺) 골짜기에서 성시골을 지나 일동네를 거쳐 이 동네, 삼동네의 복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문산천(文山川)이 있는데 언 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이 마을에서는 깽문이라고 부르고 있다. 극심한 가뭄을 당하게 되면 민속놀이보다도 오히려 기우제(祁雨際)의 행사 (行事)로 이 깽문에서 줄싸움을 할 때만 필요하다는 웃몰(윗마을), 아 랫몰(아래마을)로 옛날부터 편이 갈라져 있다. 웃몰은 청룡이고 아랫 몰은 황룡이다. 양편에서는 여러날 걸려 마을에서 모여진 볏짚으로 새끼줄을 한데 뭉쳐 만들어진 용줄을 뻗쳐 놓으면 크기가 용머리 줄 의 너머에 서있는 장정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고 길이는 200m을 넘는 큰 줄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청룡, 황룡 줄은 양편에서 동원된 장정들 이 어깨에 메고 가뭄에 마른 깽문 싸움터까지 운반된다. 이때 흥이 오른 장정들에게서 용연가(龍緣歌) 앞소리가 터져 나온다. "우이야허 허 우이야허허 우이야 소리 잘도한다. 용왕전에 들리도록 큰소리로 외쳐주소.우이야허허 우이야 허허 청룡 황룡 목이말라 비를 빌며 슬 피운다."이렇게 목이 터지도록 후렴을 외치는 그 오중창이야 말로 가 관이 아닐수 없다.
이렇게 운반된 양편의 줄은 용머리를 마주대고 동서로 뻗쳐놓는다. 기둥만한 참나무 비녀로 청룡과 황룡의 머리를 끼워 줄을 연결시킨 즉시 어느쪽이 먼저랄 것 없이 있는 힘을 다하여 줄을 당기기 시작한 다. "우여차 우여차" 응원 깃발은 미친 듯이 흔들리고 태산이 무너지 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싸움은 시작된다. 이 순간이야 무슨 잡념(雜 念)이 있을손가? 다만 줄만 당길 뿐이다. 평소 바깥 나들이고 하지않 는 부녀자들도 줄이 끌러 갈세라 치마폭에 돌을 담아 줄 위에 깔고 앉기도 한다. 밀리고 당기기를 밤낮이 없이 계속되고 하루밤 지새면 죽단지와 밥함지, 막걸리 통이 줄을 잇는다.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웃 몰(청룡)측에는 머릴 함안 군북 마산 등지에서, 아랫몰(황룡)측에는 진주 사천 삼천포 등지에서 많이 모여와서 응원하면서 구경하기도 한다. 수많은 사람은 쉴 사이없이 줄을 당긴다. 그 큰 줄이 덜썩 덜썩 깽문 바닥을 흔들고 너나 할 것 없이 구경꾼들도 달려든다. 그러는 중 난데없이 하늘에는 먹구름이 모여들고 순식간에 소낙비가 쏟아지 고 수라장같은 줄싸움판은 끝나고 꾕과리,징,장고 소리에 맞추어 목메 어 부르는 "쾌지나 칭칭나네"로 적군, 아군, 남녀노소 할것없이 서로 엉켜서 울고 웃으며 놀이판이 벌어진다. "청룡,황룡 결연하니 먹구름 이 모여들고, 저 건너 알미봉에 비가 묻어 오는구나. 우장삿갓 챙겨라 논밭에 나가보자" 그렇게 술렁거리든 마을은 폭풍우 개인 뒷날처럼 언제 무슨 일이 있었더냐는 듯이 조용해지고 평온한 농촌마을로 되돌 아간다. 전하여 오는 말에 의하면 문산 깽문에서 줄싸움만 하면 비가 내린다며 참으로 영감있는 줄싸움이라고 원근 마을까지 알려지고 있 는 사실이다. 줄싸움 이야기만 나오면 이 깽문이 나온다. 70년대 이후 줄 싸움은 사라지고 말았다.
성당골 : 1905년경에 천주교 문산교회가 설립되고 포교활동은 100여년 전부 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성당은 1932년에 건립된 것으로 웅장 하고 건축양식 또한 서구식이다. 이후부터 성당골이라고 불려지고 있 다.
장 터 : 교통수단이 발달되기 전인 옛날에 문산 장날은 금산면, 금곡면, 진 성면, 일반성면, 정촌면 등의 중심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상당히 성황을 이루었던 곳으로서 문산「장터」라서 생긴 이름이다. 문산 중 앙지를 연상케 한다.
소문리-
동정(東井) : 서정(西井), 남동(藍洞)과 연결된 마을이다.
못둑골 : 옛날에 못이 있었던 곳이다. 못은 매립되어 주거지로 변하고 못둑 만 남은 것이 지금의 골목길이며 못둑골이라 이름되고 있다.
불매골 : 보통 골목길은 외길이므로 들어간 곳을 다시 되돌아 나올수 있으나 이 골목은 수개소의 골목과 연결되어 있어서 어느 골목으로도 들락날 락 할수 있다. 또 뒷산에서 내려다 보면 불매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 진 이름이다.
약장골 : 이 마을은 지형이 평탄하여 살기좋은 마을이나 이 골은 산길과 같 이 길고 험한 골이라하여 지어지 이름이다.
서정(西井) : 동정(東井), 남동(藍洞)과 연결된 마을이다.
남동(藍洞) : 동정(東井), 서정(西井)과 연결된 마을이다. 진양 보육원과 문산 초등학교가 있다.
쪽지골 : 옛날 법륜리에 족지동(足之洞)이란 골목이 있었으며, 사람다리 같이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문산초등학교 옆 골목이며 문산 에서 제일 긴 골목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동네 : 두 번째 정착된 동네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소문리가 해당되지만 실제로는 남동마을을「이동네」라고 한다.
참나무지이 : 진목정(眞木亭)의 방언으로 객사(客舍)를 의미하며 근처에 도토 리나무가 많다하여 객사(客舍)를 진목정이라 했다. 그 객사가 없어지 고난 뒤에 저절로 길이 된 것 같고 이곳에 찰방송덕비(察訪頌德碑)가 서 있다.
놀싯고 : 문산국민학교 뒷편 고개이다. 금산으로 가는 도로가 개설되기 전에 는 노루가 들끓어 붙여진 이름으로 노루실고개란 말이 줄여진 것 같 다.
재앙터(災殃) : 장승을 모온갖 재앙을 물리쳐 준다는 전설이 있고, 또 동민들이 모여 모든 재앙을 미리 막기 위하여 정성들여 동제(洞祭)를 드리는 곳이기도 하다.
남서(藍西) : 특별한 뜻이 없고 1979년 8월 1일 리동 개편으로 남동마을을 2 개마을로 나누면서 남동의 서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남서」마을이라 하였다.
우곡산(牛谷山) : 우곡산신을 모신 곳이다. 방언인「욱시골」이 더 널리 알려 지고 있다.
건너숲 : 진양농산 뒷편에 숲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숲이 없다.
용두산(龍頭山) : 아주 옛날 문산에 한 신선(神仙)이 살았다. 신선은 문산 사 람들을 어떻(소)이 죽으면 묻어주는 곳이기도 하다.
재실마당 : 벼, 보리 타작마당이다. 지금은 고속도로 개설로 없어졌다.
삼곡리(三谷理)
1914년, 진주군 문산면 삼동(三洞) 일부, 이곡면 제곡동(耳谷面提谷洞)으로서 삼곡리(三谷理)라 하였다.
삼 동 : 일동네,이동네,삼동네 3개 동네로 문산면을 이루었으며 세 번째 정착 된 마을이란데서 삼동이 되었다고 한다.
강마곡(降馬谷) : 강마곡(降馬谷)은 문산 방언으로 강마골이라고 불리어졌다. 옛날에 말을 타고 다니던 길손이 소씨의 세력이 두려워 말에서 내렸 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공마당 : 삼동네 냇가에 있는 넓은 공지(空地)이다. 이 곳은 동네 장정들이 모여 힘을 겨루었던 마당(운동장)으로서 「씨름」「들돌(역도)」「공 차기」「소싸움」까지도 하였던 곳으로 지금의 공설운동장과 같은 곳 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동산(東山) : 마을 앞 남산에 동산곡(東山谷)이란 계곡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다. 1930년에 이 동산곡을 중심하여 남산에 수천(數千)마리의 백로(白 鷺)가 서식(棲息)했으나 6 25사변중 그 무자비한 총포소리에 놀란 백로는 휴전된 53년경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오곡(梧谷) : 옛날 이 마을에는 오동(梧桐)나무가 많아 오동내골이 생겼고 또 소문리와 연결된 오동내다리()로 연유하여 오곡마을이라고 이름 하였 다.
원당(元堂) : 마을이 정착되기 이전에는 논이었는데「원당이들」이라고 불렀 다. 그들 이름을 따서 원당마을이라고 부른다.
달래고개 : 어느 날 의좋은 남매(男妹)가 남산 먼당에 있는 밭에 일하려 여 동생을 앞세우고 가는데 갑자기 내린 소낙비를 맞아 비에 젖은 베옷 이 과년한 여동생 몸에 찰싹 달라붙자 그 몸매에 순간적으로 욕정을 느낀 오빠가 자기의 불륜한 마음가짐을 뉘우치고 고개마루에 올라가 서 생식기를 돌로 찍어 죽고 말았다. 앞서가는 여동생은 아무리 기다 려도 오빠가 오지않자 고개를 되돌아 가보니 그런 봉변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광경을 본 여동생은 울부짖으며「무엇 때문에 죽었을까. 한번이라도 달래나 볼 것이지」했다는 유래로 달래고개라 고 한다. 남산 중턱에 있다.
메모틔 : 마을 어귀 남산 기슭 모퉁이에서 말을 탄 관리나 길손은 말에서 내 려 객사에 출입할 수 있다하여 하마(下馬)모틔라고 하였다. 이말이 세 월이 지나면서 매모틔라고 불리워졌다고 한다. 지금 이곳에는 찰방 이상석 청덕선정비(察訪李相奭淸德善政碑)와 독립유공자들의 애국지 사 추모비가 서 있다.
몰매동 : 옛날 소촌역(召村驛)에서 사육하는 말이 죽으면 묻었던 장소를 말 한다. 삼곡리소재 혜광학교 부근 기슭에 위치한 몰마등(沒馬嶝)을 말 하는 것 같다.
벽계봉(碧溪峰) : 옛날에 남산밑으로 푸른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골짜기로 남산 중턱을 병풍같이 두른 바위덤은 절경을 이루었던 곳이라 한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조선조 어느 임금님의 아우가 다녀갔다는데 여 기에 대한 근거자료를 서울에 거주하는 배(裵)모씨가 갖고 있으나 연 락 두절로 자세히 기록할 수는 없다. 그 아래에 살던 이(李)씨는 여관 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 벽계붕을 연유하여 여관 이름을 「벽계여관」 이라고 하였다 한다.
알얍땅과 딘기얍땅 : 미봉산(米峰山)은 쌀이 쌓인 것과 같다고 붙여진 이름 이다. 쑥밭(林坪)들에서 벼타작을 하여 가래질을 하면 알곡식은 「알 얍당」에 떨어지고 껍질은 「딘기얍땅」과 딘기선창에 떨어진다는 것 이다. 그리고 딘기얍당과 딘기선창은 꼭 벼 껍질이 쌓여 있는 것같이 보인다고 하여 생겨난 지명이다.
나비설 : 마을 앞 남산 남서향 산록에 진양학교와 문산학교가 있는 곳이다. 옛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나비설이라고 한다. 들판에서 건너다보면 그 형상이 꼭 나비와 같단다.문산중학교 진양고등학교가 있는 가운데 등 이 나비의 몸체이고 충혼탑쪽 등느 왼쪽 날개이며 진주혜광학교 군민 회관쪽 등은 오른쪽 날개이고 산 정상은 나비의 머리라 한다. 어떤 풍수가 예언하기를 평화스러운 「나비설」이니 훗날 아이들을 가르치 는 곳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한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은 두 학교가 자 리잡고 있다.
질굿이 : 땅이 너무나 길다하여 '질굿이'이라 부른다. 일명 '지르미'라고도 한 다. 양 산군에서 발족된 임목육종장이 1969년 3월에 이곳 3만여평 규 모의 경상남도임업시험장이 이전하였다가 1992년도에 이반성면으로 옮겨가고 진주시농촌지도소가 이전하였다. 지금은 진주여성복지회관 문산별관과 문산실내체육관 문산 공설운동장이 1996년 12월에 준공
통시바우 : 통시는 화장실의 사투리이다. 이곳 바위의 생김새가 재래식 「통 시」모양으로 생겼으며 장수(체격 큰 사람)가 아니면 도저히 사용 할 수 없을 만큼이나 규모가 크게 되어 있다. 그 아래에 샘(우물)이 있는 데 이 모두를 「장수바우」와 연관된 것 같다고 전해지고 있다.
덕촌(德村) : 덕마을을 덕촌으로 부른다. 귀환동포 마을이라고 한다. 8 15 광복 후 귀환 동포가 집단 거주하였기 때문이다.
덕동(德洞) : 덕마을을 연유로 덕동마을이라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소 학교 소재지였으나 광복후 철폐되고 1957년에 면사무소가 이건되었 다. 1995년 3월 1일 읍으로 승격되고 1996년에는 2층으로 증축되었다.
덕남(德南) : 1979년 8월 1일 리동 개편 때에 덕동마을을 2개 마을로 나무면 에서 덕동마을의 남쪽에 위치한다 하여 덕남이라 하였다.
제곡(堤谷) : 제실마을을 '제곡'마을이라고 부른다. 서남쪽 골짜기에 있는 외 딴 마을이다. 마을어귀 큰 제실 못이 있고, 건너편 산 밑에 진양정신 요양원이 1923평 규모로 세워져 있으며, 언덕위에는 진주정신병원이 1996년 6월에 는 진주정신병원이 1996년 6월에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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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이곡리(耳谷理)
1914년, 진주군 문산면 삼동(三洞), 송곡면 정자동(松谷面亭子洞), 이곡면 어수동(耳谷面魚수洞) 각 일부로서 이곡리(耳谷理)라 하였다.
어수(魚 ) : 옛날에는 예늪이라 불렀다. 마을이 처음 형성될 때 오른쪽 숲이 있었는데 숲아래쪽에 있는 못(池)에는 항상 고기가 많이 놀기 때문에 고기어(魚)자와 늪수( )자로 하여 어수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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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蓮池) : 어수마을 앞 쑥밭 들판에 있는 자연의 못이나 토박이들은 오래 전부터 「연늪」이라 부르는데 연(蓮)이 많이 생산됨으로 불려진 이 름이라 한다.
강산(江山) : 마을 동쪽에 있는 산이다. 옛날 금을 캐던 곳이라 한다.
외자골 : 외따로 떨어져있는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작은골 : 마을 동쪽에 있다. 꼬불꼬불한 골짜기이다.
장자골 : 마을 남쪽의 골짜기이다.
사들보 : 사들(沙坪)농업용수의 수원(水源)이다. 영천강(潁川江)을 가로막아 만들어진 보(洑)로서 보 안은 수심(水深)이 좋기 때문에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조판서의 묘(墓) : 그렇게나 유명하지도 않던 조판서가 죽은 후 지금의 어수 마을 앞 귀봉산(龜峰山)에다 장례하였는데 이 조판서 묘사의 전설을 적는다.
조판서가 높은 벼슬을 한 분이니 가세(家勢)며 권위(權威)가 어떠했 겠는가는 짐작할 수 있다. 생존시 사랑채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어떤 노승(老僧)이 시주하기 위해 염불을 외는 소리에 단잠을 깨자 하인(下人)을 불러 노승을 내쫓으라고 호령하므로 대문밖으로 끌려나 왔다. 그러나 노승은 또 들어가 염불을 하자 화가 치민 조판서는 곤 장을 쳐 내쫓도록 하였다. 이때 노승은 얼마나 맞았는지 사경에 이르 렀는데 그 원한이 뼈에 사무쳐 언젠가는 한번 그 원한을 풀어보리라 작심하고 겨우 몸을 일으켜 떠났다. 그후 조판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노승이 와서 보니 그 묘지가 이를데 없는 명당이었다. 호수를 가운데 두고 묘소가 지네혈이고 건너편에 있는 현재 소음부락의 산이 닭혈이고 동물쪽에는 찍혈인데 호수 때문에 닭이 지네를 잡아먹을 수 없고 닭이 움직이지 않으니 찍이 닭을 잡아 먹을수 없도록 지세(地 勢)가 균형이 잡혀 명당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고 조판서에 대한 원한 을 푸는 방도는 호수를 메워 지세를 흐트림으로써 멸문(滅門)의 화 (禍)를 입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호수 가운데 춤추는 허수아비를 세워 놓고 돌을 던지기만 하면 허수아비가 춤을 추도록 하였는데 지나가는 길손은 물론 아이들은 날마다 돌을 던져 춤추는 허수아비를 구경하였 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넗은 호수는 다 메워져 들판이 되었고 조판서의 가문도 번창하지 못했다는 전설이 있다. 조판서의 무덤 옆 에는 「향계」라는 처녀노비의 무덤이 있는데 이는 순장묘(殉裝墓)라 고 전해지고 있다. 생매장된「향계」의 어머니는 감히 상전의 무덤옆 에는 가지 못하고 들판 가운데 있는 숲 옆에서 불쌍한 딸의 무덤을 바라보면서 통곡하고 애절히 울부짖었다고 하며 그 숲을 「향계」숲 이라고 한단다. 또 쑥밭들에는 논밭을 갈면은 놋물(쇳물)이 많이 뜨는 것을 볼 수 있는 바 이것은 사위가 동비(銅碑)를 배로 싣고 오다가 호수에 빠뜨려서 산화되어 놋물이 되었다 한다. 또 요즘은 말라리아 (푸심)는 근절되다 시피 거의 볼수 없으나 옛날에는 큰 병으로 여겼 는데 말라리아 환자가 조판서 묘 옆에서 잠을 자면 꿈에 조판서가 나 타나 묘역(墓域)을 침범하였다하여 호되게 꾸짖는 서슬에 놀라 잠을 깨면 말라리아 병이 말끔히 치유되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잘 알려 지고 있다.
이곡(耳谷) : 지형이 사람의 귀처럼 생겼으므로 귀실(구실)이라고 하고 사방 이 산으로 둘러 싸여있고 중앙에 뫼둥이 이어져있다 마치 귀 안과 같 이 생기고 입구에 귓밥과 같은 지형(地形)으로 되어 있어 마을 밖으 로(마을을 떠남) 나가면 못산다는 전설이 있다. 임진왜란 때 노(盧)씨, 박(朴)씨, 이(李)씨 성받이 들이 피난차 이 골작 마을에 들어온 것이 정착되어 마을이 이루어졌고 또 6 25동란 때에도 이 마을이 유일한 피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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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등산(龜嶝山) : 마을 서쪽에 있는 산으로 거북이등과 같이 생겼다고 지어 진 이름이다.
통새미 : 마을 동쪽에 있는 공동우물이다.
대 골 : 마을 동남쪽에 있고 「대곡」이라고도 하는 골짜기이다.
불시산 : 마을 남쪽에 인는 산이름
안전리(安全理)
1914년, 진주군 갈곡면 외동(葛谷面外洞), 동곡동(東谷洞), 송곡면 송곡동(松谷面松谷洞) 일부로서 안전리(安全理)라 하였다.
안전(安全) : 편안하게 사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갈밭골 : 갈밭이 많이 있는 들이다.
금산티(金山峙) : 옛날에 이곳에서 금(金)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꾸리보 : 보(洑)끝 둑에서 구리(銅)가 나왔다고 한다.
남대문굴(南大門屈) : 안전사 위편 벼랑에 있다. 경치가 좋은 곳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조그마한 통로가 있어 몸을 굽히고 들어가면 아무리 큰 사람이라도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하며 깊이는 약 10m 가량 되었다고 한다.
중시골 : 마을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동방(東榜) : 옛날부터 토박이들은 동방마을이라고 불렀다하며 1979년 8월 1 일 큰마을을 분할하면서 그대로 동방마을로 되었다.
망사고개 : 당사고비라고도 부르며 재실이 있어 선비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새터로 가는 고개이다.
대터들 : 동당골 남쪽에 있으며 대나무가 많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아랫골 : 동당골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웃 골 : 동당골의 윗마을이다.
안지이 : 안전(安全)마을의 토박 사투리이다
갈곡리(葛谷里)
1914년,진주군 갈곡면 외동(葛谷面外洞),상촌동(上村洞)으로서 갈촌리(葛村里)라 하였다.
1995년 11월 1일에는 시조례 제149호('95.10.17 공포)에 의하여 갈촌리를 갈곡리(葛谷里)로 개칭하였다.
갈곡(葛谷) : 지형이 칡(葛) 형태로 생겼고 칡이 유난히 많으며 칡뿌리는 등 넘어 있고 넝쿨은 산기슭에 내려와 있다고 한다. 또 옛날에는 갈화 (葛花)마을이라고 불렀으며 김씨(金氏) 집성촌으로 알려지고 있다.
가 실 : 원래는 개골(개곡)이라고 했다. 개골이라고 부르다가 언제부 터인 지 모르지만 가실골이 되었다고 한다.
국 골 : 골짜기 전체가 가실골인데 골짜기 일부 조그마한 곳에 골이 생겼으 며 샛골이 나와 있는 곳이다.
꽃밭둥 : 진달래가 많은 산중턱이다.
다리목 : 밤날골에 있는 대로(大路)인데 전에는 갈촌마을 입구에 내 또랑이 있고 큰 돌로 된 징검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대밭새미 : 다리목 밑에 대밭에 있는 샘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 실 : 예전에는 죽곡(竹谷)으로도 불렸으며 대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돛바우 : 샘이 있고 길가에 두 개의 바위가 있다. 옛날에 고양이가 돌을 지 고 오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어떤 여인이 그 모습을 보고 「고양이가 돌을 지고 온다」고 큰소리를 쳤다. 이 고함소리를 들은 고양이가 놀 라 지고오던 돌을 버리고 도망갔다. 그 버리고 간 돌이 돛바우라고 이름지어져 전해오고 있다.
드래새미 : 두레박을 사용한 갈촌마을의 유일한 공동우물로서 최초로 생긴 샘이다.
돛밭길 : 돛바우가 있는 곳으로 항상 돌이 그 자리에 있어서 농부들이 일을 하러 갈 때 돛밭걸로 간다고 해서 하나의 이름이 되었다.
말티고개 : 말의 형태로 생겼으며 걸어 다니는 소로길의 고개마루이다.
말티골 : 말티고개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문어산(文魚山) : 산 등성이가 꼭 문어 발의 둥근 모양처럼 생겼다.
불매골 : 풀무질하는 대장간이 있었다고 생긴 이름이다.
작은대실 : 밤나무 골짜기를 이르는 것으로 새끼 골짜기를 말한다.
장구배미 : 장고(長鼓)처럼 가새(가장자리)가 잘록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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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골(父母) : 갈촌마을은 김해김씨 집성촌으로 차자(次子) 아래가 분가 해 나가면 옛날 본집은 부모차지라 하며 옛날 집이 많은 곳을 말한다.
셍이골 : 셍이는 형(兄)님의 사투리이며 형님이 많이 사는 골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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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골 : 골이 너무나 길어 그 골에 일하러 갔다 올려면 꼭 하루해를 보내야 하기 때문에 생긴이름이다.
송정(松亭) : 웃치실(上葛)이라고도 말한다. 소나무 숲이 우거진 산골 마을이 다. 밀양박씨의 집성촌으로 알려지고 있다.
누운개굴(屈) : 마을 동북쪽 경전남부선 철도 터널로 길이 약 200m이며 지형 이 개가 누워있는 모양이고, 문산, 진성의 면 경계이기도 하다.
붕징산 : 마을 북쪽에 있는 산이다.
새미골 : 물이 좋은 약수 샘이 있다.
지상골 : 마을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홈새미 : 바위틈에 대나무를 대어 물이 나오게하여 물을 받아먹는 샘이었다.
황정자(黃亭子) : 성이 황(黃)씨인 사람이 정자나무를 심었다하여 붙여진 이 름이다.
장군동 : 장군석이라고 불리우며 바위 두 개가 있다고 한다. 지금도 돌장승 이 남아있으며 토박이는 말하기를 옛날에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있 었는데 그가 죽어서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하릿골 : 골짜기가 길어서 골 안에 일하러 가면 어쨋든 하루해를 보내야 된 다고(긴 골짜기까지 가고 오고 하는 걸음이 아까워서)붙여진 이름이 다.
햇깃등 : 하릿골 앞에 있는 산등이다.
행길등(行吉嶝) : 갈촌마을 동쪽에 있는 산등으로 「행길」이라고도 부른다.
옥산리(玉山里)
1914년 진주군 정촌면 호탄동(井村面虎灘洞), 원촌동(院村洞) 각 일부, 정동(鼎洞), 대방동(待榜洞), 문산면 옥산동(文山面玉山洞)으로서 옥산리(玉山里)라 하고, 정촌면(井村面)에 속했다가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1973. 3.12 공포)에 의하여 문산면으로 편입되었다.
정동(鼎洞) : 마을 부근 지세(地勢)가 가마솟 같이 생겼다고 솥정(鼎)자를 따 서 정동마을로 이름지어지고 정(鄭)씨가 많이 모여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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솥바위 : 가마솥을 얹을 수 있는 삼발바위가 있어 솥발바위라 불려져 오다가 줄여져 불리는 이름이다.
솥 골 : 솥바위가 있는 정동마을을 솥골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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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촌(院村) : 옛날 정강서원(鼎岡書院)이 있던 마을이라고 원(院)자를 따서 원촌마을이라 이름하였다. 이 정강서원은 사학종합대학(私學綜合大學) 으로 선현봉사(先顯奉祀)와 자제교육에 힘썼으며 서부경남 유림(儒林) 의 본산이기도 했다. 서원은 숙종초 경자년에 창견되고 공정 무진년 에 칙령(勅令)으로 철폐되어 지금은 과수원으로 변하고 그곳에 남은 주춧돌로서 당시의 모습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정강서원구선생유허비 (鼎岡書院九先生遺墟碑)는 기사년(1929년)에 세워졌다. 참고로 부기할 것은 서원 선생들은 덕망이 높고 당당하여 웬만한 관리는 서원을 지 나갈 때 말에서 내렸다는 사실은 지금도 남아있는 하마비(下馬碑)가 말해주고 있다.
또 이 마을은 배(梨) 주산단지로 농가 50여호에서 생산하는 량(量)은 약 4천톤으로 판매액은 거의 5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또 원촌배라고 하여 지방시장은 물론 서울 청과시장에서도 이름 나 있다고 한다.
수리산 : 산세가 독수리 모양이라고 한다.
나랏골 : 옛날 이곳에서 삼(麻)을 많이 심어서 살았다는 골짜기이다.
여시바위 : 오륜산 중턱에 있는 바위인데 여시(여우)가 많았다고 한다.
열두대문터 : 마을 안쪽에 있는 터로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있다. 옛 서원에 드나드는 12대문 자리라고 한다.
오륜산 : 수리산 밑에 오륜골에 있는데 옛날 이곳에서 다섯 사람이 여러 가 지 의논을 하였던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촌(新村) : 옛날부터 토박이들은 「새몰」이라고 부르는데 새마을의 사투 리이며 한자로 신촌 마을로 되었다. 또 옥산(玉山)이라 하는데 이 옥 산은 산이 나지막하고 동그람하게 구슬같이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 고 풍수설에는 신촌마을에서 건너 용두산을 바라보면 꼭 죽은 남자를 일곱군데로 염 해놓은 것 같이 보여서 이 마을에는 소녀과부가 많다 는 것이다. 그래서 그 화를 면하기 위하여마을 어귀에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고 새롭게 살기 위하여 「새마을」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 어귀에는 숲이 있다.
감나무골 : 골이 깊고 감나무가 많이 있으며 지금도 가끔씩 옛날 기와가 하 나씩 나온다고 한다.
마구할매서답돌 : 마을 서쪽 왕개봉 중턱에 있는 바위로 20여개나 땅속에 파 묻혀 있다고 한다.
무 등 : 마을 뒷편에 있는 산등성이다.
방아골 : 연자방아가 있어 방아를 찧었다고 한다.
이괄성(李适城) : 마을 서쪽에 있는 성터인데 내용을 하는 이가 없다.
대호(待虎) : 「대배미」라고도 부른다. 염소를 많이 기르며 대방마을로 알려 져 있다. 그런데 문산면으로 편입되면서 정촌면 대축리 대방과 구별 하기 위하여 대호마을이라고 이름지었다.
방아골 : 마을 서북쪽에 연자방아가 있었으므로 지어진 이름이다.
떡 고 : 옛날 동물사람이 장가를 갈 때 갓골에서 갓을 쓰고 가매골에서 가마 를 타고 떡고개애서 떡을 먹었다고 전하여지고 있으며 떡먹던 고개라 고 붙여진 이름이다.
돌 고 : 대호마을 동쪽에 있는 고개로 신촌과 문산을 통하는 험한 덤 길이 있고 그 아래로 영천강이 흐르고 있으며 고개 마루에 큰 바위가 길 양편에 서 있고,하나는 고개 너머로 누워있는데 기울어지는 쪽의 마 을은 소년 죽음을 많이 당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두산리(斗山里)
1914년, 진주군 정촌면 동물곡동(井村面冬勿谷洞), 처음동(處音洞), 이곡면 어수동(耳谷面魚藪洞), 송곡면 정자동(松谷面亭子洞) 각 일부로서 동물리(冬勿里)라 하고 정촌면에 속했다가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32호(1973. 3.12)에 의하여 문산면으로 편입되었다.
1995년 11월 1일에는 시조례 제 149호('95.10.17 공포)에 의하여 동물리를 두산리(斗山里)로 개칭하였다.
두산(斗山) : 이 지방의 방언으로 「두메실」부른다. 두메실이란 산으로 둘러 싸여 있다고 불리워진 이름인데 본시 동물곡동에 연유하여 동물(冬 勿)이라 하다가 1995년에 두산리로 개칭하였다.
계 골 : 동물마을 서쪽에 있는 험하고 깊은 골짜기이다.
계리재 : 옛날부터 풍수설에 의하여 전해진 말에 의하면 닭(鷄)과 삵쾡이(狸) 가 이쪽저쪽에 있다고 해서 계리재라 하였다.
금바구 : 계리재 마을 옆에 언덕이 있는데 옛날에 사금이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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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바구산 : 살쾡이의 머리같이 생겼으며 지금은 한 개의 바위가 있을 뿐이다
금바구산 안쪽에는 금박골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이 있다.
드므실 : 물이 많이 나는 동네로 가정 집의 물독에 가두어 놓은 물같이 겨울 에도 물이 있다하여 드물실이라 불렀으나 언제부터인가 드므실로 바 뀌었다 한다.
낙수바구 : 금바구산 덤 아래에 있는 바위이다. 옛날에는 이 바위에서 고기 를 낚았다고 하며 고성방면에서 오느 고기장수는 고깃짐을 내려놓고 고기 한 마리를 바위에 올려놓은 후 절을 하지 않으면 발걸음을 옮기 지 못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도독골 : 동물리 서편에 있는 뒷골 너머에 있는 긴 골이다. 옛날에 도둑이 많아 장꾼들을 괴롭혀 관에서 마을을 없애버린 곳이라고 하며 골짜기 의 물이 깊고 맑아 가뭄을 모른다고 한다.
소두골 : 동물에 있는 골짜기이다. 소의 머리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계리(鷄里) : 동물리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제리재라고도 부른다. 크고 둥근 바위가 있어 나무꾼의 놀이터를 이루며 소음마을과 소통되는 길이 있 고, 옛날에 무슨 소리가 나는 골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1914년 이래로 소음(所音)이라 하다가 1995년 계리로 개칭되었다.
씩덤 : 소음동에 있는 덤서리로 병풍을 둘러 놓은 것과 같고 그 한 복판에 인흥 바우라는 팔각형의 바위가 있었는데 제방을 쌓을 때 이 바윗돌 을 깨어 썼는데 그 후부터 마을이 변했졌다고 한다. 둥근 청널바우는 지금도 있고 옛날에는 백로가 수백마리나 앉았던 자리라고 한다.
뽈지골 : 금바위에서 사람이 겨우 기어올라 갈 정도로 자연경도로 되어 있는 데 뽈지(박쥐)가 살았다고 한다.
덕석바구 : 넓다랗게 덕석(멍석)같이 생긴 바위이다.
마당거미 : 강변에 들판이 생긴 것이다. 자연에 이기지 못하여 수해가 터져 여기 저기에 토지가 생겼다고 한다. 또 토박이가 말하기를 곡식을
두어서 두들기어 수확하는 마당질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첫댓글 덕분에 역사공부를 많이 한거 같습니다!!!^*^ 특히 주정의 주자가 부엌주 라는것을 알게되었고 달래고개의 슬픈 유래도 잼있게 잘 읽었습니다요!!!
호~ 이 귀한 자료 어디서 구했남. 대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