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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청량산(남한삼성) 산행후기
언제나 그렇듯이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개미실산우회' 산행 모임을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기다린다. 무엇보다도 반드시 참석하고자 하는 열의를 지닌 친구들이 더없이 고맙다. 그런데 오늘은 산행도 하기 전에 지하철 안에서 부상을 당하는 변고가 생겼다. 나이 탓인지 배낭을 메려고 몸을 뒤척이다 허리 윗 부분이 삐끗하면서 담이 생기고 말았다. 이것도 다 운동 부족에서 오는 현상이리라. 09:00경 계순이 친구와 마천역에 도착하니 혁숙, 인수 두 친구가 반갑게 마중을 하고 만남의 장소로 가니 이미 기용, 병국, 재희, 흥우 네 친구가 담소를 나누다 우릴 반갑게 맞이해 준다. 오늘은 가능하면 하산하여 점심을 하기로 하고 막걸리 한 잔 걸치지 않은채 바로 산행을 시작하였다. 하늘은 맑고 날씨는 화창하다. 황사의 계절인 탓으로 시계가 다소 불량하였으나 산행을 하기엔 참으로 좋은 날씨다. 10여분쯤 산을 오르다보니 땀이 솟고 더위를 느끼게 되어 하나 둘씩 덧옷을 벗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아직은 연초록 색깔이며 노랑, 분홍 색깔의 봄을 느낄 수 없는 것이 다소 아쉽게 느껴진다. 청량산(남한산성)의 등산로는 바위며 돌이 없이 흙길로 이어져 있어 여성들이나 아이들이 무리없이 산행하기에 그야말로 안성마춤인 곳이다. 우리는 2-3명씩 짝을 이뤄 즐거운 웃음과 함께 담소를 나누며 산을 오른다. 봄의 전령사인 노랑꽃 산수유 이야기가 나왔다. 난 어려서 산수유보단 산동백으로 알고 있다가 몇 년전부터 산수유로 알았다. 그런데 오늘 흥우 친구로 부터 산수유와 산동백은 노랑꽃이 서로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꽃이란 사실을 알게되었다. 여주봉옹성 740m, 수어장대 1,380m, 서문 1,090m이란 이정표가 눈에 들어 온다. 오늘은 남한산성 내부 답사가 아닌 산성 외곽 즉, 북문-동장대지-벌봉-엄미리(은고개)로 하산하는 산행길이다.
<연주봉 옹성> 이제 산성에 도착하였다. 산행길 이정표에는 여주봉 옹성이라 표기되어 있으나 연주봉(連珠峰) 옹성이 바른 표기다. 이 옹성은 산성 서북 모퉁이의 원성에서 제3암문을 통하여 연주봉을 연결하고 있는데 붕괴가 가장 극심하여 최근 새롭게 복원을 하였다. 이 옹성은 봉수나 망루의 역활을 한 듯이 원형의 석축 잔해가 4-5단 정도 남아있다.
성벽 시설인 치(雉)와 여장(女墻)을 배경으로 한 컷. 좌측부터 이흥우, 정계순, 김인수, 이병국, 권혁숙, 류기용, 류재희. 성벽 시설중 '치(雉)'란 성벽 바깥으로 한 칸 정도가 돌출되어 있는 시설로서 성벽에 바짝 달라붙어 기어오르는 적군을 옆에서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고 망루로도 사용하였다. '여장(女墻)'은 타(타)와 타구(타口)가 반복되는 모양으로 성벽위의 수비군이 자신의 몸을 숨기면서 바깥의 적군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이다. 위 사진 중 구멍 3개가 있는 부분을 '타'라 하고 타와 타 사이를 '타구'라 한다. 타의 구멍 3개는 총안으로 가운데가 원총안 좌우측은 근총안이라 한다. 이곳에서 우측으로는 서문과 수어장대로 갈 수 있고, 좌측으로는 우리가 목적하고 있는 북문-동장대-벌봉-엄미리로 갈 수 있다.
<남한산성1> 남한산성 내부는 시멘트 포장을 하여 걷기가 편하나 산행의 감칠 맛은 전혀 느낄 수 없고 성곽과 자연의 어울어짐 또한 느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끼끼고 고풍스런 맛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성곽 외부로 산행을 하는 것을 오히려 권하고 싶다. 이쯤에서 문화재 용어 한가지를 집고 가자. 우리는 보통 성(城)을 가리켜 성곽(城郭)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성은 무엇이고 곽은 무엇인가? 답 : 성(城)은 내성을 말하고, 곽(郭)은 외성을 말하는 것이다. 비슷한 것 한가지 더. 우리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등을 궁궐(宮闕)이라 한다. 그러면 궁은 무엇이고 궐은 무엇인가? 답 : 궁(宮)은 내전으로서 임금님과 그 가족들이 봉사하는 각종 소임을 맡은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고, 궐(闕)은 외전으로 임금님과 대신들이 더불어 정사를 보던 곳 또는 궁을 지키던 군인들이 머물던 곳을 말하는 것이다.
<남한산성2> 남한산성은 작년 이맘 때 왔을 때 보다 많이 보수가 되어 있었는데 한가지 흠은 성돌과 성돌사이에 바른 시멘트가 벌써 탈락하고 있었다. 옛날 같았으면 삼화토를 써서 보다 견고하게 처리하였을 터인데하는 아쉬움이 있다. 어쨋거나 산등성이를 따라 구불구불이어진 산성이 병자호란의 슬프고도 아픈 역사를 뒤로 하고 멋지게 이어지고 있었다.
<남한산성 복원전 폐허지>
<동장대지> 남한산성이 준공된 후에는 수어청(守禦廳)을 두었는데 수어청에는 전 후 중 좌 우 5영(五營)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 곳은 전영장(前營將)과 좌영장(左營將)이 배치되어 진을 치고 휘하 장졸을 지휘하던 동장대가 있던 곳이다.
남한산성 동장대 암문을 통해 성 외부로 나서면 다시 봉황성으로 가는 암문이 또 나온다. 암문의 푸른 하늘과 어우러진 계순이 친구의 모습이 참으로 이채롭고 멋있어 보인다.
<벌봉1> 암문 밖에서 이 바위를 보면 흡사 벌과 같다하여 벌봉이라 한다.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이 바위에 정기가 서려 있어서 침략하면서 즉시 깨뜨리므로 산성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실제로 청군이 이 봉우리에서 성내를 관찰하면서 아군을 공략하였다.
<벌봉2>
<벌봉에서 기용이 친구>
<벌봉에서 흥우, 병국>
<의안대군 방석의 묘 벌봉에서 엄미리계곡에 거의 도달할 무렵 이 골 깊은 계곡에 잘 다듬어진 묘소가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치랴 한달음에 뛰어 묘소에 다달았다. 조선왕조 개국 직후 1차 왕자의 난 때 방원(태종) 일파에게 살해된 조선조 초봉세자인 의안대군 방석과 그 부인 심씨의 무덤이다. 묘역엔 문인석이 좌우 2쌍이 있고 무덤은 장방형으로 각이 진 고려식 호석을 두렸는데 특이하게도 상, 하봉으로 되어 있다. 묘비에는 '유명조선국 오원소도공지묘'라 적혀 있지만 비바람에 깎이여 판독하기조차 어렵다. 의안대군 방석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 강씨(신덕왕후) 소생으로, 다섯째 형님인 야심가 방원 대신 세자로 책봉된게 죄가 되어 어린 나이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만 것이다. 삼봉 정도전에 의지해 아들 방석을 왕으로 만들려던 강씨 또한 죽어서도 방원의 복수를 피하지 못했다. 왕위에 오른 방원은 이성계가 죽자 덕수궁 근처(지금의 정동)에 있던 강씨 무덤을 곧바로 이장해 버렸다. "흔적을 남기지 말라"는 엄명도 함께였다. 2백년이 더 지난 현종 대에야 비로소 복원됐고 그것이 지금의 성북구에 있는 정릉이다. 정릉이 복원되던 날 유난히 많은 비가 내렸다고 하는데 당시 사람들은 왕후의 원을 씻어주는 비라하여 "세원지우"라 불렀다. 비운의 강씨와 방석 모자의 무덤은 이렇게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갈라져 있는 것이다.
의안대군 묘소를 지나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벽수골이 나오고 이곳이 바로 이지역 유원지로 통하는 엄미리계곡 또는 은고개계곡이라고 하는 곳이다. 이곳에 있는 '벽수장'은 나와함께 수년전부터 '안동김씨사이버학술연구회' 활동을 하고있는 영윤대부께서 운영하는 음식점이다. 이곳에서 우린 늦은 점심을 겸하여 푸짐한 안주와 함께 뒷풀이를 건하게 하였다. 물론 대부님의 덕분에 시내버스 정류장까지 편하게 나오기도 하였고. 배려해 주신 대부님께 감사드린다. 또한 천호역에 도착하여 기용이 친구의 찬조로 생맥주 집에 들려 입가심을 한잔하였는데 그게 또 만만치 않게 시간이 걸렸다. 늦은 시간까지 함께해준 친구들에게 감사하고 특히 만만치 않은 비용을 지불한 기용이 친구에게 감사드린다. 아! 참 기분좋은 하루였다. 참 빼먹을 뻔하였네. 다음 4월 산행은 인수 친구 집안 결혼식 참석(마산)으로 인하여 4번째 일요일(4월24일)에서 3번째 일요일(4월17일)로 일주일 앞당겨 원통산 산행을 하기로 하였고, 5월 산행은 상평국민학교 제16회 동창회 상반기 총회 개최관계로 중복의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생략하기로 하였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