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한채 값인 1억원이 있다면 한옥 5채를 지을 수 있습니다.”
5년째 불우이웃에게 매년 한채씩 무료로 집을 지어주는 한국판 해비타트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펼치고 있는 신형우(41) 순천제일대학 토목공학과 교수와 부인 허명숙(41) 송죽평생문화원장.
이들 부부는 풍족하지 못한 여건속에서도 지난 98년부터 자비를 털어 장애인과 소년소녀가장 등에게 사랑의 보금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한 집 짓기 운동을 벌여 지금까지 모두 6채의 집을 지었다.
지난 7월 이들 부부는 ‘사랑의 집 짓기’모임인 송죽원 회원들과 순천시 승주읍 신전리 황외심(69) 할머니 집을 찾았다.
아홉 살과 일곱 살난 두 손녀를 키우며 사는 할머니 집은 낡을 대로 낡은 초가였다.
그나마 지난해 지붕 한쪽이 무너져 비가 샜지만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어떻게도 할 수가 없었다.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다른 집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그 곳도 비가 새기는 마찬가지여서 누울 자리도 변변치 못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 “난생 처음 집 가져”
신 교수는 먼저 고사를 지내고 반쯤 무너진 초가를 헐어냈다. 다음날 부터 송죽회 회원들과 학생 등 자원봉사자 10~20여명이 날을 새가며 집 짓기를 시작했다.
초석을 다지고, 제재소에서 켠 목재들로 기둥을 세우고, 기와지붕을 올렸다.
송죽원 식구들의 집 짓기는 마을의 잔치가 됐다. 황토 흙에 짚을 섞어 바른 다음 기와를 올릴 때는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일인양 스스로 나서 도왔고 부녀회에서는 음식을 준비했다.
15평 규모의 6번째 전통한옥이 완성되던 날 자원봉사자들과 마을 사람들은 음식을 준비해 막걸리를 나눠마셨고, 할머니는 “난생 처음 집을 가져봤다”며 눈물을 보였다.
그 동안 신 교수의 사랑의 집 짓기가 널리 알려져 6번째 집을 지을 때는 기와 생산업체에서 기와를 대주고 시멘트와 벽돌공장에서 각각 자재를 주고 보일러 시공기술을 지원해 주는 등 7개 업체가 참여했다.
신 교수는 “이들 업체는 자재를 지원해주면서도 남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 우리에게 오히려 고마워한다”고 말했다.
자재 업체까지 선행 동참
자원봉사에 참여한 중·고생들을 위해서 완성된 집의 사진이 실린 소식지를 보내줬다. 자신이 나른 벽돌하나가 어떤 집을 만드는 지 보여줌으로써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다음에도 이 같은 일에 동참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어려움도 많았다.
허 원장은 “집을 지을 때 송죽원 회원들이 할 수 없는 기술적인 부분들은 기술자를 불러다 해야 하는데 봉사단체라고 하면 일당을 받지 못할까봐 인부들이 잘 오지 않는다”며 “이 때문에 완성이 며칠 씩 늦어지곤 한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 같은 신 교수의 집짓기 운동은 지난 98년 TV를 통해 홀로사는 노인이 태풍으로 집을 잃어 힘들게 생활하고 있다는 딱한 사연을 접하면서 시작됐다.
단순히 집만 고쳐주면 될 거라 생각하고 그 곳을 찾아나선 신 교수는 염소 우리에서 생활하는 노인을 보고 집을 지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제자들과 일반 대학생들을 참여시켜 무너진 집을 철거하고 자비를 털어 3주만에 슬레이트 집을 완성했다.
집짓기는 이듬해에도 다시 이어졌다. 구례군 용방면 송정리에 살고 있던 50대 장애인부부로 남편은 손발이 썩어들어 가는 병을 앓고 있었고, 부인은 한쪽 팔을 쓰지 못하는 언어장애인이었는데 불편한 몸을 이끌고 아궁이에 땔감을 사용하고 있었다. 신 교수 부부는 이들 부부를 위해 입식부엌을 마련해주었다. 이 일을 끝내자마자 곧 구례군 구례읍 신원리에서 50대 정신지체장애인이 살 집을 지었다.
신 교수는 89년부터 이 대학에 재직하면서 생활이 어려운 토목과 제자 1명씩을 자신의 집에서 먹이고 재우며 같이 생활했다.
제자들도 든든한 후원자
부모와 자녀들, 여기에 조카들까지 함께 살고 있는 신 교수 부부에게는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자신의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하면 제자들의 어려움을 모른 채 할 수 없었다. 제자들은 낮에 집을 짓고 저녁에는 공부를 했다.
지금까지 신 교수와 생활한 제자는 모두 13명. 이들이 지금은 신 교수의 든든한 후원자들이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생활하지만 신 교수가 집 짓기를 시작하면 모두들 휴가를 내고 와서 동참한다.신 교수가 처음으로 직접 집을 지어본 것은 지난 83년. 군 복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신 교수는 반쯤 무너져 있는 집을 보고 망연자실했다.
뒷산으로 가서 소나무를 구해다 움막을 지어 거처를 마련하고 그 곳에 ‘송죽헌’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무너져 가는 집도 토목공학 서적을 뒤져가며 직접 지었다.
‘송죽원’이라는 모임 이름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달이면 완성 무상공급 원칙
집 한채를 짓는데 소요되는 기간은 불과 한달, 필요한 자재비는 대략 2천만원선이며 지붕은 반드시 기와를 쌓아 올린다. 2번째 집까지는 신 교수 부부가 모든 비용을 부담했으나 지금은 허 원장이 운영하는 송죽평생문화원 수익금과 후원금으로 운영한다.
인터넷 사이트 ‘다음’에 ‘송죽원 사랑의 집짓기’ 카페가 개설돼 170여명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국제해비타트 운동의 한국 조직인 ‘한국 사랑의 집짓기 운동연합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집을 지어준 뒤 돈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비타트는 자활의지가 있는 무주택 서민들에게 집을 마련해주고 15∼18년간 11만∼13만원씩 매달 상환하는 조건을 걸고 있지만 ‘송죽원’은 애초에 경제적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무상으로 전통한옥을 지어준다.
신 교수 부부는 “이 일을 시작하면서 돈이 많으면 더 많은 사람에게 집을 지어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돈 욕심이 생겼다”며 “우리가 돈도 없이 이런 일을 시작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 게 부끄러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또 “내년부터는 순천시와 여러기관의 도움을 받아 더 많은 집을 지을 수 있을 것”이라며 희망을 내보이는 이들 부부는 “이 모임이 전국 또 세계적으로 확대돼 어려운 이웃들에게 따뜻한 보금자리가 마련됐으면 한다”는 소망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