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운(紫雲)서원은 조선 중기의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율곡 이이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곳이다. 규모 면에서도 전국에서 가장 큰 서원이다. 1615년(광해군 7)에 그의 수제자 사계 김장생 등이 주도하여 파주 호명산(虎鳴山) 아래에 자운서원을 창건했다. 그 후 자운산(紫雲山) 자락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조선후기인 고종 5년(1868)에 흥선대원군은 율곡을 모신 황해도 백천(白川)의 문회서원(文會書院)을 지정하고 파주의 자운서원은 훼철했다. 훼철된 서원터에는 묘정비(廟庭碑)만 남았다. 그 위폐는 매안(埋安)하고, 서원 터에 단을 만들어 지방 유림들이 향사를 지내왔다. 한국전쟁때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을 1970년 유림의기금과 국가지원을 받아 사당을 복원하였다. 1973년 서원 경내 주변을 정화한 후 그 해 7월 10일 경기도 기념물 제45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자운서원의 입구에 외삼문 '자운문(紫雲門)'이 있다. 정면 3간의 아담하고 아름다운 문이다.
효종(孝宗) 원년(1650)에 '紫雲'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紫雲은 자주빛 구름이라는 뜻이다.
자운문 가운데 공간은 어칸(御間)으로 신(神)이 드나드는 공간이다.좌우의 공간은 협칸(狹間)이다.
오른쪽 협칸은 서원으로 들어갈 때 이용하고 왼쪽 협칸은 서원에서 나올 때 이용하는 공간이다.
어칸 위에 태극문양이다. 우주질서를 상징하는 태극이다. 태극을 통해 진입하는 공간은 진리의 세계이다.

자운서원의 경우 전학후묘(前學後廟)이면서 남향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펼쳐진 능선을 내려다보고 있다.
현재 서원 경내에는 사당인 문성사, 내삼문, 강당인 강인당, 기숙사인 입지재, 수양재, 외삼문 등이 동일 축선 상에 이루고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강당인 강인당을 볼 수 있으며, 좌우측에 입지재, 수양재가 각각 위치하고 있다.


자운문을 들어서면 만나는 왼쪽 동재 입지재(立志齋)이다.
왼쪽은 동으로 해가 뜨는 곳이다. 동재는 선배들의 기숙사이다.
입지재 한칸은 신사임당의 영정을 모시는 영당(影堂)으로 사용하고 있다.


오른쪽 서쪽에 있는 서재 수양재(修養齋)이다. 서쪽은 해가 지는 곳이다. 서재는 후배가 기거하는 공간이다.

강학공간인 강인당(講仁堂)이다. 유학의 기본덕목인 '仁'을 익히고 배우는 공간 강인당(講仁堂)이다.
요즈음 학교로 보면 학생들이 공부하는 교실이다. 1977년에 신축하였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을 한 강인당이다.
강인당 앞에는 수령 360년의 노거수 느티나무 두 그루가 양쪽에 있다. 그 울창함과 짙은 그늘은 대학자 율곡 이이의 학문의 넓이 만큼 넓고 그윽하다. 나무의 그루터기에 구멍이 뚤리고 휘어져 감기고 늘어진 모양이 사뭇 고풍스럽다. 노거수 느티나무는 강학공간 강인당의 의 품위를 한층 높여주고 있다.

<자운서원 묘정비(紫雲書院 廟庭碑>
자운서원 묘정비(紫雲書院 廟庭碑)는 자운서원의 역사를 적은 비로 자운서원의 자운문 밖 우측에 위치해 있다.
이 비는 자운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학덕을 기리는 한편 자운서원의 건립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비의 받침돌은 2단으로 이루어졌다. 아랫단은 두꺼운 판석 4장으로 짜 맞추어지대석(地臺石)을 만들고 그 위에 사각의 비좌(碑座)를 놓았다. 복련문(覆蓮紋)이 새겨져 있으며 측면에는 연주문(蓮珠紋)과 괴운문(怪雲紋)이 조각되어 있다.비문은 예서체로 되어있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비문을 짓고 당대의 명필인 곡운 김수증(谷雲 金壽增)이 썼다. 비명은 김수항(金壽恒)이 썼다.
비의 상단에 ‘자운서원 묘정비(紫雲書院廟庭碑)’라는전액(篆額-머리글)이 쓰여져있으며 비문 끝의 ‘숭정56년계해(崇禎五十六年癸亥)’라는 연기로 보아 비의 건립연대가 숙종 9년(1683)임을 알수 있다.

강학공간에서 제향공간으로 가는 내삼문이다. 외삼문과는 달리 내삼문에는 현판을 따로 걸지 않고 있다.

문성사(文成祠)는 율곡 이이와 그의 제자 사계 김장생과 남계 박세채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전학휴묘의 공간배치에 따라서 자운서원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문성사(文成祠)이다.
문성사(文成祠)의 文成은 율곡 이이의 시호 문성공(文成公)에서 유래한다.
율곡 이이의 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사계 김장생과 남계 박세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매년 음력 8월 중정일(中丁日)에 제사를 드렸다.
1996년부터는 매년 가을에 개최되는 율곡문화제 때 제향을 지내고 있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아담한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앞면에는 각 칸마다 2짝 여닫이 문을 달았는데 문 앞은 개방된 구조로 널찍하여 제사지내기에 적합하다

문성사 가운데는 율곡 이이의 영정과 위패를 모셨다. 율곡 이이는 명종 3년(1548)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29세 때 응시한 문과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차례의 장원에 모두 합격하여구도장원(九度壯元)'이라 일컬어졌다.
인조는 1624년 율곡 이이에게 '文成'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린다.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해서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道德博聞 安民立政)
문성(文成)이 담고 있는 의미이다.

율곡 이이의 왼쪽에 모시고 있는 남계 박세채이다. 그의 증조부 응복(應福)은 대사헌, 할아버지 동량(東亮)은 형조판서를 지낸 명문거족 출신이다.<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한 박세당(朴世堂)·박태유(朴泰維)·박태보(朴泰輔) 등은 박세채와 당내간의 친족이다. 또한 송시열(宋時烈)의 손자 순석(淳錫)은 그의 사위이다. 이러한 가계와 척분에 따라 중요 관직에 나아가 정국운영에 참여하였으며, 정치현실의 부침에 따라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651년 김상헌(金尙憲)과 김집(金集)에게서 배웠다. 김집은 사계 김장생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가 일찍이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한 연유로 그의 사승관계(師承關係)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에 율곡 이이의 수제자 사계 김장생의 위퍠를 모시고 있다.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학맥을 이어서 기호학파 또는 율곡학파의
문호를 연 인물이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특히 예학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성리학과 구봉 송익필의 예학을 계승하여 자신의 예학체계를 완성하였다. 김장생의 예학이론은『상례비요』, 『가례집람』, 『의례문해』, 『전례문답』의 사부작에 들어 있다. 김장생은 이들 예서에서 자신의 실용적, 합리적, 주체적 예학 이론을 피력하였다. 그는 아들 신독재 김집과 함께 동방 18현으로 문묘에 배향되는 최고의 영예를 누린다. 그의 수제자 우암 송시열이 노론의 수장으로 유맥을 이어간다.

'율곡선생 신사임당 유적 정화'비석문이다.
"1974년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쓰고 경기도지사가 세우다."
2013년 2월 율곡이이 관련 유적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장소성이 인정되어
국가사적 제525호 '파주 이이 유적'으로 승격되었다.
그 유적 정화기문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 기문을 아래 옮겼다.
율곡선생 신사임당 유적 정화기
이곳 자운산 기슭에는 율곡 이이 선생과 그의 부인 노씨와
부친 이원수 모친 신사임당 등 여러 가족 분묘가 계시다.
선생이 가신 지 三十년 뒤 광해군 七년 一六一五년에
이곳 유림들이 선생의 묘소 아래 자운서원을 창건했었고
효종 원년 서기 一六五十년에 위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그로부터 수백년이 지난 대원군 때에 서원이 훼철당한 채
우거진 풀밭 위에 비바람만 불더니 一九六九년에 이르러
국고보조와 군민의 성금으로 서원과 삼문을 재건했으며
다시 一九七三년에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특별한 분부로
묘역 전체를 정화하고 삼문을 새로 짓고 경내를 정화시켜
빛나는 업적을 남겼으므로 여기에 그 전말을 새겨 전한다.
一九七四년 五월
이은상 짓고 김충현 쓰고 경기도지사 세우다

한국의 서원은 주로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에 입지하였다. 일반적으로 서원의 입지는 풍광이 뛰어난 곳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이는 관학인 성균관이나 향교와 달리 행정적으로 조정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있을 뿐 아니라 서원 제도에 함유된 유가적 운둔사상 등과 연계되어 있음도 중요 사유인 것으로 추론된다. 또한 우주의 이치를 궁리하며 성정을 도야해야 한다는 성리철학은‘거경궁리(居敬窮理)’의 공간이자 자연의 질서를 배우기 적합한 공간성 또한 입지 선정의 중요한 배경으로 요구되었다.서원을 구성하는 건물들이 배치되면서 각각의 공간들이 형성되어 주변경관과 조화를 이루었다.
서원은 선현(先賢)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향공간, 유생들의 학습을 위한 강학공간, 휴식을 위한 유식공간, 제향과
강학 기능을 지원하고 관리하는 지원공간, 그리고 서원의 주변공간으로 구분된다.
조선시대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향촌(鄕村)에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 순흥 지역에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한국 최초의 서원이다.
백운동서원은 이황(李滉, 1501-1570)의 노력으로 1550년(명종 5) 2월 국가로부터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사액 받음으로서,
한국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황은 소수서원이 사액을 받은 이후 서원의 운영, 강학 등과 관련되는 전형을 만들어
조선시대 서원 보급을 주도하였다.
서원의 발전은 17세기에 접어들어 전성기를 이루었다. 양적으로도 전국적으로 200곳 이상이 건립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2세대 사림들의 활동이 크게 눈에 띄는데, 이들은 이황을 비롯하여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과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등 당대 유명한 유학자들의 학문적 계통을 이어받았다.
때문에 자신들의 스승을 제향하는 서원을 세우거나, 이미 세워진 서원을 근거지로 하여 활발한 교육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8세기에는 지역별, 학파(學派)별, 그리고 정파(政派)별로 경쟁적으로 서원 건립을 추진하면서 서원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서원의 증가는 여러 가지 문제를 낳았고, 결국 1741년(영조 17) 전국적인 서원 정비령이 내려져 173개소가 훼철(毁撤)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