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1년 몽골 병사의 1차 침입 때에 광주군민들은 광주성(廣州城)으로 피하여 몽골군의 공격을 방어하였고,
1232년 2차 침입 때에도 살례탑(撒禮搭)이 이끄는 몽골군의 주력부대가 광주성을 공격해왔으나 이세화가 물리쳤다.
남방의 요충지인 광주성에서 몽골군의 침입 시에 밤낮으로 성을 수리하고 방비하였다."-이세화 묘지명에서-
" 공민왕 10년 1361년 홍건적 10만 명이 침입하여 개경을 함락시켜 공민왕이 안동으로 파천하는 상황 속에서
광주에 수레가 머물렀을 때 이곳 아전들과 백성들이 모두 산성으로 올라갔다."-<고려사(高麗史)>에서-
이러한 사실에서 광주성은 읍치에서 가까운 전략적 요충지로서 주민들이 들어가 방어하기 유리한 산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이야말로 우리나라 호국역사의 중심에 있는 국난 극복의 성지이자, 선인들의 정신이 깃든 찬란하고 훌륭한 수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고려시대 남한산성에서 몽고군의 공격도 막아내었다.
제2차 몽골 침입(1232, 고종 19) 때 광주산성(廣州山城)에서 벌어진 광주산성전투(廣州山城戰鬪)에서 고려가 승리한다.
1232년 6월 고려가 몽골과의 항전을 결의하고 강화도로 천도하자 사르타이(撒禮塔)가 지휘하는 제2차 침입군이 1232년 8월말 경
고려에 침입하였다. 사르타이는 한강을 건너 광주(廣州)라는 중요한 내륙 거점을 확보하여 남진을 모색하는 한편 강화도로
통하는 수로를 차단하여 강도(江都)조정을 압박하기 위해 광주산성을 공격하였다.
몽골군 본대가 남하하자 광주의 부사(副使) 이세화(李世華, ?∼1238)는 광주산성에 입보하여 급히 성을 수리하고 몽골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사르타이의 몽골군은 광주산성을 수십 겹으로 포위하고 공격해왔는데 이세화는 성안에 입보한 광주사람들과 함께
방어에 전력하였고, 상황에 따른 대응을 적절히 하여 적군 다수를 살상하고 포로로 잡았다.
전투는 1232년 12월에까지 걸쳤으나 몽골군은 끝내 광주산성을 함락하지 못한 채 일부 병력을 남겨두고 처인성(處仁城) 쪽으로
남하하였다. 사르타이의 공격을 막아냈던 광주산성은 신라 문무왕 때 축성되고 고려시대에 일장성(日長城, 혹은 晝長城)이라고
불렸던 오늘의 남한산성이다.
광주산성의 공격에 실패한 사르타이는 고려 공격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확정하지 못한 채 처인성을 공격하다가 1232년 12월 16일 사살되었다. 광주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세화는 광주부사에서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영전하였으며, 광주민들은 수년 후인 1235년(고종 22)에 국가로부터 요역(徭役) 등을 면제 받았다. 이른바 광주산성 전투는 제2차 몽골 침입 때 고려 지방민이 정부군의 도움 없이 거둔 승첩으로서 큰 의미가 있다.
고려 때의 한산(漢山)은 고려 태조23년 광주로 개칭되었고, 현종9년에 광주목으로 정할 때에는 별호로 회안(淮安)이라 하였는데,
남한산성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다만 광주부사를 지낸 이세화 묘지명(李世華 墓地銘)에 1231년 몽고병의 1차 침입시 광주군민들은 ‘광주성(廣州城)’으로 피하여
몽고군의 공력을 방어하였으며, 1232년 2차 침입시에도 살례탑(撒禮塔)이 이끄는 몽고군의 주력부대가 광주성을 공격해왔으나
이세화가 물리쳤다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광주성은 읍치에서 가까운 전략적 요충지로서 방어에 유리한 산성이었으며,
전략적인 필요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개수축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은 숫한 외세의 공략에도 단한번도 함락되지 않고 굳건하게 견디어온 천혜의 철옹성이다.
“남한산성은 안쪽은 낮고 얕으나 바깥쪽은 높고 험하여서 청이 처음 왔을 때 병기라고는 날도 대지 못하였고,
병자호란 때도 성을 끝내 함락하지 못하였다." -<택리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