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해(李山海)는 탄생부터가 신이(神異)하다.
이산해의 아버지 이지번(李之蕃)이 명나라에 사신이 되어 갔디.
그때 산해관에서 유숙하면서 집에 있는 부인과 동침하는 꿈을 꾸었다.
이지번의 부인도 같은 날 남편과 동침하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다.
집안에서는 여자 혼자 아이를 가졌다고 해서 부인을 내치려 했다.
시동생인 토정 이지함의 만류로 위기를 모면했다.
이때 이산해의 삼촌 이지함이 "필시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다"며
이지번이 귀국할 때까지 기다려 보자고 제안하였다.
그 당시 중국을 다녀오려면 몇 달에서 길게는 1년 이상도 걸릴 때였다.
이지번이 귀국하여 꿈꾼 사실을 말하고 날짜까지 일치하게 되자 결백은 입증되었다.
사연인즉, 이지번이 산해관에서 잘 때 이지번과 부인이 한 날 한 시
다른 곳에서 자면서 똑같은 꿈을 꾸고서 생겨난 일임을 확인한 것이다.
이지번이 귀국하여 꿈꾼 사실을 밝힘으로서 부인의 결백함이 입증되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수천리 밖 집에 있는 부인도 같은 날 남편과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는 꿈을 꾸고 수태한 것이다.
그 아들의 이름을 꿈을 꾼 곳 산해관(山海館)의 이름을 따서 ‘산해’(山海)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두 사람이 같은 꿈을 꾸었고 몽중행위가 현실의 결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위대한 인물에 결부된 신이한 출생담의 성격을 가진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이산해가 햇볕 아래서도 그림자가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산해의 아버지 성암(省庵) 이지번(李之蕃)이 보령읍(寶寧邑) 서쪽 고만산(高巒山) 기슭에
선영(先塋)을 정하면서 "해년(亥年)이 되면 귀한 아들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했는데
1539년(己亥)에 이산해가 태어나자, "이 아이가 우리 가문을 일으킬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산해는 예상한 대로 두 살 때부터 이미 글을 깨치기 시작했다.
이웃 상사(上舍)가 귤을 보여주자 "黃(황)"자로 대답하고, 농부가 쇠스랑을 들고 지나가자 "山(산)"자를
말했다고 한다. 그뿐이 아니었다. 3살 때 유모(乳母)의 등 뒤에서 동해옹(東海翁)의 초서(草書)를
보고 손가락으로 그어서 휘둘러 쓰는 것처럼 했더니 먹이 번져 더러워졌다. 아버지가 돌아와 유모를
나무라자 이산해가 종이와 붓을 가져다가 진본(眞本)과 비슷하게 썼다고 한다.
그리고 5살에 삼촌 이지함이 태극도(太極圖)를 가르쳤더니 천지와 음양의 이치를 깨달아
이를 논설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한다. 이산해는 특히 글씨를 잘 썼다.
6살 때 이산해는 큰 붓을 잡고 비틀거리면서 글씨를 쓰고 먹 묻은 발로 낙관을 찍으니,
글씨 모양이 품위가 있고 기상이 있었다.
이에 사람들이 글을 받으러 줄을 이었다.
그리하여 장안에 서대문 자대필(子大筆)이라는 동요가 나돌기까지 했다.
이지번은 어려서 너무 이름이 날까 봐 이산해를 데리고 동작동 정자로 피해 있을 정도였다.
그 후 이산해는 11살 되던 1549년(명종 4)에 소과에 응시해 만초손부(滿招損賦) 110여구를 지어
장원으로 합격했다. 이 시는 과거 시험장에 있던 사람들이 돌려가면서 외웠다고 한다.
시관들은 이 글을 정말 어린 이산해가 지었을까를 의심해 다시 분송부(盆松賦)를 지어보라고 했더니
단숨에 지었다 한다. 고시관들도 그 시험지를 나누어 가지고 가서 보물처럼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산해는 초기 당쟁시대에 태어나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욕을 먹었다.
동인, 북인, 대북, 골북의 영수로서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상대 당의 공격을 계속 받았고,
인조반정으로 그가 소속된 북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정권을 독차지함으로써 역사의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실리적 현실주의자로서 청렴하고 충직해 국왕의 인정을 받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당파의 영수로서 권력투쟁에서 자유스러울 수가 없었다.
이산해가 남사고(南師古)와 송송정(宋松亭)에 앉아 서쪽으로 안령(鞍嶺)과 동쪽으로 낙봉(駱峯)을
가리키며 "뒷날에 조정에 반드시 동서의 당(黨)이 생길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는『어우야담(於于野譚)』에 전한다.
그는 징비록에서 유성룡과 대립각을 세우는 북인의 영수였다.
이산해의 아버지는 이지번이고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은 그의 작은 아버지였다.
이산해가 태어났을때 토정 이지함은 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를 듣고 형님 이지번에게 말했다.‥
"이 아이가 기특하여 우리 집안이 문장가로 다시 흥할 것같습 니다."
과연 이산해는 다섯살때 병풍에 글씨를 써서 신동소리를 들었고 열세살 때
충청우도 향시에 나가 장원 급제하였다.
일찌기 어린 나이에 밥먹기를 잊어버리고 글읽기에만 몰두하니 글을 가르치던 삼촌 이지함이
책을 덮고 밥먹기를 권하였다. 나이 어린 이산해가 위의 시를 읊어 바친다.그의 나이 7세때의 일이다.
마음이 고프면
이 산해
밥이 늦어도 걱정인데
하물며 배움이 늦으면 어쩌겠니
배가 고파도 걱정인데
하물며 마음이 고프면 어쩌겠니
집이 가난해도
마음 치료할 약 있단다
둥근 달이 떠오를
그때를 기다려 보렴
달도 치료약이 될 수 있을테니.
食遲猶悶況學遲어늘 腹肌猶悶況心肌리요
家貧惟有療心藥하니 須待靈臺月出時하라